* 포르투: 포르투갈의 제2 도시인 포르투. 포르투갈의 어원이 되기도 한다. 사진에 보이는 다리는 포르투의 자랑인 동루이스 다리.

 

 

 

<재미난 스페인 17편> 포르투갈

- 포르투갈과 스페인, 비슷하지만 결이 다른 두 나라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한 후, 많은 사람들이 포르투로 이동한다. 순례길의 종착점인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포르투갈 포르투까지 약 230km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아 부담 없이 이동할 수 있다. 산티아고콤포스텔라 버스터미널에서 티켓을 구매한 후, 이동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물어보았다. 약 4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고 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직원은 무언가를 더 말해주는 듯했지만, 필자의 귀는 그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순례길에서의 피로가 가시지 않았는지 버스에 타자마자 잠이 들었다. 잠의 림프가 마법의 가루라도 뿌린 것처럼 맛있게 잠을 잤다. 얼마나 잤을까? 이쯤이면 포르투갈로 넘어왔을 테지. 스마트폰으로 시계를 봤다. 그런데 좀 이상한 거다. 1시간이 더 플러스 됐기 때문이다. 분명 오후 2시로 봤는데... 갑자기 3시가 돼버렸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와 포르투는 같은 위도상에 있는데 왜 시차가 생기는 거야...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서로 구별짓기를 하는 건가?

포르투갈은 1139년에 건국했는데 그 이전까지는 스페인과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로마의 점령, 서고트왕국, 이슬람 무어인들의 침공과 같은 역사적인 사건들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도루강(Douro)이나 테주강(Tejo)처럼 자연물도 함께 쓰고 있다. 도루강은 포르투에서 대서양으로 빠져나가는데 스페인에서는 두에로강(Duero)이라고 부른다.

테주강은 수도인 리스본을 거쳐 대서양에 합수되는데 스페인어로는 타호강(Tajo)이라고 부른다. 이렇듯 닮은 점이 많은 두 나라다. 한국사람들은 두 나라를 묶어서 여행하고, 가이드북은 두 나라를 묶어서 소개한다. 그렇다면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아무 문제 없는 형제 국가인가?

 

 

 

* 발견기념비: 리스본의 테주강변에 있다. 항해왕 엔히크 왕자, 사후 500년이 되던 1960년에 세워졌다. 엔히크 왕자는 포르투갈왕 주앙 3세의 아들로 포르투갈의 대항해 시대를 열게한 장본인이다.

 

 

 

11세기 말이었다. 이베리안반도 남쪽은 이슬람 세력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북쪽은 레온 왕국의 알폰소 6세(Alfonso VI, 1040~1109)가 통치하고 있었다. 용맹왕이라는 별칭이 붙은 알폰소 6세는 레온은 물론 카스티야왕국과 갈리시아왕국의 왕까지 겸임하고 있었다. 용맹왕이라는 별명처럼 알폰소 6세는 이슬람 세력과 연이어 전쟁을 벌이며 국토회복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때 엘시드(El Cid, 1043~1099)라고 불리는 걸출한 영웅이 나타나기도 했다. 엘시드는 이슬람 군대와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모함을 받아 정처 없이 떠돌기도 했다. 말년에는 스페인 동부에 있는 발렌시아를 함락시키고, 실질적인 발렌시아의 군주로 자리매김했다. 당시 모로코 지역에서는 베르베르인 혈통의 알모라비데(almorávides)족이 흥기하고 있었다. ‘무라비트’라고도 불렸던 그들은 이베리아반도로 쳐들어왔는데 가톨릭 왕조의 군대들을 연이어 격파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알모라비데족도 엘시드 군대에 의해 예봉이 꺾이게 된다. 알모라비데 군대가 발렌시아 인근 지역으로 진격했지만 엘시드 군대에 의해 패배했기 때문이다. 엘시드 군대는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알모라비데 군대를 물리쳤다. 이런 기적적인 승전보에 다른 가톨릭 왕조 군대들도 사기가 고양됐다. 사실 그 전투가 알모라비데 군대에 맞서 가톨릭 군대가 이룬 최초의 승리였기 때문이다.

 

 

* 노란색전차: 수도 리스본의 상징중의 하나인 노란색 전차. 푸니쿨라라고도 불린다.

 

 

 

다시 알폰소 6세 이야기다. 알폰소 6세는 이슬람 왕국뿐만 아니라 같은 가톨릭 왕국들과도 전쟁을 벌여 영토를 확대해나갔다. 하지만 이슬람 세력들도 만만치 않았는데 1086년에 있은 사그라하스 전투에서 가톨릭 군대를 패퇴시킨다. 이에 알폰소 6세는 다른 가톨릭 왕조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됐는데, 이때 부르고뉴 공국이 화답했다. 부르고뉴 공국은 지금의 프랑스 동쪽편에 있는 공작령으로 프랑스 왕국의 방계 혈족이 다스리고 있었다. 머리가 아프신가? 어려운 지명 이야기보다 이해가 확 되는 단어가 있다. 부르고뉴 와인!

부르고뉴의 젊은 기사 라이문도와 엔히크가 참전했고, 열심히 싸웠다. 알폰소 6세는 용맹한 이 기사들을 사위로 삼는다. 딸인 우라카를 라이문도에게, 테레사를 엔히크에게 시집보낸다. 영지도 받게 되는데 라이문도에게 갈리시아 백작령을, 엔히크에게는 포르투갈 백작령이 주어졌다. 현재의 포르투갈의 북부 지역이 포르투갈 백작령의 영지였다.

포르투갈 백작이 된 엔히크는 자신의 영지를 독립국으로 만들려고 했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1112년에 숨을 거둔다. 이때 3살 된 아들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아폰수 엔히크, 즉 포르투갈의 첫 번째 왕인 아폰수(Afonso I)였다. 하지만 너무 어렸기에 그의 어머니인 테레사가 섭정한다. 문제는 테레사가 친 카스티야 성향이었던 것이다. 결국 아폰수는 친 카스티야 세력들과 전쟁까지 벌여 그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1139년에 오리크에서 이슬람 군대를 상대로 크게 승리를 하기에 이른다.

 

 

* 아폰수1세: 포르투갈의 첫번째 왕인 아폰수1세의 상. 포르투갈 북부 기마랑이스성 앞에 서 있다.

 

 

 

이런 승리의 기운들을 발판삼아, 그는 포르투갈 왕국의 첫 번째 왕으로 즉위한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아폰수 1세의 등극에 카스티야의 알폰소 7세는 격분을 하고, 군대를 동원한다. 결국, 1143년 사모라 조약이 체결됐고 알폰소 7세는 포르투갈의 독립을 인정하게 된다.

이렇게 독립국이 되는 것이 어렵다. 이후에도 아폰수 1세는 남쪽으로 계속 세력을 확장하기에 이르렀고, 1147년 10월에 잉글랜드군과 연합하여 리스본을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같은 Afonso라는 로마자를 쓰는데 누구는 아폰수, 누구는 알폰소라고 기재를 하니 좀 어리둥절하다. 아폰수는 포르투갈식, 알폰소는 스페인식 표기이다. 참고로 아폰수 1세와 대립을 빚었던 카스티야의 알폰소 7세는 라이문도와 우라카의 아들이다. 한마디로 알폰소 7세와 아폰수 1세는 서로 사촌지간이다. 권력은 부모·자식 간에도 나누지 않는다는데 하물며 사촌지간에는 더욱더 나눌 수 없었을 것이다.

포르투갈에서는 스페인에서 독립한 날인, 12월 1일을 독립기념일로 지정하고 있다. 독립기념일의 기원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16세기 후반으로 시계를 되돌려야 한다.

1578년, 청년왕이었던 세바스티앙 1세(Sebastião I)가 지브롤터해협을 건너 모로코를 공격했다. 당시 모로코는 사드(Sa'd) 왕조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세바스티앙은 북아프리카에 가톨릭을 전파하겠다는 신념으로 원정을 나선 것이다. 하지만 지브롤터해협에서 남쪽으로 약 80km 정도 떨어진 알카세르키비르(Alcácer-Quibir) 전투에서 포르투갈군은 패하고, 세바스티앙도 전사하고 만다.

 

 

 

* 독립기념비: 리스본 중심가인 헤스타우라도르스 광장에 서 있다.

 

 

 

문제는 세바스티앙이 미혼이었다는 점이다. 결혼하지 않았으니 왕비도, 자식도 없었다. 이에 엔히크 1세(Henrique I)가 급히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엔히크 1세는 원래 성직자인데다 왕위에 오를 때 이미 나이가 66세였다. 그마저도 2년 뒤인 1580년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런 혼란을 틈타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의 왕위 계승자임을 주장했다. 알바 공작이 이끄는 스페인군이 침공했고, 결국 포르투갈은 스페인에 의해 병합된다. 이때부터 1640년까지, 포르투갈은 ‘60년간 포로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이 기간 동안 포르투갈은 농업이 황폐해졌고, 흑사병 같은 전염병도 창궐하게 된다. 또한 해외식민지와 해군도 방치되고 있었다.

1640년 12월 1일, 스페인의 행태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던 포르투갈 귀족들이 행동에 나섰다. 총독궁을 습격한 것이다. 독립전쟁이 시작됐다. 이때 브라간사 공작이 주앙 4세가 되어, 포르투갈 왕위가 복원된다. 당시 스페인은 유럽의 신교도 국가들과 30년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또한 그 시기에 카탈루냐 지역에서 농민반란이 발생하여 대내외적으로 내홍에 휩싸였다. 전쟁은 오래 지속되었다. 무려 28년 동안 계속됐는데, 결국 1688년 리스본 조약에 의해 마침표를 찍게 된다.

리스본 중심부에 있는 헤스타우라도르스 광장에는 포르투갈의 독립을 기념하는 큰 조형물이 있다. 그리고 매년 12월 1일에는 독립기념일 행사가 펼쳐진다. 이렇듯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비슷한 듯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결이 다른 모습을 보인다. 같으면서도 구별되는 이런 모습들이 여행자들에게는 색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게 두 나라를 함께 여행하는 재미다.

 

 

* 거리축제: 리스본에서 만난 거리축제. 아줄레주로 장식된 의상이 인상적이다. 아줄레주는 포르투갈의 전통 공예품인, 푸른색 도자기를 말한다.

 

 

 

 

* 지도: 12세기 중반경의 이베리아반도 지도. 포르투갈의 건국 초기이다.

 

 

 





☞ 지난 2018년 12월 11일부터 2019년 2월 1일까지 산티아고 순례길 및 이베리아반도 여행을 행하고 왔습니다. 여행을 하는 내내 열심히 여행일지를 작성했답니다. 앞으로 그 여행일지를 포스팅화 시킬 예정입니다. 여행일지를 약간의 수정 과정을 거쳐 올릴 거라 그렇게 재밌는 포스팅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큰 정보를 가져다 주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저 손글씨로 작성한 여행일지를 온라인으로 옮기는 것에 불과할테니까요.
그래도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쌓이고 쌓인 것이 개인의 역사가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 호카곶: 유라시아 대륙의 최서단






*여행 36일차: 2019년 1월 15일 화요일 맑음


1.코임브라 the luggage 호스텔은 전망도 좋고 시설도 좋은데 무척 추웠다. 그리고 룸메이트는 게으름뱅이였다. 오전 9시가 다 되었는데도 이불을 부여잡고 있었다. 


2. 코임브라 대학에 있는 도서관을 방문하기 위해 티켓을 끊었다. 무려 12.5유로. 외관은 그냥 둘러볼 수 있지만 주요 관광포인트를 보자면 티켓이 필요했다.

3. 먼저 채플실을 들렀다. 호불호가 있으나 난 채플실이 더 좋았다. 예전에 방문했던 세고비아 대성당이나 톨레도 대성당이 생각날 정도로 채플실은 큰 감흥을 주었다. 또 사진 촬영도 되고 말야!

4. 코임브라 대학 여행의 메인포인트인 대학도서관으로 향했다. 대학도서관은 고서들로 가득했다. 황금으로 장식된 장식물이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5. 이런 곳에서 공부가 잘 될까? 좀 어뚱한 생각을 해봤다. 그리고 이 책들이 대출이 가능할까? 어쨌든 이 도서관은 코임브라대학의 자랑이자 사람들을 코임브라로 모이게 하는 원동력이다.

6. 옆에 있는 왕궁 탐방까지 끝낸 후 코임브라 여행을 마치고 리스본행 버스를 타러 터미널로 향했다. 

7. 아참 코임브라대학 도서관의 책장 옆에는 중국풍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스태프에게 물어보니 마카오 일대의 풍광이라고 한다. 낯선 곳에서 동양의 자취를 보고 있으니 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도서관은 사진 촬영이 안 되는 것이 정말 아쉬웠다. 허가가 됐으면 그런 것들을 다 찍어왔을텐데...

8. 오후 2시경에 리스본행 버스에 탑승했음. 코임브라에서 리스본 가는 버스는 사람들이 많았음. 포르투에서 코임브라까지는 1시간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지만 코임브라에서 리스본까지는 2시간이 넘게 걸렸음.

8. 오후 4시가 넘어 리스본에 도착함. 숙소를 찾아 나섰는데 마땅한 곳이 없어 가장 싸구려 숙소를 찾아감. 8유로. 우리나라 돈으로  약 1만 1천원. 싸구려인 이유가 있었음. 무슨 달방 같았음. 투숙객들이 장기로 묵는 듯했고, 그래서인지 상호간에 서로 친분이 쌓인 듯했음.

9. 서로 웃고 떠드는데... 숙박 장소인지 돗떼기 시장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였음. 왜 밤 12시 넘어서 람바다를 추냐고... 그것도 음악 볼륨을 크게 해놓고 말야...ㅋ





*코임브라 대학: 채플실




* 코임브라: 대학 내에 있는 궁전. 코임브라는 리스본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포르투갈의 수도였음.






*여행 37일차: 2019년 1월 16일 수요일 맑음

1. 그 달방 같은 호스텔이름은 'football hostal'이었음. 괜히 축구라는 단어에 혹해서 들어갔더니만...
이 인간들이 새벽까지 노래를 부르고 난리도 아니었음. 새벽 1시에 왜 소리를 지르는지...ㅋ

2. 하여간 그 인간들이랑 엮여서 하룻밤을 보냈는데... 그래서인지 잠을 무척 설쳤음. 돈 아끼려다 아주 꽝이었지!

3. 리스본에서 신트라를 가기 위해 rossi 역으로 향함. 신트라는 동네 자체가 세계문화유산인 곳으로 유라시아대륙의 최서단인 호카곶을 가기 위해 반드시 들려야 하는 곳임.

4. 신트라에서 사용할 수 있는 원데이프리티켓을 구매했는데 16.5유로였다. 신트라까지 가는 왕복 기차와 신트라 현지에서 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 패스였다. 


5.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일단 호카곶으로 향했다. 사실 이번 포르투갈 여행의 첫번째 타깃은 호카곶이었다. 유라시아 대륙의 최서단인 호카곶! 스페인의 땅끝 피스테라에서 바라본 대서양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터라 이번 호카곶 탐방에 대한 기대는 대단했다.

6.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인가? 바람 한 점 없는 호카곶은 너무나 고요했다. 대서양에서 부는 시원한 바람을 기대하며 호카곶에 섰는데... 너무 밋밋하다고 해야 하나?

7. 호카곶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산티아고순례길에서 받은 감흥이 너무 컸던 터라 다른 여행지가 눈에 잘 안들어 왔던 것이다. 

8. 호카곶 탐방을 마친후 버스를 타고 인근에 있는 cascais를 탐방했음. 해변이 아름다운 cascais는 휴양도시로 유명함. 신트라 -> 호카곶, 호카곶 -> 까스카이스 순으로 이동했음.

9. 신트라에서 rossi 역으로 오지 않고 멋진 오리엔트역으로 돌아옴. 오리엔트역은 리스본행 야간열차라는 영화의 무대였다고 함. 그도 그럴 것이 정말 멋있는 외형을 가지고 있었음. 야경도 멋졌음.

10. 오리엔트역은 버스터미널과 붙어 있음. 이곳에서 스페인 세비야로 가는 야간 버스를 타려했음. 7시간 정도 걸리는 야간 버스고, 평일이니 사람이 많지 않겠지... 라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하지만 심야 버스에 왜그리 사람들이 많았던지!

11. 오늘따라 사람들이 많아서 티켓이 없단다. 정말 멘붕이었다. 숙소를 검색하며, 노숙까지 떠올리게 됐다. 하지만 다행히도 좌석이 하나 남았다. 10시에 탑승하는 버스에 10시 1분에 탑승했다. 그렇게 세비야행 버스에 올랐다. 요금은 45유로. 조금 비싼듯.

 


* 호카곶: 인증샷



* 코임브라 대학: 도서관 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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