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 명소들을 탐방하는 <서울 그곳에 가다>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본 <서울 그곳에 가다>는 저의 주 종목인 <역사트레킹>에서 파생된 콘텐츠입니다. 기존에 작성했던 트레킹 원고들은 평균이 원고지 35매(200자 기준) 정도여서 읽는데 좀 불편했던게 사실입니다. 이에 좀 컴팩트한 분량의 원고를 작성해보기로 했답니다.

<서울 그곳에 가다>에서 탐방하는 장소들은 기존에 작성했던 트레킹 원고에서 이미 한 번 다뤄본 곳들이 대다수일 겁니다. 그럼 재활용이냐? 아닙니다. 재작성했습니다. 기존 트레킹 원고도 출간해보고 싶고, 본 <서울 그곳에 가다>도 출간해보고 싶어서요. 자기 표절도 표절아닙니까.

원고지 15~20매 정도로 분량이 그리 많지 않으니, <서울 그곳에 가다>를 많이 사랑해주세요. 서울의 명소들을 하나하나 소개해 드릴테니까요~^^

 


역사트레킹을 직업으로 삼다보니 서울 곳곳을 누비게 됐다. 그러면서 깨달았던 것이 하나 있다. 아니 실감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보시다시피 서울에도 산이 참 많아요.”

수강생들에게 많이 했던 멘트다. 그렇다. 서울에는 북한산이나 관악산 말고도 산이 많다. 인왕산, 아차산, 청계산 등등... 그런 서울의 산을 찾아 떠난다. 산에 간다고 움찔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너무 걱정하시지 마시라. 필자도 산 정상부를 가는 것보다 둘레길 걷는 걸 더 선호하니까.

제목에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이번에 탐방할 곳은 백사실계곡이다. 백사실계곡은 북악산의 북사면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니 북악산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자.

서울 안쪽에는 4개의 산이 자리 잡고 있다. 북쪽 북악산, 동쪽 낙산, 서쪽 인왕산, 남쪽 남산. 이 산들을 연결하여 성을 쌓았더니, 한양도성 18.6km가 탄생했다. 이 산들은 안쪽에 있다하여 내사산(內四山)으로 불렸다.

* 백사실계곡: 초입에 자리잡은 현통사

● 이곳에 들어서면 도시의 번잡함이 사라진다!

청와대의 뒷산이라 그런지 북악산은 많은 부분이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다. 개발이 제한되다보니 역설적으로 서울 같지 않은 구역도 존재한다.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명승 제36호 백사실계곡이 바로 그런 곳이다. 백사실계곡에 발길을 들여놓으면 울창한 수목원을 방문한 것처럼 싱그러움이 전해진다. 서울에서도 이런 숲 향기를 느긋하게 맡을 수 있다니!

필자는 백사실계곡을 ‘비밀의 화원’이라고 표현한다. 서울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광화문에서 불과 4k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렇게 호젓한 곳이 자리 잡고 있으니,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매연과 소음, 끝없는 인파에 시달리다가도 이곳에 들어서면 갑자기 모든게 멈춰진 듯 그런 도시의 번잡함이 사라진다. 싹 다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다.

비밀의 화원답게 백사실계곡은 물도 1급수다. 그래서인지 1급수에서만 산다는 도롱뇽이 살고 있단다. 백사실계곡은 홍제천의 상류가 되는데 그 물길을 따라가면 굵직한 문화유산들을 만날 수 있다. 몇 가지를 알아보고 가자. 일단 유명한 세검정(洗劍亭)이 부암동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인조반정과 관련된 김류, 이귀 등이 거사를 모의한 후 이곳에서 칼을 씻으며 결의를 다졌다하여 세검(洗劍)이라는 명칭이 생겼고, 이곳에 정자가 들어서니 세검정이 된 것이다. 세검정은 백사실계곡 탐방의 도입부라고 할 수 있다.

세검정 인근에는 탕춘대성(蕩春臺城)의 어원이 된 탕춘대(蕩春臺) 터가 있다. 탕춘대는 연산군에 의해 1505년에 만들어졌는데 그는 이곳에 수각을 짓고 화끈하게 놀았다고 한다. 이때가 연산군 11년이었는데 다음해인 1506년, 중종반정에 의해 폐위된다. 과유불급이다. 놀아도 적당히 놀아야한다. 그러니 폐위가 되는 것이다. 참고로 수각(水閣)은 물가에 지어진 누각 혹은 정자를 말한다.

홍제천은 모래가 많다하여 사천(沙川)이라고도 불렸고, 불천이라고도 불렸다. 보도각 백불이라는 고려시대 만들어진 거대한 마애불 앞을 흐른다하여 불천(佛川)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정식 명칭이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인 보도각백불은 다른 마애불과 달리 호분으로 채색을 했다. 보기 드문 컬러풀한 마애불로 2014년 3월에 보물 제1820호로 승격됐다.

 

 

* 백사실계곡: 숲길의 가을

● 풍광이 수려한 백석동천

현통사 앞 너럭바위에서 멋지게 인증사진을 찍은 후 산책로를 따라 이동한다. 싱그러운 숲 향기를 맡으며 걷다보니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온다. 그렇게 걷다보면 큰 연못 자리를 끼고 있는 별서터가 나온다. 백석정, 백석실 혹은 백사실로 불렸던 이 건물은 전에는 오성대감 이항복 선생의 별서터였다고 전해졌다. 하지만 2012년에 추사 김정희 선생이 그곳의 주인이었다는 문서가 발견됐고, 그에 따라 부암동 별서는 이항복 선생이 아닌 추사 김정희 선생의 소유물이라는 것이 정설이 되었다.

그 곳이 이항복 선생 소유든 김정희 선생 소유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조선 중기 때 인물인 이항복 선생이 부암동 별서터를 잘 사용했고, 이후 조선 후기를 살았던 추사 김정희 선생이 바톤을 이어받아 잘 이용했다고,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역시 숲을 거닐다보면 상상력도 풍부해진다.

이제 백석동천(白石洞天) 각자 바위를 보러가자. 예전에 이 일대는 백사골로 불렸었는데 주위에 흰 돌이 많았기 때문이다. 동천(洞天)이라는 명칭은 삼청동천, 청계동천처럼 풍광이 수려한 곳을 지칭할 때 붙는 말이다. ‘백석동천’을 거칠게 풀이해보면, 풍광이 아름다운 백석지역이라는 뜻이 된다.

어쨌든 이 일대가 비밀의 화원처럼 아름답다보니 어떤 풍류객이 ‘白石洞天’ 네 글자를 보기 좋게 각자를 해두었다. 이 백석동천 바위는 크기나 선명도면에서 다른 각자바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그래서 누구나 다 그 곳에 서면 카메라를 꺼내 든다.

“곽 작가님, 거기서 멀뚱하게 서 있지 말고 우리 사진 좀 찍어줘요.”

 

필자는 열심히 사진을 찍어준다.

각자바위에서 왼쪽으로 길을 잡으면 능금마을이라는 표지판을 볼 수 있다. 능금이면 사과 아닌가? 서울에서 사과를 재배했었나? 그렇다. 지금은 아니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부암동 일대에는 사과밭이 많았다. 경림금(京林檎)이라고 불렸던 부암동 일대 사과는 제사상에 올라갈 정도로 찾는 이들이 많았었다. 부암동은 북소문인 창의문과 맞닿아있는데 가을 수확철만 되면 경림금을 구매하기 위한 행렬로 창의문밖이 들썩들썩 거렸다고 한다.

도대체 어떤 맛이었기에 창의문 밖이 들썩거리기까지 했을까? 이제는 능금밭은 찾아볼 수 없기에 입맛만 다시며 다시 숲길을 거닐었다.

이렇게 하여 백사실계곡 탐방을 마쳤다. 추사 선생의 별서터와 백석동천 각자바위, 거기에 울창한 숲길이 더해지니 이곳은 정말 서울 같지 않은 곳이다. 잘 간직하고 싶은 비밀의 화원이다. 이곳에 발자국을 들이면 축축한 흙냄새와 함께 싱그러운 나무향이 전해진다. 그런 자연의 향취에 빠지다보면 어느 순간 어깨춤을 추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걸 무아지경이라고 해야 하나? 숲에 가면 그렇게 좋은 기운을 받게 된다.

* 백석동천: 각자바위

 


 

 

■ 백사실계곡

1. 세부코스: 세검정(홍제천) ▶ 별서터 ▶ 각자바위 ▶ 능금마을 인근 숲길

2. 가는법: 3호선 경복궁역에서 상명대행 시내버스 탑승, 상명대 앞 하차. 약 10분 정도 소요됨.

3. 같이 가면 좋을 곳: <커피 프린스> 촬영지로 유명한 부암동 카페거리, 북악스카이웨이 산책로

 

 

* 백사실계곡 탐방지도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박수를 받든 안 받든 그냥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무대에 서 있을 때만큼은 정말 행복합니다.”

 

예전에 우연히 만난 연극인이 이런 말을 했었다. 연극인이 겪어야 하는 생활고, 캐스팅에 대한 불안감... 우리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고단한 연극판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는 해맑은 미소로 저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무대행복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는 더 힘줘서 이야기를 했었다.


방송에서 인기가 떨어진 가수나 배우들이 무대가 너무 그립다는 말들을 할 때는 마음에 와 닿지 않았었다. 그냥 한물간 연예인들의 인기회복용 멘트라고 생각했다. 시청자들의 감수성을 건드리려는 작업용 멘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연극인과의 대화 이후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가식적인 방송용 멘트가 아니라 진짜 무대에 대한 간절한 갈증을 마이크에 대고 표출한 것이라고.


무대라고 하니까 가수나 배우들에게만 초점이 맞춰지는데, 무대를 그라운드로 바꿀 수도 있다. 시즌 중에 부상을 당한 한 여자배구 선수가 있었다. 재활 과정 중에 인터뷰를 했었는데 코트가 그립다며 눈물까지 보이더라. 배구가 너무 하고 싶었다는 이야기다. 그녀에게 배구는 존재 이유였던 것이다.


바람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붙은 야구선수 이종범도 인터뷰에서 비슷한 말을 했었다. 부상 이후에 찾아온 슬럼프 때문에 너무 괴로웠고, 다시 그라운드에 서기 위해 더 열심히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루키시절보다 더 열심히 타격과 수비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곳이 바로 그라운드였으니까


결국 그는 다시 그라운드에 섰고, 2009년 소속팀인 기아 타이거즈가 한국시리즈를 우승할 때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 당시 이종범의 나이는 40살이었다. 이미 은퇴를 해야 할 나이였지만 그는 그라운드 위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실히 입증했다.


누구나 다 자신만의 무대가 있을 것이다. 자신만의 그라운드가 있을 것이다. 그곳에 올라서면 자신도 모르게 화색이 돌고 말에 힘이 넘치게 된다.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는 힘에 부쳐하다가도 그곳에 올라서면 얼굴색이 달라진다. 마치 무아지경에 빠진 것처럼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한다.


그렇다면 필자의 무대는 어디일까? 그렇게 화색이 돌고, 말에 힘이 넘치는 무아지경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 어디일까? 길이다. 더 정확히는 숲길.

 



* 북악팔각정: 북악팔각정에서 바라본 북한산. 






세검정(洗劍亭)보다 고향집 팔각정이 더 낫다?

 

3편에서는 백사실계곡 역사트레킹을 소개한다. 서울의 숨어 있는 비경이라고도 불리는 백사실계곡은 북악산에 자리 잡고 있다. 백악산이라고도 불리는 북악산은 서울의 내사산(內四山) 중 가장 키가 큰 산이다. 그 높이가 340m이다. 전편에서도 계속 언급했듯이 한양도성은 내사산을 연결하여 만들어졌다. 북악산-인왕산(338m)-남산(270m)-낙산(125m)을 연결하여 18.6km의 성곽을 쌓았다.


법궁이었던 경복궁이 그 아래에 자리 잡고 있듯, 북악산은 궁궐의 주산으로서 조선시대 내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 군주제에서 공화정으로 바뀐 지금도 그 역할은 계속되고 있다. ? 청와대가 있으니까.


백사실계곡 역사트레킹은 상명대입구에 있는 홍제천에서부터 시작한다. 3호선 경복궁역에서 상명대행 시내버스를 타고 약 15분 정도 이동하면 시작점에 도달한다.


홍제천은 모래가 많아 사천(沙川)이라고도 불렸다. 그 홍제천을 따라 백사실계곡으로 방향을 잡고 가면 세검정을 만날 수 있다. 세검정은 칼을 씻었다(洗劍)’는 의미인데 광해군과 관련이 있는 곳이다. 광해군을 몰아내고자, 인조반정을 획책한 이귀, 김류 등이 칼을 갈아 씻었다고 해서 세검정(洗劍亭)이라고 명명됐기 때문이다. 정자정()에서도 보듯 세검정은 계곡 옆에 지어진 정자다.


세검정 일대(종로구 부암동)는 예부터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명승지였다.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이 주위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고 홍제천이 너럭바위 위를 유유히 흐르고 있으니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데 안성맞춤이었던 셈이다


다산 정약용과 겸재 정선도 그렇게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린 이들이었다. 다산 선생은 <유세검정(遊洗劍亭)>이란 시를 지었고, 겸재 선생은 <세검정도>라는 부채 그림을 그려 세검정을 칭송했다.


현재의 세검정은 1977년에 지어졌다. 1941년에 인근에 있던 종이공장에서 화재가 났는데 불이 옮겨 붙어 주춧돌만 남기고 완전히 소실됐다가 이후 36년 만에 복원된 것이다. 겸재 선생의 부채 그림을 많이 참조하여 복원됐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차이가 크다고 한다


필자가 봐도 복원된 세검정과 겸재 선생의 그림 속의 세검정은 닮아 있지 않았다. 현재의 세검정은, 얼핏 보면 그냥 평범한 동네 정자로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트레킹팀의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었다.

 

우리 고향 마을회관에 있는 팔각정이 더 좋아 보이는데요...”


부채에 그려진 수려한 주위풍광은 되돌릴 수 없겠지만 문화재 복원만큼은 보다 더 정교하게 이루어졌으면 한다.

 




* 세검정





비밀의 화원 같은 백사실계곡

 

북악산은 많은 부분이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다. 그래서인지 1급수에서만 산다는 도롱뇽이 살고 있단다. 그곳이 정확히 어디냐? 바로 백사실계곡이다. 북악산의 북사면에 위치한 백사실계곡은 비밀의 화원같다고 표현할 수 있다. 초고층 빌딩이 즐비한 중심가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그렇게 한적한 장소가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사실 백사실 계곡은 말이 계곡이지 거의 건천에 가깝다. 시원하게 물줄기를 뿜을 때를 거의 본적이 없을 정도다. 그래서인지 백사실 계곡은 계곡 자체보다는 숲길이 더 각광을 받는 곳이다. 울창한 숲이 터널처럼 산책로를 감싸고 있어 삼림욕을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그저 한들한들 걷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기분이랄까.


산책로를 따라 백사실계곡 위쪽으로 올라가면 큰 연못 자리와 함께 별서터가 나온다. 주춧돌만이 남아 있는 그곳은 오성대감 이항복 선생의 별서터였다고 전해졌다. 그래서 필자는 예전에 이런 식으로 해설을 했었다.

 

예전에 이곳은 백사 이항복 선생의 별장터였어요. 이항복 선생은 오성과 한음 할 때, 그 오성이었죠.”

 

하지만 몇 해 전에 추사 김정희 선생이 그곳의 주인이었다는 고문서가 발견됐고, 백사실계곡의 별서는 추사 선생의 소유라는 게 정설이 되었다. 하지만 그 곳이 이항복 선생 소유든 김정희 선생 소유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오히려 오성대감과 추사 선생이 함께 묶여 있으니 더 풍부한 스토리텔링이 가능해졌다. 그래서 요즘은 이런 식으로 해설을 한다.

 

예전에는 이곳이 오성대감 별장터라고 말했는데요. 이제 추사 선생의 문서가 발견됐으니 저는 이렇게 가정해봅니다. 이곳이 오성대감 소유였다가 나중에 추사 선생이 매입했다, 이런 식으로요. 오성대감은 조선 중기 때 인물이고, 추사선생은 후기 때 인물이니까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요?”

 

과거의 행한 해설 오류를 만회하려고 나름대로 꼼수(?)를 써본 것이다.

백사실계곡 일대는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동천은 풍광이 수려한 곳을 지칭하는데 어떤 풍류객이 白石洞天네 글자를 보기 좋게 각자를 해두었다. 그 백석동천 바위는 탐방객들의 포토존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누구나 그 곳을 탐방하면 그 바위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카메라를 꺼내고 멋진 포즈를 취하게 될 것이다. 찰칵!

 




* 백사실계곡: 계곡 초입에 있는 현통사






서울 한복판에 능금마을이?

 

백석동천을 탐방하다 보면 능금마을이라는 곳을 만나게 된다. 능금마을은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어서 그런지 전원적인 모습이 물씬 풍기는 곳이다. 서울 도심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비료포대가 쌓여진 농촌 마을을 보고 있자니 생경한 느낌이 들 정도다.


그렇다면 왜 능금마을이 북악산 서북쪽 부암동 부근에 있는 것일까? 아시다시피 능금이면 우리나라의 고유 사과종을 말하는데 능금으로 유명한 지역은 대구·경북 쪽이 아닌가? 이런 의문이 드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실제로 예전에 트레킹에 참가한 사람들도 그렇게 묻고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 왜 사과마을이 있는 거에요?”

 

현재 창의문 밖, 부암동 일대는 능금마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사과나무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능금마을이라는 마을 명칭만이 옛 흔적(?)을 확인해 주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40여 년까지만 해도 창의문 밖 능금은 경림금(京林檎)이라 하여 서울의 유명한 특산물이었다. 능금이 출하되는 가을 때쯤에는 전국에서 몰려온 상인들로 창의문 인근이 들썩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창의문 밖에 능금나무가 많이 심어졌을까? 먼저 산지 형태를 띠는 부암동 일대의 토양이 척박하여 논농사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로 들어질 수 있겠다. 그럼 두 번째 이유는? 두 번째 이유는 창의문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그 두 번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창의문의 역사를 더듬어 가야 한다.

 




* 백석동천: 각자바위






인조반정과 능금마을

 

1623313.

창의문 밖 홍제원(지금의 서대문구 홍제동)에 집결한 의군(義軍)’들은 창의문을 부수고 창덕궁으로 진격한다.


반정군의 원두표가 도끼로 문을 부셨다. 당시 창의문은 문루가 없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탔기 때문이다. 높은 위치에서 활도 쏘고 해야 하는데 문루가 없으니 효과적인 방어가 펼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반정군은 창덕궁을 점령했고, 광해군은 폐위된다.


능금마을 이야기를 하다 뚱딴지 같이 왜 인조반정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일까? 그렇다. 창의문 밖 능금마을은 인조반정과 무척 관련이 깊다. 인조는 반정에 협조했다 하여 창의문 밖 백성들에게 능금나무와 자두나무를 나눠주었다. 그게 부암동 능금마을의 시초가 된 것이다.


숙종 때에는 정책적으로 묘목을 더 많이 심어 부암동 일대에 무려 20만 그루의 능금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가을이 되면 빨갛게 달아오른 사과들이 푸른 잎들 사이에서 대롱대롱 거렸을 것이다. 아주 멋진 장관이 펼쳐졌을 것 같다. 거기에 인왕산 서편으로 석양이 지는 모습까지 어우러지면!


창의문 밖 능금, 경림금은 그렇게 서울을 대표하는 특산품이 되었다. 추석 차례상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제례물품이 되었던 것이다.

 




* 수각터: 수각터에서 바라본 별서터. 물에 세운 정자를 수각이라고 한다. 백사실계곡 별서터 옆에는 수각이 세워졌던 기단들이 이렇게 남아 있다. 현재 수각은 사라졌고, 연못은 매말랐다. 엄청난 폭우가 쏟아진 다음날에는 저 연못이 물이 차기도 한다. 





북악스카이웨이와 북악산 산책로

 

능금마을을 돌아가면 약수터가 나온다. 산길도 계곡 이어진다. 백사실계곡 숲길보다는 덜하지만 이 산길도 정말 걷기에 좋은 길이다. 걷다보면 어깨춤을 추거나 콧노래가 흘러나오는 곳이다. 필자는 둘 다 했다. 어깨춤을 추며 콧노래를 불렀다.


이제 북악스카이웨이를 따라간다. 북악팔각정을 향해가는 것이다. 일명 북악스카이웨이로 불리는 북악로는 19689월에 완공됐다. 이 도로는 그해 121일에 있었던 청와대습격사건(일명 김신조 사건)의 여파로 만들어졌다. 서울방어목적으로 개통됐던 것이다.


무장공비에 의한 청와대습격이라는 엄청난 사건의 여파로 만들어졌지만 이 도로는 관광용으로 더 많이 애용됐다. 도로 정상부에 북악산 팔각정이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면 서울을 한 눈에 다 내려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사산은 물론 멀리 관악산과 아차산 등 외사산까지도 다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북악산 팔각정이다.


북악산 팔각정은 석양이 질 무렵이 가장 낭만적이다. 뒤쪽 북한산 서편으로 펼쳐진 붉은 노을을 감상한 후에 앞쪽으로 이동을 하여 서울의 야경을 보는 것이다. 노을도 감상하고, 뒤이어 야경도 감상하는 것이다.


이렇듯 자연과 도시의 낭만을 동시에 품고 있는 북악스카이웨이는 60~70년대 신혼여행지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당시에는 택시를 타고 북악스카이웨이나 남산을 한 바퀴 도는 것이 신혼여행의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해외여행이 흔한 일상이 된 요즘과 비교해보면 정말 격세지감이다.


한편 북악산 산책로는 한양도성 북악산 구간과는 다르다. 성곽 구간을 포함하여 북악산 일대는 안보상의 이유로 출입이 통제됐다 2006년 이후 일반인들에게 개방됐다.

팔각정에서 성북동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군인들의 보초로이다. 그 길을 걷다보면 지금 자신이 서울 중심부에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게 될지 모른다. 그만큼 그 길 주변은 때 묻지 않은 자연 경관을 유지하고 있다.

 




* 백사실계곡: 울창한 여름숲도 좋고, 이렇게 단풍이 지는 가을도 좋다. 이렇게 좋은 길을 걸으니 어깨춤이 들썩이고 얼굴에 화색이 도는 거겠지!





숲길에 서면 무아지경에 빠진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필자의 무대는 길이다. 길 위에 서서 트레킹을 행하다보면 모든 근심걱정에서 벗어난다. 평소에 거울을 보면 항상 해있는데 숲길에서 트레킹을 할 때는 얼굴에 화색이 돈다. 그렇게 해맑게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 신기할 정도다


좋은 기가 발산 되서 그런지 숲길에서는 해설도 잘 된다. 마이크를 잡고 이러쿵저러쿵 두서없이 이야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박수로 갈무리된다그렇게 숲길은 필자의 존재가치를 확실히 입증해주는 무대다. 가끔 그 위에 올라서면 어느덧 무아지경에 빠지기도 한다.


누구나 다 자신만의 무대가 있을 것이다. 그 무대가 누구에게는 실험실일수도 있고, 누구에게는 그라운드일수도 있다. 또 누군가에게는 주방일수도 있다. 누구의 무대가 더 좋고 나쁜지는 굳이 우열을 가릴 필요는 없다. 그저 묵묵히 무대에 올라 자신만의 에너지를 발산하면 되는 것이다.


우열을 가릴 필요는 없지만 숫자는 한 번 따져보고 싶다. 숫자는 확실히 필자의 무대가 압도적이다. ? 전국방방곡곡에 있는 숲길이 다 필자의 무대니까.

 

 



* 백사실계곡





백사실계곡 역사트레킹

 

1. IN: 부암동

2. OUT: 성북동

3. 세부코스: 세검정 백사실계곡 능금마을 북악산팔각정 성북동

4. 이동거리: 7km

5. 예상시간: 3시간 30

 

 


* 백사실계곡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서울 한복판에 왜 사과마을이 있는 거에요?

 

 

창의문과 능금마을

 

 

15.07.12 15:45    최종 업데이트 15.07.12 15:45

 

 

 

 

 

 

 

 

 

 

 
▲ 사과 능금은 아니다. 홍로라는 종이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게재했다. 2012년 경남 거창에서 촬형한 사진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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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 밖인 백사실 계곡을 탐방하다 보면 능금마을이라는 곳을 만나게 된다. 능금마을은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어서 그런지 전원적인 모습이 물씬 풍기는 곳이다. 서울 도심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비료포대가 쌓여진 농촌 마을을 보고 있자니 생경한 느낌이 들 정도다.


그렇다면 왜 능금마을이 북악산 뒤편 부암동 부근에 있는 것일까? 아시다시피 능금이면 우리나라의 고유 사과종을 말하는데 능금으로 유명한 지역은 대구·경북 쪽이 아닌가? 이런 의문이 드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실제적으로 필자와 함께 북악산 역사트레킹을 행한 참가자들도 그렇게 묻고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 왜 사과마을이 있는 거에요?"

 

 


가을만 되면 경림금 때문에 창의문이 들썩들썩!

현재 창의문 밖, 부암동 일대는 '능금마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사과나무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능금마을'이라는 마을 명칭만이 옛 흔적(?)을 확인해 주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40여 년까지만 해도 창의문 밖 능금은 경림금(京林檎)이라 하여 서울의 유명한 특산물이었다. 능금이 출하되는 가을 때쯤에는 전국에서 몰려온 상인들로 창의문 인근이 들썩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창의문 밖에 능금나무가 많이 심어졌을까? 먼저 산지 형태를 띠는 부암동 일대의 토양이 척박하여 논농사가 적합하지 않다. 그럼 두 번째 이유는? 두 번째 이유는 창의문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그 두 번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창의문의 역사를 더듬어 가야 한다.

 

 


 
▲ 능금마을 백사실 계곡 입구에서 촬영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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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문으로 더 많이 알려진 창의문


1396년(태조5)에 세워진 창의문(彰義門)은 사소문 중의 하나로 경복궁 북서쪽에 위치해 있다. 자하문(紫霞門)으로 더 많이 알려진 창의문은 인왕산과 북악산이 만나는 자하문 고개에 서 있다. 서울 성곽길을 걷다보면 두 산을 거느리고 있는 창의문의 지형적 존재감을 더 명확하게 감상(?)할 수 있는데 인왕산을 타고 내려온 서울성곽이 북악산으로 넘어가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곳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북대문(北大門)이었던 숙정문이 근방에 있었음에도 소문(小門)이었던 창의문이 북문의 역할을 해야 했다. 숙정문을 이용하려면 북악산의 급격한 경사를 타고 가야 했기에 사람들이 잘 이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1413년(태종14)에 풍수가 최양선의 건의로 문이 닫히게 됐는데 숙정문이 오른쪽 어깨의 형상을 하고 있고, 그 어깨로 경복궁을 내리누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 능금마을 서울 종로구 부암동 부근에 위치해 있다. 북악산 뒤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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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과 인조반정


오른쪽 어깨가 있으면 왼쪽 어깨도 있을 것이다. 그 왼쪽 어깨 역할을 창의문이 했다하여 1413년에 창의문도 함께 폐쇄가 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그렇게 하여 도성에서 북쪽 지역인 개성이나 양주로 가는 길이 오랫동안 불편을 겪게 된다. 창의문은 폐쇄된 지 거의 100년이 흐른 후인 1506(중종1년)에 와서야 다시 열린다.

문이 열리니 길도 열리게 됐고, 그로 인해 역사적인 발자국도 하나씩 하나씩 생기게 됐다. 인조반정도 그런 역사적인 발걸음 중에 하나다. 1623년 3월 13일, 창의문 밖 홍제원(지금의 서대문구 홍제동)에 집결한 '의군(義軍)'들은 창의문을 부수고 창덕궁으로 진격한다.

반정군의 원두표가 도끼로 문을 부셨다. 당시 창의문은 문루가 없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탔기 때문이다. 높은 위치에서 활도 쏘고 해야 하는데 문루가 없으니 효과적인 방어가 펼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반정군은 창덕궁을 점령했고, 광해군은 퇴위된다.

 

 

인조반정과 능금마을


능금마을 이야기를 하다 뚱딴지 같이 왜 인조반정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일까? 그렇다. 창의문 밖 능금마을은 인조반정과 무척 관련이 깊다. 인조는 반정에 협조했다 하여 창의문 밖 백성들에게 능금나무와 자두나무를 나눠주었다. 그게 부암동 능금마을의 시초가 된 것이다.

숙종 때에는 정책적으로 묘목을 더 많이 심어 부암동 일대에 무려 20만 그루의 능금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가을이 되면 매운 음식을 먹은 듯, 빨갛게 달아오른 사과알들이 푸른 잎들 사이에서 대롱대롱 거렸을 것이다. 아주 멋진 장관이 펼쳐졌을 것 같다. 거기에 인왕산 서편으로 석양이 지는 모습까지 어우러지면...!

창의문 밖 능금, 경림금은 그렇게 서울을 대표하는 특산품이 되었다. 추석 차례상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제례물품이 되었던 것이다.

 

 



 
▲ 창의문 사소문 중에 하나인 창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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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창의문 능금은 다 어디로 갔을까


2008년 숭례문 화재 이후, 창의문은 사대사소(四大四小)문 중에서 가장 오래된 연혁을 가진 문으로 등극(?)하게 된다. 지금의 문루는 영조 17년에(1740) 세워졌지만 1396년에 세워진 '동기동창'인 나머지 사대사소문들이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철거되거나 그 원형이 훼손됐기에 창의문이 '최고참'이 되어 버린 것이다. 화재 전까지 숭례문이 그 '최고참' 자리에 있었다.

그 많던 부암동 일대의 사과나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가을이면 경림금을 사기 위해 각지에서 몰려온 그 많던 상인들은 또 어디로 갔단 말인가? 능금나무가 심어져 있던 부암동에는 카페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고, 상인들을 대신해서는 관광객들이 몰려오고 있다. 이렇듯 세상은 변하고, 또 변한다. 역사적인 해석도 변한다. 인조반정에 참여한 반정군이 '의군'인지 아닌지, 광해군이 폭군인지 아닌지... 그런 역사적인 해석이 변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변하지 말고 계속 그대로 존속해 주었으면 하는 것들이 있다. 바로 문화재들이다. 문화재들이 있어야 역사탐방을 하든 역사트레킹을 하든 할 테니까. 어찌됐든 우리 문화재는 우리가 지켜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47년 만에 창의문 옛길이 복원된다는 소식이 정말 반갑다. 180미터 복원이라 좀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옛 원형을 찾아가는 시도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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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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