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

 

당신과의 만남은 그저 작은 인연

 

난 선을 그었고 파내서 골에 내었지

 

골은 깊어졌고 난 두더지가 되었네

 

어둠 속에서도 향기는 스미는 법

 

꽃 향기가 내 눈을 뜨게 했지

 

온 골짜기에 봄꽃이 만발했다네

 

당신이 몰래 뿌려놓은 씨앗이

 

너와 나의 인연의 꽃이 되었네

 

 

 

 

 

 

 

 

 

 

 

 

 

2013년도 서울시에서 지하철 승강장 스크린도어에 게시될 시를 공모한 적이 있습니다.

 

평소 제가 시에 재능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시민들이 내가 쓴 시를 보고 어떤 느낌을 가질까, 하는 호기심이 들어 그날로 응모를 했었지요.

 

다행히 합격해서 당당히 지하철역 스크린도어에 게시되는 영광을 느리게 됐답니다.

 

제목은 '골짜기'입니다. 아웃도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에 대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 저런 시를 작성하였답니다.

 

그런데 지금 자세히보니 운문이 아니라 산문 같네요~ㅋ 다른 공모작들은 짧게짧게 쓰여있던데...

 

그나저나 스크린도어에 제 모습이 반사가 되서 자연스럽게 셀카가 되었네요.

 

그럼 자신이 쓴 시를 앞에 두고 셀카를 찍은 건가요?ㅋ

 

 

게시장소: 서울지하철 2호선 삼성역 종합운동장 방면(외선순환) 3-3

 

 

 

 

 

 

 

 

 

 

 

 

 

<히든 싱어 김광석편>을 보고 쏟은 눈물

 

13.12.30 10:47

 

최종 업데이트 13.12.30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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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석 <히든 싱어> 화면 캡쳐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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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프로그램 하는 거 좋은데, 김광석 이름 팔아서 먹칠은 하지 마라. 제발 부탁이다!'

그렇게 방송이 시작될 때는 달갑지 않은 시선을 보냈답니다. 사실 <히든싱어2 김광석>을 본 것도 우연이었습니다. <히든싱어>가 방영되는 시간인 토요일 밤 11시경에는 저는 항상 잉글랜드 프리미엄리그를 시청했었으니까요. 12월 28일에는 카디프시티의 김보경과 선더랜드의 기성용이 맞붙는 '코리안 더비'를 보려고 TV앞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확인을 해보니 '코리안 더비'는 다음날 새벽 2시경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일 없이 리모컨을 돌리다가 채널 15번에서 잠시 멈췄답니다.

 

 



# 김광석이라는 이름 때문에 종편을 보게 됐다!

평소에는 종편 채널이 몰려있는 번호대를 그냥 뜀뛰기 하듯 넘어갔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날만큼은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아 몰입을 하고 보게 됐답니다. <히든싱어>가 방영되는 JTBC가 요즘 변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 태생적 한계 때문에 눈이 잘 가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예능 프로그램라면 더욱더 눈을 거둘 수밖에요. 그러나 김광석이라는 이름 석 자 앞에서는 그런 원칙도 우르르 무너져 내렸습니다.

<히든싱어>는 원곡을 부른 가수와 여러명의 모창가수가 서로 경쟁을 하는 독특한 구조의 프로그램입니다. 무대에는 장막으로 가려진 방이 여러 개가 있는데 오리지널 가수와 모창가수들이 각 방에서 한 소절씩 원곡을 부르는 식으로 방송이 진행됩니다. 예를 들어 '조용필'편은 이런 방식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간주가 나오는데 오리지널 가수인 조용필은 3번 방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럼 1번, 2번 방에 들어간 모창가수들은 최대한 오리지널 가수처럼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부를 것입니다.

워낙 모창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참가했기 때문에 패널들이나 방청객들은 오리지널 가수가 3번인지, 1번인지 혹은 2번인지 혼돈스러워 합니다. 그래서 '신승훈'편에서는 모창 가수가 오리지널 가수를 이기는 진기한 장면까지 생성됐다고 합니다.

'김광석'편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워낙 출중한 모창 실력을 가진 지원자들이라 그런지 마치 故김광석이 실제 무대에서 직접 노래를 부르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날 정도였습니다. 김광석의 오랜친구인 김창기, 한동준도 번호를 잘못 누를 정도였으니까요. 

그럼 1996년 1월에 저 먼 곳으로 가신이가 어떻게 <히든싱어> 무대에 설 수 있었을까요? 김광석의 앨범에서 음원을 추출하는 방법을 썼다고 합니다. 김광석의 앨범은 아날로그 방식으로 제작되어 있어 음원 추출이 수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음원은 뽑아내졌고 가신이도 2013년 <히든싱어>의 대미를 장식하는 자신의 무대에 당당히 설 수 있게 됐답니다.

하지만 가신이의 빈자리는 크더군요. 자신의 방문이 열리면 마이크를 잡고 서서히 무대 중앙으로 향하는 모창가수들과는 달리 오리지널 가수 방은 휑하게 비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무척 쓸쓸하고 아쉬웠습니다. 차라리 가신이의 사진이라도 그 방에 걸어주셨으면 덜 쓸쓸했을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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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든싱어 <히든싱어> JTBC 홈페이지 캡쳐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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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석이형의 음성은 따뜻한 격려와 위로였다네!

저는 故김광석씨를 광석이형이라고 부릅니다. 친형도 아니고 동네 선배형도 아닌데 그렇게 부릅니다. 이렇게 '친한척'을 하지만 광석이형의 제대로 된 매력을 알게 된 건 형이 저 먼 곳으로 간 이후부터였습니다. 방송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던 참가자 분은 광석이형의 죽음을 군대 전역 즈음에 들었다고 하더군요. 그 분은 큰 충격에 빠져 광석이형의 앨범을 다 불태워버렸다고 했습니다. 저도 그 비보를 군대시절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큰 느낌은 없었습니다. 그저 좋은 가수가 한 명 먼저 갔구나, 하는 정도였습니다. 

그 이후 시간이 흘렀고, 저도 나이를 먹어갔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이 녹녹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무언가가 '점점 더 멀어져 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럴수록 광석이형의 음성은 따뜻한 격려로 들렸고, 저는 그 따뜻한 위로 속에서 단잠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광석이형의 노래는 점점 더 제 귀에서 떨어지지 않게 되었답니다.

옷 벗기 경쟁에 나선 걸그룹의 음악들에서는 국적 불명의 억센 향수 냄새가 나지만 좋은 음악은 들으면 들을수록 싱그러운 향기가 납니다. 그 향기는 추억이라는 바람을 타고 널리널리 퍼져 나갑니다. 그 향기를 맡은 사람들은 하나의 공통된 기억으로 묶이게 됩니다.
'김광석 편'에 나왔던 모창 가수들도 저처럼 기억의 한 구석에 광석이형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상금을 받으면 광석이형의 웃음 짓는 동상을 만드는데 쓰고 싶다는 지원자, 감수성이 많았던 청소년 시기를 광석이형의 노래로 잘 이겨냈다는 지원자... 모두다 한결같이 광석이형의 노래로 인해 '좋은 향기'를 맡았던 것 같습니다.

 

 

 


# 변호인에서 참은 눈물, 광석이형 보고 쏟아냈다!

저도 그 향기를 맡았습니다. 그러니 주르르 눈물이 흐르더군요. 특히 마지막 부분인 <서른 즈음>이 흘러나왔을 때는 좀 더 크게 훌쩍였습니다. 저는 영화 <변호인>을 보면서도 눈물을 참았답니다. 주위에 사람들도 많았고 일부러 제가 감정을 억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종편에서 방영하는 예능프로그램을 시청하면서 눈물이 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사실 저는 <변호인>에서 통쾌한 느낌을 받았답니다. 극중 송우석 변호사가 고문 경찰인 차동명에게 큰 소리로 윽박지르는 부분에서 쾌감을 느꼈으니까요. 하지만 광석이형의 목소리에서 흘러나오는 이 대목에서는 그저 눈물만 나올 뿐이었습니다.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그러다 <서른 즈음> 나머지 부분을 따라 부르며 한심했던 제 30대를 되돌아봤습니다. 어설펐고, 그래서 욕 먹었고, 그것 때문에 아팠고. 하지만 그것보다 배신당했다는 것에 더 가슴이 쓰렸고... 생각해보니 제 30대는 그저 어둡게만 채색된 것 같습니다. 지울 수 있으면 그 시기를 지우고 싶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세상 일이 그렇게 쉬운 게 아니겠죠.

그렇게 어두웠던 제 30대도 이제 이틀 정도가 남았습니다. 이제 '서른 즈음'이 '마흔 즈음'으로 바뀔 때가 됐네요. 제 '서른 즈음'이 한심하고, 답답했다면 제 '마흔 즈음'은 활기차고 건강하게 보내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어두침침한 방에서 엎퍼져 있지 말고 봄볕을 맞은 새싹들처럼 기운차게 '일어나'야겠지요! 광석이형의 <일어나>처럼요!

'~일어나, 일어나 봄에 새싹들처럼!' 

 

 

 

 

 

 

 

 

 

 

 

 

<호빗>과 <변호인>

우리는 영웅이 아닌 친구가 필요하다!

 

13.12.28 14:53l최종 업데이트 13.12.28 14:53l

 

 

"호빗? 그거 서울에서 안 하잖아."
"그래서 광명까지 갔다 왔어요."
"그렇게까지 가서 볼 필요 있냐? 그거 그냥 블록버스터잖아!"
"……"

선배형은 호빗에 대해서 그냥 시큰둥한 평가를 내렸다. 그 와중에 옆에 있던 후배 녀석이 선배형을 거들면서 이야기를 했다.

"호빗 그거 난쟁이 영화 아니에요? 해리포터 같은... 전 그런 영화는 별로던데... 차라리 변호인 봐요. 그거 재밌다고 하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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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산 봉화산에서 바라본 봉하마을. 중앙 하단에 있는 삼각형 모양의 땅이 노무현 대통령의 묘소이다. 사진에서 보듯 봉하 마을은 '깡촌'이다. 이곳에 '아방궁'이 들어설 수 있겠는가? 2011년 여름, 남도횡단 자전거여행 때 찍은 사진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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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빗>과 판타지


그렇다. <호빗 (The Hobbit : The Desolation of Smaug)>은 난쟁이들을 다루었고 해리포터 같은 판타지 영화다. 필자는 호빗들처럼 '짝달막'한데다 판타지 장르를 즐겨 본다. 그래서 멀리까지 가서 보고 온 것이다. 로맨틱코미디는 '닭살'스럽고 공포영화는 '개그콘서트' 보는 것 같지만 판타지 영화에는 팝콘의 유혹을 물리칠 정도로 몰입을 한다.

인간의 근원적인 양태와 희로애락을 신화적인 상상력 안에서 풀어내는 판타지, 필자는 그런 판타지 장르를 선호한다. 불을 내뿜는 용들이 날아다니고 천상의 요정들이 미모를 뽐내는, 그런 화면 가득한 볼거리에 정신이 팔리는 것이 아니다. 물고 물리는 복잡한 스토리 속에서 인간 내면의 '쌩얼'이 꿈틀거리기에, 판타지를 좋아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호빗 2편의 개봉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배급사와 영화관과의 수익배분 문제 때문에 서울에서 호빗을 보기 어려웠고, 그래서 인근에 있는 광명시까지 가서 보고 왔던 것이다.

영화 취향이 천대를 받아서 그랬는지 필자는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호빗>과 <반지의 제왕>의 원작자인 존 로널드 톨킨(J.R.R.) 박사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톨킨 박사는 세계1차 대전에 참전을 했는데 그런 경험들이 그의 작품에 녹아 있다. 솜강 전투라는 1차 대전 중 최대의 격전에 참가했던 톨킨은 현대 문명에 대해 큰 회의를 품었고, 전후 북유럽과 켈틱 신화에 대해 깊이 매료됐다. 탐욕적인 근대 문명를 크게 혐오하고 물질문명 이전세계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이런 이야기를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역시 시큰둥한 반응만 돌아올 뿐이었다.

"어차피 그거 해리포터처럼 애들이 많이 보는 거잖아?"

 

 


# 스크린의 안의 문제를 스크린 밖으로까지 끄집어낸 <변호인>

 


지난 월요일 오후. 동장군의 위세가 꺾이긴 했지만 밖은 여전히 추웠다. 찬바람이 불면 온몸이 다 부르르 떨릴 정도였다. 하지만 <변호인>을 상영하는 극장 안은 후끈했다. 상대적으로 한가한 월요일 오후 4시경 영화였지만 좌석은 많은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필자도 자리를 잡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 젊은 커플들이 많았지만 나이가 지긋한 분들의 얼굴도 눈에 들어왔다.

사실 <변호인>에 대한 첫 느낌은 썩 좋지 않았다. 개봉 전부터 너무 떠들썩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는 생각에 괜한 반발심부터 앞섰던 것이다. 영화라는 매개물로 고인을 '팔아'먹는다는 느낌이 들었고, 또한 배우 송강호(송우석 역)와 노무현 대통령이 서로 잘 매칭도 되지 않았다. 수더분한 얼굴의 송강호를 보면 웃음부터 나오기 때문이었다. 노무현을 보면 웃음부터 나오지는 않았기에...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필자의 첫 느낌은 송강호의 넉살 좋은 연기에 서서히 무너져 내려갔다. '깔깔깔' 웃음소리와 함께. 그리고는 왜 이 영화가 2013년 최고의 영화중에 하나라고 불리는지도 깨닫게 됐다. 스크린 속에 그려진 우울한 시대의 단면을 영화관 밖으로 끄집어냈기 때문이다. 그 장면들이 단지 전두환 시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환기시켰기 때문이다. 건전한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스크린 안에서는 끔찍한 고문과 탄압에 분노를 했을 것이고, 극장 밖에서는 현재 우리 앞에 놓인 민주주의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극중에서 송우석 변호사가 고문 경찰관인 차동명에게 사자후와 같은 열변을 토하지만, 차동명 세력'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무척 강했고 지금도 강하다. 1981년 부림 사건의 피의자들에게 '북한의 지령'이라는 죄목이 뒤집어 씌어졌다면, 2013년 진보·개혁세력에게는 '종북좌파'라는 비난이 그들에 의해 덧씌워져 있다.

3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지만 '차동명 세력'은 자신의 과오를 참회하기는커녕 오히려 상대편에 '종북좌파' 딱지붙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어쩌면 그들은 항상 '이기는 싸움'만 해왔는지 모른다. 물론 잠깐 숨을 고른 적은 있었겠지만.

그런 '차동명 세력'은 앞으로도 계속 이 나라를 좌지우지할지 모른다. 지금으로부터 30년 후에도 계속 자신의 반대편에게 '딱지'를 붙이고 있을지 모른다. 차동명이 부림사건 시절에는 공안경찰로 등장했다면 앞으로는 다른 모습으로 등장할 수도 있다. <교학사 역사교과서>라는 얼굴로 나타날 수도 있고, 공공기관 민영화라는 '스타일'로 포장될 수도 있다. 현재는 국정원과 군 사이버사의 댓글로 나타난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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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하마을 경작지 봉하마을에서 공동경작을 하는 논이다. 2011년 여름, 남도횡단 자전거여행 때 찍은 사진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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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영웅이 아닌 친구가 필요하다!


판타지에는 어김없이 영웅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일당백이 되어 악당들을 물리친다. <호빗>이나 <반지의 제왕>에서도 수많은 영웅들이 악의 세력에 맞서 정의의 칼날을 휘두른다. 백색의 마법사 간달프는 악의 화신인 사우론과 당당히 맞서고,  꽃미남 엘프 레골라스는 거침없이 정의의 화살을 날린다. 간달프와 레골라스의 한방에 오크족과 고블린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나가고 결국 강성했던 어둠의 세력들은 멸망하게 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반신반인'의 영웅이 나타나 세상을 좌지우지 하는 식의 이야기는 말그대로 '판타지'일 뿐이다. 최강의 포스를 가진 판타지 영웅이 나타난다고 해도 우리시대의 당면과제인 사회양극화, 청년실업, 남북문제 등을 '한방'에 풀어줄 수는 없을 것이다. 슈퍼맨, 베트맨, 정도령, 원더우먼, 오디세우스 등 동서양의 영웅들이 한꺼번에 다 등장한다고 해도 역부족일 것이다.

현실의 문제는 결국 생활인들이 풀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웅이 아닌 친구가 필요하다. 기소된 송우석 변호사를 위해 이름을 올린 99명의 변호인들처럼 묵묵히 자리를 지켜주는 고마운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안녕 대자보를 붙일 때 청테이프를 끊어 주는 친구, 그 대자보를 찬찬히 읽고 따뜻한 캔커피를 건네주는 친구가 필요한 것이다.

오늘은 동장군의 기세를 누를 따끈한 국물이 그리운 날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돼지국밥 한 그릇이면 속이 든든히 채워질 거 같다. 소중한 친구와 지인들을 모아 따뜻하게 저녁식사를 하고 술잔을 기울이고 싶다. 사람사는 세상을 이야기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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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의 자전거와 내 자전거 오른쪽에 있는 자전거는 노무현 대통령의 것이다. 대통령의 자전거는 단출했지만 필자의 자전거는 무거운 짐들이 잔뜩 실려있다. 고물이고 자세도 안 나오는 내 자전거! 그래도 같이 사진 찍어주는 친구가 생겼네! 2011년 여름, 봉하마을에서 찍은 사진이다.

ⓒ 곽동운

 

 

 

사설.칼럼

렌즈세상

[렌즈세상] 죽방울놀이

등록 : 2013.08.26 18:12수정 : 2013.08.26 18:12

 

 

 

 

 

 

 

 

 

 

 

 

 

 

 

 

 

 

 

 

 

 

 

 

 

 

 

우리문화연구소 이원하 소장이 아이들 앞에서 죽방울놀이 시범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소장은 충남 공주에서

 

우리의 전통 놀이문화에 대한 연구와 보존에 힘쓰고 있는데요. 죽방울놀이는 보부상단의 볼거리 문화에서

 

전해 내려왔다고 합니다.

 

8월2일 ‘거창아시아1인극제’에서 찍었습니다.

 

곽동운/ 여행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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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27일자 <한겨레신문> 오피니언란에 필자가 찍은 사진이 게재됐다. 죽방울놀이라고,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놀이에 대한 사진이 게재된 것이다. 이 사진에 등장한 이원하 소장은 우리나라 전통 민속놀이에 대한 애정이 강한 분이다. 이 소장과 잠깐 인터뷰를 했을때 필자는 그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았었다.

 

"우리나라 전통놀이 문화를 통해 제 삶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사실 제 얼굴이 많이 험상 궂잖아요. 그런데 우리 놀이문화를 알고, 접하고, 연구하다보니 어느새 제 얼굴이 부드러워졌다고 하더군요~"

 

이 소장의 얼굴에서 부드러움이 묻어 나오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전통놀이 문화에 대한 이 소장의 신념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제가 충남 공주의 한 아파트에서 사는데 우리 아파트 놀이터에도 흙이 없어요. 아이들이 다친다고 놀이터에 우레탄을 깔아 놓은 겁니다. 공주시에 사는 아이들이 이 정도인데 다른 대도시의 아이들은 어떻겠습니까? 도대체 유년기에 흙이나 땅을 만지고 놀 기회가 없는 거에요. 아이들이 흙장난을 하면서 얻는 정서적인 느낌들이 애초부터 박탈 당하는 것이죠.'

 

그렇다. 이 소장의 말처럼 흙 장난을 하면서 얻는 정서적인 감흥이 얼마나 소중한가? 그 유년시절의 경험과 느낌들은 소리소문 없이 우리의 유전자 속에 크게 각인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런 경험과 느낌들은 하나하나가 다 소중한 것들이다. 황혼에 잠긴 어르신들이 50~60년도 더 지난 자신의 유년기 시절을 미소를 띄우며, 바로 엊그제 이야기처럼 떠올리는 것을 보면 그 유년시절의 기억들은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하고 귀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학원에 쫓겨, 스마트폰에 쫓겨 어른들보다 더 정신없이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에게 흙을 되돌려주자. 흙에서 놀다 무릎팍이 좀 까진다고 너무 속상해 하지 말고... 상처나면 소독연고 좀 발라주면 되지 뭐. 자신의 아이가 어떠한 상처도 받지 않고 자라기를 원하시나? 왠만한 부모들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실 것이다. 그럼 아이들에게 숨 쉴 공간을, 또한 정서의 공간을 내주시라. 그냥 흙에서 재밌게 놀 수 있게 짬을 주시라~!    

 

 

 

 

 

 

 

 탱크킬러라는 별칭이 붙어 있는 미공군의 A-10 공격기. 2009년 서울에어쇼에서 촬영.

 

 

 

 

작년 가을. 필자는 강월도 영월의 동강을 거닐고 있었다. 동강 최고의 비경이라는 어라연을 탐방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느긋해하고 있었다. 단풍철도 지난 시기라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유유히 흐르는 동강만이 필자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푸아항~! 그런 호젓한 정적을 깨는 강력한 엔진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비행기 한 대가 동강의 골짜기 사이를 유유히 스쳐지나갔다. 탱크킬러라고 불리는 A-10 공격기였다. 미 공군 마크가 선명했다. 필자는 좀 어리둥절했다. 왜 이 아름다운 곳에 저 공격기가 비행을 하고 있을까? 난 순간 반사적으로 사진기를 잡았지만 이미 엔진소리는 저 골짜기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아참 이 근처에 공군 사격장 있지. 그런데 거기 백두대간 허리축이라던데….'

한때 필자의 마음 속에는 비행기가 있었다. 푸른 창공을 가르며 나는 비행기들이 좋았고, 그 비행기들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짜릿함을 느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하늘을 날아보겠다고 보자기를 둘러쓰고 옥상에서 뛰어내리기도 했었다. 그러다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필자가 본격적으로 비행기에 대해 '구애 작전'을 벌였던 때는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처음에는 하나둘씩 비행기 사진을 모으다가 나중에는 항공잡지 세계에 뛰어들었다. 항공잡지를 모으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항상 문제는 돈이었다. 돈이 없으니 잡지를 구입하는 데도 제약이 많았다. 하긴 당시 고등학생이 돈이 있으면 얼마나 있었겠는가.

용돈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필자는 헌책방 투어에 나섰다. 어차피 속보성을 획득하려고 항공잡지를 구매했던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1990년대 초반의 헌책방에서 항공잡지를 찾아보기란 하늘에서 별 따기와 같은 일이었다. 그만큼 항공잡지가 귀한 시절이었다. 그렇게 어렵게 구한 잡지들도 부실한 경우가 많았다. 곰팡이가 피고, 냄새나고.

 

 

 

 

▲ 동강 어라연 동강 최고의 풍광이라고 불리는 어라연이다.

 

 

 



'어린왕자' 꿈꾸던 그 시절... 지금도 그립다

그렇게 부실한 잡지들은 한 번씩, 꼭 손을 거쳐야 했다. 햇볕에 내다말려야 했던 것이다. 한번은 옥상에서 잡지들을 펼쳐놓고 잠시 일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햇볕이 쨍쨍하기에 느긋하게 길을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그 와중에 엄청난 소나기가 내렸다. 허겁지겁 다시 돌아왔더니 옥상에 있던 항공잡지들은 이미 철저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빗방울이 컸고, 강수량도 많았던 터라 내 잡지들은 소나기의 맹공을 견뎌내지 못했던 것이다. 난 멍하게 잡지 파편들을 보고 있었다. 그 잡지들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이 뛰어다니고 움직였던가! 동쪽 하늘에 예쁘게 드리워졌던 무지개가 얄미웠다.

그런 재미난 에피소드들을 던져주던 나의 비행기 사랑은 이제 많이 무뎌진 게 사실이다. 시간 앞에 장사 없다고 세월이 흘러가면 첫사랑의 짜릿함도 사그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심경의 변화가 꼭 시간의 흐름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몇 년 전, 필자가 그토록 좋아하던 비행기들이 민간인 학살에 동원된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2차세계대전 당시 파시스트 세력들의 맹렬한 공세를 막아내던 용맹스럽고 멋진 비행기들이 우리 땅에서 민간인 학살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런 사실들은 내게 큰 혼란을 주었다. 전쟁통에 무장한 세력끼리 적대행위를 하는 건 별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비무장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사격을 가했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 동강 산소길 영월 동강의 산소길. 비행기가 떠난 자리에 아웃도어가 들어왔다.

 

 


무언가가 있던 자리에는 또 무언가로 채워지는 게 순리인 걸까? '비행기'가 떠난 자리에 '아웃도어 여행'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한 번, 두 번 떠난 여행이 쌓이고 쌓여 내 인생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더 솔직히 이야기를 하자면 아웃도어 여행으로 인해 인생의 지향점까지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동강 어라연에서의 일도 마찬가지다. 필자는 비행기가 지나간 자리에 백두대간 걱정부터 하고 있지 않은가?

세상은 돌고 도는 법이다. 이러다가 아웃도어에 대한 애정도 '있다 없어'질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무엇이든 그것이 있었던 시간이 무척 소중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있었기에 그 빈자리가 느껴지는 것이고, 또 옛 기억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필자는 가끔 그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다. 비행사 생텍쥐페리와 함께 '어린왕자'를 만나러 가던 그 시절, 그 동경의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다.

 

 

 

 

 

 

 

 

 

 

 

*아버지의 일기장

 

 

 

 

# 아내는 슈퍼우먼

이 책을 읽다보면 강한 부부애도 느껴진다. 부부의 인연이 이렇게도 강할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박일호와 신봉선은 찰떡궁합이었다. 이들에게는 연리지나 비익조 같은 수식을 붙여도 될 정도였다. 연리지는 한 나무의 가지와 다른 나무의 가지가 서로 붙어있다는 뜻이고, 비익조는 암컷과 수컷이 각각 눈과 날개가 하나씩이라서 짝을 이루지 못하면 날 수 없다는 상상속의 새 이름이다. 연리지와 비익조는 둘 다 금실 좋은 부부를 지칭할 때 쓰이는 말들이다. 그런 찬사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부부는 서로에게 좋은 동반자였다.

병든 남편을 위해 신봉선은 매일 같이 보양식을 준비했고, 장사도 도맡아 했다. 신봉선은 '슈퍼우먼'이었는데 연탄배달, 빙수 만들기, 떡볶이 조리, 문구류 판매까지 못하는 일이 없었다. 거기다 남편을 대신해서 파출소까지 끌려가야 했다. 당시는 '불량식품' 근절이니 '유해만화 단속'이니 하는 강압적 단속이 철마다 시행됐는데 병든 남편을 대신하여 유치장 신세를 져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고달프고 힘겨운 생활이었지만 신봉선의 다짐은 '강철'과도 같았다. <아버지의 일기장>은 박일호의 일기 이외에 첨언 식으로 박재동과 신봉선의 기록도 포함되어 있는데, 그와 관련된 기록을 한 번살펴보자.

천한 장사한다고 사람까지 천하게 보는 일이 허다했다. 어떤 부모는 아이들이 만화책을 빌려왔다고 열 권이 넘는 책을 불태워버린다고 했다. 우리는 그 만화책이 살림 밑천인데 서슴없이 찢어서 불태워버린다고. 어떤 이는 우리집 양반이 옳은 소리를 하면 만화방 하는 주제에 하고 무시하고, 평생 만화방이나 해먹으라고 악담까지 한다. 내 자식만은 당신들 뒤지지 않게 훌륭하게 키우리라. 세상 사람들이 얕보고 무시할 때면 내 마음은 강철같이 다져진다. 우리의 희망은 오직 세 아이다. 76페이지.

 

 

 

 

* 박재동 화백: 독자들을 위해 캐리커처를 그려주고 있는 박재동 화백. 

직접 만나보면 실제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에너지가 넘치는 분이었다.

자세히 보면 '청년' 박재동이다.   

 

 

 

 


이렇게 가족을 위해 아내는 희생을 했고, 그런 아내를 박일호는 극진히 사랑하였다. 그런 부부애가 통했던 것일까? 발병 당시 얼마 못 산다는 의사의 진단을 비웃기라도 하듯, 박일호는 3남매를 다 시집·장가 보냈고, 손자·손녀까지 안아 봤다. 또한 아들 박재동의 손을 거쳐 자신이 18년간 써온 일기장을 세상에 내놓게 된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아버지의 일기장>에서 박재동은 '타임머신'을 타고 청년 박재동으로 돌아가 그 시절의 아버지와 대화하고 있다. 매일같이 글쓰기가 버겁다는 아버지의 일기에 아들은 힘들어도 꾸준히 써야한다고 답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쓴 일기장을 통해 현재의 박재동은 '철없던' 청년기의 자신과 만나고, 그 '철없던 아들'을 묵묵히 바라보는 아버지를 만나고 있던 것이다.

 

 

 

 

 

 

* 캐리커처: 필자의 캐리커처를 그려준 박재동 화백에 대한 답례로 박재동 화백의 캐리커처를 그려보았다. 박 화백이 그려준 그림에 필자의

그림을 덧붙였으니, 박재동 화백과 곽작가의 공동작업이 되는건가?  박재동 화백을 그린 캐리커처는  <손바닥아트>에 나온 모습을 응용해서 그려보았다.

 저 그림 그리는데 1시간이나 걸렸다. 이 참에 그림 공부 좀 열심히 해서, 나중에 시화전을 열어보고 싶다. 시화전도 나의 꿈이다.      

 

 

 

 

 

 # 아버지의 꿈

아버지에게도 꿈이 있었다. 특용작물을 기르는 농장 경영이 바로 그것이었다. 박재동의 할아버지는 박일호에게 농사를 지으라고 지게를 만들어줬지만 박일호는 그 지게를 부숴버린다. 자신에게는 꿈이 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공부를 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면서. 하지만 아버지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젊은 시절 들이닥친 병마 때문에 모든 것을 접어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접어야 했던 아버지의 꿈은 고스란히 자식 세대로 넘어갔다. 부모세대의 꿈과 관련하여 박재동은 오마이뉴스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녀들의 꿈이 중요하듯 부모들의 꿈도 중요합니다. 자식들의 꿈을 위해 부모들이 자신의 꿈을 접는 일은 이제 없어야 할 것입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자식들을 위해 일방적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아버지의 일기장>을 읽은 전후로 필자는 꿈이 하나 실현됐고, 새롭게 꿈이 하나  생겼다. 실현된 꿈은 평소에 존경했던 박재동 화백을 직접 만났고, 박 화백이 직접 필자의 캐리커처를 그려주었다는 것이다.

이번에 생긴 꿈은 결혼이다. 돈도 없고, 능력도 없어서 결혼 생각은 엄두도 안 났지만 이 책을 읽으니 당장 가정을 꾸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로생활도 좋다. 하지만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기르다보면 솔로 때와는 다른 희로애락이 생길 것이다. 그런 희로애락을 거치다보면 부모만이 깨달을 수 있는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 캐리커처: 박재동 화백이 직접 그려 준 필자의 모습. 그런데 필자의 모습이 좀 껑뚱하게 나온 것 같다.

박 화백께서는 이 그림을 불과 30초 만에 완성하셨다. 놀라울 정도의 속작 능력이다.

 

 

 

 

 

 

 

#  <아버지의 일기장>과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앞서도 언급했듯이, 필자는 <아버지의 일기장>을 읽는 내내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두 책의 공통점이 하나 더 있었다. 둘 다 마지막 책장을 넘길 때까지 미소를 머금고 읽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일기장>은 30년 동안 병마에 시달린 사람의 기록이었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20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던 사람의 기록이었다. 병마와 감옥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그것에 굴하지 않고 진정한 삶의 의미를 기록했던 두 분께 박수를 보낸다. 또한 좋은 기록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해 준 박재동 화백에게도 감사를 보낸다.

 

 

 

 

 

 

 

 

 

*아버지의 일기장

 

 

 

 

 

 

 

아버지의 18년간의 기록

일기를 쓴 박일호는 '한국시사만화계의 대부'로 불리는 박재동 화백의 아버지이다. 처음 이 책이 출간됐을 때, 필자는 '일기장'이라는 부분에 눈길을 두었다. 그래서 박재동 화백이 자신의 일기장을 세상에 공개한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어쩌다 박재동 선생 부친 되시는 어른의 일기장을 읽게 되었다'라는 안도현 시인의 말처럼, 이 책은 박일호의 일기를 엮은 것이다. 만화가게, 분식점 그리고 문방구 주인이었고, 또한 30년간 병마에 시달린 무명인의 일상적인 기록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고백할 것이 하나있다. 사실 필자는 이 책을 박일호 선생이 아닌 박재동 화백의 시선으로 읽었다. 아무리 책을 좋아한다고 해도 한 무명인의 일기를 엮은 책을, 흔쾌히 돈을 주고 구매하는 책벌레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독서 실력이 하찮은 필자 같은 독서인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렇다. 필자는 박일호 옆에 적힌 박재동이란 이름 석 자가 없었다면 이 책을 구매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기를 쓴 박일호 선생은 1929년 경남 울산 범서읍(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면)에서 태어나 언양중학교를 졸업한 뒤, 해방 직후 교편을 잡았다. 당시에는 교사가 부족하여 중학교를 졸업한 사람도 교단에 섰다고 한다. 한편 한국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군복무를 마쳤는데 군 당국이 관련 서류를 분실하여 재징집이 되어 군대를 두 번이나 가게 됐다고 한다.

제대 후에는 양사초등학교로 복직을 하게 됐고, 23세에 박재동의 모친인 신봉선 여사와 혼인을 하게 된다. 교단에 다시 선 박일호는 열정적으로 교직 생활을 하게 된다. 과로까지 해가며 학생들을 가르친 것이다. 학생들에게 자습을 시키며 대충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맡은바 소임을 다하겠다는 각오로 수업을 진행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문제였다. 과로가 쌓이다보니 폐결핵이 발병했고, 그 폐결핵 때문에 교단까지 떠나야 했다. 그렇게 병치레를 하다 간경화까지 얻게 된다. 그렇다. 박일호의 젊은 시절은 설상가상처럼 불운의 연속이었다.

 

 

 

 

 

* 두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과 <아버지의 일기장>은 닮은 구석이 많은 책들이다. 둘 다 극한의 상태에서도 그것에 굴하지 않고,

 희망을 노래했던 책들이다.  그래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함박 미소를 지으며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2003년도판이다.   

 

 

 

 

 

 

질병과 가난을 극복하게 해 준 가족사랑



<아버지의 일기장>을 읽다보면 건강, 질병, 병간호에 대한 언급이 꾸준히 나타난다. 그때나 지금이나 집안에 환자가 있으면 돈이 많이 드는 법! 더군다나 박일호는 교편을 떠나야 하지 않았던가. 산 입에 풀칠을 할 수 없었기에 박일호와 신봉선은 팔을 걷어 붙여야 했다.

부산으로 이주한 그들은 연탄배달, 풀빵장사, 팥빙수장사에 손을 댔다. 그러다 집주인이 하던 만화방을 인수하기에 이른다. 시사만화가 박재동을 탄생시킨, '천국의 도서관'인 그 만화가게를 넘겨받은 것이다. 이렇듯 <아버지의 일기장>에서는 1970~1980년대 한 가난한 도시 서민의 삶의 투쟁(?)이 곳곳에 기록되어 있었다. 이 책의 한 축이 박일호의 투병이었다면, 또 한 축은 생활고였던 것이다.

여기서 잠깐! 필자가 나열한 두 축을 기본으로 삼으면 이 책은 그저 '글루미 선데이'같은 우울한 기록물일지 모른다. 하지만 필자는 <아버지의 일기장>을 읽는 내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정겹고, 익살스러운 박재동의 삽화와 코멘트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그랬기도 했지만, 그보다 투병과 생활고를 뛰어넘는 세 번째 축이 굳건히 서있었기에 필자는 즐거운 기분으로 책장을 사뿐히 넘길 수 있었다. 그럼 그 세 번째 축은 무엇일까? 바로 가족애(愛)였다.

오늘 재동이가 군복무 중 화실에 나가 받은 보수(월 4만원)를 내 약대(藥代)로 내놓았다. 난생처음 자식에게 받은 돈에 얼떨떨하다. 불효자인 내가 자식의 효심에 새삼 감동한다. 부디부디 재동에게 서광이 비치길 빌고 또 빈다. '자식에게 받은 돈' 1976년 6월 14일자, 78페이지.


 

 

 

 

* 박재동 화백: 오마이뉴스에서 강연 중인 박재동 화백

 

 

 

 

 

 

<아버지의 일기장>에서는 청년 박재동이 등장한다. 1976년 당시 방위 복무를 했던 박재동은 낮에는 자택 인근 부대에서 군복무를 하고 밤에는 화실에 나가 학생들을 지도했다고 한다. 그렇게 어렵게 번 돈을 약값에 보태라고 내놓으니 부모 입장에서는 얼마나 기특했겠는가.

이외에도 책 곳곳에서는 가족애가 넘쳐났다. 박일호 선생은 어버이날 딸(명이)이 달아준 카네이션에 환한 미소를 지었고, 둘째 아들(수동)이 달라는 동문회비를 주지 못해서 가슴을 쳐야 했다. 시간이 흐른 뒤에는 장서방(명이의 남편)의 칭찬에 침이 마를 정도였고, 큰 며느리(박재동의 부인)와 작은 며느리(수동의 부인)의 정성에 감동했다. 그렇다. 병치레의 고통과 저조한 매상 같은 암울한 기록들도 책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그것들을 상쇄하고도 남을 행복한 기록들이 <아버지의 일기장>에서는 만발하고 있었다.

 

 

 

 

 

 

 

 

 

 

 

 

 

 

 

 

 

 

 

 

 

 

 

 

 

 

 

 

 

 

 

 

 

 

 

 

 

 

 

 

 

 

 

 

 

 

 

 

* 곽작가: 우물 물을 한 바가지 들이키는 설정 샷! 좀 껑뚱하게 나왔네요!ㅋ

 

 

 

 

 

 

* 삼남길: MBC <시사매거진 2580>에서 삼남길에 대해서 방송을 했답니다. 사진에 등장한 분은 강나림 기자인데 이 분도 삼남길을 직접 걸었답니다.

그러면서 연신 감탄사를 내뱉더군요. 사진에 등장한 숲길은 전남 강진의 백운동 숲길입니다. 직접 걸어보면 화면보다도 더 큰 감흥이 있을 것입니다.

 

 

 

 

 

 

 

 

 

 

MBC <시사매거진 2580>에서 '삼남길을 아십니까'라는 제목을 걸고 삼남길에 대해서 방송을 했습니다. 약 13분간 진행된 방송은 기승전결이 명확히 떨어지더군요. 삼남길에 대한 소개, 삼남길이 주목받는 점, 삼남길을 만드는 사람들, 삼남길의 과제 등등... 아름다운 영상과 함께 진행된 방송에서 삼남길은 자신의 자태를 드러내더군요.

 

이렇게 진행된 방송에 저도 출현을 하였기에 포스팅을 한 번 해봅니다. 사실 생각보다 제가 화면에 많이 등장해서 좀 놀라기도 했답니다~ㅋ

한가지 흡족한 점은 제가 예전에 삼남길과 관련된 기사를 오마이뉴스에 게재를 한 적이 있었는데, 2580측에서 그 기사를 보고 손성일 대장에게 접촉을 했다고 하더군요. 뭐 저도 나름대로 삼남길 발전에 기여를 한 셈이니 정말 기분이 좋네요. ^ __ ^

 

이 사진들은 동영상 화면을 캡처한 것이라 화질이 떨어졌네요. 그게 안타깝습니다.

 

    

 

 

 

 

 

 

 

 

 

 

 

* 삼남대로: 삼남길은 조선시대 옛 삼남대로를 표본으로 개척되고 있는 도보여행 코스입니다. 아쉽게도 현재 삼남대로는 그 원형을 잃어버리거나 훼손된 곳이 많답니다. 산업화와 도로교통의 발달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지요. 삼남길에게도 이런 시대적 흐름 뿐아니라 도보여행길이라는 본질에 걸맞은 변화의 옷이

필요하겠지요. 즉, 옛 삼남대로를 기계적으로 삼남길에 옮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도보여행을 위한 트레킹 코스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아스팔트를 걸으며 매연을 먹는 도보여행은 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 곽작가: 삼남길 전남구간 3코스 해들길에서 한 컷. 해들길은 해남군 북평면 옛 이진산성을 지나갑니다.

제가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는건가요? 저것도 연출인 듯~ㅋ

 

 

 

 

 

 

*우물: 이 우물은 옛 이진성 안에 있었던 것인데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이 우물을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드셨다고 하네요.

화면에 저를 포함한 손성일 대장 및 삼남길 개척단원들이 등장합니다.

 

 

 

 

 

 

* 함박골: 함박골은 현대식 한옥으로 만들어진 팬션입니다. 너무 예쁘게 치장하려고만 하는 현대식 팬션과는 격조가 다른 곳입니다. 이 곳에 가면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낄 수도 있고, 저렇게 흰둥이들도 만나볼 수 있답니다. 함박골 한옥팬션은 삼남길 전남구간 4코스 첫 시작점인 차경마을에 위치해 있답니다.

 

 

 

 

 

 

* 텐트: 손성일 대장과 함께 텐트를 세팅 중.

 

 

 

 

 

* 손성일 대장: '저는 몰라도 삼남길은 분명히 남을 거다'는 멘트가 의미심장합니다!

 

 

 

 

 

 

 

* 삼남길

 

 

 

 

 

* 삼남길: 맨 뒤에서 큰 배낭을 짊어지고 있는 곽작가. 배낭에 뭘 저렇게도 많이 짊어지고 계신가?ㅋ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독자사연공모전 당선작

 

여러분의 2012년은 어떻게 저물어가고 있습니까? 형편없는 성적표나 불합격 통지서, 애인의 이별통보와 갑자기 엄습해온 병 등 많은 것들이 우리를 지치게 했고 울게 만들었습니다. 많은 독자분들이 esc와 함께 그 흑역사를 털어버리고자 공모전에 동참해왔습니다. 아깝게 탈락한 독자 여러분께도 큰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당선자 7명에게 롯데월드 자유이용권 4매씩 드립니다.

 

 

 

 

호환마마보다 두려운 카드명세서

 

 

내게는 사자나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있다. 귀신도 두려워하지 않는 나지만 그 녀석 앞에만 서면 내 심장은 ‘쫄깃쫄깃’해진다. 그 녀석은 한달에 한번씩 꼭 찾아와서는 나를 뒤죽박죽 만들어 놓고 떠나가 버린다. ‘대금 결제가 정상적으로 이뤄졌습니다’라는 문자메시지를 남기고. 그렇다.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건 바로 카드 값이다.

 

 

그간 카드 좀 긁었다. 벌이가 변변치 않아, 일단 카드로 결제하고 다음달에 메우는 식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현금서비스도 많이 받았다. 그러다 보니 결제일이 다가올수록 살얼음판을 걸어야 했다. 혹자는 내게 ‘화끈하게 놀았구먼!’ 하고 질책할 것이다. ‘얼마나 절제하지 못하고 긁었으면….’ 하지만 난 화끈하게 놀지 않았다. 이상한 곳에서 긁지도 않았다. 가난하게 살다 보니 카드 의존도가 높았을 뿐이다. 누군들 한달에 한번씩 꼭 ‘멘붕’을 맞고 싶겠는가!

 

 

2013년 새해부터는 카드 값의 공포에서부터 벗어나고 싶다. 새해부터는 재무설계를 똑 부러지게 할 생각이다. 더 졸라맬 허리띠도 없지만 그래도 개미허리가 되겠다는 각오로 열심히 살아볼 생각이다. 체크카드도 이용할 생각이다. 통장의 잔고 범위에서 지출하는 체크카드를 쓴다면 계획성 있게 돈을 쓸 것 같다. 재무설계를 똑 부러지게 하고 체크카드도 쓴다면, 2013년은 호랑이보다도 더 무서운 카드 값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원년이 될 것이다.

 

 

  

곽동운/

 

 

*** 한겨레 주말판(ESC)에 독자공모를 한다고 해서 글을 올렸습니다. 카드값과 관련된 이야기를요. 맨 위에 걸린 일레스트레이션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카드값 귀신이 자고 있는 사람을 놀래킵니다. 앗! 혹시 저 그림에서 놀란 곽작가, 나인가???ㅋ

아래글은 다른분들의  공모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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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가야 좀만 참아줘~

 

7시50분, 내가 직장에 출근을 해야 하는 시간이다. 집에서 직장까지는 차로 6~7분 거리, 밀릴 염려도 없는 주택가 도로임을 고려한다면 나의 출근길은 천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시 정도에 밥을 먹고 준비해서 7시40분께 집에서 출발하면 느긋한 맘으로 갈 수 있는 거리다. 그런데 느긋한 나의 이 출근길을 가로막는 방해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일명 ×이라 불리는 대변이다.

 

 

지금껏 내 인생에서 아침에 대변을 보지 않은 적은 손에 꼽을 정도다. 일어나면 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배설기관을 작동시키는 것. 실패한 적이 거의 없는지라 항상 가뿐하게 아침을 시작하는데, 문제는 희한하게도 아침을 먹고 나서 7시40분만 되면 후속타가 생긴다는 것이다. “나 다녀올게” 하고 인사까지 다 마치고 현관문을 열려고 하면, 그때서야 무슨 약속이라도 한 듯이 신호가 오는데, 그 신호를 무시하고 그냥 가기에는 너무 부담스럽고 꺼림칙하다. 옷이며 가방이며 다 준비된 것들을 다시 내려놓고 화장실로 가야 하는 참담함, 그리고 오늘도 늦을 수밖에 없구나 하는 암담함. 그래도 어쨌거나 가뿐한 몸으로 출근을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이 뒤늦은 쾌감.

 

 

아침잠이 없어 새벽에 항상 일어나는 아침형 인간인 나는, 이 말 못할 배설작용으로 올 한해 게으름뱅이라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이것이 하늘의 뜻이 아니라면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13년 새해를 시작하기에 앞서, 당당하게 외친다. “×아, 이제 나를 놓아다오~”

 

 

임주성/대전시 유성구 노은동

 

 


 

 

 

양다리의 길은 멀고도 험난해

 

 

스물다섯이 되도록 애인 없이 모태솔로로 지내던 나에게 소개팅은 거의 일상이었다. 끝나가는 스물다섯을 한탄하며 ‘이번에는 꼭!’이라는 각오로 소개팅을 하게 됐다. 다행히 괜찮은 상대를 만나게 되었다. ‘드디어 남자친구가 생기는구나’ 하는 기대까지 하게 됐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상대는 만날수록 물음표를 던지게 되는 사람이었다. 그러던 중 다른 지인에게서 새로운 소개팅 제안을 받았고 약속 날까지 잡았다.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바람 아닌 바람을 피우는 기분이랄까.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뭐! 하고 생각하며 남자1호와의 만남을 이어갔다.

 

 

문제의 발단은 남자2호를 만나기 전에 1호의 고백을 받게 된 거였다. 나의 예상 시나리오는 두 사람을 만나보고 더 나은 상대를 택하는 것이었는데! 팔자에도 없는 저울질을 하려다 보니 일이 꼬인 것인지, 남자1호에게 나는 시간을 달라는 애매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이야기 들은 사람이라면 예상했을 것이다.

 

 

‘두 마리 토끼 잡으려다 놓쳤구나?’ 이 정도였다면 그렇게 지우고 싶은 기억도 아니었을 것이다. 남자1호는 자꾸만 대답을 듣고 싶어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기다려달라’는 말만 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만났을까. 정말, 거짓말처럼 남자2호와의 약속이 잡힌 바로 전날 인내심이 바닥난 남자1호가 이별 선언(?)을 해온 것이다. 떠나겠다는 사람 잡을 이유는 없었기에 쿨하게 안녕 하고 다음날 소개팅에 나갔지만, 더는 쿨할 수가 없었다.

 

 

남자2호가 영 아니었던 것이다. 그 뒤로 자꾸만 남자1호가 생각나고 마음에 걸렸다. 가슴앓이를 하는 나를 주선자는 신기해했다. 지금껏 내가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나는 해서는 안 되는 연락을 하고야 말았다. 무려 세번이나! 주선자를 통해서도 해보고 내가 시도도 해보고. 결국 세번 다 까였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결론이다. 떠나는 2012년과 함께 정말 잊고 싶은 기억이 돼버렸다.

 

 

문송이/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

 


 

호환마마보다 두려운 카드명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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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가 파묻은 진실 발로 뛰며 파헤쳐
[한겨레 2006-08-25 14:54]    

 

 

[한겨레] 나는 이렇게 읽었다/<전선기자 정문태 16년간의 전쟁기록>

 

 

 

 

이 책에서 독자들의 눈을 가장 먼저 사로잡는 건 ‘전선기자’라는 말일 것이다. 지난 16년간 전쟁터를 누빈 정문태는 종군기자라는 통상적인 호칭을 과감히 거부하고 자신을 전선기자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필자의 눈을 가장 먼저 사로잡은 부분은 미군의 민간인학살에 대한 기록이었다. 2005년 11월, 미 해병대에 의해 발생한 이라크 하디타 학살이나 최근 공개된 1950년 당시 미국 대사였던 무초의 편지글은 정문태가 기록한 민간인학살과 그 궤를 같이 한다. 미군의 전쟁범죄는 1950년대나 지금이나 작동방식이 같다는 말이다. 즉 무차별적인 학살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실상을 잘 모른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가 대표적이다. 폴포트의 크메르루즈 집권시 200만명이 죽었다는 얘기는 잘 알려져 있다. 1984년에 개봉된 할리우드 영화 <킬링필드>도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영화 <킬링필드>는 75~79년까지 집권세력인 크메르루주가 동족 200만명을 학살했다는 걸 토대로 삼았다. 그러나 정문태는 킬링필드가 69년부터 시작됐다고 말한다.

   

 

베트남과 국경이 맞닿은 캄보디아는 당시 중립을 선언했음에도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무려 60만명 이상이 죽었다. 미군은 네이팜탄 등과 같은 제네바 협정에 위배되는 폭탄으로 캄보디아를 지옥으로 만들었다. “폭격 임무를 안고 날아갔으나 어디에도 군사 목표물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인 결혼식장을 공격 목표물로 삼았다.” 당시 폭격임무를 수행한 B-52폭격기의 파일럿이 오죽했으면 이런 증언을 했겠는가.

  

 

놀랍지 않은가? 우리 일반사람들 인식 속에 69~75년 기간의 1차 킬링필드는 인지조차 안 되고, 오직 2차 킬링필드에만 초점이 맞춰진 터라 미군의 전쟁범죄는 ‘내 머릿속 지우개’가 돼 버린다. 현재도 국내 언론들의 킬링필드에 대한 보도 관행은 영화 <킬링필드> 수준이다. 크메르루즈의 학살 책임을 묻는 만큼 미군의 학살책임도 짚고 넘어가야 옳은 일이 아닐까?

   

 

미군에 의한 학살은 이렇듯 무차별적이었고 미디어는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면 목표물이 적대행위 대상자든 민간인이든 그건 중요한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냥 방아쇠를 당겼다.

 

  

그렇다면 한국전쟁 당시의 상황은 어땠을까? 노근리는 단면에 불과하다. 무차별 폭격과 사격이 특정지역에서만 발생했겠는가? B-29로 융단폭격을 가한 익산역 폭격, F-86으로 공격한 단양 곡계굴 폭격, F-80으로 기총사격한 사천 조장리 난민캠프 학살…. 이 외에도 수많은 곳에서 미군학살이 발생했다. 이라크, 캄보디아, 베트남에 비해 더하면 더했다.

 

 

한국전 당시 이렇게 많은 학살이 있었음에도 우리가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 미디어 ‘덕택’이다. 그런 면에서 “심지어 자신을 전장으로 보낸 언론사도 배신하고 시민 편에 서야 된다”는 말까지 하는 정문태 기자에게 박수를 보낸다. 오연호 기자가 90년대 내내 노근리에 대해서 알리고 또 알렸지만 눈길 한 번 안 주다가 AP 통신에 의해 노근리가 밝혀지니 그때서야 열심히 취재경쟁에 나섰던 국내 언론사들의 한심한 작태를 상기하면서 <전선기자 정문태 16년간의 전쟁기록>을 읽는다면 더욱더 감칠 맛나게 책장을 넘길 수 있을 것이다.

 

   

 

곽동운/자유기고가 << 온라인미디어의 새로운 시작. 인터넷한겨레가 바꿔갑니다. >>

 

 

 

*** 앗! 2006년 8월에 기고한 글이네요. 곽작가, 제 사진이 저렇게 걸려 있네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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