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은 아이구아이구?'...

이런 달달달 암기 방식은 아니다

 

 

[주장] 기계적인 '암기식 역사' 학습에서 벗어나야

 

15.03.05 11:51   최종 업데이트 15.03.05 11:51
'이 여론조사만 놓고 보면, 우리는 역사를 잊은 민족이니 미래가 사라질 수도 있겠군!'

3·1운동 관련 뉴스를 하나 읽다가 저런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게 됐다. 그 뉴스는 우리나라 성인 남성 중 절반 이상이 3·1절의 정확한 연도를 모른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성인 1005명을 대상으로 한일관계를 조사한 한국갤럽의 여론조사를 담은 기사였는데, 응답자 중 32%만이 3·1운동이 1919년에 일어났다고 정확히 답변을 했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의 강제병탄이 있었던 1910년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19%인 반면,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은 23%로 더 많았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었다.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P)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격언을 그 기사에 빗대보면 필자의 독백이 전혀 틀린 말이 되지 않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미래가 없는 민족이 되는 것일까? 미래의 어느 한 시점에 우리 민족은 그대로 사라지고 말 것인가?

 

 


 
▲ 태극기 서대문 형무소에 걸려있는 태극기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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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퀴즈식의 여론조사

 


삼일절이나 광복절, 혹은 한국전이 발발된 6월 말 경이 되면 저런 역사 퀴즈(?)식의 여론조사 결과가 어김없이 언론에 공표된다. 그런 기사들은 질책을 담은 자극적인 제목으로 생산되기 일쑤인데 이런 방식이다.

<역사의식 실종? 국민 절반이 3·1절이 언제 일어났는지 몰라...>
<충격적인 청소년들의 안보 불감증! 6·25전쟁이 북침이라고?>

여론조사는 칼럼이나 사설로 재생산되는데 질책의 강도를 더 높인 상태로 기사화 된다. 그런 칼럼이나 사설은 작성자의 성향에 따라 온도차가 있기는 하지만 역사교육 강화라는 결론으로 도달한다.

그런 결론이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교육 강화라는 명제는 큰 범죄만 일어나면 제시되는 '인성교육 강화'와 닮은꼴을 한다. 교육 강화를 외칠 때는 큰 보폭으로 움직이는 듯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점으로 회귀해 있는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강화만하면 무엇 하는가 내용이 달라져야지!

 

 

 



# '3·1절은 아이구아이구'로 외웠다!

 


학창시절에 필자는 역사를 좋아했지만 국사 시간을 기다리지는 않았다. 연표를 '달달달' 외우고, 인물을 암기하는 방식의 수업 시간이 지루했기 때문이다. 다른 과목들과 마찬가지로 국사도 그저 시험용 학습을 했을 뿐이다.

'3·1절은 아이구아이구(1919년)다'는 식의 암기 방식으로 삼일절 페이지에 '별표'를 했던 것이다. 1918년 11월 1차 세계대전이 종전이 됐고, 그에 따라 1919년 1월에 파리강화 회의가 개최됐는데 거기서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다는 부분에도 '밑줄 쫙'을 했다.

'별표'를 치고 '밑줄 쫙'을 하는 단편적인 암기는 시험 문제를 풀 때는 유용했었다. 하지만 그런 기계적인 암기는 필자의 머릿속도 기계적으로 만들었다. 인과관계가 명확한 각 사건들이 파편화되어 단절된 지식으로 머릿속에 저장됐기 때문이다. 분명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우리민족을 위한 정책이 아니었다. 여기서의 '민족자결'은 패전국 식민지에 속해 있던 민족들의 자결을 뜻하는 것으로 당시 일본은 승전국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수혜를 입지도 않은 민족자결주의를 두고 3·1운동의 중요한 원인으로 별표를 했던 것이다. 3.1운동과 민족자결주의 사이에 인과관계를 찾을 생각은 못하고 그저 기계적인 암기에만 열중했던 것이다. 

필자의 학습은 거기까지였다. 시험범위가 거기까지였고 필자가 배운 교과서에도 그 이상의 내용이 기술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3·1운동과 민족자결주의와의 간극을 그대로 남겨둔 채 교과서를 덮고 말았다. 하지만 당시에도 무언가 찜찜했는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3·1운동을 준비했던 사람들은 파리강화회의가 강대국들의 놀이터라는 것을 몰랐나? 너무 순진했던 거 아니야?'

 

 
▲ 소녀상 일본 대사관 앞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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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편적 지식 극복하기  

파편적 지식으로 필자의 머릿속에서 따로 놀고(?) 있었던 민족자결주의와 3·1운동의 간극이 명쾌하게 극복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교복을 벗고, 또한 군복(?)까지 벗고 나서야 그 연결고리를 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 속의 역사읽기>라는 딱딱한 서술 방식이 아닌, 스토리텔링식으로 기술된 역사책을 읽다가 그 연결고리를 알아냈던 것이다. 만약 스토리텔링식의 역사책을 읽지 못했다면 아직까지도 그 둘은 서로 따로 놀고 있을지도 모른다.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은 독일의 조차지였던, 청도(靑島) 맥주로 유명한 중국의 산동반도와 중부태평양의 남양군도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요구한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남아있는 패전국 독일의 식민지에 대한 침탈 야욕을 보인 것이다. 한마디로 민족자결주의와 어긋난 행위를 했던 것이다. 이런 일본의 행태는 중국과 태평양 지역에 관심을 보이던 미국의 이익과 정면으로 배치됐다.

3.1운동을 준비했던 지도자들은 이런 일본의 야욕과 미국의 이익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충돌할 것이라고 예견했던 것이다. 비록 같은 제국주의 국가였다 할지라도 미국의 팽창은 우리에게 이익을 전해줄 것이라고 판단했던 셈이다. 하지만 그런 판단은 일제 치하에 있던 우리의 운명을 미국이라는 또 다른 외세의 힘을 빌어 극복한다는 점에서 분명 한계가 명확했다. 어쨌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독립운동 진영에 큰 파동을 전해주었다.

 



 
▲ 단재 신채호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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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에서 교훈을 얻으려면... '기계적 지식' 극복해야

2017년부터 국사가 수능 필수 과목으로 지정됐고, 또한 이제부터는 초등학생들도 정식과목으로 배우게 됐다. 이런 것만 놓고 보면 우리는 분명 역사교육를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초중고생들은 필자가 국사책에 별표를 하며 기계적으로 암기를 했던 방식에서 탈피하여 능동적이고 종합적으로 한국사를 배우고 있을까?

수험 대비용으로 '달달달' 외운 파편적인 지식은 오히려 한국사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력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기계적인 암기는 시험의 공포가 사라지는 순간부터 급격히 뇌리에서 지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계적인 암기로 국사를 배웠던 사람들은 서두에 언급한 역사 퀴즈 여론조사에 걸려들어(?) 질책을 들을 가능성이 높다.  

신채호 선생이 강조한 역사 기억하기는 '3·1절은 아이구아이구(1919년)다'라는 식이 아닐 것이다. 우리 역사를 종합적 다각적으로 바라보고 거기서 교훈을 얻자는 게 단재 선생의 의도였을 것이다. 기계적인 암기로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을사조약'과 '을사늑약'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직시하지 못할 테니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에도 실립니다.

 

 

 

 

 

 

 

영화 <언브로큰>과 광복 70주년

 

15.01.16 18:46   최종 업데이트 15.01.16 18:46

 

 

 

 



"견딜 수 있으면, 해낼 수 있다."

일본군과의 치열한 전투, 태평양에서의 47일간의 조난, 그 조난 생활보다 더 혹독했던 포로수용소 생활 등등... 영화 <언브로큰(unbroken)>의 실제 인물인 루이 잠페리니가 겪은 고난들은 저 격언으로 버티기에는 너무 강도가 심한 것들이었다.

그런 고난들은 끊임없이 저승사자처럼 앞에 나타나 주인공 뒤편에 죽음의 그림자를 길게 늘여 놓았다. 전투 중에는 일본의 제로센 전투기가 저승사자였고, 태평양의 망망대해에서는 상어떼들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그런 저승사자 중에서 가장 악랄했던 건, 일명 '새'라고 불렸던 포로수용소장 와타나베였다. 저승사자들은 주인공의 명줄을 조여 왔다. 그런 생지옥과 같은 상황이 계속 펼쳐지니, 필자의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어떤 수녀님 한 분이 연신 이런 말을 내뱉었다.

"세상에... 세상에..."

필자는 침묵을 지켰지만, 마음 만은 똑같았다. 신에 가호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주인공에게 크게 감정이입이 됐던 것이다. 


 
▲ 언브르큰 포스터
ⓒ 언브로큰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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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지옥을 견딜 수 있게 해 준 격언

"견딜 수 있으면, 해낼 수 있다"는 청년 멘토 프로그램에 잘 어울릴 것 같은 좀 '말랑말랑'한 격언이다. 하지만 그 격언은 주인공 루이 잠페리니에게 숨을 불어넣어줬고, 그가 역경을 극복할 수 있게 큰 버팀목이 되었다. 작은 말 한 마디가 생지옥을 벗어나게 하고, 저승사자들을 따돌리게 만든 원동력이 됐던 것이다. 

사실 저 격언은 요한계시록에 있는 문장인데, 루이에게 그의 형이 말한 것이다. 루이는 우유통에다 술을 숨겨 먹을 정도로 삐딱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러던 중 루이의 형은 동생에게 달리기에 대한 재능을 발견하고 그에게 육상을 권하게 된다. 하지만 반항아인 그가 순순히 달리기에 맛을 들였겠는가? 형은 투정을 부리던 루이에게 일침을 가하며 저 격언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 격언을 밑거름 삼아 루이는 열심히 달렸고, 결국 미국 육상 대표로까지 선발된다. 맛보기(?)로 참가한 1936년 독일 베를린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큰 두각을 나타냈던 루이는 다음 올림픽을 기약한다. 다음 올림픽은 1940년 도쿄 올림픽이었다. 물론 도쿄 올림픽은 2차 대전으로 인해 개최되지 못했다.

루이에게 도쿄 올림픽은 꿈의 무대였다. 하지만 그 꿈은 아주 비극적으로 현실화가 된다. 국가대표로 올림픽 주경기장에 선 것이 아니라 도쿄 외곽에 있는 포로수용소로 끌려왔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루이는 무려 850일 동안 총 3번의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된다. 콰절런 섬(먀샬제도 인근)의 야전수용소에서 시작한 생활은 오모리(도쿄 인근)를 거쳐 역사상 최악이라는 나오에츠 수용소에서 절정을 이루게 된다.

나오에츠는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은 수용소였는데 이곳에서 포로들은 석탄 운반 노역에 처하게 된다. 작업을 하다 목숨을 잃을 정도로 포로들은 엄청나게 혹사를 당한다. 한마디로 그곳은 죽음의 수용소였던 것이다.  

 

 
▲ 와타나베 와타나베 역할을 한 배우는 록밴드 출신인 미야비이다. <언브로큰>에 대해 심기가 불편했던 일본 우익들은 미야비에게도 비난의 화살을 쏘아댔다. 그가 재일동포 3세라는 것을 트집잡았던 것이다.
ⓒ 언브로큰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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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우익들을 불편하게 한 포로수용소 장면

주인공이 석탄 노역에 시달린 북방의 수용소 장면을 바라보고 있자니, 1944년에 사할린으로 징용된 필자의 외할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강제로 사할린 탄광으로 끌려간 외조부께서는 하루 12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리셨다고 한다. 죽도록 고생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 상황을 돌이키시는 것이 괴로우셨는지, 외조부께서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말씀을 아꼈다.

외조부께서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말을 아끼셨지만 <언브로큰>에서는 순화시켜서 이야기를 전개시켰다. 원작에서는 포로들이 생체실험에 동원되기도 했고, 심지어 인육까지 먹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감독인 안젤리나 졸리는 그런 부분을 전혀 담아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순화된 내용조차도 일본 우익들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언브로큰>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회자되는 부분은 이 포로수용소 장면이다. 이미 많은 내외신 언론보도에도 언급됐듯이 일본 우익들은 이 포로수용소 장면을 무척 불편해 한다. 포로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강제노역 부분을 지우고 싶었을 것이다. 도쿄수용소부터 저승사자처럼 굴었던 와타나베의 악독함을 완전 부정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뿐이겠는가? 사실 그들이 부정하는 것들이 어디 한 두 가지인가? 2014년 9월에 있은 고노 담화 흔들기에는 아베 신조 총리가 직접 나서기까지 했다. 만주에서 생체실험을 벌였던 731부대는 아예 존재자체도 부정하고 있다. 외조부가 당한 강제 징용이나 근로정신대에 대해서도 한일청구권 소멸을 들어 그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 안젤리나 졸리 <언브로큰>의 감독.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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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 수 있으면, 해낼 수 있다!

주인공 루이 잠페리니가 더욱더 칭송받을 수 있는 건 그가 조국을 배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라디오 방송에 나가 써준 대로 읽기만 하면, 안락한 삶을 제공한다는 유혹을 뿌리치고 다시 혹독한 포로수용소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렇게 루이는 저승사자들의 위협과 안락한 삶의 유혹을 참아냈고 끝까지 견뎌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게 된다. 비록 도쿄가 아닌 나가노 동계올림픽이었지만 그는 성화 봉송주자로 나서는 영광을 누린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필자는 "견딜 수 있으면, 해낼 수 있다"는 격언을 입에서 중얼거렸다. 영화관 밖에 나와서는 새삼스럽게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소중히 여겼고, 또한 한 끼 식사도 감사히 먹었다. 물론 그런 작은 것들에 대한 감사를 언제까지 이어갈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저 격언이 벌써부터 필자의 입에 감긴다는 것이다. 덕분에 좋은 격언을 입버릇으로 삼게 됐다.

글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집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다. 올해는 2차 대전 종전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더불어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런데 세월만 흘렀지 일본 우익들의 사고는 아직도 욱일승천기가 펄럭이는 그 시절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그래서 한일관계도 아직 그 자리를 계속 맴도는 것 같다. 일본의 과거사 부정이 계속된다면 70주년이 되든, 100주년이 나아지는 건 하나도 없을 것이다.

한편 일본에게 비판의 화살을 날리듯 우리 자신에게도 그 화살을 날려야 할 것이다. 왜? 광복된 지 70년이 넘도록 아직 친일매국노 청산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학사 역사교과서 파동과 같은 일도 못 처리하면서 일본에 과거사 청산을 요구하는 이중적인 행보도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일본 출신 '와타나베'에 대한 청산을 요구하려면 우리 안에 있는 조선 출신 '와타나베'에 대한 청산이 우선이다. 제대로 청산해야 일본 우익들에게 목소리를 높일 수 있지 않겠나.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영화 <호빗>을 통해 톨킨이 말 하려고 했던 것!

 

판타지를 통해 본 인간 근원의 문제

 

15.01.03 15:07 최종 업데이트 15.01.03 15:07

 

 

 

 

 

 

 

 

 

 

 

* 이 기사에는 영화의 줄거리나 주요 장면이 포함돼 있습니다.

 

 



 
▲ 호빗 영화 <호빗> 포스터
ⓒ 호빗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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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네요. 다른 건 모르겠는데 그 영화는 좀... 그거 판타지 영화 아니에요. 애들 보는 거요?"


<JSA 공동경비구역>, <박하사탕>, <7월 4일생> 등등 필자가 그런 영화들을 감명 깊게 봤다고 하면 상대방도 흔쾌히 수긍한다. 하지만 <반지의 제왕>에 이르면 꼭 부연 설명이 필요했다.

"원작이 워낙 탄탄해요. J.J. 톨킨 박사가 원작자인데 이 사람이 북유럽 신화에 아주 능통하거든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영화 자체가 하나의 잘 짜인 신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신화라는 텍스트에 인간의 욕망을 담아냈으니 하나의 대서사시가 되는 것이죠. 앞으로 이렇게 기승전결이 잘 떨어지는 판타지영화는 나오기 힘들 겁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부연 설명을 했다는 건, 필자와 상대방의 시각이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판타지 영화에 대해서 높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애들이 보는 영화라 취급하며 낮잡아 보기까지 한다. 리얼리티가 강조될수록 후한 별점을 주는 풍토에서 요정이 활을 쏘고 용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판타지물은 그저 아이들의 영역으로만 자리매김 될 뿐이다.

 

 

 

 
▲ 호빗 엘프족 여전사 타우리엘
ⓒ 호빗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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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통해 인간의 근원을 들쳐보다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시각으로 보자면 백색의 마법사 간달프의 주술은 로또 1등만큼이나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또한 중간계를 짓누르는 악의 화신 사우론의 눈빛보다 옆에 있는 김 팀장의 시선이 더 싸늘해 보인다. 그래서 판타지 영화에서는 <레미제라블>과 같은 카타르시스를 아예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판타지를, '눈 뜨고 코 베어 가는' 냉혹한 현실을 빗대어보는 하나의 원초적 도구로 바라본다. 철천지원수인 엘프족의 레골라스와 난쟁이족의 김리가 당면한 목적을 위해 오월동주(吳越同舟)가 되는 모습, 더 큰 욕심 때문에 난쟁이 왕 소린이 생사고락을 함께한 부하들을 의심하는 모습 등을 보고 있자면, 인간 내면의 깊숙한 곳을 들쳐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요정족, 난쟁이족 같은 비현실적인 종족들이 오히려 인간의 근원적인 심성을 더 명징하게 표출했다고 판단한다.

SF영화와 달리 판타지영화는 물리적으로 현실화 될 수 없는 것들을 담아 놓았다. 기술이 발전하면 <스타워즈>에 등장했던 광선검 같은 무기들도 '실전배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반지의 제왕>에 등장한 엘프족이나 호빗들은 스크린 밖으로 나올 수 없다. 대신 그들은 탐욕과 무소유, 신뢰와 배신, 전쟁과 평화 같은 우리 현실세계에서 빈번하게 회자되는 개념들을 스크린에 뿌려 놓는다.

 

 

 

 

 

 

 

 

 

 

 

▲ 제복을 입은 톨킨 1차대전에 참전했던 톨킨.

풀네임은 John Ronald Reuel Tolkien 이다.  

위키피다 출전. 

 

 

 

 

 

 

 

물질문명을 지독하게 혐오했던 톨킨


원작자 톨킨은 1차대전 중 가장 치열한 전투 중에 하나였던 솜 강 전투에 초급 장교로 참전했다. 그 전투에서 친구를 잃은 톨킨은 전쟁, 더 나아가 세계대전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던 현대문명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감을 갖게 된다. 그래서인지 그는 이후 현대문명과 과학기술에서 멀찌감치 자신을 떼어 놓았다.

문헌학자였던 톨킨은 각 나라들의 언어 변천과정을 연구했는데 각 언어들에 내포되어 있는 신화적인 요소들에 매료됐다. 기계문명의 빈자리를 고대의 신화가 채웠던 셈이다.

그렇게 신화적인 상상력으로 풀어낸 <호빗>을 톨킨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태어난 지 3년 만에 아버지를 여윈 톨킨은, 그 자신이 평생 가질 수 없었던 부성애를 자식들의 침대 곁에서 이야기로 풀어낸 것이다. 그런 아빠의 이야기를 듣고 잠이 들었던 아이들은 꿈에서 엘프 혹은 용을 만났을지 모른다. 

 

 

 

 


<호빗 3: 다섯 군대의 전투>

2014년 12월에 개봉된 <호빗 3: 다섯 군대의 전투>는 호빗 시리즈의 최종판이다. 자신들의 왕국이었던 에르보르를 탈환하기 위해 난쟁이의 왕 소린은 원정대를 꾸린다.

원정대에는 호빗 종족의 빌보 배긴스도 포함되는데 빌보의 역할은 스마우그라는 용에게서 난쟁이들의 최고의 보물인 '아르겐스톤'을 훔쳐 오는 것이었다. 험준한 산 아래에 자리 잡은 에르보르는 원래 난쟁이들이 만든 요새였지만, 사악한 스마우그라는 용이 그곳을 파괴하고 수많은 금은보화 속에서 '꽈리'를 틀게 된다.  

결국 스마우그는 죽고, 난쟁이들은 꿈에도 그리던 잃어버린 땅을 되찾게 됐다. 소린이 자신의 왕국을 되찾은 것이다. 하지만 용이 죽었다고 끝이 아니었다. 악에 의해 이루어진 균형이, 그 악이 제거됐다고 바로 선의 의한 균형으로 넘어가지는 않았던 것이다. 후세인이 제거되자 정파주의에 의해 이리저리 찢기고, 결국에는 IS(이슬람국가)가 꽈리를 튼 이라크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에르보르의 전략적 가치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황금을 차지하기 위해 사방에서 군대들이 진격해 오기 시작했다. 그 군대들은 오크족이나 괴수족 같은 어둠의 세력뿐만이 아니었다. 엘프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 호빗 영화 <호빗>
ⓒ 호빗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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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쳐오고 있었지만, 난쟁이 왕 소린은 전투준비에 박차를 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릇된 행동을 하게 된다. 최고의 보물이라는 아르켄스톤을 부하 중에 한 명이 미리 빼돌렸다고 의심을 했던 것이다. '황금의 저주'로 인해 눈이 멀게 된 것이다. 탐욕 때문에 생사고락을 함께 한 부하들을 다 도둑놈으로 몰아붙인 것이다.

<반지의 제왕 3>편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있다. 반지를 파괴하는 임무를 지닌 프로도가 절대반지의 힘에 눈이 멀어 자신의 임무를 망각하고 스스로 반지의 주인으로 선언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임무 수행을 위해 여러번 죽을 고비를 넘겼던 프로도였지만 정작 마지막 순간에는 반지를 용암에 던지지 못하고 주인 행세를 하려 든 것이다.

이 부분에서 원작자인 톨킨 박사는 탐욕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유도했는지 모른다. 채워지지 않는 무한한 욕구로 인해 인간이 궁극적으로 어떤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지를 일깨워주었다고나 할까? 난쟁이였던 소린은 피붙이와 같은 자신의 부하와 친구들에게 불신을 얻게 됐고, 호빗인 프로도는 절대반지를 끼었던 검지손가락 한마디를 잃게 됐다. 그것이 바로 현대 물질문명을 혐오했던 톨킨이 판타지를 통해 우리 인간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대망의 2015년이 시작됐다. 유난히 사건과 사고가 많았던 지난 2014년과 달리 올해는 좀 더 달라질 수 있을까? 좀 더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러려면 인간들이 탐욕에 눈이 멀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물질에서 좀 더 자유로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이런 언급은 '판타지'적이라고 욕을 먹을지 모른다.

"장그래로 대변되는 비정규직들이 넘쳐나고, 최저 시급의 굴레에 사로잡힌 알바생들 좀 봐! 탐욕에서 자유로워지라니, 탐욕을 부릴게 있어야 탐욕을 부리지!"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핼러윈의 기원은 알고 핼러윈 데이를 보내시나?

 

켈트 신화 속 나무 숭배... 산신령 섬기는 문화와 닮았다

 

14.11.03 11:53  최종 업데이트 14.11.03 13:52

 

 

 

 

 

 

 
핼러윈 데이 촛불. 호박을 파서 만든 잭-오-랜턴이 눈에 띈다.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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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핼러윈의 유래는 알고 있냐? 그런 복장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냐?"


필자도 처음에는 손가락질을 했다. 우리 명절도 아닌 핼러윈(할로윈의 표준어 규정)을 챙기려는 일부 사람들의 모습에 냉소를 보냈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까지 '핼러윈 특수'에 노출되어 있는 모습에 혀를 차며 질타했다. 그러면서 이런 말도 잊지 않았다.

"핼러윈 챙길 정신으로 우리 풍습이나 알고 챙겨라!"

이런 반응은 포털에 걸린 핼러윈 관련 기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반응이었다. 대다수의 누리꾼들은 국적 불명의 서구 풍습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반론도 있다. 국제화 시대에 맞춰 "하루 정도는 괴기스런 복장도 해보고 재미삼아 놀 수도 있지 않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반론에 "우리 풍습이나 알고 챙겨라"라는 재반박이 이어졌다.

 

 

 

켈트 신화와 드루이드교의 관계


핼러윈은 켈트족의 명절인 삼하인(Samhain) 축제에서 유래됐다. 켈트족은 앵글로족과 색슨족에 의해 브리튼 섬의 노른자에서 쫓겨나 궁벽한 웨일즈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 터를 잡았다. 켈트족은 앵글로-색슨족에 의해 브리튼의 핵심 지역에서 쫓겨난 것에 대한 원망과 서러움을 갖고 있다. 부결됐기는 하나, 지난 9월 18일에 있었던 스코틀랜드의 분리 독립 선거에서 보이듯 이들의 잉글랜드에 대한 악감정은 여전히 뿌리가 깊다.

하지만 켈트족이 맹주 노릇을 하기 전에도 브리튼 섬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넘어온 사람들로 추정된다. 즉, 브리튼 섬의 원주민은 켈트족이 아니었다. 사실 켈트족은 갈리아 지방(지금의 벨기에 및 프랑스 일대)에서 도버 해협을 거쳐 브리튼에 도착했다. 따지고 보면 이들도 이주민이었다.

켈트족은 드루이드교라는 고유의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다신을 섬기는 드루이드교는 애니미즘 요소가 강했는데 특히 숲이나 나무와 관련된 여러 징표들에서 신화적 상상력으로 표출됐다. 오랫동안 숲에서 사냥을 하며 연명했던 켈트족이었기에 숲과 나무는 삶의 터전이자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정령'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와 같은 켈트족의 신화는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으로 <반지의 제왕>, <호빗>의 작가로 유명한 J. R. R. 톨킨 박사가 있다. <반지의 제왕>과 <호빗>도 켈트 신화가 밑바탕이 된 작품이다. 죽은 자는 물론 요정이 나오고, 떡갈나무의 정령이 페이지 곳곳을 장식한다.

 

 

 

 


 
▲ 계룡산 산신제 계룡산 산신제의 모습, 켈트족도 이전에는 숲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기 때문에 숲과 나무에 정령이 있다고 믿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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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의 결속력을 높인 핼러윈

 


핼러윈은 이처럼 풍부한 애니미즘 요소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켈트족의 새해 첫날은 11월 1일이었다. 켈트족은 겨울이 시작되는 11월을 새해의 시작으로 본 것이다. 우리나라의 음력이 그레고리력(양력)과 같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켈트족은 사람이 죽어도 그 영혼은 1년 동안 다른 사람의 몸속에 접신해 있다 저승으로 간다고 믿었다. 특히 한 해의 마지막 날인 10월 31일을 접신할 수 있는 절호의 적기로 봤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날만큼은 온갖 괴기스러운 분장을 했다. 영혼들이 그런 분장 때문에 접신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켈트족은 로마에 의해 복속됐다. 이후 교황 보니파체 4세는 11월 1일을 '모든 성인의 날(All Hallow Day)로 선포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성인(Hallow)의 전야(Eve)로 자리매김되었고, 이후 핼러윈(Halloween)으로 명칭이 바뀌어 오늘날까지 이르게 됐다.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왜 켈트족의 영혼들은 10월 31일에 일제히 접신 대상자를 찾아 나설까. 왜 미리미리 찾아 나서지 않았나. 그렇다. 핼러윈도 인간이 만든 풍습이다. 애니미즘적 상상력이 풍부한 켈트족이 만든 하나의 명절이었다. 묵은해를 털어버리고 활기차게 새해를 맞이하자는 의미에서 만든 풍습이다.

한편 핼러윈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은 "Trick or Treat(과자 안주면 장난칠 거야)"이다. 큰 호박을 파서 만든 잭-오-랜턴(Jack-O'-Lantern)을 쓴 아이들이 남의 집 문을 두들기며 이런 말을 한다. 중세시대에는 다가오는 겨울을 맞아 서로 먹을 것을 나누며 공동체적 결속을 다져보자는 의미로 저 말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핼러윈은 중세시대 공동체의 구휼 장치로서 작동했다. 

 

 

 

 

 

 

계룡산 산신령과 켈트 신화의 유사성


 
▲ 계룡산 중악단 계룡산 중악단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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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원사 계룡산 신원사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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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필자는 이렇게 언급했다.


"핼러윈 챙길 정신으로 우리 풍습이나 알고 챙겨라!"

그럼 그 말대로 우리의 풍습에 대해서 알아봐야 할 것이다. 단오나 정월대보름처럼 그 의미가 다소 희미해진 명절을 소개하는 것도 좋겠지만, 개인적으로 계룡산 산신제를 소개하고 싶다.

켈트족의 드루이드교가 삶의 터전을 제공했던 숲을 신봉했듯이 우리 선인들은 태초부터 산을 영험하게 여겼다. 산은 생명의 근원인 물을 흘려보냈고, 각종 과실과 약초가 자라나는 보고였다. 또한 산짐승들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양공급원이 됐다. 이렇듯 산은 많은 것을 품고, 많은 것을 사람들에게 내주었다. 그랬기에 우리 선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산을 신성시했고, 산의 주인인 산신령에게 제례를 올렸다.

유교를 앞세웠던 조선시대에도 산신제의 위엄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화됐다. 묘향산, 계룡산, 지리산에 각각 상악단, 중악단, 남악단을 세워 산신제를 올렸다. 현재는 상악단과 남악단은 사라지고, 중악단만 남아 있다. 계룡산 신원사에 위치한 중악단은 조정의 명에 의해서 지어진 건물이라서 그런지 여타 다른 사원과는 달리 궁궐 양식이 적용됐다. 매년 4월에는 이 중악단을 비롯한 계룡산 일대에서 산신제가 봉행되어 산악신앙의 뜻을 기리고 있다.

 

 



 

 

 
▲ 신원사 중악단 삼존불이 놓일 자리에 산신령이 모셔진 신원사 중악단.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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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에 대해 제대로 눈길을 준 적이 있었는가?


앞으로 핼러윈 축제의 '시장'은 더욱더 커질 듯싶다. 외국 유학을 경험한 사람뿐만 아니라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도 늘었다. 영어 유치원이 확장되고 있고, 인기 연예인의 분장도 지속된다. 당분간 핼러윈의 열기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핼러윈 특수를 노리는 자본도 더욱더 팽창할 것이다. 마치 '밸런타인 데이'처럼, 이제 핼러윈도 10월의 마지막 밤을 점점 더 많이 채워나갈지 모른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무분별하게 서구문화를 직수입한다고 손가락질할 것인가. 질책을 한다고 그들이 꿈쩍이나 하겠나. 무엇보다 그들을 질타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문화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지, 스스로 자문해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싶다.

"핼러윈을 떠나서 우리는 우리 풍습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가? 그들을 욕하기 전에 우리 고유의 문화에 대해 제대로 눈길을 준 적이 있었나? 주지 못했다면 이제라도 눈길을 주자. 우리문화 중에도 켈트 신화 뺨칠 정도로 멋지고 재미난 것들이 많으니까!"

 



 

 

 
▲ 동자승 인형 마치 숲 속에서 불경을 보는 듯한 모습이다. 신원사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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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한겨레21


 

한겨레 이종근 기자

 

 


 

 

[한겨레21]
[레디 액션!]

뭐 서평을 쓰자고? 세상살이에 바빠 책 한 권 읽기도 힘든 마당에 책에 대한 평가를 해보자고? 이거 너무 무리한 ‘레디 액션’이 아닌가. 맞는 말이다. 독서다운 독서를 하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책읽기를 넘어 서평을 써보자는 건 너무 무리한 요구일 수도 있다.

온라인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책은 부차적인 정보취득원일지 모른다. 간단한 키워드 검색만으로도 평생 섭렵할 수 없는 자료가 쏟아져나오는데 해당 정보를 찾으려 굳이 책장부터 뒤적일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손에 ‘수갑’처럼 콱 쥔 스마트폰은 또 어떤가?

하지만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 어지러운 온라인 지식을 걸러내고, 심도 있는 정보를 구체화하는 데 아직 책보다 더 뛰어난 지식의 도구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읽는 것이 좋을까? 앞서도 언급했듯이 서평을 쓰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서평을 쓰면 적극적으로 책읽기를 하게 된다. 서평을 쓰기 위해서라도 밑줄을 긋거나 메모하는 경우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능동적인 독서 행위를 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렇게 능동적으로 독서에 임하다보면 책에 더 집중할뿐더러 지은이가 말하는 바를 잘 깨닫게 된다.

 

 

 

 

 

 

 


 

독자가 천재가 아닌 이상, 아무리 재밌게 읽은 책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머릿속에서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책장을 덮을 때부터 한줄 한줄 사라지다 나중에는 자신이 그 책을 읽었는지 모를 정도로 가물가물해진다. 하지만 서평을 쓰다보면 구체적인 문장은 사라질지언정 저자가 말하는 큰 틀은 머릿속에 남아 있게 된다. 그러고 보면 서평쓰기는 바다에 던지는 그물과도 같다. 작은 물고기는 놓치더라도 큰 녀석만큼은 잡아둘 수 있기 때문이다.


서평쓰기에는 특별한 격식이 필요 없다. 전문적인 평론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손이 가는 대로 작성하면 된다. 예를 들어 책 내용 중에 중점적으로 드러내고 싶은 부분을 기술하고, 왜 그 부분을 부각시켰는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면 된다.

잘 작성된 서평을 자신의 블로그나 페이스북에 게재해보자. 그러면 지식나눔이 되는 것이다. 그 서평을 통해 네티즌과 알차게 소통할 수도 있다. 누가 아는가? 서평을 열심히 쓰다보면 인터넷 서평꾼 ‘로쟈’처럼 되어 이름을 날릴 수도 있을지. 물론 그렇게 되려면 엄청난 내공이 필요하지만 말이야.

 

곽동운 독자


*‘레디 액션!’은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소소한 제안을 하는 코너입니다. 독자 여러분에게도 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제안하고 싶은 ‘액션’을 원고지 6~7장 분량으로 써서 han21@hani.co.kr로 보내주세요. 채택되신 분께는 소정의 원고료를 드립니다. 레디 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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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작가도 집필에 참여한 <가는 곳마다 추억 꾸러미 보는 곳마다 이야기꽃> 이 정식으로 발간 됐네요. <가는 곳마다...>는 전남 지역의 여행 명소들을 소개한 여행책자입니다. <가는 곳마다...>는 전남도에서 발간을 했는데, 지자체에서 발간한 가이드북 형식의 여행책자치고는 상당히 완성도가 높아 보입니다. 해당 여행지에 대해 단순 나열식의 소개가 아닌 스토리텔링 위주의 동선 구성이 두드러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쉬운 점도 눈에 띄지만...

 

곽작가는 강진, 해남에 있는, 삼남길에 녹아 있는 역사트레킹을 위주로 이야기를 풀어냈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보도자료문에는 제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그래서 서운하다는...ㅋㅋ

<가는 곳마다...>는 공저지만 이제 곧 저의 단독 저술도 나올 수 있겠지요? 그때는 저도 출판기념회와 출판기념 역사트레킹을 동시에 진행해 보고 싶네요! 그러면 정말 재미나겠네요~!  

 

 

 

 

 

 

 

남도여행기 '가는 곳 마다 추억꾸러미' 발간

뉴시스 | 맹대환 | 입력 2014.04.14 14:10

【무안=뉴시스】맹대환 기자 = 전남도는 여행작가와 일반인들이 남도의 매력을 표현한 여행기 '가는 곳마다 추억꾸러미, 보는 것마다 이야기꽃'을 발간했다고 14일 밝혔다.

이번 책자 발간에는 여행작가 17명, 블로거 10명, 일반인 22명 등 총 49명이 참여했으며 역사, 생태, 슬로시티, 섬, 음식 등 남도만의 고유한 멋과 풍광을 이야기 형태로 30편을 수록했다.

 

 

여행작가 양영훈이 추천하는 '꽃섬 하화도'는 봄꽃이 하늘거리는 해안길을 따라 파도소리를 들으며 섬을 한 바퀴 도는 순환형 트래킹코스를 돌고 난 후 갯돌해변에서 캠핑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여행작가 홍순율이 걸었던 '다산초당 가는 길'은 두충나무 숲길을 지나 나무뿌리들이 드러난 이채로운 길로 이어지는데 그 길을 따라 초당까지 걷는 길은 이 길이 유배의 길이었음을 잊을 만큼 솔향이 가득하다.

여기에 여행객들의 남도여행 체험이 녹아 있는 포토에세이 22편, 블로거들의 남도사랑 이야기 10편이 실려 있다.

또 남도의 감동 여행기를 묶어놓은 '이야기땅 남도에 가고 싶네' 독서 감상문 공모전 입상작 7편도 추가로 실렸다.

김명원 전남도 관광정책과장은 "이 책자는 여행 전문작가에서부터 일반인의 여행기를 한데 모은 책으로 여행 정보뿐만 아니라 읽을수록 정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며 "따스하고 포근한 남도 이야기를 따라 가족끼리, 친구끼리 추억여행을 시작해 보기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이 이야기책은 남도여행길잡이 누리집(www.namdokorea.com)에서 누구나 파일로 내려받을 수 있고 전남관광정보센터(061-285-9045)를 통해 우편으로 받아볼 수 있다.

mdhnews@newsis.com

 

 

 

 

 

 

 

 

20년도 넘은 잡지책...가, 이젠 가란 말야!

아끼던 <월간항공> 버리던 날

 

14.04.05 15:48l최종 업데이트 14.04.05 15:48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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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항공 20년도 더 지난 비행기 잡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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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헤어질 때가 됐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20년이란 시간을 함께했으니 이제는 떠나보낼 때가 된 것이다. 헤어질 때는 냉정해지자.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그런 독한 놈이 되는 거야!

"이제 넌 나한테 필요 없어. 가란 말야! 떠나버리라고!!!"

 

 


책벌레들의 커다란 고통: 책 버리기

예전에 지인분이 쓰신, 책과 관련된 에세이를 본 적이 있다. 책과 관련된 에세이라, 얼핏 '독서 예찬'과 같은 통상적인 주제라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책장에 가득한 책들 중에 어느 것을 버리고, 어느 것을 남겨둘지에 대한 단상들을 풀어낸 글이었다.

책벌레들에게 책을 버리는 일은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책을 쌓아둘 곳은 한정되어 있기에 어쩔 수없이 책을 버려야 하는 경우가 있다. 모든 이들을 다 만족시킬 수가 없듯이 모든 것들을 다 담아둘 수도 없는 법이니까!

그 분 말에 의하면 잡지책이나 소설류들을 버리는 데는 큰 고민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전공서적이나 학술서적 코너에 들어서면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것이다. 처분을 해야겠는데 어느 것을 골라야 할지 고민이라는 것이다.

한편 에세이들 중에서도 저자 사인이 적혀 있는 것들은 쉽게 처분 대상에 올리지 못해 곤혹스럽다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사실 그 지인 분은 대학교수다. 그래서 그 분의 서재는 일반적인 독서인들의 서재와는 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일반 독서인이든 대학교수든 책을 버리는 순서는 비슷해 보인다. 처분 일순위로 잡지가 지목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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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항공 오른쪽은 1991년 5월호다. 노태우 정권 때 진행된, KFP 사업에 선정됐던 F-16에 대한 사진을 메인으로 걸어놓았다. F-15K를 넘어 이제 F-35가 우리공군에 차세대 전투기로 쓰일 예정이라 사진이 무척 낯설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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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일순위로 지목된 잡지를 필자는 20년이 넘게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최근 10년 동안은 단 한 번도 펴보지 않고 그냥 그대로 한쪽 구석에 잘 모셔두었다. 그러다보니 10년치 먼지가 그대로 쌓이게 됐고 그 뒷면은 바퀴벌레 등의 좋은 안식처가 됐다.

 



'비행'소년의 욕구를 받아주었던 <월간항공>

그 잡지들은 <한겨레21>이나 <창작과 비평>같은 유명한 시사, 문예잡지가 아니었다. <월간항공>이라는 비행기 잡지였다. <월간항공>은 노태우 정권 시절인 1989년에 창간된 잡지로 우주항공 분야의 전문지로 탄생했다. 지금이야 자동차, 아웃도어, 뷰티, IT 등등 각양각색 다양한 분야의 잡지가 발간되어 세세한 정보들을 독자들에게 실어 나르고 있지만 1989년 당시에는 그렇지가 못했다.

1987년 6월 항쟁이 지난 지 겨우 2년 밖에 흐르지 않은 시점이라 그랬는지 아직 세상은 다양한 욕구를 담아낼 그릇들이 준비되지 않았었다. 영화잡지인 <씨네21>이 1995년에 창간됐듯 사회구성원의 다양한 욕망들이 본격적으로 잡지형식의 매체로 투영되기 시작한 건 1990년대 이후부터였다.

그런 의미로 <월간항공>의 등장은 상당히 신선했다. 당시는 인천공항도 없었고, 비행기 여행도 일반적이지 않은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멋진 비행기 사진이 걸린 <월간항공>를 보고 있던 필자의 마음은 크게 요동쳤다. 이미 옆구리에서 날개가 뻗어져 나와 하늘을 날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필자도 한 때는 '비행' 소년이었던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왔던 이카로스처럼 크게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날고 싶었던 '비행'소년이었다. 

그런 '비행' 소년의 욕구를 <월간항공>이라는 잡지가 채워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욕구'들이 쉽게 채워지지는 않았다. 잡지 내용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필자의 지식으로는 <월간항공>의 전문 용어들을 이해하기가 너무나 버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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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항공 20년도 넘게 집에 있다보니 먼지도 많이 쌓이고, 때도 많이 탔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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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도 문제였다. 하긴 당시 고등학생이 돈이 있으면 얼마나 있었겠는가. 그래서 필자는 헌책방 투어에 나섰다. 어차피 속보성을 획득하려고 비행기 잡지를 구매했던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 당시 헌책방에서 비행기 잡지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주인아저씨가 '그런 잡지도 있냐?'고 반문할 때도 많았다. 어렵게 구한 잡지들도 부실한 경우가 많았다. 한 쪽 면이 찢어져 있거나 라면국물이 묻어 있는 것들도 있었다. 심지어 곰팡이까지 피어 있는 것들도 있었다.

 

 



비행기가 있던 자리

그렇게 어렵게 사 모으고, 애지중지하게 모셔두었던 그 비행기 잡지들을 얼마 전 떠나보냈던 것이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잡지들은 이미 정보성이 사라진 지 오래됐다. 현재 동북아 허브 공항으로 우뚝 선, 인천공항의 착공식을 소개하고 있는 20년 전의 잡지라면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다. 또한 '차세대 전투기로 선정된 F-16(노태우 정권 때 있은 KFP 차세대 전투기 사업 기종으로 당시 F-16이 선정됨)'에 대한 기사를 담은 잡지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 F-15K를 넘어 F-35가 우리 공군에 도입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한편 그 잡지들이 자리 잡고 있어 새로운 책들이 들어올 공간이 마땅치 않아 곤혹스러기도 했다. 공간이 한정되어 있기에 새롭게 들어올 책들은 줄을 서야 했기 때문이다.

1차로 몇 권의 <월간항공>을 버렸던 날, 20년 전의 일들이 필자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서울에 있는 헌책방들을 찾아 동분서주 하며 분주히 발걸음을 옮겼던 일, 헌책들의 뭉치 속에 파묻힌 잡지를 끄집어내다 책탑을 쓰러뜨려 주인장에게 엄청 혼났던 일 등등. 그런 아련한 추억이 떠올라 순간 마음이 약해지기도 했지만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과감하게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렸다.

"이제 넌 나한테 필요 없어. 가란 말야. 떠나버리라고! 20년도 넘게 있었으면 이제 갈 때가 됐잖아!"

너무 태양 가까이 날아올라 날개가 녹아내린 이카로스처럼 필자의 마음속에서 펄럭이던 날개도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굿바이 비행소년!'

 

 

 

 

*관촉사 은진미륵: 비행기 잡지가 떠난 자리에는 역사책들과 미학책들이 그 자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역사트레킹 마스터를 하려면 방대한 역사책들과 미학책들을 '마스터'해야 하기 때문이다.

2013년 4월에 찍은 사진이다.

 

 

 


그렇게 비행기 잡지가 있던 공간에는 이제 새로운 것들이 들어와 그 곳을 메우고 있다. 역사책과 미학책들이 빠르게 그 자리를 치고 들어왔던 것이다. 마치 질량보존의 법칙처럼 '비행기'가 빠진 공간에 '정약용 선생'과 '마애석불'이 떡 하고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렇게 새롭게 자리 잡은 역사책과 미학책들을 자양분 삼아 필자는 역사트레킹을 진행한다. 한마디로 '비행기가 있던 자리'에 '역사트레킹'이 들어온 것이다.

봄날이라서 그런가? 요즘은 새롭게 다시 날개가 돋아나는 것 같다. 아름다운 봄꽃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이미 마음은 산과 들에 가 있다.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읊조리며 트레킹을 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날개가 한 번 꺾여도 너무 슬퍼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왜? 새로운 날개가 생기니까!

*추신: 최근 발생한 무인기에 의한 청와대 촬영 사건으로 인해 정국이 혼란스럽다. 청와대의 방공망이 뚫렸다고 여론이 매섭게 질책을 한다. 그런데 정부가 정국 수습용으로 꺼내든 카드가 무척 당혹스럽다. 바로 모형비행기 동호회에 대한 규제이기 때문이다. 뚱딴지같이 엉뚱한 곳에 불똥이 튄 것이다.

북한에서 '인간어뢰'나 '로봇물고기'로 우리 해역을 침범을 한다면 해녀나 스쿠버 다이버들에 대해서 규제를 내릴 텐가? 무인기에 의한 방공망 침범이 있다면 무인기를 무력화시키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우선이다. 뚱딴지같이 애꿎은 동호회에 대해 규제의 덫을 놓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박 대통령께서 연일 '규제 완화'에 대해 역설하는 판에 규제의 덫을 놓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역설적인 일이니까!    

 

 

 

*** 오마이뉴스에 '비행기가 있던 자리'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입니다. 그나저나 분명히 제가 송고할 때는 맨 마지막 사진인, 은진미륵 사진을 같이 송고했는데 지금보니 발행된 기사에서는 사진이 누락됐네요. 일부러 은진미륵에 대한 사진을 넣어 비행기에서 역사트레킹으로 넘어갔다는 걸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이게 오마이의 한계인가??? 좀 거시기하네~~~ㅋㅋㅋ
제 블로그에 담긴 송고본과 오마이뉴스의 발행본을 비교해 보면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제 송고본에는 있는 은진미륵 사진이 발행본에는 없어졌고, 그래서 글의 완성도가 감소됐다는 것입니다.

오마이뉴스 발행본 바로가기 http://omn.kr/7p74

 

 

 

 

 

 

* 월간항공: 20년도 더 지난 비행기 잡지들.

 

 

 

 

 

* 월간항공: 오른쪽은 1991년 5월호다. 노태우 정권 때 진행된, KFP 사업에 선정됐던 F-16에 대한 사진을 메인으로 걸어놓았다.

F-15K를 넘어 이제 F-35가 우리공군에 차세대 전투기로 쓰일 예정이라 이 사진이 무척 낯설다.

 

 

 

 

얼마전 20년 넘게 가지고 있던 <월간항공>이란 비행기잡지 몇 권을 버렸습니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오마이뉴스에 기고를 했답니다. '비행기가 있던 자리'라는 제목으로... 위 사진들은 그 기사에 사용된 이미지들입니다. 딱 봐도 중고품처럼 보이죠?

 

20년 넘게 제 방 한구석을 차지했던 녀석들인데 떠나 보낸다니... 한편으로는 참 아쉬움이 컸답니다. 그러고보면 오래된 물건에는 그 주인의 혼이 스며든다는 말이, 꼭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잡지들을 버리면서 제 마음 한쪽 구석에서는 무언가 허전한 감이 밀려오더군요~!

 

 

 

 

 

* 비행기잡지: 20년도 넘게 집에 있다보니 먼지도 많이 쌓이고, 때도 많이 탔다.

 

 

 

 

 

* 인천공항: 인천공항을 탐방했을 때의 모습. 2014년 2월에 찍은 사진이다.

 

 

 

 

 

 

 

*관촉사 은진미륵: 비행기 잡지가 떠난 자리에는 역사책들과 미학책들이 그 자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역사트레킹 마스터를 하려면 방대한 역사책들과 미학책들을 '마스터'해야 하기 때문이다.

2013년 4월에 찍은 사진이다.

 

 

 

 

 

 

 

 

 

 

 

 

 

 

 

 

 

 

전기장판, 영상기기, 탁자... 왜 캠핑하세요?___2탄

EBS <당신의 캠핑은 몇 g입니까?> 단상... 적게 쓰는 캠핑 되길

---> 전편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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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뱀사골 뱀사골 캠핑장 옆에 있는 뱀사골 계곡이다. 바위 위에 젖은 옷들을 말리고 있다. 시각적으로 썩 좋아보이지 않는다. 2012년 여름에 촬영한 사진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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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식물 쓰레기 버리러 왔나?

장비 과시욕은 다른 아웃도어 영역에서도 늘 잡음을 발생시켰다. 소형차 한 대 값에 맞먹는 자전거를 타고 동네나 슬슬 다니시는 분, 머리에서 발끝까지 유명 아웃도어 메이커로 도배했지만 등산은 잘 못하시는 분 등등. 그런 분들이 있으니 아웃도어 업체에서도 계속 고가 정책을 유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된 문제들은 그래도 과도한 음식물 쓰레기는 발생시키지 않는다. 그렇다. 필자가 캠핑장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은 바로 음식물 쓰레기다. 이 부분은 캠핑을 즐겨하시는 분이나 캠핑에 익숙지 않은 분들도 공통적으로 공감하실 것이다.

요즘에는 캠핑식이라 해서 캠핑 요리 레시피를 모은 가이드북도 발간됐다. 캠핑장에서 먹는 요리는 꿀맛이다. 대자연에서 캠핑도 즐기고, 요리도 해먹으니 얼마나 맛있겠는가?
밤마다 캠핑장은 바비큐 파티장으로 변신한다. 고기가 구워지고, 자연스럽게 술잔이 돈다. 자연 속에서 고기와 술을 즐기니 그곳이 무릉도원인가? 그렇게 먹고 마신다 보면 필연적으로 쓰레기가 발생한다. 아웃도어 활동을 하다 보면 그렇게 부산물들이 발생하지만 캠핑장에서 발생하는 음식물 쓰레기는 정도를 넘어섰다. 상황이 심각한 것이다.

그렇게 '파티의 끝'은 항상 쓰레기였다. 다 먹지도 못할 음식물들은 왜 가지고 와서 버리고 가는가? 도시에서도 그렇게 음식물을 버리는가? 차라리 펜션이나 게스트하우스 같은 곳은 남은 음식물들을 공용 냉장고에 넣어 둔다. 그러면 다른 숙박인들이 재활용(?)할 수 있다. 필자도 제주도에 있는 한 게스트하우스 냉장고에 있는 오징어를 재활용해서 요리를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캠핑장에서는 그런 재활용 과정 없이 그냥 버려진다. 필자는 그런 분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먹으로 오셨나요? 먹으러 오셨으면 다 드시고 가시지, 왜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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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박 비박이란 야외에서 텐트를 치지 않고 취침을 하는 것을 말한다. 텐트를 설치하면 캠핑이 되는 것이고, 사진에서처럼 그냥 침낭만 깔고 자면 비박이 되는 것이다. 2013년 여름 강원도 횡성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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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캠핑은 안녕하십니까?

필자는 우리나라 캠핑장에 발우공양 문화가 광범위하게 퍼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자신이 먹을 만큼만 음식을 준비해서 남기지 않는 것이다. 뒤끝이 없게 캠핑을 잘 마무리 하는 것이다.

그럼 필자는 캠핑을 하면서 무엇을 먹었을까? 콘플레이크를 먹었다. 두유에 동동 띄어서 먹었다. 밥도 지어먹기는 했지만 콘플레이크를 더 많이 먹었다. 음식물 쓰레기는 전혀 남기지 않았다.

물론 필자처럼 캠핑장에서 콘플레이크 같은 행동식을 취식하라는 소리가 아니다. 그저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자는 의미에서 콘플레이크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좀 더 계획적으로 일정을 짜서 좀 더 적게 버리자는 것이다.

이제껏 필자가 언급한 것들과 <당신의 캠핑은 몇 g입니까?>에서 질타한 내용은 상당 부분 일치한다. 또한 백패킹을 지향점으로 삼는 것도 동일하다. 먹고, 마시고, 장비 과시에 집중된 우리의 캠핑문화는 변해야 한다. 물량공세식의 소비지향적 캠핑은 지양돼야 한다. 캠핑은 자연을 느끼러 가는 것이지 도시적인 소비패턴을 연장하러 가는 것이 아니다. 난민촌을 연상시키는 혼잡한 캠핑장에서의 하룻밤은 힐링이 아니다. 그저 스트레스를 가중시키는 '짜증 캠핑'일 뿐이다.

<당신의 캠핑은 몇 g입니까?>는 그릇된 캠핑문화의 폐해를 잘 지적한 좋은 프로그램이었다. 덕분에 우리나라 캠핑, 아웃도어 문화에 대해서 되돌아 볼 수 있었다. 방송을 다 시청한 후 필자는 이런 의문을 품어 봤다. 

'당신의 캠핑은 안녕하십니까? 진정 캠핑을 제대로 잘 즐기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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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BS <하나뿐인 지구>의 '당신의 캠핑은 몇 g입니까'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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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여름의 어느 날.


당시 필자는 중부내륙 자전거여행을 행하고 있었다. 강원도 횡성에서 영월로 넘어가는 중이었는데 야영지를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미 시간은 자정에 가까웠기에 다급했다.

그러다 현지 경찰분들의 도움으로 근처에 있는 캠핑장에 대한 정보를 얻어 그곳으로 향했다. 그 날은 '도깨비 도로'라는 거시기한 이름의 급경사 도로를 통과했던 만큼 심신이 무척 지친 상태였다. 그래서 폐교를 리모델링했다는 그 캠핑장이 '스위트 룸'이 되어주길 기대했다. 달콤한 휴식을 기대하며 페달을 굴리는데 더욱더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헉!"

외마디 비명과 함께 필자의 인상은 찌푸려졌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인가? 시간은 한밤중이었지만 그곳은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여기저기서 고기가 구워졌고,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고기 굽는 연기가 하늘을 가득 채울 정도였고, 술자리의 떠들썩함이 온 동네에 울려 퍼질 정도였다. 또한 한편에서는 불꽃놀이도 벌어졌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필자는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화끈한 곳에서는 심신의 피로를 달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피로가 더 가중될 뿐이다. 결국 그날은 자정을 훨씬 넘어서 잠자리에 들었다. 어느 이름 모를 공사장에 짐을 풀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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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달궁 캠핑장 지리산 국립공원에 있는 오토캠핑장. 여름에는 예약 경쟁이 치열하다. 2012년 여름에 촬영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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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캠핑은 몇 g입니까?


필자는 캠핑을 많이 하지만 캠핑장을 잘 가지 않았다. 그래서 캠핑장이 아닌 곳에다 텐트를 친 적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시골동네 팔각정, 마을회관 뒤편 공터, 다리 밑, 야산 공동묘지 등등.

그렇게 캠핑장이 아닌 곳에다 베이스캠프를 꾸린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가난뱅이 여행을 하는 터라 돈이 없고, 둘째 현재 우리나라 캠핑문화가 탐탁지 않아 그렇게 했다. 캠핑장 입장료가 몇 푼 한다고 비용 문제를 언급하겠는가. 그렇다. 캠핑장 입장을 실제적으로 꺼리는 이유는 두 번째 사유 때문이다.

EBS의 환경다큐멘터리 중에 <하나뿐인 지구>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그 프로그램에서 지난 2월 28일에 <당신의 캠핑은 몇 g입니까?>라는 제목을 걸고 우리나라 캠핑 문화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였다. 그릇된 캠핑문화를 질타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질문들을 시청자들에게 던졌다.

'캠핑장으로 향하는 당신의 텐트와 차는 얼마나 큽니까?'
'캠핑장에 무엇을 남기고 어떤 것을 채워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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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백산 당골캠핑장 필자는 소형텐트로 캠핑을 한다. 2012년 여름에 촬영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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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생활을 옮겨 놓은 '자연 속' 오토캠핑장


처음으로 대형 캠핑장에 갔을 때 필자는 손수레의 쓰임새를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했었다. 얼핏 쓰레기 적재에 쓰인다고 봤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자동차에서 짐을 꺼내 자신의 사이트(텐트 세팅지)로 움직일 때 이동수단으로 쓰였다.

내부에서 차량 이동이 되지 않는 캠핑장에서는 손수레가 이동수단으로 사용된다. 일단 텐트 무게가 있고, 기타 짐들이 가득하니 손수레를 이용해 이동을 하는 것이다. 어떤 캠퍼들은 한 차로는 부족했는지 두세 번 왕복하기도 했다. 이후 다른 캠핑장에서도 손수레로 캠핑 장구들을 나르는 광경은 아주 흔하게 목격됐다.

거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조용히 있다 조용히 간다'라는 말처럼 캠핑에는 많은 물품들이 필요하지 않다. 하루짜리 야외생활에 적합한 물품들만 있으면 충분하다. 손수레로 두세 번 왕복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오토캠핑장에 오는 사람들은 왜 엄청난 짐들을 싣고 오는 것일까? 'city life', 즉 도시생활을 끌고 왔기 때문이다. 그 짐이라는 것들을 보면 캠핑 본연의 물품들이라기보다는 도시생활을 옮겨 놓은 것들에 가깝다. 탁자, 주방기구, 영상기기 등등…. 혹한기에는 난방용품까지 추가되는데 난로와 전기장판까지 휴대품으로 소지한다. 그러니까 덩치가 커질 수밖에 없다. 

캠핑 장비가 많을수록 그것을 싣는 자동차의 크기도 커져야 한다. 그래서 캠핑을 위해 더 큰 자동차를 구입하는 사람들도 생길 정도다. 캠퍼들 사이에서는 캠핑장비가 넘쳐나 일반 승용차에서 SUV로 바꿨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기까지 한다. 이쯤되면 캠핑의 주도권이 캠퍼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캠핑장비에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캠퍼와 캠핑 장비 간의 역전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도시의 안락한 생활을 캠핑장으로 옮겨 놓는다면 무엇하러 캠핑을 하러 가는가? 엄동설한에 전기장판과 난로를 가져가서 캠핑을 하느니 차라리 저렴한 민박집에 가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해당 지역경제에 보탬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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