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능내역. 작은 간이역의 정취가 살아 있다.









정약용 선생 만나러 갑시다_ 1


남양주 정약용역사트레킹


 

서울내부트레킹, 속초해변트레킹. 솔직히 그런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데 누가 그런 명칭을 지었습니까?”

 

트레킹 참여자들 중에는 간간이 이렇게 문의를 해 오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답을 합니다.

 

제가 직접 지었습니다. 코스에 담긴 내용성을 전달하려고 그런 이름을 지었어요.”

 

제 대답을 듣고 물음표를 거두는 분들이 대다수였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물음표를 몇 개 더 가져다 붙인 표정을 지으시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그런가하면 이렇게 더 묻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럼 귀에 확 꽂히는 명칭 같은 건 없나요?”

 

당시 저는 잠시 망설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답을 했지요.

 

! 이건 어떻습니까? 정약용역사트레킹이요. 정확히는 남양주 정약용역사트레킹이요.”


, 그래요? 귀에 확 꽂히네요. 다산 선생은 저도 좋아하는데... 그 명칭 잊어버리지 않겠는데요.”

 








* 능내역.





 

 


 

간이역의 정취가 살아있는 능내역

 

이번에는 경기도 남양주로 가보겠습니다. 귀에 확 꽂히는 남양주 정약용역사트레킹을 소개하겠습니다.


정약용 역사트레킹은 능내역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능내역은 중앙선에 있던 간이역이었습니다. 중앙선은 2008년에 복선화가 됐고, 능내역은 더 이상 열차가 서지 않게 됩니다. 폐역이 된 것이죠. 하지만 능내역은 휴식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간이역의 색깔을 그대로 남겨두어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공간으로 변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정취를 쫓아 주말이 되면 많은 이들이 능내역으로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단선철도 시절, 옛 중앙선의 일일 수송량보다 더 많은 인파가 주말이면 능내역 인근으로 몰려와 트레킹을 하고, 자전거를 타는 것입니다. 

 

그런 북적북적한 능내역을 뒤로 하고 트레킹팀은 천주교 성지인 마재성지로 향했습니다. 마재성지는 능내역에서 도보로 3분 거리에 있지만 그 주변 분위기는 능내역과는 완전 달랐습니다. 무척 차분했습니다. 성지는 성지였던 것입니다.

 

 






* 마재성지. 한옥성당이다.






 

정약종의 생가, 마재성지

 

마재성지는 다산 선생의 셋째형인 정약종의 생가입니다. 새남터, 절두산, 해미읍성 등 일반적인 천주교 성지는 거의가 순교, 즉 신자들의 죽음과 관련된 곳이 대대수지만 마재성지는 한 집안의 살림집이 성지가 된 독특한 사례입니다.


그럼 정약종은 누구인가요? <자산어보>를 저술한, 정약용의 둘째형인 정약전은 잘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정약종이란 이름 석 자는 처음 들어보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정약종은 정약용의 셋째형이었습니다. 바로 위형이었습니다. 도교에 심취해있던 정약종은 다른 형제들보다 늦게 천주교에 입문하게 됩니다. 하지만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 진산사건으로 인해 다른 형제들이 천주교를 멀리할 때도 그는 강건하게 신앙을 지켜냈습니다.


1791(신해년)에 발생한 진산사건은 윤지충이란 사람이 제례를 거부하고 위폐를 불사른 사건을 말하는데 이 사건의 파장으로 다산 선생도 벽파세력에 의해 공격을 받게 됩니다. 신유박해(1801) 이후 또다시 피바람을 몰고 왔던, 황사영의 백서(帛書)에도 신해년 박해 이후에 형제나 친구들로서 여전히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나, 정약종만 홀로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 마재성지.





그렇듯 정약종의 신앙은 강건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정약종의 강건한 신앙을 그의 형제들은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조선의 천주교는 외국 선교사에 의해 포교된 것이 아니라 남인 계열의 선비들이 서학을 토대로 자생적으로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기존의 유교적 가치관을 전복시키는 혁명적 도구로 천주신앙을 이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상의 위폐를 불태운 진산 사건에 반발해 천주교를 떠난 이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배교를 한 이들은 조상의 제사도 지내지 않는 천주 교리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약종이 계속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면 지킬수록 집안 형제들과의 사이는 멀어져갔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정약종만 홀로 강 건너 분원리(현 광주시 남종면)에 살게 될 정도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가진 정약종은 신유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를 하게 됩니다.

 






* 다산생가 가는 길.



 



 

정조대왕과 정약용

 

트레킹팀은 다산 정약용 생가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다산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은 마재성지에서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정약용 선생이 유배를 떠났던 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뭐 다들 아시겠지만... 1799, 당시 시파의 영수였던 체제공이 그해 1월에 서거를 했습니다. 반대파였던 벽파로서는 체제공의 뒤를 잇는 시파 거물 정치인의 등장을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아야 했지요.


벽파 입장에서는 누가 가장 위협적으로 보였을까요? 정약용이 1순위였습니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체제공 서거 이후 정약용은 더 많은 모함과 박해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딱히 정약용의 손발을 묶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정약용에게 흠결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 다산선생 묘.





벽파는 꼼수를 썼습니다. 외곽 때리기를 했던 것입니다. 정약용의 흠을 잡는데 실패한 그들은 둘째형인 정약전 때리기에 나섰습니다. 결국 정약전은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를 지켜본 정약용도 격분하며 고향인 마현(현 능내리)으로 낙향하게 됩니다.


체제공과 정약용이란 원투펀치가 조정을 떠난 두 달 후, 개혁군주였던 정조는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정조대왕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은, 임금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크게 스스로를 책망했다고 합니다. 그때가 18006월이었습니다.


정조의 승하는 벽파에게는 더할 수 없는 호재였습니다. 벽파는 기다렸다는 듯이 정조를 따르던 인사들을 축출하게 됩니다. 18012월에 있은 신유박해가 바로 그런 빌미로 이용되었죠.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남인 계열 시파 100여 명이 사사됐고, 400여 명이 유배길에 나서게 됩니다.

 

 





* 거중기






 

신유박해로 유배길에 올라야했던 정약용

 

이때 셋째 정약종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했고,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길에 나서게 됩니다. 처음 다산의 유배지는 경상도 포항 부근 장기였고, 정약전의 유배지는 전라도 완도 본섬 옆에 있는 신지도였습니다. 하지만 신유박해 이후, 황사영 백사사건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정약용은 포항보다 더 궁벽한 강진 땅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이배되기에 이릅니다.


한편 강진에서도 다산 선생의 유배지는 고정되지 않았습니다. 읍내에 있는 주막거리에 거처를 하기도 했고, 자신의 제자의 집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만덕산 기슭에 초막을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다산초당이었던 것입니다. 다산초당은 다산 선생이 1808년에서부터 해배되던 1818년까지, 10년간 머물렀던 곳입니다.


그렇게 해배된 이후 다산 선생은 고향인 이 곳 마현으로 다시 오게 됐고,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에서 강진 시절에 마치지 못한 저술 작업에 더욱더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 다산 선생 동상.





 

산 선생은 무려 500여 권의 서책을 저술한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였습니다. 강진에서의 18년 동안, 또 여유당에서의 18년 동안 다산 선생은 묵묵히 저술과 학술작업에 매진하셨습니다. 그런 다산 선생의 뜻을 배우고자 우리는 여기에 온 것입니다.”

 

나름대로 설명을 잘했는지 제 말에 환호를 하는 참가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친김에 몇마디 더 설명을 보탰습니다.

 

아참 다산 선생은 40세에 유배됐다가 58세에 여유당으로 오시게 됩니다. 그러다 76세에 돌아가십니다. 그때 기준으로는 무척 장수를 하신 셈이죠.”

 

다산생가를 떠나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한 이후에도 저는 참가자들과 함께 다산 선생과 정조대왕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습니다. 파란만장한 다산 선생과 그의 형제들의 삶, 참된 목민관이었던 다산 선생의 애민 정신, 개혁군주였던 정조대왕의 일대기 등등... 트레킹의 명칭이 남양주 정약용역사트레킹이었던 만큼 다산 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참가자 중에 한 분은 집에 가서 다산 선생과 관련된 공부를 해야겠다고 저에게 슬며시 말을 건냈답니다. 그러고보면 저 같은 사람은 두꺼운 역사책의 머리말을 읽어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드네요. 비록 도서관이 아닌 아웃도어이지만, 필드에서 트레킹을 하며 사람들을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리딩하기 때문이겠죠.


임진왜란 당시 변응성 장군이 지켰다는 마진산성 탐방을 끝으로 정약용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됩니다. 마진산성은 야트막한 산인데 그곳에 올라서면 양수대교를 비롯한 양수리 일대를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답니다.


정약용역사트레킹은 그 명칭이 귀에 확 꽂힙니다. 또한 눈도 확 뜨이게 하지요. 양수리일대가 수도권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에 한 곳이니까요. 그 아름다운 양수리 일대를 다산 선생을 생각하며 걸을 수 있기에 정약용역사트레킹은 더욱더 재밌는 것이겠지요.

 

 



* 마진산성. 마진산성에서 바라 본 양수리. 앞에 보이는 다리는 신 양수대교이다.





 

남양주 정약용역사트레킹

 

1. 코스: 능내역(폐역)마재성지 다산 생가(여유당) 연꽃 공원 다산 삼거리 조안면사무소 진둥산 솔개고개 마진산성

 

2. 이동거리: 10km

 

3. 예상시간: 4시간 30(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 트레킹팀.









관악산은 내 베이스캠프

 

둘레길 따라가는 관악산 역사트레킹

 



 

당신의 베이스캠프는 어디입니까?

 

산악인인 엄홍길 대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키운 건 도봉산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히말라야, 킬리만자로 같은 으리으리한 산들이 아니라 동네 뒷산인 도봉산이 현재의 자신을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대목을 읽었을 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혹시 엄홍길 대장의 베이스캠프는 도봉산?’

 

자신만의 베이스캠프가 있으신가요? 트레킹이나 등산을 즐겨하시는 분들은 각자 자신만의 베이스캠프가 하나씩 있을 겁니다. 물론 여기서의 베이스캠프는 사전적인 의미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자신의 다리 근육을 키운 곳을 말하는 겁니다. 통을 키우고, 잔뼈를 궂게 해 준 그런 곳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아웃도어 지수를 높여준 곳을 뜻하는 것이죠.


그럼 저의 베이스캠프는 어디일까요? 바로 관악산입니다. 동네 뒷산은 아니지만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던 관악산이 베이스캠프 역할을 해주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곳을 걸어 다니며 다리근육을 키웠고, 아웃도어 지수를 높였던 것입니다.

 





* 관악산 장승


 



 

남부 서울의 진산관악산

 

서울에는 한강을 기준으로 남쪽에는 관악산, 북쪽으로는 북한산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그렇게 두 산은 서울의 남북을 든든히 받쳐주고 있지만 역시 사람들은 북한산을 서울의 최고 산으로 인정하고 있지요. 그래서 관악산은 항상 넘버 2’의 지위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하지만 한강 이남으로 국한을 시키면 관악산이 당당히 진산의 지위를 누릴 것입니다. 서울 남부권에 관악산만한 산이 없거든요.


이미 삼국시대부터 관악산의 중요성은 부각되었습니다. 삼국은 한강 하류지역을 얻기 위해 이 일대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였습니다. 고려시대에는 남경(서울)의 남쪽 방어를 위한 산으로 삼았습니다. 그렇듯 관악산은 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수많은 역사적인 사건들의 배경이 되어주었던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이런 역사성 때문인지 관악산은 흥미로운 스토리텔링들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광화문에 해태상이 조각된 이유는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한 방편이라는 이야기, 조선 태종이 셋째 세종에게 양위를 할 것을 눈치 챈 첫째 양녕대군과 둘째 효령대군이 도성을 빠져나와 왕좌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기 위해 수도를 했다던 연주대이야기.


하지만 연주대(戀主臺)는 그 한자 이름에도 나타났듯이 왕좌에 대한 그리움이 넘쳐났던 공간이라는 이야기 등등...


그럼 관악산을 누비며 역사의 시간 속으로 걸어가 볼까요? 어렵지 않습니다. 힘들게 등산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관악산 둘레길을 따라 걸으면 수월하게 역사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강감찬 장군 기마상: 말은 역동적으로 잘 조각됐다. 하지만 장군의 다리를 보라. 너무 짧지 않은가? 기왕하는 거 잘 만들지. 장군을 숏다리(?)로 만들어 버렸다.


 




 

노익장을 발휘한 문신 출신, 강감찬 장군

 

트레킹팀도 떠났습니다. 일명 관악산 역사트레킹을 하기 위해서!


트레킹팀이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낙성대였습니다. 수많은 관악산 스토리텔링 중 가장 많은 주목을 받는 것은 고려시대 명장 강감찬 장군과 그의 생가인 낙성대(落星垈)일 것입니다. 낙성대라는 의미에서도 보듯, 강감찬 장군이 태어날 때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굳이 신화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역사적인 인물을 과도하게 칭송했다고 거부감을 드러내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한편 군사정권 시절, 성역화 작업의 한 대상자였던 강감찬에 대해 외면하고 싶은 시각도 존재할 것입니다. 현재의 낙성대는 1974, 유신헌법이 한참 맹위를 떨칠 때 건립된 것입니다.

 

그거 아세요. 강감찬 장군이 사실은 문신 출신이라는 거요.”


정말요?”


더 놀라운 사실이 있어요. 장군께서 나이 70에 최전방 사령관으로 직접 전투를 지휘했다는 겁니다. 그러다 귀주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둬서 거란 세력을 물리쳤고요.”


, 그래요!”

 

제 설명에 참가자들이 좀 놀라는 표정이었습니다. 하긴 그럴 만도 했습니다. <삼국지>의 황충 장군도 아니고, 고희의 나이에 최전방에서 을 휘둘렀다는 점이 놀라웠을 것입니다. 사실 저도 놀랐습니다.





* 안국사: 강감찬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 낙성대 공원 안에 있다.





더구나 상대편은 당시 동북아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거란족들이 아니었습니까? 이야기를 조금 더 확장해보죠.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두고 금수지국(禽獸之國)이라고 칭하며 건국 초기부터 강경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래서 거란이 선물로 준 낙타를 굶겨 죽인, 일명 만부교 사건도 발생하게 됐답니다.


거란은 요나라를 세우고 동북아에서 위세를 떨쳤습니다. 당시 요나라는 만리장성 부근에서 송나라와 대치를 하게 됐는데 한반도에 있는 고려에 대해 늘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고려가 송나라와 손을 잡고 자신들을 공격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3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였던 것입니다. 강감찬 장군은 3차 침공 때 상원수가 되어 10만 거란군을 격퇴시켰고, 그로 인해 고려는 전란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 낙성대 3층 석탑 좀 보세요.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탑인데요. 12세기 경에 건립됐으니 천 년의 세월을 버틴 탑이라네요.”


아 그렇군요.”


그런데 탑이라는 건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담아 놓는 조형물이잖아요. 그런데 강감찬 장군은 부처님도 아니고 유명한 고승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 곳에 탑이 세워졌습니다. 아무래도 강감찬 장군의 위엄이 생각 이상으로 엄청났던 것 같아요.”

 

 




* 낙성대 3층 석탑





 

삼성산 성지

 

낙성대를 뒤로 하고 본격적인 관악산 역사트레킹이 시작됐습니다. 트레킹 팀은 서울대 입구를 지나 삼성산 성지로 향했습니다.


삼성산은 관악산의 지산으로 원효, 의상, 윤필 세 분의 성인이 움막을 짓고 수도에 정진했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삼성산에 있는 천년고찰 삼막사(三幕寺)의 유래도 거기에서 나왔습니다. 

 

그런 삼성산에 성지가 있는데 불교 성지가 아니라 천주교 성지입니다. 삼성산 성지는 기해박해(1839) 때 효수를 당한 세 명의 프랑스 신부들의 무덤이 있던 자리를 성역화 시킨 것입니다.


세도 가문이었지만 안동 김씨는 천주교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폈습니다. 하지만 뒤이어 집권한 풍양 조씨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에 앞장섰습니다. 그렇게 하여 발발한 것이 헌종 5년에 있었던 기해박해였습니다.


이로 인해 권력의 중심은 풍양 조씨 세력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런면에서 기해박해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간의 권력투쟁의 부산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 삼성산 성지





기해박해로 인해 앵베르도 주교(한국명: 범세형)와 모방, 샤스탕 신부 등이 새남터에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들의 주검은 노고산(마포구 노고산동)을 거쳐 삼성산에 묻히게 된 것입니다. 이후 천주교에서는 이곳을 성역화 하였고 지금의 삼성산 성지가 되었습니다.


삼성산 성지는 조용히 사색하기 좋은 곳입니다. 성지라서 그런지 다른 탐방객들도 목소리를 낮추고 주위를 경건하게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트레킹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떤 천주교 신자께서는 잠깐 동안 기도를 올리더군요.


삼성산 성지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삼성산 숲이라는 소나무 군락지도 있는데 이곳도 사색하거나 시집을 꺼내 읽기 좋은 곳입니다. 트레킹팀도 삼성산 숲에서 신선한 피톤치드를 온 몸으로 맞으며 기분 좋게 삼림욕을 했답니다

 

관악산의 또다른 자랑인 메타세쿼이어 숲 탐방을 끝으로 관악산 역사트레킹도 무사히 끝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껏 수도 없이 관악산을 올랐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오를 생각입니다. 지겨울 만도 한데 이상하게 관악산에 발을 디디면 기분이 좋아지더군요. 지금도 다음에 행할 관악산 역사트레킹을 떠올렸는데 벌써부터 흥분이 되네요. 역시 자신의 베이스캠프로 가는 길은 항상 즐거운 일인 듯싶습니다.

 

 



* 삼성산 성지: 한 중년 남성께서 조용히 기도를 올리고 있다.





 

관악산역사트레킹

 

1. 코스: 낙성대역 낙성대 서울대입구 헬기장 삼성산 성지 삼성산 성당

2. 이동거리: 8km

3. 예상시간: 3시간 30(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 선돌: 전망대에서 바라 본 선돌. 뒤로 보이는 강이 바로 서강이다. 영월강변둘레길은 서강을 따라 걷는다.








영월, 그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들다!


서강길 따라 걷는 영월강변둘레길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앞에 보이는 게 선돌이고, 그 뒤로는 서강이 흐르고 있어요.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우리는 저 서강길을 따라 트레킹을 하게 됩니다. 일명 영월강변둘레길 역사트레킹을 하게 되는 거죠. 저 아름다운 길에 흠뻑 빠져볼까요?”

 

당시 저와 트레킹팀은 선돌이란 큰 바위 앞에 서 있었습니다. 선돌은 강원도 영월군에 위치해 있는데 그 뒤로는 서강이라는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선돌의 기묘한 자태가 푸른 강물과 어우러지니 그 멋이 한층 더 격조 있어 보이더군요.


영월에는 유명한 동강 말고, 서강도 있습니다. 워낙 동강의 유명세가 강해 서강이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서강도 무척 아름다운 절경들을 여럿 품고 있습니다. 유명한 한반도지형도 서강이 품고 있지요.


그렇습니다. 이번에 떠날 곳은 영월입니다. 영월 중에서도 서강길을 따라 갑니다. 영월강변둘레길을 걷는 것이죠.

 






* 선돌: 아래쪽 서강에서 바라 본 선돌. 다른 바위에 가려서 갈라진 부분이 작게 보인다.





 

 

기묘한 자태의 선돌

 

영월강변둘레길은 선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사진에서처럼 선돌은 서강 강변에 우뚝 솟아 있는 기암괴석입니다. 선돌은 그 높이가 70m에 달하는데 그 자태가 오묘하여 예로부터 신선암으로 불리기도 했답니다. 푸른 서강을 배경삼아 기묘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는 선돌은 그 자체만으로도 명물 중에 명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기묘한 모습 때문에 선돌은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단종 임금도 그들 중에 한 명이었지요. 단종 임금의 유배지는 영월의 청령포였는데 그 곳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돌을 지나쳐야 했습니다. 단종도 기묘한 형상의 선돌을 볼 때만큼은 고된 귀양길에서 오는 피곤함을 잠시 내려놓았다고 합니다.


트레킹 팀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습니다. 선돌과 서강의 모습에 반한 듯, 한 컷이라도 더 좋은 장면을 찍기 위해 카메라 각도를 조절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러번 방문했던 선돌이었지만 올 때마다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셔터를 눌러댔지요

 




* 서강






즐거웠던 순간도 잠시! 이제 난이도 상()에 해당되는 구간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습니다. 선돌에서부터 서강의 뚝방길로 내려가는 길이었는데 그 구간은 등산로가 무척 험했습니다. 경사가 상당히 심했습니다. 심지어 낭떠러지를 스쳐지나가야 하는 구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리딩자였던 저는 무척 고민을 많이 했었지요.

 

제발 무사히! 아무도 다치지 말고 제발 무사히!’

 

괜한 걱정이었습니다. 참가자분들의 트레킹 실력이 출중해서 그랬는지 모두 다 그 위험구간을 무사히 통과했답니다. 리딩자로서 그런 모습이 참 고맙더군요. 그래서 저는 참가자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로 했습니다. 저만 알고 있던 비밀화원같은, 환상의 뷰 포인트(view-point)로 안내했던 것입니다.


그 곳에 올라선 참가자들은 더 열심히 사진을 찍더군요. 독사진을 찍고, 짝을 지어서 찍고... 저에게 이런 말들을 건네면서요.

 

이런 멋진 곳에서 사진 찍게 해줘서 고마워요!”

 

 




* 환상의 뷰 포인트: 실제로 가보면 사진보다 훨씬 더 멋진 곳이다.





 

단종의 한이 서린 청령포

 

서강 뚝방길은 5km 정도에 달합니다. 옆으로 서강이 흐르고 있고, 간간이 기차도 지나고 하니 볼거리가 꽤 됩니다. 하지만 5km에 달하는 평지를 쉬는 시간 포함하여 1시간 반 이상을 걷고 있자니, 살짝 지루한 감이 밀려오더군요.


그렇게 살짝 지루한 감이 밀려올 때쯤, 트레킹팀은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에 도착했습니다. 다행이었습니다. 트레킹팀은 청령포를 보자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했습니다.


청령포는 3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배후면에는 가파른 육륙봉이 놓여 있어 육지 속의 섬으로 불립니다. 그래서 청령포는 지금도 배가 없으면 도달할 수 없는 곳입니다. 

 

단종은 청령포에 오랫동안 머무르지 못했습니다. 계유정난 발생 3년 후인 14566, 단종 복위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고, 주도자들이었던 사육신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청령포: 청령포의 여름.



어두운 그림자는 단종에게도 드리워지게 되지요. 한명회, 권람 같은 일파들이 단종을 가만히 두었겠습니까? 엄청나게 단종을 몰아붙였고, 결국에는 노산군으로 강봉시켜 영월 땅으로 유배를 보냈던 것입니다. 그때가 14576월이었습니다.


졸지에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은 청령포에 왔다 그해 여름 홍수를 피해 영월 읍내에 있는 관풍헌으로 옮겨 갔습니다. 그러다 그해 10월 하순에 관풍헌에서 숙부인 세조에 의해 사사됐지요. 단종의 짧았던 생애와 4개월 남짓한 영월 유배기간을 되새기며 저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한명회가 없었다면 수양대군이 정권을 틀어잡은 계유정난도 없었을 것입니다. 어찌됐든 수양대군은 정권을 잡았고, 한명회도 부귀영화를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시간은 흘렀고 우리는 단종 대왕의 뜻을 기리는 곳에 왔습니다. 한명회가 아닌...”

 

계유정난 당시는 한명회가 승리자였습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단종의 자취를 따라갑니다. 한명회를 따라가지는 않지요. 김구 선생의 자취를 따라가는 공주 마곡사 트레킹도 같은 이치입니다. 해방공간에서는 이승만이 승리자였습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김구 선생의 뜻을 기리며 마곡사 트레킹에 나섭니다. 이승만의 자취를 따라 걷지 않는다는 뜻이죠.

 

 



* 청령포: 청령포의 겨울





 

청령포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더!

 

기회가 되시면 겨울에 청령포를 방문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보통 청령포는 그 맞은편에서 배를 타고 갑니다. 하지만 겨울에는 그 앞을 흐르는 서강이 꽁꽁 얼게 되지요. 그래서 배를 타고 들어갔던 청령포를 겨울에는 얼음 위를 걸어 입장하게 됩니다.


살살살,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떼며 강을 넘어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입니다. 그렇게 꽁꽁 언 강을 넘다보면 미끄러지듯 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갈지 모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이 스쳐지나가더군요.

 

단종 임금이 겨울에 유배를 왔으면 저 얼음을 넘어서 다시 한양 땅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명도 짧고, 유배도 짧았던 우리의 슬픈 임금...’

 






* 참가자: 청령포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역사트레킹 참가자.




 

 

방절리에 있는 방절산

 

트레킹 팀은 청령포를 지나 방절산으로 향했습니다. 방절산은 강 건너 청령포 앞쪽에 있는 야트막한 산인데 제가 임의적으로 네이밍을 한 것입니다. 제가 영월에 사는 것도 아닌데, 감히(?) 그렇게 산 이름을 지은 것이죠.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동네 분들을 붙잡고 계속 그 산 이름을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건 이런 대답뿐이었습니다.

 

그 산 이름 없어요. 저쪽 산도 이름 없는데...”

 

그래서 방절산이라고 지었습니다. 그 동네가 방절리였기 때문입니다. 방절(芳節)리의 뜻을 거칠게 풀어보면 꽃다운 나이에 꺾이다라는 정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역시 동네 지명도 단종 임금과 떼려야 뗄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트레킹 코스를 명확히 하기 위해 임의적으로 네이밍을 한 만큼 누군가 좋은 이름을 제시한다면 방절산은 곧 다른 이름으로 바뀌게 될 겁니다

 




* 방절산: 사진 오른쪽, 아파트 뒤편이 동강과 서강이 합수되는 지점이다.





이름이야 어찌됐든 방절산은 충분히 올라갈 가치가 있는 산입니다. ? 동강과 서강이 합수되어 남한강을 이루는 곳을 조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곳에 올라서면 영월 읍내가 한 눈에 다 들어온답니다. 그러니 충분히 올라갈 만 하지요.


지금은 무인역사가 된 청령포역 탐방을 끝으로 영월강변둘레길 트레킹은 종료가 됐습니다.

지금까지 영월강변둘레길을 걸어보았습니다. 어떠신가요? 당장 배낭을 꾸려 떠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굳이 영월이 아니어도 괜찮겠지요. 어디든 좋습니다. 봄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면... 우리나라도 갈 곳이 많으니까요.

 


 



* 서강 뚝방길: 뚝방길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역사트레킹 참가자들.





 

영월강변둘레길

 

1. 코스: 선돌 서강 뚝방길 청령포 방절산(가칭) 청령포역(폐역사) 세경대학교

 

2. 이동거리: 10km

 

3. 소요시간: 4시간 30

 

4. 이용불가 계절: 겨울철과 여름철. 겨울에는 눈 때문에 이용불가. 여름에는 수풀이 우거져 등산로가 사라짐. 또한 서강의 범람이 우려됨.

 

 

 

 

 

 

 

 

 

 

    















* 조도: 속초해수욕장에서 바라 본 조도.







파도를 따라 걷는 속초 해변트레킹

지루할 틈이 없는 속초 해변트레킹

  

    

 

동해바다가 보이는 속초로 가자!

 

이번 화는 서울을 떠나서 동해바다 쪽으로 방향을 잡아봤습니다. 목적지는 강원도 속초입니다. 서울-춘천 고속도로의 개통, 미시령터널의 개통 등으로 이제 속초는 서울에서 2시간 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해안 도시가 되었습니다. 속초시 관광안내 책자에는 ‘1시간 40이라고 적혀 있더군요.


그만큼 강원도 해안 도시로의 접근이 용이해졌다는 뜻이겠지요. 너무 서울 중심적인 발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속초나 강릉 같은 지역들은 서울의 근교 바닷가지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번 트레킹의 특징은 파도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속초의 해변길을 걷기 때문에 속초해변트레킹이라는 이름도 붙여봤습니다. 속초해변트레킹은 해안가를 걷지만 꼭 바다 풍광만 바라보는 트레킹 코스는 아닙니다. 일단 코스 반대편에 우뚝 솟아 있는 설악산의 장엄함을 관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외옹치라는 작은 언덕에도 오릅니다. 갯배도 타고요.

    

 

    


* 고깃배




 

아바이마을과 갯배

 

속초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바닷가 쪽으로 조금만 이동하면 동명항이 나옵니다. 이 곳에 속초등대전망대가 있는데, 그곳에서부터 트레킹은 시작됩니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속초 시가지와 동해바다가 시원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또한 속초해변트레킹 코스를 눈으로 먼저 걸어볼 수도 있습니다.


동명항 탐방을 마친 후에는 아바이 마을이 있는 청호동을 향해갑니다. 아바이 마을은 1.4후퇴 때 남하했다가 영영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피난민들이 정착한 곳입니다. 정착 초기에 함경도 사람들, 특히 노년층이 많았는데 함경도 방언으로 '아바이'가 할아버지란 뜻이기에 아바이 마을이라는 명칭이 널리 쓰이게 됐습니다.


속초는 38선 이북에 있던 지역으로 한국전쟁 이전에는 북한쪽에 속해 있었습니다. 휴전이 됐을 때, ‘동쪽의 38은 북상했습니다. 그러나 서쪽의 38은 하강을 하고 말았지요.


그래서 38선 이북이었던 속초는 현재 서울에서 고속버스로 2시간이지만, 38선 이남이었던 개성은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개성공단이 폐쇄되었으니 더더욱 그렇게 된 것이지요.






* 갯배





그렇게 실향민들은 조금이라도 고향에 가까운 곳에다 삶의 터전을 잡았던 것입니다. 함경도 도민들이 집단으로 생활을 하다 보니 그곳에는 전통적인 속초지역의 문화와는 다른 음식문화와 언어문화가 자리 잡게 됐습니다.


그런 음식문화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바이순대와 오징어순대입니다. 동네 떡볶이 집에서 파는 일반적인 순대는 돼지 창자 속에 당면을 넣지만 아바이순대는 찹쌀과 선지 등을 넣어 독특한 맛을 연출합니다. 오징어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부터 강원도를 비롯한 동해안 지역에서는 돼지가 귀해 오징어를 이용하여 순대를 만들어왔습니다. 그런 방식의 오징어순대가 아바이마을에서는 함경도식으로 변형이 됐습니다.


한편 아바이마을에는 갯배라는 명물이 하나 있습니다. 갯배는 중앙동과 아바이 마을이 있는 청호동을 이어주는 무동력 선을 말합니다. 양쪽 선착장에 걸려 있는 밧줄을 끌어 당겨 그 힘으로 이동을 하는 것이죠.


아바이마을은 육지속의 섬과 같은 형상입니다. 그래서 이 갯배가 없었다면 5분 정도 걸릴 거리를 30분 정도 돌아가야 했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설악대교와 금강대교가 건설되어 이 갯배가 없어도 시내로 들어갈 수 있지만 그 전에는 이 갯배가 아바이마을 사람들의 다리 역할을 해주었던 것입니다.

    





* 속초해수욕장: 뒤로는 외옹치가 보인다.




 

 

속초해수욕장과 조도

 

아바이마을을 빠져나오는 곳에서부터 본격적인 해변 트레킹이 시작됩니다. 거기서부터가 속초 제일의 명소라고 불리는 속초해수욕장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속초 해수욕장은 황토빛 모래사장이 인상적인 곳입니다.


1km 정도에 걸쳐 질 좋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고, 새들의 낙원이라고 불리는 조도(鳥島)가 눈앞에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습니다. 더구나 바다 반대편에는 우뚝 솟은 설악산이 내려다보고 있어 여느 바닷가 해수욕장과는 다른 운치를 자아냅니다.


사실 속초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은 그렇게 넓은 편이 아닙니다. 느릿느릿 걸어도 20~30분 정도면 끝부분까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해운대나 경포대 같은 큰 백사장에 익숙한 분들에게는 성이 안 찰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큰 것보다는 아기자기함을, 더불어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속초해수욕장에 더 높은 점수를 줄지도 모릅니다.


속초해수욕장의 끝자락에는 외옹치라는 작은 언덕이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면 속초해수욕장 일대와 속초 중심부를 조망해 볼 수 있습니다. 푸른 동해바다의 물결과 황토빛 모래사장이 서로 서로의 배경색이 된 모습은 그야 말로 장관을 연출합니다

 





* 외옹치에서 바라 본 속초해수욕장: 현재 외옹치에는 대규모 리조트시설이 들어 서고 있다. 외옹치에는 고구마밭이 많았었는데 이제 그 밭들은 찾아 볼 수 없을 것 같다.





속초해수욕장에서 외옹치를 바라다보면 마치 어떤 산 하나가 바닷가를 향해 뛰어들려는 형상입니다. 평평한 해안가가 계속 이어지다 외옹치 부근에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 나온 모습이라는 뜻이죠. 외옹치(外瓮峙)라는 명칭도 바깥()으로 튀어 나온 항아리() 같은 언덕() 정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속초시 지형도를 보면, 설악산 대청봉에서 동쪽 방면으로 내려온 줄기는 주봉산을 타고 내려오다 바다를 앞에 두고 외옹치가 됩니다. 즉 외옹치에서는 동해바다와 설악산이 서로 만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지형적인 특색 때문인지 외옹치는 지금이나 예전이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됩니다. 사실 외옹치 해변은 2005년 전까지만 해도 군사용 철책이 들어서서 출입이 금지된 곳이었습니다.


그런 군사시설은 조선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외옹치의 안쪽은 덕산이라고 불렸는데 그 곳에 봉수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덕산 봉수대는 북쪽으로는 간성 남쪽으로는 지금의 양양으로 봉화를 연결해주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외옹치에 지금은 대규모 리조트 시설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리조트가 건설되면 속초경제가 활성화되겠지요. 또한 일자리 창출에도 많은 도움을 줄 겁니다. 하지만 이제 외옹치에서 밭을 경작하는 모습은 그저 옛 사진으로만 남아 있을 겁니다. 외옹치의 옛 모습은 그저 우리의 기억 속으로만 남아 있게 될 겁니다.

 

    


* 외옹치항의 낮



 

 

작고 아담한 외옹치항

 

외옹치에는 마을도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외옹치 마을은 바닷가 쪽이 아닌 도로와 인접한 곳에 밀집되어 있습니다. 어촌 마을이라면 조금이라도 바닷가와 가까운 곳에 집을 지어야 이치에 맞을 텐데 그렇지가 않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1984년에 있었던 수해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1984년에 있은 수해로 인해 산사태가 나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습니다. 그 이후 마을은 보다 안전한 곳으로 이동을 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당시 수해는 외옹치 마을의 어로 활동에도 큰 변화를 주었습니다. 1984년 이전에는 '뗀마'라고 불리던 무동력선을 타고 문어를 잡는 재래식 어로 작업을 많이 했답니다. 하지만 수해복구와 함께 항구도 현대식으로 탈바꿈 했고, 무동력선도 동력선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재래식 어로 활동도 자취를 감추었고요

 

외옹치 마을에서 조금만 이동하면 외옹치항이 내려다보입니다. 외옹치항은 작고 아담한 항구입니다. 외옹치항은 외옹치가 숨겨놓은 보물(?)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그 보물이 가장 빛날 때는 달빛을 받을 때입니다. 동해바다에 떠 있는 달빛이 은은하게 항구를 감쌀 때, 외옹치항은 그 고운 자태를 드러냅니다.

 

    




* 외옹치항의 밤





 

유명한 대포항 수산시장

 

외옹치에서 유명한 대포항까지는 약 1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실제로 행정구역상 외옹치는 대포동에 속합니다.


대포항은 어시장이 잘 발달되어 속초 최고의 항구로 손꼽힙니다. 몇 해 전 현대화 공사가 끝나 대포항은 항구와 어시장이 확 바뀌었습니다. 싱싱한 횟감이 즐비한 어시장과 말끔하게 정비된 접안 시설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구경거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해안트레킹에서 어시장탐방으로 변형이 된다고 할 수 있겠네요. 대포항 일대를 다 걸어보려면 1시간 이상이 소요될 정도로 항구와 어시장은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대포항과 어시장 탐방을 마치면 약 8km에 달하는 속초해변트레킹이 종료가 됩니다.


속초해변트레킹의 특징은 바다만 따라가는 코스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다를 끼고 걷는 길은 처음에는 드넓은 바다를 볼 수 있어 시원한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다는 2차원 적입니다. 아기자기한 멋이 없다는 뜻이죠.


그래서 바닷가를 끼고 걷다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지루한 감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속초해변트레킹은 갯배도 타고, 외옹치도 오르고, 설악산도 관망할 수 있습니다. 물론 파도 소리를 들으며 해변도 걷고요. 한마디로 지루할 틈이 없다는 뜻이죠!

    

 

    


 

속초해변트레킹

 

1. 코스: 시외버스터미널 동명항(속초등대전망대) 아바이마을(갯배) 속초해수욕장 외옹치 대포항


2. 이동거리: 8km


3. 예상시간: 3시간 30(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 피스테라 가는 길. 대서양에 접한 스페인의 한 어촌 마을. cee라는 곳이다.








스페인의 땅끝 피스테라 가는 길


 산티아고 순례길에 산티아고가 없다면?’ 두 번째 이야기

 

 

 

이번 화는 전편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산티아고가 없다면?’의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산티아고가 없다면?’이란 제목에서처럼, 저는 통상적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히는 상당히 도발적인 내용을 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산티아고지우개로 지워버린 셈이 됐으니까요.


제가 그런 이야기를 작성한 건 산티아고 순례길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조만간 다시 산티아고 순례길을 탐방할 예정입니다. 다른 순례자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그 길을 걸으며 많은 감흥을 얻었고, 큰 마음의 위안을 얻었습니다. 그만큼 저도 산티아고 앓이를 했던 셈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왜 산티아고 순례길에 산티아고가 없다면?’이란 도발적인 글을 썼을까요? 간단합니다. 제대로 알고 가자는 의미에서 글을 썼습니다. 기왕 돈 들여, 시간 들여가는 길이라면 제대로 알고 가야하는 게 아닐까요? 그래야 더 알찬 트레킹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 피스테라 가는 길. 조가비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상징물이다.








 

스페인의 땅끝, 피스테라

 

피스테라(Fisterra)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서쪽으로 약 9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스페인의 땅끝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야고보의 시신은 나룻배에 실려 에스파냐 땅에 닿게 됐는데 그 첫 번째 장소가 바로 피스테라였다고 합니다. 많은 여행책자들에 그렇게 기술되어 있지요.


어쨌든 그런 역사적인 스토리텔링에다 땅끝이라는 지정학적인 의미가 더해진 곳이기에 피스테라는 순례여행이 아니더라도 꼭 한 번 방문해 볼 가치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저도 그렇게 피스테라를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피스테라로 가는 시작점은 산티아고 대성당입니다. 대성당은 순례길의 종료점이기도 했지만 땅끝으로 가는 시작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시작과 끝이 공존하는 곳을 보고 있자니 끝은 또 다른 시작이라는 말이 실감나더군요. 새삼스레 인생은 끝없는 여정이라는 말도 떠올랐습니다.

 

시작 할 때는 이게 언제 끝나나, 하고 막막해 하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마침표를 찍게 되고, 그러다 또 다른 시작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예전 국내여행을 할 때도 그랬습니다. 시작할 때는 막막했지만 여행이 종료가 될 때는 성취감을 느끼는 동시에 이미 다음 여행의 경로를 머릿속으로 그리곤 했었지요.

    






* 산티아고 순례길.







 

해양과 산맥이 공존하는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 지방

 

피스테라로 가는 길은 인적도 드물었지만 마을 자체도 듬성듬성 있었습니다. 조금은 척박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개발이 덜 된 곳도 있었습니다.


피스테라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속한 갈리시아 지방은 스페인의 북서부에 위치해 있는데 서쪽으로는 대서양, 위쪽으로는 비스케이만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지형은 산지 형태를 띠고 있는데 험준한 산악지형이라기보다는 구릉형 산지가 층층이 쌓아 올려진 형태였습니다

 

전편에도 언급했듯이 이 지역은 이베리아반도가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을 때도 그 침략의 사슬에서 벗어나 있던 곳입니다.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온 북아프리카 무어인들은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켰고, 이에 서고트 왕국의 옛 귀족들은 반도의 서북부에서 아스투리아스(Asturias)를 건립하여 가톨릭 왕국의 재건에 나서게 됩니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서북부 지역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들어서게 됩니다. 이곳은 첩첩산중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산악지형을 띠고 있기에 효과적인 방어가 가능했습니다

 

대서양에 가까워지는 만큼 기후변화가 더 심해졌습니다. 비가 더 심하게 오락가락했습니다. 우리나라 여름철 날씨도 변덕스럽지만 여기에 오면 명함도 못 내밀 것 같더군요. 하루에도 몇 번이나 호랑이가 장가를 갈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인지 무지개도 무척이나 많이 봤답니다. 평생 본 무지개보다 순례길을 걷는 동안 본 무지개가 훨씬 더 많았을 정도였습니다.

 

    






* 피스테라. 큰 네모는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를, 작은 네모는 피스테라를 표시한다. 구글지도 변형.





 



피스테라와 야고보

 

앞서 언급한 것처럼 피스테라는 스페인의 땅끝입니다. 하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은 대개 그곳을 유럽대륙의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피스테라를 소개하는 일부 책자에 그렇게 기술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피스테라는 제가 반복해서 기술한대로 스페인의 땅끝이지 유럽 대륙의 땅끝은 아닙니다.


정확히 유럽 대륙의 땅끝은 호카 곶(Cabo de Roca)입니다. 호카 곶은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서쪽으로 약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깎아질 듯 서 있는 해안절벽이 일품인 곳이지요.


육지에서 바다쪽으로 툭 튀어나온 지형을 말할 때 두 가지로 분류를 해서 말합니다. 튀어나온 규모가 크면 반도가 되고, 작으면 이 됩니다. 유명한 포항의 호미곶을 연상하시면 될 것 같네요. 북한 쪽에서는 장산곶이 유명하지요.







* 피스테라. 광활한 대서양이 펼쳐지는 곳. 가슴이 확 트이는 곳이다.








피스테라에 대한 환상(?)을 한 가지 더 깨볼까요. 저는 전편에 야고보 성인은 이베리아반도에 복음을 전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서술했습니다. 그 서술을 따라가 보면, 야고보의 시신이 담긴 배가 예루살렘에서 피스테라까지 옮겨왔다는 이야기도 허구일 가능성이 큽니다. 뻔한 당시의 항해 기술은 둘째 치고, 사역을 하지도 않은 곳에다 자신의 시신을 묻어 달라는 전도자는 없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피스테라가 왜 야고보와 연결이 됐을까요? 아무래도 야고보의 존재를 더욱더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피스테라가 동원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로마인들은 피스테라를 세상의 끝이라고 믿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끝에서 야고보 성인의 시신이 도착하여 별들의 들판이라는 산티아고 콤프스텔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다는 식으로 스토리텔링이 정리될 수 있겠지요. 이런 전개 과정 자체가 여행자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스토리텔링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만약 로마인들이 세상의 끝을 호카 곶으로 판단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럼 호카 곶과 야고보가 연결이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루하루 잘 사는 것이 진정한 챔피언!

 

환상이 다 깨졌다고 해도 피스테라는 그 자체로 무척 매력적인 곳입니다. 넘실대는 파도와 해안절벽들을 따라 가다보면 땅끝 등대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바라보는 대서양의 모습은 일품 중에 일품입니다. 특히 이곳의 노을은 아름답기로 유명합니다.


피스테라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자신의 신발이나 옷가지를 태워 대서양에 띄우는 의식을 행합니다. 더 이상 갈 수 없으니 자신의 것들을 불태우는 것이죠. 실제로 등대 근처 곳곳에는 순례자들이 태운 신발과 옷가지의 흔적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피스테라는 그런 장소였습니다. 무언가 의식을 행하거나 다짐을 하게 만드는 장소였다는 것이죠. 마치 해남 땅 끝에 가면 무언가 마음을 다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요. 저도 대서양 바다를 보면서 한 가지 다짐을 했습니다.

 

하루하루 잘 사는 것이 진정한 챔피언!’

 

난생 처음 보는 대서양 앞에서 다짐을 한 말치고는 무척 소박한가요?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작은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사람은 큰일도 못한다고 하잖아요. 허상과도 같은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바로 앞에 있는 일들을 척척해내는 사람이 진정한 승리자라는 것이죠. 지나간 과거를 괴롭게 되새기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억지로 끌어와서 현재를 낭비하지 말자는 뜻이기도 합니다.

    




* 피스테라 표지판


 




 

남북한 순례자들이 함께 산티아고 길을 걷는다면?

 

순례길은 화합의 길이었습니다. 지역감정으로 유명한 마드리드, 카탈로니아, 바스크 사람들이 서로 정답게 트레킹을 하는 곳이 순례길이었습니다.


스페인 내국인들만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앙숙이었던 아일랜드와 영국, 그리고 러시아와 에스토니아(발트3) 청년들이 서로 의지를 하며 걷는 곳이 바로 순례길이었습니다. 도보여행을 하는데 국적이니 지역이니 하는 것들은 다 소용이 없을 테지요. 서로 격려하고, 서로 도움을 주고... 그게 바로 순례길에 녹아 있는 정신일 겁니다. 그런 정신들이 길 위에 뿌려지고, 뿌려지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사랑하는 것이겠지요.


저도 짧게나마 일본인 친구들과 즐겁게 순례길을 걸었답니다. 니가타 출신이라는 처자는 저에게 한국말로 오빠라고 칭해주더군요.

 

나 아저씨인데...’

 

이 말을 표현할 방법은 없고, 기분은 좋고 하니, 저는 그들에게 강남스타일의 말춤을 춰줬습니다. 그들도 따라 추더군요. 아주 즐겁게!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북한 순례자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된다면 무척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남한과 북한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순례길을 걷는다면 그것 자체로 좋은 일일 것이겠지요. 함께 격려하고, 도우며 길벗을 하고... 힘들 때는 함께 아리랑도 부르고!

 

 



* 진정한 챔피언. 이 친구의 왼쪽 다리를 보라! 의족이다. 하지만 사진에도 나와 있듯이 그의 표정은 아주 밝다. 자신을 북부 빌바오 출신이라고 말한 이 친구는 자전거로 이베리아 반도를 투어하고 있다고 했다. 저런 청년들이 있기에 순례길이 아름다운 것이다. 순례길 곳곳에 뿌려진 선한 마음과 인간애가 산티아고 순례길로 더 많은 이들을 불러모으고 있는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산티아고가 없다면?

- 마음으로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

 

 

 

이번에는 국내를 넘어 스페인으로 이야기를 확장해볼까 합니다. 스페인에는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 제가 하는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통상적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내용이 아닐 겁니다.

 

 

 

* 산티아고 순례길







산티아고 순례길과 제주 올레길

 

제주 올레길은 우리나라 도보여행의 시발점입니다. 2007년 제주 올레 1코스가 개척된 이후, 우리나라 도보여행길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됐습니다. 지금은 2km 이상이 됐는데 이 길이는 지구 반지름에 필적할 정도로 엄청난 길이입니다. 이 제주 올레의 모태가 바로 산티아고 순례길입니다. 그런 면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은 우리나라의 도보여행에 많은 영향을 준 셈입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영향력은 요즘도 식을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도보여행자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탐방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순례길 걷기를 일생일대의 버킷리스트로 올려놓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니 이 역사트레킹펀딩에서도 꼭 한 번은 다뤄봐야겠지요.

    

 







 

 * 산티아고 콤포스테라라 시가지. 사진 중앙 상단에 산티아고 대성당의 첨탑이 보인다.







스페인 민중들 속에서 부활한 야고보

 

산티아고(Santiago)는 스페인어로 야고보를 뜻합니다. 야고보는 사도 요한의 형으로, 야고보와 요한은 둘 다 예수의 12제자였습니다. 야고보는 현재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위치해 있는 이베리아 반도에 복음을 전파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야고보는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돌아오지요. 고된 사역길 이후에 다시 돌아온 고향이었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금의환향이 아닌 죽음의 그림자였습니다. 유대왕인 헤롯 아그리파 1세의 무시무시한 칼날이 그의 목을 내리쳤기 때문입니다. 아그리파는 예수가 태어날 때, 베들레헴의 신생아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했던, 그 헤롯왕의 손자였습니다.


대대로 헤롯왕가들은 유대 땅에 그리스도교가 기반을 잡는 것을 싫어했던 모양입니다. 결국 야고보는 기원후 44725일에 참수를 당합니다. 12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후 야고보의 시신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배에 실려, 에스파냐 북서부 지역으로 이동을 하게 됐다고 합니다. 에스파냐에서 복음을 전한만큼 그 곳에 뼈를 묻겠다는 유언이 있었고, 제자들이 실행에 옮겼다는 겁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부터 그 먼, 당시는 로마지배 하에 있던 이베리아반도까지 장거리 항해를 마다하지 않고 제자들은 돛을 올렸을 겁니다.


당시 로마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지 않았습니다. 공인은커녕 탄압에 앞장섰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요? 야고보와 관련된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잊혀 갔습니다.










* 산티아고 순례길








이후 야고보의 존재가 민중들 속에서 부활하게 된 시기는 8세기경이었습니다. ‘별들의 들판이라고 불리는 캄푸스 스텔라(Campus Stellae)에 있는 무덤중 하나가 별의 계시를 받을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민중 속에서 널리널리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그 계시가 실현이 된 것인지, 서기 813년경 성인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되었다고 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를 지배하고 있던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알폰소 2세는 그 무덤이 발견된 곳에 성당을 짓게 합니다.


그렇게 하여 건립된 것이 산티아고 대성당이었습니다. 또 그 대성당이 위치한 곳에 도시가 들어섰는데 그 곳이 바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였습니다.


여기까지가 산티아고 카미노(camino: 스페인어로 ’)에 녹아 있는 역사적인 스토리텔링입니다. 이런 내용들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소개하는 우리언론들 뿐 아니라 스페인 관광청의 소개책자에도 기술되어 있습니다.

 




 

* 야고보 성인. 산티아고 대성당 외벽에 조각된 야고보.






 

야고보의 제자들은 어떻게 그 먼 뱃길을 찾아갔을까?

 

산티아고 카미노를 걷는 사람들은 필그림(Pilgrim)이라고 불립니다. 영어 풀이 그대로 순례자라는 뜻입니다. 종교다원론자(?)인 저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습니다. 짧게나마 필그림이 되었고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야고보 성인을 기리며 미사에도 참석했습니다.


대성당에서 드린 미사는 필자에게 무언가 모를 강한 영감을 심어주었지요. 그 영감은 예전 논산 관촉사에서 은진미륵을 처음 보았던 때의 감흥과 비슷했답니다.


순례자의 마음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고, 또한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선한 감흥을 얻었지만 여행을 하기 전부터 품었던 근본적인 물음은 계속 풀리지 않았답니다. 그림자처럼 그 물음은 계속 저의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진짜 산티아고 대성당에 사도 야고보가 묻혀 있는 게 맞는 거야? 야고보의 제자들은 스페인 땅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을 텐데 어떻게 거기까지 간 거지. 내비게이션이라도 있었던 건가? 그래 그들이 갔다고 치자. 그런데 굳이 지브롤터 해협을 돌아서 스페인 서부 지역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스페인 동부 해안 쪽이 훨씬 더 가깝잖아.’

    








* 한국 컵라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는 한국 사람들이 많기에 저런 광고문구가 나왔으리라...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없다?


이 물음대로하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그 수많은 순례자들은 사기를 당한 셈이 됩니다. 있지도 않은 야고보 무덤을 보기 위해 수 백 킬로에 달하는 길을 걷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을 자신의 버킷리스트로 등재한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미래에 행할 바보들의 행진을 준비하기 위해, 현재의 소중한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는 멍청이들인가요?


시간이 지날수록 저의 의문은 더욱더 짙어져갔습니다. 그러다 새 유럽의 역사라는 책, 159쪽에 기술된 부분을 읽게 되었지요.

 

사도 성 요한의 형제이자 에스파냐의 수호성인인 야곱이 에스파냐에서 복음을 전도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프레데리크 들루슈 편, 윤승준 역, 새 유럽의 역사(까치)

 

이 서술에 의하면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없을 확률이 농후해집니다. 이외에도 서양의 중세사를 다룬 유명한 저서, 서양중세사에서도 야고보와 스페인에 대한 관계를 그저 전설수준으로 서술하였더군요.


애초 야고보가 에스파냐에 복음을 전달했을 가능성이 없었다면 그의 유언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가보지도 않은 땅에 자신의 주검을 묻어달라고 간청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사기를 당한 것일까요? 존재하지도 않은 야고보의 행적을 쫓아,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는 바보들인가요?

 

 




* 이베리아 반도 지도. 야고보의 제자들이 이베리아에 가려고 했다면 바로셀로나 같은 동부 지역에 닻을 내렸을 것이다. 뭐하러 지르롤터를 거쳐 대서양까지 나갔다가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 먼 길을 돌아갔겠는가? 더군다나 그들이 탄 배는 나룻배 수준이었을텐데. 한편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를 포함하는 서북부에 위치해 있었다.  






 

국토회복운동에 구심점이 되어 준 야고보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된 시기는 9세기 초반 경이었습니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은 이슬람 세력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611,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이래, 무슬림들은 포교를 위한 전쟁을 수행해나갔습니다.


북아프리카 일대를 점령한 그들은 711,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반도까지 물밀 듯 쳐들어갔습니다. 당시 이베리아반도에 있던 서고트왕국은 이들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713년에 멸망합니다. 이후 서고트 왕국의 옛 귀족들은 이베리아반도 북서쪽 산악지대로 도주를 했다가, 718년에 아스투리아스(Asturias) 왕국을 창건하게 됩니다.


스페인은 유럽 주요국들 중 유일하게 십자군전쟁에 참여를 하지 않은 나라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1차 십자군 전쟁(1096년 발발)이 일어났을 때도 국토의 절반 이상이 이슬람 세력에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자국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입니다.


이런 국토회복운동을 레콘키스타(reconquista)라고 부릅니다. 국토회복운동은 이슬람세력이 침공했던 711년부터 1492년까지, 무려 800년이나 지속됐는데 그런 국토회복운동의 중심에 야고보가 서게 됩니다.


국토회복이라는 엄청난 과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큰 구심점이 필요했는데 스페인 사람들은 그 역할을 야고보에게 맡긴(?) 것입니다. 12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를 했던 야고보였기에 그런 중책이 맡겨졌을 겁니다.


그와 관련하여 전설이 하나있습니다. 844년에 있은 클라비호 전투에서 백마를 탄 야고보가 나타나 이슬람 무어인들을 무찔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후 야고보는 무어인을 죽이는 산티아고(Santiago Matamoros)’라고 불리기도 하였답니다.


이렇듯 야고보는 스페인 사람들을 정신적, 종교적으로 하나로 묶어 이슬람 세력에 대한 항전 의지를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야고보는 큰 구심점이 되어주었던 것입니다.

 

 



* 산티아고 개: 산티아고 도심 입구 쪽에 있는 대저택에서 기르던 개. 무척 귀여워서 한 컷!  





 

의심도 순례자들의 덕목일지 모른다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있냐, 없냐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내려줄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겁니다. 한편 고생고생하며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도 저와 같은 의문을 한 번쯤 다 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그 당시 항해기술로 예루살렘 땅에서 스페인까지 원거리 항해가 가능하겠어!’

 

저는 그런 의심(?)들도 순례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 중에 하나로 판단합니다. 덮어놓고 무조건 믿어라, 믿어라하면 맹목적인 신앙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의심하지 말라라고 적혀 있지만, 그 의심이 합리적이라면 계속해서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라는 물음 없이 교조적으로 종교를 받아들인다면 그건 종교가 아니라 세뇌일 뿐이죠. 그 세뇌가 통한다면 그로 인해, 누군가가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글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고 치자, 그럼 이제 산티아고 순례길을 무슨 의미로 걷는단 말인가?’

 

이런 의문이 드실 수도 있을 겁니다. 저는 마음으로 걸으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마음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걷는다면 산티아고가 있고, 없고의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가 될 테니까요.

 

 

 

 

 

 

 

 

 

 







투표 후에 떠나는 봄꽃트레킹

한강, 서울성곽, 수표교까지! 아기자기한 서울내부트레킹

 

  

봄날이 왔습니다. 봄바람이 부니 하얀색 벚꽃들이 잎을 흩날리고, 노란색 개나리들이 춤을 춥니다. 20대 총선도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트레킹의 계절이 다가온 만큼 정치의 계절도 다가온 것이죠.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불립니다. 413일에는 투표함에 민주주의의 꽃 한 송이를 넣으시고, 가까운 곳으로 봄꽃트레킹을 떠나보는 게 어떨까요? 이번에 소개할 코스는 서울 남산 부근에서 행해지는 일명 서울내부트레킹코스입니다. 남산 부근에 사시는 분들이라면 투표를 하시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트레킹을 즐기셔도 좋을 듯합니다.


사실 이 서울내부트레킹은 동네 뒷산을 타고 갑니다. 시작점이 매봉산(금호산)이라는 곳인데 이 산은 전형적인 동네 뒷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코스 중간에 있는 남산도 그 동네 사람들에게는 동네 뒷산이라고 할 수 있죠.


그렇게 동네 뒷산을 타고 가지만 서울내부트레킹도 역사적 스토리텔링을 풍부하게 품고 있답니다.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한강을 조망할 수도 있고, 서울성곽길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 걸음을 더하면 수표교와 광희문, 그리고 동대문으로 익숙한 흥인지문도 탐방할 수 있답니다.

    


 

 


* 한강: 매봉산 팔각정에서 바라 본 한강. 사진 오른쪽에 있는 다리는 동호대교임.





 

매 사냥터였다는 매봉산

 

트레킹은 금호산이라고도 불리는 매봉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조선시대 왕들이 매를 풀어 사냥을 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얻게 된 것이죠.


현재 매봉산은 응봉근린공원의 한 축으로 속해 있습니다. 그 응봉근린공원은 남산과 서울숲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죠. 지금이야 도심지의 확장으로 중간중간 녹지축이 잘려 나갔지만 예전에는 남산에서부터 응봉산까지 하나의 능선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응봉산은 조선 초기 동빙고(東氷庫)가 있던 산으로 지금은 개나리 축제로 유명한 곳이죠.


지금의 매봉산은 의 눈빛이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매를 볼 수 없는 매봉산이지만 트레킹팀은 다른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강을 시원스럽게 조망했던 것입니다. 매봉산 팔각정에 올라서면, 압구정동 방면으로 꺾여 나가는 역동적인 한강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답니다.


또한 날씨가 좋은 날에는 인근에 있는 아차산은 물론 멀리 팔당대교 까지 한강을 굽어볼 수 있습니다. 연이어 놓여 있는 한강다리들의 이름을 맞춰보는 것도 매봉산 탐방의 재미입니다. 지인과 동행을 했다면 한강다리 맞추기 내기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죠.

 






* 버티고개: 버티고개를 걷고 있는 트레킹팀.

 





버티고개에 앉아 있는 놈이 되지 말자!

 

밤중에 버티고개에 가서 앉을 놈이다.”

 

이런 속담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전에 별에서 온 그대라는 드라마에서 김수현이 저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 드라마를 보지 못해서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겠네요.


저 속담은 사람들한테 사기나 치고, 민폐나 끼치는 못된 놈들을 욕할 때 쓰는 말입니다. 버티고개는 약수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합니다. 버터고개, 번터고개라고도 불린 이 고개는 길이 좁은데다 도둑들까지 들끓는 터에 악명이 높았습니다.


그 도둑들을 옛날 순라꾼들이 번도라고 외치며 추격을 했는데, 그 말이 변하여 번티라 불렸다가 다시 버티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한 밤 중에 버티고개에 앉아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마도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겁니다. 그러니 남들에게 민폐나 끼쳐서 밤중에 버티고개에 앉을 놈과 같은 욕을 먹지 말아야겠지요.


물론 지금의 버티고개는 걷기에 좋은 길이 됐습니다. 안전한 보행교가 설치되어 있는데 그 길을 따라 남산의 동쪽 방면을 보며 걸을 수 있답니다. 그렇게 버티고개를 넘으면 동남쪽 서울성곽길과 만나게 됩니다. 이 구간의 성곽길은 신라호텔 후면을 돌아갑니다. 이 구간은 신라호텔의 사유지였던 곳이 개방된 터라 비교적 성곽의 흔적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 서울성곽: 이 곳을 지나면 장충단공원이 나온다.





 

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장충단공원

 

가수 배호의 노래 안개 낀 장충단공원으로 유명한 장충단(奬忠壇)은 원래 제례를 드리는 공간이었습니다. 이곳은 어영청의 분소인 남소영(南小營)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남소영은 도성의 남부지역을 방비하는 군영이었습니다.


이 자리에 장충단이 들어서게 된 건 19009월경이었습니다. 고종은 을미사변(1895)으로 살해된 명성왕후와 신하들의 넋을 추모하고자 장충단을 세웠습니다. 처음에는 시위대장 홍계훈을 비롯한 장병들만 제사를 지냈으나 이후에는 이경직 같은 궁내부 대신들도 배향되었지요. 더불어 임오군란, 갑신정변 당시에 순직한 문신들도 배향되면서 많은 문무관들이 장충단제향신위(奬忠壇祭享神位)에 봉안됐습니다

 

공원 중심부에 서 있는 장충단(奬忠壇) 비석의 앞면은 순종이 직접 쓴 글씨를 세긴 것입니다. 순종은 명성왕후의 둘째 아들이었으니 글자를 써내려가면서 울분을 토했을 겁니다.


장충단은 1910, 일제에 의해 폐사됩니다. 1920년대 일제는 장충단을 공원화하면서 그곳의 정신을 앗아가게 됩니다. 마치 종묘사직할 때의 사직단, 1922년 사직단 공원이 된 것과 같이 격하된 것이죠.


을미사변 희생자들의 넋들이 빠져나간(?) 장충단에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추모시설들이 그 자리를 채워나갔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을 당해 죽었을 때인 1909년에 일본은 장충단에서 추도대회를 열었습니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도하기 위해 박문사(博文寺)가 세워졌고, 상해사변(1932) 때 폭탄을 안고 적진(?)을 향해 갔던 육탄삼용사를 기리는 동상도 세워졌습니다.


육탄삼용사는 가미카제의 원형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피식웃음이 나옵니다. 중국군의 철조망을 제거하기 위해 그들은 폭탄에 불을 댕겼는데 생각한 것보다 심지가 빨리 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냥 폭사했습니다. 그런 3인을 위해 일제는 동상을 세웠던 것이죠. 그런 일제가 만든 시설들은 광복 후에 다 철거가 됐습니다.

 





 * 수표교: 장충단공원에 있다.

    



 

유명한 정치집회 장소였던 장충단공원

 

광복 이후 장충단공원은 정치집회 장소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정치집회 연설 중 두드러진 연설이 하나 있었습니다. 1971418,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의 선거 유세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해 427일에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당시의 김대중의 연설은 무척 파격적이었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집권하지 못하면 박정희씨의 영구집권 총통시대가 온다

 

그의 연설처럼 1972년에 유신헌법이 제정됐고,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꿈꾸게 됩니다. 19791026일에 있은 시크릿 파티에서 한 잔의 술에 섞인 한 발의 총탄이 있기 전까지 박정희는 실질적으로 총통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3권 분립은 그저 교과서에서만 존재했었지요.


이외에도 김대중은 향토예비군 폐지, 남북간 비정치적 영역 교류 실시, 지방자치제 도입 등을 언급했습니다. 지금이야 새로울 것이 없지만 당시의 시각으로는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들이라고 할 수 있겠죠.


당시 김대중의 연설을 듣기 위해 몰려든 인파는 약 100만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인파였죠.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요즘은 그렇게 대규모 선거유세를 하지 않는 분위기지요. SNS를 이용한 선거홍보가 활발히 진행되니 굳이 대규모 정치연설을 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대규모 연설회를 하든 SNS를 활발히 운영하든 중요한 건 돈 안 들리고, 정정당당하게 선거에 임하는 모습일 겁니다. 깨끗한 선거운동, 착실한 의정활동, 국민 편에 선 정치 등등... 이런 후보자들을 찾아내서 국회로 보내야 하는 게 유권자의 임무입니다.

 

그 놈이 그 놈이다

 

이 말이 맹위를 떨치면 떨칠수록 우리 정치는 발전하지 못하게 됩니다. 진짜 그 놈이 그 놈인지, ‘그 놈이 그 놈이 아닌지를 꼼꼼히 따져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유권자의 임무 아닐까요?

 

   





*  서울성곽: 성곽 주변에 핀 개나리. 







 

청계천 복원의 핵심, 수표교


장충단공원에는 수표교(水標橋)도 있습니다. 청계천에 세워져 있던 수표교는 1958, 청계천이 복개가 될 때 철거되어 홍제동으로 이전했다가 1965년부터 장충단공원 입구에 자리 잡게 됐습니다.


수표교는 세종 2(1420)에 처음 세워졌는데 그때 이름은 마전교(馬廛橋)였습니다. 마전교가 수표교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변경되게 된 건 세종 23(1441)의 일입니다. 그해 강수량을 측정하기 위해 다리 아래에 양수표(量水標) 세우게 됐는데 그것을 계기로 수표교(水標橋)로 개칭이 된 것입니다

 

수표교의 매력은 다리 난간에 있습니다. 난간이 있는 다리는 궁궐에서나 쓰였지요. 조선시대 민간의 다리는 징검다리나 섶다리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수해가 나면 다리가 흔적조차 없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수표교는 튼튼한 돌다리인데다 고급스러운 난간까지 더해졌지요. 백성들이 이용하는 다리들 중에 수표교처럼 궁궐의 양식으로 격조 높게 축조된 다리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한편 수표교의 돌기둥에는 경진지평(庚辰地坪)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영조 36(1760), 그해에 있은 대대적인 청계천 준설 과정에서 새겨진 것입니다. 이렇듯 수표교는 역사적으로 건축학적으로 무척 중요한 다리입니다.


하지만 수표교는 청계천이 복원된 지금까지도 원래 위치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청계천 자리에는 짝퉁 수표교가 세워져 있습니다.






*광희문: 4소문 중에 하나인 광희문.



    


 

아기자기한 역사트레킹 코스

 

 

광희문과 흥인지문(동대문) 탐방을 끝으로 서울 내부트레킹은 종료가 됩니다. 광희문은 4소문 중에 하나고, 흥인지문은 4대문 중에 하나입니다.


한강 보고, 서울성곽길 걷고, 장충단도 탐방하고, 대문과 소문을 관찰할 수 있는 서울 내부트레킹! 동네 뒷산에서 시작되지만 이 정도면 아기자기한 역사트레킹 코스라고 할 수 있겠죠. 봄날, 매봉산과 남산 부근에는 벚꽃과 개나리들이 활짝 피어납니다. 413일이면 만개를 했겠네요. 투표 끝난 후에 봄꽃트레킹 어떠세요? 투표함에 민주주의의 꽃 한 송이를 넣으시고, 가까운 곳으로 봄꽃트레킹을 떠나보는 거죠!

 

 

 

 

서울내부트레킹

 

1. 코스: 매봉산 팔각정 버티고개 성곽길 장충단공원(수표교) 광희문 흥인지문(동대문)

2. 이동거리: 8km

3. 예상시간: 3시간 30(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5. 교통편: IN - 청구역(5호선) / OUT - 동대문역

 

 










역사트레킹 관련 글 썼다 강사되고, 펀딩도 하게 됐네!


오마이뉴스에 쓴 역사트레킹 기사 덕분에 생긴 일들


16.04.08 15:01 최종 업데이트 16.04.08 15:01

곽동운(artpunk)             








 
▲ 서강 강원도 영월에 있는 서강에서 찍은 필자의 사진. 트레킹을 하며 전국에 있는 명소를 다니다보니, 저런 멋진 풍광에서 사진을 찍기도 한다. 영월강변 트레킹을 실시할 때 찍었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아까 전에 말씀 드렸죠. 펠리페 2세 시기에 스페인은 무적함대를 가지고 있었다고요. 그 스페인 무적함대가 임진왜란이 있기 4년 전인, 1588년에 영국의 드레이크 함대에 의해 칼레에서 대파를 당합니다. 칼레는 도버해협 중에서 도버 반대편에 있던 프랑스 땅이랍니다."


저는 이렇게 설명을 한 후 잠시 숨을 골랐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뗐습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 수군이랑 당시 무적함대랑은 비슷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닮은 점은 둘 다 수군이면서, 한편으로는 강력한 지상군이었다는 점입니다. 둘 다 래밍(ramming, 상대방 배에 부딪히기)과 보딩(boarding, 상대방 배에 올라타기) 전법을 썼는데 그렇게 했다가 둘 다 크게 패했다는 점도 마찬가지고요."


이 말을 끝낸 후 저는 몸을 틀어서 참가자들이 제 옆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오른팔로 대포를 쏘는 시늉을 했습니다.


'빵빵빵'


"당시 판옥선은 제자리 선회가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우현에서 대포를 쏜 다음에 바로 뱃머리를 돌려서 좌현에 있는 대포가 불을 뿜었습니다."


'빵빵빵'


그 말대로 저는 제자리에서 몸을 돌렸고, 이번에는 왼쪽팔로 대포를 쏘는 시늉을 했습니다.


"이에 비해 일본 수군의 주력함인 세키부네는 속도를 빨랐을지 몰라도 선회 능력이 상당히 떨어졌습니다."


이 설명을 할 때는 판옥선 때와는 달리 작은 원을 그리며 한 바퀴를 돌았습니다. 조일전쟁 당시 판옥선의 특성을 일본군의 주력 함정과 비교 설명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제 몸을 설명 도구로 썼던 셈이지요. 이때 참가자 중에 한 분이 '아~'라는 외침을 내뱉더군요. 어떤 참가자는 고개를 끄떡이며 응답 해주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온몸으로 표현해서 그랬던가요? 제 설명이 영 '꽝'은 아니었나 봅니다.






 
▲ 서울성곽 한양도성 인왕산 구간. 성곽이 곡선을 그리고 있어, 그 멋을 더하고 있다. 인왕산 역사트레킹을 실시할 때 찍은 사진.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역사트레킹과 글쓰기, 내가 할 줄 아는 두 가지


지난 3월 23일. 저는 콩닥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문경새재에 서 있었습니다.


"준비는 하긴 했는데 버벅대면 어떡하냐. 한 열댓 명은 커버가 되는데 30명은 솔직히 좀 버겁네. 핀 마이크도 써야 되고..."


당시 저는 모 기관에서 개최하는 '힐링 트레킹'에 강사로 초빙됐습니다. 제 역할은 30여 명에 이르는 참가자들을 리딩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문경새재와 관련된 역사적인 스토리텔링을 설명하는 역할도 부여받았습니다. 그냥 걷기만 한다면 굳이 저를 강사로 초빙할 이유는 없었겠지요. 우리나라에 트레킹 강사들은 많이 있으니까요. 한마디로 저는 문경새재 역사트레킹을 리딩하는 강사였습니다. 


저는 '역사트레킹 마스터'라는 거창한(?) 직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제가 유일하게 저 직함을 쓰고 있을 겁니다. 딱히 시비 거는 사람도 없으니 계속 저 직함을 쓸 생각이지요.


역사트레킹은 제가 할 줄 아는, 아니 할 수 있는 단 두 가지 중에 하나입니다. 그럼 나머지 하나는? 바로 글쓰기입니다. 저도 나이를 먹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제가 할 수 있는 것만 움켜쥐려는 습성을 보이더군요. 그렇게 움켜쥐었던 게 역사트레킹과 글쓰기였습니다. 나머지 것들은 모래알 빠지듯이 다 빠져나가고 저 두 가지만 남아있더군요.





 
▲ 꽃길걷기 서울내부트레킹에 참가한 분들을 찍은 사진이다. 이 구간은 버티고개인데 꽃길이 예쁘게 조성되어 있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오마이뉴스>에 쓴 글 덕택에 트레킹 강사가 되다


역사트레킹은 주로 서울에서 행했습니다. 열 명 남짓 되는 인원을 모아서 함께 떠났지요. 참가비가 있긴 있었습니다. 하지만 참가비는 명목상으로 받았을 뿐입니다. 그러니 항상 운영비는 마이너스였지요. 그래서 제 사비를 턴 적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제가 멍청한 걸까요? 그렇게 하면 할수록 손해가 나는 짓을 저는 왜 했을까요? 재밌어서 그랬습니다. 참가자들에게 해당 코스의 역사지식을 알려주는 것도 재밌었고, 사람들과 이것저것 세상 이야기하는 것도 재밌었습니다. 그렇게 트레킹을 진행하다 보면 에피소드들도 생기고, 아이디어도 얻게 됩니다. 글감이 생기는 것이죠. 역사트레킹을 할 때만큼은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런 내용들을 담아 <오마이뉴스>에 풀어냈습니다. 그나마 글쓰기도 할 줄 아는 것 중에 하나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쉽게 글이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리저리 자료를 찾아가며 나름대로 정성을 들여 작성을 했습니다. 사진도 예쁜 것만 추리고 추렸지요. 역사트레킹 기사를 작성할 때도 참 행복했습니다. 진행했을 때의 사진을 보면서 미소를 짓곤 했었죠.


그렇게 나름대로 공을 들여서 그랬는지 역사트레킹 관련 기사들은 그런대로 '대접'을 잘 받았습니다. 사이드에 실린 것들이 대다수였지만 그래도 몇몇 기사들은 메인탑을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기사들은 포털 사이트 첫 화면에 실리기까지 했지요. 그 기사를 보고 어떤 여자분이 트레킹에 참여하고 싶다며, 제 블로그에 자신의 전화번호를 남겨 놓기도 했습니다. 기사를 썼다가 생판 모르는 여자분의 '전번을 땄던' 셈이죠.







 
▲ 문경새재 문경새재 제1관인 주흘관.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메인에 실리든 사이드에 실리든, 그렇게 저는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차곡차곡 결과물이 쌓이게 된 것이죠. 그 결과물을 보고 모 기관에서 연락을 했던 겁니다. 트레킹 강사로 나서달라고, 트레킹을 하면서 역사 지식을 설명해달라고, 강사료는 챙겨줄 테니 걱정 말라고...


아무리 역사트레킹이 할 줄 아는 것 중에 하나라지만 그래도 '강사님' 소리를 들으며 사람들 앞에 서니 좀 떨렸습니다. 더군다나 30명 정도 되는 인원을 리딩하는 것은 처음이었으니까요.


어떻게 됐을까요? 제 첫 강사 데뷔 무대는 성공했을까요? 성공까지는 모르겠는데 망치지는 않았습니다. 버벅대기는 했지만 준비했던 걸 거의 다 풀어냈기 때문입니다.

온몸을 설명도구로 썼던 것도 플러스 요인이 된 듯했습니다. 반응이 괜찮았으니까요. 문경새재 코스가 걷기에 편해서 참가자들의 부담이 덜했던 것도 제게는 이점이었습니다. 사전답사를 하고, 어느 지점에서 무슨 설명을 할 것인지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던 것도 도움이 된 거 같습니다.






 
▲ 스토리펀딩 스토리펀딩에서 역사트레킹을 주제로 모금을 하고 있다. 역사트레킹의 부제는 길 위의 인문학이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역사트레킹 펀딩


저는 얼마 전부터 카카오 스토리펀딩에서 모금을 하고 있습니다. 주제는 역시 역사트레킹입니다. 역사트레킹펀딩도 오마이뉴스에 쌓아둔 결과물이 아니었으면 진행할 수 없었을 겁니다.

요즘 아무리 펀딩이 흔하다고 하지만 밑도 끝도 없이 모금을 할 수는 없습니다. 무언가 결과물이 있어야지 펀딩 기획서도 통과될 수 있잖아요. 기획서가 통과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게 바로 오마이뉴스에 쓴 기사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썼다가 강사도 되고, 펀딩도 하게 됐습니다. 제가 할 줄 아는 딱 두 가지를 가지고 오마이뉴스에 적용시켰더니 나름대로 좋은 결과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런 흥미로운 변화들이 제게는 큰 활력소로 다가오네요.


저는 앞으로도 계속 오마이뉴스에 글을 쓸 생각입니다. 메인에 실리든 사이드에 실리든 계속 쓸 생각입니다. 그렇게 쓰다보면 결과물이 계속 축적되겠지요. 그런 결과물로 인해 흥미로운 변화들도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 남태령 망루: 참가자와 함께 포즈 취하기!







덧붙이는 글 | http://blog.daum.net/artpunk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 절두산: 당산역에서 바라 본 절두산. 뒤에 보이는 산은 북한산이다.









이승만이 한강 다리를 끊었다고요?

 

- 한강 따라가는 한강역사트레킹

    

 


그게 정말이에요? 저 한강대교가 폭파됐었다고요? 그게 언젠데요?”

 

어느 가을날, 한강 역사트레킹을 행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참가자 중 한 분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저런 질문을 던지더군요. 다른 분들의 표정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한강대교와 한강철교가 폭발해서 폭삭 주저앉았다는 제 설명에 대한 반응들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KTX 한 대가 미끄러지듯 한강철교 위로 속도를 내고 지나가고 있더군요. 강제적(?)으로 묶인 침묵의 시간이 흘렀고, 저는 입을 뗐습니다.

 

한국전쟁 때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폭발시킨 주체가 인민군이 아닌 우리 국군이었다는 점입니다. 인민군의 남하를 막겠다고 다리를 폭파시킨 거죠. 전쟁 때는 일부러 시설물을 파괴해서 적군의 행군 속도를 늦추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강대교 폭파는 문제가 아주 많았어요. 다리 폭파로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거든요.”

 

무슨 피해가 있었는데요?”

 

사전 예고 없이 폭파가 실시돼서 당시 다리를 건너던 피난민들이 많이 죽었어요. 수 백명의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물에 빠져버렸습니다. 더 황당한 일은 다리가 끊기기 몇 시간 전까지, 수도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힘찬 목소리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는 겁니다.”

 




* 노들텃밭: 노들섬, 노들텃밭에서 바라 본 한강대교 아치형 교각.






그럼 대통령이 서울에 남아 있었는데 다리를 끊었다는 건가요?”


아닙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에 없었어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권 수뇌부들은 멀리 대전까지 피난을 간 상태였습니다. 미리 녹음했던 음성으로 계속 돌려 됐던 거죠. 그래서 실제로 그 방송 내용을 믿고 피난을 안 간 사람도 있었다고 하네요. 웃기는 거죠. 자신들만 살겠다고 도망을 간 건 그렇다 쳐도 왜 거짓말을 합니까? 서울에 있지도 않으면서 서울에 있다고 구라쳐서 국민들을 바보로 만들고...”

 

마지막 설명을 할 때는 저도 비속어를 써가며 좀 흥분을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침도 튀기면서... 마지막 설명이 끝나자 분위기가 좀 가라앉는 듯 보이더군요. 그래서 영화이야기로 방향을 좀 틀어봤습니다.

 

“<웰컴투 동막골>이라는 영화 기억나시죠? 그 영화에서 신하균이 육군 소위로 나오잖아요. 영화에서 신하균은 탈영을 하고 자살까지 시도를 했는데 그게 다 죄책감 때문에 그랬더라고요. 피란민들이 몰려든 다리를 폭파시켰는데 담당자가 신하균이었던 거죠. 그래서 신하균은 죄책감에 시달렸던 거고요. 그 부분은 한강대교 폭파에서 모티브를 따온 게 아닌가 하네요.”

 

그때 다시 한강철교 위로 무궁화호가 한 대 지나가더군요. 무궁화호가 느린 걸음을 하는 동안 트레킹 팀은 또 한 번 침묵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소풍 같은 역사트레킹이라는 리딩 원칙이 어긋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이야기 하더군요.

 

아픈 우리 현대사네요.”

 









 * 샛강생태공원: 여의도에 숨어 있는 보물인 샛강생태공원.

 







 

# 선유도가 되어버린 선유봉?

 

한강. 매일 보는 한강인데. 매일 같이 출근하러 다리를 넘고, 퇴근하면 복실이랑 같이 산책하는 그런 곳인데. 그런 한강에도 역사트레킹을 할 곳이 있는 걸까요? , 그렇습니다. 있습니다.


한강역사트레킹의 첫 번째 도착지는 절두산 성지지만 그 반대편에 있는 선유도부터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사실 선유도와 절두산은 하나의 권역으로 묶일 수 있기에 선유도부터 이야기하는 전개 방식이 틀린 것만은 아니죠.


원래 선유도는 섬이 아니었습니다. 선유봉(仙遊峰)이라고 불렸던 봉우리였습니다. 높이는 해발 40미터 정도였습니다. 해발 40미터면 썩 높은 편은 아니지요. 하지만 푸른 나무들을 품고 있는 봉우리가 강가 가까운 쪽에 우뚝 서 있었으니, 그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것이죠. 그래서일까요? 중국 사신들도 조선에 오면 꼭 선유봉이 있는 양화 일대를 유람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겸재 정선도 선유봉을 사랑한 사람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진경산수화로 유명한 겸재 선생도 한 풍류하시지 않습니까? 그런 겸재 선생이 선유봉이 자리잡고 있는 양천현의 현령으로 부임을 하게 됩니다. 그때가 1740, 조선 영조 때였죠

 

겸재 선생은 1741년에 <양화환도>, <금성평사>, <소악후월>3편의 진경산수화를 화폭에 담았답니다. 지금의 선유도 일대의 한강 유역을 사실감 넘치는 필치로 담아낸 것이죠. 특히 <양화환도>에서는 선유봉과 함께 잠두봉이라고 불렸던 지금의 절두산이 등장합니다. 또한 그 잠두봉 아래에는 양화진(지금의 합정동)의 모습도 그려져 있습니다.


선유봉과 잠두봉 사이의 물길을 느긋하게 노를 저으며 건너가는 뱃사공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양화환도>를 보고 있노라면, 그림 속에 뛰어들어 신선놀음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선유봉(仙遊峰)은 한자 풀이대로 신선이 노닌다는 봉우리입니다. 만약 진짜 그림 속으로 뛰어들 수 있다면 선유봉 꼭대기에 서 있는 노송 아래에서 차를 한 잔 마시고 싶네요. 막걸리 말고.


그렇다면 왜 선유봉은 졸지에 선유도로 내려앉았을까요? 누가 파먹었나요?

일제에 의해 여의도에 비행장이 들어설 무렵이었습니다. 일제는 활주로를 닦고 제방을 쌓는다며 명목으로 선유봉을 깎아냈습니다. 채석을 한 것이죠. 그렇게 선유봉은 채석장이 되어버렸고 봉우리는 점점 더 깎여나갔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선유봉은 계속해서 채석장으로 이용되었는데 선유봉에서 캔 돌들은 지금의 강변북로 공사 등에 이용됐다고 합니다. 그렇게 깎이다보니 선유봉은 납작하게 되어버렸고, 이후 한강이 개발되어 강폭이 넓어졌을 때 영등포쪽과 분리되어 결국 섬이 되고 맙니다.


그러고보면 선유도는 참 사연이 많은 섬이네요. 깎이고, 부서지고, 졸지에 섬이 되고... 그렇게 섬이 된 선유도는 지금 서울 시민들이 가장 많이 찾는 휴식처 중에 한 곳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와서 신선놀음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척화비: 절두산 성지에 있다.







 

# 절두산으로 개명한 잠두봉

 

이제 절두산 이야기를 해보죠. 앞서 언급한 <양화환도>에서 절두산, 즉 잠두봉은 선유봉과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뽕나무가 많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잠두봉은 그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고 하여 용두봉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중국 사신들이 조선에 왔을 때 꼭 들렀다는 잠두봉이, 겸제 정선이 화폭으로 담아낼 정도로 비경을 자랑하던 잠두봉이 왜 절두산으로 이름이 바뀌었을까요? 그것도 머리가 잘린다는 의미의 절두산(切頭山)이라는 살벌한 이름으로

   

1866.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이루어진 병인박해 때문에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죽음을 당합니다. 이때 주교인 베르뇌를 포함한 9명의 프랑스인들이 처형을 당했는데 그들은 절두산이 아닌 새남터(현재의 용산구 이촌동)와 충남 보령 갈매못 등지에서 죽었습니다.


이 병인박해가 원인이 되어 병인양요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자국의 선교사가 처형됐다는 소식에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의 로즈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프랑스 함대는 본격적인 공세에 앞서 정찰선을 파견하는데 그 정찰선이 한강 깊숙이까지 올라온 것이죠. 양화진을 넘어 서강까지 침범하고 돌아간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대원군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대원군은 아주 격분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악한 서양 세력의 흔적들을 천주교도들의 피로 씻어내겠다며 잠두봉에 새로운 처형지를 만든 것입니다. 잠두봉이 양화진이나 서강과 가깝다는 이유로 그렇게 된 것이죠. 그렇게 하여 뽕나무들이 우거졌던 잠두봉은 머리가 떨어져 나간다는 뜻의 절두산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150년 전, 그렇게 절두산은 수 천 명의 천주교인들의 목이 잘려나간 비극의 땅이었습니다. 또한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가 감시견처럼 서 있던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강물처럼 끊임없이 흘러갔습니다. 그런 흐름은 흥선대원군도 막을 수는 없었겠지요.


현재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는 절두산 한쪽에 꿔다둔 보릿자루 마냥 껑뚱하게 서있지만 절두산은 그 자체가 우리 천주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성지 중에 성지가 됐습니다. 절두산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한 번 쯤은 가볼만한 곳입니다. ‘피의 역사가 서린 근현대사의 중요한 장소인 만큼 직접 탐방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척화비를 직접 확인해 보는 것도 좋고요

 

그러고 보면 절두산이나 선유도나 공통점이 많네요. 예전에 사랑을 많이 받은 것도 똑같고, 본의 아니게 이름이 바뀐 것도 똑같고.

 






* 한강철교: 63빌딩 쪽에서 바라본 한강철교. KTX가 지나고 있다.







 

 

# 이승만이 끊은 한강대교

 

다시 한강대교 이야기.

한강대교 폭파로 인해 군사적인 피해도 엄청났습니다. 한강 북부에 남아 있던 국군의 퇴각로가 봉쇄됐기 때문입니다. 만약 순차적인 퇴각이 이루어졌다면 국군은 한강 이남에서 전열을 정비하여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할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1950714일에 전격적으로 이양된 전시작전통제권도 그렇게 쉽게 이양되지 않았을 겁니다. 아직까지도 우리에게는 전시작전권이 없습니다.


분명 한강대교 폭파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실들을 모르고 있더군요. 대다수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다리가 끊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도 절단한 주체를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미군의 공중폭격으로 교량이 폭파되지 않았냐고 물었던 참가자도 있었으니까요.


좋은 역사든 아픈 역사든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름이 바뀌었으면 왜 바뀌었는지, 다리가 끊어졌다면 왜 끊어졌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반면교사를 삼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야지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막을 수 있겠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한강역사트레킹을 마칠 때 항상 이런 말로 마무리를 짓습니다.

 

인민군의 남침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한강대교 폭파에 대한 면죄부가 부여될 수 없지요. 자기는 안전하게 대전에 내려가 있으면서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거짓말이나 해대고... 그게 바로 이승만입니다.”

 





 

한강역사트레킹

 

1. 코스: 절두산성지 양화대교 선유도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63빌딩 한강철교 노들텃밭(한강대교)


2. 이동거리: 10km


3. 예상시간: 4시간 정도(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5. 교통편: IN - 지하철 2호선 합정역 / OUT - 노들텃밭 노들텃밭에서 노량진역으로 가는 버스를 탑승할 수 있음.

 

 

 

 

 





* 인왕산 서울성곽에서 본 남산




돈 안 되는 거 뭐하러 하세요?


길 위의 인문학_ 인왕산 역사트레킹

 


 

윤동주 시인이야 굳이 제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겠죠. 유명한 서시도 잘 아실 거고요. 국어 시간에 배웠잖아요...”

 

햇살이 따사했던 어느 봄날. 당시 저는 인왕산 역사트레킹을 리딩하고 있었습니다. 역사트레킹 팀은 수성동 계곡을 지나 창의문 인근에 있는 시인의 언덕에서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시인의 언덕은 윤동주 문학관 뒤편에 있는데 그 곳에 올라서면 서촌과 광화문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입니다. 그만큼 전망이 좋은 곳이죠.


영화 <동주>에서도 보듯, 윤동주 시인은 너무나 유명한 국민시인입니다. 굳이 입 아프게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래서 저도 그냥 저 수준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그래도 <참회록>까지는 설명을 해야 할 거 같아서 첨언을 했습니다.

 

참회록도 아시죠? 그것도 배웠잖아요. 그래도 모르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니까... 참회록은 윤동주가 창씨개명을 한 후 스스로에게 느낀 자괴감을 시어로 풀어낸 것이죠.”

 

됐다 싶어서, 저는 창의문으로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설명을 듣던 참가자 한 분이 제게 불쑥 이런 말을 던지는 겁니다

 

창씨개명을 했으면 친일파가 아닌가요?”

 

잠시 저는 숨이 하고 막혔습니다. 발걸음도 잠깐 꼬였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친일파소리를 듣다니!


하지만 이내 숨을 가다듬은 후에 그 참가자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진짜 궁금하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일부러 윤동주 시인을 깎아내리려고 그런 말을 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 인왕산역사트레킹: 인왕산 성곽구간을 걷고 있는 참가자들.



 




돈 안 되는 역사트레킹

 

저는 역사트레킹 마스터라는 거창한 직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트레킹은 말 그대로 도보여행을 통해 유적지를 탐방하는 것입니다. 마스터는 필드에서는 대장 역할을 하고, 역사유적 앞에서는 문화해설사로 변신을 해야 합니다.


참가자들의 장비를 점검(?)하고, 화장실이나 주차시설을 찍어주는 것도 마스터의 책무이지요. 부상 방지를 위하여 스트레칭을 행하는 것도 꼭 챙겨야 할 임무중에 하나입니다.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답사지를 소개하는 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그간 역사트레킹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고, 그들과 함께 많은 유적지들을 탐방해왔습니다. 그렇게 만난 이들은 대체로 찬사와 격려를 보내줬습니다. 하지만 날카로운 지적도 꽤있었습니다. 역사트레킹이 걷기열풍에 편승한 단순한 파생물이라는 이야기가 대표적이었습니다.


또한 이미 많은 이들이 답사여행을 즐기고 있는데 굳이 역사트레킹이라는 명칭을 써가며 차별화 하는 것이 좀 억지 같다는 이야기도 간간이 들리더군요. 그런 쓴소리들은 그냥 그렇게 흘려 넘겼습니다. 이미 예상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애정 어린 쓴소리는 항상 저를 머뭇거리게 했습니다.

 

돈도 안 되는 거 뭐하러 하세요? 참가한 저희야 좋지만...”

 

그렇습니다. 역사트레킹은 돈이 안 됩니다. 돈을 벌 수 있는 구조가 아닙니다. 실제로 저는 역사트레킹을 하면서 돈을 벌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제 사비를 턴 적도 꽤 있었죠. 그럼 저는 왜 돈도 안 되는 역사트레킹을 해왔을까요? 재밌으니까요! 역사 공부도 하고 트레킹도 하면 몸도 머리도 상쾌해지니까요!

 






* 윤동주 문학관: 시인의 언덕





 


 

마스터는 멍석을 깔아주는 사람

 

참가자들과 함께 호흡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참가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유도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멍석을 깔아준다는 표현을 합니다. 저 혼자 마이크를 잡고 떠드는 것이 아니라 참가자 각 개인이 스스로 보고 느끼게 멍석을 깔아주는 것이죠.


멍석이 잘 깔리면 참가자들은 스스로 그 멍석 위로 올라오더군요. 그러다보면 얼음처럼 굳어 있던 참가자들의 입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합니다. 한들거리는 봄꽃을 바라보며 함박웃음을 짓기도 하고, 맛집이야기로 군침을 흘리기도 하더군요. 그렇게 즉흥적인 반응들이 이어지다 어느 순간부터는 고품격(?)의 이야기들이 흘러나옵니다.


정약용 트레킹에서는 다산 선생의 실학 정신과 조선 후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공주 우금티 트레킹에서는 우금티 전투와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제가 굳이 아이스브레이킹을 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어색함을 깨버리고, 나중에는 해당 주제에 맞혀 토론까지 즐기더군요.


이런 모습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전 흐뭇했습니다. 요즘같이 파편화된 사회에서 역사에 대한 지식을 나누며, 함께 도보여행을 즐긴다는 것 자체가 좋은 일이 아닙니까? 헬조선이니, N포세대니... 하는 말들이 난무하는 요즘인데.

 

 

 




* 윤동주문학관: 서시





 


윤동주가 친일매국노?

 

다시 윤동주 이야기로 돌아와서.

1941년 겨울, 윤동주는 히라누마 도슈라는 창씨명을 얻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윤동주 개인의 의사가 아닌 창씨개명이었다는 점이죠. 집안 전체에서 행해진 것이지 윤동주가 직접 행정기관에 찾아가 창씨개명 서류에 도장을 찍은 게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의도하지 않은 자신의 창씨개명에 대해서까지도 참회를 했던, ‘참회록을 썼던 윤동주였습니다.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그의 고뇌가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한편 당시는 중일전쟁이 이미 발발했고, 태평양전쟁까지 일어난 상태였습니다. 일제의 침략 야욕이 극에 달할 때였습니다. 식민지 조선에도 총동원령이 내려져 식량이 배급되기에 이릅니다. 이때 식량을 배급받기 위해서는 창씨개명이 필수였다고 합니다. 그런 생존과 직결된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에 창씨개명을 한 사람들을 모두 친일 매국노로 분류한다는 건 적절하지 않은 일입니다. 실제로 반민특위에서도 창씨개명 자체를 친일행위로 보지 않았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일본 황군을 화끈하게 격려하고 찬양한 시인 서정주나 일본이 이렇게 빨리 망할 줄은 몰랐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소설가 이광수하고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윤동주가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어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지요.


그가 진짜 친일매국노였다면 교도소에서 옥사했겠습니까? 윤동주도 나름대로 지식인 아니었습니까? 그가 진짜 친일매국노였다면 그의 재능을 팔아 일제와 잘 붙어먹었겠지요. 그래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는 서정주나 이광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반대편에 섰고, 결국에는 타지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겁니다

 

이런 윤동주와 관련된 이야기를 그 참가자에게 해주었습니다. 버벅대면서 이야기를 했는데도 내용은 전달됐는지 그 분은 고개를 끄덕거리더군요. 어쨌든 그 분이나 저나 함께 호흡을 맞춘 것입니다.

 






 * 성곽에 핀 풀과 꽃: 인왕산 성곽 구간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요즘도 인문학은 강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꺾일 만도 한데 그 위력은 계속 되더군요. ‘먹방처럼요. 아무리 사회가 각박하다고 해도 인간의 근원적인 부분을 건드려주는 분야는 계속 건재하나 봅니다. 근원적인 지적 욕구! 근원적인 식욕

 

역사트레킹의 부제는 길 위의 인문학입니다. 트레킹을 하면서, 인문학을 느껴보자는 뜻입니다. 물론 그 중심에는 역사가 균형추를 잡고 있습니다. 그 균형추 옆에 다른 영역도 배치를 해두었죠. 세계사, 신화, 종교, 국제정치, 육식 문제까지... 역사만 하면 재미없으니까요. 그런 이야기들... 트레킹을 하면서 참가자들과 함께 그런 다양한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스토리펀딩에서도 길 위의 인문학이라는 취지에 맞춰 다양한 이야기를 전개할 생각입니다. 그래야 재밌죠!

 

 


 

인왕산 역사트레킹

 

1. 코스: 사직단 인왕산 입구 수성동계곡 인왕산(서울성곽) 윤동주 기념공원창의문

2. 이동거리: 6km

3. 예상시간: 3시간 정도(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5. 교통편: IN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 OUT - 부암동 부암동(윤동주 기념공원 옆 정류장)에서 버스에 탑승한 후 다시 경복궁역으로 돌아올 수 있음.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