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KBS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이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공영방송 50주년 특별기획 드라마'라는 명칭에 걸맞게 수준 높은 영상미를 펼쳐보였다. <고려거란전쟁>은 <불멸의 이순신>, <태조 왕건> 등등...

수많은 명품 사극의 뒤를 이를 것인가? 아직은 극 초반이니 좀 두고봐야 할 것이다.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거란과 사이가 나빴다. 발해를 멸망시켰다하여 거란을 짐승으로 나라로 폄하했다. 고려가 건국했을 때 거란에서 선물로 낙타 50마리를 보냈는데 그 낙타를 굶겨죽이는 일이 있을 정도였다.

<고려거란전쟁>의 초반은 대량원군에 대한 이야기로 전개되고 있다. 대량원군은 자신의 이모인 천추태후로부터 수많은 위협을 받는다. 하지만 그 위협들을 다 극복한 후 결국 왕으로 등극한다. 그가 바로 고려 8대왕 현종(재위 1010∼1031)이다.

극에도 나오듯이 대량원군은 강제로 승려가 됐는데 신혈사라는 곳에 은거하게 된다. 이 신혈사가 지금의 진관사다.

사찰 음식으로 유명한 그 진관사인데 진관 한옥마을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여행에세이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의 11꼭지에는 '진관사 역사트레킹'이 기술되어 있다. 아래는 그 내용의 일부다. 사극 <고려거란전쟁>에 진관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스리슬쩍 숟가락을 올려본다~^^

 

 

 


 

 

 

 ● 기막힌 스토리가 숨어 있는 진관사

수도권 최대의 한옥마을인 은평 한옥마을을 지나 마지막 탐방지인 진관사로 향한다.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4대 명찰이 있다. 동쪽에 불암사, 남쪽에 삼막사, 북쪽에 승가사. 그럼 서쪽은? 진관사다. 천년 고찰인 진관사(津寬寺)는 고려 현종 때인 1010년에 만들어졌다. 고려 제8대 왕인 현종이 직접 창건한 이 절은 진관대사를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태조 왕건의 손자였던 현종, 즉 왕순은 어릴 적에는 대량원군(大良院君)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왕건의 손녀였던 천추태후로부터 어릴 적부터 박해를 받은 왕순은 한때 강제로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천추태후가 그의 이모가 되기도 했는데 이것은 당시 얽히고설킨 왕실혼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같은 왕건의 혈통이자 이모뻘의 천추태후로부터 살해위협까지 받게 된 건 그가 왕위계승자였기 때문이다. 당시 천추태후는 애인인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왕으로 등극시킬 셈이었다.

그런 천추태후의 마수가 진관사에까지 뻗치게 됐다. 원래 진관사 자리에는 신혈사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진관이라는 승려가 홀로 수도를 하고 있었다. 승려가 홀로 거처하는 곳이라 천추태후 입장에서는 무언가 거사를 치르기에 적당한 곳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랬다. 천추태후는 신혈사에 자객을 보내 왕순을 죽일 셈이었다. 천추태후의 의도대로 왕순이 자객에 손에 비명횡사를 했다면, 현종도 탄생되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의 진관사도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천추태후의 의도를 눈치 챈 진관은 본존불을 안치한 수미단 밑에 굴을 파서 왕손을 숨기는 기지를 발휘한다. 수미단은 불상을 올려놓는 단을 말한다. 수미산은 불교에서 말하는 상상의 산을 말하는 것이고.

그렇게 진관에 의해 목숨을 건진 왕순은 3년 뒤, 개경으로 돌아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고려 8대 왕 현종이다. 현종은 1010년, 신혈사 자리에 대가람을 세우고 진관 대사의 이름을 본 따서 사찰 이름을 지으니 그 사찰이 바로 지금의 진관사다.

조선시대 진관사는 사가독서제로 애용된 곳이다. 사가독서제란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정진하게 만든 제도로 세종시대에 처음 도입되었다. 풍광이 수려하고 계곡이 시원한 진관사라면 학문을 닦기에 제격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사가독서제로 진관사를 다년간 이들은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이었다.

진관사는 한국전쟁동안 많은 전각들이 소실된다. 그래서 지금의 진관사는 천년고찰의 웅장함이 묻어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진관사는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모으고 있는 사찰이다. 진관사 숲길과 계곡을 걷다보면 몸도 마음도 깨끗이 씻겨 내려가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런 느낌들이 좋아서 발걸음들이 진관사로 향하는 것이 아닐까?

 

 

*진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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