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주사지 : 본당터를 중심으로 4개의 탑이 보인다.

 

 

 

 

 

 

 

2021년 6월 11일 금요일.

 

이날은 충남 보령시에 있는 성주사지를 탐방한 날이다. 탐방한 지 두 달이나 지나서 후기를 작성하다니...ㅋ

 

성주사! 후기 신라시대 대표적인 선종 사찰로 불렸던 곳. 하지만 지금은 폐사지가 되어 허허로움이 갈대처럼 나붓기는 곳. 한편 경북 성주군과 이름이 비슷하기에 성주사도 그곳에 있지 않나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곳. 사실 필자가 그랬다. 성주사지라고 하니 경북 성주군부터 생각한 것이다. 맛있는 성주 참외를 떠올리면서...^^

 

답사를 한 날은 무척 무더웠다. 그런 날은 인근에 있는 대천 해수욕장에서 머드팩을 하는게 훨씬 남는 장사일지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무거운 배낭을 메고 성주사지가 있는 성주면으로 향했다. 보령 시내에서 성주면사무소 입구까지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했는데 약 15분 정도 소요됐다. 면사무소 입구에서 성주사지까지는 약 1km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어렵지 않게 걸어갈 수 있다. 성주사지 바로 앞까지 가는 버스 노선도 있지만 자주있지 않다.

 

성주천을 따라 이동을 하다보면 넓게 펼쳐져있는 성주사지가 나타난다. 성주산과 만수산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데 그 품을 아늑하게 감싸고 있는 형상이다. 서해안에 있는 산들이 그렇듯 해발고도가 높지 않은 올망졸망한 봉우리들이 옛 절터의 뒷배경이 되어주고 있다.

 

성주사의 원래 이름은 오합사였다. 백제 법왕이 왕자 시절인 599년에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때는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원찰로 오합사가 창건된 것이다. 한편 백제 법왕은 같은 해인 599년에 제29대 왕으로 등극한다. 그리고는 그 다음해인 600년에 승하하고 만다. 직전 28대 혜왕도 재위 기간이 딱 1년이었다. 598년에서 599년.

 

오합사가 성주사로 이름이 바뀌게 된 건 신라 후기였다. 성주사(聖住寺)의 의미를 풀어보면 '성인이 거주하는 절'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성인은 무염국사를 지칭한다. 태종 무열왕의 8대손인 무염은 어려서부터 총명함을 드러냈다. 아홉살 때에는 해동신동으로 불렸을 정도다. 무염은 22살 때인 821년(헌강왕13)에 당나라에 유학을 갔다. 이후 무려 20년 동안이나 중국 일대를 다니며 자비를 실천했는데 이를 두고 '동방의 대보살'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다.

 

무염이 유학을 했을 당시 중국에는 경전을 중심으로 한 교종에서 벗어나 수행을 강조하는 선종이 유행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무염도 현실의 상황에서 벗어난, 중앙 귀족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던 교종을 비판했다.

 

 

 

 

 

*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그가 중국에서 귀국했을 때 보령 지역의 호족인 김양에 의해 오합사의 주지로 자리를 잡게 된다. 이때 신라에서는 구산선문이 크게 번성하게 된다. 구산선문은 경전 위주의 교종과는 달리 수행에 중심을 둔 선종의 9개 선문을 말한다. 한마디로 신라 말기에 9개의 선종 문파가 산을 중심으로 세워졌다는 것이다. 그중 무염은 선승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하게 되고, 더불어 그가 주지로 주석하는 성주사도 구산선문의 대표적인 사찰로 주목받게 된다.

 

그런 무염의 업적을 기리고자 성주사터 한편에는 큰 비석이 세워져있다. 비각으로 보호되고 있는 이 비석은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이다. 대낭혜는 무염의 시호이고, 백월보광은 탑호이다. 줄여서 낭혜화상탑비라고도 불린다. 국보 제8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후기 신라의 대문장가인 최치원이 비문을 지었다고 한다. 높이가 무려 4.55미터에 달하는 이 거대한 비석에는 무염과 관련된 5천여 자의 글자가 새겨져있다.

 

한편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최치원의 사산비명 중 하나다. 사산비명은 최치원이 지은 비석문 가운데 사료적 가치가 높은 4개를 묶어서 만든 책이다. 그럼 그 대상인 4개는 무엇인가? 아참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가 그중 하나라고 했지.

 

1. 진감선사대공령탑비(국보 제47호): 지리산 쌍계사

​2. 지증대사적조탑비(국보 제 315호): 경북 문경 봉암사

3. 대숭복사비: 경주 대숭복사터

4.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 제8호)

 

대숭복사비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3개의 비문이 다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는데다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니 사산비명을 주제삼아 탐방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신라 말기 비운의 천재였던 최치원의 자취를 따라서... 성주사터에 왔으니 벌써 한 곳은 다녀온 셈이다.

 

이제 절의 중심부였던 곳으로 향해가보자. 총 4개의 탑이 눈길을 확 사로잡을 것이다. 하나는 오층석탑이고, 나머지 3개는 삼층석탑이다. 삼층석탑은 열을 지어 서 있고, 오층석탑은 그것들과는 외떨어져 있다. 오층석탑과 삼층석탑 사이에는 본당 건물터가 있다.

 

하나도 아닌 4개의 탑이 한 곳에 집중적으로 서 있다는 것이 무척 흥미로웠다. 건물 하나에 탑 하나를 두고, 사찰의 가람배치에서 1당 1탑이라고 한다. 탑이 두 개면 1당 2탑이라고 한다. 1당 3탑까지는 들어봤는데 1당 4탑은...? 하여간 우뚝 서 있는 4개의 탑이 있어 그런지 성주사지는 그 어떤 폐사지보다 덜 쓸쓸해보인다.

 

탑들을 둘러보기 전에 본당터부터 살펴보자. 이 본당터 가운데에는 연꽃무늬로 새겨진 석조대좌가 있는데 오랜 시간이 흘러서인지 사각형의 석조대좌는 군데군데가 훼손되었다. 외형이 훼손되었지만 그래도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해보았다. 아니 건축학적 상상력인가? 이 석조대좌에는 큰 불상이 있었다고 전한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 불상은 석불이 아닌 철불이었다고 하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들고 나갔다는 것이다. 이런 괴씸한!

 

 

 

 

 

* 성주사지 오층석탑

 

 

 

 

 

 

 

오층석탑은 6.6미터로 성주사지에 남은 문화재들중에서 가장 높다. 오층석탑은 성주사지의 기준점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처럼 본당터 앞에 우뚝 서 있다. 2중 기단 위에 5개의 탑신이 올려져있는데 1층 탑신이 두드러지게 길쭉하지만 탑 전체가 늘씬한 상승감을 자랑하며 균형있게 층층을 이루고 있다. 안타깝게도 꼭대기 부분인 상륜부는 훼손이 됐다.

 

성주사지 오층석탑은 신라 후기에 제작되었는데 2층 기단과 1층 탑신 사이에 괴임돌이 받혀졌다. 이렇게 괴임돌이 받혀지는 형식은 신라시대 석탑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형태다. 아무래도 오층석탑을 만든 석공은 시대를 앞서간 아티스트가 아니었을까... 성주사지 오층석탑은 보물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제 열을 지어 서 있는 세 개의 탑을 살펴보자. 얼핏보면 세 쌍둥이 탑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보면 각 탑의 높이가 제각각이다. 서탑은 4미터, 중간탑은 3.7미터, 동탑은 4.6미터이다. 이 세 탑은 건너편 오층석탑처럼 2층 기단과 1층 탑신 사이에 괴임돌이 따로 받혀진 형태다. 그런데 이 세 개의 탑의 1층 탑신에는 무언가가 조각되어 있다. 문틀모양과 문고리 장식을 새겨넣은 것이다. 탑에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독특함 때문인지 세 개의 탑은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서탑은 제47호, 중간탑은 제20호, 동탑은 제2021호이다. 동탑은 2019년도에 승격됐는데 이전에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였다.

 

한편에 서 있는 석불입상도 친견했다. 훼손이 심해 시멘트로 보수되어 있는 석불은 좀 어눌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좀 더 친근한 모습이었다. 마을에서는 미륵불로 불린다고 한다. 오랜동안 이곳에 서 있으면서 성주사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석불일텐데... 그렇게 묵묵하게 이 터를 지켜준 석불 앞에서 크게 몸을 숙여 합장을 하였다.

 

성주사지도 폐사지이기에 허허로움이 탐방 내내 느껴졌지만 그래도 석불도 있고, 석탑도 4개나 있어서 그나마 덜 외로운 느낌이었다. 뒤쪽에 둘러져 있는 성주산도 압도하는게 아니라 아늑해 보이고... 그렇게 성주사지 탐방이 종료가 됐다.

 

 

 

 

 

* 세 개의 탑

 

 

 

 

 

 

 

* 성주사지 석불입상

 

 

 

 

 

 

 

 

* 세 개의 석탑: 사진 가운데 하단부에 석불입상이 보인다.

 

 

 

 

 

 

 

* 본당터 석조계단: 오리지널 석조 계단을 1986년에 누가 들고 갔다고 한다. 그 무거운 걸 가져가다니! 이 문화재 도둑놈아! 현재 계단은 옛 사진을 근거로 복원한 것이다.

 

 

 

 

 

 

 

 

 

 

 

 

 

 

 

 

 

* 흥법사지 3층석탑

 

 

 

 

 

 

 

 

2021년 4월 2일 금요일.

이날은 원주에 있는 흥법사지를 탐방했다. 이전 포스팅에도 언급했듯이 강원도 원주 일대에는 큰 폐사지들이 여러개가 있다. 원주시 부론면에 자리잡고 있는 거돈사지와 법천사지에 이어 흥법사지에 대한 포스팅을 해본다.

 

여기서 잠깐 의문이든다. 왜 강원도 원주와 경기도 여주에 큰 폐사지가 많은지에 대해서... 이곳은 남한강이 흐르고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 뿐만아니라 고려시대에도 남한강 수계는 무척이나 중요한 교통로였다. 고려는 이곳에 흥원창이라는 조창을 설치하여 세곡을 거두어들였다. 이곳은 현재 원주시 부론면에 위치해있다.

 

다시 흥법사지 이야기로. 흥법사지는 원주시 지정면에 자리잡고 있는데 뒤쪽으로는 영봉산이라는 야트막한 산이 둘러싸고 있다. 영봉산은 소금산과 걸어서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데 소금산에는 유명한 출렁다리가 놓여 있다. 워낙 유명해서 그런지 소금산 출렁다리는 주중에도 사람들이 티케팅을 하더라.

 

신라 말에 창건된 흥법사는 고려 개국시기에 크게 중창된다. 흥법사에 주석한 진공대사 충담이 태조 왕건의 왕사였기 때문이다. 신라의 귀족 출신인 충담은 당나라에 유학가서 불법을 연구하는데 충담이 귀국하자 왕건은 그를 극진히 대접하며 왕사로 임명했던 것이다. 왕건이 그를 얼마나 극진히 대접했냐면, 진공대사가 열반에 이르자 탑비에 들어가는 비문을 왕건 자신이 직접 지었다는 것이다. 탑비의 비문은 고위 학자들이 짓는게 일반적인데... 왕이 직접 짓다니!

 

흥법사지도 여느 폐사지처럼 주변에 논과 밭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우뚝 서 있어야 할 당간지주가 없기에 그 역할을 삼층석탑이 대신해주고 있다. 흥법사지 삼층석탑은 전형적인 고려시대 3층석탑인데 1층 탑신부에 문고리를 조각해 부처님의 사리가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사진에도 보이듯 흥법사지 3층석탑은 여러부분의 석재들이 파손됐다. 옥개석은 끝단이 잘려나갔고, 하부 기단도 금이 갔다. 탑신 전체도 약간 기울어진 모습이다. 나중에 해체복원도 필요해보인다. 이렇게 훼손된 민낯을 드러낸 흥법사지 3층석탑이지만 그래도 당당히 보물 464호로 지정되어 있다. 약 3.7미터 달하는 3층 석탑이 없었다면 흥법사지의 모습은 무척 쓸쓸했을지 모른다.

 

 

 

 

 

 

 

 

* 진공대사탑비: 중간에 비가 없고, 받침돌인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만 있다.

 

 

 

 

 

 

 

 

 

* 진공대사탑비: 머리 부분에 네모난 홈이 있다. 무언가 별도의 장식이 있었을 것이다.

 

 

 

 

 

 

 

 

 

눈길을 돌려 드디어 진공대사탑비를 바라보았다. 3층 석탑과 아주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 구조를 보니 이런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석탑은 사찰 가람의 중심이잖아. 통상적으로 무슨무슨 대사 탑비나 부도는 사찰 외곽에 조성하지않나?'

 

그만큼 진공대사의 위상을 보여주는 구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공대사가 열반에 든 건 940년이었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것이 936년이었으니 한참 고려의 국운이 뻗어나갈 때 진공대사탑비가 만들어지고 흥법사가 크게 중창된 것이다.

 

사찰의 중심부에, 그것도 태조 왕건이 비문을 작성했으니 흥법사를 방문한 사람들은 당연히 진공대사탑비를 보려고 했을 것이다. 필자도 그랬다. 한자 실력이 낮지만 그래도 봐야쥐~

 

이게 뭐야! 비좌 역할을 하는 귀부와 머리장식인 이수만 있는 것이다. 왕건이 작성한 비문을 보고 싶단 말야! 내 한자 실력을 만방에 알리고 싶단 말야!^^

 

귀부와 이수 사이에 긴 막대처럼 있어야 할 비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반출됐다 다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렇게 세파에 시달렸는지 비는 4조각으로 짤려나갔다고 한다. 무슨 조각피자도 아니고 말야.

 

중간에 있어야 할 비가 타향에 있지만 귀부와 이수만 있는 현재의 모습도 그 자체로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부터 현재의 모습이 완성품이었나 할 정도로 귀부와 이수가 서로 딱 맞아떨어져 보인다. 그래서 보물 463호로 지정되어 있다. 얼핏봤을 때 작은 장갑차처럼 보였는데 그걸 타면 수륙양용으로 달릴 수 있으려나?

 

보시다시피 용인지 거북이인지 정말 정교하게 잘 조각을 해놨다. 발톱과 갑옷도 보시라. 하나하나 부족한 부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화려한 장식을 한 머릿돌인 이수도 보시라. 용이 날아갈 거 같지 않은가?

 

이렇게 귀중한 문화재가 있지만 흥법사지는 방치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위가 논밭이라 그런지 인근에는 농업 쓰레기들이 많이 보였다. 탑비 옆에는 담배꽁초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흥법사지가 유명하지 않아서인지 마땅히 주차할 곳도 없어보였다.

 

흥법사지를 사적지로 지정하자는 한 시민단체의 현수막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직선거리로 20km도 안 떨어져 있는 원주시 부론면의 법천사지와 거돈사지는 사적지로 지정되어 잘 보호를 받고 있다. 하지만 흥법사지는 일부러 찾지 않는 이상은 발길이 쉽게 가지 않을 정도로 방치되어 있다. 보물 2점이 있고, 인근에 소금산과 연동하면 많은 이들이 탐방할 수 있는 소중한 문화 유산인데 말야.

 

예산 쏟아부어서 이상한 조형물 만드는 것보다 있는 문화재 잘 활용하면 그것 자체가 문화재 힐링 여행이 되는 것이다.

 

 

 

 

 

 

 

 

* 흥법사지 3층석탑

 

 

 

 

 

 

 

 

* 흥법사지: 주위는 논밭으로 변했다.

 

 

 

 

 

 

 

 

 

 

* 흥법사지: 방치된 석물들. 왼쪽 연꽃 받침돌은 석등의 일부분이었을 것이다.

 

 

 

 

 

 

 

 

 

 

* 흥법사지: 국가사적 지정 청원 현수막

 

 

 

 

 

 

 

 

 

 

 

 

* 미륵리5층석탑

 

 

 

 

 

 

 

2021년 3월 8일 월요일.

 

이날은 충청북도 충주에 있는 미륵대원지와 계립령을 탐방하러 갔다. 이 답사기는 3월 31일에 작성하고 있으니 거의 20일 만에 정리하고 있는 셈이다. 필자가 게으른 것도 있지만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다. ^^

 

미륵대원지는 온천으로 유명한 수안보에 자리잡고 있다. 정확히는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이다. 서울에서 수안보까지 다이렉트로 도착하는 시외버스를 타면 가장 좋다. 하지만 그 버스편이 많지가 않다. 수안보의 명성이 예전만 못한 것이다. 차선책이 있다. 동서울이나 강남터미널에서 충주터미널까지 가는 시외버스를 타는 것이다. 생각보다 버스편이 꽤 많아서 좋다. 이후 충주터미널에서 수안보행 시내버스를 탄다. 수안보행 시내버스도 적은편이 아니다. 어쨌든 수안보는 미륵대원지를 가기 위한 전진 기지가 되는 셈이다.

 

2016년이었다. 당시 필자는 <한국보건복지인력개발원>이라는 곳에서 시행하는 프로그램에 강사로 참여를 하고 있었다. 보건, 위생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트레킹을 리딩하는 것이었다. 문경새재 트레킹을 리딩하는 것이었는데 다른 교육 프로그램보다 필자의 트레킹 강의가 훨씬 더 인기가 많았다. 수강생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우천시에도 우비를 뒤집어 쓰고 문경새재를 누볐던 것이 기억이 난다. 당시 강사료도 짭짭했는디...ㅋ

 

갑자기 이렇게 문경새재에 대해서 언급하는 건 이유가 있다. 문경새재의 전진 기지도 수안보이기 때문이다. 수안보에서 미륵리 방면으로 가면 미륵대원지가 나오고, 괴산군 연풍면 연풍리 방면으로 가면 문경새재가 나온다. 문경새재를 두고 충북 괴산군 쪽에서는 연풍새재라고 부른다.

 

미륵대원지든 문경새재든 둘 다 아름다운 곳이다. 국내여행을 좋아하시고 트레킹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두 곳 모두 방문하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미륵대원지는 하늘재라고도 불리는 계립령이 있어 이 둘을 묶어 트레킹을 할 수 있다.

 

수안보에서 미륵대원지까지는 약 10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주머니가 가벼운 뚜벅이가 택시를 타다니! 그래도 시간 관계상 어쩔 수 없었다. 중간에 월악산 국립공원을 지나가는데 눈이 호강할 정도로 아름다운 숲길이 펼쳐져 있었다. 그 울창한 숲길에는 인적도 없고 차편도 드문드문이라 참 묘한 느낌이 들더라.

 

미륵대원지에 들어섰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북향을 향하고 있다는 미륵리 석조여래입상을 친견할 생각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드디어 이곳에 왔구나!

 

'에이~ 이게 뭐야!'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공사중이었다. 공사장 가림막 넘어 곁눈질로 친견할 수밖에 없었다. 국내 유일의 북향 석불을 보러왔더니만 곁눈질이라니!

 

 

 

 

 

 

 

*미륵대원지: 미륵대원지에 있는 대표적인 석물들을 한 컷에 담아보았다. 미륵리5층석탑, 미륵리석등,미륵리사각석등.

 

 

 

 

 

 

 

미륵대원지(彌勒大院址)는 충북과 경북을 잇는 하늘재에 자리잡고 있는 사찰로 원(院)을 겸하고 있는 특별한 형태의 절이었다. 원은 공적인 임무를 띈 관리나 상인들에게 숙식과 편의를 제공하는 공공 숙소를 말한다. 원은 대개 말을 다루는 역(驛) 인근에 설치하였다. 이를 두고 역원(驛院)제도라고 불렀다. 역원은 30리마다 세워졌는데 중앙의 행정력을 지방까지 빠르게 전달하는 첨병 역할을 했다. 조치원, 퇴계원이 바로 그 역원이었다. 그래도 가장 유명한 지명은 어디? 이태원이다. 우리가 아는 그 이태원! 이태원이 원래 클럽이 즐비한 곳이 아니었다니깐~!^^

 

보물 제96호인 충주미륵리석조여래입상은 미륵대원의 본존불이었다. 미륵리석불도 고려 초기에 만들어져서 그런가? 키가 엄청 크시다. 무려 10.6미터에 달하신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불인 관촉사 은진 미륵이 약 18미터에 달하는 거에 비하면 작은 수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10미터가 넘는 큰 석불이 산 중에 있다는게 신기할 정도다. 실제로 석불 뒤편에 올라서면 가까이로는 북바위산 일대가, 멀리는 월악산의 영봉 일대가 보인다. 그 광경을 보면 석불이 북향을 향하는게 아니라 주위 산들을 굽어보시는 거 같더라.

 

물론 이런 장면은 사진 속에서 봤다. 지금은 공사중이니까...

 

미륵대원은 석굴사원이다. 거대한 암석을 쪼개서 굴 형식으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석굴 사원이다. 돌들을 차곡차곡 쌓아서 감실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거대한 충주미륵리석조여래입상을 모신 것이다. 처음에는 지붕 역할을 하는 목조 건축물이 있었을 거라고 추측되는데 지금은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돌들이 석불에 둘러져 있으니 석굴사원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더불어 공사 이전에는 뒤편까지 올라갈 수 있어 석불이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맞출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시선에는 월악산 영봉 일대가 보이는 것이고.

 

하지만 지금은 공사중이라 석불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미륵리 석불의 강한 기운을 느끼고파 한걸음에 달려왔는데... 그런 아쉬움은 충주 미륵리 오층석탑에 투영할 수밖에 없었다. 꿩대신 닭이라고 해야 하나?

 

보물 제95호인 미륵리 오층석탑은 높이가 6미터에 달한다. 바로 뒤에 있는 석불도 크고 석탑도 크다. 얼핏보면 6층 석탑같은 이 석탑의 기단은 자연석에 가까워보인다. 앞쪽에 있는 돌거북처럼 그 자리에 있던 자연석을 다듬어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탑신과 옥개석을 올려 지금의 석탑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다.

 

1층 탑신은 기단처럼 아주 거대하지만 2층 탑신은 확 줄어든 모습이 정교성을 떨어뜨린다. 그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뒤에 있는 석불도 디테일은 떨어지니까. 필자는 그런 덜 정교하고 더 순박한 불교 미술도 좋아한다. 정교한 것은 정교한대로 투박한 것은 투박한대로 눈길이 가는게 우리들의 시선이 아니겠는가.

 

 

 

 

 

 

* 미륵리석조여래입상: 옛날 사진을 필자의 카메라로 찍었음.

 

 

 

 

 

 

 

미륵리사각석등, 미륵리석등, 거북바위, 온달장군 공기돌 등등... 미륵대원지는 협소한 공간에 문화재들이 오밀조밀하게 뭉쳐있고, 옆쪽으로는 새로 지은 절이 있어서 그런지 다른 폐사지와는 달리 분주함이 느껴졌다. 다른 페사지에서 느꼈던 허허로움은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띄엄띄엄이지만 계속해서 탐방객들이나 기도객들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그곳에 문화해설사가 배치되었을까!

 

다른 페사지에도 보물이나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있다. 국보급 문화재를 품고 있는 페사지도 있다. 하지만 그런 곳에서도 어김없이 허허로움이 강하게 밀려든다. 넓디넓은 공간에 덩그러이 남아 있는 석조물들이 세상사의 흥망성쇠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거 같아서다.

 

하지만 미륵대원지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으니 폐사지의 느낌이 덜하다는 것이다. 역시 사람이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폐사가 된 것도 사람 때문이겠지만 그 곳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도 사람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의 발걸음을 이끈 것은 누가뭐래도 미륵리 석불이다. 다른 폐사지에는 석불이 없으니 덜 할 수밖에 없지만 미륵대원지에는 석불이 있으니 발걸음이 분주할 수밖에... 그렇게 필자의 발걸음을 이끈 것도 미륵리 석불 때문이었지.

 

미륵대원지 옆쪽으로는 넓은 마방터와 3층 석탑, 또 불두(부처님 머리)가 있다. 그 옆쪽으로는 하늘재 입구가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편에서~

 

 

 

 

 

 

* 거북바위: 미륵대원지의 마스코트 같은 거북바위. 형태를 봐서는 당연히 등에 비석을 올려놓았을 거 같은데 인근에서 비석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 이 형태가 최종결과물인 셈이라 더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 미륵리석조여래입상과 5층석탑: 빨리 공사가 끝나길 기원해본다.

 

 

 

 

 

 

* 미륵리석등

 

 

 

 

 

 

 

 

* 미륵리사각석등

 

 

 

 

 

 

 

 

* 공기돌: 온달장군이 가지고 놀았다는 공기돌. 그럼 온달장군은 헤라클라스인가? 충북 일대에는 온달장군과 관련된 설화가 아주 많이 있다.

 

 

 

 

 

 

 

* 미륵대원지 가는법

 

1. 동서울터미널에서 수안보행 시외버스 탑승. 편수가 많지 않음. 약 2시간 40분 소요. 이후 미륵대원지행 시내버스 탑승. 거리는 약 11km임.

 

2. 서울강남터미널이나 동서울터미널에서 충주터미널행 고속버스(시외버스) 탑승. 이후 미륵대원지행 시내버스 탑승. 미륵대원지행 시내버스는 충주시내에서 출발하고 수안보를 경유함. 충주버스터미널에서 미륵대원지까지는 약 33km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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