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두껍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꾹 참고 써본다. 내가 추천하는 브런치북은 <트레킹은 생각창고>다. 그렇다. <트레킹은 생각창고>는 내가 쓴 작품이다. 잘나도 내 작품, 못나도 내 작품이기에 염치불구하고 추천을 해본다.

 

<트레킹은 생각창고>는 사연이 많은 원고다. 이 원고의 오리지널 제목은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이었다. 오리지널 제목에도 나와 있듯이 이 원고는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서 행한 역사트레킹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역사트레킹은 무작정 걷는 것이 아니라 트레킹을 행하며 문화유산을 답사하는 아주 고급진 아웃도어 활동이다. 역사트레킹은 아웃도어에서 행해지는 터라 요즘 같이 코로나가 맹위를 떨치는 시절에도 실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원고들에는 내 역사트레킹의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져있다. 처음 작성했던 원고가 2013년도였고, 브런치북으로 간행된 것이 2020년 6월이었으니 약 7년이란 시간동안 숙성이 된 원고라는 뜻이다.

 

 

 

 

 

 

 

7년 동안 자연 상태로 두지는 않았다. 무척이나 휘저었다. 서울과 경기, 그리고 에필로그인 산티아고 순례길까지 총 20화로 엮었는데 재작성만 10번 이상을 한 꼭지도 있었다. 그렇듯 재작성도 만만치가 않았다. 글을 새로 한 편 쓰는 정도의 에너지가 들 필요했으니까. 그만큼 제대로 쓰고 싶었고 많은 이들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렇게 원고가 손이 많이 갔다는 건 외부적인 충격이 있었다는 뜻이다. 사실 이 원고는 출간 제의를 3번이나 받았다. 하지만 3번 다 처참할 정도로 차였다. 그렇게 출간이 불발됐으니 이렇게 브런치북 공모전에 나서고 있지 않은가. 이번 공모전까지 떨어지면 도대체 몇 번을 차이는 거지?

 

- 우리출판사는 역사서에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내용을 보강해주세요.

- 적어도 30꼭지는 있어야 합니다. 지금의 분량으로는 부족합니다.

- 트레킹에 중점을 둔 실용서가 우리의 방향입니다. 맛집이나 주변관광지를 포함하는 건 당연하고요.

- 글 앞뒤에 있는 에세이 부분을 더 강조해주세요.

 

각기 다른 3곳의 출판사에서 거절을 당하다보니 요구 멘트도 중구난방이었다. 거기에 휩쓸리듯 원고에 손을 댔던 것이다. 그러니 재작성을 10번 이상한 원고도 나오게 됐다. 제목도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에서 <트레킹은 생각창고>로 변경을 하게 됐다.

 

아이러니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쓰고 고치고를 여러번 하다보니 웬만한 오탈자나 비문은 다 잡아냈다. 추가된 내용들도 원문글에 잘 녹였다. 시간이 갈수록 잘 숙성 된 듯싶었다. 이제는 사람들이 많이 읽기만 하면 되는데...

 

10km짜리 역사트레킹 코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약 100km 이상을 탐방해야 한다. 한 번 갔던 길을 여러번 반복해서 가야한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길을 찾기 위해 왔던 길을 또 가고, 또또 가야 하는 것이다.

 

<트레킹은 생각창고>를 작성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조금이라도 더 알찬 내용을 담기위해 눈을 비비며 글을 작성했었다. 역사에 대한 내용을 다루는 만큼 교차검증을 철저히 했다. 한 문장을 쓰기 위해 한 시간 이상 걸린 적도 있었다. 그만큼 정확한 내용을 전달하려고 노력을 했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못난 그림 솜씨로 지도도 그려 넣었을까! 이해도를 높이려고 그랬던 것이다.

 

그렇게 공을 들여서 만든 <트레킹은 생각창고>였지만 생각만큼 성적이 신통치가 않다. 요즘 트렌드에 맞지 않게 글이 길어서 그런가? 아니면 너무 설명식의 딱딱한 글이어서 그런가?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예뻐하지 않던가. 성적이 좋든 나쁘든 <트레킹은 생각창고>는 내게는 자식처럼 아주 소중한 존재다. 잘났든 못났든 어쨌든... 내 소중한 작품이다.

 

 

*** 브런치북을 소개하는 공모전에 출품하면서.

 

 

 

 

 

 

 

원고지 750매 짜리 트레킹 원고가 있습니다

-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쉽지만 이번엔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브런치를 통해 작가님의 귀중한 원고를 발견하였고, 출판시장을 고려하여

원고를 어떠한 방향으로 기획하여 출간해볼까 다양한 방안을 검토해보고

거듭 논의를 거쳤습니다만, 저희가 생각하는 출간의 방향과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출판사 에디터에게 받은 메일이다. 보다시피 내 원고는 퇴짜를 맞았다. 출판이 또 엎어진 것이다.

벌써 3번째다. 어차피 계약서도 안 쓴 처지라 뭐 크게 손해본 것은 없었다.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하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사실 이번에는 출판사에서 적극적으로 대시를 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내 핸드폰 번호로 전화까지 했다. 이메일은 공개했지만 전화번호는 좀 숨겼었는데 그걸 찾아내서 전화를 해줬으니... 진도가 꽤 나갔던 셈이다.

담당 에디터는 트레킹 도서 발간에 강한 의지를 여러번 표명했었다. 그런 의지 표명이 좋았기에 일이 순탄하게 흘러갈 줄 알았다.

하지만!!!

무언가 꼬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중간에 메인 담당자가 바뀌었는데... 그때부터 좀 감이 이상했다. 그냥 계속 나아가야지 왜 중간에 바뀌지? 그 바뀐 담당자와는 계속 메일로만 의견 교환을 했다. 그런데 메일로만 의견을 나누면 한계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전화도 병행을 하는데... 그 바뀐 담당자와는 전화 통화 한 번을 못해봤다.

내가 전화를 할 때는 받지를 않았다. 또한 전화를 주겠다는 시간에 전화를 주지 않았다. 해당 시각을 넘겼을 때 전화가 아닌 메일을 보냈다. 여기서부터 확 꼬였다는 느낌을 받았다.

'뭐지? 일처리를 이렇게 하나?'

일이 안 되려니 애먼되서 꼬이더라. 하여간 그렇게 엎어졌고 참 거시기했다. 더이상 이야기하면 좀 구질구질할 거 같아서 여기서 멈추겠다. 그런데 마음이 이런 건 어쩔 수가 없다.

- 오빠를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ㅋ

예전에 개그 프로그램 중에 이런게 있었지. 괜히 김칫국부터 마셨던 거야...ㅋ

- 우리는 역사서에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내용을 보강해주세요.

- 적어도 30꼭지는 있어야 합니다. 지금의 분량으로는 부족합니다.

- 트레킹에 중점을 둔 실용서가 우리의 방향입니다. 맛집이나 주변관광지를 포함하는 건 당연하고요.

- 글 앞뒤로 에세이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을 조절해주세요.

이제까지 내 원고와 관련된 의견들이다. 뭐 다른 말로 하면 원고가 '까인' 이유다.

3개의 각기 다른 출판사에서 들은 의견들이라 일률적이지가 않다. 어디서는 역사에 방점, 어디서는

실용서로 만들겠다... 아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거지!

그냥 내 스타일을 유지할란다. 그게 서로한테 더 나을 거 같군.

글을 마치기 전에 광고나 해본다. 광고하면서 거시기한 마음을 달래본다.

현재 총 25편의 역사트레킹 글이 있다. 대충 200자 원고지 750매 정도의 역사트레킹 글이 있다는 뜻이다. 750매에 사진 붙이고, 지도 붙이고 하면... 트레킹 단행본이 뚝딱 나온다는 것이다.

요즘 코로나 땜시 트레킹이 대세라는데... 혹시 역사트레킹 책에 관심있는 출판사 없수?

글의 퀄리티가 좋은지 나쁜지는 브런치에 직접 가서 확인할 수 있으니 가서 봐주시기라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트레킹은 생각창고> 는 산티아고 2편을 제외하고 16꼭지를 작성했어요. 200자 원고지 기준, 30~35매 정도로 작성했습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thinktrekking

<함께걷는역사트레킹>은 7꼭지입니다. 200자 원고지 기준, 30매 정도로 작성했습니다.

https://brunch.co.kr/magazine/withtrekking

한마디로 현재 역사트레킹 관련 글은 23편입니다. 산티아고 2편을 포함하면 총 25편이 됩니다. 바로 출판이 가능한 분량이지요. ^^

 

 

 

 

* 삼천사 역사트레킹 지도

 

 

 

 

10월 17일 토요일.

 

이날은 새벽부터 분주했다. 새벽 4시경에 드디어 길고 길었던 프로젝트 하나가 종료됐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아침에 일어나 인왕산 역사트레킹을 리딩하러 경복궁역으로 달려갔다. 새벽까지 그림을

그리고 아침에는 트레킹을 하러가니 누가보면 무슨 대단히 바쁜 사람인 줄 알겠다...ㅋ

 

그렇다. 그 프로젝트는 그림 그리기, 정확히는 트레킹 지도 그리기였다. 필자는 <트레킹은 생각창고>라는

브런치북을 간행했었다. <트레킹은 생각창고>에는 총 16편의 트레킹 코스와 그에 해당하는 지도 그림이

그려져있다.

 

지도를 그렸다고 하는데... 보시면 알겠지만 퀄리티가 높은 수준이 아니다. 그래그래 내 그림 솜씨 초딩이다.

그러니 너그럽게 봐주셨으면 좋겠다.^^ 이전 포스팅에도 언급을 했지만 해당 트레킹의 이동경로를 시각화시켜주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는 차이가 아주 크다. 자신의 위치를 알고 싶어하는 것은 사람의 본능이다. 하물며 낯선 필드에서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이동을 했는지를 알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아주 예전 원고에서는 지도를 그려넣지 못했다. 여러가지 원인이 있었지만 가장 큰 것은 못난 그림 솜씨 때문이었다. 하지만 <트레킹은 생각창고>부터는 큰 맘 먹고 지도를 그려넣기 시작했다. 욕을 하려면 해라~ 뭐 그런 식으로 대차게 나간 것이다. 이렇게 확치고 나갈 때도 있는 법이다!

 

필자가 구식이라 그런지 지도를 수기로 그려넣었다. 집에 굴러다니는 A4 용지에다 볼펜 깍지를 낀 몽땅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다이소에서 구매한 3천원짜리 색연필로 색칠을 했다. 재료비가 거의 안 들었다. 그건 정말 좋았다. 돈 안 들어서...ㅋ

 

 

 

 

 

전송중...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그렇게 <트레킹은 생각창고>는 완료가 됐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16편 가지고는 원고의 절대량이 부족해보였다. 그래서 <함께 걷는 역사트레킹>이라는 브런치 매거진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총 7편의 원고가 들어가 있다.

 

<함께 걷는 역사트레킹>은 여름에 작성한 원고라 지도를 그려 넣기가 만만치가 않았다. 한 여름에는 팔에 땀이 배겨 A4 용지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고심 끝에 <함께 걷는 역사트레킹>은 원고부터 다 작성하고 지도는 날씨가 선선해지면 몰아서 그리기로 했다. <트레킹은 생각창고> 때는 한 편 작성하면 바로 지도를 그렸던 터였다.

 

역시 일은 묵혀두면 부담감도 함께 쌓인다. 7편의 지도를 몰아서 그리려고 하니 부담감도 생기고 귀찮기도 했다. 그래서 <함께 걷는 역사트레킹>은 지도 없이 갈까 하는 생각까지 들더라. 하지만 일을 시작했으면 완결을 봐야한다. 어차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각오를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매일 하루에 하나씩 지도를 그렸다. 이 지도가 책에 실릴 수 있을지 아닐지... 그저 내 블로그에만 존재하는 지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일단은 접어두고 계속 그렸다. 그게 내 역할이고 내 임무였으니까.

 

결국 10월 17일 새벽 4시경에 마지막 호암산 역사트레킹 지도까지 다 그렸다. 스캔까지 해서 브런치와 블로그에 올렸다. 아주 속이 다 후련하다. 무슨 작품 전시회 같은게 끝난 느낌이다. 오죽 후련했으면 그 새벽 시간에 옥상에 올라가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을까!

 

작년 가을부터 이제까지 총 23편의 지도와 원고를 그렸고 작성했다. 만약 코로나 사태가 없었으면 그 정도의 결과물을 생산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 코로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나?ㅋ 코로나야 썩 물러가라!

 

이제 당분간은 지도를 그릴 일이 없을 거 같다. 한창 시즌이라 역사트레킹도 리딩해야 한다. 지금이 단풍트레킹 하기에 딱 좋은 계절이 아닌가. 소규모로 방역 수칙만 잘 지키면 언택트 시대에도 트레킹은 가능하다. 또 다른 프로젝트도 해야하니까 당분간 지도를 그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슬슬 손이 가려워지겠지. 어쩌면 나도 모르게 보물 지도를 그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그런 보물지도...ㅋ

 

 

 

 

 

 

 

* 태종이방원역사트레킹: 채색본과 완성본.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2020년 7월 31일.

예전 기준으로는 한창 휴가철이다. 하지만 장맛비가 아직까지도 계속된다. 작년이었으면 나도 배낭을 꾸리며 휴가 계획을 짜고 있었을 거다. 하지만 올해는 휴가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계속되는 장마 때문만은 아니다.

'아직까지도 코로나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 이 시국에 무슨놈의 휴가?'

이런 식으로 자기검열(?)을 하고 있는 것이다. 휴가 검열인가...^^ 코로나19로 인해 모든게 다 꼬이게 된 것이다.

난 2020년 새해를 스페인에서 맞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2020년을 어떻게 잘 보낼까, 그런 계획들을 세웠다.

'anno nuevo(아뇨 누에보,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스페인어로 'anno'는 '해', 'nuevo'는 '새로운'이라는 뜻이다. 안되는 발음 굴려가면서 스페인 사람들과 새해 덕담을 주고 받았다.

'2020년은 원더키티의 해! 새해에는 더욱더 원더풀하게 나아가는 거야!'

1. 새로운 트레킹 코스 런칭하기

2. 트레킹 원고 작성 완료하기

3. 역사트레킹 100회 이상 실시하기

4. 돈 많이 벌기

5. 투잡하기

산티아고 순례길 종료 후 이어진 배낭여행까지 무사히 잘 마치고 2월 11일에 한국에 잘 도착했다. 하지만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코로나19가 전세계를 강타했고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코로나 공포로 인해 사람들이 모이지를 않았다. 그런 상황인데 무슨 트레킹이며, 무슨 여행인가! 귀국 후 지금까지 약 6개월이 흐르고 있는데 그간 의미있게 한 일이 딱 두 가지 뿐이다.

1. <트레킹은 생각창고> 원고 작성 완료 및 브런치북 발간

2. 2020 위대한 여정 희망걷기

2020 위대한 여정 희망걷기는 파킨슨병 환우인 정만용 선생이 600km 국토종단을 행하는 행사였다. 나는 거기에 스태프를 참가하여 정만용 선생의 국토종단에 힘을 보탰다. 하지만 그 행사는 내가 주인공은 아니었다. 스태프는 스태프일 뿐이다.

그런 의미로 <트레킹은 생각창고> 의 브런치북 발간은 내 스스로 생각해도 참 기특한 일이었다. 코로나가 준 시간 선물이라고 해야 하나? 트레킹은 못하더라도 트레킹 원고는 쓰자라는 생각에 열심히 노트북 앞에서 엉덩이 싸움을 했었다. 그 결과로 지난 6월 30일에 브런치북을 발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020년이 '원더'하긴 하다. 물론 이런 식으로 원더하리라고는 정말 생각도 못했지만. 지난 며칠간 기분도 별로여서 미뤄두었던 사진기 수리와 노트북 점검을 했다. 사진기를 맡기고, 노트북을 포맷하고. 이제 장비 점검도 끝났으니 다시 시작해야겠다.

한 여름이지만 사실 아직까지도 내 마음은 동장군이 맹위를 떨치는 한 겨울같다. 그래도 여기서 얼어붙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마음 속의 동장군은 이제 매콤한 비빔면으로 비벼서 보내드리고 싶다. 두 손 두 발 놓고 있기에는 지금의 시간이 너무나 아깝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지 않은가!

앞으로 남은 2020년은 더 기운차게 보내고 싶다. 브런치북을 간행한 노력이 헛된 것이 아니었는지 출간 제의도 왔다. 가능하면 정식 출간도 하고, 더 나아가 베스트셀러에도 등극하고 싶다. ^^

어쨌든 남은 2020년은 확실하게 원더하게 살아볼 생각이다. 나 스스로에게 외친다. 아자아자 파이팅!

ps. 예전에 <2020 원더키티>라는 국산 만화영화가 있었다. 2020년의 기대감 때문에 난 1~2년 전부터, '2020 원더키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었다. 어쨌든 그 말대로 원더하긴 원더했네...ㅋ

 

 

 

 

 

 

 

 

 

 

지난 6월 30일에 <트레킹은 생각창고>라는 브런치 북을 발행했다.

아직 일주일도 되지 않은 시점에 무슨 대단한 변화가 있으랴!

하지만 그래도 지난 일주일 동안의 변화를 기록해 봐야겠다는 생각이들어 이 포스팅을 작성한다.

1. 조횟수가 많이 늘어났다.

2. 10년 묵은 체증이 날라갈 정도로 속이 시원했다. 한편으로는 허탈감이 밀려왔다.

3. 아직 '제안하기' 메일함은 텅 비어있다.

4. 계속 해오던 원고 쓰기가 종료되니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느낌이들었다. 글쓰기 금단 현상이라도 있는 걸까? 초초함 같은 것이 밀려왔다. 무언가를 써야하는데 쓰지를 못하니 손까지 떨리더라.

이 정도의 변화가 있었다. 아는 지인이 Daum 메인 화면에 <트레킹은 생각창고>가 떴다는 이야기도 해주셨다.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는데... 금방 내려가더라! 어쨌든 평소에는 파리가 날렸던 내 브런치가 좀 들썩들썩 해졌다. 좋은 일이다.

10년 묵은 체증이 날라갈 정도로, <트레킹은 생각창고>에는 약 10년 전에 쓴 글도 있다. 10년 동안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따로 놀았던 꼭지들이 브런치북으로 제대로 묶였던 것이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데... 10년 동안 널브려뜨렸던 구슬들을 이참에 잘 꿰어둔 것이다.

그렇게 보배를 만들어놨는데 아직까지도 제안하기 메일함은 텅~ 비어있다. 사실 난 브런치 초기 유저다. 2015년인가에 브런치를 시작했는데 이제껏 제안다운 제안을 받아본 적이 없다. 누구는 브런치를 하자마자 받았다고 하던데... 얼마나 부럽던지. 뭐 이제까지 기다렸는데 좀 더 기다려보자. 언젠가는 나도 제안다운 제안 받아보겠지.

사실 본 포스팅은 마지막 4번 때문에 작성하는 것이다. 브런치북을 완성, 이후 후속작업까지 마무리지었다. 이제는 느긋하게 즐기기만 하면 될 줄 알았다. 노트북 앞에 앉을 때까지만 해도 룰루랄라였다. 그런데 갑자기 초초함 답답함 이런 감정들이 밀려왔고 식은땀도 나더라. 무슨 금단현상처럼 느껴졌다.

거의 9개월 정도 밤마다 원고와 씨름을 해와서 그랬던가, 그 루틴에서 벗어나니 무엇을 해야할지 갑자기 콱 막혀버린 느낌이었다. 물론 중간에 지방 출장 같은 뜀뛰기 시간도 있긴 했다.

어쨌든 더이상 공을 들인 대상이 사라지니, 더이상 에너지를 쏟을 대상이 사라지니 당혹스러웠던 것이다. 분명 금단현상이었다.

담배나 술을 끓을 때 금단현상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봤어도 글쓰기가 중단이 됐다고 금단현상이라니...ㅋ

빨리 다른 연재를 시작해야하나. 원고 하나 다 썼다고 별 일을 다 겪네~

 

 

 

https://brunch.co.kr/brunchbook/thinktrekking

 

[브런치북] 트레킹은 생각창고

저에게 트레킹은 단순히 걷는 행위만이 아니었습니다. 트레킹을 행할 때마다 주옥같은 사색들이 떠올랐답니다. 바쁜 일상에서는 피어오르지 못했을 사색들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꽃망울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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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트레킹은 생각창고>가 브런치북으로 발간됐다. 첫 프롤로그가 2019년 9월 30일에 발행됐고, 완성을 2020년 6월 30일에 했으니 장장 9개월이란 시간이 걸린 셈이다.

 

프롤로그, 본편, 에필로그... 총 20편이 실린 <트레킹은 생각창고>는 역사트레킹을 행하면서 느낀 생각들을 담아내었다. 역사와 트레킹, 그리고 사색을 서로 어우러지게 했다. 

 

분량이 A4로 약 100매 정도다. 적은 분량은 아니다. 그럼에도 작성에서 발간까지 9개월이나 소요될 거라는 건 생각지도 못했다. 순수하게 A4 100매짜리 원고를 새로 썼다면 그 정도 시간이 걸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프롤로그에도 언급했는데 <트레킹은 생각창고>는 예전 원고를 재작성한 것이다. 그래서 애초에는 한 달 정도면 

브런치북으로 발간할 수 있을지 알았다. 그러나!!! 

 

세상일이 그렇게 딱딱 떨어지던가! 브런치북이든 종이책이든 세상에 결과물을 내놓으려고 하니,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허점들이 눈에 띄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재작성 수준으로 다시 글을 쓰기로 했다. 아예 몇 편은 처음부터 새로 쓴 것도 있다. 초등학생 실력의 그림 솜씨로 지도도 만들어 넣었다. 

 

긴 글, 여러장의 사진, 안 예쁜 지도... 기존 브런치북들과는 많이 좀 다르다. 뭐 이렇게 길게 썼냐고, 핀잔을 들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핀잔도 이미 다 각오하고 있다. 사실 종이책까지 염두해두고 원고를 썼으니까. 

 

<트레킹은 생각창고>에 실린 글 중에는 첫 작성을 7년 전에 한 것도 있다. 꽤 오랫동안 제자리를 찾지 못했던 원고들이 

<트레킹은 생각창고> 브런치북에서 자기의 위치를 잡게됐다. 이점 필자로서 참 뿌듯하다. 글만 썼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집산하고 작품화시키는 것도 작성자의 큰 역할인데 이제서야 그 역할을 해낸 것이다. 

 

이제 브런치북도 만들었으니 많은 곳에서 희소식이 들려왔으면 좋겠다. 종이책도 만들고, 강연도 하고, 인터뷰도 하고... 필자가 역사트레킹 마스터인만큼 북토크는 실내가 아닌 아웃도어에서 하고 싶다. 역사트레킹을 행하면서 독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 

 

벌써부터 김칫국인가? 그래도 좋다. 김칫국을 한 사발 들이켜도 좋을 만큼 오늘은 기분이 좋다. 

 

오늘밤의 엔터키는 그 어느때보다도 더 기분 좋게 눌러본다. ^^;

 

 

 

https://brunch.co.kr/brunchbook/thinktrekking

 

[브런치북] 트레킹은 생각창고

저에게 트레킹은 단순히 걷는 행위만이 아니었습니다. 트레킹을 행할 때마다 주옥같은 사색들이 떠올랐답니다. 바쁜 일상에서는 피어오르지 못했을 사색들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꽃망울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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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작가’라는 명칭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글을 참 늦게 쓴다. 그래서인지 아직까지 본인 이름 걸고 쓴 책다운 책이 없다. 물론 글을 빨리 쓴다고 좋은 건 아니다. 속필이 명필이 되는 경우는 흔하지가 않으니까. 그 느릿느릿한 글쓰기는 필자의 성격과 닮아 있다. 느긋한 문장에서는 빠릿빠릿함보다는 게으름이 잔뜩 묻어있다. 오후의 햇살 아래에서 배 쭉 깔고 단 잠에 빠져있는 누렁이의 모습이 그려진다.

 

하지만 필자는 의외로 꼼꼼하다는 소리도 많이 듣는다. 역사트레킹을 진행하려면 생각보다는 많은 지식이 필요로 한다. 그래서 지식노트를 만들었는데 우연하게 그 노트를 본 참가자 분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셨다.

 

“보기와는 다르게 참 꼼꼼하세요.”

 

사실 그런 꼼꼼함은 필자의 방어 기재다. 외부의 공격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에서 꼼꼼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완벽주의. 그렇게 완벽주의에 물들어 있다 보니 삶이 진도가 안 나간다. 살다보면 앞뒤 안 재고, 확 치고 나갈 때도 분명 필요하다.

 

본성이 게으른데 완벽주의에까지 물들어 있으니 글을 빨리 못 쓰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다른 곳에 있다. 필자는 완벽주의자가 아니다. 완벽주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 완벽주의에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탈이 날 수밖에 없지!

 

 

 

 

 

 

* 정약용 선생 상

 

 

 

 

 

 

 

● 트레킹 강의명도 ‘섹시한 제목’이 필요하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이 역사트레킹도 제목을 잘 지어야한다. 눈에 확 띄는 ‘섹시한’ 제목으로 나가야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문화센터에서 트레킹 강의를 진행하는데 매학기 마다 제목 짓는 걸로 골머리를 썩어야했다.

 

수많은 쟁쟁한 강의들 사이에서 필자의 강의를 ‘잘 팔기’ 위해서는 제목으로 승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얼토당토않은 내용을 끌어다 쓸 수는 없었다. 내용성과 완전히 어긋나는 제목은 욕먹기 ‘딱’이기 때문이다.

 

“제 강의 커리큘럼 중에 가장 눈에 띄는 네이밍이 있나요?”

 

매학기가 시작할 때마다 저렇게 물어보곤 했다. 그 중에서 단연 이 강의가 수강생들의 눈에 띄었던 것 같다.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이요!”

 

그렇다. 이번에는 경기도 남양주로 가본다.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을 소개한다.

 

 

 

 

 

 

 

* 여유당: 정약용 선생 생가

 

 

 

 

 

 

 

● 2018년은 다산 정약용의 해배 200주년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하기 전에 2018년과 다산 정약용 선생과의 연관성에 대해서 잠시 언급해본다. 시간을 좀 돌려보자. 2018년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지였던 전남 강진에서 해배(解配)된 지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해배’는 유배에서 풀려나는 것을 말한다. 정약용 선생은 1801년 11월에 강진으로 유배를 갔다 1818년 10월에 고향인 마재(현 남양주)로 돌아온다.

 

정약용 선생은 유독 ‘18’이란 숫자와 연관이 많은 분이다. 유배를 18년 동안 당했고, 유배에서 풀려난 후 18년을 더 사신 후에 돌아가셨다. 또 관직 생활도 18년 동안 하셨다.

 

정약용 역사트레킹은 능내역에서부터 시작된다. 능내역은 중앙선에 있던 간이역이었다. 중앙선은 2008년에 복선화가 됐고, 능내역은 더 이상 열차가 서지 않게 됐다. 폐역이 된 것이다. 하지만 능내역은 휴식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간이역의 색깔을 그대로 남겨두어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공간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그런 정취를 쫓아 주말이 되면 많은 이들이 능내역으로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룬다.

 

단선철도 시절, 옛 중앙선의 일일 수송량보다 더 많은 인파가 주말이면 능내역 인근으로 몰려와 트레킹을 하고, 자전거를 타는 것이다. 한결같이 다 즐거운 표정들을 하고서. 그래서인지 어떤 참가자는 이런 말까지했다.

 

“여기는 정말 딴 세상 같아요. 다들 즐거워 보여요.”

 

그런 딴 세상 같은 능내역을 뒤로 하고 트레킹팀은 천주교 성지인 마재성지로 향했다. 마재성지는 능내역에서 도보로 3분 거리에 있지만 그 주변 분위기는 능내역과는 완전히 다르다. 무척 차분했다. 성지는 성지였던 것이다.

 

 

 

 

 

 

 

 

* 능내역

 

 

 

 

 

 

 

● 정약종의 생가, 마재성지

 

마재성지는 다산 선생의 셋째형인 정약종의 생가다. 새남터, 절두산, 해미읍성 등등... 일반적인 천주교 성지는 거의가 순교, 즉 신자들의 죽음과 관련된 곳이 대대수지만 마재성지는 한 집안의 살림집이 성지가 된 독특한 사례다.

 

그럼 정약종은 누구인가? <자산어보>를 저술한, 정약용의 둘째형인 정약전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약종이란 이름 석 자는 처음 들어보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정약종은 정약용의 셋째형이었다. 바로 위형이었다. 도교에 심취해있던 정약종은 다른 형제들보다 늦게 천주교에 입문하게 된다. 하지만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진산사건으로 인해 다른 형제들이 천주교를 멀리할 때도 그는 강건하게 신앙을 지켜냈다.

 

1791년(신해년)에 발생한 진산사건은 윤지충이란 사람이 제례를 거부하고 위폐를 불사른 사건을 말하는데 이 사건의 파장으로 다산 선생도 벽파세력에 의해 공격을 받게 된다. 신유박해(1801년) 이후 또다시 피바람을 몰고 왔던, 황사영의 백서(帛書)에도 ‘신해년 박해 이후에 형제나 친구들로서 여전히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나, 정약종만 홀로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였다.

 

그렇듯 정약종의 신앙은 강건했다. 하지만 그런 정약종의 강건한 신앙을 그의 형제들은 환영하지 않았다. 당시 조선의 천주교는 외국 선교사에 의해 포교된 것이 아니라 남인 계열의 선비들이 서학을 토대로 자생적으로 발전시켰다. 기존의 유교적 가치관을 전복시키는 혁명적 도구로 천주신앙을 이용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상의 위폐를 불태운 진산 사건에 반발해 천주교를 떠난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렇게 배교를 한 이들은 조상의 제사도 지내지 않는 천주 교리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정약종이 계속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면 지킬수록 집안 형제들과의 사이는 멀어져갔다. 그래서 나중에는 정약종만 홀로 강 건너 분원리(현 광주시 남종면)에 살게 됐을 정도였다.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가진 정약종은 신유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를 하게 된다.

 

 

 

 

 

 

 

* 마재성지

 

 

 

 

 

 

 

● 정조대왕과 정약용

 

트레킹팀은 다산 정약용 생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산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은 마재성지에서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있다.

 

여기서 잠깐 정약용 선생이 유배를 떠났던 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1799년 당시 시파의 영수였던 체제공이 그해 1월에 서거를 하게 된다. 반대파였던 벽파로서는 체제공의 뒤를 잇는 시파 거물 정치인의 등장을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아야 했다.

 

벽파 입장에서는 누가 가장 위협적으로 보였을까? 정약용이 1순위였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체제공 서거 이후 정약용은 더 많은 모함과 박해를 받게 된다. 하지만 딱히 정약용의 손발을 묶을 방법이 없었다. 그만큼 정약용에게 흠결이 없었다는 것이다.

 

벽파는 꼼수를 쓰기에 이른다. 외곽 때리기를 했던 것이다. 정약용의 흠을 잡는데 실패한 그들은 둘째형인 정약전 때리기에 나섰다. 결국 정약전은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를 지켜본 정약용도 격분하며 고향인 마현(현 능내리)으로 낙향하게 된다.

 

체제공과 정약용이란 ‘원투펀치’가 조정을 떠난 두 달 후, 개혁군주였던 정조는 세상을 떠나게 된다. 정조대왕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은, 임금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크게 스스로를 책망했다고 한다. 그때가 1800년 6월이었다.

 

정조의 승하는 벽파에게는 더할 수 없는 호재였다. 벽파는 기다렸다는 듯이 정조를 따르던 인사들을 축출하게 된다. 1801년 2월에 있은 신유박해가 바로 그런 빌미로 이용됐다.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남인 계열 시파 100여 명이 죽음에 이르게 됐고, 400여 명이 유배길을 떠나야 했다.

 

 

 

 

 

 

 

* 거중기: 다산 생가 앞에 전시되어 있음.

 

 

 

 

 

 

● 신유박해로 유배길에 올라야했던 정약용

 

이때 셋째 정약종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했고,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길에 나서게 된다. 처음 다산의 유배지는 경상도 포항 부근 장기였고, 정약전의 유배지는 전라도 완도 본섬 옆에 있는 신지도였다. 하지만 신유박해 이후, 황사영 백사사건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정약용은 포항보다 더 궁벽한 강진 땅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이배되기에 이른다.

 

한편 강진에서도 다산 선생의 유배지는 고정되지 않았다. 읍내에 있는 주막거리에 거처를 하기도 했고, 자신의 제자의 집에 머물기도 했다. 그러다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만덕산 기슭에 초막을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다산초당이었던 것이다. 다산초당은 다산 선생이 1808년에서부터 해배되던 1818년까지, 10년간 머물렀던 곳이다.

 

그렇게 해배된 이후 다산 선생은 고향인 이 곳 마현으로 다시 오게 됐고,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에서 강진 시절에 마치지 못한 저술 작업에 더욱더 박차를 가하게 된다.

 

“다산 선생은 무려 500여 권의 서책을 저술한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였습니다. 강진에서의 18년 동안, 또 여유당에서의 18년 동안 다산 선생은 묵묵히 저술과 학술작업에 매진하셨습니다. 그런 다산 선생의 뜻을 배우고자 우리는 여기에 온 것입니다.”

 

나름대로 설명을 잘했는지 필자의 말에 환호를 하는 참가자도 있었다. 그래서 내친김에 몇 마디 더 설명을 보탰다.

 

“아참 다산 선생은 40세에 유배됐다가 58세에 여유당으로 오시게 됩니다. 그러다 76세에 돌아가십니다. 그때 기준으로는 무척 장수를 하신 셈이죠.”

 

다산생가를 떠나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한 이후에도 필자는 트레킹팀과 함께 다산 선생과 정조대왕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다. 파란만장한 다산 선생과 그의 형제들의 삶, 참된 목민관이었던 다산 선생의 애민 정신, 개혁군주였던 정조대왕의 일대기 등등... 트레킹의 명칭이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이었던 만큼 다산 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래서인지 참가자 중에 한 분은 집에 가서 다산 선생과 관련된 공부를 해야겠다고 필자에게 슬며시 말을 건넨 분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필자와 같은 사람은 두꺼운 역사책의 머리말을 읽어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도서관이 아닌 아웃도어이지만, 필드에서 트레킹을 하며 사람들을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리딩’하기 때문이겠다.

 

 

 

 

 

 

 

* 다산생태공원

 

 

 

 

 

 

 

 

● 귀에 확 꽂히는 이름,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

 

여유당을 뒤로 한 트레킹팀은 자전거도로 옆에 놓인 인도를 따라 운길산 방면으로 나아갔다. 이 길은 옛 중앙선 철로였다. 중앙선이 복선화되면서 옛날 단선 구간을 리모델링하여 자전거도로와 인도로 변신시킨 것이다. 이 길은 아름다운 한강변을 옆에 끼고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자전거의 위협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는 단점도 있다.

 

무섭게 페달을 밟아대는 일부 자전거족들이 이 구간에 많기에 항상 경각심을 가지고 걸어야한다. 하긴 필자도 예전에 자전거를 탔을 때, 특히 한강변을 달릴 때는 무식하게 페달을 밟았었다. 그래서 이런 소리를 들은 적도 있었다.

 

“자전거 폭주족이냐! 그 고물자전거로 애쓴다 애써!”

 

임진왜란 당시 변응성 장군이 지켰다는 마진산성(터) 탐방을 끝으로 정약용 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된다. 마진산성은 야트막한 산인데 그곳에 올라서면 양수대교를 비롯한 양수리 일대를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다.

 

 

 

 

 

 

 

* 양수대교: 마진산성 터에서 바라본 양수대교. 강 건너편이 양수리다.

 

 

 

 

 

 

 

●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제는 완벽주의의 허울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완벽하지도 않은 인간이 완벽주의로 위장을 하고 있으니 정체성에 혼란만 올 뿐이다. 더군다나 나답게 살기를 원한다면서 자신을 완벽주의로 방어한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리다.

 

이렇게 필자의 허울을 벗겨주시는데 정약용 선생의 역할이 컸다. 무슨 소리인가? 정약용 선생도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배에서 풀려나기 위해 당시 세도가문이었던 안동 김씨 쪽과 접촉했던 것, 제자들 중에 큰 사상가가 나타나지 않은 점 등이 바로 그것이다.

 

민족의 큰 스승인 정약용 선생도 이렇듯 개인적인 흠결이 있었다. 하물며 고만고만한 삶을 살고 있는 필자가 어설픈 완벽주의의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었으니 그저 우스울 따름일 뿐!

 

필자는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쓸 것이다. 느릿느릿하게라도 꾸준히 쓸 것이다. 열심히 쓰다 글이 어느 정도 무루 익으면 과감하게 원고를 출판사에 보낼 것이다. 전에는 완벽한 원고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을 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허울에 빠져있던 예전의 내 자신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싶다.

 

“세상에 완벽한 원고가 있을까? 그렇게 했다가는 평생 책 낼 생각은 하지도 말아야지. 완벽한 원고만 찾다가는 완벽하게 평생 그 자리에만 머물러 있어야 할 걸!”

 

 

 

 

 

 

 

* 다산생태공원: 청명한 가을날의 다산생태공원

 

 

 

 

 

 


 

 

 

 

 

■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

 

1. 코스: 능내역 ▶ 마재성지 ▶ 다산생가(정약용묘) ▶ 다산생태공원 ▶ 마진산성(터)

2. 이동거리: 약 10km

3. 예상시간: 4시간(휴식시간 포함)

4. IN: 팔당역 ☞ 팔당역에서 능내리행 버스 탑승(약 15분간 이동) / OUT: 운길산역

 

 

 

 

 

 

 

 

*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남양주정약용역사트레킹

 

 








트레킹은 생각창고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어떻게 이야기가 전개될까?



● 서울은 어떤 도시일까?


서울은 어떤 도시일까내가 살고 있는 이 서울에 대해서 난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필자가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을 시작했을 때 품었던 근원적인 물음이었다. ‘서울천도 600’, ‘한성백제 2000’ 등과 같은 역사교과서적인 수식어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삶의 공간으로서의 서울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물론 필자는 지금도 서울공화국’, ‘수도권과밀화’ 같은 서울에 붙여진 비판적인 꼬리표에 좋아요’ 버튼을 누르고 있다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다 빨아드리고 있는 이 블랙홀 도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거둘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런 비판적인 시각과 근원적인 물음이 꼭 상충되는 것만은 아니었다예를 들어 서울이 블랙홀이 되기까지의 과정들에 대한 탐구를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서울의 확대발전에 대한 개념을 짚고 넘어가게 된다한편 서울이 최상위 포식자가 되어 모든 것을 다 집어삼키기 시작한 것은 불과 한 두 세기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공룡 도시 서울에 대한 냉정한 시선을 보내는 것이 맞는 만큼 역사 도시 서울을 탐구하는 진지한 자세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곳은 우리가 발을 딛고 구체적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공간이니까자신이 속해 있는 이 도시가 잘 났는지 혹은 못 났는지 그것을 알아보자는 것이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의 취지인 것이다.


● 토박이를 이길 수 있는 여행작가는 없다


각 개인이 살아가면서 층층이 쌓아올린 생각들도 지역적인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산들로 둘러싸인 지역에서는 갯가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반대로 바닷가 지역에서는 산신령을 모시는 신당을 찾아보기가 어렵다자신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관념들은 결국 지역적인 틀 속에서 생성된 상호작용의 결과물인 것이다.


필자가 낙산의 성곽길을 미디어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접했다면 어땠을까그저 벽화마을에서 사진을 찍고 성곽길을 잠깐 탐방한 후 이렇게 이야기했을지 모른다.


별 거 없네맛집이나 찾아서 가자고.”


외국인 관광객들이 들고 다니는 가이드북 정도의 인식 수준으로 낙산과 성곽길을 바라봤을 것이다.


아무리 머리가 비상한 여행작가라고 하더라도 해당 지역의 토박이를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학창시절에 그렇게 공부를 못했던 필자가 그나마 서울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었던 건 45년 동안 서울에서 계속 살아왔기 때문이다서울에 있는 산들이 좋아 많이 돌아다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물론 군대생활 2년은 빼고.


필자는 이 책에서 역사적인 지식만 나열하지는 않을 것이다필자의 삶의 공간인이곳 서울에서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자유롭게 풀어나갈 생각이다서울 촌놈인 필자가 트레킹을 통해 서울 곳곳을 탐방하고그곳에서 주어올린 생각들을 나름대로의 필체로 풀어낼 생각이다.

밥값을 하듯이 책값을 하고 싶다나름대로 열심히 쓸 생각이다기대하셔도 좋을 것이다







* 필자: 해설을 하고 있는 필자의 모습









트레킹은 생각창고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들어가면서


사실 본 원고는 몇 해 전에 출간 제의를 받은 적이 있었다몇 권의 베스트셀러를 출간한 중견출판사에서 필자의 원고를 눈여겨봤다고 메일로 연락이 왔던 것이다정형화된 형식에서 벗어난 역사서를 만들고 싶다는 내용이었다본 원고의 네이밍이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이니 그들이 찾는 원고로 이었을 것이다트레킹과 역사가 서로 합쳐진데다 서울학개론이라는 독특한 명칭까지 더해지니 편집자의 입장에서는 구미가 당겼을 것이다.


● 김칫국을 제대로 마셨다


정말 기뻤다내 원고의 가치를 알아봐주었던 것도 기뻤고내 이름으로 된 책을 낼 수 있다는 것도 기뻤다더군다나 찾기도 어려웠을 내 이메일 주소를 알아내서 연락을 줬으니 출간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게 아닌가!

두근두근 설렜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답장을 보냈다.


출간 제의를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그런데 글에도 언급되었듯이 제가 역사 전공이 아닌데 괜찮을까요전공자가 아닌데 괜히 역사서 썼다가 씹히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또 저는 본격적인 역사서보다는 역사트레킹아웃도어 이런 것들을 다 다루고 싶은데요제가 트레킹 강사니까요.”


이렇게 점잔을 뺐다그냥 좋다고 덥석 물면 괜히 없어 보일 거 같아서물론 당시 내 머릿속은 인세부터 계산하고 있었다또 저자 사인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연구중이었다그렇게 난 김칫국을 제대로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곽 작가님의 의견 잘 봤습니다전공비전공 부분은 저희도 감안을 했던 부분입니다그런데 우리는 역사에 방점을 찍고역사서를 출간할 생각이거든요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난다지만 핵심은 역사거든요트레킹이나 아웃도어는 그저 부수적인 영역이고요트레킹을 무시할 수 없으시다면 우리가 애초 기획한 포지셔닝과 어긋나네요책 분류 자체도 달라져서 무척 애매해질 수 있다는 판단입니다.”


결론은 내 원고로 책을 출간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내가 너무 겸손을 떨었던 것일까그냥 덥석 잡았을 걸치고 나갈 때는 확 치고 나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인데 난 겸손을 떨다가 김칫국만 제대로 들이켰던 것이다.









● 내 원고의 포지션은 반반 치킨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그렇다고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는 않았다그동안 더 많은 자료를 검토했고더 많은 코스를 탐방했다좋은 역사 해설을 위해서 책을 열심히 읽었고더 순조로운 트레킹을 위해 열심히 코스 답사를 다녔다김칫국을 들이켰을 때나 지금이나 내 포지셔닝은 반반치킨이다역사 반트레킹 반출간 제의를 했던 그 편집자 입장에서는 내 원고는 아직도 포지셔닝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것으로 보일 것이다.


어쩌면 그때 책을 출간하지 않았던 것이 더 나았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내 원고는 부족해 보인다비역사 전공자의 한계가 고스란히 눈에 밟힌다.


그렇다고 눈 비비며 작성했던 내 노력의 결정체가 다시 또 거절당하는 아픔을 겪고 싶지는 않았다그래서 원고를 변경하기로 했다.  그럼 역사에 더 많은 비중을 두는 것인가아니다오히려 역사의 비중은 그대로 두거나 줄이고 에세이적인 면을 더 보강하려고 한다


트레킹을 하면서 들었던 생각들을 해당 탐방지의 역사적인 면과 결합시켜 글로 풀어낼 생각이다반반치킨에 에세이라는 양념소스를 제대로 버무리려한다그래서 제목도 <트레킹은 생각창고>아니던가!


비전공자의 역사다루기라는 ‘잘 안 받아주는’ 포지션보다 역사적인 길을 걷다 느낀 단상들을 에세이로 풀어내는 게 더 그나마 ‘잘 받아' 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편집자도 비전공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피상적인 역사 원고를 ‘오케이’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에세이라는 거대한 장르라면 비전공자도 그 속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역사 글빨’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 앉아서 하는 트레킹?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은 트레킹을 통해 자신의 두 발로 서울의 명소들을 탐방하는 아웃도어 프로그램이다이 책은 그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의 기록들과 함께 필자가 트레킹을 행하며 느꼈던 생각들을 정리하였다그래서 역사아웃도어에세이가 결합된 짬뽕된 포지셔닝을 갖고 있다


누구는 이런 결과물에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른다정체성이 없다고근본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하지만 요즘같이 최첨단 초결합시대에 도서항목 분류표에 따라 기계적으로 원고를 맞출 필요는 없을 것이다시대가 변했다독자도 변했고.


독자여러분들은 필자와 함께 서울구경을 하실 것이다간간이 경기도구경도 하신다이제 필자와 함께 앉아서 하는 트레킹을 행하실 것이다.


자 함께 같이 떠나볼까요신발 끈 단단히 묶으셨나요그럼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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