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유도가 원래 섬이 아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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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작가

 

 

 

 

 

 

본문내용

양화대교

 

한강은 서울 한복판을 유유히 흘러가며 사람들에게 많은 것들을 나누어 주었다. 지금이야 모습이 많이 바뀌었지만 여름에는 강수욕장으로 변해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고, 겨울에는 얼음을 채취할 수 있는 일등 장소로 이용됐다. 그렇듯 한강은 예로부터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진경산수화로 유명한 겸재 정선(1676~1759)도 한강을 무척이나 사랑한 인물이었다. 진경산수화란 우리 산천을 우리의 필치로 담아낸 것을 말한다. 진경산수화 이전에는 중국 남방 화풍으로 우리 산천을 담아냈었다.

 

겸재는 65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양천 현감으로 봉직된다. 현감 시절 겸재는 ‘선유봉’, ‘양화환도’ 같은 진경산수화를 그렸는데 그 배경이 됐던 장소가 지금의 선유도와 절두산 일대이다.

 

 

 

 

신선이 노닐던 봉우리, 선유봉

 

선유도-양화대교: 뒤로 당산철교와 여의도가 보임.

 

 

 

 

선유도는 원래 섬이 아니었다. 선유봉(仙遊峰)이라고 불린 해발 40m 정도의 봉우리였다. ‘신선들이 노니는 곳’이라고 불릴 정도로 선유봉은 그 형상이 오묘하였다고 한다. 지대가 얕은 강변 부근에 소나무가 군집해 있는 기암괴석의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으니, 예로부터 이곳은 많은 이들이 즐겨 찾은 명승지였다. 그렇게 선유봉을 찾아 ‘신선놀음’을 했던 이들은 우리나라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중국의 사신들도 이곳을 찾아 조선의 풍광에 감탄을 했다고 한다.

 

 

 

 

당산철교 아래 초미니섬

 

 

 

그렇다면 ‘신선들의 봉우리’였던 선유봉은 왜 지금처럼 섬이 되었을까? 선유봉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자신을 깎아내렸다. 그렇게 깎인 돌은 일제 강점기에는 여의도 비행장의 활주로와 제방을 쌓는데 사용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강변북로 공사에 이용되었다. 그렇게 깎이고 깎이다가 원형을 잃게 되었고, 이후 한강의 강폭이 넓어졌을 때는 주변으로 강물이 채워져 섬으로 고립되게 된다.

 

선유도의 변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78년에 서울 서남부권의 식수를 공급하는 정수장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선유도 정수장은 폭발적으로 늘어난 서남부권의 주민들에게 식수를 공급했던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고 보면 어린 시절 서울 서남부권에 거주했던 필자도 선유도 정수장에서 공급된 물을 마시고 자랐던 셈이다. 선유도 정수장은 2000년도 까지 운영됐고, 그 이후에는 공원으로 꾸며졌다.

 

 

 

 

* 척화비: 절두산 성지

 

 

 

 

 

지금은 무시무시한 이름으로 개명한 잠두봉

 

선유도의 반대편에는 절두산이 있다. 이 절두산(切頭山)도 사연이 많은 산이다. 절두산의 원래 명칭은 잠두봉이었다. 뽕나무가 많이 자란다고 하여 잠두봉(蠶頭峰)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그런데 1866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이곳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대거 붙잡혀 와 머리가 잘리는 참수형을 당하게 된다. 무려 8천 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참수를 당했는데 그 이후로 이 곳은 ‘절두산’으로 불리게 됐다. 흥선대원군은 이곳에 척화비를 세워 쇄국정책의 고삐를 죄게 된다.

 

 

 

 

 

절두산 성지

 

 

 

 

한강을 사이에 두고 한 곳은 깎이고 깎여 섬이 되었고, 또 한 곳은 ‘머리가 잘린다는’ 무시무시한 이름으로 개명을 하게 됐다. 두 봉우리가 동시에 비운을 겪게 된 셈이다.

 

300여 년 전 겸재 정선이 양화진 일대를 그린 ‘양화환도’에는 선유봉과 잠두봉이 풍치있게 그려져 있다. 두 봉우리 사이로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고, 그 위를 나룻배가 느긋하게 물길을 가르고 있다. 유심히 보고 있노라면, 마치 화폭에 들어가 겸재 선생과 함께 뱃놀이를 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지금은 겸재 선생도, 나룻배도 없다. 또한 선유봉은 원형을 잃었다. 하지만 너무 슬퍼하지 말자. 양화대교가 있으니까. 절두산 성지를 탐방한 후 양화대교를 건너 선유도에 갈 수 있다. 양화대교와 선유도는 연결되어 있다.

 

양화대교에는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면서 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커피전문점도 있다. 양화대교 양 옆에 있는 절두산 성지와 선유도를 탐방한 후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것도 운치가 있을 것이다. 아, 그렇다면 한강 근현대사 탐방 후에 마시는 커피 한 잔이 되는 건가?

 

 

 

* 선유도 공원: 옛 정수장 시설물을 전시하고 있다.

 

 

 

 

 

 

 

■ 도움말
1. 코스: 합정역 ▶ 절두산성지 ▶ 양화대교 ▶ 선유도 ▶ 당산역
 * 코스 종료 후 여의도에 위치한 샛강생태공원까지 탐방하는 것도 추천함.
2. 교통편: 시작 – 합정역(2,6호선) 7번 출구 / 종료 – 당산역(2,9호선)

 

 

 

 

 

 

 

 

 

청명한 가을날에 떠난 한강 역사트레킹

13.10.17 14:10l최종 업데이트 13.10.17 21:43l
곽동운(artpunk)             

 

---> 1편에 이어서

 

 

 

# 자신을 아낌없이 다 내주었던, 선유봉

과연 그럴까? 정말 한강에 볼거리가 없을까? 한강역사트레킹의 첫 번째 도착지는 선유도 공원이었다. 원래 선유도는 선유봉이라고 불렸던 해발 40m 정도의 봉우리였다. 강가 바로 옆 쪽에 우뚝 선 모습이 아름다워 예로부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왔다고 한다. 중국 사신들도 조선에 오면 꼭 선유봉이 있는 양화 일대를 유람하고 돌아갔다고 할 정도였다.

겸재 정선도 선유도를 사랑한 사람 중에 한 명이었다. 겸재는 양천 현감으로 있었던 1741년에 <양화환도> <금성평사> <소악후월> 등 3편의 진경산수화를 그려, 지금의 선유도 일대의 한강 유역을 사실감 넘치는 필치로 담아내었다.

특히 <양화환도>에서는 선유봉과 함께 잠두봉이라고 불렸던 지금의 절두산이 등장하고, 또한 그 잠두봉 아래에는 양화진(지금의 합정동)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선유봉과 잠두봉 사이의 강물길을 느긋하게 나룻배로 건너고 있는 뱃사공의 모습도 화폭에 담겨 있어 그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내 자신도 그 그림 속에 뛰어들어 신선놀음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들 정도다.

그렇다. 선유봉(仙遊峰)은 신선이 노닌다는 봉우리였다. 그럼 왜 선유봉은 졸지에 선유도로 내려앉았는가? 선유도는 이웃들에게 아낌없이 자신을 내주었다. 일제에 의해 여의도에 비행장이 들어설 무렵, 활주로를 닦고 제방을 쌓는다며 선유봉에서 채석을 한 것이다. 그렇게 선유봉은 채석장이 되어버렸고 봉우리는 점점 더 낮아져 갔다. 해방 이후에도 선유봉은 계속해서 채석장으로 이용되었는데 선유봉에서 캔 돌들은 지금의 강변북로 공사 등에 이용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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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샛강생태공원 한강 역사트레킹팀이 활기차게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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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깎이다보니 선유봉은 납작하게 되었고, 이후 한강이 개발되어 강폭이 넓어졌을 때 영등포 쪽과 분리되어 섬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후 1978년에는 서울 서남부권에 식수를 공급하는 정수장이 선유도에 들어서게 됐고, 그 정수장이 지난 2000년에 폐쇄되어 지금의 선유도 공원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그러고보면 선유도는 참 사연이 많은 섬이다. 깎이고, 부서지고, 졸지에 섬이 되어버리고.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선유도가 그렇게 아낌없이 내주었기에 지금이 서울 시민들은 느긋하게 '신선놀음'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날도 많은 사람들이 선유도에서 느긋하게 강바람을 맞으며 가을소풍을 즐겼다. 우리 역사트레킹팀도 간식을 먹으며 즐겁게 선유도를 탐방했다.

 

 



# 잠두봉이 왜 절두산으로 개명했나?

선유도를 이야기하면서 절두산을 언급하지 않는다면 안 될 것이다. 절두산은 한강역사트레킹의 루트는 아니었지만 그 중요성 때문에 따로 시간을 내서 설명을 했다. 앞서 말한 <양화환도>에서 절두산, 즉 잠두봉은 선유봉과 짝을 이루고 있다. 뽕나무가 많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잠두봉은 그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고 하여 용두봉이라고도 불렸다.

중국 사신들이 조선에 왔을 때 꼭 들렀다는 잠두봉이, 겸제 정선이 화폭으로 담아낼 정도로 비경을 자랑하던 잠두봉이 왜 절두산으로 이름이 바뀌었을까? 그것도 머리가 잘린다는 의미의 절두산(切頭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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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두산 성지 당산역 방면에서 찍은 사진이다. 절두산 성지 뒤로 북한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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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이루어진 병인박해 때문에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죽음을 당한다. 이때 주교인 베르뇌를 포함한 9명의 프랑스인들이 처형을 당했는데 그들은 절두산이 아닌 새남터(현재의 용산구 이촌동)와 충남 보령 갈매못 등지에서 죽었다.

이 병인박해가 원인이 되어 병인양요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자국의 선교사가 처형됐다는 소식에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의 로즈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 프랑스 함대는 본격적인 공세에 앞서 정찰선을 파견하는데 그 정찰선이 한강 깊숙이까지 올라온 것이다. 양화진을 넘어 서강까지 침범을 하고 돌아간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대원군이 가만히 있었겠는가? 아주 격분을 했다. 그러면서 '사악한 서양 세력의 흔적들을 천주교도들의 피로 씻어내겠다'며 잠두봉에 새로운 처형지를 만든 것이다. 그렇게 하여 뽕나무들이 우거졌던 잠두봉은 머리가 떨어져 나간다는 뜻의 절두산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 것이다.

약 150년 전, 그렇게 절두산은 수천 명의 천주교인들의 목이 잘려나간 비극의 땅이었다. 또한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가 감시견처럼 서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강물처럼 끊임없이 흘러갔다. 그 흐름은 흥선대원군도 어쩌지를 못했다. 현재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는 절두산 한쪽에 꿔다둔 보릿자루 마냥 껑뚱하게 서 있지만 절두산은 그 자체가 우리 천주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성지 중에 성지가 됐다.

서양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반대는 어느 정도 수긍이 가지만 사람들의 피로 그 흔적을 닦아낸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무슨 공포영화를 찍는 것도 아니고 사람 피로 무엇을 닦는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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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척화비 절두산 성지 한 쪽 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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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병인양요에 대해서 프랑스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더불어 그 콧대 높은 프랑스 함대가 왜 다시 조선을 침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시대사적인 유추를 해보았다.

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의 통치기였다. 그 시절 전 유럽은 신흥강국으로 발돋움한 프로이센에 대해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그 중 프랑스는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나라 중에 하나였다. 아니나다를까 몇 년 후 프랑스와 프로이센간에는 전쟁이 벌어졌고, 그 파장으로 독일 지방은 통일된 국가를 이루게 됐다. 즉 1866년경, 프랑스는 동방의 조선에 물리력을 집중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 숨어 있는 진주,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이런 필자의 설명을 뒤로하고 한강역사트레킹팀은 여의도 샛강생태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샛강생태공원은 1997년 9월 경에 우리나라 최초로 조성된 생태공원이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트레킹 코스나 자전거도로가 닦인 것은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앞쪽의 한강이 보기 좋게 정비가 됐다면, 뒤쪽의 샛강은 그렇지 못했다. 생태탐방로나 나무데크 같은 시설이, 또 자전거 도로 같은 인프라가 갖추어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S라인을 강조하며 여의도와 신길역을 연결하는 샛강도보교가 개통된 지도 겨우 1년 남짓 밖에 되지 않았다. 정확히는 2011년 4월 12일에 개통했다고 한다. 역으로 말하면 샛강의 접근성은 최근에 와서야 좋아졌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샛강생태공원이 무슨 대단한 절경을 품고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샛강은 상당히 매력적인 공간이다. 여의도의 고층건물과 습지가 서로의 배경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여의도라는 서울에서도 알아주는 첨단 구역에 샛강생태공원이라는 허파와도 같은 공간이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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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샛강생태공원 샛강생태공원은 억새가 많은 곳이다. 그 억새들을 배경으로 한 컷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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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합시다, 역사트레킹! 

한강 역사트레킹의 다음 탐방지는 중지도에 있는 노들 텃밭이다. 한강대교가 걸터 있는 중지도에 도시형 텃밭이 들어섰는데 그 곳이 우리의 마지막 방문지였던 노들텃밭이었다. 그곳은 2012년에 첫 농사를 지었는데 63빌딩을 비롯한 여의도의 고층 빌딩을 바라보며 농사를 짓는 이색적인 곳이다. 도심지 한복판에 한가롭게 허수아비들이 들어서 있는 모습도 흥미롭다. 노들 텃밭에는 오두막도 많은데 그곳에서 먹는 새참과 간식은 꿀맛일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한강 역사트레킹은 무사히 마무리됐다. 무슨 여복(?)이 터졌는지 모르겠지만 필자를 빼고는 모두 젊은 처자들이 이번 트레킹에 참여를 했다. 그것도 5명씩이나. 그런 5명의 재기발랄한 젊은 처자들과 함께 4시간 정도를 걸었더니 아주 상쾌했다. 물론 그들을 리딩하는 것 자체가 부담이긴 했지만 그 정도는 마스터의 숙명이라고 생각하고 감수를 했다. 

앞으로도 역사트레킹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역사트레킹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주말에 마땅히 할 일이 없으면 애꿎은 방바닥만 긁지 말고 필자와 함께 역사트레킹에 나서 보는게 어떤가? 필자가 유머 감각이 뛰어나지는 않다. 그래서 '이승만은 세종대왕과 같다'와 같은 '빵' 터지는 개그콘서트를 펼치지는 못한다.

하지만 단언컨대 일본 우익의 주장을 고스란히 담은 후소사 역사교과서나 요즘 한참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교학사 역사교과서보다 훨씬 더 양질의 콘텐츠를 제공할 것을 확실히 보장한다. 말만 잘하면 필자가 밥도 사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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