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걷는 역사트레킹 3편>

 

 

역사트레킹을 행하다보면 필연이든 우연이든 역사적 라이벌과 관련된 테마를 언급하게 된다. <인왕산 역사트레킹>에서 다룬 무학대사와 정도전, 즉 불교세력 VS 유교세력 간의 라이벌 대결이 좋은 예이다. 인물이 아닌 자연지형물 간의 대결도 있다. <낙산 역사트레킹>에서 서울의 좌청룡(낙산)과 우백호(인왕산) 간의 대결이 바로 그것이다.

 

이번에 소개할 정릉 역사트레킹도 라이벌과 관련이 있다. 누구와 누구 간의 라이벌일까?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 씨의 무덤이다. 일단 한 명은 나왔다. 그럼 나머지 한 사람은 누구? 자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 정릉: 필자가 탐방했을 때는 비가 많이 온 다음이어서 그랬는지 봉분에 방수포를 덮었었다. 보시다시피 정릉은 다른 왕릉에 비해 무척 단출하다. 뺄셈을 당한 것이다.

 

 

 

 

 

 

● 이성계의 총애를 받은 신덕왕후

 

트레킹 팀이 첫 번째로 탐방한 곳은 정릉(貞陵)이었다. 정릉은 신덕왕후 강 씨의 무덤이다. 황해도 곡산 출신인 신덕왕후는 이성계의 둘째 부인으로 이성계의 총애를 받게 된다. 1392년, 조선이 개국했을 때 태조의 옆에 서 있던 사람도 신덕왕후였다.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 씨가 그 전 해에, 조선의 개창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결국 강 씨는 현비로 봉해져 조선의 첫 번째 왕비에 오르게 된다.

 

조선왕조가 개창될 때 이성계의 나이는 58세였다. 그래서 즉위하자마자 세자 책봉에 나서야했다. 현비였던 신덕왕후로서는 자신이 생산한 왕자를 세자의 자리에 앉히고 싶어 했다. 이성계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던 그녀였기에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했으리라. 하지만 쟁쟁하게 버티고 있던 신의왕후 한 씨의 소생들이 문제였다. 방과(정종), 방원(태종) 등등... 신의왕후의 소생들은 조선 창업에 큰 공을 세운 이들이었다. 호락호락한 인물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신덕왕후는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정도전과 손을 잡게 된다. 정도전 입장에서도 이미 다 장성한데다 자기 주관이 뚜렷한 신의왕후 자제들보다는 아직 나이가 어린 강 씨의 소생이 세자가 되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 재상중심의 왕도정치를 주창한 정도전이었으니까.

 

결국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었던 방석(의안대군)이 1392년 8월 20일에 세자로 책봉된다. 그해 7월 17일에 조선이 개국했으니 약 한 달 만에 세자가 책봉이 된 것이다. 이에 이방원(정안대군)은 격분한다.

 

“정릉은 조선왕조가 개국한 후 처음으로 능으로 조성되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왕릉들에 비해서는 좀 허술해 보이지 않나요? 봉분을 둘러싼 봉분석(병풍석)도 없고요.”

 

그 말대로 정릉은 능의 격식에 맞지 않게 무언가가 빠져있다. 여백의 미학이 아닌 인위적으로 뺄셈을 당한 것이다. 그렇게 뺄셈을 한 사람은 바로 태종 이방원이었다.

 

신덕왕후는 자신의 소생이 왕위에 등극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396년(태조5)에 눈을 감고 만다. 자신이 너무나 사랑했던 신덕왕후가 죽자 이성계는 지금의 서울 중구 정동, 현재의 영국대사관 자리에 능을 조성했다. 또한 흥천사라는 사찰을 지어 그녀의 명목을 빌었다. 이 흥천사를 두고 원찰(願刹)이라고 부르는데, 원찰은 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어진 사찰을 뜻한다. 정조대왕과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융건릉 인근에 있는 용주사도 원찰이다.

 

 

 

 

 

 

 

* 정릉: 봉분에서 정자각 및 부속건물들을 내려본 모습.

 

 

 

 

 

 

 

● 뺄셈을 당한 정릉

 

1398년 8월, 이방원이 주도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무인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불리는 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정도전은 목숨을 잃게 된다. 세자였던 이방석도 목숨을 잃게 된다.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도성 안에 무덤이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1409년(태종9)에 정릉을 지금의 위치인 성북동으로 이전시킨다. 본격적인 뺄셈이 시작된 것이다. 그 다음해에는 정릉의 봉분을 두르고 있던 석각신장 같은 석물들을 광통교 건설에 쓰게 했다. 광통교는 청계천에 있는 다리다.

 

능에서 가져온 귀한 석재들로 돌다리를 만드는 만큼 그것들을 제대로 이용했으면 좋았으련만 이방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부러 신장석을 뒤집어 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광통교 하단을 보면 몇몇 신장석들은 머리가 바닥을 향해 있다. 이방원은 철저하게 신덕왕후를 짓밟았던 것이다.

 

“여기 이거 물구나무 선 거 같지 않나요?”

“진짜 그러네요.”

“청계천 복원할 때 뒤집어서 복원한 게 아니고, 광통교가 처음으로 만들어졌을 때부터 이렇게 물구나무를 세웠습니다. 광통교는 1410년, 태종 때 만들어졌지요. 이렇게 거꾸로 놓이게 된 건 제작자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됐다는 뜻이겠죠.”

“굳이 이렇게까지...”

“그나저나 이것들은 거의 600년 이상을 이렇게 거꾸로 세상을 보고 있었겠네요.”

 

이 대화들은 청계천 광통교를 탐방했을 때 이루어졌다. 이런 스토리텔링이 있기 때문에 정릉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광통교도 함께 탐방할 것을 추천한다.

 

신덕왕후의 능을 탐방한 후에는 정릉 숲길을 따라 걷는다. 정릉 자체보다 정릉 숲길이 더 좋다고 할 정도로 숲길이 참 빼어나다. 30분 정도 걸리는 코스가 있고 1시간 정도 걸리는 코스가 있는데 둘 다 좋다. 트레킹팀은 일부러 긴 코스를 걸었다.

 

이제 트레킹팀은 흥천사(興天寺)로 향한다. 정릉에서 나와 위쪽 주택가로 길을 잡으면 흥천사 표지판이 나온다. 왕릉의 정문을 통해 나오니 바로 주택가가 나오는 것도 정릉의 특징이다. 큰 주차장이 자리를 잡고 있는 동구릉이나 서오릉 같은 곳과는 차이가 확연하다. 숲길을 좋아하는 주민들은 아예 정릉 숲길에서 산책을 할 정도다. 정릉이 속해있는 성북구 주민들에게는 50% 할인이 적용된다. 성인 입장료가 1천 원이니 할인을 받으면, 500원으로 매일같이 정릉 숲길을 걷는 것이다. 무척 부럽더라.

 

 

 

 

 

 

 

* 석각신장: 청계천 광통교 교각 부분에 있는 석각신장. 머리 부분이 아래를 향하고 있다. 정릉의 봉분을 두루고 있던 병풍석이었는데 이렇게 엉뚱한 곳에서 이상한 자세로 세워져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정릉의 봉분이 단출할 수밖에...

 

 

 

 

 

 

● 정릉의 원찰 흥천사

 

흥천사는 정릉의 원찰이다. 신덕왕후에 대한 그리움이 지극했던 태조 이성계였기에 원찰을 크게 짓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흥천사는 1397년에 170여 칸의 대가람으로 탄생했고, 창건과 동시에 조계종의 본산이 된다. 1년 후에는 부처님 사리를 모신 사리각(舍利閣)도 만들어진다.

 

하지만 흥천사도 정릉처럼 우여곡절이 많았다. 흥천사는 정릉처럼 중구 정동에 세워졌다. 정릉이 현재의 자리인, 성북구로 옮겨진 후로도 계속 그 자리를 지키게 된다. 이때에는 원찰이 아닌 왕실의 비호를 받게 되는 왕실 사찰이 된다. 하지만 성종 이후에는 쇠락해졌고 1504년(연산군10)에는 큰 화재가 나서 사리각을 제외한 건물 전체가 불에 타는 아픔을 겪는다.

 

그러다 1510년(중종5)에는 남아있던 사리각까지 불타 없어진다. 이렇게 사찰이 쇠락하니 그 안에 있던 기물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그중 대표적인 게 보물 1460호로 지정된 흥천사 동종이다. 이 동종은 현재 덕수궁에 전시되어 있다. 범종이 사찰이 아닌 궁궐에 있는 것이다.

 

흥천사는 1569년(선조2)에는 왕명에 의해 정동 생활을 마감하고 ‘함취정’이라는 정자터에 다시 세워진다. 이때는 이름을 바꿔 신흥사(新興寺)로 불렸다. 그러다 1669년(현종10)에 신덕왕후가 복권됐고, 1794년(정조18)에 지금의 자리인 성북구 돈암동으로 이전하여 중창된다.

 

신흥사에서 흥천사로 제 이름을 다시 찾게 된 건 1865년(고종2) 때였다. 흥선대원군은 대방을 짓고, 그 대방의 현판을 쓰는 등 흥천사의 중창에 큰 역할을 한다.

 

어렵지 않은가? 연도도 많이 나오고, 여기 갔다 저기 갔다. 솔직히 정릉골 역사트레킹을 하면서 참 많이 애를 먹었다. 위에 저 내용을 트레킹팀 앞에서 해설을 했다고 생각해보시라! 가뜩이나 머리도 안 좋은데... 그래서 정리를 해본다.

 

1. 1397년 정릉과 흥천사 만들어짐

2. 1409년 정릉, 성북동으로 천장됨

3. 1569년 흥천사가 신흥사로 이름을 바꿔 옛 함취정 자리에 들어섬

4. 1669년 신덕왕후 복권됨

5. 1794년 신흥사가 지금의 자리로 이전, 중창됨

6. 1865년 흥선대원군이 중창을 하고, 흥천사로 이름을 다시 고침

 

흥천사는 사찰 탐방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꼭 한 번 방문해 볼만한 곳이다. 본당인 극락전을 비롯해 대방, 명부전 등의 가람들이 조선 후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 흥천사 대방의 겨울

 

 

 

 

 

 

 

● 이름값 하는 산사 가는 길

 

이제 트레킹팀은 북악스카이웨이의 동쪽편을 따라 걷는다. 차로로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북악하늘길을 걷는 것이다. 계속 북악하늘길을 따라 걷다 북악골프연습장이 나오면 숲길로 들어선다. 이 숲길은 ‘산사 가는 길’이라는 도보여행길이다. 북악산 북쪽편에는 작은 사찰들이 많은데 그 사찰들을 연결한 길이다. 북악하늘길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차가 다니는 길이라 산사 가는 길보다 못하다. 산사 가는 길은 진짜 이름값을 한다. 직접 걸어보시길 권한다.

 

역사의 라이벌은 참 많이도 있었다. 싸움 구경이 재미나듯이, 역사가들에 의해 싸움 붙여진 라이벌들도 많을 것이다. 라이벌은 선의의 경쟁관계로 있어야 서로에게 이득이 될 것이다. 상대방을 찍어 누르려는 라이벌은 비극만을 초래할 뿐이다. 특히 권력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는 더 그렇다. 도대체 권력이 무엇이기에!

 

 

 

 

 

 

 

* 흥천사의 본당 극락전

 

 

 

 

 

 

 

 

* 정릉 숲길

 

 

 

 

 

 


 

 

 

 

■ 정릉골 역사트레킹

 

1. 코스: 정릉 ▶ 흥천사 ▶ 북악하늘길 ▶ 산사가는길 ▶ 전망대

2. 이동거리: 약 7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휴식시간 포함)

4. IN: 경전철 우이신설선 정릉역 2번 출구 / OUT: 국민대 ☞ 국민대에서 버스편을 이용하여 다시 정릉역으로 이동할 수 있다.

 

 

 

 

 

* 태릉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지난 3월 21일 목요일


3월 14일부터 영등포 50플러스센터에서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강의를 진행합니다. 어라,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은 어디다 팔아 먹고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이 된 거죠? ^^;

이번 강의는 인문학을 강조해야 한다는 영등포50 측의 요청으로 네이밍을 저렇게 했답니다. 뭐 이름만 살짝 바꿨지 별다를 건 없습니다. 한마디로 오십보 백보, 거기서 거기라는 것이죠...ㅋ

경국사에서 시작하는 정릉골 역사트레킹은 조금 난이도가 있는 코스입니다. 계단도 많고, 고바위도 있고요. 이날 오신 분들은 좀 고생을 하셨을 겁니다.ㅋㅋㅋ 

하지만 그렇게 고생을 한 보람은 분명히 있을 겁니다. 왜냐? 시원한 풍광이 트레킹팀을 맞이했으니까요. 트레킹팀은 정릉골 역사트레킹의 메인 포인트인 인디언 바위에 올랐는데요, 이곳이 정말 바람의 언덕이더군요. 시원한 바람이 트레킹팀의 얼굴을 스쳐가는데... 그 뒤로, 아니 360도로 펼쳐져 있는 풍광이 정말 멋졌습니다. 

이 인디언 바위는 삼각산(북한산)에서 내려온 맥이 경복궁 뒤편의 백악산(북악산)으로 연결되는 구준봉에 자리잡고 있는 곳입니다. 삼각산 보현봉에서 내려온 맥은 구준봉을 거쳐 백악산으로 뻗어나갑니다. 한마디로 삼각산과 백악산으로 연결하는 아주 중요한 맥을 트레킹팀이 탐방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수강생분들에게 제 목을 탁 치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곳은 서울 풍수에서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목뒷덜미 같은 곳이니까요. 여기는 직접 눈으로 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어요."

수강생분들도 내심 제 말에 동의를 해주시는 거 같더군요. 내친김에 저는 말을 더 보탰습니다.

"제가 이 땅 살까요? 여기 사면 서울을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데..."

그런데 바람소리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는데 희미하게 이런 소리가 들리더군요.  

"살 돈은 있수? 점심 값도 없어보이는디..."





























  







* 광교: 청계천에 있다. 






청계천이야기 1


청계천(淸溪川)은 똥물이었습니다맑을청()자를 품고 있는 명칭과는 달리 진짜 똥물이었습니다.


예전에 그만큼 더러웠다는 뜻이죠똥물처럼 탁하다는 뜻이요?”


저렇게 물어보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저런 질문을 하시는 분들은 청계천이 똥물처럼 오염된 하천이라고 판단하셨을 겁니다워낙 오폐수로 뒤덮이다보니 똥물만큼 더럽다고 생각하신 것이겠죠.


청계천이 똥물이었다는 말은 진짜 청계천에 똥이 둥둥 떠다녀서 붙여진 이름입니다혼탁해서 붙여진 것이 아니라 진짜 똥이 흘러흘러 떠내려가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청개천의 원래 이름은 개천(開川)이었습니다. 청계천이란 명칭은 일제강점기 이후부터 사용되었지요태종은 자연 상태에 놓여 있던 개천을 준설합니다퇴적이 심각했던 터라 큰 비만 내리면 일대가 다 침수가 됐기 때문입니다이때가 1411(태종11)년이었는데 그 전 해에 큰 홍수가 나서 목교가 떠내려가는 등 도성 일대가 큰 홍역을 치렀습니다.






* 광교: 석각신장이 뒤로 누워 있다. 필자가 일부러 사진을 돌린 것이 아니다. 





이 시기에 광교가 만들어집니다석교로 만들어진 광교는 나무다리로 만든 목교들과는 달랐습니다튼튼한 돌다리이기에 물살에 휩쓸리지 않았던 것입니다그렇게 튼튼하게 만들어진 광교의 석재들은 신덕왕후의 능에서 가져온 것들입니다태종은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을 지금의 자리(성북동)로 옮기고 석각신장 같은 석물들을 광교 건설에 사용했던 것입니다처음 정릉은 지금의 덕수궁 부근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능의 석물들을 다리를 만드는데 사용했을까요왜 태종 이방원은 망자를 욕되게 했을까요신덕왕후는 태조 이성계의 계비로 첫 번째 왕세자인 이방석의 어머니였습니다이방원과는 대척점에 있었던 인물이었지요왕자의 난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신덕왕후를 부정해야 했을 겁니다자신이 신덕왕후의 소생 이방석을 죽였으니까요.


청계천변의 다리들은 백성들이 많이 이용했습니다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광교를 오갔을 겁니다짚신이든 가죽신이든 그 발걸음들이 신덕왕후 능에서 가져온 석물들을 밟고 갔습니다그렇게 걸음걸음이 오가는 것 자체가 신덕왕후를 욕보이게 하는 것이겠지요.


똥물이야기하다 갑자기 광교이야기를 하니 좀 혼란스러우시죠본격적인 똥물이야기는 다음편에...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무장공비 루트에 고운 단풍... 그런데 여기가 서울?



정릉에서 김신조 루트까지, 성북동 역사트레킹




16.11.21 13:10 최종 업데이트 16.11.21 13:10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함께 걷는 서울트레킹>이라는 프로젝트를 12월 20일까지 진행합니다. 그 프로젝트 연재글을 알맞게 편집·수정하여 오마이뉴스에 기고할 예정입니다. 이번글은 5편입니다. - 기자 말

    

▲ 북악산 북악산 하늘길, 일명 김신조 루트를 걷고 있는 참가자들.
빛깔 고운 단풍비를 맞으며 걷고 있다.

        

        



출발 전부터 바람이 불었다. 빗방울도 오락가락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이 처음 런칭하는 날인데..."

지난 10월 23일.

이 날은 성북동 역사트레킹이 행해진 날이었다. 성북동 트레킹은 스토리펀딩에서 처음으로 실시하는 트레킹이었다. 그래서 나름 준비도 열심히 했다. 발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답사도 여러번 다녀왔고, 자료를 찾는다고 책장을 분주히 넘기기도 했다. 하지만 당일 날 날씨가 발목을 잡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바람이 불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트레킹할 때 날씨가 좋으면 반을 먹고 들어간다고 하는데 보시다시피 오늘은 꽝이네요."
"그래도 좋아요!"
"이런 날씨에 걷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오히려 그 자리에 모인 후원자분들이 더 걱정을 해주셨다. 말씀만이라도 고마웠다. 이런 후원자들과 함께 트레킹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축복일 테지!





▲ 정릉 세계문화유산 정릉.   

       







이성계의 총애를 받은 신덕왕후

트레킹 팀이 첫 번째로 탐방한 곳은 정릉(貞陵)이었다. 정릉은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이다. 황해도 곡산 출신인 신덕왕후는 이성계의 둘째 부인으로 이성계의 총애를 받게 된다. 1392년, 조선이 개국했을 때 태조의 옆에 서 있던 사람도 신덕왕후였다.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가 그 전 해에, 조선의 개창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결국 강씨는 현비로 봉해져 조선의 첫 번째 왕비에 오르게 된다.

조선왕조가 개창될 때 이성계의 나이는 58세였다. 그래서 즉위하자마자 세자 책봉에 나서야 했다. 현비였던 신덕왕후로서는 자신이 생산한 왕자를 세자의 자리에 앉히고 싶어 했다. 이성계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던 그녀였기에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했으리라.

하지만 쟁쟁하게 버티고 있던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들이 문제였다. 방과(정종), 방원(태종) 등등... 신의왕후의 소생들은 조선 창업에 큰 공을 세운 이들었다. 호락호락한 인물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신덕왕후는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정도전과 손을 잡게 된다. 정도전 입장에서도 이미 다 장성한데다 자기 주관이 뚜렷한 신의왕후 자제들보다는 아직 나이가 어린 강씨의 소생이 세자가 되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 재상중심의 왕도정치를 주창한 정도전이었으니까.

결국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었던 방석(의안대군)이 1392년 8월 20일에 세자로 책봉된다. 그해 7월 17일에 조선이 개국했으니 약 한 달 만에 세자가 책봉이 된 것이다. 이에 이방원(정안대군)은 격분한다.

"정릉은 조선왕조가 개국한 후 처음으로 능으로 조성되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왕릉들에 비해서는 좀 허술해 보이지 않나요? 봉분을 둘러싼 봉분석도 없고요." 

그 말대로 정릉은 능의 격식에 맞지 않게 무언가가 빠져 있다. 여백의 미학이 아닌 인위적으로 뺄셈을 당한 것이다. 그렇게 뺄셈을 한 사람은 바로 태종 이방원이었다.

신덕왕후는 자신의 소생이 왕위에 등극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396년(태조5)에 눈을 감고 만다. 자신이 너무나 사랑했던 신덕왕후가 죽자 이성계는 지금의 서울 정동, 현재의 영국대사관 자리에 능을 조성했다. 또한 흥천사라는 사찰을 지어 그녀의 명목을 빌었다.

이 흥천사를 두고 원찰(願刹)이라고 부르는데, 원찰은 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어진 사찰을 뜻한다. 정조대왕과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융건릉 인근에 있는 용주사도 원찰이다.



                             ▲ 정릉 봉분을 두르는 봉분석이 없다.

        






뺄셈을 당한 정릉

1398년 8월, 이방원이 주도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무인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불리는 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정도전은 목숨을 잃게 된다. 세자였던 이방석도 목숨을 잃게 된다.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도성 안에 무덤이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1409년(태종9)에 정릉을 지금의 위치인 성북동으로 이전시킨다. 본격적인 뺄셈이 시작된 것이다. 그 다음해에는 정릉의 봉분을 두르고 있던 석각신장 같은 석물을 광통교 건설에 쓰게 했다. 광통교는 청계천에 있는 다리다.

능에서 가져온 귀한 석재들로 돌다리를 만드는 만큼 그것들을 제대로 이용했으면 좋았으련만 이방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부러 신장석을 뒤집어 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광통교 하단을 보면 몇몇 신장석들은 머리가 바닥을 향해 있다. 이방원은 철저하게 신덕왕후를 짓밟았던 것이다.

"여기 이거 물구나무 선 거 같지 않나요?"
"진짜 그러네요."
"청계천 복원할 때 뒤집어서 복원한 게 아니고, 광통교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이렇게 물구나무를 세웠습니다. 광통교는 1410년, 태종 때 만들어졌지요. 이렇게 거꾸로 놓이게 된 건 제작자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됐다는 뜻이겠죠."
"굳이 이렇게까지..."
"그나저나 이것들은 거의 600년 이상을 이렇게 거꾸로 세상을 보고 있었겠네요."


인왕산역사트레킹 때 광통교 앞에서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이런 스토리텔링이 있기 때문에 정릉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광통교도 함께 탐방할 것을 추천한다. 





▲ 광통교 정릉에서 빼온 신장석이 거꾸로 세워져 있다. 무려 600년이 넘는 시간동안. 광통교는 청계천에 있다.

     


 
  

아픈 현대사를 걷다, 김신조 루트를 걷다

정릉을 뒤로 하고 트레킹팀은 본격적인 길을 나섰다. 바람이 좀 더 세게 부는 듯했다. 빗줄기도 더 강해지고 있었다. 참가자들 중에는 우비를 꺼내 입은 분들도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날씨가 이런 게 내 잘못이야? 기왕 이렇게 된 거 좋게 생각하자. 오늘 가는 곳이 아픈 현대사를 담은 곳이잖아. 그러니 비를 배경 삼아 가는 것도 괜찮겠네.'

트레킹팀은 북악스카이웨이를 지나 <북악하늘길>로 접어들었다. 북악하늘길은 성북구에서 조성한 도보여행길로 총 4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트레킹 팀은 제2산책로를 '타깃'삼아 이동을 했다. 나는 제2산책로를 앞에다 두고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정릉을 거쳤고, 북악스카이웨이 옆 산책로도 지나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많이 소요됐습니다."
"그럼 거의 끝난 건가요?"
"아니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이 코스를 걷기 위해 우리가 여기에 온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예행연습이었어요."
"에이..."
"너무 해!"







      ▲ 북악산 하늘길 단풍이 고운 북악산 하늘길.         

       



그렇게 참가자들은 탄식을 내뱉었다. 어떤 참가자는 내게 '사기꾼'이라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자신이 있었다. 그 탄식과 핀잔이 감탄사로 바뀔 것이라는 그런 자신감.

"이 곳은 북악하늘길 제2코스입니다. 일명 김신조 루트라고 불리는 곳이죠."

북악산은 군사 목적으로 출입이 제한되다가 지난 2007년 전면 개방이 되었다. 그 군사적인 목적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 바로 김신조 일당이었다.

"1·21사태, 일명 김신조 사건에 대해서 알고 계시죠? 청와대 습격 사건이라고도 부르는 그 사건이요."

나는 호경암 앞에서 입을 열었다. 호경암은 1·21사태 때 격전이 벌어진 곳이다. 당시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져 아직까지도 바위 곳곳에는 그날의 아픈 흉터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당시 김신조를 위시한 무장공비들은 시간당 10km 이동을 했답니다. 그것도 산길을요. 건강한 성인이 4km로 정도로 이동하니까 그들이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이동을 했는지 알 수 있겠죠."

구멍이 뻥뻥 뚫린 호경암을 앞에 두고 나는 설명을 이어갔다.


▲ 호경암 치열했던 교전의 흔적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호경암. 빨간색으로 칠한 표시가 바로 총탄 자국이다.        

  





격동의 시기, 1968년!

"김신조 사태가 1968년 1월 21일에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 이틀 후인, 1월 23일에는 미국의 정보선인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의해 나포되지요. 또 그해 10월 경에는 울진, 삼척 지역에 무장공비 120명이 침투를 하기에 이릅니다."
"참 많은 일이 있었네요. 그때..."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었어요. 베트남에서는 월맹군의 구정공세로 미군의 예봉이 꺾였고, 미국에서는 반전 운동이 크게 일어났잖아요. 히피문화로 대변되는..."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나는 숨을 좀 가다듬고 말을 이어갔다.

"이것 말고도 1968년에는 전세계적으로 많은 일들이 발생합니다. 서구에서는 68혁명이라 하여 구체제 극복을 내세운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약간 다른 이야기지만 당시 공산권인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프라하의 봄이라는 혁명이 일어났지요. 밀란 쿤데라라고 소설가 아시죠? 그 사람이 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프라하의 봄이 중요한 모티브였습니다. 하지만 그 봄날은 오래가지 못했답니다. 구소련이 강제 진압을 했었거든요. 봄날이 너무나 쉽게 가버린 것이죠."

너무 설명이 진지했던 것 같아 약간 말을 돌렸다.

"이제까지 1968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봤는데, 그 1968이라는 숫자를 저도 가지고 있답니다. 제 전화기 끝자리가 1968이거든요."

그렇게 내가 실없는 소리를 했어도 참가자들은 신나했다. 비가 오고 있어도 바람이 불고 있어도 신나했다. 왜? 성북동 트레킹이 아름다운 풍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악산 단풍이 아주 곱게 잘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빛깔 고운 단풍을 서울에서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무장공비의 루트였던 곳에서 그토록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보고 있다니!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하긴 아무리 지뢰가 깔리고, 철조망이 쳐져 있다고 해도 DMZ만큼 아름다운 곳도 없을 테니까!

글을 마치기 전에 혁명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한 마디만 하자. 며칠 전인 12일에 백 만명 이상 사람들이 모여 촛불집회를 열었다. 그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19일에도 수많은 이들이 촛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모여들었다. 촛불혁명이라고 명명해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광장에 모여 불을 밝혔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이렇게 외쳤다.

"박근혜 퇴진"

나중에 이 촛불혁명은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승리로 기록될 것인가? 아니면 패배로? 나는 승리로 기록되길 간절히 기원한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 성북동 트레킹: 비주얼이 뛰어났던 북악산.








10월 23일.


강원도에서 들려오는 단풍 소식이 우리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때였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서울의 대부분의 산들은 아직 단풍 절정기에 들지 않았더군요. 기왕하는 트레킹, 아름다운 단풍을 보며 걸으면 좋잖아요.


이 날은 <함께 걷는 서울트레킹>의 세번째 리워드 트레킹이 있었던 날입니다. 일명 성북동 역사트레킹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이 성북동 트레킹은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처음으로 런칭하는 것이었습니다.


"잘해야 하는데!"


첫 스타트였으니 부담감도 좀 생기더군요. 그런 약간의 부담감을 안고 약속장소인 성심여대역으로 출발을 했습니다.


첫번째 코스인 정릉을 지났는데... 그만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군요. 바람도 거세게 불고. 가는날이 장날이라고 트레킹을 첫번째로 런칭한 날인데!!! 


그렇다고 하염없이 날씨 탓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고 하잖아요. 기획한대로 제 임무를 열심히 수행했습니다. 답사를 제대로 해서 그랬는지 첫 번째로 행하는 트레킹치고는 물 흐르듯이 잘 진행이 되었답니다.


"우와!"


북악산을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참가자들의 탄성 소리도 커져갔습니다. 왜냐? 알록달록한 단풍들이 주위를 뒤덮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울의 다른 산들은 아직 단풍절정기가 아니었지만 우리가 갔던 북악산 코스는 단풍이 최절정기에 다다랐던 것입니다.


아름다운 비주얼을 바라보며 걸으니 발걸음이 한결 더 가볍더군요. 참가자분들의 반응도 폭발적이었습니다.


"올해 단풍놀이를 여기서 할 줄이야!"


첫번째인데다, 비 내리는 날 행한 트레킹이었지만 많은 분들이 호응을 해주셔서 무사히 행사가 잘 종료가 됐답니다.


그러고보니 저도 올해 단풍놀이를 그날 처음했던 것 같네요. 눈이 호강을 한 하루였습니다.

 



 





 
   * 전망대: 뒤로 성북구와 도봉구 일대가 보인다.
 






 

  * 호경암: 1.21사태. 일명 김신조 사태 때의 상흔을 품고 있는 호경암.








  * 성북동 역사트레킹: 단풍길을 걷고 있는 참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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