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0일 금요일.

영등포 50플러스센터에서 다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심화과정이 개설된 것이죠.
앞에 포스팅에서도 언급했듯이 저는 영등포 50플러스센터에서 열린강의를 진행했었습니다. 그런데 제 강의가 반응이 좋아서 이번에 심화과정을 개설하게 된 것이죠. 이를 두고 영등포 50플러스센터에서는 '시드팩토리(seed factory)'라고 부르더군요. 직역하면 '씨앗공장'이 되는 거겠죠. 뭐 강의를 잘 키울 수 있게 도움을 주겠다는 뜻이겠죠. 

열린강의 -> 심화강의(시드팩토리) -> 정식강의

이런 식의 단계를 밟습니다. 현재 제 강의가 심화강의에 놓인 만큼 좀 더 잘해서 정식강의로 발돋음 하고 싶네요. 기왕하는 거 잘해서 A강사 소리 한 번 들어야지요! ^^;

이날은 첫 수업이었던 만큼 오리엔테이션 개념으로 진행했습니다. 1시간은 실내에서 공지사항을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야외로 나갔지요. 센터 근처에 여의도 샛강 공원이 있어 그 길을 걸었답니다. 

누가 트레킹 수업 아니랄까봐... 첫날부터 문을 박차고 야외로 나갔답니다. 그 샛강길을 따라 선유도 공원까지 걸어갔지요. 그 선유도를 중심으로 반대편 쪽에 있는 절두산 성지까지 설명을 했답니다. 

선유도는 처음부터 섬이 아니었다는 거, 선유봉이었는데 깎이고 깎여 결국 지금처럼 섬이 되버리는 이야기. 절두산도 처음부터 절두산이 아니었다는 거, 예전에는 잠두봉이라는 명칭으로 쓰일만큼 뽕나무가 많이 있었던 이야기. 그러다 흥선대원군이 병인박해를 일으켜 지금처럼 절두산 성지가 되어버린 이야기...

그러고보면 옛 한양의 외수구인 한강도 스토리텔링이 무궁무진합니다. 너무 많아서 다 꿰지 못할 정도지요. 

첫날 수업이라 좀 가볍게 걸었답니다. 무리하지 않고 워밍업 하듯이 걸었습니다.

아참! 이날은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의 현수막이 처음으로 빛을 본 날입니다. 저 현수막을 제작하기 위해 거금을 투입했답니다. 마무리는 간판집 사장님이 해주셨지만 기본 디자인은 제가 직접했다는 사실! 푸하핫!!! 







 

 

선유도가 원래 섬이 아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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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작가

 

 

 

 

 

 

본문내용

양화대교

 

한강은 서울 한복판을 유유히 흘러가며 사람들에게 많은 것들을 나누어 주었다. 지금이야 모습이 많이 바뀌었지만 여름에는 강수욕장으로 변해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고, 겨울에는 얼음을 채취할 수 있는 일등 장소로 이용됐다. 그렇듯 한강은 예로부터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진경산수화로 유명한 겸재 정선(1676~1759)도 한강을 무척이나 사랑한 인물이었다. 진경산수화란 우리 산천을 우리의 필치로 담아낸 것을 말한다. 진경산수화 이전에는 중국 남방 화풍으로 우리 산천을 담아냈었다.

 

겸재는 65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양천 현감으로 봉직된다. 현감 시절 겸재는 ‘선유봉’, ‘양화환도’ 같은 진경산수화를 그렸는데 그 배경이 됐던 장소가 지금의 선유도와 절두산 일대이다.

 

 

 

 

신선이 노닐던 봉우리, 선유봉

 

선유도-양화대교: 뒤로 당산철교와 여의도가 보임.

 

 

 

 

선유도는 원래 섬이 아니었다. 선유봉(仙遊峰)이라고 불린 해발 40m 정도의 봉우리였다. ‘신선들이 노니는 곳’이라고 불릴 정도로 선유봉은 그 형상이 오묘하였다고 한다. 지대가 얕은 강변 부근에 소나무가 군집해 있는 기암괴석의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으니, 예로부터 이곳은 많은 이들이 즐겨 찾은 명승지였다. 그렇게 선유봉을 찾아 ‘신선놀음’을 했던 이들은 우리나라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중국의 사신들도 이곳을 찾아 조선의 풍광에 감탄을 했다고 한다.

 

 

 

 

당산철교 아래 초미니섬

 

 

 

그렇다면 ‘신선들의 봉우리’였던 선유봉은 왜 지금처럼 섬이 되었을까? 선유봉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자신을 깎아내렸다. 그렇게 깎인 돌은 일제 강점기에는 여의도 비행장의 활주로와 제방을 쌓는데 사용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강변북로 공사에 이용되었다. 그렇게 깎이고 깎이다가 원형을 잃게 되었고, 이후 한강의 강폭이 넓어졌을 때는 주변으로 강물이 채워져 섬으로 고립되게 된다.

 

선유도의 변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78년에 서울 서남부권의 식수를 공급하는 정수장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선유도 정수장은 폭발적으로 늘어난 서남부권의 주민들에게 식수를 공급했던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고 보면 어린 시절 서울 서남부권에 거주했던 필자도 선유도 정수장에서 공급된 물을 마시고 자랐던 셈이다. 선유도 정수장은 2000년도 까지 운영됐고, 그 이후에는 공원으로 꾸며졌다.

 

 

 

 

* 척화비: 절두산 성지

 

 

 

 

 

지금은 무시무시한 이름으로 개명한 잠두봉

 

선유도의 반대편에는 절두산이 있다. 이 절두산(切頭山)도 사연이 많은 산이다. 절두산의 원래 명칭은 잠두봉이었다. 뽕나무가 많이 자란다고 하여 잠두봉(蠶頭峰)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그런데 1866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이곳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대거 붙잡혀 와 머리가 잘리는 참수형을 당하게 된다. 무려 8천 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참수를 당했는데 그 이후로 이 곳은 ‘절두산’으로 불리게 됐다. 흥선대원군은 이곳에 척화비를 세워 쇄국정책의 고삐를 죄게 된다.

 

 

 

 

 

절두산 성지

 

 

 

 

한강을 사이에 두고 한 곳은 깎이고 깎여 섬이 되었고, 또 한 곳은 ‘머리가 잘린다는’ 무시무시한 이름으로 개명을 하게 됐다. 두 봉우리가 동시에 비운을 겪게 된 셈이다.

 

300여 년 전 겸재 정선이 양화진 일대를 그린 ‘양화환도’에는 선유봉과 잠두봉이 풍치있게 그려져 있다. 두 봉우리 사이로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고, 그 위를 나룻배가 느긋하게 물길을 가르고 있다. 유심히 보고 있노라면, 마치 화폭에 들어가 겸재 선생과 함께 뱃놀이를 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지금은 겸재 선생도, 나룻배도 없다. 또한 선유봉은 원형을 잃었다. 하지만 너무 슬퍼하지 말자. 양화대교가 있으니까. 절두산 성지를 탐방한 후 양화대교를 건너 선유도에 갈 수 있다. 양화대교와 선유도는 연결되어 있다.

 

양화대교에는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면서 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커피전문점도 있다. 양화대교 양 옆에 있는 절두산 성지와 선유도를 탐방한 후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것도 운치가 있을 것이다. 아, 그렇다면 한강 근현대사 탐방 후에 마시는 커피 한 잔이 되는 건가?

 

 

 

* 선유도 공원: 옛 정수장 시설물을 전시하고 있다.

 

 

 

 

 

 

 

■ 도움말
1. 코스: 합정역 ▶ 절두산성지 ▶ 양화대교 ▶ 선유도 ▶ 당산역
 * 코스 종료 후 여의도에 위치한 샛강생태공원까지 탐방하는 것도 추천함.
2. 교통편: 시작 – 합정역(2,6호선) 7번 출구 / 종료 – 당산역(2,9호선)

 

 

 

이승만의 한강대교 폭파... 그런 일이 있었냐고?

 

아픈 역사 간직한 한강 다리 곳곳, 자전거·도보 탐방으로 '딱'

 

15.03.11 20:11   최종 업데이트 15.03.11 20:11

 

 

 

 

 

 
▲ 노들텃밭 한강대교 중간에 위치한 노들섬에 있는 노들텃밭. 텃밭 뒤로 한강대교 아치가 보인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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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서울시와 관련된 한강 다리는 몇 개일까? 총 26개다. 지난해 11월 구리암사대교의 임시 개통으로 26개로 늘어났다. 동쪽 강동대교에서부터 서쪽 신행주대교까지 한강변을 따라 늘어서 있는 다리들은 한강철교와 같은 열차 전용 교량도 있고, 방화대교처럼 자동차만 다닐 수 있는 다리도 있다. 물론 사람과 자동차가 동시에 이동할 수 있는 교량이 대다수다.


서울의 팽창과 함께 한강에도 차곡차곡 다리들이 놓이게 됐다. 한강 다리들은 '한강의 기적'을 온몸으로 증명하는 상징물이 된 것이다. 한강 다리 교각 아래로 우리의 근현대사가 흘러갔고, 또 흐르고 있다고 표현할 수도 있는 셈이다. 역사성만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자기만의 색깔이 강한 다리들도 생겨나면서 한강 다리를 따라 도보 탐방을 즐기는 사람들까지 나타났다. 보행로의 확장과 연결로 정비 등으로 한강 다리 자체가 트레킹 코스로 자리 잡은 것이다. 

 

 



현대사 비극 품은 한강대교

한강에 처음으로 들어선 인공 교량은 한강철교다. 1900년도에 들어선 한강철교는 말 그대로 철도 전용 다리였기에 일반 사람이 이용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지금이야 교통카드만 있으면 전철을 타고 느긋하게 한강을 넘어갈 수 있지만, 옛날 구한말의 백성이 기차표를 쉽게 끊을 수 있었겠는가?

일반 백성이 편리하게 한강을 넘을 수 있게 된 건 1917년부터였다. 한강 인도교라고 불렸던 한강대교가 개통됐기 때문이다. 한강철교 제작 때 남은 자제들로 건설되어서 그런지 개통 당시 한강대교는 대교(大橋)라는 말이 어울리지는 않았다. 중앙 차로 부분이 4미터, 좌·우측 보도 부분이 각각 1미터, 총 6미터의 폭이었기 때문이다.

한강대교는 당시 경성 사람들의 나들이 장소였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나룻배에 의존해 도강해왔던 한강을 느긋하게 걸어서 건널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무척 신기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한강대교는 그 긴 역사만큼 큰 아픔도 가지고 있다. 한국 전쟁 시기였던 1950년 6월 28일 다리가 폭파됐기 때문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공격으로 서울 함락이 눈앞에 이르자 당시 이승만 정권은 한강대교 폭파라는 극단적인 판단을 하게 된다.

 



 
▲ 한강철교 63빌딩 부근에서 촬영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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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파 작전은 기습적으로 감행됐다. 당시 한강대교에는 수많은 피난민이 다리를 건너고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어떠한 사전 통보도 없었다. 그래서 500명이 넘는 피난민들이 폭파와 함께 생명을 잃거나 한강에 수장됐다.


어처구니가 없었던 건, 당시 시내에서는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음성이 계속해서 퍼져 나왔다는 것이다. 그때 이승만 정권의 수뇌부는 이미 대전으로 피난을 간 상태였다. 수도 서울을 버리고 시민의 피난 행렬을 묶어둔 채 앵무새처럼 녹음 방송만 틀어댔던 셈이다.

한강대교 폭파로 군사적인 피해도 엄청났다. 한강 북부에 남아 있던 국군의 퇴각로가 봉쇄됐기 때문이다. 만약 순차적인 퇴각이 이뤄졌다면 국군은 한강 이남에서 전열을 정비해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할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1950년 7월 14일에 전격적으로 단행된 전시 작전 통제권 이양도 없었을 수도 있었다.

분명 한강대교 폭파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그런 사실들을 모르는 듯했다. 필자가 몇 차례 걸쳐 한강 다리 트레킹을 진행하면서 만난 사람들이 한강대교가 끊겼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는 모습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리가 끊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도 절단한 주체를 잘못 알고 있었다. '미군의 공중 폭격으로 교량이 폭파되지 않았냐'고 물었던 참가자도 있었으니까. 필자는 한강대교 설명을 마칠 때 이런 말로 항상 마무리를 지었다.

"인민군의 남침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한강대교 폭파에 면죄부가 부여될 수 없지요. 자기는 안전하게 대전에 내려가 있으면서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거짓말이나 해대고... 그게 바로 이승만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건국 대통령이라고 칭송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뭘 건국했다는 건지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선유도를 품고 있는 양화대교

 
▲ 양화대교 선유도에서 촬영한 사진임.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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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그런 명칭이 통용되지 않지만 예전에는 '제1한강교', '제2한강교'처럼 한강 다리에 번호들이 매겨졌다. 제1한강교는 앞서 언급한 한강대교이고, 제2한강교는 이번에 소개할 양화대교다. 1965년 양화대교가 들어서기까지 한강에는 인도교가 두 개밖에 없었는데 한강대교와 1936년에 준공된 광진교가 바로 그것이었다. 둘 다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졌다. 그래서 양화대교는 우리나라 기술진에 의해 한강에 만들어진 최초의 인공 교량이 된 것이다.


양평동과 합정동을 연결하는 양화대교는 서울 서남부권의 교통량 해소라는 목적과 함께 서부전선의 물자 수송을 위한 군사적 목적을 염두에 두고 건설됐다. 그래서 유사시에는 군사 작전에만 이용하도록 그 용도가 제한됐다. 양화대교는 선유도를 품고 있어 한강 다리 트레킹을 하기에 가장 좋은 다리다. 또한 합정동 방면으로는 절두산 성지를 지척에 두고 있어 역사 탐방까지 자연스럽게 진행할 수 있다.    

 

 

 

* 선유도: 선유교를 넘어 선유도로 갈 수 있다.

 

 

 

 


선유도는 처음엔 섬이 아니었다. 원래는 선유봉(仙遊峰)이라고 불렸던 곳이다. 말 그대로 신선들이 노닐었다는 선유봉은 맞은편 잠두봉과 함께 중국 사신도 즐겨 찾았다는 절경이었다. 잠두봉은 뽕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인데 흥선대원군 시절 절두산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지금은 천주교의 성지로 불리는 곳이다.

선유봉은 일제 강점기 때 여의도 비행장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채석 작업이 이뤄져 그 높이가 점점 낮아지게 됐다. 해방 이후에도 채석 작업이 진행됐고 결국, 그 원형을 잃게 됐다. 이후 한강의 강폭이 넓어져 섬이 되었고, 1978년 그 자리에 정수장이 건립됐다가 지난 2000년에 폐쇄됐다. 선유도 공원은 그 정수장을 개조해 만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선유도의 역사는 곧 한강 개발의 역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그런 아픔을 품고 있는 선유도는 한강을 찾는 서울 시민의 좋은 휴식처가 됐다. 선유도는 산책하기도 좋고, 소풍 가기도 좋은 곳이다. 날씨가 청명한 날에는 확 트인 한강을 넘어 인왕산과 남산, 멀리 북한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잠수교와 잠실철교


 
▲ 잠수교 한강다리들 중에 가장 접근성이 좋은 다리.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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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에 있는 다리를 직접 걸어서 건너다보면 자연스럽게 순위가 매겨진다. 그 중 단연 1등은 잠수교다. 도보로 한강 다리를 건널 때 가장 중시되는 부분은 진·출입의 편리성이다. 다리에 설치된 보행로는 만족스럽지만, 다리 자체에 대한 접근이 어려운 곳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잠수교는 보행로뿐 아니라 진출입의 편이성에서도 최고점을 받기에 충분했다. 한강 시민 공원에서 바로 잠수교로 진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잠수교는 795m로 한강 다리 중에서는 가장 짧다. 넓게 확보된 보행로와 진·출입의 용이성, 거기다 최단 거리로 한강을 건널 수 있기 때문에 잠수교는 한강을 가장 편하게 건널 수 있는 다리 1위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한강 다리 중에는 지하철과 속도 경쟁을 할 수 있는 곳도 있다. 바로 잠실 철교가 그곳이다. 1979년 10월. 지하철 2호선의 일부 구간으로 개통된 잠실철교는 교량 중앙에 철로가 있었고 양옆에는 도로가 놓여 있었다. 약 4미터 정도의 폭을 가진 이 도로는 현재 자전거 도로와 인도로 사용되고 있다.

이 자전거 도로를 따라 전동차와 속도 경쟁(?)을 벌이는 라이더들도 있다. 그만큼 잠실철교는 자전거와 전동차가 나란히 달릴 수 있는 공간인데 그 간격이 가까워 전동차에 탄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관찰될 정도다. 달리 말하면 전동차에 탄 승객들이 라이더가 힘들어하는 모습도 쉽게 관찰된다는 뜻이다. 그러니 전동차를 따라잡겠다고 너무 세게 페달을 밟지는 말자.

한강은 큰 강이고, 이와 비례해 담긴 이야기도 아주 많다. 봄날을 맞이해 한강을 직접 건너보는 건 어떨까? 한강과 한강 다리에 녹아 있는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건너보는 것이다.

 

 



"님아, 이 강을 걸어서 건너보세요! 대신 옷은 따뜻하게 입고요!"

 



 
▲ 잠실철교 전동차와 나란히 걷거나 자전거를 탈 수 있는 잠실철교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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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http://blog.daum.net/artpunk)에도 실렸습니다.



● 한강다리 트레킹 추천 코스

1. 양화대교 - 한강대교 구간: 합정역 ▶ 절두산성지 ▶ 양화대교 ▶ 선유도 ▶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 63빌딩 ▶ 한강철교 ▶ 노들텃밭(한강대교)

2. 이동거리: 약 10km / 소요 시간: 약 3시간(휴식시간 포함)

 

 

 

 

 

 

 

풍경 좋은 산, '머리 잘리는 산'이 되다___ 1편

 

서울에서 가까운 천주교 성지는? 절두산, 삼성산 그리고 마재성지

 

14.08.13 11:29 최종 업데이트 14.08.13 11:29

 

 

 

 

 

 

 

 

 
▲ 절두산 성지 당산역 방면에서 바라본 절두산 성지. 뒤로는 멀리 북한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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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4일부터 266대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4박 5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한다. 호세 마리오 베르고글리오(Jorge Mario Bergoglio)라는 이름을 가진 아르헨티나 출신 교황의 방문은 그 자체만으로도 천주교 신자들에게 큰 축복일 것이다.

비천주교 신자들도 그의 방문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듯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국 <타임>이 선정한 '올해의 인물'로 선정될 정도로 그간 활발한 대외활동을 해왔기 때문이다. 노숙인을 초청하고, 분배의 정의를 역설하는 등 전임 교황들과는 사뭇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나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지만 역사 트레킹을 통해 천주교 성지 답사를 꾸준히 해왔다. 천주교 성지 탐방은 사찰 탐방과는 또 다른 맛(?)이 있다. 지금까지 천주교 성지 답사를 하면서 깨달은 점이 하나 있었다. 생각보다 천주교 신자들이 천주교 성지를 잘 모른다는 점이었다.

이 기사는 서울 인근에 있는 천주교 성지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담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에 맞춰, 우리 땅에서 천주교가 어떤 식으로 뿌리를 내렸고 또한 어떤 수난을 겪어 왔는지 공부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머리가 떨어져 나가는' 산, 절두산

 
▲ 척화비 절두산 성지 한 쪽 편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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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하철 2호선을 타고 당산철교를 지나다 보면 절두산과 선유도를 볼 수 있다. 절두산은 옛날에는 '잠두봉'이라 불렸는데 선유봉(선유도)과 함께 빼어난 경치를 자랑했던 곳이다. 양천 현감이었던 겸재 정선은 <양화환도>를 통해 화폭에 이 풍광을 담아냈다.

뽕나무가 많다고 해 이름이 붙여진 잠두봉은 그 머리가 불쑥 튀어나와 '용두봉'이라고도 불렸다. 중국 사신들이 조선에 왔을 때 꼭 들렀다는 잠두봉이, 겸재 정선이 화폭으로 담아낼 정도로 비경을 자랑하던 잠두봉이 왜 절두산으로 바뀌어 불렸을까. 그것도 머리가 잘린다는 의미인 절두산(切頭山)으로.

1866년.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이뤄진 병인박해 때문에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죽임을 당한다. 이때 주교인 베르뇌를 포함한 아홉 명의 프랑스인들이 처형을 당했는데 그들은 새남터(현재의 용산구 이촌동)와 충남 보령 갈매못 등지에서 형장의 이슬이 됐다.

병인박해가 원인이 돼 병인양요가 발생한다. 자국의 선교사가 처형됐다는 소식에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로즈 프랑스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그런데, 당시 로즈 제독의 침공은 자국의 승인을 받지 않았다. 그런 의미로 병인양요는 국가 대 국가간의 분쟁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프랑스 함대는 본격적인 공세에 앞서 정찰선을 파견하는데 그 정찰선이 한강 깊숙한 곳까지 올라왔다. 양화진을 넘어 서강까지 침범을 하고 돌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대원군은 격분했다. 그러면서 '사악한 서양 세력의 흔적들을 천주교도들의 피로 씻어내겠다'라면서 잠두봉에 새로운 처형지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뽕나무들이 우거졌던 잠두봉은 '머리가 떨어져 나간다'는 뜻을 가진 절두산으로 바뀌어 불리게 됐다. 병인박해는 1866년을 시점으로 1871년까지 계속 이어졌다.

약 150년 전, 절두산은 수천 명의 천주교인들의 목이 잘려나간 비극의 땅이었다. 또한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가 우뚝 서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갔다. 현재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는 절두산 한쪽에 서 있지만 절두산은 그 자체가 천주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성지 중에 성지가 됐다.

 

 

 

 

 

세 프랑스 신부가 운명 달리한 곳, 삼성산 성지


 
▲ 삼성산 성지 왼쪽부터 앵베르도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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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산은 관악산의 지산이다. 삼성산은 원효·의상·윤필 세 분의 성인이 움막을 짓고 수도에 정진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성산에 있는 삼막사(三幕寺)의 유래도 거기에서 나왔다. 그런 삼성산에도 삼성산 성지라는 천주교 성지가 있다. 삼성산 성지는 기해박해(1839년) 때 효수된 세 명의 프랑스 신부들의 무덤이 있던 자리를 성역화한 것이다.


세도 가문이었지만 안동 김씨는 천주교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폈다. 하지만 뒤이어 집권한 풍양 조씨는 천주교 탄압에 앞섰다. 그렇게 해서 발발한 것이 헌종 5년에 있었던 기해박해였다. 이로 인해 권력의 중심은 풍양 조씨로 넘어갔다. 그런 면에서 기해박해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간의 권력투쟁의 부산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기해박해로 인해 앵베르도 주교(한국명 범세형)와 모방·샤스탕 신부 등이 새남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들의 주검은 노고산(마포구 노고산동)을 거쳐 삼성산에 묻혔다. 이후 천주교에서는 이곳을 성역화했고, 지금의 삼성산 성지가 조성됐다.

이 성지는 산 중에 있어서 그런지 조용히 사색하기 좋은 곳이기도 하다. 삼성산 성지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삼성산 숲이라는 소나무 군락지도 있는데 이곳도 사색하거나 시집을 꺼내 읽기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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