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산티아고 순례길을 갔을 때였다. 사리아(sarria)라는 도시에서 순례길을 중단했는데 사리아는 순례길의 종착지인 산티아고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서 동쪽으로 약 1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다. 


당시 필자의 왼쪽 다리 상태는 썩 좋지가 않았다. 햄스트링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트레킹으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이 다리에 이상이 있다니! 그래서 고민 끝에 사리아에서 기차를 타고 산티아고콤포스텔라로 넘어가기로 했다. 이미 그전에 순례길 800km를 완주한 적이 있었기에 과감히 결단을 내린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도보여행가인데 기차 ‘점핑’이라니. 갈등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거기서 더 무리를 했으면 내 왼쪽 다리는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넜을 지도 모른다. 이미 그때도 파스로 범벅을 하고 있었으니까. 돌아가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하루 이틀하고 트레킹을 그만 둘 것도 아니기에 그렇게 한 것이다. 길게 보고 돌아가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돌아가는 길이라고 다 순탄할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적어도 필자의 경험은 그랬다. 기차를 잘못 탔는지 엉뚱한 곳에 도착을 했다. 오우렌세(ourense)라는 도시였다. 이곳은 산티아고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서 남동쪽으로 약 1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다.


순례길에서 이미 체력을 많이 소진한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기차를 잘못 탔고 뜻하지 않은 곳에 발걸음을 하게 된 것이다. 다음 기차까지 배차 시간도 꽤 길어서 역 밖으로 나와야했다.      


‘왜 이렇게 돌아가는 길이 어려운가. 왜 내 여행은 항상 이런 식일까?’     






* 남산성곽길: 단풍이 잘 물든 가을날에 촬영했다.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서 성곽이 잘 보이지 않는다. 대신 뒤에 북한산은 시원스럽게 보인다. 






● 트레킹 코스도 이름을 잘 지어야한다     


이제까지 인왕산, 낙산, 백사실계곡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았다. 백사실계곡이 백악산(북악산)에 있으니 내사산 중 남산만 제외하고 다 언급한 것이다. 그럼 4편은 남산 역사트레킹에 대한 이야기인가? 아니다. 제목처럼 돌아간다. 대신 많이는 안 돌아간다. 이번편은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이다.       


“원래 이 코스의 이름이 <서울 내부트레킹>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으로 강제 개명을 시켰어요.”

“왜요?”

“이름이 서울내부트레킹이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감을 못 잡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감을 잡나요?”

“그건 모르겠는데 최소한 예전보다 장사는 좀 되네요. 사람들이 조금 더 많이 와요.”     


트레킹 코스도 이름을 잘 지어야한다. 해당 명칭에서 사람들의 발걸음을 확 이끌 수 있는 무언가를 전달해주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은 예전 명칭인 <서울 내부트레킹>보다는 훨씬 더 낫다. 적어도 사람들의 발걸음을 확 이끌었으니까.  


그렇다고 서울 내부트레킹이라는 이름이 아예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본 코스는 ‘서울숲 - 남산’을 연결하여 걷기 때문이다. 서울의 내부를 가로질러 가기 때문에 예전에 저런 네이밍을 했던 것이다. 한편 종료지점이 남산의 끄트머리인 장충단공원이라서 돌아간다고 표현한 것이다. 남산을 가기는 하지만 살짝 찍으니까.     




● 매 사냥터였다는 매봉산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의 시작점은 지하철 5,6호선 청구역이다. 청구역에서 첫걸음을 뗀 후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은 금호산이라고도 불리는 매봉산이다. 조선시대 왕들이 매를 풀어 사냥을 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매봉산은 응봉근린공원의 한 축으로 속해 있다. 그 응봉근린공원은 남산과 서울숲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이야 도심지의 확장으로 중간 중간 녹지축이 잘려 나갔지만 예전에는 남산에서부터 응봉산까지 하나의 능선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응봉산은 조선 초기 동빙고(東氷庫)가 있던 산으로 지금은 개나리 축제로 유명한 작은 산이다. 사냥감을 노리는 ‘매’서운 눈빛이 사라진 매봉산이지만 그곳에 올라서면 눈이 크게 떠지게 된다. 시원스럽게 한강을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강을 가깝게 전망할 수 있는 곳은 매봉산 팔각정이다. 이 곳에 올라서면 서울을 흐르고 있는 한강의 동쪽편을 관찰할 수 있다. 


여기서 잠깐 한강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자. 한강은 예전부터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광개토대왕비문에는 '아리수'라고 기재되어 있고, 고려시대에는 '열수'라고 불리기도 했다. 지역적으로 다른 이름을 가지기도 했는데 경기도 여주 지역은 '여강'이라고 불렸고, 임진강과 합수되는 한강 하류 일대는 조강이라고 불렸다.


매봉산 팔각정 앞에 있는 동호대교는 '동호'라는 옛날 그 지역의 명칭을 따서 지었다. 동호는 서울의 동쪽 지역 한강을 일컫는 말이다. 한강이 마치 호수처럼 잔잔하게 보인다고 하여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팔각정에 올라서면 강남 방면으로 꺾여 나가는 한강의 역동적인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인근에 있는 아차산은 물론 멀리 팔당대교 부근까지 조망할 수도 있다. 


연이어 놓여 있는 한강다리들의 이름을 맞춰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동행한 사람들과 한강다리 맞추기 놀이를 해볼 수도 있다. 필자도 동행한 트레킹팀과 함께 한강다리 맞추기 놀이를 했다. 결과는? 비밀!     





* 한강: 매봉산 팔각정에서 서울의 동쪽 지역을 바라본 모습.






● 버티고개에 앉아 있는 놈이 되지 말자     


“밤중에 버티고개에 가서 앉을 놈이다.”   

  

이런 속담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 저 속담은 사람들한테 사기나 치고, 민폐나 끼치는 못된 놈들을 욕할 때 쓰는 말이다. 버티고개는 약수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버터고개, 번터고개라고도 불린 이 고개는 길이 좁은데다 도둑들까지 들끓는 터에 악명이 높았다. 그 도둑들을 옛날 순라꾼들이 ‘번도’라고 외치며 추격을 했는데, 그 말이 변하여 ‘번티’라 불렸다가 다시 ‘버티’로 바뀌었다고 한다. 


예전 한 밤 중에 버티고개에 앉아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겠는가? 아마도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니 남들에게 민폐나 끼쳐서 ‘밤중에 버티고개에 앉을 놈’과 같은 욕을 먹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물론 지금의 버티고개는 걷기에 좋은 길이 됐다. 안전한 생태다리가 설치되어 있는데 그 길을 따라 남산의 동쪽 방면을 보며 걸을 수 있다. 그렇게 버티고개를 넘으면 동남쪽 서울성곽길과 만나게 된다. 이 구간의 성곽길은 신라호텔 후면을 돌아간다. 이 구간은 신라호텔의 사유지였던 곳이 개방된 터라 비교적 성곽의 흔적이 잘 보존되어 있다.      






* 매봉산 팔각정






● 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장충단 공원     


가수 배호의 노래 ‘안개 낀 장충단 공원’으로 유명한 장충단(奬忠壇)은 원래 제례를 드리는 공간이었다. 이곳은 어영청의 분소인 남소영(南小營)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남소영은 도성의 남부지역을 방비하는 군영이었다. 


이 자리에 장충단이 들어서게 된 건 1900년 9월경이었다. 고종은 을미사변(1895년)으로 살해된 명성왕후와 신하들의 넋을 추모하고자 장충단을 세웠다. 처음에는 시위대장 홍계훈을 비롯한 장병들만 제사를 지냈으나 이후에는 이경직 같은 궁내부 대신들도 배향되었다. 더불어 임오군란, 갑신정변 당시에 순직한 문신들도 배향되면서 많은 문무관들이 장충단제향신위(奬忠壇祭享神位)에 봉안됐다.  


공원 중심부에 서 있는 장충단(奬忠壇) 비석의 앞면은 순종이 직접 쓴 글씨를 세긴 것이다. 순종은 명성왕후의 둘째 아들이었으니 글자를 써내려가면서 울분을 토했을 것이다. 


장충단은 1910년, 일제에 의해 폐사된다. 1920년대 일제는 장충단을 공원화하면서 그곳의 정신을 앗아가게 된다. 마치 ‘종묘사직’ 할 때의 ‘사직단’이, 1922년 사직단 공원이 된 것과 같이 격하된 것이다. 


을미사변 희생자들의 넋들이 빠져(?)나간 장충단에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추모시설들이 그 자리를 채워나갔다.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을 당해 죽었을 때인 1909년에 일본은 장충단에서 추도대회를 열었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도하기 위해 박문사(博文寺)가 세워졌고, 상해사변(1932년) 때 폭탄을 안고 적진(?)을 향해 갔던 육탄삼용사를 기리는 동상도 세워졌다. 


육탄삼용사는 가미카제의 원형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중국군의 철조망을 제거하기 위해 그들은 폭탄에 불을 댕겼는데 생각한 것보다 심지가 빨리 탔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됐을까? 그냥 폭사했다. 그런 3인을 위해 일제는 동상을 세웠던 것이다. 그런 일제가 만든 시설들은 광복 후에 다 철거가 됐다.      





* 수표교





● 정치집회 장소로 쓰였던 장충단공원     


광복 이후 장충단 공원은 정치집회 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수많은 정치집회 연설 중 두드러진 연설이 하나 있었다. 1971년 4월 18일,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의 선거 유세가 바로 그것이다. 그해 4월 27일에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선거 와중에 행해진 김대중의 연설은 무척 파격적이었다.   

   

“이번에 우리가 집권하지 못하면 박정희씨의 영구집권 총통시대가 온다”     


그의 연설처럼 1972년에 유신헌법이 제정됐고,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꿈꾸게 된다. 1979년 10월 26일에 한 발의 ‘총탄’이 있기 전까지 박정희는 실질적으로 총통이었다. 3권 분립은 그저 교과서에서만 존재했다. 


이외에도 김대중은 향토예비군 폐지, 남북간 비정치적 영역 교류 실시, 지방자치제 도입 등을 언급했다. 지금이야 새로울 것이 없지만 당시의 시각으로는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들이었다. 장충단 공원에 모인 100만 가까운 인파들 앞에서 저런 ‘센세이셔널’한 내용들이 확성기를 타고 퍼져나갔으니 당시 집권세력은 얼마나 긴장을 했겠는가?      



● 청계천 복원의 핵심수표교 


장충단공원에는 수표교(水標橋)도 있다. 청계천에 세워져 있던 수표교는 1958년, 청계천이 복개가 될 때 철거되어 홍제동으로 이전했다가 1965년부터 장충단공원 입구에 자리 잡게 됐다. 수표교는 세종 2년(1420)에 처음 세워졌는데 그때 이름은 마전교(馬廛橋)였다. 마전교가 수표교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변경되게 된 건 세종 23년(1441)의 일이다. 그해 강수량을 측정하기 위해 다리 아래에 양수표(量水標) 세우게 됐는데 그것을 계기로 수표교(水標橋)로 개칭이 된 것이다.  


수표교의 매력은 다리 난간에 있다. 난간이 있는 다리는 궁궐에서나 쓰였다. 조선시대 민간의 다리는 징검다리나 섶다리 수준이었다. 그래서 수해가 나면 다리가 흔적조차 없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수표교는 튼튼한 돌다리인데다 고급스러운 난간까지 더해졌다. 백성들이 이용하는 다리들 중에 수표교처럼 궁궐의 양식으로 격조 높게 축조된 다리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편 수표교의 돌기둥에는 경진지평(庚辰地坪)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영조 36년(1760), 그해에 있은 대대적인 청계천 준설 과정에서 새겨진 것이다. 이렇듯 수표교는 역사적으로 건축학적으로 무척 중요한 다리다. 하지만 청계천 복원이 된 지금도 원래 위치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현재의 청계천 자리에는 ‘짝퉁 수표교’가 세워져 있다. 


한강도 보고, 버티고개도 넘고, 장충단도 탐방하는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 그렇게 서울 내부를 가로질러 가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곳들을 탐방하게 된다. 생각지도 못한 울창한 숲길에 매료되게 된다. 



* 한강정망대 역사트레킹: 한양도성 남산구간






● 가야할 길이라면 우리는 가야한다     


서두에 언급한 오우렌세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보자. 돌아가는 길이 순탄하지 않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길을 헤매는 것도 여행의 일부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도 여행의 일부니까. 


그런데 뜻밖의 장면을 목격하게 됐다. 로마시대에 건설된 다리를 만나게 된 것이다.  ponte roman de ourense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는 로마시대의 다리인데 현재도 현역으로 쓰이고 있다. 또 한 가지가 있다. 도시자체가 무척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 로마다리 밑으로는 미뉴강이라는 강이 흐르고 있는데 수변과 어우러진 도심지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직진을 하든 돌아서 가든 가야할 길이라면 우리는 가야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숙명이다. 그렇게 묵묵히 걷다보면 위와 같은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을 많이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에피소드를 이렇게 부른다.     


- 전화위복     





■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     


1. 코스: 금호산 ▶ 매봉산팔각정 ▶ 버티고개 ▶ 한양도성  ▶ 장충단공원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하

5. In: 지하철5,6호선 청구역 / Out: 장충단공원(지하철3호선 동대역)    





*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역사트레킹








 * 한강: 매봉산 팔각정에서 바라본 한강.

 





 

* 버티고개: 버티고개에서 한 컷. 수강생분들이 즐거워하고 있다.  








10월 8일 토요일, 한겨레 문화센터 역사트레킹 강의가 있는 날.


그 전날 전화 한 통이 걸려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한겨레 문화센터입니다. 내일 비 예보가 있는데요.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 예보 저도 봤습니다. 그런데 우리 출발할 때는 비가 그친다고 나오네요."


"그래도 비가 계속 올 지 모르니까..."


'그렇죠. 비가 계속 이어서 올 지 모르죠. 요즘 하도 일기예보가 안 맞으니까..."


"음...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혹시 이번 트레킹은 취소하시는 게 어떠신가요?"


"아니요. 일정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때 그때 일정을 소화해야지 차후로 미루면 엉켜버립니다."



저는 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확실히 의사표시를 한 것이죠. 한 번 일정이 틀어지면 계속 꼬이게 되잖아요. 그런 걸 방지하기 위해서 단호하게 나갔던 것입니다. 제 뜻을 알겠다는 듯 담당자 분도 수긍을 해주시더군요. 감사하더군요.


8일에 행해진 서울내부트레킹은 그렇게 비 때문에 취소될 뻔했답니다. 사실 당일날 새벽까지 비가 오긴 왔었습니다. 하지만 아침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날씨가 개었더군요. 전화위복이라고 그렇게 비가 그친 뒤에 행한 트레킹이라 상쾌함이 배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서울내부트레킹을 시작하기 전에는 좀 고민을 했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길을 안 좋아하면 어쩌냐... 여기 산들은 다 동네 뒷산급인데..."


하지만 수강생분들의 만족도는 상당했습니다. 괜한 걱정을 한 것이죠. 수강생분들은 서울의 구석구석을 알 수 있게 되어, 즐거웠다고 이구동성으로 말씀해주시더군요. 매봉산 팔각정, 버티고개, 수표교, 광희문 등등... 수강생분들은 그런 곳들을 탐방하며 즐거워하셨습니다.


걱정을 많이 한 만큼 준비를 많이 한 탓도 있을 겁니다.


역시 강의 준비는 철저히! 다음 트레킹을 또 기약하며!


 








​ * 성곽길: 남산의 동쪽에 위치한 성곽길.


 


* 광희문














* 수표교: 장충단 공원 안에 있는 수표교 앞에 선 참가자들.










"소나기라도 안 내리나? 이런 날씨에 무슨 트레킹이야! 더워 죽겠구만!"



2016년 8월 16일.



찌는 듯한 폭염이 더욱더 기승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광복절 전후로 폭염이 꺾인다는 기상청의 발표는 그저 무색할 따름이었죠. 정말 망설였습니다. 이렇게 더운 날에 무슨 트레킹입니까!


그래도 약속은 약속입니다. 아무리 덥다고 해도 일정을 변경을 할 수는 없겠죠. 중간에 에어컨이 빵빵한 커피숍으로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발걸음을 떼야했습니다. 그래도 너무 덥더라고요. 오죽했으면 제가 소나기가 내렸으면 하는 기원까지 드렸겠습니까!


앞선 포스팅에서도 언급했듯이 저는 렛츠런 문화공감센터에서 역사트레킹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난 16일은 서울내부 역사트레킹이 행해진 날이었습니다. 폭염에 대한 염려의 마음을 한가득 안고 집합장소인 청구역에 도착했습니다.


렛츠런에서 행하는 트레킹은 모임 인원이 20명인데 이날은 9명이 오셨더군요. 아무래도 날씨 때문에 참가율이 저조했던 것 같습니다.


두둥~ 드디어 첫걸음을 옮겼습니다. 태양은 뜨겁게 내려째고 있었고, 지열은 이글이글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서울내부 역사트레킹 코스는 응봉이라고 불리는 산등성이를 타고 갑니다. 산등성이라고 하지만 해발이 낮아서 누구나 다 오를 수 있는 코스죠. 그래도 산을 오르려면 오르막 길을 올라야 하잖아요. 그런 오르막이 초반에 있답니다. 그 초반 오르막을 지나면 숲길을 지나는 터라 걷기는 편하죠. 참가자 분들이 도보여행에 익숙한 분들이 많아서 그랬는지 초반 오르막 길을 무사히 잘 오르시더군요.







*버티고개: 버티고개 쉼터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참가자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날 트레킹도 모든 분들이 완주를 해주셨답니다. 땀을 뻘뻘 흘리기는 했지만... 그래서 옷이 완전 젖었지만... 아참 출발하기 전에 제가 참가자 분들에게 손수건을 나눠 드렸습니다. 일명 '역사트레킹 손수건'이었는데 나름대로 디자인이 예쁘다고 하시더군요. 그 손수건으로 땀도 닦으시고 그러더군요. 하여간 잘 나눠드린 것 같습니다.


저도 다른 모임 때보다 아주 천천히 리딩을 했답니다. 사실 저도 무척 힘들었으니까요. 사실 전날 잠을 제대로 못 잤거든요.


하여간 쉽지 않은 트레킹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고생을 했더니 기억에 많이 남는 모임이 되었답니다. 보람도 컸습니다.


그래도 9월 달 트레킹은 좀 날씨가 좋았으면 좋겠습니다!!! 


 





* 서울성곽: 서울성곽 구간에 선 참가자들.













 






투표 후에 떠나는 봄꽃트레킹

한강, 서울성곽, 수표교까지! 아기자기한 서울내부트레킹

 

  

봄날이 왔습니다. 봄바람이 부니 하얀색 벚꽃들이 잎을 흩날리고, 노란색 개나리들이 춤을 춥니다. 20대 총선도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트레킹의 계절이 다가온 만큼 정치의 계절도 다가온 것이죠.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불립니다. 413일에는 투표함에 민주주의의 꽃 한 송이를 넣으시고, 가까운 곳으로 봄꽃트레킹을 떠나보는 게 어떨까요? 이번에 소개할 코스는 서울 남산 부근에서 행해지는 일명 서울내부트레킹코스입니다. 남산 부근에 사시는 분들이라면 투표를 하시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트레킹을 즐기셔도 좋을 듯합니다.


사실 이 서울내부트레킹은 동네 뒷산을 타고 갑니다. 시작점이 매봉산(금호산)이라는 곳인데 이 산은 전형적인 동네 뒷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코스 중간에 있는 남산도 그 동네 사람들에게는 동네 뒷산이라고 할 수 있죠.


그렇게 동네 뒷산을 타고 가지만 서울내부트레킹도 역사적 스토리텔링을 풍부하게 품고 있답니다.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한강을 조망할 수도 있고, 서울성곽길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 걸음을 더하면 수표교와 광희문, 그리고 동대문으로 익숙한 흥인지문도 탐방할 수 있답니다.

    


 

 


* 한강: 매봉산 팔각정에서 바라 본 한강. 사진 오른쪽에 있는 다리는 동호대교임.





 

매 사냥터였다는 매봉산

 

트레킹은 금호산이라고도 불리는 매봉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조선시대 왕들이 매를 풀어 사냥을 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얻게 된 것이죠.


현재 매봉산은 응봉근린공원의 한 축으로 속해 있습니다. 그 응봉근린공원은 남산과 서울숲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죠. 지금이야 도심지의 확장으로 중간중간 녹지축이 잘려 나갔지만 예전에는 남산에서부터 응봉산까지 하나의 능선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응봉산은 조선 초기 동빙고(東氷庫)가 있던 산으로 지금은 개나리 축제로 유명한 곳이죠.


지금의 매봉산은 의 눈빛이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매를 볼 수 없는 매봉산이지만 트레킹팀은 다른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강을 시원스럽게 조망했던 것입니다. 매봉산 팔각정에 올라서면, 압구정동 방면으로 꺾여 나가는 역동적인 한강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답니다.


또한 날씨가 좋은 날에는 인근에 있는 아차산은 물론 멀리 팔당대교 까지 한강을 굽어볼 수 있습니다. 연이어 놓여 있는 한강다리들의 이름을 맞춰보는 것도 매봉산 탐방의 재미입니다. 지인과 동행을 했다면 한강다리 맞추기 내기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죠.

 






* 버티고개: 버티고개를 걷고 있는 트레킹팀.

 





버티고개에 앉아 있는 놈이 되지 말자!

 

밤중에 버티고개에 가서 앉을 놈이다.”

 

이런 속담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전에 별에서 온 그대라는 드라마에서 김수현이 저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 드라마를 보지 못해서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겠네요.


저 속담은 사람들한테 사기나 치고, 민폐나 끼치는 못된 놈들을 욕할 때 쓰는 말입니다. 버티고개는 약수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합니다. 버터고개, 번터고개라고도 불린 이 고개는 길이 좁은데다 도둑들까지 들끓는 터에 악명이 높았습니다.


그 도둑들을 옛날 순라꾼들이 번도라고 외치며 추격을 했는데, 그 말이 변하여 번티라 불렸다가 다시 버티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한 밤 중에 버티고개에 앉아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마도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겁니다. 그러니 남들에게 민폐나 끼쳐서 밤중에 버티고개에 앉을 놈과 같은 욕을 먹지 말아야겠지요.


물론 지금의 버티고개는 걷기에 좋은 길이 됐습니다. 안전한 보행교가 설치되어 있는데 그 길을 따라 남산의 동쪽 방면을 보며 걸을 수 있답니다. 그렇게 버티고개를 넘으면 동남쪽 서울성곽길과 만나게 됩니다. 이 구간의 성곽길은 신라호텔 후면을 돌아갑니다. 이 구간은 신라호텔의 사유지였던 곳이 개방된 터라 비교적 성곽의 흔적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 서울성곽: 이 곳을 지나면 장충단공원이 나온다.





 

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장충단공원

 

가수 배호의 노래 안개 낀 장충단공원으로 유명한 장충단(奬忠壇)은 원래 제례를 드리는 공간이었습니다. 이곳은 어영청의 분소인 남소영(南小營)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남소영은 도성의 남부지역을 방비하는 군영이었습니다.


이 자리에 장충단이 들어서게 된 건 19009월경이었습니다. 고종은 을미사변(1895)으로 살해된 명성왕후와 신하들의 넋을 추모하고자 장충단을 세웠습니다. 처음에는 시위대장 홍계훈을 비롯한 장병들만 제사를 지냈으나 이후에는 이경직 같은 궁내부 대신들도 배향되었지요. 더불어 임오군란, 갑신정변 당시에 순직한 문신들도 배향되면서 많은 문무관들이 장충단제향신위(奬忠壇祭享神位)에 봉안됐습니다

 

공원 중심부에 서 있는 장충단(奬忠壇) 비석의 앞면은 순종이 직접 쓴 글씨를 세긴 것입니다. 순종은 명성왕후의 둘째 아들이었으니 글자를 써내려가면서 울분을 토했을 겁니다.


장충단은 1910, 일제에 의해 폐사됩니다. 1920년대 일제는 장충단을 공원화하면서 그곳의 정신을 앗아가게 됩니다. 마치 종묘사직할 때의 사직단, 1922년 사직단 공원이 된 것과 같이 격하된 것이죠.


을미사변 희생자들의 넋들이 빠져나간(?) 장충단에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추모시설들이 그 자리를 채워나갔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을 당해 죽었을 때인 1909년에 일본은 장충단에서 추도대회를 열었습니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도하기 위해 박문사(博文寺)가 세워졌고, 상해사변(1932) 때 폭탄을 안고 적진(?)을 향해 갔던 육탄삼용사를 기리는 동상도 세워졌습니다.


육탄삼용사는 가미카제의 원형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피식웃음이 나옵니다. 중국군의 철조망을 제거하기 위해 그들은 폭탄에 불을 댕겼는데 생각한 것보다 심지가 빨리 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냥 폭사했습니다. 그런 3인을 위해 일제는 동상을 세웠던 것이죠. 그런 일제가 만든 시설들은 광복 후에 다 철거가 됐습니다.

 





 * 수표교: 장충단공원에 있다.

    



 

유명한 정치집회 장소였던 장충단공원

 

광복 이후 장충단공원은 정치집회 장소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정치집회 연설 중 두드러진 연설이 하나 있었습니다. 1971418,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의 선거 유세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해 427일에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당시의 김대중의 연설은 무척 파격적이었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집권하지 못하면 박정희씨의 영구집권 총통시대가 온다

 

그의 연설처럼 1972년에 유신헌법이 제정됐고,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꿈꾸게 됩니다. 19791026일에 있은 시크릿 파티에서 한 잔의 술에 섞인 한 발의 총탄이 있기 전까지 박정희는 실질적으로 총통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3권 분립은 그저 교과서에서만 존재했었지요.


이외에도 김대중은 향토예비군 폐지, 남북간 비정치적 영역 교류 실시, 지방자치제 도입 등을 언급했습니다. 지금이야 새로울 것이 없지만 당시의 시각으로는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들이라고 할 수 있겠죠.


당시 김대중의 연설을 듣기 위해 몰려든 인파는 약 100만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인파였죠.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요즘은 그렇게 대규모 선거유세를 하지 않는 분위기지요. SNS를 이용한 선거홍보가 활발히 진행되니 굳이 대규모 정치연설을 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대규모 연설회를 하든 SNS를 활발히 운영하든 중요한 건 돈 안 들리고, 정정당당하게 선거에 임하는 모습일 겁니다. 깨끗한 선거운동, 착실한 의정활동, 국민 편에 선 정치 등등... 이런 후보자들을 찾아내서 국회로 보내야 하는 게 유권자의 임무입니다.

 

그 놈이 그 놈이다

 

이 말이 맹위를 떨치면 떨칠수록 우리 정치는 발전하지 못하게 됩니다. 진짜 그 놈이 그 놈인지, ‘그 놈이 그 놈이 아닌지를 꼼꼼히 따져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유권자의 임무 아닐까요?

 

   





*  서울성곽: 성곽 주변에 핀 개나리. 







 

청계천 복원의 핵심, 수표교


장충단공원에는 수표교(水標橋)도 있습니다. 청계천에 세워져 있던 수표교는 1958, 청계천이 복개가 될 때 철거되어 홍제동으로 이전했다가 1965년부터 장충단공원 입구에 자리 잡게 됐습니다.


수표교는 세종 2(1420)에 처음 세워졌는데 그때 이름은 마전교(馬廛橋)였습니다. 마전교가 수표교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변경되게 된 건 세종 23(1441)의 일입니다. 그해 강수량을 측정하기 위해 다리 아래에 양수표(量水標) 세우게 됐는데 그것을 계기로 수표교(水標橋)로 개칭이 된 것입니다

 

수표교의 매력은 다리 난간에 있습니다. 난간이 있는 다리는 궁궐에서나 쓰였지요. 조선시대 민간의 다리는 징검다리나 섶다리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수해가 나면 다리가 흔적조차 없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수표교는 튼튼한 돌다리인데다 고급스러운 난간까지 더해졌지요. 백성들이 이용하는 다리들 중에 수표교처럼 궁궐의 양식으로 격조 높게 축조된 다리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한편 수표교의 돌기둥에는 경진지평(庚辰地坪)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영조 36(1760), 그해에 있은 대대적인 청계천 준설 과정에서 새겨진 것입니다. 이렇듯 수표교는 역사적으로 건축학적으로 무척 중요한 다리입니다.


하지만 수표교는 청계천이 복원된 지금까지도 원래 위치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청계천 자리에는 짝퉁 수표교가 세워져 있습니다.






*광희문: 4소문 중에 하나인 광희문.



    


 

아기자기한 역사트레킹 코스

 

 

광희문과 흥인지문(동대문) 탐방을 끝으로 서울 내부트레킹은 종료가 됩니다. 광희문은 4소문 중에 하나고, 흥인지문은 4대문 중에 하나입니다.


한강 보고, 서울성곽길 걷고, 장충단도 탐방하고, 대문과 소문을 관찰할 수 있는 서울 내부트레킹! 동네 뒷산에서 시작되지만 이 정도면 아기자기한 역사트레킹 코스라고 할 수 있겠죠. 봄날, 매봉산과 남산 부근에는 벚꽃과 개나리들이 활짝 피어납니다. 413일이면 만개를 했겠네요. 투표 끝난 후에 봄꽃트레킹 어떠세요? 투표함에 민주주의의 꽃 한 송이를 넣으시고, 가까운 곳으로 봄꽃트레킹을 떠나보는 거죠!

 

 

 

 

서울내부트레킹

 

1. 코스: 매봉산 팔각정 버티고개 성곽길 장충단공원(수표교) 광희문 흥인지문(동대문)

2. 이동거리: 8km

3. 예상시간: 3시간 30(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5. 교통편: IN - 청구역(5호선) / OUT - 동대문역

 

 






 

'짝퉁' 수표교, 사라지면 좋겠다

 

 

진짜 수표교와 가짜 수표교

 

15.06.28 14:32   최종 업데이트 15.06.28 14:32

 

 

 

 

 

 

 

 

 
▲ 수표교 장충단공원에 있는 수표교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비슷한 것은 가짜다'


고전 연구자로 유명한 한양대 정민 교수의 책 제목이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2000)는 연암 박지원의 실학사상과 산문을 소개하고, 풀어쓴 책이다.

서평을 쓰자고 이 글을 쓰는 건 아니다. 수표교(水標橋)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이다. 그럼 왜 여행기사의 첫 문장에 책 제목을 끌어다 쓴 것인가? 수표교에 비슷하게 생긴 '가짜'가 있는가?

 

 


조선 개국과 함께 정비된 청계천

지금은 장충단 공원 한 쪽에 위치해 있지만 수표교는 원래 청계천에 있던 다리였다. 청계천이 복개가 된 후 홍제동에 머물렀다 1965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50년 동안 현재의 자리에 터를 잡은 것이다.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천도를 했을 때, 조정에서는 매년마다 반복되는 물난리로 골머리를 앓게 된다. 당시 한양의 하수시설이 빈약했기 때문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백악산(북악산), 인왕산, 남산 등등... 도성을 감싸고 있는 내사산의 물길을 한 곳으로 모아 흐르게 하기로 했다. 그 사업이 바로 개천(開川) 개설 사업이었다. 개천은 청계천의 옛 이름이다.

태종 11년(1411)부터 세종 16년(1434)까지 대대적으로 벌어진 치수 사업으로 인해 청계천은 흔하디흔한 자연형 하천에서 명실 공히 도성의 으뜸하천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때 물길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게 됐는데 한양이 서고동저형 지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 수표교 봄 꽃이 화사하게 핀 수표교.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청계천 역사의 산증인 수표교

하천이 개설됐으니 다리들도 세워졌다. 청계천에는 24개의 다리가 들어섰는데 수표교도 그 중 하나였다. 수표교는 세종 2년(1420)에 세워졌는데 처음 이름은 마전교(馬廛橋)였다. 다리 인근에 소와 말을 매매하던 시전이 있었다하여 그런 이름이 붙여졌던 것이다. 그러다 20년이 지난 후에 비로소 수표교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1441년, 강수량 측정을 할 수 있는 수표(水標)를 마전교 서쪽에 세우게 됐는데 그 이후부터는 다리 이름도 수표교로 불리게 된 것이다. 

처음 물길이 잡히고, 300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청계천은 다시 바닥이 높아지게 된다. 상류에서 쏟아져 나온 토사가 계속 쌓이다보니 하천의 바닥과 둑의 높이가 비슷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영조 36(1760)년, 청계천은 다시 대대적인 준설이 이루어진다. 수표교 부근에 준천사(濬川司)라는 기관을 세우고 작업을 실시하게 되는데 57일 동안 무려 20만 명의 인원이 동원된 대대적인 준설을 하게 된다. 이때 수표교의 교각에는 경신지평(庚辰地坪)이라는 각자가 새겨졌다.

 


 

 
▲ 경신지평 조선 영조 때 새겨진 글씨.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청계천으로 돌아가지 못한 수표교 

시전 상인들이 건너고, 소와 말들도 건넜을 수표교에는 왕실 양식이 적용되어 있다. 다리 양 옆에 난간이 설치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일반 백성들의 발걸음이 대다수였을 청계천의 다리에 왕실에서 쓰는 기법이었던 난간을 설치한 경우는 무척 이례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민간에서는 징검다리나 외나무다리 같이 격식은커녕 안정성도 담보되지 않은 다리들을 주로 이용했었다.

수표교는 튼튼한 돌다리에다 양 옆으로는 고급스러운 난간까지 설치되어 있다. 수량을 측정하기 위해 수표까지 세워졌다. 또한 청계천 준설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렇듯 수표교는 청계천 다리 중 가장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청계천 역사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수표교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청계천이 아닌 장충단공원에 자리 잡고 있다. 청계천 복원공사가 종료(2005년)된 지 한참이 흘렀지만 아직까지도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물을 흘려보내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원래 수표교 자리에는 무엇이 들어섰는가? '짝퉁'이 들어서 있다. 품격 있는 '오리지널' 수표교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갈색페인트로 덧칠된 격 떨어지는 '짝퉁'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오리지널'의 고급스러운 석재 난간은 나무로 대체되었는데 얼핏 보면 등산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데크처럼 보인다. 진짜 수표교를 보다가 가짜 수표교를 보면 탄식의 한숨이 터져 나올 것이다.

 


 

 
▲ 난간 진짜 수표교의 난간. 왕실에서 쓰이는 난간 양식이 민간 다리에 적용됐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 난간 가짜 수표교에서 바라본 청계천. 난간을 나무로 만들었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쉽지 않은 수표교 복원 사업

어떤 역사학자는 청계천 복원의 정점은 수표교를 원래 위치로 되돌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말을 빗대보면 아직 청계천의 복원은 끝나지 않은 셈이다. 필자도 그 말에 일정부분 동의한다. 수표교가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곳은 장충단공원이 아닌 바로 청계천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서울시는 청계천시민위원회를 꾸려 수표교 복원과 관련된 사업을 추진 중에 있다. 서울시에 따르면 2020년까지 수표교는 원래 자리인 청계2가 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이전 비용이 무려 800억에 달하기 때문이다. 또한 노후화가 심해서 자칫하면 훼손된 상태로 복원이 될 수도 있다는 어려움도 안고 있다. 한편 원위치인 청계2가로 옮긴다고 해도 그 주변의 경관들이 '오리지널' 수표교의 모습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맹점도 도사리고 있다. 실제로 청계2가 주변은 상가들이 정돈되지 않은 모습으로 영업을 하고 있다.

이런 문제점들 때문에 '오리지널'에 준하는 복제교를 세우자는 의견도 있다. 진짜 수표교는 그대로 장충단공원에 놔두고, 정교하게 복제된 다리를 만들어 청계2가에 세우자는 의견이다.

'오리지널'이 복원되든 복제본이 세워지든 갈색으로 덧칠된 현재의 '짝퉁' 수표교는 좀 사라졌으면 좋겠다. 진짜를 보다가 격 떨어지는 가짜를 보면 다리에 힘이 풀린다. 비슷하지도 않은 가짜를 보니 그저 답답함이 밀려올 뿐이다. 비슷하지도 않은 짝퉁을 좀... 어떻게 좀... 해주셨으면 좋겠다.  

 

 

 
▲ 가짜 수표교 청계 2가에 위치해 있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 진짜 수표교와 가짜 수표교를 비교해 보고자 하면:

장충단공원(3호선 동대입구역) ▶ 동대문(오간수교) ▶ 청계천 ▶ 청계2가


- 이동거리: 약 3.5km / 이동시간: 약 50분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아기자기한 재미, 서울내부트레킹!

 

한강, 서울성곽, 수표교까지... 아기자기한 도보여행

 

15.06.03 14:14   최종 업데이트 15.06.03 14:15

 

 

 

 

 

 

 
▲ 수표교 장충단공원 입구에 위치해 있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휴일날 행하는 아웃도어 활동이라면 적어도 북한산 정도는 올라가야 폼이 좀 날지 모른다. 그 귀중한 시간에 동네 뒷산에나 오른다면 휴일에 대한 예의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필자는 동네 뒷산도 훌륭한 트레킹 코스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동네 뒷산의 쓰임새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 소개할 역사트레킹 코스는 금호산이라는 전형적인 동네 뒷산을 시작점으로 삼고 있다.

이곳은 북한산에 비하면 작은 동네 산일 뿐이다. 하지만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한강을 조망할 수도 있고, 서울성곽길을 만날 수도 있다. 거기에 걸음을 더하면 수표교와 광희문, 그리고 동대문으로 익숙한 흥인지문도 탐방할 수 있다.

 

 

매 사냥터였다는 매봉산

이렇게 아기자기한 길에 이름이 없다면 섭섭할지 모른다. 그래서 필자는 이름을 지어보았다. 서울 내부트레킹! 남산을 중심으로 인근 지역을 탐방한다는 의미로 지어본 이름이다.

서울 내부트레킹의 시작점은 지하철 5호선 청구역이다. 청구역에서 첫걸음을 뗀 후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은 금호산이라고도 불리는 매봉산이다. 조선시대 왕들이 매를 풀어 사냥을 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매봉산은 응봉근린공원의 한 축으로 속해 있다. 그 응봉근린공원은 남산과 서울숲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이야 도심지의 확장으로 중간중간 녹지축이 잘려 나갔지만 예전에는 남산에서부터 응봉산까지 하나의 능선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응봉산은 조선 초기 동빙고(東氷庫)가 있던 산으로 지금은 개나리 축제로 유명한 작은 산이다. 사냥감을 노리는 '매'서운 눈빛이 사라진 매봉산이지만 그곳에 올라서면 눈이 크게 떠지게 된다. 시원스럽게 한강을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호대교 아래로 압구정동 방면으로 꺾여 나가는 한강의 모습이 역동적으로 보인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인근에 있는 아차산은 물론 멀리 팔당대교 부근까지 조망할 수 있다.

연이어 놓여 있는 한강다리들의 이름을 맞혀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필자도 동행한 트레킹팀과 함께 한강다리 이름 맞히기 놀이를 했다. 결과는? 당연히 필자가 1등을 했다. 참가자들 중에 지방출신이 많았기 때문이다.

 

 

 


 
▲ 버티고개 버티고개를 걷고 있는 트레킹팀.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버티고개에 앉아 있는 놈'이 되지 말자

 


"밤중에 버티고개에 가서 앉을 놈이다."

이런 속담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 저 속담은 사람들한테 사기나 치고, 민폐나 끼치는 못된 놈들을 욕할 때 쓰는 말이다. 버티고개는 약수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버터고개, 번터고개라고도 불린 이 고개는 길이 좁은 데다 도둑들까지 들끓는 터에 악명이 높았다. 그 도둑들을 옛날 순라꾼들이 '번도'라고 외치며 추격을 했는데, 그 말이 변하여 '번티'라 불렸다가 다시 '버티'로 바뀌었다고 한다.

예전 한밤중에 버티고개에 앉아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겠는가? 아마도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니 남들에게 민폐나 끼쳐서 '밤중에 버티고개에 앉을 놈'과 같은 욕을 먹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물론 지금의 버티고개는 걷기에 좋은 길이 됐다. 안전한 보행교가 설치되어 있는데 그 길을 따라 남산의 동쪽 방면을 보며 걸을 수 있다. 그렇게 버티고개를 넘으면 동남쪽 서울성곽길과 만나게 된다. 이 구간의 성곽길은 신라호텔 후면을 돌아간다. 이 구간은 신라호텔의 사유지였던 곳이 개방된 터라 비교적 성곽의 흔적이 잘 보존되어 있다.

 
▲ 서울성곽길 서울성곽길. 이 길을 따라가면 신라호텔과 장충단공원을 만날 수 있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장충단 공원

 


가수 배호의 노래 '안개 낀 장충단 공원'으로 유명한 장충단(奬忠壇)은 원래 제례를 드리는 공간이었다. 이곳은 어영청의 분소인 남소영(南小營)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남소영은 도성의 남부지역을 방비하는 군영이었다.

이 자리에 장충단이 들어서게 된 건 1900년 9월경이었다. 고종은 을미사변(1895년)으로 살해된 명성왕후와 신하들의 넋을 추모하고자 장충단을 세웠다. 처음에는 시위대장 홍계훈을 비롯한 장병들만 제사를 지냈으나 이후에는 이경직 같은 궁내부 대신들도 배향되었다. 더불어 임오군란, 갑신정변 당시에 순직한 문신들도 배향되면서 많은 문무관들이 장충단제향신위(奬忠壇祭享神位)에 봉안됐다. 

공원 중심부에 서 있는 장충단(奬忠壇) 비석의 앞면은 순종이 직접 쓴 글씨를 새긴 것이다. 순종은 명성왕후의 둘째 아들이었으니 글자를 써내려가면서 울분을 토했을 것이다.

장충단은 1910년, 일제에 의해 폐사된다. 1920년대 일제는 장충단을 공원화하면서 그곳의 정신을 앗아가게 된다. 마치 '종묘사직' 할 때의 '사직단'이, 1922년 사직단 공원이 된 것과 같이 격하된 것이다.

 

 



 
▲ 장충단 비석 앞면은 순종, 뒷면은 민영환의 글이 새겨졌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을미사변 희생자들의 넋들이 빠져(?)나간 장충단에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추모시설들이 그 자리를 채워나갔다.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을 당해 죽었을 때인 1909년에 일본은 장충단에서 추도대회를 열었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도하기 위해 박문사(博文寺)가 세워졌고, 상해사변(1932년) 때 폭탄을 안고 적진(?)을 향해 갔던 육탄삼용사를 기리는 동상도 세워졌다.


육탄삼용사는 가미카제의 원형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중국군의 철조망을 제거하기 위해 그들은 폭탄에 불을 댕겼는데 생각한 것보다 심지가 빨리 탔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됐을까? 그냥 폭사했다. 그런 3인을 위해 일제는 동상을 세웠던 것이다. 그런 일제가 만든 시설들은 광복 후에 다 철거가 됐다.

광복 이후 장충단 공원은 정치집회 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수많은 정치집회 연설 중 두드러진 연설이 하나 있었다. 1971년 4월 18일,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의 선거 유세가 바로 그것이다. 그해 4월 27일에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선거 와중에 행해진 김대중의 연설은 무척 파격적이었다.

"이번에 우리가 집권하지 못하면 박정희씨의 영구집권 총통시대가 온다"

그의 연설처럼 1972년에 유신헌법이 제정됐고,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꿈꾸게 된다. 1979년 10월 26일에 있은 '시크릿 파티'에서 한 잔의 술에 섞인 한 발의 '총탄'이 있기 전까지 박정희는 실질적으로 총통이었다. 3권 분립은 그저 교과서에서만 존재했다.

이외에도 김대중은 향토예비군 폐지, 남북간 비정치적 영역 교류 실시, 지방자치제 도입 등을 언급했다. 지금이야 새로울 것이 없지만 당시의 시각으로는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들이었다. 장충단 공원에 모인 100만 가까운 인파들 앞에서 저런 '센세이셔널'한 내용들이 확성기를 타고 퍼져나갔으니 당시 집권세력은 얼마나 긴장을 했겠는가?

 


 
▲ 수표교 장충단공원에 있는 수표교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청계천 복원의 핵심, 수표교 

    
장충단공원에는 수표교(水標橋)도 있다. 청계천에 세워져 있던 수표교는 1958년, 청계천이 복개가 될 때 철거되어 홍제동으로 이전했다가 1965년부터 장충단공원 입구에 자리 잡게 됐다.

수표교는 세종 2년(1420)에 처음 세워졌는데 그때 이름은 마전교(馬廛橋)였다. 마전교가 수표교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변경되게 된 건 세종 23년(1441)의 일이다. 그해 강수량을 측정하기 위해 다리 아래에 양수표(量水標) 세우게 됐는데 그것을 계기로 수표교(水標橋)로 개칭이 된 것이다. 

수표교의 매력은 다리 난간에 있다. 난간이 있는 다리는 궁궐에서나 쓰였다. 조선시대 민간의 다리는 징검다리나 섶다리 수준이었다. 그래서 수해가 나면 다리가 흔적조차 없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수표교는 튼튼한 돌다리인 데다 고급스러운 난간까지 더해졌다. 백성들이 이용하는 다리들 중에 수표교처럼 궁궐의 양식으로 격조 높게 축조된 다리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편 수표교의 돌기둥에는 경진지평(庚辰地坪)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영조 36년(1760), 그해에 있은 대대적인 청계천 준설 과정에서 새겨진 것이다. 

이렇듯 수표교는 역사적으로 건축학적으로 무척 중요한 다리다. 하지만 청계천 복원이 된 지금도 원래 위치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현재의 청계천 자리에는 '짝퉁 수표교'가 세워져 있다.

 

 

 

아기자기한 역사트레킹 코스


광희문과 흥인지문(동대문) 탐방을 끝으로 서울 내부트레킹은 종료가 된다. 광희문은 4소문 중에 하나고, 흥인지문은 4대문의 하나다.

한강 보고, 서울성곽길 걷고, 장충단도 탐방하고, 대문과 소문을 관찰할 수 있는 서울 내부트레킹! 동네 뒷산에서 시작되지만 이 정도면 아기자기한 역사트레킹 코스라고 할 만하지 않은가?

 


 
▲ 광희문 광희문을 탐방중인 트레킹팀.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