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종교다원주의자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은 후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미사에 참여했었는데 그때 큰 감흥을 느꼈었다. 사찰을 탐방하는 역사트레킹을 행할 때는 합장부터 하며 가람을 누볐다. 또한 간간이 교회도 갔고, 그 곳에서 이웃 사랑에 대해서 곱씹어 보기도 했다.

 

무속신앙도 빠질 수 없다. 친분이 있는 무속인이 있는데 작두를 아주 잘 탔다. 그 분 따라 작두잡이를 여러 번 해봤다. 작두잡이를 할 때는 절대 말을 해서는 안 되기에 입에다 ‘함’을 물린다. 작두굿은 유혈이 낭자하는 경우가 많기에 항상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그렇게 작두굿은 종료가 되고 관객들은 한 명씩 차례로 공수를 받는다. 공수는 신이 무당의 입을 빌려 전하는 메시지이다.

그때서야 작두잡이들도 긴장감에서 해방이 되어 입에 문 함을 뱉어낸다. 침방울로 범벅이 된 함을 그냥 태울 것인가? 안 된다. 함을 열어봐야한다.

“앗싸 돈 들어있다! 작두잡이 값이다.”

* 인왕산 성곽길

● 바위산인 인왕산

이번에는 우리나라 무속 신앙의 메카 같은 곳을 향해 간다. 그곳은 인왕산에 있는 선바위다.

인왕산은 바위산이라 그런지 돌이 많기로 유명하다. 호랑이바위, 투구바위, 해골바위 등등... 독특한 형상을 한 바위들이 참 많다. 원래 인간은 자연이 빚어놓은 형상에 어떤 식으로든 의미를 부여하려고 했다. 무생물에도 영혼이 있다는 애니미즘(animism)이 바위에도 투영되니 거석숭배문화가 발생했다. 인왕산 선바위는 그런 애니미즘적인 거석숭배문화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선바위는 가로 7미터, 세로 10미터 정도로 인왕산의 남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규모가 큰 바위인데다 워낙 독특하게 생겨서 멀리서도 그 자태를 알아볼 수가 있다. 하지만 인왕산에 다른 바위들이 많은 터라 좀 자세히 봐야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다.

선바위를 비롯해 인왕산의 남서부 일대를 한 발짝 떨어서져 조망하고 싶다면 인왕산이 아닌 그 앞쪽에 있는 안산(鞍山)에 올라가보자. 안산은 무악재 고개를 사이에 두고 인왕산과 마주하고 있는 산이다. 서대문 형무소가 위치해있을뿐더러 유명한 안산자락길이 있어 도보여행자들의 발길을 불러 모으고 있는 산이다. 그 무악재에는 2017년에 무악재하늘다리가 놓여서 두 산을 연결하고 있다.

안산은 ‘편안한 안(安)’이 아닌 ‘안장 안(鞍)’을 쓴다. 산이 말 안장처럼 생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 안장 형상을 제대로 인지하려면 인왕산, 그 중에서도 선바위 인근에서 바라봐야 한다. 가까이에서 봐야 제대로 알 수 있는 게 있고, 반대로 멀리서 봐야 그 전체 틀거리를 알 수 있는 게 있다.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닌가? 상황에 따라 줌인 / 줌아웃을 적절히 해야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 선바위

 

 

● 선바위와 국사당

선바위를 한자로 쓰면 '선암(禪岩)'으로 '스님바위'라는 뜻이 된다. 승복을 입은 선승이 참선을 하는 모습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선바위를 자세히 보면 단일 암석이 아닌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붙어 있는데 이것을 두고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영혼이 나란히 깃들어 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렇게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서 있다 보니 선바위는 예로부터 아이를 갖기 원하는 이들의 좋은 기도처였다고 한다. 쌍둥이 바위는 다산을 뜻하니까. 요즘같이 저출산 시대에는 ‘애국자 바위’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거대한 암석에서 치성을 드리는 것을 두고 거석숭배문화라고 한다. 이 거석숭배문화는 우리 민간신앙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선바위는 이런 거석숭배문화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된다. 바로 산악신앙이다.

우리 옛 선인들은 산을 경이로운 존재이자 두려운 존재로 인식하였다. 물이 샘솟고, 과실과 약초들이 산재해 있으며, 연료인 나무들을 채취할 수 있으니 산은 인간에게 생명의 원천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산을 마냥 좋은 것만 주는 존재로 인식하지는 않았다. 사나운 맹수들이나 험준한 지형이 항상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경이로운 존재이자 두려운 존재인 산을 신격화하여 제사를 드렸다. 산에 사는 신령, 즉 산신령에게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이것을 두고 산악신앙이라고 부른다. 그런 산악신앙은 우리 무속신앙의 근원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바위 아래에는 국사당(國師堂)이라는 신당이 있다. 이 국사당은 원래 남산에 있던 신당이었다. 조선이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1395년(태조4), 이성계는 목멱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호국의 신으로 삼았다. 그때 제사를 드리기 위해 사당이 세워졌는데 이것을 국사당, 또는 목멱신사(木覓神祠)라고 불렀다.

이 목멱신사에서는 봄과 가을에 국가의 공식행사로 제례를 올렸다. 유교중심주의를 표방하며 건국된 조선에서조차도 산신령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그렇게 목멱대왕을 모셨던 국사당은 192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게 된다. 일제가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을 세웠는데 자기들의 신궁 위에 국사당이 있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겼던 것이다. 국사당이 선바위 부근으로 옮겨오게 된 건, 인왕산이 무학대사의 기도처였기 때문이었다. 국사당(國師堂)에서 '국사(國師)'는 무학대사를 뜻한다.

“제가 예전에 작두 좀 탔습니다.”

국사당 앞에는 작두를 타는 단이 있는데 그 앞에서 좀 있어 보이려고 저런 멘트를 했었다.

 

“정말요? 무섭지 않았어요?”

“작두날이 날카롭지 않아요? 피 날 거 같은데.”

“아니 제가 탔다는 게 아니라... 전 작두잡이를 하면서요... 작두잡이 하면 돈도 입에다 물려줘요. 공수도 받고, 돈도 받고...”

돌아오는 반응은 항상 작두의 날만큼 매서웠다. 그럼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다. 궁색해져 돈 타령으로 급히 마무리 할 수밖에...

 

 

* 국사당: 국사당에는 당연히 주차장이 없다. 그래서 제사 물품을 지게로 나른다. 최첨단 시대이지만 한편으로는 올드 스타일도 존재하는 법이다.

 

● 무학대사와 정도전, 그리고 선바위

선바위는 한양도성에서 직선거리로 300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 선바위를 도성 안에 두냐 마냐를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 간에 격론이 오갔다. 불교세력을 대변했던 무학대사는 당연히 선바위가 도성 안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유교세력을 대변했던 정도전은 이 스님바위가 도성 안에 들어오는 것을 크게 반대했다. 선바위가 들어오면 도성 안에 불교가 융성해질 거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첨예하게 오갔던 격론은 이성계에 의해 결론이 났다. 선바위가 도성 밖으로 물러나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불심이 깊은 이성계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유학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이에 무학대사는 200년 안에 큰 전란이 있을 것이고, 국운이 기울 것이라는 큰 저주(?)를 내뱉었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 이 선바위를 두고 오갔다던 ‘무학대사 VS 정도전’ 간의 갈등은 정사가 아닌 야사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선바위를 두고 오갔던 두 사람의 갈등은 <조선왕조실록> 같은 공식적인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왜 이런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일까? 선바위 논쟁이 입에서 입으로 흘러나왔던 건, 실제로 조선이 건국한 후 약 200년 뒤에 일어난 조일전쟁(임진왜란) 때문이었다. 당시의 민중들이 어떤 식으로든 전란에 대한 유학자들의 책임을 묻기 위해 선바위와 무학대사를 무대로 등판시켰다는 것이다. 도성을 버리고 떠난 왕과 사대부들에 대한 원망을 선바위와 무학대사에 기대어 풀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무속의 메카답게 오늘도 선바위에는 많은 이들이 와서 기도를 올린다. 아이를 낳게 해 줄 수 있는 바위라 그런지 확실히 여성들이 더 많다. 신엄마, 신딸로 보이는 무속인 무리들도 자주 보인다. 심지어는 외국인 여성도 와서 기원을 드리더라. 확실히 선바위의 기도빨이 좋긴 좋나보다. 그 여성 외국인은 무아지경에 빠진 듯 꽤 오랫동안 묵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선바위 앞에서 필자도 조심스럽게 합장을 하였다. 무슨 기원을 드렸을까? 로또대박? 역사트레킹이 잘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역사트레킹만큼은 정말 잘하고 싶으니까!

 

* 선바위와 한양도성: 선바위의 뒷모습. 선바위가 한양도성을 응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 눈내린 인왕산 성곽

 


■ 선바위

1. 코스: 안산자락길 ▶ 무악재하늘다리 ▶ 선바위 ▶ 국사당

2. 가는법: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에서 하차한 후 선바위로 바로 올라갈 수 있음. 하지만 안산자락길을 좀 걸은 후 무악재하늘다리를 통해 선바위를 탐방하는 코스를 추천함. 길도 예쁘고 완만해서 부담없이 걸을 수 있음.

3. 같이 가면 좋을 곳: 인왕산 수성동계곡

* 선바위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백두대간을 '무대'로 삼은 거창아시아1인극제



제9회 거창아시아1인극제 참관기


16.08.11 12:00  최종 업데이트 16.08.11 18:12

곽동운


             





    

 

▲ 양반춤 양반춤을 추고 있는 이삼헌. 뒤로 보이는 산이 삼봉산이다. 백두대간 삼봉산.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백두대간을 무대 배경으로 삼는다면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까요? 백두대간을 무대 일부로 끌어온 연극제가 있다면, 그 연극제는 어떤 멋으로 관객들에게 다가갈까요? 만약 그런 연극제가 있다면 풍류를 제대로 타는 연극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백두대간을 무대 배경으로 '쓴' 거창아시아1인극제

실제로 그런 연극제가 있었습니다. 지난 7월 29일부터 30일까지, 이틀에 걸쳐 삼봉산문화예술학교에서 개최된 제9회 거창아시아1인극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삼봉산문화예술학교의 다른 이름은 거창귀농학교입니다. 거창귀농학교는 백두대간인 삼봉산을 올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1인극제의 무대 배경으로 백두대간 삼봉산이 쓰일(?) 수 있었던 겁니다. 

'거창아시아1인극제'가 9회째를 맞이했다고 기술했지만 '아시아1인극제'는 올해로 27회째입니다. 1988년 서울 바탕골 소극장에서 펼쳐진 '아시아1인극제'가 '거창아시아1인극제'의 전신이기 때문입니다.

바탕골에서 1회 대회를 치른 이후 '아시아1인극제'는 대만, 일본, 인도,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을 순회하며 행사를 개최했습니다. 그 이후 충남 공주에 있는 공주민속박물관이 주최가 되어 1인극제를 무대에 올리게 됩니다. 명칭도 바뀝니다. '공주아시아1인극제'로.



▲ 나비와 소녀 극단 마네트의 김봉석이 '나비와 소녀'라는 마임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저 소녀의 옷이 걸쳐진 나무에 자석이 달린 종이 나비들이 붙여지게 된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현재와 같이 경남 거창에서 1인극제가 무대에 오르게 된 건 2007년부터였습니다. 백두대간 삼봉산이 올려다 보이는 거창귀농학교에서 무대가 펼쳐지니 그때부터는 '거창아시아1인극제'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모노드라마(monodrama)가 백두대간 아래에서 펼쳐졌고, 벌써 9회째를 맞이하게 됐습니다. 

올해 대회는 작년에 비해 참가팀이 많았습니다. 이틀에 걸쳐 23개 팀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거기에 더해 관람객으로 참가한, 23개 팀에 등재되지 않았던 '국악소녀'가 특별출연 형식으로 무대에 올라 타령 한 곡조를 뽑아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연극제가 풍성해질 수 있었던 건, '한국민족춤협회' 회원들의 발걸음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3월 19일, 대학로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한 '한국민속춤협회' 회원들은 이번 거창아시아1인극제에 대거 참석했습니다. 우리 민속춤을 계승·발전시키고자 발족한 한국민속춤협회 회원들 덕택에 거창아시아1인극제도 한층 빛이 났던 것입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공연 프로그램을 소개해보겠습니다.







▲ 만신 서문정 마고당 서문정. 작두를 타기 전.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아이스커피 때문에 장군님이 노하셨나?

이번 연극제는 만신 서문정(마고당)의 작두굿으로 시작했습니다. 21살 때 신내림을 받은 서문정은 서해안배연신굿 예능보유자인 김금화 선생에게서 사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황해도를 위시한 서해안지역의 굿은 퍼포먼스가 강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인지 서문정의 작두굿도 그런 문법에 충실했습니다. 혀 위에 날카로운 식칼을 올려놓기도 했고, 큰 작두 위에서 두 발을 쿵쾅거리며 뛰기도 했습니다.

연극제 스태프로 참가한 저는 그 작두를 잡아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서문정이 작두를 타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지를 못했습니다.

그렇게 작두지기를 하다 보니 에피소드가 하나 발생했습니다. 작두지기도 굿에 참가한 일원이다 보니, 굿하는 동안만큼은 다른 잡스러운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죠. 하지만 너무 더워서 그랬는지 작두지기를 하는 내내 저는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생각했습니다. 
   
'아이스커피 사 먹으려면 읍내까지 내려가야 되는데... 그래도 시원하게 한 잔 했으면 ...'

작두굿은 무사히 마쳤습니다. 관객들 호응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액운(?)이 끼었습니다. 제 휴대폰이 굿을 할 때 쓰이는 정화수에 완전히 젖었기 때문입니다. 시원하게 젖어서 전원이 나가버렸습니다.

'장군님이 노하셨나? 아직 할부도 많이 남았는데... 시원하게 물먹었네.'  



▲ 서예 퍼포먼스 서예 퍼포먼스를 펼친 김기상. 오른쪽에서 두 번째.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서예 퍼포먼스와 통영오광대 문둥춤

두 번째로 무대에 오른 작품은 신평 김기상 선생의 서예 퍼포먼스였습니다. 김기상 선생은 몽둥이 같은 큰 붓을 들고 일필휘지의 기운으로 획을 쳐나갔습니다. 그렇게 흰 천 위에 한 획 한 획이 이어지다보니 어느 순간 한 편의 작품이 탄생되더군요. 채 5분도 되지 않은 시간에 작품이 완성된 것입니다.

짧은 시간에 완성된 작품이었지만 미적으로는 무척 뛰어났습니다. 검은 선들에서 붉은 꽃들이 피어나와 꽃망울을 터뜨리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그런 아름다움 때문인지 김기상 선생의 작품은 다음날(30일) 공연 내내 무대 뒤편에 걸려 있었습니다. 배경막으로 쓰인 셈이죠.

이외에도 첫날 공연에는 이강용씨가 춘 문둥춤 공연이 상당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문둥춤은 통영오광대 놀이의 첫 번째 마당으로 덧빼기 춤의 정수라고 불립니다. 여기서 덧빼기는 장단을 말하는 것이죠.

문둥춤에서 광대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한 맺힌 삶을 춤으로 승화하려 합니다. 통상적으로 이런 식으로 내용이 전개되면 극의 분위기가 무척 가라앉았을 겁니다. 하지만 문둥춤이 오광대놀이의 첫째마당 아닙니까. 비록 광대는 흉한 모습의 탈을 썼지만 입에서는 걸출한 입담을 쏟아냈습니다. 춤에 풍자와 해학을 담아 자신의 한을 승화시킨 것이죠.



▲ 문둥춤 문둥춤을 추고 있는 이강용.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꼬맹이.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 타혼: ​우리문화연구회 타악 연주팀. 타혼.





풍류를 탔던 양반춤

1인극제는 그 다음날에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둘째 날(30일)은 우리문화연구회 '타혼'의 난타 공연으로 시작됐습니다. 쿵쾅거리는 북소리가 축제의 둘째 날이 시작됐음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장중한 북소리의 울림이 공연장 곳곳을 휘몰아친 후 백두대간을 향해 뻗어나가는 것처럼 느껴지더군요.

이어진 공연은 춤꾼 이삼헌의 양반춤이었습니다. 이삼헌씨는 원래 발레를 전공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한국 무용으로 '전공'을 전환한 후 지금까지 우리 전통춤을 추고 있다고 합니다. 서양무용과 한국무용을 두루 섭렵한 것이죠.

그런 이삼헌씨의 이력 탓인지 그가 추는 양반춤은 남다른 멋이 있더군요. 흰 한복을 입고 무대에 올라 부채를 펼치는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뒤로는 백두대간 삼봉산이 펼쳐지니 풍류가 제대로 장단을 탔던 것이죠.



▲ 인형한마당 얼씨구 판타지 인형극 '얼씨구'를 공연중인 고규미. 2화 꽃의 환생을 연기하고 있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나비와 소녀

인형극 공연과 마임 퍼포먼스도 펼쳐졌습니다. 극단 상사화의 고규미씨는 '인형한마당 얼씨구'를 통해 판타지 인형극을 선보였습니다. 인형극은 '1화 할아버지 얼씨구'와 '2화 꽃의 환생'으로 이루어졌는데 2화를 설명하는 대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사람의 인생은 누구나 꽃처럼 오고 언젠가 꽃처럼 갑니다. 살아 있는 동안 우리 인생들이 꽃처럼 편안하고 행복하면 좋겠습니다.'

극단 마네트의 김봉석씨는 마임 퍼포먼스를 펼쳐주셨습니다. '나비와 소녀'라는 마임이었는데 정신대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공연이었습니다. 소녀의 옷이 걸린 나무의 등장으로 극은 시작됩니다. 그 옷을 걷어낸 자리에는 날갯짓을 하며 날아온 나비들이 자리를 잡습니다. 나비들이 꽉 들어차자 나무에 불이 밝혀집니다.

'나비를 좇는 소녀는 꿈을 꿉니다. 그러나 나무에 못이 박히듯 소녀의 몸은 상처로 얼룩지고 꿈은 무참히 깨집니다. 이제 살아있는 이들이 상처를 덮고 다시 소녀로 되돌려주려 합니다. 아름다운 나비의 꿈으로...'


▲ 나비와 소녀 마임 퍼포먼스 '나비와 소녀'를 펼치고 있는 김봉석. 나비가 날아온 나무에 보라색 등이 점등이 됐다.  뒤편 건물에는 동영상 프로젝트 빔을 쏘고 있다.



      



'나비와 소녀'에 대한 팸플릿의 소개글이었습니다. 관람객이 자석이 박힌 종이나비를 직접 나무에 붙여주는 등, 이 마임 퍼포먼스는 관객친화적인 공연이었습니다. 또한 위에 소개글처럼 많은 울림을 담은 공연이기도 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첫째날 작두굿 공연을 한 만신 서문정은 이런 소감을 밝히더군요.

"공연을 보면서 죄책감을 느끼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보는 내내 죄스러운 마음이 들더군요."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임 공연을 보는 내내 마음 한구석이 아려오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런 좋은 마임 퍼포먼스를 펼쳐주신 김봉석씨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아사라토 연주: ​아사라토를 연주하고 있는 일본인 켄토. 켄토는 이번 1인극제에 참여한 유일한 외국 국적자였다. 아사라토는 북아프리카 지역의 타악기인데, 호두만한 두 개의 물체를 부딪혀 소리를 낸다. 치고, 흔들고, 불고... 그렇게 소리를 낸다. 즉흥 공연이 가능하고, 다른 악기와 협연도 쉬운게 아사라토의 장점이다. 정식 공연이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 켄토의 즉흥 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 켄토는 아사라토 연주만 13년 째라고 한다. 저렇게 공연을 하며 전세계를 누빈다고 한다. 그러고보면 켄토도 풍류객인 것이다.

 







사드 반대 춤

거창아시아1인극제의 대미는 한국민족춤협회 이사장인 장순향 선생께서 해주셨습니다. 장순향 선생은 '사드(THAAD) 반대' 춤을 추셨습니다. 원래 선생께서는 산조춤을 추시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무대에 오르셨을 때는 '사드 반대'라는 큰 부채를 펼치며 춤사위를 펼쳤답니다.

선생도 처음부터 저 춤을 출 계획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공연을 바로 앞 둔 시점에 착상이 떠올라 즉흥적으로 춤을 추셨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순식간에 창작춤을 이끌었던 셈입니다. 

아시아1인극제가 열린 거창은 사드 배치 후보지인 성주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있습니다. 사드 배치가 남의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인지 '사드 반대' 춤이 주는 의미가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 않더군요.

과연 우리나라에 사드가 필요한 것인지, 만약 그 사드 체계가 설치가 된 후에 실전에서 사드 미사일이 발사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한반도, 더 나아가 동북아 지역은 지도상에서 지워질지 모릅니다.

사드 반대 춤을 끝으로 이틀에 걸쳐 펼쳐진 제9회 거창아시아1인극제도 무사히 종료가 됐습니다. 백두대간 삼봉산을 배경 삼아서 그랬는지 춤사위는 더 멋들어졌고, 노랫가락은 더 흥에 겨웠습니다. 거창아시아1인극제가 풍류를 제대로 탔던 것이죠.







▲ 사드 반대 사드 반대 춤을 추고 있는 한국민족춤협회 이사장 장순향.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