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딩비 미리 당겨썼습니다!

- 청소년들과 함께한 인왕산역사트레킹

 

 

제게 메일 한 통이 왔습니다. 홍은동 공부방이라는 곳의 프로그램 담당 선생님이 보낸 메일이었습니다. 담당 선생님은 검색을 통해 우연히 역사트레킹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아이들이 인왕산 역사트레킹에 참여를 할 수 있는지 문의를 했습니다. 한마디로 역사트레킹을 통해 지역체험활동을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인왕산이 홍은동의 동네 뒷산이라서 그랬던 것이죠.

 

 



 

청소년들과 함께한 역사트레킹

 

사실 역사트레킹은 성인 대상 프로그램입니다.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껏 계속 성인들만 참가신청을 해왔기에 그렇게 굳어져버린 것이죠. 그러다보니 저도 성인들 기준으로 코스를 짜게 됐습니다. 또한 성인들의 입맛(?)에 맞는 해설을 준비해 왔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꼭 그렇게 성인들 대상으로만 프로그램을 진행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역사트레킹을 하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아니, 오히려 청소년들이 더 많이 역사트레킹에 참여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무거운 책가방만큼이나 학습에 짓눌린 그들이기에... 그렇게 해서 지난 528, 청소년들과 함께 인왕산 역사트레킹에 나서게 됐습니다.


한편, 인왕산역사트레킹은 지난 1화에 언급이 됐습니다. 그럼 이번화는 재탕이 되는 건가요? 아닙니다. 그때는 윤동주 시인과 관련된 에피소드 위주로 내용을 서술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이번화에서는 코스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담았습니다. 또한 코스의 시작점도 변경됐습니다. 예전에는 광화문에서부터 시작을 했지만 변경된 코스에서는 청계천에 있는 광통교에서부터 출발을 하게 됩니다.


이번화가 재탕인지 아닌지 끝까지 읽어 봐주세요. 더군다나 펀딩비를 미리 땡겨쓴만큼 후원자분들은 냉철한 시선으로 이번화를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 광통교





 

 

광통교(廣通橋)


트레킹 팀이 첫 번째로 탐방한 곳은 청계천에 있는 광통교입니다. 대광통교, 광충교, 광교라고도 불리는 광통교는 원래 태조 때 흙으로 만들어진 토교(土橋)였습니다. 그러다 태종10(1410), 홍수로 인해 다리가 떠내려 가 다시 돌다리(石橋)로 만들게 됩니다. 이때 다리에 쓰였던 석재들은 정릉(貞陵)에 있던 석물들이었습니다.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의 무덤입니다.


여기서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어떻게 왕후의 무덤에 있던 돌들이 다리의 재료로 쓰일 수 있냐는 의문 말입니다.


조선왕조가 개창될 때 이성계의 나이는 58세였습니다. 그래서 즉위하자마자 세자 책봉에 나서야했습니다. 그래서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었던 방석이 1392820일에 세자로 책봉됩니다. 그해 717일에 조선이 개국했으니 약 한 달 만에 세자가 책봉이 된 것이지요.


쟁쟁한 형들을 물리치고 이방석이 세자가 될 수 있었던 건, 신덕왕후가 개국 후 첫 번째 왕후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원래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은 신의왕후 한 씨였습니다. 한 씨는 이성계가 즉위하기 1년 전에 세상을 떠났기에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게 됩니다. 신의왕후는 방과(정종), 방원(태종), 방간(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킴) 6명의 남자 형제들을 낳았습니다

   



* 광통교. 거꾸로 세워진 신장석.




 

신덕왕후는 자신의 소생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396(태조5)에 세상을 뜨고 맙니다. 강 씨를 무척 아꼈던 이성계는 지금의 서울 정동에 묘소를 만드니, 그것이 바로 정릉이었습니다. 이후 13988, 이방원이 주도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이때 세자였던 방석이 죽고 맙니다. 이를 무인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부릅니다.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1409(태종9), 도성 안에 무덤이 있을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정릉을 현 위치인 성북동으로 옮기게 합니다. 그 다음해에는 정릉의 봉분을 두르고 있던 석각신장(石刻神將) 등을 광통교 건설에 이용하게 합니다

 

신덕왕후에 대한 이방원의 '뒤끝'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기왕 능에서 가져온 귀한 석재들인 만큼 그걸 제대로 쌓았으면 좋았으련만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부러 신장석들을 뒤집어 놓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장석은 머리가 바닥을 향해 있습니다. 신덕왕후를 철저히 조롱한 것이죠.


이 광통교는 길이(12미터)보다 폭(14미터)이 더 넓습니다. 그래서 광통교라고 부르나 봐요. 그렇게 넓은 다리인 만큼 거기에 담긴 스토리텔링도 풍부하네요.”

 

트레킹 팀은 풍부한 역사를 담고 있는 광통교를 직접 건넜습니다. 다리에 담긴 많은 이야기들을 곱씹어 보면서.

 

 




* 서울성곽: 서울성곽 인왕산 구간.







 

사직단은 종묘사직할 때, 사직이다.

 

트레킹 팀은 광화문을 지나 사직단으로 향했습니다. 사직단은 토지의 신인 사신(社神)과 오곡의 신인 직신(稷神)에게 제례를 올리는 곳입니다. ‘종묘사직할 때 사직이 바로 사직단인 것입니다. 농경을 중시했던 조선왕조였기에 사직단의 의미는 종묘보다 더 크면 컸지 작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조선의 왕들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일들이 닥쳤을 때 사직단에 직접 나아가 제사를 올렸다고 합니다.


보통 사직은 궁을 중심으로 서쪽, ‘종묘는 동쪽에 들어섭니다. 실제로 사직단은 경복궁의 서편인 서촌에 위치에 있고, 종묘는 경복궁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직단은 동쪽에 사신을 모시는 사단, 서쪽에는 직신을 모시는 직단이 있습니다. 큰 담 안에 작은 담이 둘러져 있는데, 그 작은 담은 이라고 부릅니다. 그 율 안에 사단과 직단이 있는 것이죠.


조선의 근간 중에 하나였던 사직단에도 일제의 마수가 뻗쳤습니다. 1911년에 사직단이 폐사됐기 때문입니다. 이에 더해 1922년에는 원래 부지에다 인근의 땅들을 합쳐서 공원을 만들기까지 합니다. 사직단을 공원화하여 격하시켰던 것입니다.






* 사직단: 사직단 제단 바로 옆에서 사진촬영을 하는 청소년 트레킹 팀.






해방 이후에도 사직단은 아픔을 겪었습니다. 도시계획에 따라 신문(神門)이라고 불린 정문이 원 위치보다 14미터 뒤로 후퇴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지 안에 차례로 도서관, 학교, 어린이 놀이공간 등이 세워지게 됩니다.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이 떠난(?) 예전 사직공원은 몸살을 앓았습니다. 취객들이 술김에 울타리를 넘어 가기도 하고, 아이들은 제단에서 씨름을 하기도 했다고 하더군요.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는 부비부비를 즐긴 남녀들도 넘쳐났다고 합니다



트레킹 팀은 율을 넘어 사직단을 지근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내친김에 기념촬영도 했습니다. 물론 허락을 받고 안쪽으로 들어간 것이죠. 소중한 문화유산을 앞에 두고 기념촬영을 할 수 있어서 은근히 기분이 좋더군요. 학생들의 표정도 밝아보였습니다. 이런 맛에 역사트레킹 하는 거겠죠!

 






* 사직단






 

인왕산의 숨겨진 보물, 수성동계곡

 

트레킹 팀은 수성동 계곡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수성동 계곡은 인왕산의 또 다른 볼거리입니다. 아랫동네 서촌의 번잡함은 싹 사라지고, 계곡이 주는 청량감이 주위를 감싸고 있는 곳이 바로 수성동입니다. 물론 계곡치고는 유량이 거의 없는 것이 안타깝기는 하더군요.


수성동(水聲洞)의 명성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한경지략>에는 수성동을 명승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겸재 정선은 <수성동>을 그려 이곳의 아름다움을 수묵으로 옮겨놓았습니다.


또한 이곳은 중인들이 모여 시를 짓고 노닐던 곳입니다. 조선후기 중인들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위항문학(委巷文學)의 본거지였던 셈이죠. 그러니 문학사적인 측면에서도 무척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수성동 계곡은 20127월에 복원한 것입니다. 복원 전에는 1971년에 지어진 시민아파트가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이후 안전문제로 아파트는 철거가 됐고, 그 위치를 옛 모습으로 돌려놨던 것입니다.


복원 과정에서 겸재 정선의 <수성동>이 큰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수성동>에 나오는 것처럼 기린교라는 통돌다리도 그대로 복원이 됐습니다. 어쩌면 겸재의 그림이 없었다면 지금의 수성동 계곡은 평범한 도시 공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 수성동 계곡







 

북문의 역할을 했던 창의문

 

윤동주 문학관을 넘어 마지막 목적지인 창의문으로 향했습니다.


창의문(彰義門)은 사소문중 하나로 자하문(紫霞門)으로 더 많이 알려진 문입니다. 북대문인 숙정문이 있었음에도 실질적으로 북문(北門) 역할을 했던 건 바로 창의문이었습니다.


북악산의 험한 지형 위에 세워진 숙정문은 사람의 발길이 뜸했을 뿐더러 1413년부터는 그마저도 폐쇄를 시켰기 때문입니다. 숙정문이 오른팔이 되어 경복궁을 내리누른다는 풍수학적인 의미 때문에 그런 조치를 취했던 것입니다.


그때 창의문도 폐쇄가 되는데 왼팔의 역할을 하여 경복궁의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죄명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숙정문과 달리 교통의 요충지 위에 놓여 있던 창의문은 1506(중종 1)에 다시 통행이 재개됩니다. 그래서 소문(小門), 창의문이 북문 역할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했다는 것은 그 문 아래로 수많은 역사적 발걸음이 오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인조반정 때 능양군(인조)을 옹립하던 세력들은 이 문을 통해 도성을 점령했고, 광해군을 쫓아낸 후 권력을 잡게 됩니다.


현재의 문루는 조일전쟁(임진왜란)때 불 타 사라진 것을 영조 때(1740) 건립한 것입니다. 현재 창의문은 일반인에게 개방이 되어 있어 문루까지 직접 올라갈 수 있습니다. 내부에는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인사들의 이름을 적은 나무판이 걸려 있습니다. 이 판은 문루를 세울 때 같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 창의문: 창의문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청소년 트레킹 팀.





 

 

펀딩비를 미리 당겨쓰다!

 

트레킹 팀은 창의문을 통과할 때 천장화를 바라보면서 이동했습니다.

 

저 그림이 뭘로 보이세요?”

봉황 아니에요?”

주작이요. 주작.”

 

! 봉황에 주작까지 나왔습니다만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정답은 닭이었습니다. 이 일대가 풍수적으로 지네의 기운을 가졌다하여 천적인 닭을 창의문에 그려 넣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창의문 밖인 부암동 일대가 치킨으로 유명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청소년들과 함께 한 인왕산 역사트레킹은 무사히 종료가 되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넘었더군요. 그냥 그렇게 헤어지기는 아쉬웠습니다. 배도 고프고.


그래서 제가 점심을 쏘기로 했습니다. 제 사비를 쓸까 하다가 스토리펀딩비를 당겨 쓰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유익하게 역사트레킹을 하려고 펀딩을 받고 있는 거잖아요. 그 목적에 맞게 지출이 됐다면 후원금을 미리 당겨쓴다고 해도 후원자분들이 너그러이 이해해 주실 거라 생각합니다.

 

 

 

인왕산 역사트레킹

 

1. 코스: 광통교 사직단 단군성전 수성동계곡 윤동주문학관 창의문

 

2. 이동거리: 7km

 

3. 예상시간: 3시간(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 인왕산 서울성곽에서 본 남산




돈 안 되는 거 뭐하러 하세요?


길 위의 인문학_ 인왕산 역사트레킹

 


 

윤동주 시인이야 굳이 제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겠죠. 유명한 서시도 잘 아실 거고요. 국어 시간에 배웠잖아요...”

 

햇살이 따사했던 어느 봄날. 당시 저는 인왕산 역사트레킹을 리딩하고 있었습니다. 역사트레킹 팀은 수성동 계곡을 지나 창의문 인근에 있는 시인의 언덕에서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시인의 언덕은 윤동주 문학관 뒤편에 있는데 그 곳에 올라서면 서촌과 광화문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입니다. 그만큼 전망이 좋은 곳이죠.


영화 <동주>에서도 보듯, 윤동주 시인은 너무나 유명한 국민시인입니다. 굳이 입 아프게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래서 저도 그냥 저 수준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그래도 <참회록>까지는 설명을 해야 할 거 같아서 첨언을 했습니다.

 

참회록도 아시죠? 그것도 배웠잖아요. 그래도 모르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니까... 참회록은 윤동주가 창씨개명을 한 후 스스로에게 느낀 자괴감을 시어로 풀어낸 것이죠.”

 

됐다 싶어서, 저는 창의문으로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설명을 듣던 참가자 한 분이 제게 불쑥 이런 말을 던지는 겁니다

 

창씨개명을 했으면 친일파가 아닌가요?”

 

잠시 저는 숨이 하고 막혔습니다. 발걸음도 잠깐 꼬였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친일파소리를 듣다니!


하지만 이내 숨을 가다듬은 후에 그 참가자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진짜 궁금하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일부러 윤동주 시인을 깎아내리려고 그런 말을 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 인왕산역사트레킹: 인왕산 성곽구간을 걷고 있는 참가자들.



 




돈 안 되는 역사트레킹

 

저는 역사트레킹 마스터라는 거창한 직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트레킹은 말 그대로 도보여행을 통해 유적지를 탐방하는 것입니다. 마스터는 필드에서는 대장 역할을 하고, 역사유적 앞에서는 문화해설사로 변신을 해야 합니다.


참가자들의 장비를 점검(?)하고, 화장실이나 주차시설을 찍어주는 것도 마스터의 책무이지요. 부상 방지를 위하여 스트레칭을 행하는 것도 꼭 챙겨야 할 임무중에 하나입니다.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답사지를 소개하는 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그간 역사트레킹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고, 그들과 함께 많은 유적지들을 탐방해왔습니다. 그렇게 만난 이들은 대체로 찬사와 격려를 보내줬습니다. 하지만 날카로운 지적도 꽤있었습니다. 역사트레킹이 걷기열풍에 편승한 단순한 파생물이라는 이야기가 대표적이었습니다.


또한 이미 많은 이들이 답사여행을 즐기고 있는데 굳이 역사트레킹이라는 명칭을 써가며 차별화 하는 것이 좀 억지 같다는 이야기도 간간이 들리더군요. 그런 쓴소리들은 그냥 그렇게 흘려 넘겼습니다. 이미 예상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애정 어린 쓴소리는 항상 저를 머뭇거리게 했습니다.

 

돈도 안 되는 거 뭐하러 하세요? 참가한 저희야 좋지만...”

 

그렇습니다. 역사트레킹은 돈이 안 됩니다. 돈을 벌 수 있는 구조가 아닙니다. 실제로 저는 역사트레킹을 하면서 돈을 벌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제 사비를 턴 적도 꽤 있었죠. 그럼 저는 왜 돈도 안 되는 역사트레킹을 해왔을까요? 재밌으니까요! 역사 공부도 하고 트레킹도 하면 몸도 머리도 상쾌해지니까요!

 






* 윤동주 문학관: 시인의 언덕





 


 

마스터는 멍석을 깔아주는 사람

 

참가자들과 함께 호흡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참가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유도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멍석을 깔아준다는 표현을 합니다. 저 혼자 마이크를 잡고 떠드는 것이 아니라 참가자 각 개인이 스스로 보고 느끼게 멍석을 깔아주는 것이죠.


멍석이 잘 깔리면 참가자들은 스스로 그 멍석 위로 올라오더군요. 그러다보면 얼음처럼 굳어 있던 참가자들의 입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합니다. 한들거리는 봄꽃을 바라보며 함박웃음을 짓기도 하고, 맛집이야기로 군침을 흘리기도 하더군요. 그렇게 즉흥적인 반응들이 이어지다 어느 순간부터는 고품격(?)의 이야기들이 흘러나옵니다.


정약용 트레킹에서는 다산 선생의 실학 정신과 조선 후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공주 우금티 트레킹에서는 우금티 전투와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제가 굳이 아이스브레이킹을 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어색함을 깨버리고, 나중에는 해당 주제에 맞혀 토론까지 즐기더군요.


이런 모습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전 흐뭇했습니다. 요즘같이 파편화된 사회에서 역사에 대한 지식을 나누며, 함께 도보여행을 즐긴다는 것 자체가 좋은 일이 아닙니까? 헬조선이니, N포세대니... 하는 말들이 난무하는 요즘인데.

 

 

 




* 윤동주문학관: 서시





 


윤동주가 친일매국노?

 

다시 윤동주 이야기로 돌아와서.

1941년 겨울, 윤동주는 히라누마 도슈라는 창씨명을 얻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윤동주 개인의 의사가 아닌 창씨개명이었다는 점이죠. 집안 전체에서 행해진 것이지 윤동주가 직접 행정기관에 찾아가 창씨개명 서류에 도장을 찍은 게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의도하지 않은 자신의 창씨개명에 대해서까지도 참회를 했던, ‘참회록을 썼던 윤동주였습니다.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그의 고뇌가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한편 당시는 중일전쟁이 이미 발발했고, 태평양전쟁까지 일어난 상태였습니다. 일제의 침략 야욕이 극에 달할 때였습니다. 식민지 조선에도 총동원령이 내려져 식량이 배급되기에 이릅니다. 이때 식량을 배급받기 위해서는 창씨개명이 필수였다고 합니다. 그런 생존과 직결된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에 창씨개명을 한 사람들을 모두 친일 매국노로 분류한다는 건 적절하지 않은 일입니다. 실제로 반민특위에서도 창씨개명 자체를 친일행위로 보지 않았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일본 황군을 화끈하게 격려하고 찬양한 시인 서정주나 일본이 이렇게 빨리 망할 줄은 몰랐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소설가 이광수하고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윤동주가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어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지요.


그가 진짜 친일매국노였다면 교도소에서 옥사했겠습니까? 윤동주도 나름대로 지식인 아니었습니까? 그가 진짜 친일매국노였다면 그의 재능을 팔아 일제와 잘 붙어먹었겠지요. 그래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는 서정주나 이광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반대편에 섰고, 결국에는 타지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겁니다

 

이런 윤동주와 관련된 이야기를 그 참가자에게 해주었습니다. 버벅대면서 이야기를 했는데도 내용은 전달됐는지 그 분은 고개를 끄덕거리더군요. 어쨌든 그 분이나 저나 함께 호흡을 맞춘 것입니다.

 






 * 성곽에 핀 풀과 꽃: 인왕산 성곽 구간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요즘도 인문학은 강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꺾일 만도 한데 그 위력은 계속 되더군요. ‘먹방처럼요. 아무리 사회가 각박하다고 해도 인간의 근원적인 부분을 건드려주는 분야는 계속 건재하나 봅니다. 근원적인 지적 욕구! 근원적인 식욕

 

역사트레킹의 부제는 길 위의 인문학입니다. 트레킹을 하면서, 인문학을 느껴보자는 뜻입니다. 물론 그 중심에는 역사가 균형추를 잡고 있습니다. 그 균형추 옆에 다른 영역도 배치를 해두었죠. 세계사, 신화, 종교, 국제정치, 육식 문제까지... 역사만 하면 재미없으니까요. 그런 이야기들... 트레킹을 하면서 참가자들과 함께 그런 다양한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스토리펀딩에서도 길 위의 인문학이라는 취지에 맞춰 다양한 이야기를 전개할 생각입니다. 그래야 재밌죠!

 

 


 

인왕산 역사트레킹

 

1. 코스: 사직단 인왕산 입구 수성동계곡 인왕산(서울성곽) 윤동주 기념공원창의문

2. 이동거리: 6km

3. 예상시간: 3시간 정도(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5. 교통편: IN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 OUT - 부암동 부암동(윤동주 기념공원 옆 정류장)에서 버스에 탑승한 후 다시 경복궁역으로 돌아올 수 있음.

 

 

 

 

 


 

 

 

 

 

 

 

 

 

 

 

 

여행 사진을 찍다보면 단선보다는 곡선을 더 선호하게 됩니다. 그냥 단선은 밋밋할

 

뿐이라 별 감흥이 없잖아요. 같은 다리라고 해도 아치가 있는 한강대교가 그냥 밋밋한

 

원효대교보다는 그림이 더 잘 나올 겁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비슷해서 그런지 여행 사진 공모전에 입상한 작품들을 보아도 곡선미가

 

살아 있는 사진들이 후한 점수를 받더군요. 'S라인 순천만', '반원을 그린 공룡해안'...

 

 

 

 

 

그렇게 둥글게 휘돌아 나가는 모습에 눈길이 가니 자연경관 뿐아니라 인공구조물도

 

곡선미를 중심에 두고 사진을 찍는 버릇이 생기더군요. 여행을 하고, 사진을 찍다보니...

 

나름대로의 미적 감각이 생겼나 봅니다.

 

 

 

 

 

게재된 사진은 둘 다 서울 성곽을 담은 사진입니다. 메인은 남산 구간에서 찍었고,

 

아래 사진은 인왕산 코스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성곽이 휘돌아 나가는 모습이 저에게는

 

하나의 '리듬'처럼 들리네요. 그럼 미감에 음감까지 얻게 된 것인가요?

 

예술가 다 됐네! ^^;

 

 

 

 

 

 

 

 

 

 


 

 

창의문 천장에 '닭' 그려넣은 이유, 오호라

 

[서촌의 뒷산, 인왕산역사트레킹 ②]

 

15.06.09 20:06    최종 업데이트 15.06.09 20:06

 

 

 

 

 

 

 

 

 

▲ 수성동계곡 사진 왼쪽 부분에 돌다리가 보인다. 기린교다. 뒤에 보이는 산은 인왕산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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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 [서촌의 뒷산, 인왕산역사트레킹 ①] '낭만'과 '비낭만'이 교차하는 서울성곽길

 

인왕산의 숨겨진 보물, 수성동계곡


수성동 계곡은 인왕산의 또 다른 볼거리다. 열을 갖춰 늘어서 있는 소나무들 사이로 암반이 드러난 인왕산을 바라보다보면 여기가 서울이 맞나 싶을 정도다. 아랫동네 서촌의 번잡함은 싹 사라지고, 계곡이 주는 청량감이 주위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계곡치고는 유량이 거의 없어서 안타깝기는 하지만. 

수성동(水聲洞)의 명성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수성동을 두고 조선시대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와 <한경지략>에는 명승지로 소개하고 있다. 겸재 정선은 <수성동>을 그려 이곳의 아름다움을 수묵으로 옮겨놓았다. 또한 이곳은 중인들이 모여 시를 짓고 노닐던 곳이다. 조선후기 중인들의 중심으로 발달된 위항문학(委巷文學)의 본거지였던 셈이다. 그러니 문학사적인 측면에서도 무척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수성동 계곡은 2012년 7월에 복원한 것이다. 복원 전에는 1971년에 지어진 시민아파트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후 안전문제로 아파트는 철거가 됐고, 그 위치를 옛 모습으로 돌려놨던 것이다. 복원 과정에 겸재 정선의 <수성동>이 큰 역할을 해주었다. <수성동>에 나오는 것처럼 '기린교'라는 통돌다리도 그대로 복원이 됐다. 어쩌면 겸재의 그림이 없었다면 지금의 수성동 계곡은 평범한 도시 공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수성동에 '동(洞)'자가 붙어 있는데 이것은 행정구역명을 뜻하는 게 아니다. 골짜기를 뜻한다. 백사실계곡으로 유명한 백석동천(白石洞天)도 같은 한자어를 쓰고 있다. 수성동계곡이든 백사실계곡이든 참으로 소중한 존재다. 시내중심가와 멀지 않은 곳에 그렇게 청량감을 주는 계곡이 있다는 게 그저 정말 고마울 따름이다.

 


▲ 수성동계곡 인왕산 수성동계곡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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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성동계곡

 

 

 

 

 

시인의 언덕과 윤동주문학관


수성동계곡을 벗어난 트레킹팀은 윤동주 문학관을 향해 갔다. 2012년 7월에 개관한  문학관은 윤동주 시인의 친필 원고와 시집 등이 전시되어 있다. 흥미롭게도 문학관은 수도가압장과 물탱크 시설을 개조하여 만든 전시관이다. 그런 탓인지 전시관에는 옛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위쪽으로는 시인의 언덕이라는 작은 공원도 마련되어 있다. 시인의 언덕에서 바라보는 주변 풍광이 상당히 낭만적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문학관에 가기 전에 누상동에 있는 윤동주의 하숙방을 먼저 탐방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누상동 하숙방은 수성동계곡 아래쪽에 위치해 있다. 

 


▲ 시인의 언덕 윤동주 시인의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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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의 역할을 했던 창의문


윤동주 문학관을 넘어 마지막 목적지인 창의문으로 향했다. 창의문(彰義門)은 사소문 중 하나로 자하문(紫霞門)으로 더 많이 알려진 문이다. 북대문인 숙정문이 있었음에도 실질적으로 북문(北門) 역할을 했던 건 바로 창의문이었다. 북악산의 험한 지형 위에 세워진 숙정문은 사람의 발길이 뜸했을뿐더러 1413년부터는 그마저도 폐쇄를 시켰다. 숙정문이 오른팔이 되어 경복궁을 내리누른다는 풍수학적인 의미 때문에 그런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그때 창의문도 폐쇄가 되는데 왼팔의 역할을 하여 경복궁의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죄명' 때문이었다. 하지만 숙정문과 달리 교통의 요충지 위에 놓여 있던 창의문은 1506년(중종 1년)에 다시 통행이 재개된다. 그래서 소문(小門)인, 창의문이 '북문 역할'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 것이다.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했다는 것은 그 문 아래로 수많은 역사적 발걸음이 오갔다는 뜻도 된다. 실제로 인조반정 때 능양군(인조)을 옹립하던 세력들은 이 문을 통해 도성을 점령했고, 광해군을 쫓아낸 후 권력을 잡게 된다. 현재의 문루는 조일전쟁(임진왜란)때 불 타 사라진 것을 영조 때(1740) 건립한 것이다. 현재 창의문은 일반인에게 개방이 되어 있어 문루까지 직접 올라갈 수 있다. 내부에는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인사들의 이름을 적은 나무판이 걸려 있다. 이 판은 문루를 세울 때 같이 만들어진 것이다.

 



 
▲ 창의문 북문의 역할을 했던 창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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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의 천장벽화는 닭


트레킹팀은 창의문을 통과할 때 천장화를 바라보면서 이동했다. 광화문이든 창의문이든 문을 통과할 때 천장화를 보면서 관찰해보자. 각 문마다 그려진 수호동물이 다르다. 막간을 이용한 퀴즈시간.

"저 그림이 뭘로 보이세요? 딱 봐도 용은 아니고."
"봉황 아니에요? 좀 모습이 우습긴 한데..."
"맞아요. 봉황 같은데요."


거의 다 '봉황'으로 답으로 말했다. 하지만 틀린 답이다. '닭'이다. 특이하게도 창의문의 천장화에는 닭이 그려져 있다. 이 일대가 풍수적으로 지네의 기운을 가졌다하여 천적인 닭을 창의문에 그려 넣었던 것이다. 관악산의 화기를 누른다고 광화문 앞에 해태상을 만든 것과 같은 이치다.

"설명을 들으니까 치킨이 생각나요. 저기가 부암동 아닌가요? 저쪽에 유명한 통닭집이 있다고 하던데요."

부암동을 잘 아는 참가자 한 분이 이런 말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디선가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몰려왔다. 통닭 냄새였다. 마늘통닭인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어쨌든 창의문 밖 치킨집에서 풍겨오는 치킨 냄새에 트레킹팀은 모두 한마음이 되었다. 모두 다 군침을 흘렸다.

 
▲ 창의문 천장화. 닭이 그려져 있다. 봉황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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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유익하고, 또한 맛집 탐방도 할 수 있는 인왕산 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됐다. 글을 마치기 전에 1편에 언급된 사직단으로 돌아가 보자.


국가의 대소사가 있을 때 조선의 왕들은 직접 제단에 나가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자신의 부덕함을 하늘에 고하면서 제를 올렸던 것이다. 그런데 메르스 사태라는 중차대한 일을 직면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은 어떤가? 사태가 일어난 지 12일이 지난 후에야 '초기 대응이 잘못됐다'고 짧은 멘트를 남겼을 뿐이다. 이후 발표에서는 발병 환자의 수도 틀리게 언급을 했다. 또한 주말(6월 6~7일)에는 특별한 외부활동 없이 조용히 보내셨다고 한다.

지금이 그렇게 한가할 때인가? 시급을 다투며 행정력을 총결집해도 모자를 판에 그렇게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게 맞는 일인가? 차라리 화끈하게 사직단에서 제사라도 올려주셨으면 좋겠다. 대한민국의 안녕을 위해서. 너무 답답해서 하는 말이니 오해는 없으셨으면 한다. 오죽 답답하면 여행기사를 이런 식으로 끝을 맺겠는가!   

 
▲ 창의문 창의문 문루는 개방되어 있다. 문루를 탐방중인 트레킹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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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

1. 인왕산역사트레킹 코스: 광화문→사직단→단군성전→수성동계곡→윤동주문학관→창의문
2. 약 5km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탐방할 것들이 많아 3시간 이상 소요될 것으로 보임.
3. 시작점: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에서 하차. / 종료점: 종로구 부암동. 경복궁역행 버스 탑승 가능함.
4. 5월 25일에 트레킹을 행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낭만'과 '비낭만'이 교차하는 서울성곽길

 

[서촌의 뒷산, 인왕산역사트레킹①]

 

15.06.09 16:33  최종 업데이트 15.06.09 16:33

 

 

 

 

 

 

 

 

 

▲ 낭만적인 서울성곽의 모습 활처럼 휜, C자형 구간. 뒤로 남산타워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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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仁王山)은 보면 볼수록 위엄이 느껴지는 산이다. 가파른 바위가 드러낸 바위색과 그 바위 사이로 가지를 뻗은 수풀들의 푸른색이 서로의 배경색이 되어주니, 그 운치에 감탄사가 절로 나올 수밖에! 그런 인왕산을 겸재 정선은 <인왕제색도>, 강희언은 <인왕산도>를 붓끝으로 담아 표현하였다.   


호랑이가 살고 있어 무서운 곳이긴 했지만 인왕산은 예부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필자도 마찬가지다. 광화문, 경복궁 너머로 보이는 인왕산의 풍광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혼자만 좋아한 게 아니다.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함께 트레킹을 할 정도로 좋아한다. 일명 인왕산 역사트레킹을 리딩하며, 사람들에게 인왕산의 매력을 알려줄 정도다. 인왕산역사트레킹 코스는 다음과 같다.

 


광화문 → 사직단 → 단군성전 → 수성동계곡 → 윤동주문학관 → 창의문

 


▲ 서울성곽 서울성곽 인왕산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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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은 '종묘사직'할 때, 그 '사직'이다


인왕산 역사트레킹은 사직단에서부터 시작된다. 사직단은 토지의 신인 사신(社神)과 오곡의 신인 직신(稷神)에게 제례를 올리는 곳이다. '종묘사직'할 때 '사직'이 바로 사직단인 것이다. 농경을 중시했던 조선왕조였기에 사직단의 의미는 종묘보다 더 크면 컸지 작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조선의 왕들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일들이 닥쳤을 때 사직단에 직접 나아가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보통 '사직'은 궁을 중심으로 서쪽, '종묘'는 동쪽에 들어선다. 실제로 사직단은 경복궁의 서편인 서촌에 위치에 있고, 종묘는 경복궁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사직단은 동쪽에 사신을 모시는 사단, 서쪽에는 직신을 모시는 직단이 있다. 큰 담 안에 작은 담이 둘러져 있는데, 그 작은 담은 '율'이라고 불린다. 그 율 안에 사단과 직단이 있는 것이다.

조선의 근간 중 하나였던 사직단에도 일제의 마수가 뻗치게 된다. 1911년에 사직단이 폐사됐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1922년에는 원래 부지에다 인근의 땅들을 합쳐서 공원을 만든다. 사직단을 공원화 하여 격하시켰던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사직단은 아픔을 겪었다. 도시계획에 따라 신문(神門)이라고 불린 정문이 원 위치보다 14미터 뒤로 후퇴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부지 안에 차례로 도서관, 학교, 어린이 놀이공간 등이 세워지게 된다.

 


▲ 사직제례 사직제례를 준비하는 모습. 2014년에 촬영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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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이 떠난(?) 예전 사직공원은 몸살을 앓았다. 취객들이 술김에 울타리를 넘어 가기도 하고, 아이들은 제단에서 씨름을 하기도 했다.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는 '부비부비'를 즐긴 남녀들도 넘쳐났다고 한다. 필자는 사직단 뒤편 신사임당, 이율곡 동상 근처에 있는 족구장과 배드민턴장을 보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종묘에서 족구나 배드민턴을 칠 수 없잖아요. 그런데 사직단에서는 지금 하고 있거든요. 현재 사직단은 복원화 사업을 하고 있는데 원안대로 한다면 저기 도서관이랑 어린이 시설을 철거해야 한답니다. 사직단을 종묘처럼 성역화한다면 이곳에서 족구는 못하겠죠. 그건 그렇다 쳐도 도서관이랑 어린이시설까지 철거한다면 너무 일이 커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설명을 얼버무리는 건 복원사업에 대한 스스로의 입장 정리가 되지 않은 탓이다. 대신 확실한 건 하나 있다.

"성역화를 하더라도 입장료는 받지 마세요! 지갑이 얇아서요..."

 


▲ 단군성전 사직공원 한쪽편에 있는 단군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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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처럼 휘어나가는 서울성곽의 곡선미


트레킹팀은 단군성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직공원 위쪽에 자리 잡은 단군성전은 규모가 크지 않다.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지 않는다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사실 단군성전은 전국에 산재해 있다. 규모가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다.

성전이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다. 크기가 중요한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직동의 단군성전은 우리동네 교회보다도 더 작다. 아무리 그래도 서울에 있는 단군성전이라면 일정 정도 규모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단군성전을 탐방할 때마다 느끼는 아쉬움이다.

그런 아쉬움을 뒤로 하고 본격적인 트레킹에 나섰다. 산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다 보면 활처럼 곡선으로 휜 성곽이 펼쳐진다. 뒤쪽으로 남산을 두고 'C자'형으로 크게 휘어나가는 서울성곽은 트레킹팀의 시선을 독차지했다. 이를 두고 필자는 이렇게 말을 했다.

"여기가 서울성곽 중 가장 곡선미가 뛰어난 구간인 듯싶습니다. 뒤쪽에 남산도 있어서 배경도 살아 있어요. 그러니 열심히 사진을 찍어주세요!"

 


 

▲ 서울성곽 성곽길을 걷고 있는 트레킹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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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이지 않은 서울성곽길


서울성곽길 역사트레킹을 리딩하면서 하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성곽길을 만만하게 보고 있다는 점이다. 등산에 준하는 복장을 갖추라고 미리 공지를 했음에도 트레킹 당일날 보면, 필자를 당혹스럽게 하는 참가자들이 꼭 있었다.

배낭이 없으면 백팩이라도 메고 오라고 당부했지만 옆으로 메는 가방을 들고 오는 참가자. 가급적 트레킹화를 신고 오라고 말을 해도 운동화는커녕 하이힐을 신고 오는 참가자. 그런 사람들을 보면 필자는 이런 말을 건넨다.

"서울성곽 길은 낭만과 비낭만이 교차하는 곳입니다. 성곽자체는 낭만적으로 보일 겁니다. 하지만 한양도성은 말 그대로 방어시설이었어요. 비탈의 경사가 급격할수록 방어력도 높아지잖아요. 그런 상식에 기초해서 성곽이 만들어졌으니 성곽길이 험할 수밖에 없답니다. 그런 곳은 비낭만적이죠."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성곽길을 낭만적인 길로 인지하고 있을까? 미디어에서 접한 모습들이 낭만적으로 묘사돼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기자들이 험한 구간은 직접 취재하거나 체험하지 않고, 그저 '그림'이 잘 나오는 부분을 부각시키는 기사를 남발했다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필자도 자유롭지 않다. 곡선미가 사는 C자형 성곽구간을 메인 사진으로 올려 사람들의 참가를 유도했으니까. 어렵고 난이도 있는 구간은 쏙 빼놓았으니까. 낭만과 비낭만이 교차하는 성곽길을 뒤로하고 트레킹팀은 수성동 계곡으로 향했다.  

 

 


▲ 서울성곽 사진에도 보이듯 성곽길은 경사도가 꽤 된다. 계단을 계속 타고 올라가는게 무척 비낭만적이지만 성벽 넘어로 보이는 풍광들은 무척 낭만적이다. 비낭만이 있어야지 낭만이 더 돋보이는 법이다. 뒤로 보이는 산은 북한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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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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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문과 역사적 상상력

 

 

 

 

 

 

 

홍지문 현판

 

 

자하문이라고도 불리는 창의문 근방에는 역사적인 명소가 많다. 유명한 백사실 계곡에는 오성 이항복 대감의 별서 터가 있고, 너럭바위가 펼쳐진 세검정은 광해군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꿈틀대고 있다. 또, 흥선대원군의 별서 터도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창의문 밖에는 홍지문도 있다.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인데 역사적인 상상력을 발휘하기에 이만한 곳도 없다. 일단 홍지문과 탕춘대성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자. 탕춘대성을 새로 나온 ‘중국 음식’으로 오해할 수도 있으니.

 

 

 

홍지문과 오간수문

 

 

 

 

탕춘대성과 홍지문

 

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해주는 보조 성으로 지어졌다. 한양도성은 조선 초기시대에 축조된 것에 비해 북한산성은 후기인 숙종 때 만들어졌다. 임진왜란과 병자·정묘호란을 통해 처참한 피해를 입었던 조선은 한성 방어를 위해 성곽들을 정비하게 됐고, 그렇게 하여 북한산성이 완공되기에 이른다.

 

이후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길이 4km의 성이 만들어졌으니, 이 성을 두고 탕춘대성(湯春大城)이라고 불렀다. 탕춘대성의 이름은 성곽이 자리 잡은 곳 인근에 탕춘대라는 돈대를 따라 지었다고 한다. 축조 된 순서를 정리해보면 ‘한양도성(조선 초기) ▶ 북한산성(조선 후기) ▶ 탕춘대성(조선 후기)’ 순이다.

 

홍지문은 그런 탕춘대성의 성문이었다. 비록 4km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성이었지만 탕춘대성도 있을 건 다 있는 성채였다. 홍지문 옆으로는 홍제천이 흐르기에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도 만들어졌다.

 

 

 

홍지문과 북한산 방면의 성벽. 수풀이 무성하지 않은 계절에 가야 성벽을 관찰할 수 있음.

 

 

 

 

상상력으로 홍지문 성벽을 ‘복원’ 해보자!

 

 

지금의 홍지문은 다시 만들어진 것이다. 1921년 홍제천이 범람하여 홍지문을 비롯한 오간대수문을 싹 다 쓸어버리고 간 걸, 1977년에 복원했다. 하지만 복원은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왕산 방면의 성벽이 훼손이 됐고, 그 위로는 도로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홍지문의 한쪽은 단절되어 있고, 그 옆으로는 지금도 자동차들이 쉴 새 없이 지나가고 있다.

 

 

 

경사가 급격한 인왕산 성벽

 

 

 

역사책으로 해보는 상상력은 텍스트의 한계를 넘어서기가 어렵다. 그래서 역사적 상상력은 현장에 있을 때 가장 선명하게 그려질 수 있다. 그런 역사적 상상력을 홍지문 앞에서 발휘해보자. 자동차들을 지워버리고, 도로도 걷어내보자. 그런 후에는 끊어진 성벽을 이어보자. 인왕산에서 급하게 내려온 성벽이 북한산 방면으로 또 급격하게 오를 수 있게 홍지문의 끊어진 성벽을 역사적 상상력으로 ‘복원’해 보자.

 

이런 것도 하나의 재미다. 이런 재미가 있기에 서울 역사탐방은 언제나 필자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뚜껑없는 박물관', 서울역사도보여행    

  


우리에게 3월은 봄의 시작이자 삼일절이라는 역사적인 날이 있는 달이다. 야외활동을 시작하기 좋은 이 봄에, 역사도보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멀리 떠날 필요도 없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광화문에서 서대문형무소까지 이어지는 길로 역사도보여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광화문과 사직단

 

일명 광화문-서대문형무소 코스로 불릴 수 있는 이 도보여행의 시작점은 경복궁의 남문이자 정문인 광화문에서 시작된다. 경복궁이 조선의 법궁이었던만큼 광화문은 다른 궐문보다 훨씬 더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궁궐은 ‘궁’과 ‘궐’이 합쳐진 말인데 ‘궐’은 높은 석대 위에 누각을 세운 것을 말한다. 지금은 경복궁 돌담과 떨어져 있는 동십자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일반적인 궁궐의 의미에 빗대어 보자면 광화문은 조선시대 궁궐 정문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 형식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광화문 수문장 교대식

 

 

 

일제의 마수는 광화문에도 미치게 된다. 일제는 조선의 정기를 끊기 위해 광화문을 헐어 동쪽으로 옮겨 버렸다. 대신 그 자리에는 한용운 선생이 ‘돌집’이라고 불렀던 조선총독부가 들어섰다.

해방 이후 광화문은 여러 차례 중수를 하게 됐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광화문은 2010년 8월에 완공한 것이다. 다시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광화문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수문장 교대식 때문이다. 바람에 펄럭이는 큰 깃발과 화려한 복식을 한 수문장들의 박력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도 큰 관광 상품이 되었다.

 

경복궁 서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인 서촌에는 사직단이 자리를 잡고 있다. 도보로 10분 정도 이동을 하면 닿을 수 있는 곳이다. 사직단은 토지의 신인 ‘사’와 곡식의 신인 ‘직’에게 제례를 올리기 위해 마련된 장소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종묘, 서쪽으로는 사직단이 자리 잡은 것이다.




토지와 곡신의 신에게 제사를 올린다는 뜻의 `사직단` 제례

 

 

 

종묘사직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직단은 종묘에 버금가는 곳이었다. 하지만 사직단도 일제시대에 큰 몸살을 앓게 된다. 경내가 크게 훼손되고, 그 영역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이슈가 됐던 사직단 복원 문제도 그 근원에는 일제의 마수가 있었던 것이다.



 

서대문형무소와 독립문


도보여행은 인왕산 서울 성곽으로 이어진다. 겸재 정선이 사랑했던 돌산 인왕산에 올라 서울 시내를 찬찬히 살펴보고 마지막 탐방 장소인 서대문형무소로 이동해보자.

서대문 형무소에 대형태극기가 걸려 있다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피눈물을 흘렸던 서대문 형무소는 역사도보여행의 절정부이자 종료 지점이다. 서대문형무소는 1996년 성역화 사업 이후 역사공원으로 탈바꿈했는데 빨간 벽돌로 지어진 건물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는 형태를 띠고 있다. 아직도 이곳에는 유관순 열사가 옥사했던 여감방, 강인규 열사(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짐)가 처형당한 사형장 등등… 수많은 독립지사들의 복역을 했던 독방들이 전시되어 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찾아가 봐도 좋다

 

 

 

이제 도보여행을 하기 좋은 봄이 왔다. 춘삼월에는 배낭을 꾸려 서울 곳곳에 남아 있는 역사유적들을 탐방해보자. 도보여행을 통해 빛나는 역사뿐 아니라 그늘진 역사도 배워보자. 알고 보면 서울도 뚜껑 없는 박물관인 정도로 풍부한 역사유적을 가지고 있는 매력적인 도시다.


 

 

 

 

 



■ 역사도보여행 제안 코스
 1. 광화문-서대문형무소 코스:
    광화문(경복궁) ▶사직단(서촌) ▶ 인왕산(서울성곽) ▶ 서대문 형무소(독립문)
 2. 교통편: 출발 –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이용 / 종료 –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이용
 3. 이동거리: 약 5km / 서대문형무소 관람을 포함, 약 2시간 30분 정도 소요 예상
 

 

 

 

 

서울 도보여행, 이렇게 걸으면 즐거움 커진다  2부

[북악산 역사트레킹 1편] 역사 알면 서울이 달라 보입니다

 

 

* 홍지문

 

 

 

 

 

---> 전편에 이어서

 

 

 

상처(?)가 많은 홍지문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이었다. 성벽이 숨을 골랐던 자리에 홍지문이 들어선 것이다. 그래서 홍지문 옆에는 홍제천이 흐를 수 있도록 수문 5개가 함께 세워져 있다.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이라고 불리는 이 수문은 홍예형(무지개)으로 이루어져 있다.

홍지문(弘智門)은 상처(?)가 많은 문이다. 사람들이 자꾸 4대문 중 북쪽에 있는 문으로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역사트레킹 팀에도 그렇게 오해를 한 참가자가 있었다.


"이 근처에 북대문이 있다고 하던데... 이게 그 북대문이에요? "

 


아니다. 홍지문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탕춘대성이라는 보조성의 성문이다. '북대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북쪽의 대문은 서울성곽 북악산 구간에 있는 숙정문(肅靖門)이다. 4대문에 붙여진 인의예지(仁義禮智) 중 북쪽에 해당되는 '智'가 홍지문(弘智門)에 붙여져 그런 오해가 있는 것 같다.


홍지문은 그런 명칭의 혼용 같은 내적상처 뿐 아니라 외적상처도 있다. 성곽 일부가 잘려나간 것이다. 홍지문 바로 옆으로 세검정로가 놓여 있는데 성곽 일부를 잘라서 도로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홍지문은 자동차들의 매연과 소음이 끊임없이 진동하는 곳이다. 문화재가 자동차들에 의해 압도당하는 느낌이 든다.

그보다 더 큰 상처도 있었다. 1921년 대홍수로 아주 싹 쓸려 내려간 것이다. 옆에 있는 오간대수문도 그때 싹 쓸려 내려갔다. 지금의 홍지문은 1977년에 복원한 것이다. 대홍수 이후 방치되어오다 약 반세기 만에 복원을 한 것이다.

이렇게 상처 많은 홍지문이지만 그곳 일대를 탐방하다보면 서울성곽과 북한산성이 어떻게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는지를 관찰할 수 있다. 가파른 경사에 축조된 성곽이 어떻게 방어기지 역할을 했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는 말이다. 평소에는 수풀이 우거져 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가을이 되면 성벽과 오색단풍이 어우러져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할 것이다.

 

 

 

 

 
▲ 석파랑 흥선대원군의 별서 사랑채였다. 전통한옥과 중국풍이 어우러진 건축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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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검정(洗劍亭)보다 고향집 팔각정이 더 낫다?


 

역사트레킹 팀은 다음 탐방지인 석파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석파랑(石坡廊)은 석파정(石坡亭)에서 옮겨져 온 것인데 흥선대원군의 별서 사랑채였다. 석파정은 대원군이 사랑한 별장이었다고 한다. 현재 요릿집으로 쓰이고 있는 석파랑은 벽에 둥근 만월창을 내는 듯, 전통한옥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전통 방식과 중국식 양식이 조화를 이룬 건축기법이다.


석파랑에서 조금만 이동을 하면 세검정이 나온다. 세검정은 '칼을 씻었다(洗劍)'는 의미인데 광해군과 관련이 있는 곳이다. 광해군을 몰아내고자, 인조반정을 획책한 이귀, 김류 등이 칼을 갈아 씻었다고 해서 세검정(洗劍亭)이라고 명명됐기 때문이다.


석파정과 세검정에서 보듯, 이 일대(종로구 부암동)는 예부터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명승지였다.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이 주위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고 사천이라 불렸던 홍제천이 너럭바위 위를 유유히 흐르고 있으니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데 안성맞춤이었던 셈이다. 다산 정약용과 겸재 정선도 그렇게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린 이들이었다. 다산 선생은 <유세검정(遊洗劍亭)>이란 시를 지었고, 겸재 선생은 <세검정도>라는 부채 그림을 그려 세검정을 칭송했다.

 

 

 

 
▲ 세검정 세검정과 사천으로 불렸던 홍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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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세검정은 1977년에 지어졌다. 1941년에 인근에 있던 종이공장에서 화재가 났는데 불이 옮겨 붙어 주춧돌만 남기고 완전히 소실됐다, 36년 만에 복원된 것이다. 겸재 선생의 부채 그림을 많이 참조하여 복원됐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차이가 크다고 한다. 필자가 봐도 복원된 세검정과 겸재 선생의 그림 속의 세검정은 닮아 있지 않았다. 현재의 세검정은, 얼핏 보면 그냥 평범한 동네 정자로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참가자 중 한 분이 혼잣말로 이렇게 속삭였다.

"고향 마을회관에 있는 팔각정이 더 좋아 보이는데..." 
 


부채에 그려진 수려한 주위풍광은 되돌릴 없겠지만 문화재 복원만큼은 보다 더 정교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 문제는 앞서 언급한 홍지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숭례문 복원에서 보듯 부실하게 문화재를 복원하면 안 하는 것만도 못한 일이 된다. 특히 답사여행을 하는 사람들 앞에 놓인 것이 '불량 복원품'이라면, 그 답사여행자들은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필자 같이 자신의 두 발로 역사트레킹을 하는 사람들은 더 크게 허탈함을 느낄 것이다.

문화재 복원에 대한 의문 혹은 아쉬움을 품고, 트레킹 팀은 이항복 별서터가 있는 백사실계곡 쪽으로 향했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서울 도보여행, 이렇게 걸으면 즐거움 커진다  1부

 

[북악산 역사트레킹 1편] 역사 알면 서울이 달라 보입니다

 

14.10.17 19:50 최종 업데이트 14.10.17 19:50

 

 

 

 

 

 

 

 
▲ 북악산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 휴식터에서 북한산을 보고 있는 트레킹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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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의 장점은 텍스트상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텍스트 안에서는 읽어낼 수 없는 지식들이 답사를 통해서 체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성곽같은 축조물들은 해당 유적과 함께 주위 사방의 지형을 함께 둘러보아야 그 진면목을 명쾌하게 인지할 수 있다.

가파른 산줄기를 타고 내려온 성곽이 어떤 방면의 방어를 위해 축조되었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탐방자는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가 적들의 예상 침입로를 짐작해보고, 해당 성곽이 그 침입을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게 축조됐는지 나름대로 '워게임 시뮬레이션'을 돌려볼 수도 있다.

 


이런 과정들은 역사교과서나 위성지도 같은 텍스트로는 구현할 수 없는 것들이다. 현장에 가서 직접 눈으로 확인을 해야 가능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답사여행은 '현장에 답이 있다'라는 격언을 가장 잘 실천하는 행위인 듯싶다.

지난 10월 4일, 그런 격언을 실천하기 위해 필자는 배낭을 꾸렸다. 바로 북악산 역사트레킹을 하기 위해서다. 물론 북악산만 탐방하려고 나선 것은 아니다. 세검정 일대와 반대편인 성북동까지 두루 탐방하기 위해서 역사트레킹에 나선 것이다. 코스는 다음과 같다.

 


홍지문  석파랑  세검정  백사실 계곡  이항복 별서터  능금마을  북악산팔각정(북악스카이웨이)  북악산산책로 ▶

한용운 생가(심우장)

 

 



 

 

 
▲ 홍지문 홍지문과 오간대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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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과 북한산성, 그리고 탕춘대성

 


북악산 역사트레킹은 상명대 옆쪽에 자리잡은 홍지문(弘智門)에서부터 시작한다. 서울에는 큰 성곽이 두 개가 있다. 일명 서울성곽이라고 불리는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이 바로 그것이다. 서울성곽은 북악산을 기점으로 동쪽의 낙산, 서쪽 인왕산, 남쪽 남산을 둘러쌓아 축조한 것이다. 이 네 개의 산은 내사산이라 불린다. 안쪽에 있는 네 개의 산이란 뜻이다.

서울성곽이 도읍 방어의 최후의 보루였다면, 북한산성은 도성 방어의 전초기지라고 불릴 수 있다. 북한산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손꼽히는 요충지였다. 이 일대를 차지하기 위해 삼국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고려시대에도 여러차례 북한산에 있는 산성을 수리·축조했다. 그만큼 북한산 일대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방어 거점이었던 것이다.

 


현재의 북한산성은 조선 숙종 시기에 축조된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혹독하게 치룬 조선은 국방력 강화와 도성 방어에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리하여 1704년(숙종 30)부터 1710년까지 도성 성곽을 재정비했다.

또한 다음해인 1711년에는 북한산성을 축조하게 됐다. 약 8km 달하는 북한산성은 기공에서 완공까지 6개월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 규모에 비해 무척 빨리 축조된 것인데 청나라에게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공사를 서둘러 완료시켰다고 한다. 당시 조선은 병자호란 강화조약에 의해 성의 축조와 수축에 큰 제약을 받고 있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서울성곽은 내사산을 둘러 만든 성이다. 북한산성은 북한산에 있는 성이고. 그래서 두 성곽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두 성곽 사이가 좀 '붕 떠있다'고 할 수 있다. 그 간극을 메꾸기 위해 보조성이 축성됐는데 그것이 바로 탕춘대성(湯春大城)이다. 성이 세워진 세검정 부근에 탕춘대(湯春大)가 있다하여 그렇게 명명된 것이다.

도성과 북한산성을 약 4km에 걸쳐 연결한 탕춘대성도 1719년, 조선 숙종 시기에 만들어졌다. 인왕산에서 가파르게 내려온 성벽은 홍제천(사천)에서 잠시 숨을 고르다 다시 북한산 쪽으로 숨 가쁘게 비탈을 탄다. 그러다 북한산 서남쪽 비봉 인근에서 북한산성과 합류된다. 북한산 비봉은 진흥왕 순수비(555년 건립)가 있던 곳이다.

 

 

 

 
▲ 홍지문 홍지문 바로 옆에는 도로가 있다. 탕춘대성의 일부를 잘라 도로로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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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티투어? 아니... 서울시티트레킹!  2편

자신의 두 발로 가는 서울 명소탐방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문이자 정문이었다. 경복궁이 조선의 법궁이었던 만큼 광화문은 다른 궐문보다 훨씬 더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광화문은 석축을 쌓고 중앙에 홍예문(무지개문)을 셋이나 내서 격식을 높였다.

궁궐은 '궁'과 '궐'이 합쳐진 말인데 '궐'은 높은 석대 위에 누각을 세운 것을 말한다. 지금은 경복궁 돌담과 떨어져 있는 동십자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일반적인 궁궐의 의미에 빗대어 보자면 광화문은 조선시대 궁궐 정문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 형식을 가지고 있다.

경복궁은 조일전쟁(임진왜란) 때 불에 타고 만다. 광화문 앞에 화기를 막으려고 세운 해태상이 있었음에도 불에 전소되었던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자 선조는 궁궐을 버리고 몽진(임금의 피난)을 하게 되고, 이에 격분한 백성들은 궁궐로 몰려간다. 그중 노비 신분에 있던 사람들은 장예원에 불을 놓는다. 장예원에 노비문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장예원에서 일어난 불길은 사방으로 퍼져나가 경복궁 전체가 화마의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아무리 해태상을 세운다고 한들, 강력한 소방시설을 갖춘다고 한들 성난 민심 앞에서는 그저 무용지물이었던 것이다.


 

 

 

 

 

 
▲ 광화문 수문장 교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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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조선의 정기를 끊기 위해 광화문을 헐어 동쪽으로 옮겨 버렸다. 그 자리에는 한용운 선생이 '돌집'이라고 불렀던 조선총독부가 들어섰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광화문은 2010년 8월에 완공된 것이다. 1968년에 중수를 하게 되는데 그때 제대로 복원을 하지 못했다. 당시 중앙청으로 쓰이던 구 조선총독부 축에 맞춰 중수를 했는데 그 때문에 본래보다 3.5도 가량 틀어졌던 것이다.

그런 오류를 바로잡고 거듭난 광화문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공간이 되었다. 수문장 교대식 때문이다. 바람에 펄럭이는 큰 깃발과 화려한 복식을 한 수문장들의 박력 있는 모습을 보기 위해 국내외 관광객들이 광화문으로 몰려들고 있다.

사직단은 경복궁에서 서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인 서촌에 자리를 잡고 있다. 사직단은 토지의 신인 '사'와 곡식의 신인 '직'에게 제례를 올리기 위해 마련된 장소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종묘, 서쪽으로는 사직단이 자리 잡은 것이다. 이런 배치는 <주례고공기>에 의한 것이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계한 사람은 정도전이었다.   

 

 

 

# 인왕산과 서울성곽


사직단이 있는 서촌까지는 요즘 유행하는 동네걷기와 별 차이가 없다. 포장도로를 걷기 때문이다. 서울성곽이 있는 인왕산 코스에 가야 트레킹다운 트레킹을 할 수 있다.

약 18km에 달하는 서울성곽은 조선의 도성이었다. 북쪽의 백악산(북악산)을 기준으로 동쪽에 낙산, 서쪽에 인왕산, 남쪽에 목멱산(남산)을 둘러서 만든 성곽이다. 이 산들을 묶어 내사산이라 부른다. 북악산은 원래 백악산이라 불렸는데 일제 강점기에 '북악'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런 도성에는 4대문이 있는데 남쪽에는 숭례문(남대문), 동쪽에는 흥인지문(동대문), 북쪽에는 숙정문, 서쪽에는 돈의문(서대문)이 있었다. 하지만 현재 서대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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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성곽 서울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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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에 올라서면 성곽과 함께 고층빌딩으로 둘러싸인 서울 시내가 보인다. 내사산이 둘러싸고 있는 서울 중심부다. 이를 두고 필자는 '작은 서울'이라 칭했다. 그럼 '큰 서울'은 어딘가? 서울의 주산인 북한산을 기준으로 남쪽으로는 관악산, 동쪽으로는 아차산(용마산), 서쪽으로는 덕양산(행주산성)을 두고 외사산이라 부르는데 그 외사산의 안쪽 지역을 '큰 서울'이라고 불렀다. 서쪽 지역만 빼놓고는 지금의 서울 행정권역과 얼추 비슷하다. 한양천도 이후, 서울의 확장은 계속됐지만, 지형적인 굴레까지 뛰어넘지는 못했던 것이다.

서울성곽은 자연적 지형을 이용하여 방어요새를 구축했다. 산사면의 급경사를 이용하여 적의 침략을 대비한 것이다. 한마디로 매우 급한 경사면에 성곽이 구축됐다는 뜻이다. 이를 달리 해석하면 서울성곽길은 걷기가 만만치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걷다 보면 발바닥에 불이 난다는 뜻이다.

하지만 간혹 서울성곽길을 좀 만만하게 보는 분들이 있다. 우리 역사트레킹팀에도 그런 분이 있었다. 사전에 미리 공지를 올렸는데도 어떤 분께서 하이힐을 신고 오셨던 것이다. 트레킹 인도자로서 참 난감했다.

"읔! 제가 분명히 편한 복장에 편한 신발을 신고 오라고 당부드렸는데요."
"앞에는 그냥 평지고, 서울성곽길 걷는다면서요…."

 

 

 

 

 
▲ 서울성곽 '시간 퇴적층'이 새겨진 서울성곽 돌덩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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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힐을 신고 오신 분도 끝까지 완주를 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물론 필자는 무척 조마조마했지만….

서울성곽은 여러 번에 걸쳐 개축됐다. 조선 초기에는 토성이었고, 이후에는 주위에 있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축성됐다. 그러다 조선 후기 숙종시대에는 두부 모양의 장대석이 쌓아올려지게 된다. 이후 박정희 정권 시대에 또 한 번 개축된다.

이렇듯 서울성곽은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마치 600년이란 시간이 퇴적층처럼 돌들에 새겨져 있는 것 같다. 아랫돌은 옛날에 쌓여 '누릿누릿'한데 그 이후에 축성된 돌들은 하얀색이다. 윗돌과 아랫돌이 시각적으로 '시간 퇴적층'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 서대문형무소와 독립문


역사트레킹팀은 마지막 탐방지인 독립문과 서대문 형무소로 이동했다. 독립문은 잘 아시다시피 독립협회에서 자주 국권을 상징하기 위해 세운 문이다. 독립문은 영은문을 헐고 지은 문이다. 영은문은 청나라 사신을 접견하기 위해 만든 문이었다.

독립협회가 주장한 '자주독립'은 분명 한계가 있었다. 러시아에 대한 독립의지는 확고했으나 일본이나 미국에 대해서 무척 관대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이권침탈에는 목소리를 높이며 반대했으나 일본의 이권 침탈에는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 독립문 독립문을 탐방하는 서울시티트레킹 참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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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해 드리지는 않겠다. 너무나 잘 아시는 곳이겠기에 굳이 필자가 따로 언급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대신 이 말은 하고 싶다.

"그들이 꿈꾸는 세상, 조국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쳤던 그들이 꿈꾸던 세상을, 현재 우리는 살고 있는가? 아베 총리의 우경화에 핏대 높여 반대를 하면서 식민지근대화론 같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가 끊임없는 나오는 나라를 그들은 꿈꾸었을까? '친일청산은 소련의 지령'이라고 공개적으로 언급한, 친일 매국노의 후손이 KBS 이사장을 맡는 현실을 그들은 꿈꾸었을까?"

 

 

 


 

 
▲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에 걸려 있는 대형태극기! 저곳에서 피를 흘리고 목숨을 잃었던 분들이 꿈꾸었던 세상을, 지금 우리는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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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

1. 서울시티트레킹 코스: 조계사(우정국) ▶ 위안부 소녀상(일본대사관 앞)▶ 광화문(경복궁) ▶사직단(북촌)

▶ 인왕산(서울성곽) ▶ 서대문 형무소 ▶ 독립문

2. 약 6km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탐방할 것들이 많아 3시간 이상 소요될 것으로 보임.

3. 시작점: 지하철 1호선 종각역에서 하차 한 후 조계사로 이동. / 종료점: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이용.

4. 이 코스는 지도상으로만 존재하는 곳이다. 따로 표식작업이 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길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계신다면 지도검색을 통해 해당 탐방지들을 찾아갈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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