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도 좌청룡과 우백호가 있다. 조선이 건국되고 한양으로 천도를 할 때 철저하게 풍수지리를 따져가며 도읍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먼저 서울의 우백호는 인왕산이다. 그럼 좌청룡은 어디일까? 이번에 소개하는 낙산이 바로 서울의 좌청룡이다.

낙산(駱山)은 산의 모양이 낙타의 등처럼 생겼다고 하여 낙타산 혹은 타락산으로도 불렸다. 낙산은 높이가 해발 125미터 정도로 산이라 불리기에는 턱없이 낮다. 실제로 한양도성을 두르고 있는 네 개의 산 중에서도 가장 낮다. 참고로 북악산은 342미터, 인왕산이 338미터, 남산이 270미터이다. 이 4개의 산은 서울 안쪽에 있다하여 내사산(內四山)이라고 부른다.

* 낙산 성곽길: 낙산공원에서부터 혜화문까지는 성 밖을 걷는다.

● 서울의 좌청룡 낙산

실제로 이렇게 키가 낮다보니 낙산은 좌청룡으로서의 역할을 못한다고 질책에 시달려야했다. 이에 비해 우백호인 인왕산은 거대한 암반면이 광범위하게 노출되어 있어 돌이 많은 골산(骨山)의 면모를 강하게 드러낸다. 낙산도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되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워낙에 체급 차이가 나다보니 우백호인 인왕산에게는 도전장조차 못 내미는 것이다.

그럼 왜 좌청룡의 역할이 중시됐을까? 현실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청룡을 굳이 끌어다가 멀쩡한 산에 이입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의미를 알려면 다시 풍수지리로 돌아가야 한다. 좌청룡은 남자, 장자를 뜻한다. 이에 비해 우백호는 여자, 차자를 뜻한다. 차자는 둘째나 셋째를 말한다.

다른 왕조국가들처럼 조선도 엄연히 장자 계승원칙이 있었다. 그러니 장자를 뜻하는 좌청룡이 튼실해야했던 것이다. 하지만 서울의 좌청룡은 우백호에게 게임이 되지 않았다. 용호상박은커녕 호랑이한테 냉큼 잡아먹히는 형상이다. 어쨌든 그 말대로 된 것인지는 모를 일이나 실제로 숙종이외에는 제대로 왕위를 이끈 장자 출신 왕이 전무했다.

좌청룡우백호니, 용호상박이니 판타지 같은 말들은 접어두고 낙산을 올라가보자. 우리는 말보다는 걷는 걸 더 잘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한양도성은 앞서 언급한 내사산을 두르고 있는데 그 길이가 18.6km에 달한다. 그런 한양도성을 걷는 것을 두고 순성놀이라고 부른다. 18.6km라면 걸을 만 하지 않은가. 트레킹 마니아라면 충분히 도전해볼만 하다. 옛 선조들은 짚신 신고도 잘 순성을 하셨다. 우리들이야 최신형 트레킹화를 신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순성을 잘 하려면 출발점이 중요한데 그 시작점을 많은 이들이 낙산 구간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낙산 성곽길에서 몸을 제대로 풀어주고 북악산 성곽길로 넘어가는 것이다. 키가 작은 것이 역설적으로 낙산의 강점이 되는 것이다.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에서 시작과 종료를 할 수 있으니 접근성도 무척이나 좋다.

 

 

* 낙산: 낙산공원에서 바라본 북한산의 모습.

● 시원한 풍광을 품은 낙산공원

본격적으로 낙산 성곽길을 걷다보면 오른쪽으로 깎아지는 절벽 위에 세워진 집들이 보일 것이다. 이곳은 창신동인데 예전에 채석장이 있던 자리였다. 창신동하면 전태일 열사가 떠오르면서 작은 봉제공장들이 연상된다. 그런 창신동에 채석장이 있었다는 걸 아는 이들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성저십리(城底十里)라 하여 도성밖 십리까지는 함부러 묘지를 쓰지도 못하게 했고, 돌도 캐내지 못하게 했다. 한양도성에 쌓여진 돌들은 해당 산에서 캐낸 것이 아니라 멀리 다른 산에서 가져온 것들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성저십리 원칙은 훼손된다. 시가지의 확장으로 많은 석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고 도심지와 가까이에 있는 낙산은 그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때 인왕산도 채석장이 들어서 훼손이 된다. 일제에 의해 좌청룡우백호가 동시에 아픔을 겪었던 것이다.

“와 정말 시원한 풍광이네요. 저 앞에 있는 산이 북한산 맞죠?”

“예 맞아요. 북한산 북쪽에서 남쪽까지 파노라마로 보고 있어요. 도대체 이런 풍광을 어디서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낙산 정상부인 낙산공원 전망대에 올라가면 꼭 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125미터라는 높이에 비해 품고 있는 풍광이 너무 아름답고 거대하다. 이런 점 때문에 많은 이들이 낙산공원을 좋아한다.

이제는 혜화문 방면으로 내려간다. 혜화문은 동소문인데 일제강점기에 철거됐다 1994년에 지금의 자리에 다시 만들어졌다. 낙산의 영역은 흥인지문과 혜화문 사이인 것이다.

* 낙산성곽: 낙산공원의 성곽. 여장의 구멍 3개가 보인다. 가운데 구멍은 근총안이고 양 옆에 구멍은 원총안이다. 근총안은 가까운 적을 공격할 때, 원총안은 원거리 적을 공격할 때 이용된다.

● 낙산 성곽길을 걸으며 성곽 공부를 한다

낙산공원 이전까지는 성곽의 안쪽을 걸었다면 혜화문까지는 성곽 밖을 걷게 된다. 그렇게 걷는다는 것은 한양도성 밖, 즉 4대문 밖으로 나왔다는 뜻이 된다. 그 이전까지는 여장(女墻)이라는 낮은 담장을 따라 걸으며 그 너머로 보이는 풍광을 감상할 수 있었다. 구멍이 3개가 뚫린 여장은 성가퀴라고도 불리는데 구체적인 전투행위가 벌어지는 곳이다.

 

“여장 꼭대기 부분의 명칭은 옥개석인데요, 요거를 넘어서 보려면 좀 불편하시죠?”

“네 까치발 들고 봐야 돼요. 왜 이렇게 만들었대요. 키 좀 낮추지.”

 

다 이유가 있다. 한양도성은 애초 방어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관광을 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병사들이 그곳에서 생사를 걸고 싸워야했기에 방어에 적합한 높이로 여장을 만든 것이다. 여장이 높으니 성 밖에서는 그곳에 군사가 얼마나 배치되어 있는지 확인을 할 수가 없었다.

이와 달리 바깥쪽은 커다란 장벽 같은 성체를 끼고 걷게 된다. 적군은 그 큰 장벽을 기어 올라가야 성을 함락시킬 수 있다. 이렇게 안쪽과 바깥쪽이 다른 축성 방식을 두고 편축법(片築法)이라고 칭한다. 편축법은 한마디로 한쪽만 쌓았다는 뜻인데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 특성에 적합한 축조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한쪽만 쌓으니 돈도 덜 들고, 공기도 단축된다. 얼마나 좋은가. 또한 편축법은 지형과 합치되는 방식이기에 성체가 자연의 일부로 녹아든 형상을 보인다.

 

그럼 평지에서는 어떤 식으로 성을 축조할까. 협축법(夾築法)이란 방식으로 쌓는다. 협축법은 성벽의 안팎에서 성체를 올려쌓는 것을 말한다. 유럽의 성들이 많이 사용하는 방식이다. 편축법이 바깥쪽만 낭떠러지라면 협축법으로 쌓여진 성들은 안쪽과 바깥쪽 모두 다 낭떠러지다.

사진에 등장하는 아빌라성은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서북쪽으로 약 1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다. 이 아빌라성은 중세에 건립됐음에도 보존 상태가 좋아 198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사진에서 보듯 아빌라성은 협축법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예전에 찍은 스페인 역사 기행 사진을 여기서 써먹는다.

한양도성은 크게 세종, 숙종, 순조까지 세 시기에 걸쳐 성을 고쳐 쌓았다. 시간이 갈수록 성돌 낱낱의 크기는 커졌고, 다듬질의 강도는 정교해졌다. 낙산 성곽길을 걸을 때 놓치지 말고 관찰해보면 좋다. 이렇듯 낙산 성곽길 구간을 걷다보면 자연스럽게 성곽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된다. 이거야 말로 교과서 밖으로 나온 살아있는 역사 공부다.

*아빌라(Avilla)성: 협축법으로 축조된 아빌라성. 저 좁은 협로에서 병사들이 전투를 한다. 사진 왼쪽과 정면에 보이는 건물은 아빌라 대성당이다.

* 아빌라성: 성 안쪽에서 바라본 모습. 협축법으로 축조가 됐으니 성 안쪽과 바깥쪽 모두 낭떠러지다. 그나저나 정원 참 예쁘다.

* 낙산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 낙산 성곽길

1. 코스: 흥인지문 ▶ 낙산공원 ▶ 성곽길 ▶ 혜화문

2. 가는법: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에서 하차한 바로 흥인지문을 탐방할 수 있음. 이후 혜화문에서는 4호선 한성대역으로 이동할 수 있음.

3. 같이 가면 좋을 곳: 심우장(만해 한용운 선생 집), 수연산방(수필가 이태준의 집. 지금은 전통찻집으로 변모함)

 

 

 

 




이름을 떨치고 싶었다. 말이 좋아 역사트레킹 마스터지 필자의 삶은 백수의 고급버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프리랜서, 그것이 딱 필자의 자화상이었다. 그렇게 이도저도 아닌 삶을 살고 있다 보니 엉뚱하게도 이름 떨치기에 대한 욕구가 커져갔다.


변변치 않은 벌이와는 별개로 트레킹 바닥은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시즌과 비시즌이 확 갈린다는 것이다. 봄과 가을에는 신발밑창이 닳도록 열심히 움직이지만 여름과 겨울에는 멍하니 하늘을 보는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노을트레킹을 겨울에는 눈꽃트레킹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도 딱 거기까지다. 더군다나 필자가 추구하는 트레킹은 대중트레킹이다. 어두운 밤에 멧돼지를 만나거나 동장군에 맞서면서까지 트레킹을 하기가 쉽지 않다. 수강생들도 안 온다.


만약 필자의 이름값이 꽤 나간다면 비시즌에도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지는 않을 것이다. 열심히 원고 작성을 하거나 마이크를 잡고 실내 강의를 하고 있겠지. 하지만 현실은 동장군이 얼어 죽을 정도로 냉혹하다. 필자의 통장은 비시즌이 되면 싸늘함 그 자체가 된다.


불혹이 넘은 나이에도 불안정한 삶을 살고 있다 보니 이름에 대한 집착을 갖게 된 거 같다. 네임밸류가 있었으면 적어도 현재와 같은 불안한 삶을 살지는 않았을 텐데. 호랑이가 가죽을 남기듯 내 이름 석 자를 남길 수 있을까?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아무 의미 없이 그냥 살다가 가는 건가?


허명(虛名)이라도 갖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답답한 현실에 대한 유일한 탈출구이자 판타지였다






* 인왕산: 서울의 우백호 인왕산. 낙산공원에서 촬영했다. 





낙산은 서울의 좌청룡

 

1편 인왕산 역사트레킹에서 언급했던 내용을 다시 복기해본다. 좌청룡·우백호에 대한 이야기이다.


서울에도 좌청룡과 우백호가 있다. 조선의 도읍지였던 한양이 풍수지리에 의거해 기획된 도시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동쪽-청룡’, ‘서쪽-백호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남쪽-주작’, ‘북쪽-현무도 빼놓을 수 없다.


일단 우백호는 어디일까? 인왕산이다. 경복궁 옆쪽에 우뚝 서 있는 인왕산이 서울의 우백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럼 좌청룡은 어디일까? 낙산이다. 혜화동 뒤편에 나지막하게 서 있는 낙산이 바로 서울의 좌청룡인 것이다. 이화동 벽화마을, 낙산공원을 품고 있는 산이 바로 그 낙산이다.


낙산(駱駝)은 높이가 약 125미터로 키가 작은데 산의 형세가 낙타 등처럼 보인다하여 낙산 또는 낙타산이라고 불린다. 낙산은 인왕산과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낙산은 좌청룡이기에 우백호인 인왕산과는 필연적으로 용호상박을 해야 하는 팔자다. 청룡과 백호의 피할 수 없는 한 판 승부! 당신은 어디에다 베팅을 할 것인가?

 

- 세상을 뒤흔들 세기의 맞대결! 메가톤급 강펀치가 천지를 진동한다. 세상의 모든 이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청룡과 백호의 물러설 수 없는 한 판! 그 세기의 대결에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절대 놓치지 마십시오. 마감 임박~!

 

하지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는 법이다. 저렇게 프로모션을 띄운다고 해도 결과

는 뻔하다. 세기의 대결치고 진짜 세기의 대결이 펼쳐진 거 본 적 있는가?  






* 낙산성곽길





우백호의 위세에 눌린 좌청룡

 

결론적으로 말해 서울의 청룡은 백호에게 게임이 안 된다. 체급부터가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낙산은 해발고도가 125미터로 338미터인 인왕산에 비해 키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낙산(), 인왕산(), 남산(), 북악산()을 묶어 내사산으로 칭하는데 그 내사산 중에서 낙산이 가장 작다. 참고로 북악산은 342미터이고, 남산은 270미터이다.


해발고도가 낮으니 낙산은 산세도 그리 웅장하지 못하다. 이에 비해 인왕산은 민낯을 드러낸 것처럼 돌출된 암반면이 소나무들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300미터급 산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을 뽐내고 있다.


그렇게 우백호보다 기량이 딸리는 좌청룡이었기에 그것을 보완해야 했다. 동쪽에 있는 좌청룡은 남자, 장자를 뜻했다. 이에 비해 서쪽에 있는 우백호는 여자, 차자 등을 뜻했다. 적장자 중심의 왕위계승을 중시했던 조선이었기에 좌청룡에 대한 보완은 분명히 필요했던 것이다


이에 무학대사는 인왕산 아래에 궁궐을 짓자고 역설한다. 그리고는 궁궐의 방향을 동쪽인 낙산으로 향하게 하자는 주장을 펼친다. 이것이 인왕산 주산론이다. 하지만 당시의 실권자였던 정도전 세력들은 인왕산 주산론을 반대한다


궁궐의 방향을 서쪽으로 둘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정도전을 위시한 유교세력들의 주장이 힘을 얻었고 법궁이었던 경복궁이 북악산 아래에 들어서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북악산 주산론이다






* 성북동: 성북동 성곽길은 낙산이 아닌 백악산(북악산)에 속한다. 낙산 역사트레킹

은 낙산을 다 걸은 후 성북동에서 종료한다. 



   


200년 후를 내다본 무학대사?

 

이렇게 자신의 주장이 꺾인 무학대사는 이런 말을 남기며 탄식했다고 한다.

 

“200년 뒤 경복궁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너희들이 알겠느냐!”

 

여기서 다시 한 번 1, 인왕산 역사트레킹에서 언급한 내용을 재론해보겠다. 1

에서는 기도빨이 잘 받는 인왕산 선바위가 정도전을 위시한 유교 세력에 의해 

도성 밖으로 밀려났다는 것을 기술했었다. 그리고 이번 편에서는 인왕산 주산론

이 탈락되고, 북악산 주산론이 채택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렇듯 무학대사를 

위시한 불교세력들은 유교세력들에 의해 번번이 자신의 의사가 꺾이고 만다. 불교

세력들은 탄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말 무학대사가 200년 후를 내다보며 저런 이야기를 했을까? 무학대사가 

노스트라다무스도 아닌데... 불교세력이 밀려난 후, 200년 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를 했을 때가 1394년이었으니, 200년 후는 

1590년대였다. 그 즈음에 누구나 다 아는 전쟁이 일어났다. 그렇다. 임진왜란이라 

불리는 조일전쟁이 1592년에 벌어진 것이다.


정말 무학대사는 200년 후를 내다보며 저런 예언을 했던 것일까? 1편에서도 언급했

듯이 불교 VS 유교간의 갈등은 공식적인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무학대

사의 예언은 개국 초기가 아닌 조일전쟁 이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당시의

민초들은 지배층이었던 사대부들에게 전란의 책임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


도성을 버리고, 백성도 버린 지배층에 대해서 힐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책임을 묻는 자리에 무학대사를 등판시킨 것이다. 자신들의 울분과 설움을 무학대사

에게 투영하여 당시 지배층인 사대부들을 꾸짖고 있었던 것이다





* 이화동 벽화마을






동인의 핵심 김효원이 살았던 낙산

 

낙산은 야트막한 산세 때문에 산책로로 많이 이용되었다. 또한 숲길이 우거져 있어 낙산 인근에는 별장들이 많았다. 인조의 셋째 아들이었던 인평대군이 지은 석양루(夕陽樓)를 비롯하여 18세기에 활약했던 문인 이심원이 지은 일옹정(一翁亭) 등 많은 별채들이 있었다.


명사들도 많이 살았다. 태종의 외손이었던 남이 장군, 우암 송시열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 동서분당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던 김효원도 낙산 기슭에서 살았다. 김효원의 집이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동인이라고 불렀다. 이에 비해 서인의 거두 심의겸의 집은 지금의 덕수궁 근처라 한양의 서쪽에 있었다. 그래서 심의겸을 따르는 이들을 서인이라고 불렀다.


일설에 의하면 단종비 정순왕후(定順王后)도 낙산에 은거해 살았다고 한다. 단종이 강원도 영월 땅으로 유배를 떠나고 난 후, 폐서인이 된 정순왕후는 이 산 아래에 있는 청룡사의 승려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임을 떠나보냈던 정순왕후는 이 산 동쪽에 있는 동망봉에 올라 매일같이 치성을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렇듯 낙산은 누군가에게는 한이 서린 기원의 장소이기도 했다






* 혜화문: 원래는 사진 아래에 있는 도로에 위치해 있었다. 1928년 도로 확장에 

따라 문이 헐리게 됐다. 이후 1994년에 현재의 위치로 복원된다.  







낙산 성곽길에서 성돌 모양 맞추기

 

이렇게 낙산에 대한 연혁들을 나열해봤다. 하지만 낙산 역사트레킹의 백미는 역시 성곽길을 걷는 것이다. 낙산 성곽길에서는 축성 시기에 따른 다양한 성돌 모양을 직접 관찰할 수가 있다. 한양도성은 축성 시기에 따라 크게 4시기로 나눌 수가 있다.

 

1. 태조시기. 이때는 토성(土城)과 석성(石城)이 혼합된 형태로 축성됐음.

2. 세종시기.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함.

3. 숙종시기. 종전보다 더 큰 성돌로 축성함.

4. 순조이후시기. 더 큰 성돌로 축성함.

 

낙산 성곽길에서는 세종시기부터 순조 이후까지, 즉 조선 전기부터 후기까지 성돌의 변천사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성돌의 변화상을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그런데 처음 봐서는 잘 구분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필자도 그랬다. 주변머리가 없어서 그랬는지 성돌 구분이 처음부터 확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는 나름대로의 구별법을 써봤다.

 

1. 세종시기 -> 옥수수돌

2. 숙종시기 -> 두붓돌

3. 순조이후시기 -> 주사위돌

 

*정리: 시간이 흐를수록 성돌은 점점 더 커져갔고, 규격화됐다. 후기로 갈수록 치석(治石)의 강도가 세지고, 돌의 크기도 더 커지는데 순조 시기에는 큰 주사위돌 같은 형태가 나타난다. 여기서의 치석은 치과에서 말하는 치석이 아니라 돌을 다듬는 것을 말한다. 태조 시기의 돌들은 자연석을 옮겨놓는 수준이라 표면이 매우 거칠었다. 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치석이 강화되니 표면이 매끈한 성돌이 성체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 성돌의 시기별 모양





낙산 정상에 올라서면 속이 다 시원해진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낙산은 서울의 안쪽을 감싸고 있는 내사산 중에 가장 키가 작다. 그래서인지 한양도성 낙산 구간은 인왕산이나 북악산 구간보다 훨씬 더 걷기 편하다. 인왕산이나 북악산 구간에는 급경사 구간이 있지만 이에 비해 낙산 구간은 시종일관 완만한 경사를 유지하고 있다. 선조들에게는 왜소한 좌청룡이라고 놀림을 받았지만 역설적으로 성곽길을 탐방하는 여행객들에게는 찬사를 받는 것이다.


또한 접근성도 상당히 좋다. 전철역에서 바로 성곽길 트레킹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에서 하차한 후 흥인지문(동대문)을 둘러본 후 성곽길을 따라 트레킹을 할 수 있는 것이 낙산트레킹의 큰 장점 중에 하나다.


그렇게 성곽길을 타고 올라가다보면 이화동 벽화마을도 만날 수 있다. 벽화마을을 탐방한 후 언덕길을 올라가면 낙산 정상부인 낙산공원에 다다르게 된다. 이 곳에 올라서면 속이 다 시원해질 정도로 멋진 풍광을 만날 수 있다


눈앞에 북한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기 때문이다. 백운대·인수봉·만경대 등의 동북쪽 봉우리들뿐만 아니라 보현봉이나 형제봉 같은 남쪽의 봉우리들까지도 한 눈에 다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 장면을 보면서 필자는 항상 이런 멘트를 했었다.

 

저 북한산 좀 보세요. 위쪽으로는 살짝 도봉산까지 보이죠? 북한산을 한 눈에 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서 바라보려면 이 낙산만큼 좋은 곳도 없습니다. 낙산이 키가 작아도 이렇게 참 실하지 않습니까?”

 

성곽길 낙산 구간이 끝날 무렵에는 동소문이라고 불리는 혜화문을 만나게 된다. 혜화문은 일제에 의해 철거됐다, 199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져 복원됐다. 낙산 역사트레킹은 북악산 성곽길도 걷는다. 그렇게 성북동 인근 북악산 구간을 걷다 와룡공원을 지나게 된다. 이후 트레킹은 만해 한용운 선생의 생가인 심우장에서 종료하게 된다






* 북한산: 낙산공원에서 바라본 북한산.




 작자미상

 

서울은 인구 천 만 명이 사는 메트로폴리탄이다. 그런 거대 도시에 축조된 지 600년도 더 넘는 거대한 성곽이 잘 버티고 서 있다는 게 참 대견스럽다. 서울의 내사산을 따라서 만들어진 한양도성. 마치 순리를 따르듯 자연지형에 녹아든 한양도성의 모습이 서울 메트로폴리탄을 더 돋보이게 한다.


그런 한양도성을 보면서 꼭 잊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 있다. 무엇을? 이름 모를 백성들의 피와 땀이다. 역군으로 징발된 그들에게 성곽축조는 중노동 중에 상중노동이었다. 그 추운 계절에 동원된 그들에게 나라에서는 아무런 반대급부도 지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먹을 식량까지 각자 알아서 준비해야 했다. 농한기라도 힘없는 백성들은 느긋하게 쉴 수가 없었다.


죽기는 또 얼마나 많이 죽었겠는가. 그렇게 이름 모를 민초들이 피와 눈물을 흘려가며 한땀한땀 성돌을 올린 것이 지금의 한양도성이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 석 자는 어디에도 기재되지 않았다. 공사를 지휘하던 관리들은 그나마 각자성석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지만 민초들의 이름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팔이 빠져라 성돌을 나르고 쌓았던 수많은 김개똥, 최돌쇠 등등... 부르튼 그들의 손을 누가 제대로 기억이라도 해줬을까?

 

이렇게 좀 씁쓸한 생각이 이어졌다. 결말을 지어야하는데 좀 우울한 면을 너무 부각한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생각해봤다. 아무래도 결말은 해피엔딩으로 하는게 낫지 않나.


이름 모를 민초들은 성곽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에 성곽이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연과 어우러진 한양도성이라는 예술작품을 그들이 공동으로 제작한 것이다. 김개똥도 최돌쇠도 공동으로 제작한 것이다. 대신 문서상으로는 그들의 이름이 기재되지 않았다. 작자미상이다. 물론 발주처는 명확하다. 조선 조정.


글을 마무리하려고 할 때 이런 생각이 밀려왔다.

 

굳이 이름을 남겨야 돼?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작자미상이 있는데... 그냥 

민폐 안 끼치고 좋아하는 역사트레킹하면서 사는 것도 복 받은 일이잖아!’   







* 이름남기기: 순종 이후 시기에 쌓여진 성돌에 필자의 방식대로 민초들의 이름을 

남겨보았다. 하는 김에 필자도 이름도 슬쩍 끼어넣었다. 얄밉게 숟가락을 올리는 형식

이라 뒤가 캥기지만... 이런 식으로 필자의 이름을 남겨본다. 혼자 북치고 장구친다고

욕을 먹더라도 상관없다. 소원성취를 한 것이다. 이름을 남겼으니까...








 낙산 역사트레킹  

   

1. 코스: 흥인지문 ▶ 이화동벽화마을 ▶ 낙산공원 ▶ 혜화문 ▶ 와룡공원 

2. 이동거리: 약 7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하

5. In: 지하철1,4호선 동대문역 / Out: 와룡공원(성북동)






* 낙산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서울 낙산에 올라서면 속이 다 시원해진다!


서울의 좌청룡을 걷다, 낙산 역사트레킹


17.03.29 14:01 최종 업데이트 17.03.29 14:01
 
곽동운(artpunk)             


    

      

▲ 낙산역사트레킹 성북동 부근을 촬영했다. 성북은 성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는 뜻이다. 엄밀히 말해 이곳은 한양도성 북악산 구간이다. 하지만 낙산역사트레킹에서는 이 구간을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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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이야기지만 서울에도 좌청룡·우백호가 있다. 조선의 도읍지였던 한양이 풍수지리에 의거해 기획된 도시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좌청룡·우백호가 있고, 남쪽에는 주작, 북쪽에는 현무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일단 우백호는 어디일까? 인왕산이다. 경복궁 옆쪽에 우뚝 서 있는 인왕산이 서울의 우백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럼 좌청룡은 어디일까? 낙산이다. 혜화동 뒤편에 나지막하게 서 있는 낙산이 바로 서울의 좌청룡인 것이다.



        



▲ 낙산성곽길 흥인지문 옆 쪽에 복원된 성곽길. 흥인지문 옆쪽 구간은 2015년도에 복원됐다. 예전에는 그 자리에 이화여대동대문병원이 들어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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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백호의 위세에 눌린 좌청룡

낙산(駱駝)은 높이가 약 125미터로 키가 작은데 산의 형세가 낙타 등처럼 보인다 하여 낙산 또은 낙타산이라고 불린다. 낙산은 인왕산과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낙산은 좌청룡이기에 우백호인 인왕산과는 필연적으로 '용호상박'을 해야 하는 팔자다. 청룡과 백호의 피할 수 없는 한 판!

'세상을 뒤흔들 세기의 맞대결! 메가톤급 강펀치가 천지를 진동한다. 세상의 모든 이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청룡과 백호의 물러설 수 없는 한 판! 그 세기의 대결에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절대 놓치지 마십시오. 마감 임박~'

하지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는 법이다. 저렇게 프로모션을 띄운다고 해도 결과는 뻔하다. 세기의 대결치고 진짜 '세기의 대결'이 펼쳐진 거 본 적 있는가?

결론적으로 말해 서울의 청룡은 백호에게 게임이 안 된다. 체급부터가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낙산은 해발고도가 125미터로 338미터인 인왕산에 비해 키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낙산(동), 인왕산(서), 남산(남), 북악산(북)을 묶어 내사산으로 칭하는데 그 내사산 중에서 낙산이 가장 작다. 참고로 북악산은 342미터이고, 남산은 270미터이다.

해발고도가 낮으니 낙산은 산세도 그리 웅장하지 못하다. 이에 비해 인왕산은 민낯을 드러낸 것처럼 돌출된 암반면이 소나무들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300미터급 산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을 뽐내고 있다. 



        

▲ 성곽길 성벽과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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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우백호보다 기량이 딸리는 좌청룡이었기에 그것을 보완해야 했다. 동쪽에 있는 좌청룡은 남자, 장자를 뜻했다. 이에 비해 서쪽에 있는 우백호는 여자, 차자 등을 뜻했다. 적장자 중심의 왕위계승을 중시했던 조선이었기에 좌청룡에 대한 보완은 분명히 필요했던 것이다.

이에 무학대사는 인왕산 아래에 궁궐을 짓자고 역설한다. 그리고는 궁궐의 방향을 동쪽인 낙산으로 향하게 하자는 주장을 펼친다. 이것이 인왕산 주산론이다. 하지만 당시의 실권자였던 정도전 세력들은 인왕산 주산론을 반대한다. 궁궐의 방향을 서쪽으로 둘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렇게 자신의 주장이 꺾인 무학대사는 이런 말을 남기며 탄식했다고 한다.

"200년 뒤 경복궁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너희들이 알겠느냐!"

200년 뒤에 조일전쟁(임진왜란)이 일어났고, 경복궁은 잿더미로 변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정말 무학대사의 예언이 맞았던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 필자는 역사트레킹 참가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무학대사 말대로 인왕산 아래에 경복궁이 들어서면 조일전쟁이 발발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경복궁이 불타지 않았을까요? 풍수지리는 우리민족 정신에 많은 영향을 끼친 사상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너무 경도되지는 말자고요. 조상묘를 잘 쓰는 것보다 자신의 의지가 중요한 게 아닐까요? 조상묘 아무리 잘 써도 자기가 노력을 안 하면 말짱 도루묵이잖아요!" 



▲ 성벽 모자이크처럼 올려진 성벽돌. 각 시기마다 축조된 성벽돌이 달라 모자이크 같은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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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의 핵심 김효원이 살았던 낙산

낙산은 야트막한 산세 때문에 산책로로 많이 이용되었다. 또한 숲길이 우거져 있어 낙산 인근에는 별장들이 많았다. 인조의 셋째 아들이었던 인평대군이 지은 석양루(夕陽樓)를 비롯하여 18세기에 활약했던 문인 이심원이 지은 일옹정(一翁亭) 등 많은 별채들이 있었다.

명사들도 많이 살았다. 태종의 외손이었던 남이 장군, 우암 송시열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 동서분당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던 김효원도 낙산 기슭에서 살았다. 김효원의 집이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동인이라고 불렀다. 이에 비해 서인의 거두 심의겸의 집은 지금의 덕수궁 근처라 한양의 서쪽에 있었다. 그래서 심의겸을 따르는 이들을 서인이라고 불렀다. 

일설에 의하면 단종비 정순왕후(定順王后)도 낙산에 은거해 살았다고 한다. 단종이 강원도 영월 땅으로 유배를 떠나고 난 후, 폐서인이 된 정순왕후는 이 산 아래에 있는 청룡사의 승려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임을 떠나보냈던 정순왕후는 이 산 동쪽에 있는 동망봉에 올라 매일같이 치성을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 벽화 이화동 벽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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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 정상에 올라서면 속이 다 시원해진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낙산은 서울의 안쪽을 감싸고 있는 내사산 중에 가장 키가 작다. 그래서인지 한양도성 낙산 구간은 인왕산이나 북악산 구간보다 훨씬 더 걷기 편하다. 인왕산이나 북악산 구간에는 간간이 급경사 구간이 있지만 이에 비해 낙산 구간은 시종일관 완만한 경사를 유지하고 있다. 선조들에게는 왜소한 좌청룡이라고 놀림을 받았지만 역설적으로 성곽길을 탐방하는 여행객들에게는 찬사를 받는 것이다.

또한 접근성도 상당히 좋다. 전철역에서 바로 성곽길 트레킹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에서 하차한 후 흥인지문(동대문)을 둘러본 후 성곽길을 따라 트레킹을 할 수 있는 것이 낙산트레킹의 큰 장점 중에 하나다.

그렇게 성곽길을 타고 올라가다보면 이화동 벽화마을도 만날 수 있다. 벽화마을을 탐방한 후 언덕길을 올라가면 낙산 정상부인 낙산공원에 다다르게 된다. 이 곳에 올라 서면 속이 다 시원해질 정도로 멋진 풍광을 만날 수 있다. 무언가 꽉 막혀 있던 것들이 확 씻겨 내려가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 낙산 성곽길 한양도성 낙산구간은 경사가 완만하여 걷기가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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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한양도성이 어떤 방식으로 내사산을 연결하여 축조되었는지 찬찬히 따져 볼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 손에 다 잡힐 듯 북한산이 아주 가깝게 펼쳐져 있다. 백운대·인수봉·만경대 등의 동북쪽 봉우리들뿐만 아니라 보현봉이나 형제봉 같은 남쪽의 봉우리들까지도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참가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저 북한산 좀 보세요. 위쪽으로는 살짝 도봉산까지 보이죠? 북한산을 한 눈에 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서 바라보려면 이 낙산만큼 좋은 곳도 없습니다. 낙산이 키가 작아도 이렇게 참 실하지 않습니까?"

성곽길 낙산 구간이 끝날 무렵에는 동소문이라고 불리는 혜화문을 만나게 된다. 혜화문은 일제에 의해 철거됐다, 199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져 복원됐다.

낙산 역사트레킹은 북악산 성곽길도 걷는다. 그렇게 성북동 인근 북악산 구간을 걷다 와룡공원을 지나고, 북촌의 위쪽에 자리 잡은 삼청공원에서 종료하게 된다.

이제 완연한 봄이다. 떠나기 좋은 계절이 왔다. 하지만 미세먼지니 황사니 하는 것들이 신경 쓰인다. 그렇다고 우리가 안 떠날 줄 알고! 떠날 사람은 다 떠난다. 그렇다. 이번 주말 서울의 좌청룡인 낙산으로 떠나보자. 맛있는 도시락을 준비해서 낙산 공원에도 올라보고, 걷기 편한 성곽길도 걸어보자. 시원하게 펼쳐진 북한산을 바라보며 인증샷도 찍어보는 것이다. 그렇게 신나게 낙산으로 봄소풍을 떠나보는 것이다.




▲ 혜화문 사진 중앙부 상단에 있는 헤화문. 일제에 의해 철거된 후 1994년에 복원됐다. 원래는 사진 하단에 보이는 도로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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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곽: 성곽면이 잘려 있다. 도심지의 확장 및 사유지의 확장으로 인해 한양도성 평지 구간은 훼손이 심한 구간이 있다.





◆ 트레킹 참고 사항


1. 교통편: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 6번 출구 하차
2. 세부코스: 흥인지문 ▶ 이화동벽화마을 ▶ 낙산공원 ▶ 혜화문 ▶ 와룡공원 ▶ 삼청공원(북촌)
3. 이동거리: 약 8km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cafe.naver.com/trekkingmaster













* 낙산 성곽길: 한양도성 낙산 구간은 걷기 좋은 길로 유명하다.  






* 성곽: 모자이크처럼 올려진 성벽돌. 각 시기마다 축조된 성벽돌이 달라 모자이크 같은 느낌을 준다.  






* 성북동: 성북동에 있는 와룡공원 부근에서 한성대역 방면으로 사진을 찍었다.






* 동대문 부근: 동대문 부근에서 성곽길을 찍어봤다. 동대문 부근 성벽은 2015년에 복원됐다.  






* 벽화: 낙산의 아랫동네가 바로 이화동이다. 그 유명한 이화동 벽화마을이 있는 이화동. 






* 성북동: 성벽 넘어에 있는 성북동을 찍어 봤다. 성벽 넘어에 있다고 성북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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