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도 이런 대형석불이? 외국 안 가도 되겠네 1편

고려 전기시대 대형석불 테마 탐방... 가을 여행지로 여기 어떠세요?

 

14.09.30 15:51    최종 업데이트 14.09.30 15:51

 

 

 

 

 

천고마비의 계절인 가을. 산이나 들, 어디로든 떠나기 좋은 계절이다. 이제 곧 단풍철도 다가오지 않는가!

기왕 떠나는 여행, 테마를 가지고 떠나면 어떨까? 발 가는대로 떠나는 좌충우돌식의 여행도 좋지만 주제를 잡고 여행을 떠나보는 것이다. 산성(山城)기행, 폐사지 답사기행, 천주교 성지순례 등등... 이런 것들이 테마 여행이다.

이렇게 테마를 중심에 놓고 여행을 하다 보면 학습과 여행이 유기적으로 작동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산성 기행인 경우 '행주산성 → 서울성곽 → 공산성' 등으로 여행 일정을 계획 할 수 있다. 각 산성들을 탐방, 관찰한 후 서로 공통점과 차이점을 등을 살펴보는 것이다.

필자가 제안하는 테마 여행은 거대석불 탐방이다. 고려 전기시대에 집중적으로 제작된 거대한 석불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한때 필자는 거대한 석불들을 찾아다니며 '복'을 기원한 적이 있었다. 그때 복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최소한 거대한 석불 앞에 섰을 때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바미안 석불에는 못 미치지만 그런 거대한 석불이 내 눈 앞에 떡하니 서 있으니 얼마나 든든하던지! 그래서 복스러운 함박웃음을 지었던 것이다.

한편 바미안 석불은 탈레반이 파괴해 지금은 흉물처럼 서 있지 않던가! 하지만 우리의 석불들은 천년의 세월을 꿋꿋이 견뎌내며 거리의 수호신처럼 서 있었다. 듬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돌미륵을 찾아 여행을 떠났었다.  

 

 

 


  


 
▲ 용미리마애이불입상 쌍미륵석불이라고도 불린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쌍둥 석불 형식이다. 왼쪽에 원립불을 쓰고 있는 상은 손에 연꽃을 들었는데 남성을 뜻한다. 오른쪽 방립불을 쓰고, 손을 합장한 상은 여성을 상징한다. 원립불은 말그대로 둥근 모자 형태이고, 방립모는 그에 비해 각이 진 모자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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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이 쌍으로 들어오려나? 파주 용미리 쌍둥이 석불

 

 

먼저 소개할 석불은 파주시 광탄면에 있는 용미리 쌍둥이 석불이다. 용미리, 용암사에 위치한 이 쌍둥이 석불의 공식명칭(문화재청)은 용미리마애이불입상이다. 이 석불은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어 대중교통으로도 편리하게 닿을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서울에서 용미리로 가기 위해서는 혜음령이라는 고개를 넘어야 한다. 혜음령은 조선시대 한양에서 개성으로 넘어갈 때 거쳐야 했던 중요한 고개다. 그래서 혜음령 근처에는 벽제관이라는 역관(驛館)이 있었다. 그렇다. 용미리 일대는 한양에서 개성을 거쳐 평양, 의주로 향했던 의주대로가 있던 곳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곳을 내왕했고, 쌍미륵에게 복을 기원했던 것이다.

장지산 기슭에 자리 잡은 용미리 쌍미륵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제작되었다. 자연석을 몸통으로 삼아 조각을 새기고, 얼굴 부위는 따로 제작해 올렸다. 쌍미륵도 고려 전기시대의 다른 석불들처럼 인체 비례가 일치하지 않는다.

용미리 석불입상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남여 쌍미륵 형상이라 '다산(多産)'과 관련된 기원들을 많이 하러 온다고 한다. 즉,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부부들이 많이 와서 기원을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쌍미륵과 관련된 설화도 '잉태'와 관련이 있다.

그 전설로 들어가 보자. 고려 선종 때였다. 선종은 자식이 없어 원산궁주를 후궁으로 맞이했다. 하지만 원산궁주도 쉽게 잉태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날 궁주가 이상한 꿈을 꾼다.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이다.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

 


이런 내용의 꿈이었다. 꿈 이야기를 전해들은 선종은 장지산으로 사람을 보냈다. 그런데 궁주의 꿈처럼,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왕은 그 바위에다 미륵불을 조각하고, 그 옆쪽에 사찰을 세워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그런 정성이 전해졌는지 그해에 왕자인 한산후가 탄생했다고 한다.

고려 선종은 13대왕으로 1083년부터 1094년까지 왕위에 올랐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용미리석불입상도 고려 전기 때 제작된 것임이 유력해진다.

쌍미륵 앞에서 복을 기원하면 복이 두 배로 들어올까? 확실한 건 모르겠지만 쌍미륵 앞에 서면 함박웃음이 두 배로 지어질 것이다. 그렇게 웃다보면 복은 자연스럽게 들어올지 모른다. 



 
▲ 은진미륵 고려전기시대 제작된 대형 석불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관촉사 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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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대 석불 '관촉사 은진미륵'

 

 

이제 거대 석불을 찾아 충남 지역으로 가보자. 다음으로 탐방할 곳은 충남 논산에 있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다. 관촉사 석불은 관촉사 경내에 자리 잡고 있다. 관촉사는 반야산이라는 야트막한 산 중턱에 위치해 있는데 그곳에 올라서면 가까이는 계백장군 혼이 살아있는 황산벌이 보이고, 멀리는 계룡산과 대둔산이 보인다.


그렇게 전망이 좋은 곳에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굽어보고 있던 것이다. 한편 관촉사 석불은 은진미륵이라고도 불린다. 원래 그 지역의 명칭이 '은진'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보물 제218호인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은 높이가 18m가 넘는 우리나라 최대의 석불이다. 크기가 크기인지라 제작하는 데 무려 36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최대이고 긴 세월 동안 제작된 터라, 관촉사 석불에도 흥미로운 설화가 스며 있었다. 어느 날 반야산에 큰 바위가 불쑥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에 고려 조정은 그 바위로 불상을 만들 것을 결정하고 당대 최고 고승이던 혜명 스님에게 그 일을 맡겼다. 고려 광종 19년(968)에 시작된 석불 건립은 목종 9년(1006)에 가서야 완성됐다. 석불 제작은 다리, 몸통, 머리 세 부분으로 나뉘어서 제작이 됐는데 각 부분이 다 완성된 후 큰 문제가 발생했다. 각 부분들이 엄청나게 크고 무거운 터라 인력으로는 도저히 석불을 세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혜명 스님의 고민은 깊어 갔다. 그러던 차에 스님은 아이들이 진흙 불상 놀이를 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거기서 힌트를 얻어 석불을 세웠다고 한다. 아이들도 다리, 몸통, 머리를 따로따로 제작하여 불상을 만들었는데 나중에 그것을 독특한 방법으로 합체를 했던 것이다. 먼저 다리를 세우고 그 주위를 모래로 채우고는 물을 뿌려 주위를 단단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 뒤 비탈을 만들어 몸통을 굴려서 올렸다.

그렇게 모래비탈을 이용해서 진흙 석불을 장난감 로봇 만들 듯 3단으로 합체했다는 것이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모방했고, 결국 18m가 넘는 엄청난 규모의 석불이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이렇듯 은진 미륵불은 제작시기와 제작자가 명확한 석불이다.

관촉사 석불도 고려 전기시대 작품답게(?) 인체 비례가 맞지 않는다. 대신 신체 부위를 시원시원하게 표현하였다. 머리, 손, 발 등이 아주 굵직하게 표현되었다. 인체비율을 중시했던 석불들이 정교한 디테일을 강조했다면, 은진미륵은 선이 굵은 디테일로 표현됐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손가락, 발가락까지 시원시원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그런지, 관촉사 석불을 보고 있노라면 친근감이 밀려온다. 거대 석상에 압도된다기 보다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관촉사 일대도 예전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었다. 옛 삼남대로가 이곳을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은진미륵은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 서 있었다. 액운을 막아주고 마을의 안녕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 관촉사 은진미륵

 

 

 

* 관촉사 은진미륵

 

 

 

 

 

* 대조사 석불

 

 

 

* 대조사 석불

 

 

 

 

 

 

* 안동 이천동 석불

 

 

 

* 안동 이천동 석불

 

 

 

 

 

 

 

* 파주 용미리 쌍미륵

 

* 파주 용미리 쌍미륵

 

 

 

 

 

 

어느덧 1주년이 됐습니다. 사진에 있는 관촉사 은진미륵불에 삼 배를 올릴 때가 벌써 1년 가까이 됐네요.

그렇게 절을 올리며 다짐을 했었죠. 역사트레킹을 하겠다고... 아웃도어를 하돼, 무언가 지적으로도 채울 수 있는

트레킹을 하겠다고... 그렇게 하여 역사트레킹 카페를 개설했고 벌써 1년이 흘렀습니다. 작년 4월 22일의 일입니다.

 

냉정히 말해 우리카페는 아직 걸음마도 못 뗐습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흔히들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고 하지요. 우리 역사트레킹 카페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그러러면 카페지기인 제가 더 열심히 달려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솔직히 카페지기가 임무에 너무 소홀히 했네요. 4월 22일이 카페 1주년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뻔했습니다.

 

카페 창립 1주년 축하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애도로 대신해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20년도 넘은 잡지책...가, 이젠 가란 말야!

아끼던 <월간항공> 버리던 날

 

14.04.05 15:48l최종 업데이트 14.04.05 15:48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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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항공 20년도 더 지난 비행기 잡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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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헤어질 때가 됐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20년이란 시간을 함께했으니 이제는 떠나보낼 때가 된 것이다. 헤어질 때는 냉정해지자.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그런 독한 놈이 되는 거야!

"이제 넌 나한테 필요 없어. 가란 말야! 떠나버리라고!!!"

 

 


책벌레들의 커다란 고통: 책 버리기

예전에 지인분이 쓰신, 책과 관련된 에세이를 본 적이 있다. 책과 관련된 에세이라, 얼핏 '독서 예찬'과 같은 통상적인 주제라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책장에 가득한 책들 중에 어느 것을 버리고, 어느 것을 남겨둘지에 대한 단상들을 풀어낸 글이었다.

책벌레들에게 책을 버리는 일은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책을 쌓아둘 곳은 한정되어 있기에 어쩔 수없이 책을 버려야 하는 경우가 있다. 모든 이들을 다 만족시킬 수가 없듯이 모든 것들을 다 담아둘 수도 없는 법이니까!

그 분 말에 의하면 잡지책이나 소설류들을 버리는 데는 큰 고민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전공서적이나 학술서적 코너에 들어서면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것이다. 처분을 해야겠는데 어느 것을 골라야 할지 고민이라는 것이다.

한편 에세이들 중에서도 저자 사인이 적혀 있는 것들은 쉽게 처분 대상에 올리지 못해 곤혹스럽다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사실 그 지인 분은 대학교수다. 그래서 그 분의 서재는 일반적인 독서인들의 서재와는 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일반 독서인이든 대학교수든 책을 버리는 순서는 비슷해 보인다. 처분 일순위로 잡지가 지목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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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항공 오른쪽은 1991년 5월호다. 노태우 정권 때 진행된, KFP 사업에 선정됐던 F-16에 대한 사진을 메인으로 걸어놓았다. F-15K를 넘어 이제 F-35가 우리공군에 차세대 전투기로 쓰일 예정이라 사진이 무척 낯설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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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일순위로 지목된 잡지를 필자는 20년이 넘게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최근 10년 동안은 단 한 번도 펴보지 않고 그냥 그대로 한쪽 구석에 잘 모셔두었다. 그러다보니 10년치 먼지가 그대로 쌓이게 됐고 그 뒷면은 바퀴벌레 등의 좋은 안식처가 됐다.

 



'비행'소년의 욕구를 받아주었던 <월간항공>

그 잡지들은 <한겨레21>이나 <창작과 비평>같은 유명한 시사, 문예잡지가 아니었다. <월간항공>이라는 비행기 잡지였다. <월간항공>은 노태우 정권 시절인 1989년에 창간된 잡지로 우주항공 분야의 전문지로 탄생했다. 지금이야 자동차, 아웃도어, 뷰티, IT 등등 각양각색 다양한 분야의 잡지가 발간되어 세세한 정보들을 독자들에게 실어 나르고 있지만 1989년 당시에는 그렇지가 못했다.

1987년 6월 항쟁이 지난 지 겨우 2년 밖에 흐르지 않은 시점이라 그랬는지 아직 세상은 다양한 욕구를 담아낼 그릇들이 준비되지 않았었다. 영화잡지인 <씨네21>이 1995년에 창간됐듯 사회구성원의 다양한 욕망들이 본격적으로 잡지형식의 매체로 투영되기 시작한 건 1990년대 이후부터였다.

그런 의미로 <월간항공>의 등장은 상당히 신선했다. 당시는 인천공항도 없었고, 비행기 여행도 일반적이지 않은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멋진 비행기 사진이 걸린 <월간항공>를 보고 있던 필자의 마음은 크게 요동쳤다. 이미 옆구리에서 날개가 뻗어져 나와 하늘을 날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필자도 한 때는 '비행' 소년이었던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왔던 이카로스처럼 크게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날고 싶었던 '비행'소년이었다. 

그런 '비행' 소년의 욕구를 <월간항공>이라는 잡지가 채워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욕구'들이 쉽게 채워지지는 않았다. 잡지 내용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필자의 지식으로는 <월간항공>의 전문 용어들을 이해하기가 너무나 버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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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항공 20년도 넘게 집에 있다보니 먼지도 많이 쌓이고, 때도 많이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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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도 문제였다. 하긴 당시 고등학생이 돈이 있으면 얼마나 있었겠는가. 그래서 필자는 헌책방 투어에 나섰다. 어차피 속보성을 획득하려고 비행기 잡지를 구매했던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 당시 헌책방에서 비행기 잡지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주인아저씨가 '그런 잡지도 있냐?'고 반문할 때도 많았다. 어렵게 구한 잡지들도 부실한 경우가 많았다. 한 쪽 면이 찢어져 있거나 라면국물이 묻어 있는 것들도 있었다. 심지어 곰팡이까지 피어 있는 것들도 있었다.

 

 



비행기가 있던 자리

그렇게 어렵게 사 모으고, 애지중지하게 모셔두었던 그 비행기 잡지들을 얼마 전 떠나보냈던 것이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잡지들은 이미 정보성이 사라진 지 오래됐다. 현재 동북아 허브 공항으로 우뚝 선, 인천공항의 착공식을 소개하고 있는 20년 전의 잡지라면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다. 또한 '차세대 전투기로 선정된 F-16(노태우 정권 때 있은 KFP 차세대 전투기 사업 기종으로 당시 F-16이 선정됨)'에 대한 기사를 담은 잡지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 F-15K를 넘어 F-35가 우리 공군에 도입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한편 그 잡지들이 자리 잡고 있어 새로운 책들이 들어올 공간이 마땅치 않아 곤혹스러기도 했다. 공간이 한정되어 있기에 새롭게 들어올 책들은 줄을 서야 했기 때문이다.

1차로 몇 권의 <월간항공>을 버렸던 날, 20년 전의 일들이 필자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서울에 있는 헌책방들을 찾아 동분서주 하며 분주히 발걸음을 옮겼던 일, 헌책들의 뭉치 속에 파묻힌 잡지를 끄집어내다 책탑을 쓰러뜨려 주인장에게 엄청 혼났던 일 등등. 그런 아련한 추억이 떠올라 순간 마음이 약해지기도 했지만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과감하게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렸다.

"이제 넌 나한테 필요 없어. 가란 말야. 떠나버리라고! 20년도 넘게 있었으면 이제 갈 때가 됐잖아!"

너무 태양 가까이 날아올라 날개가 녹아내린 이카로스처럼 필자의 마음속에서 펄럭이던 날개도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굿바이 비행소년!'

 

 

 

 

*관촉사 은진미륵: 비행기 잡지가 떠난 자리에는 역사책들과 미학책들이 그 자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역사트레킹 마스터를 하려면 방대한 역사책들과 미학책들을 '마스터'해야 하기 때문이다.

2013년 4월에 찍은 사진이다.

 

 

 


그렇게 비행기 잡지가 있던 공간에는 이제 새로운 것들이 들어와 그 곳을 메우고 있다. 역사책과 미학책들이 빠르게 그 자리를 치고 들어왔던 것이다. 마치 질량보존의 법칙처럼 '비행기'가 빠진 공간에 '정약용 선생'과 '마애석불'이 떡 하고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렇게 새롭게 자리 잡은 역사책과 미학책들을 자양분 삼아 필자는 역사트레킹을 진행한다. 한마디로 '비행기가 있던 자리'에 '역사트레킹'이 들어온 것이다.

봄날이라서 그런가? 요즘은 새롭게 다시 날개가 돋아나는 것 같다. 아름다운 봄꽃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이미 마음은 산과 들에 가 있다.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읊조리며 트레킹을 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날개가 한 번 꺾여도 너무 슬퍼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왜? 새로운 날개가 생기니까!

*추신: 최근 발생한 무인기에 의한 청와대 촬영 사건으로 인해 정국이 혼란스럽다. 청와대의 방공망이 뚫렸다고 여론이 매섭게 질책을 한다. 그런데 정부가 정국 수습용으로 꺼내든 카드가 무척 당혹스럽다. 바로 모형비행기 동호회에 대한 규제이기 때문이다. 뚱딴지같이 엉뚱한 곳에 불똥이 튄 것이다.

북한에서 '인간어뢰'나 '로봇물고기'로 우리 해역을 침범을 한다면 해녀나 스쿠버 다이버들에 대해서 규제를 내릴 텐가? 무인기에 의한 방공망 침범이 있다면 무인기를 무력화시키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우선이다. 뚱딴지같이 애꿎은 동호회에 대해 규제의 덫을 놓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박 대통령께서 연일 '규제 완화'에 대해 역설하는 판에 규제의 덫을 놓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역설적인 일이니까!    

 

 

 

*** 오마이뉴스에 '비행기가 있던 자리'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입니다. 그나저나 분명히 제가 송고할 때는 맨 마지막 사진인, 은진미륵 사진을 같이 송고했는데 지금보니 발행된 기사에서는 사진이 누락됐네요. 일부러 은진미륵에 대한 사진을 넣어 비행기에서 역사트레킹으로 넘어갔다는 걸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이게 오마이의 한계인가??? 좀 거시기하네~~~ㅋㅋㅋ
제 블로그에 담긴 송고본과 오마이뉴스의 발행본을 비교해 보면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제 송고본에는 있는 은진미륵 사진이 발행본에는 없어졌고, 그래서 글의 완성도가 감소됐다는 것입니다.

오마이뉴스 발행본 바로가기 http://omn.kr/7p74

 

 

 

 

 

 

* 월간항공: 20년도 더 지난 비행기 잡지들.

 

 

 

 

 

* 월간항공: 오른쪽은 1991년 5월호다. 노태우 정권 때 진행된, KFP 사업에 선정됐던 F-16에 대한 사진을 메인으로 걸어놓았다.

F-15K를 넘어 이제 F-35가 우리공군에 차세대 전투기로 쓰일 예정이라 이 사진이 무척 낯설다.

 

 

 

 

얼마전 20년 넘게 가지고 있던 <월간항공>이란 비행기잡지 몇 권을 버렸습니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오마이뉴스에 기고를 했답니다. '비행기가 있던 자리'라는 제목으로... 위 사진들은 그 기사에 사용된 이미지들입니다. 딱 봐도 중고품처럼 보이죠?

 

20년 넘게 제 방 한구석을 차지했던 녀석들인데 떠나 보낸다니... 한편으로는 참 아쉬움이 컸답니다. 그러고보면 오래된 물건에는 그 주인의 혼이 스며든다는 말이, 꼭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잡지들을 버리면서 제 마음 한쪽 구석에서는 무언가 허전한 감이 밀려오더군요~!

 

 

 

 

 

* 비행기잡지: 20년도 넘게 집에 있다보니 먼지도 많이 쌓이고, 때도 많이 탔다.

 

 

 

 

 

* 인천공항: 인천공항을 탐방했을 때의 모습. 2014년 2월에 찍은 사진이다.

 

 

 

 

 

 

 

*관촉사 은진미륵: 비행기 잡지가 떠난 자리에는 역사책들과 미학책들이 그 자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역사트레킹 마스터를 하려면 방대한 역사책들과 미학책들을 '마스터'해야 하기 때문이다.

2013년 4월에 찍은 사진이다.

 

 

 

 

 

 

 

 

 

 

 

 

 

 

 

 

 

 

 

 

 

 

 

 

 

 

 

 

 

 

 

 

 

* 그냥 풍광만 보고, 걷기만 하는 트레킹에서 벗어나고 싶으신가요?

 

* 정상만 찍고 하산을 하는 등산여행이 지겨우신가요?

 

* 답사도 속도전을 하는 것인지, 스케줄에 쫓겨 '버스 뺑뺑이'를 하는 답사여행이 싫으신가요?

 

* 아웃도어를 통한 육체적인 활동은 좋은데 지적인 활동까지 병행하고 싶으세요?

 

 

누구나 한 번쯤 아웃도어를 하시다 이런 물음들을 곱씹어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사실 위에 물음들도 제가 여행을 하다 만난 분들의 의견을 토대로 작성한 것입니다.

이런 물음들을 종합해보자면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기왕하는 아웃도어, 좀 더 배우고. 채우자!'

 

역사트레킹은 이런 고민들 속에서 창안됐습니다. 육체적인 활동을 넘어서서 지,덕,체가

혼연일체되는 아웃도어를 해보자는 것이 바로 역사트레킹의 목표입니다.

 

 이런 역사트레킹의 바탕에는 우리의 5천년 문화전통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지붕 없는 박물관'이란 말이 있듯이 우리나라는 전국에 문화재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그 유서 깊은 문화유산을 탐방하고, 이어서 풍광 좋은 길을 트레킹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지,덕,체가 배양되는 것입니다.

 

역사트레킹은 마스터에 의해서 주관됩니다. 마스터는 문화유산 앞에서는 문화해설사가

되고, 도보코스에서는 대장 역할을 합니다. 길을 걷는 중간중간에는 지리학자가 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마스터의 역할이 무척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화해설도 해야하고, 10km 정도의 트레킹 리딩도 해야 하니까요.

그러고보니 마스터는 지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강해야 되겠군요!

 

10km 정도의 도보가 있듯이, 역사트레킹은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일반적인 답사여행과는 구별됩니다.

수학여행식의 '버스 뺑뺑이'를 하지 말자는게 역사트레킹의 큰 취지입니다.

 

역사트레킹은 걸음마 단계입니다. 아니 아직 시작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천천히 걸음걸이를 뛸 것입니다. 느릿느릿 걸어도 황소걸음이란 말이 있잖아요!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 사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불인 관촉사 은진미륵입니다!

 

 

 

* 은진미륵: 은진미륵을 옆에서 본 모습이다. 뒤쪽으로 보이는 곳은 황산벌이다.

 

 

 

 

* 관촉사 5층 석탑: 관촉사 석등과 함께 은진미륵 앞에 병렬에 서 있다. 필자가 방문했을 당시는 그 앞으로 무언가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무려 36년 동안 제작된 은진미륵

우리나라에서 최대이고 긴 세월 동안 제작된 터라, 관촉사 석불에는 흥미로운 설화가 스며있었다. 어느날 반야산에 큰 바위가 불쑥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에 고려 조정은 그 바위로 불상을 만들 것을 결정하고 당대 최고 고승이던 혜명 스님에게 그 일을 맡겼다. 고려 광종 19년(968)에 시작된 석불 건립은 목종 9년(1006)에 가서야 완성이 됐다. 석불 제작은 다리, 몸통, 머리 세 부분으로 나뉘어서 제작이 됐는데 각 부분이 다 완성된 후 큰 문제가 발생했다. 각 부분들이 엄청나게 크고 무거운 터라 인력으로는 석불을 세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 타워크레인이 있었겠는가?

혜명 스님의 고민은 깊어 갔다. 그러던 차에 스님은 아이들이 진흙 불상 놀이를 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거기서 힌트를 얻어 석불을 세웠다고 한다. 아이들도 다리, 몸통, 머리를 따로따로 제작하여 불상을 만들었는데 나중에 그것을 독특한 방법으로 합체를 했던 것이다. 먼저 다리를 세우고 그 주위를 모래로 채우고는 물을 뿌려 주위를 단단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비탈을 만들어 몸통을 굴려서 올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래비탈을 이용해서 진흙 석불을 3단 합체했다는 것이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혜명스님은 '옳거니'했고, 결국 18m가 넘는 엄청난 규모의 석불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렇듯 은진 미륵불은 제작시기와 제작자가 명확한 석불이다.  

 

 

 

 

 

 

 

 

 

▲ 은진미륵 필자 대신 등장한 나의 배낭. 이제 저 배낭을 메고 계속 해서 '모험'을 떠날 생각이다. 은진미륵의 큰 손을 붙잡고 함께 모험을 떠나고 싶다!

 

 

 

 

 

▲ 은진미륵 은진미륵이 워낙 거대해서,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남성이 무척 작아보인다.

 

 

 

 

# 고려 전기시대에 제작된 대형석불들

한편, 은진 미륵불이 제작된 고려 전기시대는 거석 석불이 유행한 시기였다. 고려왕조 창건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호족들의 독특한 지방문화가 불교문화제에 투영된 시기였던 것이다. 활기차고 강건한 지방문화가 석불 건립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거대한 돌미륵을 탄생시켰다.

고려 전기에 제작된 대형 석불들은 여러 개가 있다. 부여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일명 파주 쌍미륵), 안동 이천동 석불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 시기에 세워진 석불들은 하나 같이 다 엄청난 크기들을 자랑하고 있다. 신체비례에 맞춰 정교함을 구현하는 방식이 아닌 특정 부위를 부각시킨 거대한 석불을 제작하였다. 그런 탓인지 관촉사 석불은 3등신에 가깝고, 얼굴은 '얼큰이'다. 또 손은 마치 야구글로브를 낀 것처럼 아주 크다.

은진미륵을 가까이에서 마주하니, 당장이라도 내게 그 큰 손을 내밀고 이렇게 말하는 듯싶었다.

'어이 곽 작가, 지금 당장 나랑 같이 모험을 떠나자고!'

그럼 왜 그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큰 석불들을 제작했을까?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보다 세공기술이 덜해서 그랬던 것일까?

고려 전기 시대에는 고을의 평안에서부터 각 개인의 기복까지 다 받아주는 수호신 같은 거대한 석불이 제작되었다. 이런 대형 석불은 해당지역의 민간신앙까지 접목되어, 마치 돌로 큰 장승을 세운 것처럼 형상화됐다. 거인 같은 미륵불이 마을입구나 왕래가 잦은 곳에 떡하니 서 있으니 해당지역 사람들은 얼마나 든든했겠는가? 방범용 CCTV가 없었더라도 아주 든든했을 것 같다. 은진미륵이 서 있는 반야산도 황산벌이 보이는 곳으로 인편의 왕래가 잦은 곳이다.

 

 

 

 

▲ 대조사 석조관음보살입상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생김새와 조각기법 등이 논산 관촉사 석조관음보살입상과 유사성을 띄고 있다.

대조사는 충남 부여에 있는 사찰이다. 부여의 옆동네가 논산으로 두 지역은 무척 가까이에 있다.

 

 

 

 

# 은진미륵의 디테일은 선이 굵은 디테일

한편 디테일(detail)적인 관점으로 은진미륵을 바라본다면 어떤 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충남 서산시 가야산 자락 절벽에는 6세기 말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산마애삼존불상이 새겨져 있다.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은 섬세한 백제 불교 미술의 정수라고 할 만하다. 마치 한 땀 한 땀 수를 놓은 듯이 바위에 새겨진 마애삼존불은 정교성을 강조한 '세밀한 디테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손도 크고, 얼굴도 큰 은진미륵은 '선이 굵은 디테일'로 불릴 수 있을 것 같다. 얼굴과 손을 강조했고, 더군다나 발가락까지 크게 부각시킨 은진미륵을 두고 기계적인 관점에서 디테일이 떨어진다고 하면 그거 정말 곤란한 일이다. 세밀한 디테일이 있는가 하면 선이 굵은 디테일도 있지 않겠는가?

 

 

 

▲ 서산삼존마애석불 6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서산 삼존마애석불. 일명 백제의 미소로 불린다. 세밀한 디테일이 두드러진 정교한 석불이다.

 

 

 

 

 

 

은진미륵께 삼배를 올린 후, 필자는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자리를 계속 옮겨가며 열심히 사진을 찍다 카메라 LCD창에 비친 내 얼굴을 보게 되었다. 내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것도 그냥 웃음이 아니라 함박웃음이었다. 그냥 은진미륵 앞에 서 있으니 좋았던 것이다. 필자는 그냥 복을 넝쿨째 받은 느낌이었다.

은진미륵께서 복을 내려주셨으니 필자의 새로운 비즈니스가 번창할 것 같다. 새로운 비즈니스? 필자는 현재 outdoor와 tour를 접목한 일명 '아웃투어'를 아이템 삼아 사업을 시작할 예정이다. 거창한 일은 아니고, 그저 예전부터 해왔던 여행을 나름대로 특화시켜볼 생각이다. 기회가 된다면 <오마이뉴스>에도 아웃투어와 관련된 기사를 송고할 생각이다.

논산 관촉사에 가서 은진미륵께서 주신 '기복'을 받아왔으니 앞으로는 좋은 일들만 가득할 것 같다. 독자여러분들도 좋은 일들이 가득하시길 기원해본다.

 

 

 

 

 

 

 

 

 

 

 

 

 

 

 

 

 

 

 

 

 

 

 

 

 

 

▲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 일명 은진미륵이라고 불리는 우리나라 최대의 석불이다.

신체비율을 따르지 않고 머리, 손, 발 등을 크게 부각시켰다. 고려 전기시대에는 이렇듯 대형 석불들이 많이 제작되었다.

 

 

 

* 관촉사 은진미륵: 손과 얼굴이 크게 부각됐다!

 

 

 

 

 

 

 

미륵불의 큰 손을 잡고 모험을 떠나고 싶다!

-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불인, 관촉사 은진미륵불

 

 

 

인간은 나약한 존재다. 남들 앞에 서는 센 척, 강한 척 하지만 골방에 들어서면 한없이 고독감에 빠져드는 외로운 존재다. 꿈자리가 뒤숭숭하면 아침부터 문안 전화를 돌린다. 시험 날짜를 받아두면 자신이 관운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처녀보살'을 찾는다. 그렇듯 인간의 운명이란 한 치 앞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절대자에게 의탁하게 되고, 기도를 올리게 된다. 그런 기원을 올리는 곳이 동네 서낭당일 수도 있고, 팔공산 갓바위일 수도 있다.

아무리 우리 사회가 근대를 넘어 탈근대를 지향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에게 내포된 불안감은 영구적이기에 기복신앙도 항상 우리 곁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듯 필자도 꿈틀거리는 불안감을 억누르고, 꼬여 있는 실타래를 푼다는 생각으로 기원을 드리러 갔다. 최근에 필자가 새로 시작하는 비즈니스가 있는데 그 일이 잘되길, 기원드리러 간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로 기도를 드리러 갔단 말인가? 갓바위로 갔는가? 아니다. 충남 논산으로 갔다. 황산벌이 내려다보이는 논산 관촉사로 갔다. 은진미륵에게 기원을 드리려고.

 

 

 

▲ 은진미륵 필자도 사진에 등장한 분처럼 은진미륵께 삼 배를 올렸다.

 

 

 

 

 ▲ 관촉사 석등 은진미륵 앞에서는 석등이 세워져 있다. 4각 석등으로 전형적인 고려식 석등이다.

 유명한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에 있는 석등처럼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석등이다. 이 석등 외에도 관촉사 5층 석탑이 은진미륵 앞에 병렬되어 있다.

 

 

 

 

 

 

#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교회는 군대교회

4월 4일 목요일 오전.


필자는 느긋해 있었다. 평일이라 고속버스를 타는 사람들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논산까지 2시간 20분 정도 걸리니까 점심은 논산에서 먹으면 되겠군. 푸하핫! 예전 자전거여행 할 때 밥 먹었던, 그 백반집으로 가야지!'

그러나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세상일이다. 고속버스터미널에 가니 오전 논산행 버스가 다 매진됐다는 것이다. 추석 명절 같은 특별 운송기간도 아니고, 더군다나 평일 오전 시간에 버스좌석이 없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곧 있으면 임시버스가 증차되니까 좀 기다리세요."

평일날 임시버스가 운행된다는 소리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사정을 알고 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논산 연무대에서 입소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연무대에서 입소식이나 퇴소식이 있는 날에는 순식간에 좌석이 매진이 되고, 증차까지 된다고 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그날 승차장에서는 사복을 입은 '빡빡 머리'들이 많이 목격됐었다.

강원도 군번인 필자는 그렇게 예비 '논산 군번'들과 함께 논산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군대시절에 다녔던 교회를 떠올렸다. 필자도 교회를 다녔었다. 물론 초코파이 때문에 갔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초코파이는 군대교회에서 먹었던 초코파이였다.

초코파이 먹는 맛에 교회를 다니긴 했지만, 그래도 그 시절의 신앙은 참 순수했었다. 그 시절의 '기복'이라게 뻔하기 때문이다. 훈련의 무사복귀, 내무생활 잘하기, 무사히 제대하기 등등... 이것만큼 순수한 신앙이 어디 있겠는가? '세상 것'들 과는 질적으로 다른 진정한 신앙이었다. 

 

 

 

* 관촉사 석등: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등이다.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진 석등에 비해 규모가 크다. 

 

 

 

 

# 황산벌이 보이는 반야산

관촉사는 논산시내에서 가깝다. 약 3km정도 떨어져 있는데 버스터미널에서 걸어가면 40분 정도 걸린다. 필자는 천천히 논산 시내를 걸으며 관촉사 방면으로 길을 잡았다.

관촉사는 반야산이라는 야트막한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반야산은 넓은 평야지대에 위치한 산이다. 그곳에 올라서면 가까이는 계백장군이 혼이 살아 있는 황산벌이 보이고, 멀리는 계룡산과 대둔산이 보인다. 그렇게 전망이 좋은 곳에 일명 은진미륵이라고 불리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 입상이 서 있었다. 은진 지역에 있다해서 은진미륵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보물 제218호인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은 높이가 18m가 넘는 우리나라 최대의 석불이다. 크기가 크기인지라 제작하는데 무려 36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 황산벌과 은진미륵 관촉사가 있는 반야산에서는 황산벌이 눈 앞에 펼쳐진다. 멀리는 계룡산과 대둔산이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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