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껑없는 박물관', 서울역사도보여행    

  


우리에게 3월은 봄의 시작이자 삼일절이라는 역사적인 날이 있는 달이다. 야외활동을 시작하기 좋은 이 봄에, 역사도보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멀리 떠날 필요도 없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광화문에서 서대문형무소까지 이어지는 길로 역사도보여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광화문과 사직단

 

일명 광화문-서대문형무소 코스로 불릴 수 있는 이 도보여행의 시작점은 경복궁의 남문이자 정문인 광화문에서 시작된다. 경복궁이 조선의 법궁이었던만큼 광화문은 다른 궐문보다 훨씬 더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궁궐은 ‘궁’과 ‘궐’이 합쳐진 말인데 ‘궐’은 높은 석대 위에 누각을 세운 것을 말한다. 지금은 경복궁 돌담과 떨어져 있는 동십자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일반적인 궁궐의 의미에 빗대어 보자면 광화문은 조선시대 궁궐 정문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 형식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광화문 수문장 교대식

 

 

 

일제의 마수는 광화문에도 미치게 된다. 일제는 조선의 정기를 끊기 위해 광화문을 헐어 동쪽으로 옮겨 버렸다. 대신 그 자리에는 한용운 선생이 ‘돌집’이라고 불렀던 조선총독부가 들어섰다.

해방 이후 광화문은 여러 차례 중수를 하게 됐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광화문은 2010년 8월에 완공한 것이다. 다시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광화문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수문장 교대식 때문이다. 바람에 펄럭이는 큰 깃발과 화려한 복식을 한 수문장들의 박력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도 큰 관광 상품이 되었다.

 

경복궁 서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인 서촌에는 사직단이 자리를 잡고 있다. 도보로 10분 정도 이동을 하면 닿을 수 있는 곳이다. 사직단은 토지의 신인 ‘사’와 곡식의 신인 ‘직’에게 제례를 올리기 위해 마련된 장소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종묘, 서쪽으로는 사직단이 자리 잡은 것이다.




토지와 곡신의 신에게 제사를 올린다는 뜻의 `사직단` 제례

 

 

 

종묘사직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직단은 종묘에 버금가는 곳이었다. 하지만 사직단도 일제시대에 큰 몸살을 앓게 된다. 경내가 크게 훼손되고, 그 영역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이슈가 됐던 사직단 복원 문제도 그 근원에는 일제의 마수가 있었던 것이다.



 

서대문형무소와 독립문


도보여행은 인왕산 서울 성곽으로 이어진다. 겸재 정선이 사랑했던 돌산 인왕산에 올라 서울 시내를 찬찬히 살펴보고 마지막 탐방 장소인 서대문형무소로 이동해보자.

서대문 형무소에 대형태극기가 걸려 있다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피눈물을 흘렸던 서대문 형무소는 역사도보여행의 절정부이자 종료 지점이다. 서대문형무소는 1996년 성역화 사업 이후 역사공원으로 탈바꿈했는데 빨간 벽돌로 지어진 건물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는 형태를 띠고 있다. 아직도 이곳에는 유관순 열사가 옥사했던 여감방, 강인규 열사(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짐)가 처형당한 사형장 등등… 수많은 독립지사들의 복역을 했던 독방들이 전시되어 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찾아가 봐도 좋다

 

 

 

이제 도보여행을 하기 좋은 봄이 왔다. 춘삼월에는 배낭을 꾸려 서울 곳곳에 남아 있는 역사유적들을 탐방해보자. 도보여행을 통해 빛나는 역사뿐 아니라 그늘진 역사도 배워보자. 알고 보면 서울도 뚜껑 없는 박물관인 정도로 풍부한 역사유적을 가지고 있는 매력적인 도시다.


 

 

 

 

 



■ 역사도보여행 제안 코스
 1. 광화문-서대문형무소 코스:
    광화문(경복궁) ▶사직단(서촌) ▶ 인왕산(서울성곽) ▶ 서대문 형무소(독립문)
 2. 교통편: 출발 –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이용 / 종료 –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이용
 3. 이동거리: 약 5km / 서대문형무소 관람을 포함, 약 2시간 30분 정도 소요 예상
 

 

 

 

봄철 안전 산행을 위하여

 

 

철저한 준비가 필요한 해빙기 산행...

 종료 시점 기준으로 배낭 꾸려야

 

15.02.27 11:01  최종 업데이트 15.02.27 11:01

 

 

 

 

동장군의 위세가 꺾이는 요즘.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봄기운이 사람들의 오감을 자극한다. 그렇다. 이제 설 명절도 지났고 춘삼월이 눈 앞에 와 있다. 그렇게 봄이 다가올수록 등산인들의 설레는 마음도 커질 것이다. 산들산들 부는 봄바람에 자신의 몸을 실어, 산과 들로 마음껏 활보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설렘은 잠시 접어두자. 겨울 산행만큼이나 봄 산행도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봄은 달리 말하면 해빙기를 뜻한다. 응달이 진 곳에는 아직 얼음이 얼어 있고, 산 정상부에는 잔설이 남아 있는 시기이다. 자칫하면 산행 중에 눈을 맞을 수도 있다. 그만큼 각별한 준비를 해야 안전한 산행을 행할 수 있다는 뜻이다.

 

 

 



 
▲ 봄철 산행 해빙기 산행은 겨울철 산행만큼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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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료시를 기준으로 배낭을 꾸리자


당연한 이야기지만 봄은 일교차가 큰 계절이다. 아침, 저녁으로는 싸늘하지만 낮에는 온화한 햇살 덕분에 나른하기까지 하다. 그래서인지 낮 시간대에는 반소매 차림으로 다니는 이들까지 눈에 띌 정도다.

산행도 마찬가지다. 오후 시간대에 산에 오르다 보면 땀이 많이 배출된다. 그래서 일부 등산객들 중에는 번거롭다는 이유로 다운점퍼나 재킷을 휴대하지 않고 산에 오르기도 한다. 한편 여분의 옷을 가지고 왔다고 해도 옷감이 너무 얇아 체온 보호에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준비소홀은 출발시를 기준으로 산행에 나서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아무리 기온이 높아졌다고 해도 산 정상부는 여전히 겨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또한 해가 질 무렵이면 산 중의 온도는 영하에 가까워진다. 그렇기 때문에 출발시가 아닌 종료시를 기준으로 배낭을 꾸려야 한다. 출발할 때는 더워도 종료할 때는 몸에 오한이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봄철 산행인 것이다.  

종료시를 기준으로 배낭을 꾸린다는 것은 언제든지 체온 유지를 해줄 여분의 옷을 보유해야 한다는 뜻이다. 일교차가 큰 계절인 만큼 저체온증을 대비하기 위해 만전을 기해야 한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겨울산행에 쓰이는 핫팩을 준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해빙기에는 함부러 바위를 잡지 말자


해빙기의 산은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한다. 정상부나 응달이 진 곳에서는 아직 잔설도 남아 있다. 한마디로 등산로가 불안정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해빙기인 봄철에는 낙석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흙과 바위, 나무가 단단히 자리를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빙기인 봄철에는 바위나 나무를 붙잡을 때도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는 바위도 결빙과 해빙이 반복되다 보면 힘없이 굴러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봄철에는 '돌다리도 두들겨 가며 걷는다'라는 심경으로 바위와 나무를 조심스럽게 짚어야 한다.

한편 살얼음이 맺힌 바위구간도 무척 미끄럽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크게 결빙된 구간은 누구나 다 조심스럽게 이동한다. 하지만 살얼음 구간은 방심할 수 있는데 그러다 보면 크게 엉덩방아를 찧을 수도 있다. 배낭에 아이젠을 휴대하고 다니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 눈 봄철 산행 중에도 폭설을 만날 수 있다. 그런 점을 대비하여 우비를 준비하자.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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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산행만큼 철저히 준비하자


사실 겨울 산행보다 봄 산행이 더 위험할 수 있다. 겨울 산행이야 철저한 준비를 바탕으로 혹한을 감수하며 떠난다. 사전에 위험도가 높다는 걸 인지하고 산에 오른다는 뜻이다. 그런 만큼 산행길에 나서는 이들도 경험이 풍부한 등산인들이다. 

하지만 봄철 산행은 계절적인 빗장이 풀려서 그런지 너도나도 길을 나선다. 그들 중에는 이동경로와 이동시간까지 철저히 계산해 안전한 산행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혹한이 도사리고 있는 산을 만만하게 보고 덤비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 해빙기에 산악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 하나만은 기억하자. 겨울 산행만큼 철저히 준비를 한다면 봄철 산행도 즐겁게 행할 수 있다는 것을!

 

 

 

 


 도움말

 

 

1. 산행에 나서기 전에 철저히 준비운동을 해준다. 로프를 잡거나 바위를 타야 할 상황도 발생하니, 하체뿐만 아니라 상체도 골고루 해주어야 한다. 일부 등산인들 중에는 준비운동도 없이 바로 본 산행에 나서기도 하는데 이런 방식은 좋지 못하다. 시간이 없다면 약식으로라도 준비운동은 꼭 해주어야 한다.  

2. 겨울산행과 동일한 장비를 보유하는 것이 좋다. 모자, 장갑 등은 물론 비상시를 대비하여 스패츠와 아이젠도 준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3. 코스를 잘 계획해서 일몰 2시간 전에는 하산을 하는 것이 좋다. 해가 지면 산중에서의 기온은 수직으로 하강한다. 만약을 대비하여 휴대용 랜턴을 준비하자. 랜턴의 밝기는 루멘(lumen)으로 측정하는데 야간산행을 전문적으로 다니지 않는다면 100루멘 급의 랜턴도 쓸 만하다.  

4. 지속적으로 더운 음식물을 섭취하는 것이 좋다. 보온병에 뜨거운 음료를 담아가 보자. 일부 여성 등산인들 중에는 화장실 문제 때문에 음료 섭취를 꺼리는 분들도 있으니 사전에 미리 화장실 위치를 파악해 두는 것이 좋겠다.

5. 비상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니 단독 산행보다는 2인 이상 동반 산행을 하는 것이 좋다. 산에서는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이다. 안전한 산행이 최고의 산행이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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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은 아이구아이구?'...

이런 달달달 암기 방식은 아니다

 

 

[주장] 기계적인 '암기식 역사' 학습에서 벗어나야

 

15.03.05 11:51   최종 업데이트 15.03.05 11:51
'이 여론조사만 놓고 보면, 우리는 역사를 잊은 민족이니 미래가 사라질 수도 있겠군!'

3·1운동 관련 뉴스를 하나 읽다가 저런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게 됐다. 그 뉴스는 우리나라 성인 남성 중 절반 이상이 3·1절의 정확한 연도를 모른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성인 1005명을 대상으로 한일관계를 조사한 한국갤럽의 여론조사를 담은 기사였는데, 응답자 중 32%만이 3·1운동이 1919년에 일어났다고 정확히 답변을 했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의 강제병탄이 있었던 1910년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19%인 반면,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은 23%로 더 많았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었다.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P)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격언을 그 기사에 빗대보면 필자의 독백이 전혀 틀린 말이 되지 않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미래가 없는 민족이 되는 것일까? 미래의 어느 한 시점에 우리 민족은 그대로 사라지고 말 것인가?

 

 


 
▲ 태극기 서대문 형무소에 걸려있는 태극기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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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퀴즈식의 여론조사

 


삼일절이나 광복절, 혹은 한국전이 발발된 6월 말 경이 되면 저런 역사 퀴즈(?)식의 여론조사 결과가 어김없이 언론에 공표된다. 그런 기사들은 질책을 담은 자극적인 제목으로 생산되기 일쑤인데 이런 방식이다.

<역사의식 실종? 국민 절반이 3·1절이 언제 일어났는지 몰라...>
<충격적인 청소년들의 안보 불감증! 6·25전쟁이 북침이라고?>

여론조사는 칼럼이나 사설로 재생산되는데 질책의 강도를 더 높인 상태로 기사화 된다. 그런 칼럼이나 사설은 작성자의 성향에 따라 온도차가 있기는 하지만 역사교육 강화라는 결론으로 도달한다.

그런 결론이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교육 강화라는 명제는 큰 범죄만 일어나면 제시되는 '인성교육 강화'와 닮은꼴을 한다. 교육 강화를 외칠 때는 큰 보폭으로 움직이는 듯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점으로 회귀해 있는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강화만하면 무엇 하는가 내용이 달라져야지!

 

 

 



# '3·1절은 아이구아이구'로 외웠다!

 


학창시절에 필자는 역사를 좋아했지만 국사 시간을 기다리지는 않았다. 연표를 '달달달' 외우고, 인물을 암기하는 방식의 수업 시간이 지루했기 때문이다. 다른 과목들과 마찬가지로 국사도 그저 시험용 학습을 했을 뿐이다.

'3·1절은 아이구아이구(1919년)다'는 식의 암기 방식으로 삼일절 페이지에 '별표'를 했던 것이다. 1918년 11월 1차 세계대전이 종전이 됐고, 그에 따라 1919년 1월에 파리강화 회의가 개최됐는데 거기서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다는 부분에도 '밑줄 쫙'을 했다.

'별표'를 치고 '밑줄 쫙'을 하는 단편적인 암기는 시험 문제를 풀 때는 유용했었다. 하지만 그런 기계적인 암기는 필자의 머릿속도 기계적으로 만들었다. 인과관계가 명확한 각 사건들이 파편화되어 단절된 지식으로 머릿속에 저장됐기 때문이다. 분명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우리민족을 위한 정책이 아니었다. 여기서의 '민족자결'은 패전국 식민지에 속해 있던 민족들의 자결을 뜻하는 것으로 당시 일본은 승전국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수혜를 입지도 않은 민족자결주의를 두고 3·1운동의 중요한 원인으로 별표를 했던 것이다. 3.1운동과 민족자결주의 사이에 인과관계를 찾을 생각은 못하고 그저 기계적인 암기에만 열중했던 것이다. 

필자의 학습은 거기까지였다. 시험범위가 거기까지였고 필자가 배운 교과서에도 그 이상의 내용이 기술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3·1운동과 민족자결주의와의 간극을 그대로 남겨둔 채 교과서를 덮고 말았다. 하지만 당시에도 무언가 찜찜했는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3·1운동을 준비했던 사람들은 파리강화회의가 강대국들의 놀이터라는 것을 몰랐나? 너무 순진했던 거 아니야?'

 

 
▲ 소녀상 일본 대사관 앞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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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편적 지식 극복하기  

파편적 지식으로 필자의 머릿속에서 따로 놀고(?) 있었던 민족자결주의와 3·1운동의 간극이 명쾌하게 극복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교복을 벗고, 또한 군복(?)까지 벗고 나서야 그 연결고리를 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 속의 역사읽기>라는 딱딱한 서술 방식이 아닌, 스토리텔링식으로 기술된 역사책을 읽다가 그 연결고리를 알아냈던 것이다. 만약 스토리텔링식의 역사책을 읽지 못했다면 아직까지도 그 둘은 서로 따로 놀고 있을지도 모른다.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은 독일의 조차지였던, 청도(靑島) 맥주로 유명한 중국의 산동반도와 중부태평양의 남양군도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요구한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남아있는 패전국 독일의 식민지에 대한 침탈 야욕을 보인 것이다. 한마디로 민족자결주의와 어긋난 행위를 했던 것이다. 이런 일본의 행태는 중국과 태평양 지역에 관심을 보이던 미국의 이익과 정면으로 배치됐다.

3.1운동을 준비했던 지도자들은 이런 일본의 야욕과 미국의 이익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충돌할 것이라고 예견했던 것이다. 비록 같은 제국주의 국가였다 할지라도 미국의 팽창은 우리에게 이익을 전해줄 것이라고 판단했던 셈이다. 하지만 그런 판단은 일제 치하에 있던 우리의 운명을 미국이라는 또 다른 외세의 힘을 빌어 극복한다는 점에서 분명 한계가 명확했다. 어쨌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독립운동 진영에 큰 파동을 전해주었다.

 



 
▲ 단재 신채호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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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에서 교훈을 얻으려면... '기계적 지식' 극복해야

2017년부터 국사가 수능 필수 과목으로 지정됐고, 또한 이제부터는 초등학생들도 정식과목으로 배우게 됐다. 이런 것만 놓고 보면 우리는 분명 역사교육를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초중고생들은 필자가 국사책에 별표를 하며 기계적으로 암기를 했던 방식에서 탈피하여 능동적이고 종합적으로 한국사를 배우고 있을까?

수험 대비용으로 '달달달' 외운 파편적인 지식은 오히려 한국사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력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기계적인 암기는 시험의 공포가 사라지는 순간부터 급격히 뇌리에서 지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계적인 암기로 국사를 배웠던 사람들은 서두에 언급한 역사 퀴즈 여론조사에 걸려들어(?) 질책을 들을 가능성이 높다.  

신채호 선생이 강조한 역사 기억하기는 '3·1절은 아이구아이구(1919년)다'라는 식이 아닐 것이다. 우리 역사를 종합적 다각적으로 바라보고 거기서 교훈을 얻자는 게 단재 선생의 의도였을 것이다. 기계적인 암기로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을사조약'과 '을사늑약'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직시하지 못할 테니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에도 실립니다.

 

 

 

 

 

발트해 해상요새에서 DMZ를 생각하다!

 

[22일간의 여행 마지막편] 핀란드 헬싱키

 

15.02.12 16:35 최종 업데이트 15.02.12 16:46

 

 

 

 

 

 

 

 
▲ 수오멘린나 수오멘린나 요새.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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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헬싱키 대성당: 핀란드 루터교의 대본산이다.

독립 전에는 성 니콜라우스 성당이라고 불렸다.

 

 

 

 

 

 

신나고 재미났던 산티아고 순례길과 마드리드 근교 여행을 마친 후 필자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귀국편 항공기인가? 아니다. 스페인을 떠난 필자가 닿은 곳은 북유럽의 핀란드였다. 핀에어(FINN AIR)라는 핀란드 국적기를 이용해 여행을 했는데 '스톱오버(stopover)'를 통해 핀란드 수도 헬싱키에 3일간 머물기로 한 것이다. 스톱오버는 '단기체류'를 말하는데 직항이 아닌 갈아타는 비행기를 탔을 때 이용할 수 있는 제도로, 갈아타는 공항이 위치한 국가를 잠깐 동안 여행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2014년 11월  21일, 여행 19일째

역시 핀란드는 산타클로스의 나라였다. 헬싱키 반타 공항에 도착했더니 세상은 설국으로 변해 있었다. 주기장은 물론 활주로에도 많은 양의 눈이 쌓여 있었지만 '이 정도 적설량'은 끄떡없다는 듯, 공항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필자는 지난 겨울의 첫눈을 고국이 아닌 낯선 핀란드에서 맞이한 셈이다.

솔직히 핀란드 땅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는 후회가 막심했다. 변변한 겨울옷도 없이 러시아 모스크바보다도 더 위도가 높은 핀란드에 도착했으니 그럴 수밖에... 처음 느껴보는 북유럽의 추위에 몸이 적응이 안 됐다. 당장 서울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귀국 비행기는 3일 후에 있었다.

'그래, 한 번 버텨 보자. 발트해 추위가 어떤지 한 번 겪어보는 거야. 우리나라 동장군도 만만치 않지만 매년 잘 버텨왔잖아!'

 


 
▲ 설국 산타클로스의 고향이라서 그런지 핀란드는 눈이 많이 내린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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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들 사이에 낀 핀란드

역사적으로 내내, 핀란드는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샌드위치' 신세였다. 서쪽으로는 스웨덴, 동쪽으로는 러시아가 수백 년 동안 핀란드 땅을 압박해 왔다. 핀란드는 비교적 뒤늦은 13세기경에 유럽 문화권에 편입되는데 이때도 독자적으로 유럽 중심부와 교류했다기보다는 강대국 스웨덴의 일부 지역으로 편입됐다고 봐야 한다.

유럽권으로 편입됐지만 핀란드가 독립국가가 되기까지는 무려 75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야 했다. 650년간의 스웨덴 지배, 그 이후 100년간의 러시아 지배를 겪은 이후인 1917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핀란드는 독자적인 국가를 세우고 세계에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그걸로 핀란드의 시련이 종결된 것이 아니었다.

1917년의 독립이 러시아 혁명 와중에 이루어졌듯, 동쪽에 국경을 맞댄 러시아는 핀란드 근현대사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나라였다. 독립 이후에도 핀란드는 러시아와 2번에 걸쳐 전쟁을 벌였다.

두 차례에 걸친 핀란드-소련(러시아) 간의 전쟁은 모두 2차 세계대전 중에 발발했는데 1차 전쟁은 1939년, 2차 전쟁은 1941~1944년에 일어났다. 두 번에 걸친 전쟁은 핀란드의 국토를 황폐화 시켰고, 그런 역사적 아픔 때문인지 핀란드인들은 러시아에 대해 썩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 벙커 수오멘린나 섬은 사진과 같은 벙커가 곳곳에 만들어져 있었다. 벙커 안에서 관광객들을 찍어 봤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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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 요새 수오멘린나

다음날 필자가 방문한 수오멘린나(Suomenlinna) 섬은 강대국들의 위세에 눌려 샌드위치 신세로 살아야했던 핀란드의 지난 역사를 돌아보기에 안성맞춤이다.   

수오멘린나는 헬싱키 항구에서 뱃길로 10여 분 간 달리면 도착할 수 있다. 수도 헬싱키의 관문 역할을 하는 이곳은 1748년 스웨덴에 의해 해상 요새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핀란드를 점령한 스웨덴은 발트해에서 세력 확장을 꾀하던 러시아에 대해 큰 위협을 느꼈고, 이에 헬싱키 앞바다에 떠 있는 섬 6개를 연결해 축성했다. 또한 대포를 설치해 말 그대로 바다에 떠있는 해상 요새를 만들기에 이른다. 러시아의 팽창을 막기 위한 대규모의 작업이었던 만큼 수오멘린나 요새는 거의 40년에 걸쳐 만들어졌다.

그렇게 어렵게 요새를 만들었지만 스웨덴이 이곳을 제대로 사용한 시기는 약 20여 년 밖에 되지 않았다. 1808년 러시아가 핀란드를 점령한 이후부터는 수오멘린나도 러시아의 수중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핀란드가 그렇듯 수오멘린나도 스웨덴과 러시아의 자취를 동시에 품고 있는 섬이다. 요새의 기본 골격은 스웨덴 지배 시절에 지어진 것들이지만 일부는 크림전쟁(1853~56년) 때 영국과 프랑스 함대의 공격을 받아 다시 재건됐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 함대는 47시간 동안 수오멘린나를 공격했는데 그때의 함포사격으로 섬의 일부가 크게 훼손됐다고 한다.

 

 



 
▲ 한 겨울에 반팔 현재 수오멘린나에는 주민들이 거주를 하고 있다. 그들을 위해 슈퍼마켓도 운영되고 있다. 그나저나 사진에 등장한 저 핀란드 청년은 춥지도 않나 보다. 한겨울인데도 반팔에 반바지 차림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왼쪽에는 대포들이 눈이 쌓인 채로 전시되어 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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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해에서 DMZ를 떠올리다

바다를 향해 포신을 세운 대포들에도 흰 눈이 쌓여 있었다. 그 옛날 발트해를 향해 맹렬히 불을 뿜었을 그 대포들은 이제 관광객들의 사진 속 배경에 빠지지 않고 감초처럼 등장한다. 국제역학 관계의 변화와 무기체계의 현대화로 이제 수오멘린나도 '요새'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게 됐다.

대신 그 섬에 스며있는 역사적 가치와 발트해를 품은 아름다운 주위환경 때문에 이제는 헬싱키를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들러야 하는 필수 관광 코스가 된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수오멘린나는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상대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세워진 철옹성이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는 그 애초의 의도에서 벗어나 역사적, 문화적 현장으로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한반도의 DMZ도 훌륭한 역사적, 생태적 학습의 장으로 떠오를 것이다. 현재의 DMZ은 남북한의 갈등 때문에 살벌한 철책선으로 가로막혀 있지만 나중에는 그 철책선도 관광객들의 사진 속에 빠지지 않는 감초로 등장할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올 것이다.

흑야는 백야와 달리 해가 빨리지는 것을 말하는데 필자가 핀란드를 방문했을 때는 흑야 시즌이었다. 그래서인지 오후 4시도 되지 않은 시각이었지만 서쪽 하늘은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수오멘린나에서 발틱해를 바라보면서 감상하는 낙조도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낯선 이국땅에서 붉은 노을을 바라보고 있자니 무언지 모를 감상에 젖어드는 느낌이었다. 싸구려라도 좋으니 와인 한 병이 필요한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 발트해의 낙조 수오멘린나 섬에서 본 낙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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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리더십'의 할로넨 대통령

섬에서 돌아오는 길에 대통령 궁을 지나갔다. 대통령 궁은 수오멘린나 행 여객선을 타는 선착장과 가까웠는데, 처음 봤을 때는 그냥 일반 건물인 줄 알았다. 딱히 삼엄한 경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방이 열려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 대통령 궁에서 타르야 할로넨이라는 여성 대통령이 2000년부터 12년 동안 집무를 했고 지난 2012년에 명예롭게 자리에서 물러났다. 재임 중에 '엄마 리더십'을 펼쳤던 할로넨은 퇴임 후에도 국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성공한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했다. 재활용 수집함에서 쓸 만한 물건을 수거해가는 모습이 목도될 정도로 할로넨은 소탈했다.

열려 있는 핀란드의 대통령 궁과 타르야 할로넨을 떠올리자니 그저 부러움이 앞설 뿐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무슨 국정 철학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리더십을 국민들에게 보여줬나? 그렇게 이어지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아서 나머지 생각들은 그냥 발틱 해에 버리고(?) 왔다.

 

 



 
▲ 대통령 궁 핀란드 대통령 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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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물 중앙 광장 인근에서 진행되던 축제. 개량형 포크레인이 루돌프를 대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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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필자의 여행기는 여기까지다. 이제껏 15편에 걸쳐 여행기를 작성했다. 실제 여행 일수가 22일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좀 길게 늘어진 게 사실이다. 필자도 애초 10편 정도로 작성할 생각이었지만 쓰다 보니 글 욕심이 생겨 5편 정도가 더 늘어나게 됐다. 기사를 작성하면서 좀 아쉬운 것이 하나 있었다.

우리나라에 스페인과 관련된 역사서가 전무하다는 점이다. <꽃보다 할배>의 영향 때문인지 스페인 여행서는 쏟아져 나왔지만 정작 스페인 역사서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기존에 나왔던 책들은 절판된 지 이미 오래고, 헌책방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현지에서 보고 느낀 감흥을 귀국 후에 방문국의 역사서로 채울 수 있다면 정말 알찬 여행 '뒤풀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스페인 역사서들이 다시 출간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간 필자의 여행기를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별 재미도 없는 여행기였을 텐데 몇몇 분들이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이 자리를 빌려 그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그런 조언들을 채찍질 삼아 더 열심히 글을 쓸 생각이다.

 

 

 

 

 * 거리의 예술가: 병을 이용하여 음악을 연주하는 특이한 거리의 음악가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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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마드리드 홈구장 가보니... 상암구장이 낫겠네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14] 허탕만 친 마드리드 탐방기

 

15.02.09 11:22   최종 업데이트 15.02.09 14:10

 

곽동운(artpunk)

 

 

 

 

 

 

 

 

 

 
▲ 알칼라 문 알칼라 문(Puerta de Alcala). 1778년 카를로스 3세에 의해 만들어지기 시작한 문으로 한때는 마드리드의 동쪽 경계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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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20일, 여행 18일째. 내일이면 스페인을 땅을 떠나게 된다. 작별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아쉬움과 함께 후련함이 몰려왔다. 분명 나중에는 다시 스페인 땅을 그리워하겠지만 그 당시에는 빨리 여행의 종착역으로 향해가고 싶었다.

후련하다는 감정이 든다는 건 무언가 확실히 뽑아냈다는 뜻일 것이다. 정확히 어떤 것을 뽑아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냐? 바로 '똥배'였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포함해서 계속 강행군을 했더니 '똥배'가 쏙 들어간 것이다. 여행 기간 동안 화장실을 잘 갔더니 배가 홀쭉해졌던 것이다.

역시 도보여행은 다이어트의 지름길이다.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수록 늘어나는 건 똥배뿐이었고, 그에 따라 허리띠도 길어졌다. 그런데 짧은 기간이나마 허리띠가 줄어드는 신기한 경험도 해보았다. 물론 서울에 돌아와서는 다시 원상복구가 됐지만...

 

 



 
▲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축구팀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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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 마드리드 홈구장보다 상암구장이 더 좋더라

스페인에 와서 정작 수도인 마드리드를 돌아보지 못했던 탓에 그날은 작정하고 마드리드 일대를 탐방하기로 했다. 마드리드 구도심은 도보로 이동을 해도 끝에서 끝까지, 약 1시간 정도 밖에 소요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지도로 중요 지점을 찍어가면서 시내 탐방을 하기로 했다.

처음으로 길을 잡은 곳은 축구팀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이 있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Santiago Bernabéu)였다. 스페인 프리메가리그의 팬이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팬인 필자에게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 방문은 그 자체로 흥분거리였다. 그곳은 구도심에서 좀 멀기에 지하철을 탔는데 이동하는 내내 심장이 '쿵쾅쿵쾅' 거렸다.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 도착했다. 경기가 없는 날이라 시합 구경은 못하더라도 구장 일대를 탐방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한껏 기대감이 차올랐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중심가에 서 있어서 그런지 레알마드리드 홈구장은 차도로 둘러싸여 있었다. 차도로 꽉 막힌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는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FC서울의 홈구장인 상암 월드컵 경기장이나 맨체스터 유나이티트의 올드 트레포드처럼 공원형 구장을 상상했는데... 그 공원에 앉아 느긋하게 커피 한 잔을 마실 생각이었는데... 그런 기대들이 무참히 사라졌던 것이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김에 잔디라도 한 번 밟아봐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매표소에서 구장 투어 가격을 알아봤다. 무려 19유로(한화로 약 2만3천 원)였다. 19유로면, 톨레도 왕복 차비에다 점심까지 먹을 수 있는 돈이다.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속으로 욕에 욕을 해댔다.

 


'FC 서울이랑 할 때는 당연하고, 레알 마드리드랑 맨유랑 붙었을 때도 맨유 응원해야지! 상암 구장이 훨씬 낫네. 인근에 하늘공원도 있고 말야.'

 


 
▲ 고야 프라도 미술관 앞에 서 있는 고야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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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도에는 '게르니카'가 없더라

다음 이동 장소는 프라도 미술관이었다.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라고 불리는 프라도 미술관은 1819년 개관했다. 프라도 미술관은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 등등... 미술계에 큰 족적을 남긴 유명 화가들의 작품 6천여 점을 보유하고 있는 유서 깊은 미술관이다.

미술에 문외한인 필자가 프라도 앞을 서성였던 건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보기 위해서였다. 화가 피카소를 좋아하고, <게르니카>의 가치를 잘 아는 만큼 직접 작품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워낙 유명한 곳이라서 그런지 미술관 앞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프라도 앞에서 그려야 '그림빨'이 사는지 열심히 스케치에 몰두하고 있는 예비 화가들, 느긋하게 잔디에 누워 늦가을 햇볕을 쬐고 있는 커플 등등... 그 중에는 한국인들도 많았다. 역시 이곳은 전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여기 게르니카가 없다고요? 왜요? 프라도면 당연히 게르니카가 있어야 되지 않나요?"

레알 마드리드 홈구장에서처럼 필자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당연히 세계 3대 미술관이라는 프라도 미술관에 <게르니카>가 있을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충격과 함께 창피함이 몰려왔다.

현재 왕립 소피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게르니카>는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던 피카소가 1937년 6월에 완성한 작품이었다. 그해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는데 고국 스페인관에 내걸 벽화를 의뢰받았다. 당시는 스페인 내전 초기였는데 여기서 '고국'이라하면, 당연히 프랑코 정권이 아닌 인민전선 정부를 말한다.

처음 피카소는 작품 구상에 시간을 허비했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4월 28일 바스크 지역에 있는 게르니카에 독일군이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고, 혼신을 다해 그 참상을 화판에 담아낸다. 그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 <게르니카>였다.

 

 



 
▲ 게르니카 왕립 소피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게르니카.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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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도에서 소피아 미술관으로 이전된 게르니카

예전 일이다. 필자는 게르니카가 당연히 카탈로니아(동부) 지역인 줄 알았다. 스페인 내전 중에 카탈로니아에 대한 탄압이 극심했고, 이후에도 분리독립 운동이 활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게르니카는 바스크(북부) 지역이었다. 필자가 번지수를 잘못 안 것이다.

프라도의 명예 관장이었던 피카소는 프랑코 독재에 대한 항거의 뜻으로 <게르니카>를 스페인으로 보내지 않았다. 이후 <게르니카>는 조건이 하나 붙여진 상태로 뉴욕 근대 미술관으로 보내졌다. 스페인에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프라도에 내건다는 조건이었다.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한다. 그렇다고 프랑코 체제가 일거에 사라지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게르니카>는 1981년 9월 9일 고국 땅을 밟게 된다. 하지만 또 문제가 하나 생겼다. 프라도 미술관은 20세기 이후의 작품을 소장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1937년도에 탄생한 <게르니카>를 소장한다면 스스로의 원칙을 깨게 되는 셈이다.

결국 <게르니카>는 왕립 소피아 미술관으로 이동을 하게 된다. 결국 <게르니카>는 왕립 소피아 미술관으로 이동을 하게 됐다. 소피아 미술관이 현대미술을 전문적으로 소장 전시하는 곳이기에 그런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프라도가 19세기 이전의 작품만 소장한다는 원칙과 소피아 미술관이 현대미술의 보고라는 것만 알았어도 허무하게 발길을 돌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번 실수를 발판 삼아 미학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무식하다'는 쓴소리를 밑천 삼아서 더 열심히 책을 뒤적거려야겠다.

 

 


 
 해군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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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이 아쉽다... 스페인 해군 박물관에서

다음 탐방지는 프라도 미술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해군 박물관이었다. 원조(?) 무적함대의 나라 스페인에 왔으니 해군 박물관까지 걸음을 하게 됐지만 이곳은 한국인 방문객들에게는 큰 인기가 없는 곳인 듯싶었다. 민박집 추천 리스트 중에서도 이곳은 빠져 있었다.

앞선 두 탐방지에서 허탕을 쳤기에 이곳에서는 좀 진득하게 둘러봤다. 공항 검색대를 뺨칠 정도로 까다로운 보안 검색을 통과 한 후 입장을 했다. 입장료 3유로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전시물들이 다양했다. 해군이나 배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면 한 번쯤 방문해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배의 실물이 전시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축소된 모형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대포나 총기류, 칼과 같은 비교적 소형 장비들은 실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동양관에는 중국이나 일본, 베트남의 전통 함선들도 전시되어 있었지만 아쉽게도 우리나라와 관련된 것들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이 그 곳에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뒤로 하고 마드리드 시내를 가로질러 숙소로 향했다.

전체적으로 마드리드 여행은 허탕을 쳤고, 그만큼 아쉬움도 컸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왜? 다음에 다시 오면 되니까. 그때는 좀 더 알차게 탐방하면 되니까. 

 

 

 

 

 

 

 

* 해군 박물관: 마드리드 해군 박물관
   

 

 


 
▲ 솔 광장 마드리드의 핵심이라고 불리는 솔 광장. 각양각색의 희극인들이 쇼를 선보이며 관광객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사진 중앙에 빨간색 옷을 입은 광대는 공중부양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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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펠리페 2세 동상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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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레도, 그 골목길마다 숨 쉬는 역사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⑬] 역사도시 톨레도를 가다

 

15.02.05 12:19   최종 업데이트 15.02.05 12:19

 

 

 

 

 

 

 

 

 

 

 

 

 
▲ 톨레도 대성당 톨레도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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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이 코스는 이 로마시대 다리를 건너서 저기 궁전으로 넘어가면 좋을 것 같군. 그런 후에는 강변길을 걸으면서 트레킹을 마무리 해보는 거야.'

직업병인가? 필자는 스페인 도시여행을 하는 내내 머릿속으로 트레킹 코스를 짜고 있었다. 어느 코스로 가야 역사 유적을 연이어서 만날 수 있을까, 어떤 길이 사람들의 시선을 더 사로잡을 수 있을까, 어느 바르(bar)에 가야 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 등등... 그러면서 실없는 생각도 해보았다.

'나중에 리딩 할 일 있으면 반값에 한 번 해봐야겠다. 해외여행이라고 비싸게 할 필요가 있나? 반값에도 충분하지.'

고도 톨레도(Toledo). 로마시대에는 자치 도시가 있었고, 서고트 왕국 시절에는 도읍지였던 곳. 이슬람 무어인들도 요새로 사용한 곳이다. 이렇듯 2000년도 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톨레도를 탐방하다보니, 서울과 충남 공주에서 행한 역사트레킹이 생각났다.

동선을 잡기 위해 답사를 하면서 애를 먹던 일, 해당 유적지에서 무슨 설명을 해야 하나 하며 답답해했던 일. 그렇게 시작 전에는 전전긍긍했지만 트레킹이 종료됐을 때는 참가자들과 즐겁게 뒤풀이를 했던 일 등등... 그런 것들이 필자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갔다.

 

 

 



고추장 비벼먹고 톨레도를 향해

 
▲ 세르반테스 톨레도 성 인근에 서 있는 세르반테스 동상. 톨레도는 세르반테스의 주 활동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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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19일, 여행 17일째

한인 민박집에서 밥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터미널로 향했다. 안주인께서 특별식으로 닭백숙을 해놔서 고추장에 발라 먹었다. 닭백숙을 고추장에다 비벼서 밥과 함께 먹었더니, 속이 화끈거리기는 했지만 든든했다. 빵이나 치즈, 커피 등을 좋아하지만 필자도 역시 별 수 없는 한국 사람이었던 것이다.

톨레도는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약 70km 정도 떨어져 있다. 무정차 버스로 약 50분이면 도착할 수 있고 왕복 버스비도 약 10유로 정도로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다. 그래서 이곳은 스페인에 오면 꼭 한 번은 들러야 할 도시로 여겨진다.

 

 



 
▲ 톨레도 톨레도는 예로부터 철제 산업이 발달했다. 그래서인지 중세시대 기사들이 쓰던 칼과 방패들을 파는 기념품 가게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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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차창 밖의 풍광에 매료되다 잠깐 잠이 들었는데 벌써 종착지였다. 역시 톨레도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터미널에서 내려 구도심 쪽을 바라보는데 예사롭지 않은 풍광이었다. 옛 건축물과 성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데 마치 중세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일반적으로 톨레도 여행의 시작은 언덕길을 올라가 비사그라 문을 통해 톨레도 구 시가지에 진입하는 것이다. 이 비사그라 문은 카를로스 1세가 1550년에 축조한 문으로 일명 '성스러운 문'이라고도 불린다. 합스부르크가 출신인 카를로스 1세는 이 문의 정면에다 자신의 가문의 문장을 새겨놓았다.

 

 

 

독일 출신 스페인 왕, 카를로스 1세

 



 
▲ 알칸타라 다리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알칸다라 다리. 다리 끝 부분에는 방어를 위해 성채가 올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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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가 문장에도 보이듯 카를로스 1세는 당시 스페인 국왕이면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다. 독일 지방을 통치하는 황제가 스페인 국왕을 겸임할 수 있었던 건 결혼을 통해 왕실끼리 연결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약간 결이 다른 이야기인데 '정복왕' 윌리엄 1세(1028~1087) 같은 경우도 프랑스 노르망디 공이면서 영국의 왕이었다. 그는 영국의 왕이면서도 주로 프랑스 지역에 거주했다. 영어도 못했다고 한다.

카를로스 1세는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카를로스 5세로 불렸다. 그는 합스부르크 출신답게(?) 스페인보다는 독일 지역을 우선시 했는데 그로 인해 스페인 국민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의 집권 초기에 발발한 코무네로스(Comuneros) 반란의 원인 중에는 외국 출신 왕에 대한 반감도 한 몫을 했을 정도였다. 코무네로스 반란과 관련된 이야기는 앞선 여행기(관련 기사 : "<백설공주>에 나오는 세고비아성, 직접 보니...")에 잠깐 언급이 되어 있다.

집권 40년 동안 스페인에 있었던 시기가 고작 16년 밖에 되지 않았던,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였지만 그는 스페인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을 아들로 두었다. 그가 바로 스페인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펠리페 2세였다.

 

 

 

스페인 내전의 상흔을 간직한 곳, 톨레도 성

 



 
▲ 톨레도 성 스페인 내전 당시 격전지였던 톨레도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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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사그라 문을 지나 톨레도 성(Alcázar of Toledo)으로 향했다. 톨레도가 역사적인 장소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이곳에서 수많은 분쟁이 일어났다는 뜻일 게다. 그런 분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 바로 톨레도 성이었다.

톨레도 성은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데 멀리서보면 빈틈이 없는 단단한  하나의 성채처럼 보인다. 로마시대부터 궁성이 있었던 이곳은 수많은 세월을 거치는 동안 계속해서 증개축이 이루어졌다.

현재 톨레도 성의 원형은 카를로스 1세와 펠리페 2세 때 윤곽이 드러나게 된다. 지금의 톨레도 성은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완전히 파괴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그래서 멀리서 본 성의 형상은 고풍스럽지만 실제 외관의 벽돌 하나하나는 비교적 때가 덜 묻어 있었다.  

이렇듯 톨레도 성은 스페인 내전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공간이다. 그와 관련된 유명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소개를 해보겠다.

1936년 7월 27일. 당시 톨레도 성은 프랑코 휘하의 호세 모스카르도(José Moscardó) 대령이 사관생도들과 함께 방어를 하고 있었다. 외곽에서는 인민전선이 진을 치고 성을 포위한 상태였다. 인민전선은 모스카르도 대령의 16살 아들을 인질로 잡고, 톨레도 성을 포기하지 않으면 아들을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다. 그와 관련된 전화 통화 내용이다.

"나는 인민전선군 대장 바르델로 소령이오. 항복하지 않으면 당신 아들을 죽일 것이오."
"항복은 없소."
"최후통첩이란 말이오."

(중략)

"아버지. 저 루이스에요."
"아들아, 스페인 국민으로, 기독교인으로 만세 두 번을 외쳐라. 한 번은 그리스도를 위해, 다른 한 번은 스페인을 위해…."
"예, 아버지. 신이여 만세! 스페인 만세!"


탕탕

어린 소년의 죽음 때문인지 성 안에 있던 프랑코 군은 70일간 지속됐던 인민전선의 포위를 이겨냈다. 이런 일화 때문인지 톨레도 성은 복원과 함께 성역화 작업이 이루어진다. 70일간 계속된 인민전선의 혹독한 포위를 견뎌내고, 성을 지키는 최고 사령관의 어린 아들의 장렬한 죽음까지... 이곳은 이후 '스페인 내셔널리즘(민족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 되어버린다. 독재자 프랑코는 이를 놓치지 않고 톨레도 성을 선전장으로 활용하게 된다. 

 
▲ 비사그라 문 일명 '성스러운 문'이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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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에피소드와 관련하여 몇 가지 다른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먼저 대령의 아들이 전화 통화 중에 죽지 않고 한 달 후에 벌어진 인민전선에 대한 보복공습 때 총격을 당했다는 이야기다. 또 하나는 어린 아들의 죽음을 통해 인민전선의 잔악성을 고발함으로써 프랑코 측의 만행을 덮어버렸다는 이야기다. 당시 '가디아 시빌(Guardia Civil)'이란 공안조직이 다수의 남성 인질들을 죽였는데 그 만행을 덮기 위해 어린 아들의 죽음을 더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루이스의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스페인 내전을 기억하는 일일 것이다. 그것을 과거의 일로 돌리지 않고, 또한 서양 사람들의 일로 치부하지 않고 기억하는 일이 톨레도 성을 방문하는 우리들의 책무일 것이다.

 

 

 



정신 없었던 톨레도 성당

 


 
▲ 톨레도 성당 톨레도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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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근현대사의 아픔까지도 품고 있는 성을 지나, 필자는 톨레도 성당을 향해갔다. 아주 좁은 골목길을 따라서 갔다.


"예? 8유로요?"

멈칫했다. 무슨 성당 입장료가 그렇게 비싸단 말인가. 8유로면 우리나라 돈으로 만 원이 넘는 돈이었다. 그래도 발걸음을 돌릴 수 없어 표를 끊었다. 속으로 욕에 욕을 해대며 말이다.

톨레도 대성당은 페르난도 3세 재위시절인 1226년에 짓기 시작했다. 후기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이 성당은 완공 때까지 무려 187년이나 소요됐다. 오랜 연륜을 가지고 있고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인 만큼 이곳은 톨레도 여행의 필수코스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핵심 코스라서 그런지 성당 안에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같은 규모의 세고비아 성당은 한산했지만 톨레도 성당은 자칫하면 줄서서 관람해야 할 정도로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8유로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톨레도 대성당은 훌륭했지만 인파에 떠밀리는 것이 싫어서 서둘러 다음 탐방지로 향했다.

 

 



천혜의 요새 톨레도

 
▲ 좁은 골목길 톨레도의 골목길은 무척 좁다. 그런데 저 좁은 곳으로도 자동차가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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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탐방지는 톨레도 구시가지를 감싸고 있는 타호강과 알칸타라(Alcantara) 다리다. 톨레도가 오래전부터 전략적 요충지가 된 건 타호강 덕분이다. 톨레도의 구도심은 말발굽처럼 생겼는데 그 주위 3면을 타호강이 휘돌아 나간다. 그 3면은 협곡 형태를 띠고 있는 터라 톨레도는 천혜의 방어요충지가 되는 셈이다.

그런 타호강에 로마시대에 축조된 다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알칸타라 다리다. '알칸타라'는 아랍어로 '다리'라는 뜻이다. 알칸타라는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만큼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다. 톨레도가 수많은 분쟁을 겪은 도시인만큼 알칸타라도 부침이 많았다. 또한 협곡에 위치해 있는 터라 홍수가 나서 교각이 떠내려가기도 했다. 톨레도만큼이나 알칸타라의 역사도 파란만장했던 셈이다.

톨레도를 탐방을 하니 중세시대로 되돌아 간 느낌이었다. 물론 스페인 내전 같은 현대사도 떠올리기도 했다. 덕분에 유익한 해외 역사트레킹을 행했던 것이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톨레도에서 지인들과 함께 역사트레킹을 해보고 싶다. 대신 그때는 인원파악을 하느라 애를 좀 먹을 것 같다. 작은 골목길을 헤집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까.

 

 

 

 

 * 타호강: 타호강에 있는 또 하나의 오래된 다리. 산 마르틴 다리.

 

 

 

 

* 기러기 떼: 톨레도에서 본 기러기 떼. 흔히 볼 수 없는 모습이라서 한 컷.

 

 

 

 

 

 

 

* Monastery of San Juan de Los Reyes: 산 후안 수도원. 외벽에는 이슬람

왕국에 사로잡힌 기독교 포로들을 결박하기 위해 사용된 체인들이 걸려있다.

 

 

 

 

 

 

 

 

* Monastery of San Juan de Los Reyes: 외벽에 걸린 포로 결박용 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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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고비아의 자랑, 세고비아 성과 세고비아 성당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12편] 세고비아 2부

 

15.01.30 14:38 최종 업데이트 15.01.30 14:38

 

 

 

 

 

 

 

 

 
▲ 세고비아 성 일명 백설공주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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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교의 지상 구간 관찰과 원거리 수원지 조망 등등... 세고비아 신시가지 일대 탐방은 상당히 유익한 시간이었다. 내친김에 '호랑가시 숲'이라고 불리는 수원지까지 가서 시작점을 직접 관찰해 보고 싶었으나 다음을 기약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대충이나마 시작점을 조망했으니 이제 종료점을 향해 가야 할 차례였다. 수도교의 종료점은 일명 '백설공주성'이라 불리는 세고비아 성(Alcázar of Segovia)이다.

 

 



'큰 시장'보다 더 북적거리는 '작은 시장'

 


세고비아 성은 구시가지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그곳을 가려면 수도교와 아조구에호(Plaza de Azoguejo) 광장을 다시 거쳐 가야 했다. 스페인어로 '아조구에호(azoguejo)'는 '작은 시장'을 뜻하고, 마요르 광장(Plaza de Mayor)할 때 '마요르(mayor)'는 '큰 시장'을 뜻한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아조구에호 광장보다 마요르 광장이 더 크고 북적거려야 하지만 세고비아에서는 좀 달랐다. 수도교 때문인지 '작은 시장'이 '큰 시장'보다 사람들이 더 붐비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 가는 데 돈 간다고, 실제로 작은 시장 쪽이 상권도 더 발달했다. 그러고 보면 건축물에도 새옹지마라는 속담이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전편에서도 언급했듯이 수도교를 두고 옛날 세고비아 사람들은 악마의 작품이라고 의문을 표시하며 경원시했지만 지금은 세고비아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고마운 존재가 아닌가?

수도교가 잘 보이는 그 작은 시장에는 '코치니요'로 유명한 맛집이 있었다. 코치니요는 새끼 통돼지 요리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통구이라면 고기를 나무꼬치에 꽂아 돌리는 것을 생각하지만 코치니아는 화덕에다 구운 요리다. 이 요리는 세고비아에 가면 꼭 한 번은 맛보아야 할 이 지역의 명물이라고 한다.

 

 

 


 
▲ 세고비아 성당 마요르 광장 쪽에서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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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맛집 앞에서 필자는 반가운 얼굴들을 만났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함께 걸었던 순례팀과 재회를 한 것이다. 순례팀은 막 점심식사를 하려는 순간이었고 필자는 광장을 가로 질러 그 맛집 앞을 지날 때였다. 얼마나 반갑던지.

"여기서 또 만나네요. 역시 만날 사람은 만난다니까요!"

헤어진 지 겨우 3일 밖에 되지 않았지만 정말 반가웠다. 단체여행을 하다가 갑자기 뚝 떨어져 나가듯 단독여행을 했으니 더 그 외로움이 더 컸고, 그래서 더 반가웠던 것이다. 순례팀도 마드리드 인근 도시를 탐방 중이었다. 마드리드 민박집을 베이스캠프 삼아 인근 세고비아나 톨레도 같은 인근 도시들을 당일치기로 여행하고 있었다.

필자도 자리를 꿰차고 앉아 고기를 뜯고 싶었지만 이미 식사를 한 터라 다음을 기약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대신 그날 밤에는 필자도 마드리드 민박집으로 합류하기로 했다.

"밤에 봬요! 집에서!"

 

 


 
▲ 세고비아 성당 세고비아 성 방면에서 바라본 모습. 아래쪽에는 도시를 감싸고 있는 성곽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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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새 들의 놀이터 세고 비아 성당

 



세고비아 성을 가기 위해 먼저 들러야 할 곳은 마요르 광장에 있는 세고비아 대성당이었다. 세고비아 대성당은 1525년부터 1577년까지, 52년 동안 건축된, 규모가 상당히 큰 성당이다. 노을이 질 무렵, 작은 첨탑들이 황새들의 놀이터로 이용될 만큼 세고비아 대성당은 뾰족한 고딕양식이 일품인 곳이다. 

현재의 세고비아 대성당은 옛 성당을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옛 성당은 세고비아 성 인근에 있었는데 1520년에 발발한 코무네로스(Comuneros) 반란 때 파괴됐다. 코무네로스 반란은 당시 집권자인 카를로스 1세의 과중한 세금 부담 등에 반대하여 세고비아, 톨레도, 바야돌리드 등 주요 도시에서 시민들이 봉기한 사건을 말한다. 이들 도시에서는 자치조직인 '코무니다드'가 만들어졌는데 그 구성시민들을 '코무네로스'라고 불렀다. 그 이름을 따서 코무네로스 반란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반란군들은 옛 성당을 접수하여 세고비아 성의 성벽부근을 방어하고 있는 카를로스 1세군을 격파할 생각이었다. 그런 공방전 끝에 옛 성당은 파괴되고, 5년 후 현재의 자리에 대성당이 지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듯 현재의 대성당은 건축 당시에는 전쟁의 상흔을 극복하고자 지어졌고, 지금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아름다운 대성당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대성당을 위에서 보면 3층짜리 아치형 지붕이 층층이 쌓아 올려진 것처럼 보인다. 그 사이사이에는 수많은 스테인글라스들이 성당을 돋보이게 해주고 있었다. 세고비아 대성당에서 가장 백미라고 할 수 있는 곳은 높이가 90m인 종탑이다. 이 종탑은 1614년에 세워졌는데 멀리서 보면 왕관을 올려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곳에 올라서면 세고비아 시내를 시원스럽게 조망할 수 있다고 한다. 

 

 

 


 
▲ 세고비아 좁은 세고비아의 구 시가지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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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였던 세고비아  성

 



대성당을 뒤로 하고 좁은 골목길을 따라 일명 '백설공주 성'이라고 불리는 세고비아 성을 향해갔다. 세고비아 성은 월트디즈니사의 <백설공주>에 나오는 성의 모델이 됐다고 해서 그런 별명을 얻게 됐다.

애니메이션의 배경 모델이 될 만큼 세고비아 성은 매우 아름다웠다. 또한 독특했다. 하지만 이곳이 처음부터 그런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공간은 아니었다. 성이 들어서기 전에는 요새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 기원은 로마 점령기 이전의 셀티베리안(Celtiberians)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다.

이곳은 수도교의 종착점이 될 정도로  로마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전략적 요충지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즉, 거의 2000년 전부터 중요한 거점으로 쓰였다는 뜻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코무네로스 반란 때에도 이 일대는 격전지였다.

 

 

 


 
▲ 해자 세고비아 성의 해자. 해자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변을 판 후 물을 채워넣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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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고비아 성을 두고 안내책자에는 배 모양을 하고 있다고 표현했다. 그 표현이 적합한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이 성이 '붕' 떠 있다는 것이다. 에레스마 강(Eresma)과 클라모레스 강(Clamores)이 휘돌아나가는 작은 협곡에 위치해 있는 이 곳은 연결다리를 폐쇄시키면 외부와는 격리가 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천혜의 요새였던 셈이다. 한편 그 옆을 흐르는 강들은 유량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수도교를 건설해 그 먼 곳에서 물을 끌어 왔던 것이다.

그렇게 협곡 요새로 기능하던 곳이 13세기 이후부터는 왕이 거주하는 왕궁으로 변모 했고, 그 이후부터 수세기동안 증개축이 거듭되었다. 세고비아 성은 감옥으로도 쓰였는데 마드리드에 있던 왕실 법정이 옮겨옴에 따라 죄수들을 격리할 공간을 마련했기에 그렇게 된 것이다.

세고비아 성은 1862년에 발생한 큰 화재로 거의 모든 게 파괴되는데, 20년 후 대대적으로 복원 공사에 나서게 된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성은 1882년에 재건축된 것이다. 한편 세고비아 성은 현재 왕립 포병학교의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한쪽 면에는 각종 대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 세고비아 성 성 앞에서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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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떠나면 고생, 하지만 떠나야 하는 운명

 



세고비아 탐방을 마친 후 필자는 마드리드행 버스를 탔다. 이제 순례팀이 묵고 있는 한인 민박집을 향할 차례였다. 한인 민박집에서 순례팀을 다시 만나니 마치 가족들과 상봉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 와중에 누가 이런 말을 했다.

"집 나가니까 고생이지?"

필자는 그 말에 깊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런 말을 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지만, 떠나야지만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게 우리의 운명이잖아요!"

 

 



 
▲ 세고비아 성 세고비아 성에 전시된 중세 기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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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

1. 마드리드에서 세고비아까지는 약 90km 정도 떨어져 있다. 버스로는 1시간 10분 정도 소요된다.

2. 추천여행 노선: 터미널 → 수도교 → 세고비아 성당 → 세고비아 성
천천히 둘러보면 3~4시간 정도 소요된다. 

3. 시간이 되신다면 신시가지 방면에 있는 수도교 지상 구간을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정수장 안쪽의 정수시설을 관찰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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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고비아 수도교에서 느낀 절대음감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11편] 세고비아 1부

 

15.01.28 11:09   최종 업데이트 15.01.28 11:09
곽동운(artpunk)

 

 

 

 

 

 

 

 

 

 
▲ 수도교 구시가지 방면에서 본 수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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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고비아와 '세고비아'는 무슨 관계?

 


평생 그곳을 가보지는 않았지만, 이름만 들어도 친숙한 도시들이 있을 것이다. 영화 <카사블랑카> 때문에 유명해진 모로코의 카사블랑카, 재즈의 발상지인 미국 남부의 뉴올리언스 등등. 필자도 그런 도시가 있다. 이번에 소개할 세고비아가 바로 그곳이다. 

예전에 통기타가 하나 있었다. 지인한테 물려받은 것인데 아무리 조율해도 그 음이 그 음 같은 그런 통기타였다. 그래도 열심히 튕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음유시인까지는 못되더라도 좋아하는 후배 앞에서 폼 좀 잡아보겠다고... 그때 튕기던 기타가 바로 '세고비아 기타'였다. 그런 기억 때문에 세고비아는 필자에게 전혀 낯선 도시가 아니었다.

세고비아 기타는 유명 기타리스트인 안드레아 세고비아의 이름을 따서 상품명으로 삼았다. 안드레아 세고비아는 다른 악기용으로 작곡된 음악들을 기타 연주에 적합하게 편곡을 하는 등 현대 기타 연주의 대가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안드레아 덕택에 '세고비아 기타'가 이름을 얻게 됐고, 그 상품명 덕분에 세고비아라는 도시가 우리 귀에 익숙해진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세고비아에 가면 안드레아와 관련된 기타 박물관 같은 것이 있는 줄 알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도시 세고비아와 안드레아 세고비아와는 별 관계가 없다. 그는 남부인 안달루시아 출신이고 데뷔도 안달루시아에서 했다. 그냥 그의 이름에 '세고비아'라는 도시 이름이 들어간 것뿐이다. <강철군화>의 저자 잭 런던처럼 그냥 사람 이름에 도시명이 포함된 것이다.

 


 
▲ 수도교 야경 상상력을 고조시켰던 수도교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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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교와 절대음감

 


2014년 11월 17일, 여행 15일째

오후 6시에 발라돌리드에서 세고비아행 버스를 탔다. 두 도시의 직선거리는 90km도 채 되지 않아 늦어도 1시간 20분 정도면 도착할 줄 알았다. 그래서 세고비아에서 저녁 식사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행이 계획대로만 진행되는가? 버스가 인근 동네 구석구석을 다 정차하고 다녔다. 심지어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기도 했다. 더 가관인 것은 중간에 버스에서 내려 다른 버스로 갈아타야 했다는 점이다. 옆쪽에 있던 마드리드 청년이 일러주지 않았으면 아마 다른 행선지로 갔을지도 몰랐다.

결국 오후 8시가 넘어 세고비아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긴장을 했는지 딱히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래서 세고비아의 명물이라는 수도교(aqueduct)를 찾아갔다. 어차피 갈 거 미리 알아두고 다음날 꼼꼼히 살펴보자는 속셈이었다.  

"이야, 정말 환상적이네"

수많은 아치들로 이루어진 수도교의 장엄한 모습이 화려한 조명 빛을 받아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책에서나 보던 로마시대의 수도교를, 그것도 조명이 빛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한밤 중에 보는 수도교의 아치는 리듬감이 살아 있는 듯했다. 로마네스크 기둥을 타고 오르는 선율이 아치에서 곡선을 그린 후 위층으로 올라가 고음을 잡는 그런 모습... 그렇게 아치 기둥을 타고 나온 음악은 어떤 것일까? 한 밤의 세레나데일까 아니면 카이사르 군대가 불렀을지도 모를 행진곡? 세고비아에 세고비아가 없다지만 필자에게는 수도교가 '절대음감'처럼 보였다. 시각의 청각화를 통한 음악 연상해보기! 어쩌면 이런 것도 여행의 재미다. 해당 유적에 상상력을 더해 본다.

 

 



 
▲ 수도교 신시가지에서 바라 본 수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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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들의 기술력이 집약된 거대한 수도교

기둥: 120개
아치: 167개
관로: 25*30*30cm
총길이: 16,220km
최고높이: 28.10m
교량구간: 728m

수도교의 스펙이다. 수도교는 로마시대인, 기원 후 1~2세기에 만들어진 건축물이다. 당시 이베리아반도는 로마의 식민지였다. 로마인들은 곳곳에 식민도시를 세웠는데 세고비아도 그 중 하나였다. 정착지는 세워졌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세고비아는 넓은 평원에 자리 잡고 있는 터라 대규모로 용수를 공급할 수 있는 수원지와 거리가 멀었다. 수도교는 그런 고민의 산물이었다. 로마인들은 외곽에 있는 프리오 강(Rio Frio)에서부터 중심부까지 수로(水路)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여 무려 16km에 달하는 수로가 만들어졌다.

수도교는 그 수로의 교량구간이다. 즉 16km 송수관 중 728m 정도가 아치형 다리 위에 자리 잡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로마인들은 왜 수도교라는 교량을 만들었을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그냥 수로를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하물며 시멘트도 없던 시대에 그런 거대한 구조물을 축조한다는 건 엄청난 공사였기 때문이다.

수도교를 잘 즐길 수 있는 곳은 아조구에호(Plaza de Azoguejo) 광장인데 그곳을 중심으로 양 옆쪽을 보면 왜 로마인들이 거대한 아치형 교각을 세웠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양 옆의 언덕으로 인해 광장은 협곡 형태를 띠게 된다.

이제껏 수로를 타고 온 물이 협곡으로 떨어지면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말 것이다. 협곡을 넘어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인위적인 구조물을 연결하여 최종목적지까지 물을 도달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양편을 이으려고 하니 거대한 구조물이 나타났고, 교량 형식이니 아치가 그려졌다. 또한 협곡의 높이가 있으니 복층까지 올려 졌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세고비아의 수도교가 탄생됐던 것이고, 그 가치를 높이 사 198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되기에 이른다.

 



 
▲ 세고비아 세고비아 외곽에서 바라본 사진. 뒤쪽에 보이는 산에서 물길이 시작된다. 전날에 눈이 왔는지 봉우리에 눈이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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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 만든 수도교?

옛날 옛적에 이 거대한 교량은 악마의 구조물이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접착제도 없이 큰 돌조각들이 무지개를 그리며 놓여 있으니, 눈앞에서 보고도 그런 의심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관련해서 전설이 하나 있다.

 

매일같이 물 주전자를 들고 비탈진 길을 오르내려야 했던 소녀가 한 명 있었다. 일이 고된 나머지 소녀는 새벽닭이 울기 전까지 자신의 집까지 물길을 내주겠다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갔고,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기에 이른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소녀는 비극적인 상황을 모면할 수 있게 열렬히 기도를 하게 된다.

그동안 악마는 수로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태풍이 발생하여 일에 차질이 생기게 된다. 그러다 갑자기 새벽닭이 울게 됐는데 그때 악마는 돌조각 하나만을 세우지 못한 채 건축물을 다 완성시킨 상태였다. 돌조각 하나 때문에 거래는 무산됐지만, 수도교는 온전히 그 자리에 생성됐고 소녀의 영혼도 빼앗기지 않게 됐다.

소녀는 마법 같았던 지난밤의 일을 세고비아 시민들에게 실토하게 됐고, 이에 사람들은 아치를 통과한 물은 유황 성분이 제거된 성수라고 여기며 새로운 건축물을 기쁘게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전설에도 내포되어 있듯이 옛날 사람들 입장에서는 거대한 수도교가 경외적인 존재였을지 모른다.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는 축조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수도교가 자신들의 식수를 공급해주고 있으니, 그 존립 자체를 인간 영역 밖에서 끌어오고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수도교를 두고 거대한 '마법덩어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세고비아 시민들은 19세기 중반까지 그 '마법덩어리'에서 물을 공급받았다.

 

 



 
▲ 수로 수로의 지상구간. 수도교의 맨 위쪽에도 이런 관로가 놓여 있다. 사진 중앙, 관로가 끝나는 부분에 있는 건물이 정수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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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장 시설까지!

기둥들을 따라서 가봤다. 수로의 지상구간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세고비아는 수도교를 중심으로 그 안쪽은 구시가지이고, 그 밖은 신시가지로 분류된다. 수로의 지상 구간은 신시가지쪽에 있었다.

한 10분 정도를 걷다보니 정수장과 함께 드디어 지상구간이 나왔다. 전설에 유황이 제거됐다고 언급됐듯이 정수장도 수도교와 함께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정수는 이물질을 물에 침전하는 방식으로 행해졌다. 정수장에는 심도가 깊은 물탱크를 만들었는데 그 물탱크에 모래나 황 같은 불순물들을 침전시키고, 깨끗한 윗물만 빠져나가는 식으로 정수시스템을 만들었던 것이다. 간단한 구조였지만 그들의 지혜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지상 구간의 수로는 말 그대로 수로였다. 화강암을 깎아내고 그 위에 25*30*30cm 규격의 홈을 파 내 관로를 삼은 것이다. 수도교의 맨 위 부분도 그렇게 관로가 놓여 있다. 고대 로마인들의 건축기술에 다시 한 번 감탄을 했던 대목이었다.

지상 구간을 탐방하다 길을 잃고 말았다. 궁금했던 것들이 풀려나가는 재미에 빠져 있다 보니 길을 잘못 든 것이다. 덕분에 세고비아의 신시가지를 갈지(之)자로 마구마구 돌아다녔다. 그렇게 다니다보니 수로가 시작되는 산을 더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눈이 왔는지 산봉우리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전날에는 수도교에 상상력을 더했다면, 그날은 수도교를 더 면밀하게 탐구한 날이 됐다. 문화유적 앞에서 멋지게 사진을 찍는 것도 좋지만 그 문화유산에 상상력도 더해 보고, 더 꼼꼼히 관찰해 보는 것도 재미다. 여행의 큰 재미. 세고비아 여행은 다음편으로 계속 이어진다.   

 

 

  

 
▲ 정수장 신 시가지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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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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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옛 도시에 남겨 놓은 물음표들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⑩] 바야돌리드 2부

 

15.01.26 17:02  최종 업데이트 15.01.26 17:04

 

곽동운(artpunk)

 

 

 

 

 

 

이전 여행기에서 'Valladolid'를 '발라돌리드'라고 표기를 했으나 어떤 독자분이 그 표기가 합당하지 않다는 고견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번 여행기부터는 '바야돌리드'로 표기를 수정했습니다. 더 정확하게 사실관계를 확인한 후 기사작성에 임하겠습니다. 고견을 주신 독자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 기자말

 


전편에도 언급했듯이 바야돌리드는 유서가 깊은 도시다. 그래서 이 도시와 관련된 역사 인물들도 많다. 먼저 펠리페 2세가 있다. 그는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투르쿠를 물리쳐, 유럽에서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다. 그 레판토 해전에서 승리한 스페인 함대를 두고 무적함대라는 별명이 붙었다. 스페인 축구대표팀을 두고 '무적함대'라고 칭하는 데 그 명칭의 기원은 펠리페 2세 치하의 스페인 함대였던 것이다.

이 도시에서는 전 유럽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켜봤던 결혼식도 거행됐었다. 카스티야 왕국의 왕위 계승자 이사벨라 1세와 아라곤 왕위 계승자 페르난도 2세가 그 결혼식의 주인공들이었다. 촉각을 곤두세웠다는 것은 방해자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왕실의 결혼식이었지만 그들은 추격자들을 따돌리며 예식을 올렸어야 했다. 그만큼 이 결혼식은 '세기'의 웨딩마치였다.

이런 정치인들 이외에도 대문호인 세르반테스와 탐험가 콜럼버스가 바야돌리드와 인연을 맺고 있다.

 

 

 

산타크루즈 궁과 '황금' 도서관

 


 
▲ 산타 크루즈 궁 산타 크루즈 궁(Santa Cruz Place). 수도원의 회랑식으로 지어진 궁. 사진 사진 아래에는 해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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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산타크루즈 궁(Santa Cruz Place)로 향했다. 1486년 멘도사 추기경에 의해 건립이 된 산타크루즈 궁은 4년여의 기간 동안 지어진 건물이다. 산티아고 대성당이 완공되는 데 150년 이상 걸렸던 것에 비하면 무척 빨리 시공된 셈이다.


공사기간이 짧았음에도 이 궁전은 건축 중에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게 된다. 처음에는 고딕 양식으로 지어지다가 이후에는 르네상스 양식으로 전환됐다. 그러다 18세기에는 벤츄라 로드리게스가 신 고전양식을 가미하여 궁을 손보게 된다.

산타크루즈 궁은 반원형의 아치가 인상적인 3층 건물이다. 각층은 수도원 형식의 회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왕이 거주했던 궁치고는 상당히 소박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런 소박함 중에서도 사치스러운 공간은 있었다.

2층에 예배당과 함께 도서관이 있었는데 고 장서들이 번쩍번쩍 빛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금테를 두른 황금 도서관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 장서들은 그레고리 페르난데즈가 모은 것들이란다. 책값만 해도 엄청나다고 한다.

 

 

 

 

 

▲ 황금 도서관 산타크루즈 궁에 있는 도서관.

유리 너머로 찍어서 좀 깨지게 나왔다.  

 

 

 

 



대학도시 바야돌리드와 세르반테스

 


산타크루즈 궁의 화원을 가로 질러가면 바야돌리드 대학의 입구가 나온다. 바야돌리드 대학은 1241년에 건립됐는데 1254년에 등장한, 그 유명한 살라망카 대학보다 더 오래된 대학이다. 사실 바야돌리드 대학의 모태는 팔렌시아(Palencia : 동부에 있는 '발렌시아'와 다른 도시) 대학이었다. 팔렌시아 대학은 1212년에 건립됐다. 이후 바야돌리드로 이전하여 더 큰 발전을 이루게 된 것이다.

시가지에는 바야돌리드 단과대들이 분산되어 있다. 또한 2002년에는 대문호인 세르반테스 이름을 딴 미구엘 세르반테스 대학(Miguel de Cervantes European University)이라는 사립대학도 세워졌다. 그래서 이 도시 자체는 커다란  캠퍼스 같다는 느낌이 든다.

 



 
▲ 세르반테스 생가 바야돌리드에 있는 세르반테스의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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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에는 세르반테스의 생가도 있다. 세르반테스의 아버지는 귀족 출신이었지만 무능했다. 그 여파로 고향을 등지고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바야돌리드도 그 중 하나였다.


세르반테스도 앞서 언급한 레판토 해전에 참전했다. 전투 중에 그는 왼쪽 팔에 큰 부상을 당한다. 그 때문에 평생 왼쪽 팔을 쓰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레판토 외팔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될 정도였다.

하지만 설상가상이라고 그의 불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타고 있던 배가 납치되어 5년 동안 포로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돈키호테>도 세비야에 있는 감옥에서 구상을 했다고 하니, 세르반테스의 삶도 그 자체로 한 편의 소설인 셈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필자가 생가를 방문했을 때는 휴관을 하고 있었다. 안타까웠지만 발길을 돌려야 했다.

한편 이 도시에는 학교만 많은 게 아니다. 궁전도 많다. 앞서 언급한 산타크루즈 궁외에도 피멘텔 궁(Palace Pimetel)이나 비베로 궁(Palace Vivero) 등 여러 궁전 건물이 있다. 특히 비베로 궁은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라 1세와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가 결혼식을 올린 곳이기도 하다.

 

 

 


 
▲ 콜럼버스 동상 거대한 콜럼버스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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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9년 행한 두 사람의 결혼으로 인해 스페인의 국토회복운동은 더욱더 활기를 띠게 된다. 이후 마침내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세력들이 축출되기에 이르는데 그때가 1492년이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아 떠난 그 해였다.


바야돌리드는 콜럼버스가 숨을 거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기차역 앞에 있는 콜론 광장이라는 곳에는 그의 동상이 크게 세워져 있었다. 워낙 동상이 커서 그런지, 철없는 동네 아이들은 그 동상에 올라가서 놀기도 했다.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바야돌리드 대성당

 

 


 
▲ 바야돌리드 대성당 바야돌리드 대성당(Valladolid Cathedral). 뒤쪽으로는 산타마리아 안티구아 교회가 보인다. 대성당은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고, 안티구아 교회는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두 건물이 잘 보이는 카페가 있는데 그곳에 앉으면 서양미술사 공부가 저절로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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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야돌리드 대성당 재정난에 휩싸여 아직까지도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정돈되지 않은 성당의 뒤편을 담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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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소개할 곳은 바야돌리드 대성당(Valladolid Cathedral)이다. 이 대성당은 우여곡절이 많은 건물로 아직까지도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1595년 9월, 교황 클레멘스 8세의 승인에 의해 바야돌리드에 새롭게 주교 관할구가 설치된다. 이에 시 위원회는 에스파냐 땅에서 가장 큰 성당을 짓기로 결의 한다.


당시는 국왕 펠리페 2세가 바야돌리드에 거주하며 에스파냐를 통치하던 시기였다. 펠리페 2세의 고향은 이곳 바야돌리드였다. 왕이 거주하니 이 도시는 사실상의 도읍지였던 셈이다. 도시에 주교 관할구가 생성됐고, 도읍지 역할까지 하고 있으니 에스파냐 땅에서 가장 큰 성당을 짓겠다는 시 위원회의 결의가 결코 허망한 것은 아니었다.

 

 

 


 
▲ 산타마리아 안티구아 산타마리아 안티구아 교회(Santa Maria Antigua).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이다. 언뜻보면 예배당이 아니라 성처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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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세상 일이 생각만큼 쉬운 일이겠는가? 1606년, 펠리페 3세는 수도를 마드리드로 이전한다. 이에 도시의 정치적 위상도 추락하게 된다. 중심권에서 벗어나니 시 재정도 그만큼 타격을 입게 됐고, 대성당의 건립에도 악영향을 끼치게 됐다. 결국 대성당 건립은 미완으로 남은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편 바야돌리드 대성당 뒤편에는 산타마리아 안티구아(Santa María Antigua) 교회도 있다. 필자는 그 두 건물이 잘 보이는 바르에 앉아 느긋하게 커피 한 잔을 마셨다. 대성당은 에레라(Herrerian)라는 스페인식의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반면, 안티구아 교회는 길쭉한 종탑이 인상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져 있었다. 그 둘을 비교하면서 바라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었다. 참고로 안티구아 교회는 마요르 광장에 서 있는 콘데 안스레스에 의해 12세기에 첫 삽을 떴다.

 

 

 

 



정교한 석조 양식으로 유명한 산 파블로 교회


 
▲ 산 파블로 교회 산 파블로 교회(San Pablo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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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탐방지는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 건물인 산 파블로 교회(San Pablo Church)다. 섬세한 조각상들이 여행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이 건물은 1270년 경에 처음으로 짓기 시작했다. 이후 1550년 경에는 건물 정면을 섬세한 조각들로 새겨 넣게 된다.


이렇게 건물 정면을 정교하게 꾸미는 기법을 두고 파사드(facade)라고 한다. 파사드는 건물을 돋보이게 할뿐더러 자체의 위엄을 높이는 형식으로 작동된다. 이렇듯 파사드가 적용된 산 파블로 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딕 양식 건물로 손꼽히고 있다.

사진을 찍으려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몇몇 석조상들은 훼손이 된 상태였다. 인물을 형상한 조각들이었는데 어떤 것은 팔다리가 잘려나가기도 했고, 어떤 것들은 목이 없기도 했다. '시간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석조상들에도 적용됐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 산 파블로 교회 떨어져 나간 장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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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파블로 교회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쇠락한 제국의 한 귀퉁이를 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저런 화려한 장식들 이면에 드러나지 않은 당시 스페인 백성들의 노고를 떠올리기도 했다.


'저런 화려한 건축물이 나타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백성들의 피와 땀이 필요했을까? 또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수탈은 어떻고?'

솔직히 필자는 바야돌리드 대해서 잘 몰랐다. 하지만 그곳에 가지 않았으면 무척 후회했을 것 같다. 생각지도 못한 보물 상자를 얻은 느낌이 들 정도로 흥미로운 여행이었으니까. 그렇다고 화려한 유물들을 탐방하며 감탄사만 연발하지는 않았다. 많은 물음표도 남기고 왔다. 그런 물음표들은 다음 여행을 위한 밑거름으로 삼을 생각이다. 단순히 사진을 찍기 위해 옛 도시를 가는 것은 아니니까….

 

 



도움말

 

1. 바야돌리드는 마드리드에서 버스로 약 2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마드리드 국제 공항에서 출발하는 공항버스도 있다. 그 버스는 약 3시간 정도 소요된다.

2. 마요르 광장을 중심으로 반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시티투어를 할 수 있다. 소요 시간은 3~4시간 정도. 단 길이 좀 복잡하니 주의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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