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초순부터 8회에 걸쳐 영등포50플러스에서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강의를 진행했습니다. 열린교육 과정이라는 방식을 통해 프로그램을 개설을 했지요. 열린교육은 말 그대로 누구나가 다 강사가 될 수 있는 제도입니다. 이전 포스팅에서도 언급을 했었지요.

그런데 반응이 좋았는지 제 강의가 씨드팩토리(seed factory)에 선발이 됐네요. 씨드팩토리는 열린교육 프로그램 중에서 반응이 좋은 강의를 뽑아 한 번 더 강의를 할 수 있게 하는 제도입니다. 일단 3대1의 경쟁률을 뚫고 제 강의가 씨드팩토리에 선정됐으니 박수를!!! 엄청 크게 박수를!!! ^^;

그래서 영등포50플러스에서 4월 20일부터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심화과정을 개설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강의들은 딱 기본적인 트레킹 코스 위주로 진행이 됐다면 이번 심화과정은 좀 더 보폭을 넓혔습니다. 좀 더 다양한 코스들을 탐방한다는 뜻입니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해 주세요. 벌써부터 마감이 임박해오네요. 아 이 넘의 인기는... ^^;













이전 포스팅에서 제가 멧돼지와 격렬(?)하게 한판 붙었다고 한 적이 있지요.


에헴~ 사실은 멧돼지를 만나 단거리 달리기 선수처럼 열심히 도망을 갔다는... ^^;

그렇게 멧돼지 녀석과 조우한 곳을 다시 한 번 탐방하러 갔답니다. 

사실은 썩 내키지는 않았습니다. 멧돼지 녀석을 또 만날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하지만 해야 할 일이라면 해야합니다. 또 녀석을 만나면 삼겹살로 구워 먹으면 되는 거고! ^^;

그렇게 숲길을 따라 걷다보니 알록달록한 빛깔을 발하고 있는 단풍들이 눈에 띄더군요.

"참, 좋다!"

아직까지는 단풍이 짙게 물들지는 않았습니다. 제대로 색감이 실리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겁니다. 

하지만 조금 덜 물들었어도 저는 좋더군요. 그렇게 단풍들이 드리워진 숲길을 걷고 있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난 이 숲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겠구나. 숲길을 떠나면 항상 숲길이 그리웠고 다시 숲길로 들어서려는 생각 뿐이었으니까... 그러고보면 난 숲길 중독자구나!'
    
그렇습니다. 저는 숲길중독자였습니다. 그걸 이제서야 깨달았네요. 제가 다른 사람들한테 스스로를 

'커피중독자'라고 칭하기를 여러번 했는데 '숲길중독자'라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습니다. 

별로 영양가 없는 '커피중독자'보다는 '숲길중독자'가 훨씬 더 낫지요? 그렇게 저는 멧돼지골에서 귀중한 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았답니다. 

저랑 같이 숲길중독자 되실 분 어서 오십시오!!!^^;




















저는 본 블로그 말고 카페를 하나 운영하고 있답니다.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이라는 명칭의 카페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던 카페였습니다. 


비슷한 명칭들이지만 제가 서울학에 집중하기 위해서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으로 네이밍을 변경한 것입니다. 어차피 둘 다 '역사트레킹'이 언급되니 큰 혼선을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카페명을 변경하면서 로고도 바꿨답니다. 한동안 이 로고로 밀고 나갈 생각입니다. 아직까지는 파리가 날리는 카페지만 언젠가는 사람들로 가득해질 거라고, 즐거운 상상을 해보며 포스팅을 마칩니다! ^^;


아참 아래의 작은 로고는 개인 명찰이나 손수건 제작 때 사용할 기본 도안입니다. 


'simple is best' 라고 굳이 복잡하게 로고를 만들 필요가 없을 거 같아서 저걸 사용하려고요. ㅋ







   








































* 각자석: 한양도성은 공사실명제를 도입했다. 각 구간마다 책임자들의 이름을 돌에 새겨 넣었다. 2015년에 복원된 흥인지문 북쪽 구간에 새겨진 각자들. 당시에 새겨진 글자를 본떠서 새로운 돌에 새긴 듯하다.

          









알고보면 더 재밌는 길, 서울성곽길


성돌에 맺힌 백성들의 피와 땀을 기억하며




17.04.10 11:12   최종 업데이트 17.04.10 11:12





             





    

        

      ▲ 서울성곽 인왕산 구간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서 두고 걸으면 두 발이 아프다!"
 
한양도성, 즉 서울성곽을 두고 기자가 역사트레킹에 참가한 분들에게 했던 말이다. 찰리 채플린의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유명한 명언을 빗대서 저런 말을 했던 것이다.

기자가 언급한 것처럼 서울성곽길은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니다. 서울성곽은 네 개의 산(낙산-인왕산-남산-북악산)을 연결해서 만든 방어용 시설이다. 지금처럼 성곽길 트레킹을 하라고 만든 관광 자원이 아니라는 뜻이다. 애초 목적이 방어용 시설이었기에 경사도가 급할 수밖에 없었다. 수비목적의 산성으로 축성됐기에 경사도가 급하면 급할수록 방어력은 더 높아졌던 것이다. 물론 구간에 따라서는 아주 완만한 길도 있다.

어쨌든 산을 연결해서 만든 성곽이기에 한양도성을 걸을 때는 그에 걸맞은 준비가 필요하다. 걷기 편한 신발을 신고, 옆으로 메는 가방이 아닌 아웃도어 배낭을 준비하고, 생수와 행동식도 넉넉히 준비하고... 그렇게 세심하게 준비를 한 후 떠나야 더 알차게 서울성곽 트레킹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외부적인 준비뿐만 아니라 지식적인 준비도 해보자. 알고 떠나면 더 재밌는 성곽길 투어가 될 테니까.  




 ▲ 서울성곽 북악산 구간.   

       




전쟁이 난 것도 아닌데 500명 이상이 죽었다

조선을 개국하고 한양으로 천도한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도성을 쌓으라고 명한다. 그래서 1396년(태조5) 1월 9일부터 2월 28일까지 한양도성이 축성된다. 서울의 네 개의 산을 연결하여 만든 성곽은 그 길이가 무려 18.6km에 달했다. 49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18km가 넘는 성곽을 쌓았던 것이다.

그렇게 빨리 도성 축조가 가능했던 이유는 많은 백성들을 공사에 투입했기 때문이다. 약 11만 명이 넘는 인원이 현장에서 땀방울을 쏟아냈으니 50일도 안 되는 시기에 그렇게 엄청난 결과물을 도출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한양 인구를 10만 명 남짓으로 추정하고 있으니 징발된 인원수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태조시기에 쌓은 성은 7할 이상이 토성(土城) 구간이었다. 돌이 아닌 흙으로 축성했으니 빠르게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토성은 석성(石城)보다는 견고함이 떨어진다. 성체의 형상도 반듯하지 않고, 비바람에도 취약할 수밖에 없다. 또한, 여장 같은 방어력을 증대시키는 시설을 설치하기도 어렵다.





* 탕춘대성: 탕춘대성의 성돌. 돌의 앞면부와 뒷면부가 다르다. 모양이 마치 사람 이빨처럼 생겼다. 뒷면부에는 잡석과 흙을 채워 성돌을 고정시킨다. 탕춘대성은 숙종 때 쌓은 성으로 북한산성과 도성을 연결하는 익성이었다.






* 탕춘대성: 탕춘대성은 숙종 때 쌓은 성이다. 사진 아래부분에 다듬어진 성돌을 보라. 숙종시기에 쌓은 성돌과 비슷하다.  







이런 단점들은 축성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문제시되었고, 도성을 수축하자는 의견들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대규모의 수축은 20여 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나 이루어졌다. 1422년(세종4) 1월 16일, 태조 시기보다 훨씬 더 많은, 무려 32만 명의 인원이 동원된 대대적인 도성 수축 작업이 이루어진다. 이 작업을 이끈 최종결정권자는 당시 태상왕으로 있던 태종 이방원이었다.
 
"엄청나게 많은 백성들이 징발된 만큼 그때 수많은 인명들이 다치고 죽었습니다. 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공사 중에 목숨을 잃었다고 하네요. 전쟁 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많은 인원들이 목숨을 잃은 것이죠."
 
필자가 이런 설명을 하면 트레킹 참가자들은 십중팔구 무척 놀랬다.
 
"한편 공사에 동원된 백성들은 자기 먹을거리를 자기가 준비해야 했습니다. 험한 공사에 징발된 것도 못마땅할 판에 자기가 식량까지 가져가야 했으니 아주 죽을 맛이었을 겁니다."
 
이런 설명을 하면 십중팔구 혀를 차며 어이없어했다.






        

▲ 성벽돌 정조 이후 양식이다. 성체의 위쪽 부분이 여장이다. 여장 하나를 '타'라고 부른다. 한 타에는 총 3개의 구멍이 뚫렸는데 가운데는 근총안, 양 옆에는 원총안이 뚫려 있다. 근총안에서는 가까운 적을 향해, 원총안에서는 멀리 있는 적을 향해 화포를 발사한다.







'사극왕' 숙종의 다른 모습

서울성곽의 대대적인 보수는 숙종 시기에 다시 이루어진다. 도성을 다시 쌓자는 의견은 숙종 즉위 초부터 개진되었지만 실제로 실행에 옮겨진 것은 무려 30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렇게 숙종 30년(1704년)에 시작된 한양도성 다시 쌓기는 1710년까지 이어진다.

숙종은 그다음 해인 1711년, 북한산성을 축조하게 한다. 북한산성은 6개월 만에 만들어졌다. 길이가 약 8km에 달하는 산성을 반년 만에 쌓게 한 것이다. 이렇게 '초스피드'로 북한산성을 쌓게 한 건 청나라의 눈길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조선은 병자호란 강화조약에 의해 성을 새로 쌓지도, 기존의 성을 보수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한양도성의 수축에 대한 논의가 30년 동안이나 지루하게 진행된 이유 중의 하나도 청나라의 감시 눈초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TV 속의 숙종은 항상 인현왕후, 장희빈과 함께 등장한다. 숙종 시기는 사극계의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존재다. 한마디로 그는 '사극왕'이다. 그렇듯 우리는 이제까지 너무 사극 프레임으로만 숙종을 바라보지 않았나? 한양도성의 대대적인 보수, 북한산성 축성, 이에 더해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의 축성 등 숙종 시기에는 국방력이 크게 신장된다. 자신의 여인들을 들었다 놨다 하며, 치명적인(?) 삼각관계를 만들었던 숙종이었지만 이렇듯 국방력 강화에도 힘을 썼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타 속의 고양이 '타'는 여장 하나의 단위를 말한다. 또한 여장과 여장 사이의 공간을 뜻하기도 한다. 타에서는 주로 활로 공격을 했다. 사진속 고양이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활을 쏘았다는 것이다.








후기로 갈수록 돌이 커졌고, 더 잘 다듬었다 

"여기 돌은 세종시기에 쌓았어요. 옥수수처럼 생겼죠? 아니 메주처럼 생겼나요?"
 
세종 때 쌓은 돌들을 보면 생긴 것은 옥수수처럼 생겼고, 크기는 메주 정도만 하다.
 
"여기 숙종 때 쌓은 돌들은 조선 전기 때보다 더 크죠. 전체적으로 더 매끈하게 떨어지고요."
 
숙종 시기에 쌓은 성돌은 세종 때에 쌓은 성돌보다 모양도 더 크고, 다듬기도 더 많이 다듬었다.
 
"이 큰 성돌들은 정조 이후에 쌓은 돌들입니다. 숙종 시기보다도 더 크죠?"
"이 돌들은 확실히 크네요. 이거는 딱 봐도 알겠네."



        

▲ 성돌 사진에서 오른쪽이 정조 이후의 양식이다. 사진 왼쪽 하단부 검은색을 띈 돌들은 세종 시기의 양식이다. 왼쪽 상단부와 오른쪽 여장은 근래에 다시 쌓은 것으로 보인다.








정조 이후에 쌓은 돌들은 숙종 때보다도 훨씬 크고, 치석(治石)도 훨씬 더 세밀하다. 성돌과 성돌의 이가 잘 맞물려 빈틈이 작다. 빈틈이 작다는 것은 그만큼 빗물이 침투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여기서의 치석은 한자어 그대로 '돌을 간다'는 말이다.
 
"맞습니다. 저 성돌은 확실히 눈에 띄죠. 크니까."
"적어도 정조 이후 성돌들은 잊어버리지 않겠네요."
"저렇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성돌이 커진 건 방어력을 높이려고 그랬던 거죠. 화포에 대한 방어력을 높이려고요. 병자호란 때 청나라군이 홍이포라는 대포로 남한산성을 공격했는데 그걸 교훈 삼아 성돌들을 더 크게 만든 것이죠."

 
이렇게 정리가 된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성돌의 크기가 커지고, 치석의 강도도 세진다. 왜? 당시 세계는 대포로 성벽을 부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포 공격을 이겨내려면 성돌을 대형화시켜야 했고, 대형화된 성돌을 이가 잘 맞물리게 쌓으려면 치석을 잘해야 했다.
 
"두 가지를 알면 훨씬 더 재밌게 성곽길 탐방을 할 수 있어요. 후기로 갈수록 돌이 커진다. 돌을 다듬는 정밀도도 높아진다. 이 두 가지요."


성돌을 시기별로 구분할 줄 모른다고 해도 성곽길을 걷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기왕 하는 성곽 순성길이라면 좀 알고 가면 좋지 않을까? 아는 만큼 보인다고 서울성곽도 아는 만큼 더 재밌게 즐길 수 있을 테니까.

서울성곽의 역사는 조선왕조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역사 속에는 일반 백성들의 땀방울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성돌 하나하나에 박혀 있는 백성들의 피와 눈물! 그런 피눈물이 있었기에 지금의 순성놀이가 가능한 것이다. 그런 성벽을 쌓았던 이들의 노고를 잊지 않으며 성곽길을 걷는 것도 우리의 몫이 아닐까 한다.




 * 훼손부분: 서울성곽의 훼손부분. 한 빌라의 축대로 사용되고 있다. 한양도성 북악산 구간 중에서.











덧붙임

지난 3월 21일, 한양도성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무산됐다는 보도가 전해졌다. 유네스코 자문기관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아래 이코모스)는 한양도성을 대상으로 패널심사를 진행했는데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등재 불가' 판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에 문화재청은 부득이하게 철회하며, 2020년 등재로 목표 수정을 했다고 밝혔다.

이코모스의 결정에 동의하기가 어렵다. 한양도성에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없다는 판단이 납득이 안 된다. 한양도성은 자연지형을 거스르지 않고, 방어력을 극대화시킨 성으로 평지에 축성된 다른 나라 성들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한양도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충분하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협의회의 결정을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아쉬운 마음이 넘치겠지만, 문화재청과 서울시는 다시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임해야 할 것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더 꼼꼼히 챙겨 2020년에는 꼭 등재에 성공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덧붙이는 글 | 2020년 서울성곽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기원하며...



역사트레킹 카페

http://cafe.naver.com/trekkingmaster














서울성곽은 숙종 시기에 대대적인 보수를 한다. 도성을 다시 쌓자는 의견은 숙종 즉위 초부터 개진되었지만 실제로 실행에 옮겨진 것은 무려 30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렇게 숙종 30(1704)에 시작된 한양도성 다시 쌓기는 1710년까지 이어진다.


숙종은 그 다음해인 1711, 북한산성을 축조하게 한다. 북한산성은 6개월 만에 만들어졌다. 길이가 약 8km에 달하는 산성을 반 년 만에 쌓게 한 것이다. 이렇게 초스피드로 북한산성을 쌓게 한 건 청나라의 눈길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조선은 병자호란 강화조약에 의해 성을 새로 쌓지도, 기존의 성을 보수하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양도성의 수축에 대한 논의가 30년 동안이나 지루하게 진행된 이유 중의 하나도 청나라의 감시의 눈초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TV 속의 숙종은 항상 인현왕후, 장희빈과 함께 등장한다. 숙종 시기는 사극계의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존재다. 한마디로 그는 사극왕이다. 그렇듯 우리는 이제까지 너무 사극 프레임으로만 숙종을 바라보지 않았나?


한양도성의 대대적인 보수, 북한산성 축성, 이에 더해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의 축성 등 숙종 시기에는 국방력이 크게 신장된다. 자신의 여인들을 들었다 놨다하며, 치명적인(?) 삼각관계를 만들었던 숙종이었지만 이렇듯 국방력 강화에도 힘을 썼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차산 역사트레킹에 대한 동영상입니다.

이것도 카드뉴스 형식으로 만들었습니다.









      






서울 낙산에 올라서면 속이 다 시원해진다!


서울의 좌청룡을 걷다, 낙산 역사트레킹


17.03.29 14:01 최종 업데이트 17.03.29 14:01
 
곽동운(artpunk)             


    

      

▲ 낙산역사트레킹 성북동 부근을 촬영했다. 성북은 성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는 뜻이다. 엄밀히 말해 이곳은 한양도성 북악산 구간이다. 하지만 낙산역사트레킹에서는 이 구간을 지나간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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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이야기지만 서울에도 좌청룡·우백호가 있다. 조선의 도읍지였던 한양이 풍수지리에 의거해 기획된 도시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좌청룡·우백호가 있고, 남쪽에는 주작, 북쪽에는 현무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일단 우백호는 어디일까? 인왕산이다. 경복궁 옆쪽에 우뚝 서 있는 인왕산이 서울의 우백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럼 좌청룡은 어디일까? 낙산이다. 혜화동 뒤편에 나지막하게 서 있는 낙산이 바로 서울의 좌청룡인 것이다.



        



▲ 낙산성곽길 흥인지문 옆 쪽에 복원된 성곽길. 흥인지문 옆쪽 구간은 2015년도에 복원됐다. 예전에는 그 자리에 이화여대동대문병원이 들어서있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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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백호의 위세에 눌린 좌청룡

낙산(駱駝)은 높이가 약 125미터로 키가 작은데 산의 형세가 낙타 등처럼 보인다 하여 낙산 또은 낙타산이라고 불린다. 낙산은 인왕산과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낙산은 좌청룡이기에 우백호인 인왕산과는 필연적으로 '용호상박'을 해야 하는 팔자다. 청룡과 백호의 피할 수 없는 한 판!

'세상을 뒤흔들 세기의 맞대결! 메가톤급 강펀치가 천지를 진동한다. 세상의 모든 이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청룡과 백호의 물러설 수 없는 한 판! 그 세기의 대결에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절대 놓치지 마십시오. 마감 임박~'

하지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는 법이다. 저렇게 프로모션을 띄운다고 해도 결과는 뻔하다. 세기의 대결치고 진짜 '세기의 대결'이 펼쳐진 거 본 적 있는가?

결론적으로 말해 서울의 청룡은 백호에게 게임이 안 된다. 체급부터가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낙산은 해발고도가 125미터로 338미터인 인왕산에 비해 키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낙산(동), 인왕산(서), 남산(남), 북악산(북)을 묶어 내사산으로 칭하는데 그 내사산 중에서 낙산이 가장 작다. 참고로 북악산은 342미터이고, 남산은 270미터이다.

해발고도가 낮으니 낙산은 산세도 그리 웅장하지 못하다. 이에 비해 인왕산은 민낯을 드러낸 것처럼 돌출된 암반면이 소나무들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300미터급 산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을 뽐내고 있다. 



        

▲ 성곽길 성벽과 마을.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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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우백호보다 기량이 딸리는 좌청룡이었기에 그것을 보완해야 했다. 동쪽에 있는 좌청룡은 남자, 장자를 뜻했다. 이에 비해 서쪽에 있는 우백호는 여자, 차자 등을 뜻했다. 적장자 중심의 왕위계승을 중시했던 조선이었기에 좌청룡에 대한 보완은 분명히 필요했던 것이다.

이에 무학대사는 인왕산 아래에 궁궐을 짓자고 역설한다. 그리고는 궁궐의 방향을 동쪽인 낙산으로 향하게 하자는 주장을 펼친다. 이것이 인왕산 주산론이다. 하지만 당시의 실권자였던 정도전 세력들은 인왕산 주산론을 반대한다. 궁궐의 방향을 서쪽으로 둘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렇게 자신의 주장이 꺾인 무학대사는 이런 말을 남기며 탄식했다고 한다.

"200년 뒤 경복궁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너희들이 알겠느냐!"

200년 뒤에 조일전쟁(임진왜란)이 일어났고, 경복궁은 잿더미로 변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정말 무학대사의 예언이 맞았던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 필자는 역사트레킹 참가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무학대사 말대로 인왕산 아래에 경복궁이 들어서면 조일전쟁이 발발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경복궁이 불타지 않았을까요? 풍수지리는 우리민족 정신에 많은 영향을 끼친 사상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너무 경도되지는 말자고요. 조상묘를 잘 쓰는 것보다 자신의 의지가 중요한 게 아닐까요? 조상묘 아무리 잘 써도 자기가 노력을 안 하면 말짱 도루묵이잖아요!" 



▲ 성벽 모자이크처럼 올려진 성벽돌. 각 시기마다 축조된 성벽돌이 달라 모자이크 같은 느낌을 준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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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의 핵심 김효원이 살았던 낙산

낙산은 야트막한 산세 때문에 산책로로 많이 이용되었다. 또한 숲길이 우거져 있어 낙산 인근에는 별장들이 많았다. 인조의 셋째 아들이었던 인평대군이 지은 석양루(夕陽樓)를 비롯하여 18세기에 활약했던 문인 이심원이 지은 일옹정(一翁亭) 등 많은 별채들이 있었다.

명사들도 많이 살았다. 태종의 외손이었던 남이 장군, 우암 송시열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 동서분당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던 김효원도 낙산 기슭에서 살았다. 김효원의 집이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동인이라고 불렀다. 이에 비해 서인의 거두 심의겸의 집은 지금의 덕수궁 근처라 한양의 서쪽에 있었다. 그래서 심의겸을 따르는 이들을 서인이라고 불렀다. 

일설에 의하면 단종비 정순왕후(定順王后)도 낙산에 은거해 살았다고 한다. 단종이 강원도 영월 땅으로 유배를 떠나고 난 후, 폐서인이 된 정순왕후는 이 산 아래에 있는 청룡사의 승려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임을 떠나보냈던 정순왕후는 이 산 동쪽에 있는 동망봉에 올라 매일같이 치성을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 벽화 이화동 벽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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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 정상에 올라서면 속이 다 시원해진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낙산은 서울의 안쪽을 감싸고 있는 내사산 중에 가장 키가 작다. 그래서인지 한양도성 낙산 구간은 인왕산이나 북악산 구간보다 훨씬 더 걷기 편하다. 인왕산이나 북악산 구간에는 간간이 급경사 구간이 있지만 이에 비해 낙산 구간은 시종일관 완만한 경사를 유지하고 있다. 선조들에게는 왜소한 좌청룡이라고 놀림을 받았지만 역설적으로 성곽길을 탐방하는 여행객들에게는 찬사를 받는 것이다.

또한 접근성도 상당히 좋다. 전철역에서 바로 성곽길 트레킹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에서 하차한 후 흥인지문(동대문)을 둘러본 후 성곽길을 따라 트레킹을 할 수 있는 것이 낙산트레킹의 큰 장점 중에 하나다.

그렇게 성곽길을 타고 올라가다보면 이화동 벽화마을도 만날 수 있다. 벽화마을을 탐방한 후 언덕길을 올라가면 낙산 정상부인 낙산공원에 다다르게 된다. 이 곳에 올라 서면 속이 다 시원해질 정도로 멋진 풍광을 만날 수 있다. 무언가 꽉 막혀 있던 것들이 확 씻겨 내려가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 낙산 성곽길 한양도성 낙산구간은 경사가 완만하여 걷기가 편하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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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한양도성이 어떤 방식으로 내사산을 연결하여 축조되었는지 찬찬히 따져 볼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 손에 다 잡힐 듯 북한산이 아주 가깝게 펼쳐져 있다. 백운대·인수봉·만경대 등의 동북쪽 봉우리들뿐만 아니라 보현봉이나 형제봉 같은 남쪽의 봉우리들까지도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참가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저 북한산 좀 보세요. 위쪽으로는 살짝 도봉산까지 보이죠? 북한산을 한 눈에 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서 바라보려면 이 낙산만큼 좋은 곳도 없습니다. 낙산이 키가 작아도 이렇게 참 실하지 않습니까?"

성곽길 낙산 구간이 끝날 무렵에는 동소문이라고 불리는 혜화문을 만나게 된다. 혜화문은 일제에 의해 철거됐다, 199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져 복원됐다.

낙산 역사트레킹은 북악산 성곽길도 걷는다. 그렇게 성북동 인근 북악산 구간을 걷다 와룡공원을 지나고, 북촌의 위쪽에 자리 잡은 삼청공원에서 종료하게 된다.

이제 완연한 봄이다. 떠나기 좋은 계절이 왔다. 하지만 미세먼지니 황사니 하는 것들이 신경 쓰인다. 그렇다고 우리가 안 떠날 줄 알고! 떠날 사람은 다 떠난다. 그렇다. 이번 주말 서울의 좌청룡인 낙산으로 떠나보자. 맛있는 도시락을 준비해서 낙산 공원에도 올라보고, 걷기 편한 성곽길도 걸어보자. 시원하게 펼쳐진 북한산을 바라보며 인증샷도 찍어보는 것이다. 그렇게 신나게 낙산으로 봄소풍을 떠나보는 것이다.




▲ 혜화문 사진 중앙부 상단에 있는 헤화문. 일제에 의해 철거된 후 1994년에 복원됐다. 원래는 사진 하단에 보이는 도로에 있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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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곽: 성곽면이 잘려 있다. 도심지의 확장 및 사유지의 확장으로 인해 한양도성 평지 구간은 훼손이 심한 구간이 있다.





◆ 트레킹 참고 사항


1. 교통편: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 6번 출구 하차
2. 세부코스: 흥인지문 ▶ 이화동벽화마을 ▶ 낙산공원 ▶ 혜화문 ▶ 와룡공원 ▶ 삼청공원(북촌)
3. 이동거리: 약 8km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cafe.naver.com/trekkingmaster













* 낙산 성곽길: 한양도성 낙산 구간은 걷기 좋은 길로 유명하다.  






* 성곽: 모자이크처럼 올려진 성벽돌. 각 시기마다 축조된 성벽돌이 달라 모자이크 같은 느낌을 준다.  






* 성북동: 성북동에 있는 와룡공원 부근에서 한성대역 방면으로 사진을 찍었다.






* 동대문 부근: 동대문 부근에서 성곽길을 찍어봤다. 동대문 부근 성벽은 2015년에 복원됐다.  






* 벽화: 낙산의 아랫동네가 바로 이화동이다. 그 유명한 이화동 벽화마을이 있는 이화동. 






* 성북동: 성벽 넘어에 있는 성북동을 찍어 봤다. 성벽 넘어에 있다고 성북동이다.  

 























서울은 아파트 값이 너무 비싸 집 구하기가 참 힘들죠.

어렵게 아파트를 구했다고 해도 별 같지도 않은 것들을 꼬투리 삼아 이러쿵 저러쿵 하는 사람들 때문에 속이 상하셨던 분들도 있을 겁니다. 평수가 몇 평이니, 임대주택이니아니니 하는 그런 이러쿵 저러쿵들이죠. 그래서 가끔은 사진과 같은 원시적인 주거 구조가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최소한 저런 집에 살면 아파트 평수 때문에 혹은 임대아파트냐 아니냐 때문에 속이 상하는일은 없을 테니까요.

첫번째 사진은 움집이고 , 두번째 사진은 얼개집입니다. 둘 다 원시적인 구조지만 별 같지도 않은 거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일은 없을 겁니다. 또 층간 소음도 없을 거고, 새집증후군도 없을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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