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양도성: 남산구간.







이전 포스팅에서 체성 구간의 돌과 문루 구간의 돌이 다르다는 것을 살펴봤습니다. 똑같이 돌이라는 재료를 쌓아 올렸지만 문루 구간에 있는 돌들이 훨씬 더 격이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그런데 문루 구간은 체성 구간과 또다른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


일단 한양도성이 어떻게 축조됐는지, 어떤 식으로 토목공사가 행하여 졌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한양도성은 편축법이라는 방식으로 축조됐답니다. 편축법은 한쪽 면만 쌓는 방식인데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 지형에 합치되는 축조 방식입니다. 


밖에서 성곽을 보십시오. 5~6미터 이상 되는 성벽이 우뚝 서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성 안에서의 눈높이는 여장 정도 잖아요. 이것이 바로 편축법 방식입니다. 한마디로 한쪽만 쌓았다는 겁니다. 


편축법으로 성벽을 쌓는다면 일단 산을 깎아내야 합니다. 이를 삭토법이라고 합니다. 뭐 당연한 이야기겠지요. 적당하게 산을 깎아 성돌을 올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할 테니까요. 


삭토법을 할 때는 맨 아래부분(시작점)과 맨 윗부분(종료점)의 위치는 달라집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뒤로 비스듬이 깎아낸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당연한 이야기겠지요. 시작점과 종료점이 수직으로 일치한다면 그 성벽은 드립다 무너질 겁니다. 그럼 공사 책임자는 유배가고...ㅋㅋㅋ


그렇게 비스듬이 삭토하고, 또 비스듬이 성돌을 올리다보니 맨 아래와 맨 윗 부분의 각도 차이가 생긴답니다. 구간에 따라 다르지만 약 15도 정도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편축법은 한쪽만 쌓으니 그만큼 공력이 덜 듭니다. 물자와 인력을 아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내사산을 둘러쌓은 한양도성은 편축법의 전형을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산과 어우러졌기에 한양도성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편축법 말고 협축법이라는 방식이 있는데 고거이는 다음편에... ㅋ







* 여장: 한양도성 안쪽에서 바라보면 여장이 우리의 시야를 꽉 채운다. 여장의 위치가 우리가 보는 위치다. 여장 앞쪽의 평평한 공간을 내탁부라고 한다. 이 공간에서 전투와 경계가 이루어진다. 









* 성벽: 밖의 순성로에 보는 성은 우뚝 선 성벽이다. 






* 서울성곽: 여장 옆 내탁부를 걷고 있는 참가자.









* 숭례문: 도미노 블럭을 옆으로 쌓은 듯 하다. 필자는 저 돌을 지우개처럼 생겼다 하여 지우개 돌이라고 불렀다. 벽돌을 쌓아 올린 면장은 여장보다는 높이가 낮아 성 밖을 보기에 용이하다. 2008년에 방화에 의해 불탄 숭례문은 2013년에 복원되어 시민의 품으로돌아왔다.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을 행하다보면, 흔히 성곽길을 따라 걷다 대문 혹은 소문으로 쏙 들어가게 됩니다. 예를 들어 낙산 역사트레킹을 한다고 가정해 보죠. 트레킹팀은 낙산 성곽길을 유유자적 하게 걷다 동소문이라고 불리는 혜화문을 만나게 됩니다. 그 길로 쏙 들어가는 겁니다.


그렇게 성곽길을 걸을 때 한 번 자세히 관찰해 보세요. 성체라 불리는 체성 구간과 문 구간의 차이점을. 체성 구간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보는 성곽 구간입니다. 우리는 그 옆에 난 순성로를 따라 성곽과 나란히 걷는 것이죠. 


문 구간은 앞서 언급한 혜화문이나 사진에 등장한 숭례문(남대문), 창의문을 말합니다. 

첫번째 숭례문 사진을 보십시오. 같은 돌로 쌓여져 있는 듯하지만 체성 구간의 돌 하고는 차이점이 있지요? 잘 보세요. 여러분들의 센스를 믿어요...ㅋ


숭례문과 창의문에 쌓여진 돌들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장대석들입니다. 얼핏보면 블럭들을 차곡차곡 쌓아둔 것처럼 보일 겁니다. 이 부분을 육축이라고 합니다. 그 육축 위에 벽돌로 올려진 부분은 면장이라고 불리지요. 체성 구간의 여장이 문 구간에서는 면장이 됐다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면장은 여장보다는 키가 낮아서 안에서 밖을 관망할 수 있다는 점이 있지요. 아무래도 문루에서는 장수들이 지휘를 하다보니 밖이 보여야 하잖아요. 여장처럼 키가 크다면 밖이 안 보일테고, 그러다보면 적군이 왔는지 산타클로스가 왔는지 모를테니까요...ㅋ


하지만 체성 구간의 돌들은 육축 구간의 돌들처럼 잘 다듬어지지 않았습니다. 또 시기마다 다르잖아요. 태조 시기의 돌, 세종시기의 돌, 숙종시기의 돌, 영정조 이후 시기의 돌. 


그렇게 보면 문 구간에 있는 육축은 그냥 시기구분이 없어서 참 좋네요. 구분할 필요가 없어서 머리가 아프지 않아...ㅋ  


한양도성과 관련된 자료를 정리하다가 생각이 나서 올려봤습니다. 다음에 또 관련 이야기를 올려볼게요!









* 체성: 한양도성 인왕산 구간










* 창의문: 홍예문이 잘 드러나 있다. 면장이 여장보다 확실히 낮아 보인다. 










* 체성: 문 구간의 육축과는 돌이 다르다. 














* 각자석: 한양도성은 공사실명제를 도입했다. 각 구간마다 책임자들의 이름을 돌에 새겨 넣었다. 2015년에 복원된 흥인지문 북쪽 구간에 새겨진 각자들. 당시에 새겨진 글자를 본떠서 새로운 돌에 새긴 듯하다.

          









알고보면 더 재밌는 길, 서울성곽길


성돌에 맺힌 백성들의 피와 땀을 기억하며




17.04.10 11:12   최종 업데이트 17.04.10 11:12





             





    

        

      ▲ 서울성곽 인왕산 구간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서 두고 걸으면 두 발이 아프다!"
 
한양도성, 즉 서울성곽을 두고 기자가 역사트레킹에 참가한 분들에게 했던 말이다. 찰리 채플린의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유명한 명언을 빗대서 저런 말을 했던 것이다.

기자가 언급한 것처럼 서울성곽길은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니다. 서울성곽은 네 개의 산(낙산-인왕산-남산-북악산)을 연결해서 만든 방어용 시설이다. 지금처럼 성곽길 트레킹을 하라고 만든 관광 자원이 아니라는 뜻이다. 애초 목적이 방어용 시설이었기에 경사도가 급할 수밖에 없었다. 수비목적의 산성으로 축성됐기에 경사도가 급하면 급할수록 방어력은 더 높아졌던 것이다. 물론 구간에 따라서는 아주 완만한 길도 있다.

어쨌든 산을 연결해서 만든 성곽이기에 한양도성을 걸을 때는 그에 걸맞은 준비가 필요하다. 걷기 편한 신발을 신고, 옆으로 메는 가방이 아닌 아웃도어 배낭을 준비하고, 생수와 행동식도 넉넉히 준비하고... 그렇게 세심하게 준비를 한 후 떠나야 더 알차게 서울성곽 트레킹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외부적인 준비뿐만 아니라 지식적인 준비도 해보자. 알고 떠나면 더 재밌는 성곽길 투어가 될 테니까.  




 ▲ 서울성곽 북악산 구간.   

       




전쟁이 난 것도 아닌데 500명 이상이 죽었다

조선을 개국하고 한양으로 천도한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도성을 쌓으라고 명한다. 그래서 1396년(태조5) 1월 9일부터 2월 28일까지 한양도성이 축성된다. 서울의 네 개의 산을 연결하여 만든 성곽은 그 길이가 무려 18.6km에 달했다. 49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18km가 넘는 성곽을 쌓았던 것이다.

그렇게 빨리 도성 축조가 가능했던 이유는 많은 백성들을 공사에 투입했기 때문이다. 약 11만 명이 넘는 인원이 현장에서 땀방울을 쏟아냈으니 50일도 안 되는 시기에 그렇게 엄청난 결과물을 도출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한양 인구를 10만 명 남짓으로 추정하고 있으니 징발된 인원수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태조시기에 쌓은 성은 7할 이상이 토성(土城) 구간이었다. 돌이 아닌 흙으로 축성했으니 빠르게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토성은 석성(石城)보다는 견고함이 떨어진다. 성체의 형상도 반듯하지 않고, 비바람에도 취약할 수밖에 없다. 또한, 여장 같은 방어력을 증대시키는 시설을 설치하기도 어렵다.





* 탕춘대성: 탕춘대성의 성돌. 돌의 앞면부와 뒷면부가 다르다. 모양이 마치 사람 이빨처럼 생겼다. 뒷면부에는 잡석과 흙을 채워 성돌을 고정시킨다. 탕춘대성은 숙종 때 쌓은 성으로 북한산성과 도성을 연결하는 익성이었다.






* 탕춘대성: 탕춘대성은 숙종 때 쌓은 성이다. 사진 아래부분에 다듬어진 성돌을 보라. 숙종시기에 쌓은 성돌과 비슷하다.  







이런 단점들은 축성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문제시되었고, 도성을 수축하자는 의견들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대규모의 수축은 20여 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나 이루어졌다. 1422년(세종4) 1월 16일, 태조 시기보다 훨씬 더 많은, 무려 32만 명의 인원이 동원된 대대적인 도성 수축 작업이 이루어진다. 이 작업을 이끈 최종결정권자는 당시 태상왕으로 있던 태종 이방원이었다.
 
"엄청나게 많은 백성들이 징발된 만큼 그때 수많은 인명들이 다치고 죽었습니다. 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공사 중에 목숨을 잃었다고 하네요. 전쟁 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많은 인원들이 목숨을 잃은 것이죠."
 
필자가 이런 설명을 하면 트레킹 참가자들은 십중팔구 무척 놀랬다.
 
"한편 공사에 동원된 백성들은 자기 먹을거리를 자기가 준비해야 했습니다. 험한 공사에 징발된 것도 못마땅할 판에 자기가 식량까지 가져가야 했으니 아주 죽을 맛이었을 겁니다."
 
이런 설명을 하면 십중팔구 혀를 차며 어이없어했다.






        

▲ 성벽돌 정조 이후 양식이다. 성체의 위쪽 부분이 여장이다. 여장 하나를 '타'라고 부른다. 한 타에는 총 3개의 구멍이 뚫렸는데 가운데는 근총안, 양 옆에는 원총안이 뚫려 있다. 근총안에서는 가까운 적을 향해, 원총안에서는 멀리 있는 적을 향해 화포를 발사한다.







'사극왕' 숙종의 다른 모습

서울성곽의 대대적인 보수는 숙종 시기에 다시 이루어진다. 도성을 다시 쌓자는 의견은 숙종 즉위 초부터 개진되었지만 실제로 실행에 옮겨진 것은 무려 30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렇게 숙종 30년(1704년)에 시작된 한양도성 다시 쌓기는 1710년까지 이어진다.

숙종은 그다음 해인 1711년, 북한산성을 축조하게 한다. 북한산성은 6개월 만에 만들어졌다. 길이가 약 8km에 달하는 산성을 반년 만에 쌓게 한 것이다. 이렇게 '초스피드'로 북한산성을 쌓게 한 건 청나라의 눈길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조선은 병자호란 강화조약에 의해 성을 새로 쌓지도, 기존의 성을 보수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한양도성의 수축에 대한 논의가 30년 동안이나 지루하게 진행된 이유 중의 하나도 청나라의 감시 눈초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TV 속의 숙종은 항상 인현왕후, 장희빈과 함께 등장한다. 숙종 시기는 사극계의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존재다. 한마디로 그는 '사극왕'이다. 그렇듯 우리는 이제까지 너무 사극 프레임으로만 숙종을 바라보지 않았나? 한양도성의 대대적인 보수, 북한산성 축성, 이에 더해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의 축성 등 숙종 시기에는 국방력이 크게 신장된다. 자신의 여인들을 들었다 놨다 하며, 치명적인(?) 삼각관계를 만들었던 숙종이었지만 이렇듯 국방력 강화에도 힘을 썼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타 속의 고양이 '타'는 여장 하나의 단위를 말한다. 또한 여장과 여장 사이의 공간을 뜻하기도 한다. 타에서는 주로 활로 공격을 했다. 사진속 고양이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활을 쏘았다는 것이다.








후기로 갈수록 돌이 커졌고, 더 잘 다듬었다 

"여기 돌은 세종시기에 쌓았어요. 옥수수처럼 생겼죠? 아니 메주처럼 생겼나요?"
 
세종 때 쌓은 돌들을 보면 생긴 것은 옥수수처럼 생겼고, 크기는 메주 정도만 하다.
 
"여기 숙종 때 쌓은 돌들은 조선 전기 때보다 더 크죠. 전체적으로 더 매끈하게 떨어지고요."
 
숙종 시기에 쌓은 성돌은 세종 때에 쌓은 성돌보다 모양도 더 크고, 다듬기도 더 많이 다듬었다.
 
"이 큰 성돌들은 정조 이후에 쌓은 돌들입니다. 숙종 시기보다도 더 크죠?"
"이 돌들은 확실히 크네요. 이거는 딱 봐도 알겠네."



        

▲ 성돌 사진에서 오른쪽이 정조 이후의 양식이다. 사진 왼쪽 하단부 검은색을 띈 돌들은 세종 시기의 양식이다. 왼쪽 상단부와 오른쪽 여장은 근래에 다시 쌓은 것으로 보인다.








정조 이후에 쌓은 돌들은 숙종 때보다도 훨씬 크고, 치석(治石)도 훨씬 더 세밀하다. 성돌과 성돌의 이가 잘 맞물려 빈틈이 작다. 빈틈이 작다는 것은 그만큼 빗물이 침투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여기서의 치석은 한자어 그대로 '돌을 간다'는 말이다.
 
"맞습니다. 저 성돌은 확실히 눈에 띄죠. 크니까."
"적어도 정조 이후 성돌들은 잊어버리지 않겠네요."
"저렇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성돌이 커진 건 방어력을 높이려고 그랬던 거죠. 화포에 대한 방어력을 높이려고요. 병자호란 때 청나라군이 홍이포라는 대포로 남한산성을 공격했는데 그걸 교훈 삼아 성돌들을 더 크게 만든 것이죠."

 
이렇게 정리가 된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성돌의 크기가 커지고, 치석의 강도도 세진다. 왜? 당시 세계는 대포로 성벽을 부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포 공격을 이겨내려면 성돌을 대형화시켜야 했고, 대형화된 성돌을 이가 잘 맞물리게 쌓으려면 치석을 잘해야 했다.
 
"두 가지를 알면 훨씬 더 재밌게 성곽길 탐방을 할 수 있어요. 후기로 갈수록 돌이 커진다. 돌을 다듬는 정밀도도 높아진다. 이 두 가지요."


성돌을 시기별로 구분할 줄 모른다고 해도 성곽길을 걷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기왕 하는 성곽 순성길이라면 좀 알고 가면 좋지 않을까? 아는 만큼 보인다고 서울성곽도 아는 만큼 더 재밌게 즐길 수 있을 테니까.

서울성곽의 역사는 조선왕조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역사 속에는 일반 백성들의 땀방울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성돌 하나하나에 박혀 있는 백성들의 피와 눈물! 그런 피눈물이 있었기에 지금의 순성놀이가 가능한 것이다. 그런 성벽을 쌓았던 이들의 노고를 잊지 않으며 성곽길을 걷는 것도 우리의 몫이 아닐까 한다.




 * 훼손부분: 서울성곽의 훼손부분. 한 빌라의 축대로 사용되고 있다. 한양도성 북악산 구간 중에서.











덧붙임

지난 3월 21일, 한양도성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무산됐다는 보도가 전해졌다. 유네스코 자문기관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아래 이코모스)는 한양도성을 대상으로 패널심사를 진행했는데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등재 불가' 판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에 문화재청은 부득이하게 철회하며, 2020년 등재로 목표 수정을 했다고 밝혔다.

이코모스의 결정에 동의하기가 어렵다. 한양도성에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없다는 판단이 납득이 안 된다. 한양도성은 자연지형을 거스르지 않고, 방어력을 극대화시킨 성으로 평지에 축성된 다른 나라 성들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한양도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충분하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협의회의 결정을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아쉬운 마음이 넘치겠지만, 문화재청과 서울시는 다시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임해야 할 것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더 꼼꼼히 챙겨 2020년에는 꼭 등재에 성공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덧붙이는 글 | 2020년 서울성곽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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