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유도가 원래 섬이 아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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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작가

 

 

 

 

 

 

본문내용

양화대교

 

한강은 서울 한복판을 유유히 흘러가며 사람들에게 많은 것들을 나누어 주었다. 지금이야 모습이 많이 바뀌었지만 여름에는 강수욕장으로 변해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고, 겨울에는 얼음을 채취할 수 있는 일등 장소로 이용됐다. 그렇듯 한강은 예로부터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진경산수화로 유명한 겸재 정선(1676~1759)도 한강을 무척이나 사랑한 인물이었다. 진경산수화란 우리 산천을 우리의 필치로 담아낸 것을 말한다. 진경산수화 이전에는 중국 남방 화풍으로 우리 산천을 담아냈었다.

 

겸재는 65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양천 현감으로 봉직된다. 현감 시절 겸재는 ‘선유봉’, ‘양화환도’ 같은 진경산수화를 그렸는데 그 배경이 됐던 장소가 지금의 선유도와 절두산 일대이다.

 

 

 

 

신선이 노닐던 봉우리, 선유봉

 

선유도-양화대교: 뒤로 당산철교와 여의도가 보임.

 

 

 

 

선유도는 원래 섬이 아니었다. 선유봉(仙遊峰)이라고 불린 해발 40m 정도의 봉우리였다. ‘신선들이 노니는 곳’이라고 불릴 정도로 선유봉은 그 형상이 오묘하였다고 한다. 지대가 얕은 강변 부근에 소나무가 군집해 있는 기암괴석의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으니, 예로부터 이곳은 많은 이들이 즐겨 찾은 명승지였다. 그렇게 선유봉을 찾아 ‘신선놀음’을 했던 이들은 우리나라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중국의 사신들도 이곳을 찾아 조선의 풍광에 감탄을 했다고 한다.

 

 

 

 

당산철교 아래 초미니섬

 

 

 

그렇다면 ‘신선들의 봉우리’였던 선유봉은 왜 지금처럼 섬이 되었을까? 선유봉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자신을 깎아내렸다. 그렇게 깎인 돌은 일제 강점기에는 여의도 비행장의 활주로와 제방을 쌓는데 사용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강변북로 공사에 이용되었다. 그렇게 깎이고 깎이다가 원형을 잃게 되었고, 이후 한강의 강폭이 넓어졌을 때는 주변으로 강물이 채워져 섬으로 고립되게 된다.

 

선유도의 변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78년에 서울 서남부권의 식수를 공급하는 정수장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선유도 정수장은 폭발적으로 늘어난 서남부권의 주민들에게 식수를 공급했던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고 보면 어린 시절 서울 서남부권에 거주했던 필자도 선유도 정수장에서 공급된 물을 마시고 자랐던 셈이다. 선유도 정수장은 2000년도 까지 운영됐고, 그 이후에는 공원으로 꾸며졌다.

 

 

 

 

* 척화비: 절두산 성지

 

 

 

 

 

지금은 무시무시한 이름으로 개명한 잠두봉

 

선유도의 반대편에는 절두산이 있다. 이 절두산(切頭山)도 사연이 많은 산이다. 절두산의 원래 명칭은 잠두봉이었다. 뽕나무가 많이 자란다고 하여 잠두봉(蠶頭峰)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그런데 1866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이곳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대거 붙잡혀 와 머리가 잘리는 참수형을 당하게 된다. 무려 8천 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참수를 당했는데 그 이후로 이 곳은 ‘절두산’으로 불리게 됐다. 흥선대원군은 이곳에 척화비를 세워 쇄국정책의 고삐를 죄게 된다.

 

 

 

 

 

절두산 성지

 

 

 

 

한강을 사이에 두고 한 곳은 깎이고 깎여 섬이 되었고, 또 한 곳은 ‘머리가 잘린다는’ 무시무시한 이름으로 개명을 하게 됐다. 두 봉우리가 동시에 비운을 겪게 된 셈이다.

 

300여 년 전 겸재 정선이 양화진 일대를 그린 ‘양화환도’에는 선유봉과 잠두봉이 풍치있게 그려져 있다. 두 봉우리 사이로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고, 그 위를 나룻배가 느긋하게 물길을 가르고 있다. 유심히 보고 있노라면, 마치 화폭에 들어가 겸재 선생과 함께 뱃놀이를 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지금은 겸재 선생도, 나룻배도 없다. 또한 선유봉은 원형을 잃었다. 하지만 너무 슬퍼하지 말자. 양화대교가 있으니까. 절두산 성지를 탐방한 후 양화대교를 건너 선유도에 갈 수 있다. 양화대교와 선유도는 연결되어 있다.

 

양화대교에는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면서 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커피전문점도 있다. 양화대교 양 옆에 있는 절두산 성지와 선유도를 탐방한 후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것도 운치가 있을 것이다. 아, 그렇다면 한강 근현대사 탐방 후에 마시는 커피 한 잔이 되는 건가?

 

 

 

* 선유도 공원: 옛 정수장 시설물을 전시하고 있다.

 

 

 

 

 

 

 

■ 도움말
1. 코스: 합정역 ▶ 절두산성지 ▶ 양화대교 ▶ 선유도 ▶ 당산역
 * 코스 종료 후 여의도에 위치한 샛강생태공원까지 탐방하는 것도 추천함.
2. 교통편: 시작 – 합정역(2,6호선) 7번 출구 / 종료 – 당산역(2,9호선)

 

 

 

이승만의 한강대교 폭파... 그런 일이 있었냐고?

 

아픈 역사 간직한 한강 다리 곳곳, 자전거·도보 탐방으로 '딱'

 

15.03.11 20:11   최종 업데이트 15.03.11 20:11

 

 

 

 

 

 
▲ 노들텃밭 한강대교 중간에 위치한 노들섬에 있는 노들텃밭. 텃밭 뒤로 한강대교 아치가 보인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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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서울시와 관련된 한강 다리는 몇 개일까? 총 26개다. 지난해 11월 구리암사대교의 임시 개통으로 26개로 늘어났다. 동쪽 강동대교에서부터 서쪽 신행주대교까지 한강변을 따라 늘어서 있는 다리들은 한강철교와 같은 열차 전용 교량도 있고, 방화대교처럼 자동차만 다닐 수 있는 다리도 있다. 물론 사람과 자동차가 동시에 이동할 수 있는 교량이 대다수다.


서울의 팽창과 함께 한강에도 차곡차곡 다리들이 놓이게 됐다. 한강 다리들은 '한강의 기적'을 온몸으로 증명하는 상징물이 된 것이다. 한강 다리 교각 아래로 우리의 근현대사가 흘러갔고, 또 흐르고 있다고 표현할 수도 있는 셈이다. 역사성만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자기만의 색깔이 강한 다리들도 생겨나면서 한강 다리를 따라 도보 탐방을 즐기는 사람들까지 나타났다. 보행로의 확장과 연결로 정비 등으로 한강 다리 자체가 트레킹 코스로 자리 잡은 것이다. 

 

 



현대사 비극 품은 한강대교

한강에 처음으로 들어선 인공 교량은 한강철교다. 1900년도에 들어선 한강철교는 말 그대로 철도 전용 다리였기에 일반 사람이 이용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지금이야 교통카드만 있으면 전철을 타고 느긋하게 한강을 넘어갈 수 있지만, 옛날 구한말의 백성이 기차표를 쉽게 끊을 수 있었겠는가?

일반 백성이 편리하게 한강을 넘을 수 있게 된 건 1917년부터였다. 한강 인도교라고 불렸던 한강대교가 개통됐기 때문이다. 한강철교 제작 때 남은 자제들로 건설되어서 그런지 개통 당시 한강대교는 대교(大橋)라는 말이 어울리지는 않았다. 중앙 차로 부분이 4미터, 좌·우측 보도 부분이 각각 1미터, 총 6미터의 폭이었기 때문이다.

한강대교는 당시 경성 사람들의 나들이 장소였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나룻배에 의존해 도강해왔던 한강을 느긋하게 걸어서 건널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무척 신기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한강대교는 그 긴 역사만큼 큰 아픔도 가지고 있다. 한국 전쟁 시기였던 1950년 6월 28일 다리가 폭파됐기 때문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공격으로 서울 함락이 눈앞에 이르자 당시 이승만 정권은 한강대교 폭파라는 극단적인 판단을 하게 된다.

 



 
▲ 한강철교 63빌딩 부근에서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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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파 작전은 기습적으로 감행됐다. 당시 한강대교에는 수많은 피난민이 다리를 건너고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어떠한 사전 통보도 없었다. 그래서 500명이 넘는 피난민들이 폭파와 함께 생명을 잃거나 한강에 수장됐다.


어처구니가 없었던 건, 당시 시내에서는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음성이 계속해서 퍼져 나왔다는 것이다. 그때 이승만 정권의 수뇌부는 이미 대전으로 피난을 간 상태였다. 수도 서울을 버리고 시민의 피난 행렬을 묶어둔 채 앵무새처럼 녹음 방송만 틀어댔던 셈이다.

한강대교 폭파로 군사적인 피해도 엄청났다. 한강 북부에 남아 있던 국군의 퇴각로가 봉쇄됐기 때문이다. 만약 순차적인 퇴각이 이뤄졌다면 국군은 한강 이남에서 전열을 정비해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할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1950년 7월 14일에 전격적으로 단행된 전시 작전 통제권 이양도 없었을 수도 있었다.

분명 한강대교 폭파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그런 사실들을 모르는 듯했다. 필자가 몇 차례 걸쳐 한강 다리 트레킹을 진행하면서 만난 사람들이 한강대교가 끊겼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는 모습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리가 끊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도 절단한 주체를 잘못 알고 있었다. '미군의 공중 폭격으로 교량이 폭파되지 않았냐'고 물었던 참가자도 있었으니까. 필자는 한강대교 설명을 마칠 때 이런 말로 항상 마무리를 지었다.

"인민군의 남침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한강대교 폭파에 면죄부가 부여될 수 없지요. 자기는 안전하게 대전에 내려가 있으면서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거짓말이나 해대고... 그게 바로 이승만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건국 대통령이라고 칭송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뭘 건국했다는 건지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선유도를 품고 있는 양화대교

 
▲ 양화대교 선유도에서 촬영한 사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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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그런 명칭이 통용되지 않지만 예전에는 '제1한강교', '제2한강교'처럼 한강 다리에 번호들이 매겨졌다. 제1한강교는 앞서 언급한 한강대교이고, 제2한강교는 이번에 소개할 양화대교다. 1965년 양화대교가 들어서기까지 한강에는 인도교가 두 개밖에 없었는데 한강대교와 1936년에 준공된 광진교가 바로 그것이었다. 둘 다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졌다. 그래서 양화대교는 우리나라 기술진에 의해 한강에 만들어진 최초의 인공 교량이 된 것이다.


양평동과 합정동을 연결하는 양화대교는 서울 서남부권의 교통량 해소라는 목적과 함께 서부전선의 물자 수송을 위한 군사적 목적을 염두에 두고 건설됐다. 그래서 유사시에는 군사 작전에만 이용하도록 그 용도가 제한됐다. 양화대교는 선유도를 품고 있어 한강 다리 트레킹을 하기에 가장 좋은 다리다. 또한 합정동 방면으로는 절두산 성지를 지척에 두고 있어 역사 탐방까지 자연스럽게 진행할 수 있다.    

 

 

 

* 선유도: 선유교를 넘어 선유도로 갈 수 있다.

 

 

 

 


선유도는 처음엔 섬이 아니었다. 원래는 선유봉(仙遊峰)이라고 불렸던 곳이다. 말 그대로 신선들이 노닐었다는 선유봉은 맞은편 잠두봉과 함께 중국 사신도 즐겨 찾았다는 절경이었다. 잠두봉은 뽕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인데 흥선대원군 시절 절두산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지금은 천주교의 성지로 불리는 곳이다.

선유봉은 일제 강점기 때 여의도 비행장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채석 작업이 이뤄져 그 높이가 점점 낮아지게 됐다. 해방 이후에도 채석 작업이 진행됐고 결국, 그 원형을 잃게 됐다. 이후 한강의 강폭이 넓어져 섬이 되었고, 1978년 그 자리에 정수장이 건립됐다가 지난 2000년에 폐쇄됐다. 선유도 공원은 그 정수장을 개조해 만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선유도의 역사는 곧 한강 개발의 역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그런 아픔을 품고 있는 선유도는 한강을 찾는 서울 시민의 좋은 휴식처가 됐다. 선유도는 산책하기도 좋고, 소풍 가기도 좋은 곳이다. 날씨가 청명한 날에는 확 트인 한강을 넘어 인왕산과 남산, 멀리 북한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잠수교와 잠실철교


 
▲ 잠수교 한강다리들 중에 가장 접근성이 좋은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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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에 있는 다리를 직접 걸어서 건너다보면 자연스럽게 순위가 매겨진다. 그 중 단연 1등은 잠수교다. 도보로 한강 다리를 건널 때 가장 중시되는 부분은 진·출입의 편리성이다. 다리에 설치된 보행로는 만족스럽지만, 다리 자체에 대한 접근이 어려운 곳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잠수교는 보행로뿐 아니라 진출입의 편이성에서도 최고점을 받기에 충분했다. 한강 시민 공원에서 바로 잠수교로 진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잠수교는 795m로 한강 다리 중에서는 가장 짧다. 넓게 확보된 보행로와 진·출입의 용이성, 거기다 최단 거리로 한강을 건널 수 있기 때문에 잠수교는 한강을 가장 편하게 건널 수 있는 다리 1위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한강 다리 중에는 지하철과 속도 경쟁을 할 수 있는 곳도 있다. 바로 잠실 철교가 그곳이다. 1979년 10월. 지하철 2호선의 일부 구간으로 개통된 잠실철교는 교량 중앙에 철로가 있었고 양옆에는 도로가 놓여 있었다. 약 4미터 정도의 폭을 가진 이 도로는 현재 자전거 도로와 인도로 사용되고 있다.

이 자전거 도로를 따라 전동차와 속도 경쟁(?)을 벌이는 라이더들도 있다. 그만큼 잠실철교는 자전거와 전동차가 나란히 달릴 수 있는 공간인데 그 간격이 가까워 전동차에 탄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관찰될 정도다. 달리 말하면 전동차에 탄 승객들이 라이더가 힘들어하는 모습도 쉽게 관찰된다는 뜻이다. 그러니 전동차를 따라잡겠다고 너무 세게 페달을 밟지는 말자.

한강은 큰 강이고, 이와 비례해 담긴 이야기도 아주 많다. 봄날을 맞이해 한강을 직접 건너보는 건 어떨까? 한강과 한강 다리에 녹아 있는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건너보는 것이다.

 

 



"님아, 이 강을 걸어서 건너보세요! 대신 옷은 따뜻하게 입고요!"

 



 
▲ 잠실철교 전동차와 나란히 걷거나 자전거를 탈 수 있는 잠실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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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http://blog.daum.net/artpunk)에도 실렸습니다.



● 한강다리 트레킹 추천 코스

1. 양화대교 - 한강대교 구간: 합정역 ▶ 절두산성지 ▶ 양화대교 ▶ 선유도 ▶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 63빌딩 ▶ 한강철교 ▶ 노들텃밭(한강대교)

2. 이동거리: 약 10km / 소요 시간: 약 3시간(휴식시간 포함)

 

 

 

 

 

 

 

풍경 좋은 산, '머리 잘리는 산'이 되다___ 1편

 

서울에서 가까운 천주교 성지는? 절두산, 삼성산 그리고 마재성지

 

14.08.13 11:29 최종 업데이트 14.08.13 11:29

 

 

 

 

 

 

 

 

 
▲ 절두산 성지 당산역 방면에서 바라본 절두산 성지. 뒤로는 멀리 북한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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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4일부터 266대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4박 5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한다. 호세 마리오 베르고글리오(Jorge Mario Bergoglio)라는 이름을 가진 아르헨티나 출신 교황의 방문은 그 자체만으로도 천주교 신자들에게 큰 축복일 것이다.

비천주교 신자들도 그의 방문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듯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국 <타임>이 선정한 '올해의 인물'로 선정될 정도로 그간 활발한 대외활동을 해왔기 때문이다. 노숙인을 초청하고, 분배의 정의를 역설하는 등 전임 교황들과는 사뭇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나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지만 역사 트레킹을 통해 천주교 성지 답사를 꾸준히 해왔다. 천주교 성지 탐방은 사찰 탐방과는 또 다른 맛(?)이 있다. 지금까지 천주교 성지 답사를 하면서 깨달은 점이 하나 있었다. 생각보다 천주교 신자들이 천주교 성지를 잘 모른다는 점이었다.

이 기사는 서울 인근에 있는 천주교 성지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담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에 맞춰, 우리 땅에서 천주교가 어떤 식으로 뿌리를 내렸고 또한 어떤 수난을 겪어 왔는지 공부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머리가 떨어져 나가는' 산, 절두산

 
▲ 척화비 절두산 성지 한 쪽 편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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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하철 2호선을 타고 당산철교를 지나다 보면 절두산과 선유도를 볼 수 있다. 절두산은 옛날에는 '잠두봉'이라 불렸는데 선유봉(선유도)과 함께 빼어난 경치를 자랑했던 곳이다. 양천 현감이었던 겸재 정선은 <양화환도>를 통해 화폭에 이 풍광을 담아냈다.

뽕나무가 많다고 해 이름이 붙여진 잠두봉은 그 머리가 불쑥 튀어나와 '용두봉'이라고도 불렸다. 중국 사신들이 조선에 왔을 때 꼭 들렀다는 잠두봉이, 겸재 정선이 화폭으로 담아낼 정도로 비경을 자랑하던 잠두봉이 왜 절두산으로 바뀌어 불렸을까. 그것도 머리가 잘린다는 의미인 절두산(切頭山)으로.

1866년.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이뤄진 병인박해 때문에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죽임을 당한다. 이때 주교인 베르뇌를 포함한 아홉 명의 프랑스인들이 처형을 당했는데 그들은 새남터(현재의 용산구 이촌동)와 충남 보령 갈매못 등지에서 형장의 이슬이 됐다.

병인박해가 원인이 돼 병인양요가 발생한다. 자국의 선교사가 처형됐다는 소식에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로즈 프랑스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그런데, 당시 로즈 제독의 침공은 자국의 승인을 받지 않았다. 그런 의미로 병인양요는 국가 대 국가간의 분쟁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프랑스 함대는 본격적인 공세에 앞서 정찰선을 파견하는데 그 정찰선이 한강 깊숙한 곳까지 올라왔다. 양화진을 넘어 서강까지 침범을 하고 돌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대원군은 격분했다. 그러면서 '사악한 서양 세력의 흔적들을 천주교도들의 피로 씻어내겠다'라면서 잠두봉에 새로운 처형지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뽕나무들이 우거졌던 잠두봉은 '머리가 떨어져 나간다'는 뜻을 가진 절두산으로 바뀌어 불리게 됐다. 병인박해는 1866년을 시점으로 1871년까지 계속 이어졌다.

약 150년 전, 절두산은 수천 명의 천주교인들의 목이 잘려나간 비극의 땅이었다. 또한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가 우뚝 서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갔다. 현재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는 절두산 한쪽에 서 있지만 절두산은 그 자체가 천주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성지 중에 성지가 됐다.

 

 

 

 

 

세 프랑스 신부가 운명 달리한 곳, 삼성산 성지


 
▲ 삼성산 성지 왼쪽부터 앵베르도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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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산은 관악산의 지산이다. 삼성산은 원효·의상·윤필 세 분의 성인이 움막을 짓고 수도에 정진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성산에 있는 삼막사(三幕寺)의 유래도 거기에서 나왔다. 그런 삼성산에도 삼성산 성지라는 천주교 성지가 있다. 삼성산 성지는 기해박해(1839년) 때 효수된 세 명의 프랑스 신부들의 무덤이 있던 자리를 성역화한 것이다.


세도 가문이었지만 안동 김씨는 천주교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폈다. 하지만 뒤이어 집권한 풍양 조씨는 천주교 탄압에 앞섰다. 그렇게 해서 발발한 것이 헌종 5년에 있었던 기해박해였다. 이로 인해 권력의 중심은 풍양 조씨로 넘어갔다. 그런 면에서 기해박해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간의 권력투쟁의 부산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기해박해로 인해 앵베르도 주교(한국명 범세형)와 모방·샤스탕 신부 등이 새남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들의 주검은 노고산(마포구 노고산동)을 거쳐 삼성산에 묻혔다. 이후 천주교에서는 이곳을 성역화했고, 지금의 삼성산 성지가 조성됐다.

이 성지는 산 중에 있어서 그런지 조용히 사색하기 좋은 곳이기도 하다. 삼성산 성지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삼성산 숲이라는 소나무 군락지도 있는데 이곳도 사색하거나 시집을 꺼내 읽기 좋은 곳이다.

 

 

 

 


 

 

* 당산철교와 양화대교: 당산철교와 양화대교 사이 해역에 해양스포츠 훈련장이 있다.

 

 

 

 

 

 

 

* 인어공주: '인어공주도 입장불가'라는 문구가 재밌다. 수영금지를 알리는 현수막. 해양스포츠 훈련장 앞에 게시되어 있어서 한 컷.

 

 

 

 

 

 

 

지난 6월 1일, 한강다리에 대한 기사 작성을 위해 서울 지하철 당산역으로 향했다. 그간 한강에서 자전거 타기와 트레킹을 많이 한 탓에 한강 다리와 관련된 사진들이 넉넉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나만의 착각!!! 혼자 볼 사진이 아니라 외부로 공표할 사진이라는 점을 고려하니 그저그런 사진가지고는 성이 차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전문 사진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내 이름으로 기명 기사가 나가는데 사진을 아무거나 쓸 수 있단 말인가!!!

 

그럼 그날 제대로 된 사진을 찍었단 말인가? 아니다. 하드디스크에 담긴 예전 한강 사진이나 그날 찍은 사진이나 별로 차이점이 없었다. 그저 마음만 앞섰다고 할까나? 아니면 나의 촬영 기술이나 미적 감각의 한계? -_-

 

하지만 그날 흥미로운 사진들을 몇 컷 촬영했다. 당산역 부근 한강시민공원에는 해양스포츠 훈련장이 있다. 아래 사진에서도 보이듯 청소년들이 해양스포츠를 즐길 수 있게 지도와 훈련을 해주는 곳이다. 필자가 방문한 날은 1인용 요트, 그냥 돗단배라고 해도 무방한 배들이 당산철교와 인근 선유도 부근 해역에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코치로 보이는 사람들이 연신 소리를 지르며 아이들에게 지시를 했고, 아이들은 그 지시에 따라 좋다고 배를 몰았다.

 

 

 

 

 

 

* 양화대교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함성들이 당산역 부근 한강가에서 울려퍼졌다. 세월호 참사 이후 배를 타는 모습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사실 물이 무서웠다고 해야할 것 같다. 나뿐만 아니라 내주위의 다른 사람들도 그런 말들을 내뱉었었다. 배 타기가 무섭다고...

 

그래서 더 씩씩하게 요트를 운행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더 반가웠는지 모르겠다. 요트를 운행할 때만큼은 아이들에게 주입식 교육이나 학교시험 같은 것은 다른 나라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 순간만큼은 돛을 움직여야 했고, 물살을 주시해야 했으니까. 그러다 무사히 운행을 마치고 정박지에 돌아오고...

 

그런 활동들이 진짜 교육이 아닐까? 스스로 무언가 해내고 서로 어울려서 협동심을 기르는 것이 진짜 교육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 해양스포츠 훈련 

 

 

 

 * 해양스포츠 훈련

 

 

 

 

* 해양스포츠 훈련장: 운항을 마치고 항구(?)로 돌아온 아이들 

 

 

 

 

* 해양스포츠 훈련장: 당산역 부근 한강시민공원 주변에 있다.

 

 

 

 

 

 

* 샛강생태공원: 여의도의 숨어 있는 진주 샛강생태공원.

 

 

 

 

 

 

 

 

* 코스명: 여의도샛강길

 

 

* 이동경로: 당산역 ▶ 선유도 ▶ 샛강(여의도) ▶ 한강대교 ▶ 한강텃밭

 

* 역사유적: 선유도, 절두산 성지, 한강대교, 한강철교, 양화대교

1. 선유도(선유봉): 근대화 이전 시기의 한강 하구에 대한 설명. 선유도의 불운의 역사 설명.

2. 절두산(잠두봉): 선유봉과 잠두봉을 엮어서 설명. 절두산 성지에 대한 이야기 설명.

3. 한강대교, 한강철교, 양화대교: 각 다리에 얽혀 있는 이야기 설명.

4. 그 외: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한강 텃밭

 

 

* 이동거리: 약 8.5km

 

 

* 예상 소요시간: 약 3시간(쉬는 시간 포함 등)

 

 

* 난이도: 하 ---> 초보자 가능

 

 

* 방향찾기: 표지판 있음. 한강, 여의도에 위치한 길이라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음.

 

 

* 이용불가 계절: 없음. 4계절 이용 가능함.

 

 

* 특이사항: 당산역에서 샛강생태공원으로 이동할 때 자전거를 조심해야 함.

 

 

* 교통편: 서울 지하철 2호선 당산역을 이용. 트레킹을 마친후에는 한강대교 근처에 있는

        지하철 9호선 노들역을 이용할 수 있음.

 

 

 

 

 

 

 

 

 

 

* 여의도 샛강길: 여의도 샛강 트레킹 코스 지도.

 

 

 

 

 

 

 

 

* 절두산 성지: 절두산은 직접 가지 않고, 양화대교에서 구두로 설명한다.

 

 

 

 

 

 

 

* 양화대교: 선유도에서 바라본 양화대교

 

 

 

 

 

 

 

 

* 샛강생태공원: 생태공원에는 저렇게 흙길이 있다.

 

 

 

 

 

 

여의도샛강 역사트레킹 후기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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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한 가을날에 떠난 한강 역사트레킹

13.10.17 14:10l최종 업데이트 13.10.17 21:43l
곽동운(artpunk)             

 

---> 1편에 이어서

 

 

 

# 자신을 아낌없이 다 내주었던, 선유봉

과연 그럴까? 정말 한강에 볼거리가 없을까? 한강역사트레킹의 첫 번째 도착지는 선유도 공원이었다. 원래 선유도는 선유봉이라고 불렸던 해발 40m 정도의 봉우리였다. 강가 바로 옆 쪽에 우뚝 선 모습이 아름다워 예로부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왔다고 한다. 중국 사신들도 조선에 오면 꼭 선유봉이 있는 양화 일대를 유람하고 돌아갔다고 할 정도였다.

겸재 정선도 선유도를 사랑한 사람 중에 한 명이었다. 겸재는 양천 현감으로 있었던 1741년에 <양화환도> <금성평사> <소악후월> 등 3편의 진경산수화를 그려, 지금의 선유도 일대의 한강 유역을 사실감 넘치는 필치로 담아내었다.

특히 <양화환도>에서는 선유봉과 함께 잠두봉이라고 불렸던 지금의 절두산이 등장하고, 또한 그 잠두봉 아래에는 양화진(지금의 합정동)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선유봉과 잠두봉 사이의 강물길을 느긋하게 나룻배로 건너고 있는 뱃사공의 모습도 화폭에 담겨 있어 그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내 자신도 그 그림 속에 뛰어들어 신선놀음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들 정도다.

그렇다. 선유봉(仙遊峰)은 신선이 노닌다는 봉우리였다. 그럼 왜 선유봉은 졸지에 선유도로 내려앉았는가? 선유도는 이웃들에게 아낌없이 자신을 내주었다. 일제에 의해 여의도에 비행장이 들어설 무렵, 활주로를 닦고 제방을 쌓는다며 선유봉에서 채석을 한 것이다. 그렇게 선유봉은 채석장이 되어버렸고 봉우리는 점점 더 낮아져 갔다. 해방 이후에도 선유봉은 계속해서 채석장으로 이용되었는데 선유봉에서 캔 돌들은 지금의 강변북로 공사 등에 이용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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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샛강생태공원 한강 역사트레킹팀이 활기차게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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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깎이다보니 선유봉은 납작하게 되었고, 이후 한강이 개발되어 강폭이 넓어졌을 때 영등포 쪽과 분리되어 섬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후 1978년에는 서울 서남부권에 식수를 공급하는 정수장이 선유도에 들어서게 됐고, 그 정수장이 지난 2000년에 폐쇄되어 지금의 선유도 공원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그러고보면 선유도는 참 사연이 많은 섬이다. 깎이고, 부서지고, 졸지에 섬이 되어버리고.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선유도가 그렇게 아낌없이 내주었기에 지금이 서울 시민들은 느긋하게 '신선놀음'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날도 많은 사람들이 선유도에서 느긋하게 강바람을 맞으며 가을소풍을 즐겼다. 우리 역사트레킹팀도 간식을 먹으며 즐겁게 선유도를 탐방했다.

 

 



# 잠두봉이 왜 절두산으로 개명했나?

선유도를 이야기하면서 절두산을 언급하지 않는다면 안 될 것이다. 절두산은 한강역사트레킹의 루트는 아니었지만 그 중요성 때문에 따로 시간을 내서 설명을 했다. 앞서 말한 <양화환도>에서 절두산, 즉 잠두봉은 선유봉과 짝을 이루고 있다. 뽕나무가 많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잠두봉은 그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고 하여 용두봉이라고도 불렸다.

중국 사신들이 조선에 왔을 때 꼭 들렀다는 잠두봉이, 겸제 정선이 화폭으로 담아낼 정도로 비경을 자랑하던 잠두봉이 왜 절두산으로 이름이 바뀌었을까? 그것도 머리가 잘린다는 의미의 절두산(切頭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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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두산 성지 당산역 방면에서 찍은 사진이다. 절두산 성지 뒤로 북한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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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이루어진 병인박해 때문에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죽음을 당한다. 이때 주교인 베르뇌를 포함한 9명의 프랑스인들이 처형을 당했는데 그들은 절두산이 아닌 새남터(현재의 용산구 이촌동)와 충남 보령 갈매못 등지에서 죽었다.

이 병인박해가 원인이 되어 병인양요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자국의 선교사가 처형됐다는 소식에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의 로즈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 프랑스 함대는 본격적인 공세에 앞서 정찰선을 파견하는데 그 정찰선이 한강 깊숙이까지 올라온 것이다. 양화진을 넘어 서강까지 침범을 하고 돌아간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대원군이 가만히 있었겠는가? 아주 격분을 했다. 그러면서 '사악한 서양 세력의 흔적들을 천주교도들의 피로 씻어내겠다'며 잠두봉에 새로운 처형지를 만든 것이다. 그렇게 하여 뽕나무들이 우거졌던 잠두봉은 머리가 떨어져 나간다는 뜻의 절두산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 것이다.

약 150년 전, 그렇게 절두산은 수천 명의 천주교인들의 목이 잘려나간 비극의 땅이었다. 또한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가 감시견처럼 서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강물처럼 끊임없이 흘러갔다. 그 흐름은 흥선대원군도 어쩌지를 못했다. 현재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는 절두산 한쪽에 꿔다둔 보릿자루 마냥 껑뚱하게 서 있지만 절두산은 그 자체가 우리 천주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성지 중에 성지가 됐다.

서양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반대는 어느 정도 수긍이 가지만 사람들의 피로 그 흔적을 닦아낸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무슨 공포영화를 찍는 것도 아니고 사람 피로 무엇을 닦는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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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척화비 절두산 성지 한 쪽 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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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병인양요에 대해서 프랑스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더불어 그 콧대 높은 프랑스 함대가 왜 다시 조선을 침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시대사적인 유추를 해보았다.

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의 통치기였다. 그 시절 전 유럽은 신흥강국으로 발돋움한 프로이센에 대해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그 중 프랑스는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나라 중에 하나였다. 아니나다를까 몇 년 후 프랑스와 프로이센간에는 전쟁이 벌어졌고, 그 파장으로 독일 지방은 통일된 국가를 이루게 됐다. 즉 1866년경, 프랑스는 동방의 조선에 물리력을 집중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 숨어 있는 진주,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이런 필자의 설명을 뒤로하고 한강역사트레킹팀은 여의도 샛강생태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샛강생태공원은 1997년 9월 경에 우리나라 최초로 조성된 생태공원이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트레킹 코스나 자전거도로가 닦인 것은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앞쪽의 한강이 보기 좋게 정비가 됐다면, 뒤쪽의 샛강은 그렇지 못했다. 생태탐방로나 나무데크 같은 시설이, 또 자전거 도로 같은 인프라가 갖추어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S라인을 강조하며 여의도와 신길역을 연결하는 샛강도보교가 개통된 지도 겨우 1년 남짓 밖에 되지 않았다. 정확히는 2011년 4월 12일에 개통했다고 한다. 역으로 말하면 샛강의 접근성은 최근에 와서야 좋아졌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샛강생태공원이 무슨 대단한 절경을 품고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샛강은 상당히 매력적인 공간이다. 여의도의 고층건물과 습지가 서로의 배경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여의도라는 서울에서도 알아주는 첨단 구역에 샛강생태공원이라는 허파와도 같은 공간이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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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샛강생태공원 샛강생태공원은 억새가 많은 곳이다. 그 억새들을 배경으로 한 컷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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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합시다, 역사트레킹! 

한강 역사트레킹의 다음 탐방지는 중지도에 있는 노들 텃밭이다. 한강대교가 걸터 있는 중지도에 도시형 텃밭이 들어섰는데 그 곳이 우리의 마지막 방문지였던 노들텃밭이었다. 그곳은 2012년에 첫 농사를 지었는데 63빌딩을 비롯한 여의도의 고층 빌딩을 바라보며 농사를 짓는 이색적인 곳이다. 도심지 한복판에 한가롭게 허수아비들이 들어서 있는 모습도 흥미롭다. 노들 텃밭에는 오두막도 많은데 그곳에서 먹는 새참과 간식은 꿀맛일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한강 역사트레킹은 무사히 마무리됐다. 무슨 여복(?)이 터졌는지 모르겠지만 필자를 빼고는 모두 젊은 처자들이 이번 트레킹에 참여를 했다. 그것도 5명씩이나. 그런 5명의 재기발랄한 젊은 처자들과 함께 4시간 정도를 걸었더니 아주 상쾌했다. 물론 그들을 리딩하는 것 자체가 부담이긴 했지만 그 정도는 마스터의 숙명이라고 생각하고 감수를 했다. 

앞으로도 역사트레킹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역사트레킹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주말에 마땅히 할 일이 없으면 애꿎은 방바닥만 긁지 말고 필자와 함께 역사트레킹에 나서 보는게 어떤가? 필자가 유머 감각이 뛰어나지는 않다. 그래서 '이승만은 세종대왕과 같다'와 같은 '빵' 터지는 개그콘서트를 펼치지는 못한다.

하지만 단언컨대 일본 우익의 주장을 고스란히 담은 후소사 역사교과서나 요즘 한참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교학사 역사교과서보다 훨씬 더 양질의 콘텐츠를 제공할 것을 확실히 보장한다. 말만 잘하면 필자가 밥도 사줄 수 있다.

 

 

 

 

 

 

 

 

 

 

청명한 가을날에 떠난 한강 역사트레킹

13.10.17 14:10l최종 업데이트 13.10.17 21:43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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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고층건물들과 습지가 서로 어우러진 모습이 상당히 이채로운 곳이다. 올 여름에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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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끊어진 다리

"그게 정말이에요? 저 한강대교가 폭파됐었다고요? 그게 언젠데요?"

누군가 놀란 듯 큰 목소리로 필자에게 물었다. 나머지 팀원들은 조용히 숨을 죽이고 필자의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국전쟁 때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끊은 주체가 인민군이 아닌 우리 국군이었다는 점입니다. 인민군의 남하를 막겠다고 다리를 폭파시킨 거죠. 전쟁 때는 일부러 시설물을 파괴해서 적군의 행군 속도를 늦추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강대교 폭파는 문제가 아주 많았어요. 다리 절단으로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기 때문이죠."

 


"무슨 피해가 있었는데요?"

 


"사전 예고 없이 폭파가 실시돼서 당시 다리를 건너던 피난민들이 많이 죽었어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물에 빠져버렸습니다. 더 황당한 일은 다리가 끊기기 몇 시간 전까지, 수도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힘찬 목소리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는 겁니다."
"그럼 대통령이 서울에 남아 있었는데 다리를 끊었다는 건가요?" 

 


"아닙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에 없었어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권 수뇌부들은 멀리 대전까지 피난을 간 상태였습니다. 미리 녹음했던 음성으로 계속 돌려 됐던 거죠. 그래서 실제로 그 방송 내용을 믿고 피난을 안 간 사람도 있었다고 하네요. 웃기는 거죠. 자신들만 살겠다고 도망을 간 건 그렇다 쳐도 왜 거짓말을 합니까? 서울에 있지도 않으면서 서울에 있다고 구라쳐서 국민들을 바보로 만들고."

필자의 설명이 끝나자 분위기는 한층 더 가라앉았다. 그래서 영화 이야기로 방향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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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역사트레킹의 코스 당산역 ->선유도공원 -> 샛강생태공원 -> 노들텃밭(한강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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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투 동막골>이라는 영화 기억나시죠? 그 영화에서 신하균이 육군 소위로 나오잖아요. 영화에서 신하균은 탈영을 하고 자살까지 시도를 했는데 그게 다 죄책감 때문에 그랬더라고요. 피란민들이 몰려든 다리를 폭파시켰는데 담당자가 신하균이었던 거죠. 그래서 신하균은 죄책감에 시달렸던 거고요. 그 부분은 한강대교 폭파에서 모티브를 따온 게 아닌가 하네요."

씁쓸한 적막감이 바람에 실려 온 듯 우리 한강 역사트레킹팀을 크게 흔들고 지나간 듯싶었다. 누군가 소리 낮춰 이야기 내뱉었다.

"아픈 우리 현대사네요."

 


"그렇죠.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당시 찍은 사진들을 보니까 마치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연상되더군요. 상판이 떨어져 나가서 강물에 둥둥 떠 있고요…."

 


# 한강에 뭐 볼 게 있는가?

10월 13일 오후. 가을날의 한강은 청명함이 더해가고 있었다. 일요일 오후의 느긋함을 만끽하려는 듯 한강시민공원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는 여유가 흘러넘쳤다. 우리 한강역사트레킹 팀의 얼굴 표정에서도 그런 청명한 가을 날씨가 살아 숨쉬는 듯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리팀은 진지함까지 묻어 있었다. 하나라도 더 배워가려는 듯 필자의 말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그런 진지함이 부담으로 작용했는지 필자의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거 괜히 버벅대서 팩트 전달이 꼬이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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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역사트레킹 여복이 터졌나? 필자만 뺴고 모두 젊은 처자들이었다. 이 분들 덕분에 재미난 역사트레킹을 할 수 있었다. 뒤에 보이는 곳이 선유도와 양화대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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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역사트레킹 마스터다. 이 직함은 우리나라에서는 필자가 처음으로 사용했다. 즉, 국내에서는 유일무이한 직함이라는 것이다. 역사트레킹 마스터는 역사 유물 앞에서는 유홍준 선생이 되어야 하고, 필드에서는 엄홍길 대장이 되어야 한다. 또 직접 트레킹 코스도 개척해야 하기에 손발이 무척 분주한 직업이다.

이렇게 보면 역사트레킹 마스터라는 게 무척 대단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지적인 면과 아웃도어적인 면이 동시에 부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냥 '빛 좋은 개살구'였다. 그동안 그 직함에 어울리는 활동이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역사트레킹 마스터라고 그냥 폼만 잡고 다녔던 것이다.

그랬다. 그간 필자의 손발은 무척 한가했다. 또한 필자가 주인장으로 있는 역사트레킹 카페도 파리만 날렸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얼마전 위즈돔이라는 지식 공유 사이트에 <한강역사트레킹>이라는 코너를 하나 개설했다. 운이 좋았는지 코너는 매진이 되었고, 10월 13일에 역사트레킹의 첫 항해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한강에 무슨 볼거리라 있다고, 거창하게 '역사트레킹'을 하냐는 비아냥거림이 있을지 모른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한강이야 산책하고, 운동하는 그러는 곳이잖아. 그렇게 친숙한 곳에 '한강역사트레킹'이라는 거창한 명칭을 붙이는 거 오버 아니야? 괜히 있어 보이려고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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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화대교 선유도공원에서 바라본 양화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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