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에 산티아고가 없다면?

- 마음으로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

 

 

 

이번에는 국내를 넘어 스페인으로 이야기를 확장해볼까 합니다. 스페인에는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 제가 하는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통상적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내용이 아닐 겁니다.

 

 

 

* 산티아고 순례길







산티아고 순례길과 제주 올레길

 

제주 올레길은 우리나라 도보여행의 시발점입니다. 2007년 제주 올레 1코스가 개척된 이후, 우리나라 도보여행길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됐습니다. 지금은 2km 이상이 됐는데 이 길이는 지구 반지름에 필적할 정도로 엄청난 길이입니다. 이 제주 올레의 모태가 바로 산티아고 순례길입니다. 그런 면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은 우리나라의 도보여행에 많은 영향을 준 셈입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영향력은 요즘도 식을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도보여행자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탐방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순례길 걷기를 일생일대의 버킷리스트로 올려놓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니 이 역사트레킹펀딩에서도 꼭 한 번은 다뤄봐야겠지요.

    

 







 

 * 산티아고 콤포스테라라 시가지. 사진 중앙 상단에 산티아고 대성당의 첨탑이 보인다.







스페인 민중들 속에서 부활한 야고보

 

산티아고(Santiago)는 스페인어로 야고보를 뜻합니다. 야고보는 사도 요한의 형으로, 야고보와 요한은 둘 다 예수의 12제자였습니다. 야고보는 현재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위치해 있는 이베리아 반도에 복음을 전파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야고보는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돌아오지요. 고된 사역길 이후에 다시 돌아온 고향이었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금의환향이 아닌 죽음의 그림자였습니다. 유대왕인 헤롯 아그리파 1세의 무시무시한 칼날이 그의 목을 내리쳤기 때문입니다. 아그리파는 예수가 태어날 때, 베들레헴의 신생아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했던, 그 헤롯왕의 손자였습니다.


대대로 헤롯왕가들은 유대 땅에 그리스도교가 기반을 잡는 것을 싫어했던 모양입니다. 결국 야고보는 기원후 44725일에 참수를 당합니다. 12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후 야고보의 시신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배에 실려, 에스파냐 북서부 지역으로 이동을 하게 됐다고 합니다. 에스파냐에서 복음을 전한만큼 그 곳에 뼈를 묻겠다는 유언이 있었고, 제자들이 실행에 옮겼다는 겁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부터 그 먼, 당시는 로마지배 하에 있던 이베리아반도까지 장거리 항해를 마다하지 않고 제자들은 돛을 올렸을 겁니다.


당시 로마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지 않았습니다. 공인은커녕 탄압에 앞장섰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요? 야고보와 관련된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잊혀 갔습니다.










* 산티아고 순례길








이후 야고보의 존재가 민중들 속에서 부활하게 된 시기는 8세기경이었습니다. ‘별들의 들판이라고 불리는 캄푸스 스텔라(Campus Stellae)에 있는 무덤중 하나가 별의 계시를 받을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민중 속에서 널리널리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그 계시가 실현이 된 것인지, 서기 813년경 성인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되었다고 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를 지배하고 있던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알폰소 2세는 그 무덤이 발견된 곳에 성당을 짓게 합니다.


그렇게 하여 건립된 것이 산티아고 대성당이었습니다. 또 그 대성당이 위치한 곳에 도시가 들어섰는데 그 곳이 바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였습니다.


여기까지가 산티아고 카미노(camino: 스페인어로 ’)에 녹아 있는 역사적인 스토리텔링입니다. 이런 내용들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소개하는 우리언론들 뿐 아니라 스페인 관광청의 소개책자에도 기술되어 있습니다.

 




 

* 야고보 성인. 산티아고 대성당 외벽에 조각된 야고보.






 

야고보의 제자들은 어떻게 그 먼 뱃길을 찾아갔을까?

 

산티아고 카미노를 걷는 사람들은 필그림(Pilgrim)이라고 불립니다. 영어 풀이 그대로 순례자라는 뜻입니다. 종교다원론자(?)인 저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습니다. 짧게나마 필그림이 되었고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야고보 성인을 기리며 미사에도 참석했습니다.


대성당에서 드린 미사는 필자에게 무언가 모를 강한 영감을 심어주었지요. 그 영감은 예전 논산 관촉사에서 은진미륵을 처음 보았던 때의 감흥과 비슷했답니다.


순례자의 마음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고, 또한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선한 감흥을 얻었지만 여행을 하기 전부터 품었던 근본적인 물음은 계속 풀리지 않았답니다. 그림자처럼 그 물음은 계속 저의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진짜 산티아고 대성당에 사도 야고보가 묻혀 있는 게 맞는 거야? 야고보의 제자들은 스페인 땅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을 텐데 어떻게 거기까지 간 거지. 내비게이션이라도 있었던 건가? 그래 그들이 갔다고 치자. 그런데 굳이 지브롤터 해협을 돌아서 스페인 서부 지역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스페인 동부 해안 쪽이 훨씬 더 가깝잖아.’

    








* 한국 컵라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는 한국 사람들이 많기에 저런 광고문구가 나왔으리라...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없다?


이 물음대로하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그 수많은 순례자들은 사기를 당한 셈이 됩니다. 있지도 않은 야고보 무덤을 보기 위해 수 백 킬로에 달하는 길을 걷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을 자신의 버킷리스트로 등재한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미래에 행할 바보들의 행진을 준비하기 위해, 현재의 소중한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는 멍청이들인가요?


시간이 지날수록 저의 의문은 더욱더 짙어져갔습니다. 그러다 새 유럽의 역사라는 책, 159쪽에 기술된 부분을 읽게 되었지요.

 

사도 성 요한의 형제이자 에스파냐의 수호성인인 야곱이 에스파냐에서 복음을 전도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프레데리크 들루슈 편, 윤승준 역, 새 유럽의 역사(까치)

 

이 서술에 의하면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없을 확률이 농후해집니다. 이외에도 서양의 중세사를 다룬 유명한 저서, 서양중세사에서도 야고보와 스페인에 대한 관계를 그저 전설수준으로 서술하였더군요.


애초 야고보가 에스파냐에 복음을 전달했을 가능성이 없었다면 그의 유언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가보지도 않은 땅에 자신의 주검을 묻어달라고 간청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사기를 당한 것일까요? 존재하지도 않은 야고보의 행적을 쫓아,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는 바보들인가요?

 

 




* 이베리아 반도 지도. 야고보의 제자들이 이베리아에 가려고 했다면 바로셀로나 같은 동부 지역에 닻을 내렸을 것이다. 뭐하러 지르롤터를 거쳐 대서양까지 나갔다가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 먼 길을 돌아갔겠는가? 더군다나 그들이 탄 배는 나룻배 수준이었을텐데. 한편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를 포함하는 서북부에 위치해 있었다.  






 

국토회복운동에 구심점이 되어 준 야고보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된 시기는 9세기 초반 경이었습니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은 이슬람 세력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611,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이래, 무슬림들은 포교를 위한 전쟁을 수행해나갔습니다.


북아프리카 일대를 점령한 그들은 711,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반도까지 물밀 듯 쳐들어갔습니다. 당시 이베리아반도에 있던 서고트왕국은 이들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713년에 멸망합니다. 이후 서고트 왕국의 옛 귀족들은 이베리아반도 북서쪽 산악지대로 도주를 했다가, 718년에 아스투리아스(Asturias) 왕국을 창건하게 됩니다.


스페인은 유럽 주요국들 중 유일하게 십자군전쟁에 참여를 하지 않은 나라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1차 십자군 전쟁(1096년 발발)이 일어났을 때도 국토의 절반 이상이 이슬람 세력에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자국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입니다.


이런 국토회복운동을 레콘키스타(reconquista)라고 부릅니다. 국토회복운동은 이슬람세력이 침공했던 711년부터 1492년까지, 무려 800년이나 지속됐는데 그런 국토회복운동의 중심에 야고보가 서게 됩니다.


국토회복이라는 엄청난 과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큰 구심점이 필요했는데 스페인 사람들은 그 역할을 야고보에게 맡긴(?) 것입니다. 12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를 했던 야고보였기에 그런 중책이 맡겨졌을 겁니다.


그와 관련하여 전설이 하나있습니다. 844년에 있은 클라비호 전투에서 백마를 탄 야고보가 나타나 이슬람 무어인들을 무찔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후 야고보는 무어인을 죽이는 산티아고(Santiago Matamoros)’라고 불리기도 하였답니다.


이렇듯 야고보는 스페인 사람들을 정신적, 종교적으로 하나로 묶어 이슬람 세력에 대한 항전 의지를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야고보는 큰 구심점이 되어주었던 것입니다.

 

 



* 산티아고 개: 산티아고 도심 입구 쪽에 있는 대저택에서 기르던 개. 무척 귀여워서 한 컷!  





 

의심도 순례자들의 덕목일지 모른다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있냐, 없냐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내려줄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겁니다. 한편 고생고생하며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도 저와 같은 의문을 한 번쯤 다 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그 당시 항해기술로 예루살렘 땅에서 스페인까지 원거리 항해가 가능하겠어!’

 

저는 그런 의심(?)들도 순례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 중에 하나로 판단합니다. 덮어놓고 무조건 믿어라, 믿어라하면 맹목적인 신앙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의심하지 말라라고 적혀 있지만, 그 의심이 합리적이라면 계속해서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라는 물음 없이 교조적으로 종교를 받아들인다면 그건 종교가 아니라 세뇌일 뿐이죠. 그 세뇌가 통한다면 그로 인해, 누군가가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글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고 치자, 그럼 이제 산티아고 순례길을 무슨 의미로 걷는단 말인가?’

 

이런 의문이 드실 수도 있을 겁니다. 저는 마음으로 걸으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마음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걷는다면 산티아고가 있고, 없고의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가 될 테니까요.

 

 

 

 

 

 

 

 

 

 



 

 

스페인 땅끝 가는 길에 만난 '빤스' 할아버지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7] 스페인의 땅끝 피스테라 가는 길

 

15.01.13 11:00최종 업데이트 15.01.13 13:51

 

 

 

 

 

 

 

 

 
▲ 피스테라 가는길 스페인의 땅끝 피스테라 가는길.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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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창피해서 명함을 못 내밀겠네요."

"뭐가요?"
"800킬로 찍은 사람들이 널리고 널렸는데 겨우 100킬로 밖에 못 뛰었으니까요."
"에이, 그래도 100킬로도 적은 거리가 아니죠."

 


산티아고 대성당 인근에서 만난 한국 순례자들과 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사실 100km도 적은 거리는 아니다. 하지만 풀코스인 800km를 마친 순례자들 앞에 서면 왠지 모르게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필자도 국내에서는 무동력 여행으로 수천 킬로미터를 누볐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그저 1/8만 채운 순례자였을 뿐이다. 그런 자격지심 때문인지 성취감보다는 아쉬움이 더 컸다. 그래서 다음 목표를 향해 당장이라도 발을 떼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런 감정은 필자 혼자만이 느낀 것이 아니었다. 순례팀 전체가 느끼고 있었다.

 



 
▲ 피스테라 가는길 피스테라 가는길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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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땅끝마을 '피스테라'


2014년 11월 10일, 여행 8일째. 아침 일찍, 순례팀은 피스테라(Fisterra)로 가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피스테라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서쪽으로 약 9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스페인의 땅끝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야고보의 시신은 나룻배에 실려 에스파냐 땅에 닿게 됐는데 그 첫 번째 장소가 바로 피스테라였다고 한다. 그런 역사적인 스토리텔링에다 땅끝이라는 지정학적인 의미가 더해진 곳이기에 피스테라는 순례여행이 아니더라도 꼭 한 번 방문해 볼 가치가 있는 곳이다.

피스테라로 가는 시작점은 산티아고 대성당이다. 대성당은 순례길의 종료점이기도 했지만 땅끝으로 가는 시작점이 되기도 했다. 시작과 끝이 공존하는 곳을 보고 있자니 '끝은 또 다른 시작'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새삼스레 인생은 끝없는 여정이라는 생각도 떠올랐다.

'시작 할 때는 이게 언제 끝나나, 하고 막막해 하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마침표를 찍게 되고, 그러다 또 다른 시작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예전 국내여행을 할 때도 그랬다. 시작할 때는 막막했지만 여행이 종료가 될 때는 성취감을 느끼는 동시에 이미 다음 여행의 경로를 머릿속으로 그리곤 했었다. 

'이번에는 종단을 했으니까 다음에는 남해안을 휙 가로질러 횡단을 해야겠군. ' 

 


 
▲ 산티아고 대성당 피스테라 길의 시작점인 산티아고 대성당. 중앙에 있는 이는 사단법인 '아름다운 도보여행'의 손성일 대장이다. 순례팀이 방문했을 때, 대성당은 공사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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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가 필요한 피스테라 길


산티아고-피스테라 구간은 확실히 순례객들이 적었다. 전날까지 북적거리던 길은 한산하다 못해 인적이 뜸하기까지 했다. 이를 두고 순례팀을 이끌었던 '사단법인 아름다운 도보여행'의 손성일 대장은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완주자들은 프랑스 국경에서 800km를 걸어서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온 거예요. 그래서 성취감과 함께 공허함 같은 것이 밀려 와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화장실에서 울기도 해요. 또 어떤 이들은 식사를 하다가 눈물을 닦기도 하고 그래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주 복잡한 심경에 놓이는 거죠. 한편으로는 몸에서 진이 빠진 것도 있고요."

손성일 대장은 이번으로 해서 순례길만 벌써 3번째인데 자신도 처음 순례길을 완주했을 때 식당에서 갑자기 울컥한 적이 있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진이 빠진 사람들이 굳이 90km 남짓한 거리를 또 걸어서 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한 산티아고 시내에서 피스테라까지는 직행버스가 다니기 때문에 그걸 타면 편안히 이동할 수가 있다. 요금은 약 10유로(약 1만4천 원)정도라 저렴하고, 시간은 약 2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피스테라 구간은 순례객들이 적은 만큼 편의 시설도 적다. 당연한 것이다. 사람 가는 데 돈 간다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으니 바르(bar)나 알베르게(albergue)도 드물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좀 더 계획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알베르게 위치를 고려하여 하루 이동거리를 정확히 산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야간 트레킹을 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피스테라 가는 길 피스테라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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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과 산맥이 공존하는 갈리시아 지방

 


피스테라 길은 인적도 드물었지만 마을 자체도 듬성듬성 있었다. 조금은 척박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개발이 덜 된 곳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갈리시아 지방의 속살을 들여다본다는 생각도 들었다.

피스테라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속한 갈리시아 지방은 스페인의 북서부에 위치해 있는데 서쪽으로는 대서양, 위쪽으로는 비스케이만에 둘러싸여 있다. 지형은 산지 형태를 띠고 있는데 험준한 산악지형이라기보다는 구릉형 산지가 층층이 쌓아 올려진 형태다. 

여행기 2편(관련 기사 :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고?)에도 언급했듯이 이 지역은 이베리아반도가 이슬람의 지배 하에 있을 때도 그 침략의 사슬에서 벗어나 있던 곳이다.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온 북아프리카 무어인들은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켰고, 이에 서고트 왕국의 옛 귀족들은 반도의 서북부에서 아스투리아스(Asturias)를 건립하여 가톨릭 왕국의 재건에 나선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서북부 지역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들어섰다. 이곳은 첩첩산중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산악지형을 띠고 있기에 효과적인 방어가 가능했을 것이다.

대서양에 가까워지는 만큼 기후변화가 더 심해졌다. 비가 더 심하게 오락가락했다. 그때마다 배낭에서 판초우의를 꺼냈다, 넣었다도 반복됐다. 우리나라 여름철 날씨도 변덕스럽지만 여기에 오면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호랑이가 장가'를 갈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무지개도 무척이나 많이 봤다. 평생 본 무지개보다 순례길을 걸은 동안 본 무지개가 훨씬 더 많았을 정도다.

 



 
▲ 무지개 갈리시아 지방은 비가 많이 그런지 무지개도 자주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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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1일, 두 번의 '폭풍우'를 만나다


11월 11일에는 짧은 순간이나마 엄청난 폭풍우를 만나기도 했다. Olveiroa라는 마을로 향하는 길에 우박을 동반한 집중호우를 만났는데 무슨 태풍이 온 줄 알았다. 빗줄기는 따가울 정도로 세게 내려치지, 강풍으로 몸은 휩쓸려 갈 것 같지. 그날의 폭풍우가 얼마나 거셌는지 여행수첩에 이렇게 기록해 놓을 정도였다.

"서울 촌놈 스페인 깡촌에 와서 듣도 보도 못한 '스페인 폭풍우'에 휩쓸려 갈 뻔했네."

순례팀은 몸이 싹 다 젖은 상태로 사립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사립 알베르게는 10~15유로 정도인데 공립보다는 좀 더 시설이 쾌적하다. 이날 1박을 한 사립 알베르게는 바르까지 함께하는 곳이라 숙식이 한꺼번에 해결되는 장점이 있었다. 물론 침대도 깨끗하고 안락했다.

하지만 그렇게 쾌적한 알베르게에서, 필자는 또 한 번의 작은 '폭풍우'을 만나야 했다. 예상치 못한 엄청난 폭풍우를 만난 터라 몸이 피곤했고, 또한 배도 살살 아파왔다. 그래서 화장실을 좀 오래 썼다. 이곳도 화장실과 샤워실이 붙어 있는 곳이었는데 그날따라 '폭풍우'처럼 시원하게 화장실을 봤다. 변기가 넘치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들 정도로 아주 시원하게 날려버렸다. 그리고는 샤워를 하며, 비에 젖은 속옷과 양말 등을 빨려고 세면대에 담가두었다. 화장실도 오래 보고, 샤워도 오래했더니만 밖에서 누군가 문을 세게 두들겼다.

"쾅쾅쾅"

다른 쪽도 두들긴다.

"쾅쾅쾅"

단순히 노크가 아니라 아주 감정이 실린 듯 세게 두들겼다. 그리고는 알 수 없는 스페인어가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쏟아져 나온 말들이 마치 폭풍우처럼 필자의 몸을 감싸왔다.

"아임 쏘리, 아임 쏘리(I'm sorry, I'm sorry)."

 

 



 
▲ 사립 알베르게 저 곳에서 연타석(?)으로 폭풍우를 만났다. 도착하기 전에 한 번, 그 곳 화장실에서 또 한 번...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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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미안하다고 말했다. 괜히 '폭풍우'와 맞설 필요가 없으니까. 대충 수건으로 물기를 닦은 후 문을 여니 어느 스페인 할아버지가 '빤스'바람으로 시계를 가리키며 필자에게 또 속사포를 쏴댔다. 이에 필자는 합장을 한 후 다시 '아임 쏘리'라고 했더니, 그분은 무언가 울분 같은 걸 삼킨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어쨌든 또 폭풍우를 하나 넘기게 됐다.


바르에서 치킨샐러드와 와인으로 맛있는 저녁을 즐긴 후 다시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폭풍우 때문에 진이 빠졌기에 몸이 아주 노곤했다. 잠을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시 침실로 돌아왔을 때 좀 당혹스러웠다. 속사포로 작은 '폭풍우'를 일으켰던 '빤스' 할아버지가 맞은편 침대에서 느긋하게 '빤스' 바람으로 누워있던 것이 아닌가! 대신 이번에는 뭐가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스페인 사람들 다혈질이라는데 '빤스' 할아버지를 보니 그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닌 듯싶었다.

이렇듯 스페인의 땅끝마을로 가는 길도 역시 알콩달콩한 에피소드가 넘쳐났다. 폭풍우를 연이어 만났으니...

 

 



 
▲ 사이 좋은 개와 고양이 개와 고양이는 서로 앙숙이라는데 저 녀석들을 보니 그 말이 꼭 맞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순례길에서 찍은 사진이다. 한편 필자도 저 사진에서처럼 그 스페인 '빤스' 할아버지와 다정(?)하게 1박을 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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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


1. 산티아고-피스테라 구간은 약 90km 정도다. 본문에도 나와 있듯이 이 구간은 바르나 알베르게 같은 편의시설이 메인 루트에 비해 현저히 부족하다. 심지어 3시간 만에 겨우 바르를 하나 만난 적도 있었다. 그러니 하루 이동거리를 적절히 계산하여 움직여야 할 것이다.

2. 바르가 부족하다보니 한두 끼 정도의 식량은 항상 몸에 휴대하고 다니는 것이 좋다. 필자는 이 구간에서는 거의 3인분 정도 되는 식량을 계속 지니고 다녔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고? 

 

[22일간의 스페인 여행기 ②] 산티아고 순례길과 성인 야고보 2부

 

 

 

 

 

 

---> 전편에 이어서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

 

 
▲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이 스페인 가족은 포르투갈과 인접한 지역인 비고(Vigo)에서 왔는데 순례길을 걷는 내내 자주 마주치게 됐다. 동선을 함께한 것이다. 야고보 성인을 캐릭터화한 음수대에서 물을 마시고 있을 때 촬영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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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물음대로라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그 수많은 순례자들은 '사기'를 당한 셈이 된다. 있지도 않은 야고보 무덤을 보기 위해 무려 800km에 달하는 길을 걷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을 자신의 버킷리스트로 넣는 사람들은 어떤가? 미래에 행할 '바보들의 행진'을 준비하기 위해, 현재의 소중한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는 멍청이들인가?

시간이 지날수록 필자의 의문은 더욱 짙어졌다. 그러다 책 <새 유럽의 역사>159쪽에 기술된 부분을 읽게 됐다.



사도 성 요한의 형제이자 에스파냐의 수호 성인인 야곱(기자 주. 야고보)이 에스파냐에서 복음을 전도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 프레데리크 들루슈 편, 윤승준 역, <새 유럽의 역사>(까치)


이 서술에 의하면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없을 확률이 농후해진다. 이외에도 서양의 중세사를 다룬 유명한 저서, <서양중세사>에도 야고보와 스페인에 대한 관계를 그저 '전설' 수준으로 서술했다.

애초 야고보가 에스파냐에 복음을 전달했을 가능성이 없었다면, 그의 유언도 성립될 수 없다. 가보지도 않은 땅에 자신의 주검을 묻어달라고 간청할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사기를 당한 것일까? 존재하지도 않은 야고보의 행적을 좇아,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짓을 한 것인가?

 

 

 

 


국토 회복 운동에 구심점이 되어 준 야고보

 

 
▲ 무어인을 무찌르는 야고보 17세기 작품이다.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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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됐다는 9세기 초,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은 이슬람 세력이 차지하고 있었다. 611년,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이래, 무슬림들은 포교를 위한 전쟁을 수행해나갔다. 북아프리카 일대를 점령한 그들은 711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까지 물밀 듯 쳐들어갔다.

당시 이베리아반도에 있던 서고트 왕국은 이들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713년에 멸망한다. 이후 서고트 왕국의 옛 귀족들은 이베리아 반도 북서쪽 산악 지대로 도주했다가, 718년에 아스투리아스(Asturias) 왕국을 창건하게 된다.

스페인은 유럽 주요국 중 유일하게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나라였다. 그도 그럴 것이 1차 십자군 전쟁(1096년 발발)이 일어났을 때도 국토의 절반 이상이 이슬람 세력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자국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이다.

 

 

 

 

* 12세기 경의 스페인: 북부 지방을 제외하면, 이베리아반도 전체가

코르도바 왕국의 영역이다. 코르도바 왕국은 이슬람 무어인들이 세운 나라다.

 

 

 

 

 


이런 국토 회복 운동을 레콘키스타(reconquista)라고 부른다. 국토 회복 운동은 이슬람 세력이 침공했던 711년부터 1492년까지, 무려 800년이나 지속됐는데 그런 국토 회복 운동의 중심에 야고보가 서게 된다. 국토 회복이라는 엄청난 과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큰 구심점이 필요했는데 스페인 사람들은 그 역할을 야고보에게 맡긴 것이다. 열두 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했던 야고보였기에 그런 큰 역할을 부여했을 것이다.

그와 관련해 전설이 하나있다. 844년의 클라비호 전투에서 백마를 탄 야고보가 나타나 이슬람 무어인들을 무찔렀다는 것이다. 이후 야고보는 '무어인을 죽이는 산티아고(Santiago Matamoros)'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렇듯 야고보는 스페인 사람들을 정신적, 종교적으로 하나로 묶어 이슬람 세력에 대한 항전 의지를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다.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야고보는 큰 구심점이 돼주었던 것이다.

 

 

 

 

의심도 순례자들의 덕목일지 모른다

 

 
▲ 산티아고 대성당 산티아고 대성당에 선 필자. 대성당은 당시 공사중이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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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대성당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있냐, 없냐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내려줄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 같다. 한편 고생 고생하며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도 필자와 같은 의문을 한 번쯤 다 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우리 순례길 팀에도 '어떻게 그 당시 항해 기술로 예루살렘 땅에서 스페인까지 원거리 항해가 가능하겠냐'고 말씀한 분도 계셨다.

필자는 그런 의심(?)들도 순례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 중 하나로 판단했다. 덮어놓고 무조건 '믿어라, 믿어라'하면 맹목적인 신앙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짜 순례자들이라면 몸은 고달프더라도 정신적으로는 '예수천국 불신지옥' 같은 그릇된 배타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이 돼야 할 것이다.

성경에는 '의심하지 말라'라고 적혀 있지만, 그 의심이 합리적이라면 계속해서 되새겨야 할 것이다. '왜'라는 물음 없이 교조적으로 종교를 받아들인다면 그건 종교가 아니라 세뇌일 뿐이다. 그 세뇌가 통한다면 그로 인해, 누군가가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기사를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산티아고에 야고보가 묻힌 것이 맞냐'라는 필자의 의구심은 해소가 됐는가? 그걸 궁금하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필자의 결론은 이렇다.

 

 



물음표는 그저 물음표로 남겨 두겠습니다. 어쩌면 느낌표가 대신 답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관촉사 은진미륵에서 선한 감흥을 받았을 때도, 56억 7천만 년 후에 부처님이 도래한다는 미륵불 신앙을 기계적으로 믿어서 얻은 불심이 아니었거든요. 산티아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곳에 야고보가 묻혀 있든 아니든 저는 대성당에서 성소를 체험했기에 그 감흥을 느낌표로 간직하고 싶네요!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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