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떨치고 싶었다. 말이 좋아 역사트레킹 마스터지 필자의 삶은 백수의 고급버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프리랜서, 그것이 딱 필자의 자화상이었다. 그렇게 이도저도 아닌 삶을 살고 있다 보니 엉뚱하게도 이름 떨치기에 대한 욕구가 커져갔다.


변변치 않은 벌이와는 별개로 트레킹 바닥은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시즌과 비시즌이 확 갈린다는 것이다. 봄과 가을에는 신발밑창이 닳도록 열심히 움직이지만 여름과 겨울에는 멍하니 하늘을 보는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노을트레킹을 겨울에는 눈꽃트레킹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도 딱 거기까지다. 더군다나 필자가 추구하는 트레킹은 대중트레킹이다. 어두운 밤에 멧돼지를 만나거나 동장군에 맞서면서까지 트레킹을 하기가 쉽지 않다. 수강생들도 안 온다.


만약 필자의 이름값이 꽤 나간다면 비시즌에도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지는 않을 것이다. 열심히 원고 작성을 하거나 마이크를 잡고 실내 강의를 하고 있겠지. 하지만 현실은 동장군이 얼어 죽을 정도로 냉혹하다. 필자의 통장은 비시즌이 되면 싸늘함 그 자체가 된다.


불혹이 넘은 나이에도 불안정한 삶을 살고 있다 보니 이름에 대한 집착을 갖게 된 거 같다. 네임밸류가 있었으면 적어도 현재와 같은 불안한 삶을 살지는 않았을 텐데. 호랑이가 가죽을 남기듯 내 이름 석 자를 남길 수 있을까?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아무 의미 없이 그냥 살다가 가는 건가?


허명(虛名)이라도 갖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답답한 현실에 대한 유일한 탈출구이자 판타지였다






* 인왕산: 서울의 우백호 인왕산. 낙산공원에서 촬영했다. 





낙산은 서울의 좌청룡

 

1편 인왕산 역사트레킹에서 언급했던 내용을 다시 복기해본다. 좌청룡·우백호에 대한 이야기이다.


서울에도 좌청룡과 우백호가 있다. 조선의 도읍지였던 한양이 풍수지리에 의거해 기획된 도시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동쪽-청룡’, ‘서쪽-백호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남쪽-주작’, ‘북쪽-현무도 빼놓을 수 없다.


일단 우백호는 어디일까? 인왕산이다. 경복궁 옆쪽에 우뚝 서 있는 인왕산이 서울의 우백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럼 좌청룡은 어디일까? 낙산이다. 혜화동 뒤편에 나지막하게 서 있는 낙산이 바로 서울의 좌청룡인 것이다. 이화동 벽화마을, 낙산공원을 품고 있는 산이 바로 그 낙산이다.


낙산(駱駝)은 높이가 약 125미터로 키가 작은데 산의 형세가 낙타 등처럼 보인다하여 낙산 또는 낙타산이라고 불린다. 낙산은 인왕산과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낙산은 좌청룡이기에 우백호인 인왕산과는 필연적으로 용호상박을 해야 하는 팔자다. 청룡과 백호의 피할 수 없는 한 판 승부! 당신은 어디에다 베팅을 할 것인가?

 

- 세상을 뒤흔들 세기의 맞대결! 메가톤급 강펀치가 천지를 진동한다. 세상의 모든 이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청룡과 백호의 물러설 수 없는 한 판! 그 세기의 대결에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절대 놓치지 마십시오. 마감 임박~!

 

하지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는 법이다. 저렇게 프로모션을 띄운다고 해도 결과

는 뻔하다. 세기의 대결치고 진짜 세기의 대결이 펼쳐진 거 본 적 있는가?  






* 낙산성곽길





우백호의 위세에 눌린 좌청룡

 

결론적으로 말해 서울의 청룡은 백호에게 게임이 안 된다. 체급부터가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낙산은 해발고도가 125미터로 338미터인 인왕산에 비해 키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낙산(), 인왕산(), 남산(), 북악산()을 묶어 내사산으로 칭하는데 그 내사산 중에서 낙산이 가장 작다. 참고로 북악산은 342미터이고, 남산은 270미터이다.


해발고도가 낮으니 낙산은 산세도 그리 웅장하지 못하다. 이에 비해 인왕산은 민낯을 드러낸 것처럼 돌출된 암반면이 소나무들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300미터급 산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을 뽐내고 있다.


그렇게 우백호보다 기량이 딸리는 좌청룡이었기에 그것을 보완해야 했다. 동쪽에 있는 좌청룡은 남자, 장자를 뜻했다. 이에 비해 서쪽에 있는 우백호는 여자, 차자 등을 뜻했다. 적장자 중심의 왕위계승을 중시했던 조선이었기에 좌청룡에 대한 보완은 분명히 필요했던 것이다


이에 무학대사는 인왕산 아래에 궁궐을 짓자고 역설한다. 그리고는 궁궐의 방향을 동쪽인 낙산으로 향하게 하자는 주장을 펼친다. 이것이 인왕산 주산론이다. 하지만 당시의 실권자였던 정도전 세력들은 인왕산 주산론을 반대한다


궁궐의 방향을 서쪽으로 둘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정도전을 위시한 유교세력들의 주장이 힘을 얻었고 법궁이었던 경복궁이 북악산 아래에 들어서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북악산 주산론이다






* 성북동: 성북동 성곽길은 낙산이 아닌 백악산(북악산)에 속한다. 낙산 역사트레킹

은 낙산을 다 걸은 후 성북동에서 종료한다. 



   


200년 후를 내다본 무학대사?

 

이렇게 자신의 주장이 꺾인 무학대사는 이런 말을 남기며 탄식했다고 한다.

 

“200년 뒤 경복궁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너희들이 알겠느냐!”

 

여기서 다시 한 번 1, 인왕산 역사트레킹에서 언급한 내용을 재론해보겠다. 1

에서는 기도빨이 잘 받는 인왕산 선바위가 정도전을 위시한 유교 세력에 의해 

도성 밖으로 밀려났다는 것을 기술했었다. 그리고 이번 편에서는 인왕산 주산론

이 탈락되고, 북악산 주산론이 채택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렇듯 무학대사를 

위시한 불교세력들은 유교세력들에 의해 번번이 자신의 의사가 꺾이고 만다. 불교

세력들은 탄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말 무학대사가 200년 후를 내다보며 저런 이야기를 했을까? 무학대사가 

노스트라다무스도 아닌데... 불교세력이 밀려난 후, 200년 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를 했을 때가 1394년이었으니, 200년 후는 

1590년대였다. 그 즈음에 누구나 다 아는 전쟁이 일어났다. 그렇다. 임진왜란이라 

불리는 조일전쟁이 1592년에 벌어진 것이다.


정말 무학대사는 200년 후를 내다보며 저런 예언을 했던 것일까? 1편에서도 언급했

듯이 불교 VS 유교간의 갈등은 공식적인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무학대

사의 예언은 개국 초기가 아닌 조일전쟁 이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당시의

민초들은 지배층이었던 사대부들에게 전란의 책임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


도성을 버리고, 백성도 버린 지배층에 대해서 힐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책임을 묻는 자리에 무학대사를 등판시킨 것이다. 자신들의 울분과 설움을 무학대사

에게 투영하여 당시 지배층인 사대부들을 꾸짖고 있었던 것이다





* 이화동 벽화마을






동인의 핵심 김효원이 살았던 낙산

 

낙산은 야트막한 산세 때문에 산책로로 많이 이용되었다. 또한 숲길이 우거져 있어 낙산 인근에는 별장들이 많았다. 인조의 셋째 아들이었던 인평대군이 지은 석양루(夕陽樓)를 비롯하여 18세기에 활약했던 문인 이심원이 지은 일옹정(一翁亭) 등 많은 별채들이 있었다.


명사들도 많이 살았다. 태종의 외손이었던 남이 장군, 우암 송시열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 동서분당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던 김효원도 낙산 기슭에서 살았다. 김효원의 집이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동인이라고 불렀다. 이에 비해 서인의 거두 심의겸의 집은 지금의 덕수궁 근처라 한양의 서쪽에 있었다. 그래서 심의겸을 따르는 이들을 서인이라고 불렀다.


일설에 의하면 단종비 정순왕후(定順王后)도 낙산에 은거해 살았다고 한다. 단종이 강원도 영월 땅으로 유배를 떠나고 난 후, 폐서인이 된 정순왕후는 이 산 아래에 있는 청룡사의 승려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임을 떠나보냈던 정순왕후는 이 산 동쪽에 있는 동망봉에 올라 매일같이 치성을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렇듯 낙산은 누군가에게는 한이 서린 기원의 장소이기도 했다






* 혜화문: 원래는 사진 아래에 있는 도로에 위치해 있었다. 1928년 도로 확장에 

따라 문이 헐리게 됐다. 이후 1994년에 현재의 위치로 복원된다.  







낙산 성곽길에서 성돌 모양 맞추기

 

이렇게 낙산에 대한 연혁들을 나열해봤다. 하지만 낙산 역사트레킹의 백미는 역시 성곽길을 걷는 것이다. 낙산 성곽길에서는 축성 시기에 따른 다양한 성돌 모양을 직접 관찰할 수가 있다. 한양도성은 축성 시기에 따라 크게 4시기로 나눌 수가 있다.

 

1. 태조시기. 이때는 토성(土城)과 석성(石城)이 혼합된 형태로 축성됐음.

2. 세종시기.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함.

3. 숙종시기. 종전보다 더 큰 성돌로 축성함.

4. 순조이후시기. 더 큰 성돌로 축성함.

 

낙산 성곽길에서는 세종시기부터 순조 이후까지, 즉 조선 전기부터 후기까지 성돌의 변천사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성돌의 변화상을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그런데 처음 봐서는 잘 구분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필자도 그랬다. 주변머리가 없어서 그랬는지 성돌 구분이 처음부터 확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는 나름대로의 구별법을 써봤다.

 

1. 세종시기 -> 옥수수돌

2. 숙종시기 -> 두붓돌

3. 순조이후시기 -> 주사위돌

 

*정리: 시간이 흐를수록 성돌은 점점 더 커져갔고, 규격화됐다. 후기로 갈수록 치석(治石)의 강도가 세지고, 돌의 크기도 더 커지는데 순조 시기에는 큰 주사위돌 같은 형태가 나타난다. 여기서의 치석은 치과에서 말하는 치석이 아니라 돌을 다듬는 것을 말한다. 태조 시기의 돌들은 자연석을 옮겨놓는 수준이라 표면이 매우 거칠었다. 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치석이 강화되니 표면이 매끈한 성돌이 성체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 성돌의 시기별 모양





낙산 정상에 올라서면 속이 다 시원해진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낙산은 서울의 안쪽을 감싸고 있는 내사산 중에 가장 키가 작다. 그래서인지 한양도성 낙산 구간은 인왕산이나 북악산 구간보다 훨씬 더 걷기 편하다. 인왕산이나 북악산 구간에는 급경사 구간이 있지만 이에 비해 낙산 구간은 시종일관 완만한 경사를 유지하고 있다. 선조들에게는 왜소한 좌청룡이라고 놀림을 받았지만 역설적으로 성곽길을 탐방하는 여행객들에게는 찬사를 받는 것이다.


또한 접근성도 상당히 좋다. 전철역에서 바로 성곽길 트레킹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에서 하차한 후 흥인지문(동대문)을 둘러본 후 성곽길을 따라 트레킹을 할 수 있는 것이 낙산트레킹의 큰 장점 중에 하나다.


그렇게 성곽길을 타고 올라가다보면 이화동 벽화마을도 만날 수 있다. 벽화마을을 탐방한 후 언덕길을 올라가면 낙산 정상부인 낙산공원에 다다르게 된다. 이 곳에 올라서면 속이 다 시원해질 정도로 멋진 풍광을 만날 수 있다


눈앞에 북한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기 때문이다. 백운대·인수봉·만경대 등의 동북쪽 봉우리들뿐만 아니라 보현봉이나 형제봉 같은 남쪽의 봉우리들까지도 한 눈에 다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 장면을 보면서 필자는 항상 이런 멘트를 했었다.

 

저 북한산 좀 보세요. 위쪽으로는 살짝 도봉산까지 보이죠? 북한산을 한 눈에 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서 바라보려면 이 낙산만큼 좋은 곳도 없습니다. 낙산이 키가 작아도 이렇게 참 실하지 않습니까?”

 

성곽길 낙산 구간이 끝날 무렵에는 동소문이라고 불리는 혜화문을 만나게 된다. 혜화문은 일제에 의해 철거됐다, 199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져 복원됐다. 낙산 역사트레킹은 북악산 성곽길도 걷는다. 그렇게 성북동 인근 북악산 구간을 걷다 와룡공원을 지나게 된다. 이후 트레킹은 만해 한용운 선생의 생가인 심우장에서 종료하게 된다






* 북한산: 낙산공원에서 바라본 북한산.




 작자미상

 

서울은 인구 천 만 명이 사는 메트로폴리탄이다. 그런 거대 도시에 축조된 지 600년도 더 넘는 거대한 성곽이 잘 버티고 서 있다는 게 참 대견스럽다. 서울의 내사산을 따라서 만들어진 한양도성. 마치 순리를 따르듯 자연지형에 녹아든 한양도성의 모습이 서울 메트로폴리탄을 더 돋보이게 한다.


그런 한양도성을 보면서 꼭 잊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 있다. 무엇을? 이름 모를 백성들의 피와 땀이다. 역군으로 징발된 그들에게 성곽축조는 중노동 중에 상중노동이었다. 그 추운 계절에 동원된 그들에게 나라에서는 아무런 반대급부도 지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먹을 식량까지 각자 알아서 준비해야 했다. 농한기라도 힘없는 백성들은 느긋하게 쉴 수가 없었다.


죽기는 또 얼마나 많이 죽었겠는가. 그렇게 이름 모를 민초들이 피와 눈물을 흘려가며 한땀한땀 성돌을 올린 것이 지금의 한양도성이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 석 자는 어디에도 기재되지 않았다. 공사를 지휘하던 관리들은 그나마 각자성석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지만 민초들의 이름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팔이 빠져라 성돌을 나르고 쌓았던 수많은 김개똥, 최돌쇠 등등... 부르튼 그들의 손을 누가 제대로 기억이라도 해줬을까?

 

이렇게 좀 씁쓸한 생각이 이어졌다. 결말을 지어야하는데 좀 우울한 면을 너무 부각한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생각해봤다. 아무래도 결말은 해피엔딩으로 하는게 낫지 않나.


이름 모를 민초들은 성곽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에 성곽이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연과 어우러진 한양도성이라는 예술작품을 그들이 공동으로 제작한 것이다. 김개똥도 최돌쇠도 공동으로 제작한 것이다. 대신 문서상으로는 그들의 이름이 기재되지 않았다. 작자미상이다. 물론 발주처는 명확하다. 조선 조정.


글을 마무리하려고 할 때 이런 생각이 밀려왔다.

 

굳이 이름을 남겨야 돼?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작자미상이 있는데... 그냥 

민폐 안 끼치고 좋아하는 역사트레킹하면서 사는 것도 복 받은 일이잖아!’   







* 이름남기기: 순종 이후 시기에 쌓여진 성돌에 필자의 방식대로 민초들의 이름을 

남겨보았다. 하는 김에 필자도 이름도 슬쩍 끼어넣었다. 얄밉게 숟가락을 올리는 형식

이라 뒤가 캥기지만... 이런 식으로 필자의 이름을 남겨본다. 혼자 북치고 장구친다고

욕을 먹더라도 상관없다. 소원성취를 한 것이다. 이름을 남겼으니까...








 낙산 역사트레킹  

   

1. 코스: 흥인지문 ▶ 이화동벽화마을 ▶ 낙산공원 ▶ 혜화문 ▶ 와룡공원 

2. 이동거리: 약 7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하

5. In: 지하철1,4호선 동대문역 / Out: 와룡공원(성북동)






* 낙산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 낙산 역사트레킹갑니다. 관심 있는 분들 클릭요! ^^;




●  낙산 역사트레킹


좌청룡우백호라는 말 아시죠서울에도 좌청룡우백호가 있답니다우백호는 인왕산이고좌청룡은 낙산을 말합니다조선이 건국되고 한양으로 천도를 했을 때 도성방어를 위해서 성을 쌓기 시작합니다그것이 바로 한양도성입니다내사산(낙산인왕산남산북악산)을 연결하여 만든 한양도성은 이제 서울의 명물이 됐습니다.


그렇게 한양도성의 동쪽 축선은 낙산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키가 작은 낙산은 낙타산이라고 불리는데 혜화동의 뒤편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형상입니다낙산 성곽길 바로 아래에는 벽화로 유명한 이화동 벽화마을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낙산 공원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정말 일품입니다서울시내는 물론 북한산까지 한 눈에 다 들어올 정도로 시원스러운 풍광을 자랑하니까요. ‘북한산을 제대로 관찰하기 위해서는 낙산에 올라야 한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낙산의 또다른 자랑은 성곽길입니다낙산 구간은 걷기 좋은 성곽길로 꼽힐 정도로 순성로가 잘 정비가 되었답니다그 순성로를 따라 걷다보면 시대의 흐름에 따른 성곽의 변천사를 관찰할 수 있답니다성곽의 나이테를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낙산 성곽길 구간인 것입니다.  



http://cafe.naver.com/trekkingmaster/108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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