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양도성: 남산구간.







이전 포스팅에서 체성 구간의 돌과 문루 구간의 돌이 다르다는 것을 살펴봤습니다. 똑같이 돌이라는 재료를 쌓아 올렸지만 문루 구간에 있는 돌들이 훨씬 더 격이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그런데 문루 구간은 체성 구간과 또다른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


일단 한양도성이 어떻게 축조됐는지, 어떤 식으로 토목공사가 행하여 졌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한양도성은 편축법이라는 방식으로 축조됐답니다. 편축법은 한쪽 면만 쌓는 방식인데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 지형에 합치되는 축조 방식입니다. 


밖에서 성곽을 보십시오. 5~6미터 이상 되는 성벽이 우뚝 서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성 안에서의 눈높이는 여장 정도 잖아요. 이것이 바로 편축법 방식입니다. 한마디로 한쪽만 쌓았다는 겁니다. 


편축법으로 성벽을 쌓는다면 일단 산을 깎아내야 합니다. 이를 삭토법이라고 합니다. 뭐 당연한 이야기겠지요. 적당하게 산을 깎아 성돌을 올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할 테니까요. 


삭토법을 할 때는 맨 아래부분(시작점)과 맨 윗부분(종료점)의 위치는 달라집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뒤로 비스듬이 깎아낸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당연한 이야기겠지요. 시작점과 종료점이 수직으로 일치한다면 그 성벽은 드립다 무너질 겁니다. 그럼 공사 책임자는 유배가고...ㅋㅋㅋ


그렇게 비스듬이 삭토하고, 또 비스듬이 성돌을 올리다보니 맨 아래와 맨 윗 부분의 각도 차이가 생긴답니다. 구간에 따라 다르지만 약 15도 정도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편축법은 한쪽만 쌓으니 그만큼 공력이 덜 듭니다. 물자와 인력을 아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내사산을 둘러쌓은 한양도성은 편축법의 전형을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산과 어우러졌기에 한양도성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편축법 말고 협축법이라는 방식이 있는데 고거이는 다음편에... ㅋ







* 여장: 한양도성 안쪽에서 바라보면 여장이 우리의 시야를 꽉 채운다. 여장의 위치가 우리가 보는 위치다. 여장 앞쪽의 평평한 공간을 내탁부라고 한다. 이 공간에서 전투와 경계가 이루어진다. 









* 성벽: 밖의 순성로에 보는 성은 우뚝 선 성벽이다. 






* 서울성곽: 여장 옆 내탁부를 걷고 있는 참가자.









* 숭례문: 도미노 블럭을 옆으로 쌓은 듯 하다. 필자는 저 돌을 지우개처럼 생겼다 하여 지우개 돌이라고 불렀다. 벽돌을 쌓아 올린 면장은 여장보다는 높이가 낮아 성 밖을 보기에 용이하다. 2008년에 방화에 의해 불탄 숭례문은 2013년에 복원되어 시민의 품으로돌아왔다.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을 행하다보면, 흔히 성곽길을 따라 걷다 대문 혹은 소문으로 쏙 들어가게 됩니다. 예를 들어 낙산 역사트레킹을 한다고 가정해 보죠. 트레킹팀은 낙산 성곽길을 유유자적 하게 걷다 동소문이라고 불리는 혜화문을 만나게 됩니다. 그 길로 쏙 들어가는 겁니다.


그렇게 성곽길을 걸을 때 한 번 자세히 관찰해 보세요. 성체라 불리는 체성 구간과 문 구간의 차이점을. 체성 구간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보는 성곽 구간입니다. 우리는 그 옆에 난 순성로를 따라 성곽과 나란히 걷는 것이죠. 


문 구간은 앞서 언급한 혜화문이나 사진에 등장한 숭례문(남대문), 창의문을 말합니다. 

첫번째 숭례문 사진을 보십시오. 같은 돌로 쌓여져 있는 듯하지만 체성 구간의 돌 하고는 차이점이 있지요? 잘 보세요. 여러분들의 센스를 믿어요...ㅋ


숭례문과 창의문에 쌓여진 돌들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장대석들입니다. 얼핏보면 블럭들을 차곡차곡 쌓아둔 것처럼 보일 겁니다. 이 부분을 육축이라고 합니다. 그 육축 위에 벽돌로 올려진 부분은 면장이라고 불리지요. 체성 구간의 여장이 문 구간에서는 면장이 됐다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면장은 여장보다는 키가 낮아서 안에서 밖을 관망할 수 있다는 점이 있지요. 아무래도 문루에서는 장수들이 지휘를 하다보니 밖이 보여야 하잖아요. 여장처럼 키가 크다면 밖이 안 보일테고, 그러다보면 적군이 왔는지 산타클로스가 왔는지 모를테니까요...ㅋ


하지만 체성 구간의 돌들은 육축 구간의 돌들처럼 잘 다듬어지지 않았습니다. 또 시기마다 다르잖아요. 태조 시기의 돌, 세종시기의 돌, 숙종시기의 돌, 영정조 이후 시기의 돌. 


그렇게 보면 문 구간에 있는 육축은 그냥 시기구분이 없어서 참 좋네요. 구분할 필요가 없어서 머리가 아프지 않아...ㅋ  


한양도성과 관련된 자료를 정리하다가 생각이 나서 올려봤습니다. 다음에 또 관련 이야기를 올려볼게요!









* 체성: 한양도성 인왕산 구간










* 창의문: 홍예문이 잘 드러나 있다. 면장이 여장보다 확실히 낮아 보인다. 










* 체성: 문 구간의 육축과는 돌이 다르다. 














* 각자석: 한양도성은 공사실명제를 도입했다. 각 구간마다 책임자들의 이름을 돌에 새겨 넣었다. 2015년에 복원된 흥인지문 북쪽 구간에 새겨진 각자들. 당시에 새겨진 글자를 본떠서 새로운 돌에 새긴 듯하다.

          









알고보면 더 재밌는 길, 서울성곽길


성돌에 맺힌 백성들의 피와 땀을 기억하며




17.04.10 11:12   최종 업데이트 17.04.10 11:12





             





    

        

      ▲ 서울성곽 인왕산 구간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서 두고 걸으면 두 발이 아프다!"
 
한양도성, 즉 서울성곽을 두고 기자가 역사트레킹에 참가한 분들에게 했던 말이다. 찰리 채플린의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유명한 명언을 빗대서 저런 말을 했던 것이다.

기자가 언급한 것처럼 서울성곽길은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니다. 서울성곽은 네 개의 산(낙산-인왕산-남산-북악산)을 연결해서 만든 방어용 시설이다. 지금처럼 성곽길 트레킹을 하라고 만든 관광 자원이 아니라는 뜻이다. 애초 목적이 방어용 시설이었기에 경사도가 급할 수밖에 없었다. 수비목적의 산성으로 축성됐기에 경사도가 급하면 급할수록 방어력은 더 높아졌던 것이다. 물론 구간에 따라서는 아주 완만한 길도 있다.

어쨌든 산을 연결해서 만든 성곽이기에 한양도성을 걸을 때는 그에 걸맞은 준비가 필요하다. 걷기 편한 신발을 신고, 옆으로 메는 가방이 아닌 아웃도어 배낭을 준비하고, 생수와 행동식도 넉넉히 준비하고... 그렇게 세심하게 준비를 한 후 떠나야 더 알차게 서울성곽 트레킹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외부적인 준비뿐만 아니라 지식적인 준비도 해보자. 알고 떠나면 더 재밌는 성곽길 투어가 될 테니까.  




 ▲ 서울성곽 북악산 구간.   

       




전쟁이 난 것도 아닌데 500명 이상이 죽었다

조선을 개국하고 한양으로 천도한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도성을 쌓으라고 명한다. 그래서 1396년(태조5) 1월 9일부터 2월 28일까지 한양도성이 축성된다. 서울의 네 개의 산을 연결하여 만든 성곽은 그 길이가 무려 18.6km에 달했다. 49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18km가 넘는 성곽을 쌓았던 것이다.

그렇게 빨리 도성 축조가 가능했던 이유는 많은 백성들을 공사에 투입했기 때문이다. 약 11만 명이 넘는 인원이 현장에서 땀방울을 쏟아냈으니 50일도 안 되는 시기에 그렇게 엄청난 결과물을 도출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한양 인구를 10만 명 남짓으로 추정하고 있으니 징발된 인원수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태조시기에 쌓은 성은 7할 이상이 토성(土城) 구간이었다. 돌이 아닌 흙으로 축성했으니 빠르게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토성은 석성(石城)보다는 견고함이 떨어진다. 성체의 형상도 반듯하지 않고, 비바람에도 취약할 수밖에 없다. 또한, 여장 같은 방어력을 증대시키는 시설을 설치하기도 어렵다.





* 탕춘대성: 탕춘대성의 성돌. 돌의 앞면부와 뒷면부가 다르다. 모양이 마치 사람 이빨처럼 생겼다. 뒷면부에는 잡석과 흙을 채워 성돌을 고정시킨다. 탕춘대성은 숙종 때 쌓은 성으로 북한산성과 도성을 연결하는 익성이었다.






* 탕춘대성: 탕춘대성은 숙종 때 쌓은 성이다. 사진 아래부분에 다듬어진 성돌을 보라. 숙종시기에 쌓은 성돌과 비슷하다.  







이런 단점들은 축성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문제시되었고, 도성을 수축하자는 의견들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대규모의 수축은 20여 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나 이루어졌다. 1422년(세종4) 1월 16일, 태조 시기보다 훨씬 더 많은, 무려 32만 명의 인원이 동원된 대대적인 도성 수축 작업이 이루어진다. 이 작업을 이끈 최종결정권자는 당시 태상왕으로 있던 태종 이방원이었다.
 
"엄청나게 많은 백성들이 징발된 만큼 그때 수많은 인명들이 다치고 죽었습니다. 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공사 중에 목숨을 잃었다고 하네요. 전쟁 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많은 인원들이 목숨을 잃은 것이죠."
 
필자가 이런 설명을 하면 트레킹 참가자들은 십중팔구 무척 놀랬다.
 
"한편 공사에 동원된 백성들은 자기 먹을거리를 자기가 준비해야 했습니다. 험한 공사에 징발된 것도 못마땅할 판에 자기가 식량까지 가져가야 했으니 아주 죽을 맛이었을 겁니다."
 
이런 설명을 하면 십중팔구 혀를 차며 어이없어했다.






        

▲ 성벽돌 정조 이후 양식이다. 성체의 위쪽 부분이 여장이다. 여장 하나를 '타'라고 부른다. 한 타에는 총 3개의 구멍이 뚫렸는데 가운데는 근총안, 양 옆에는 원총안이 뚫려 있다. 근총안에서는 가까운 적을 향해, 원총안에서는 멀리 있는 적을 향해 화포를 발사한다.







'사극왕' 숙종의 다른 모습

서울성곽의 대대적인 보수는 숙종 시기에 다시 이루어진다. 도성을 다시 쌓자는 의견은 숙종 즉위 초부터 개진되었지만 실제로 실행에 옮겨진 것은 무려 30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렇게 숙종 30년(1704년)에 시작된 한양도성 다시 쌓기는 1710년까지 이어진다.

숙종은 그다음 해인 1711년, 북한산성을 축조하게 한다. 북한산성은 6개월 만에 만들어졌다. 길이가 약 8km에 달하는 산성을 반년 만에 쌓게 한 것이다. 이렇게 '초스피드'로 북한산성을 쌓게 한 건 청나라의 눈길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조선은 병자호란 강화조약에 의해 성을 새로 쌓지도, 기존의 성을 보수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한양도성의 수축에 대한 논의가 30년 동안이나 지루하게 진행된 이유 중의 하나도 청나라의 감시 눈초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TV 속의 숙종은 항상 인현왕후, 장희빈과 함께 등장한다. 숙종 시기는 사극계의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존재다. 한마디로 그는 '사극왕'이다. 그렇듯 우리는 이제까지 너무 사극 프레임으로만 숙종을 바라보지 않았나? 한양도성의 대대적인 보수, 북한산성 축성, 이에 더해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의 축성 등 숙종 시기에는 국방력이 크게 신장된다. 자신의 여인들을 들었다 놨다 하며, 치명적인(?) 삼각관계를 만들었던 숙종이었지만 이렇듯 국방력 강화에도 힘을 썼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타 속의 고양이 '타'는 여장 하나의 단위를 말한다. 또한 여장과 여장 사이의 공간을 뜻하기도 한다. 타에서는 주로 활로 공격을 했다. 사진속 고양이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활을 쏘았다는 것이다.








후기로 갈수록 돌이 커졌고, 더 잘 다듬었다 

"여기 돌은 세종시기에 쌓았어요. 옥수수처럼 생겼죠? 아니 메주처럼 생겼나요?"
 
세종 때 쌓은 돌들을 보면 생긴 것은 옥수수처럼 생겼고, 크기는 메주 정도만 하다.
 
"여기 숙종 때 쌓은 돌들은 조선 전기 때보다 더 크죠. 전체적으로 더 매끈하게 떨어지고요."
 
숙종 시기에 쌓은 성돌은 세종 때에 쌓은 성돌보다 모양도 더 크고, 다듬기도 더 많이 다듬었다.
 
"이 큰 성돌들은 정조 이후에 쌓은 돌들입니다. 숙종 시기보다도 더 크죠?"
"이 돌들은 확실히 크네요. 이거는 딱 봐도 알겠네."



        

▲ 성돌 사진에서 오른쪽이 정조 이후의 양식이다. 사진 왼쪽 하단부 검은색을 띈 돌들은 세종 시기의 양식이다. 왼쪽 상단부와 오른쪽 여장은 근래에 다시 쌓은 것으로 보인다.








정조 이후에 쌓은 돌들은 숙종 때보다도 훨씬 크고, 치석(治石)도 훨씬 더 세밀하다. 성돌과 성돌의 이가 잘 맞물려 빈틈이 작다. 빈틈이 작다는 것은 그만큼 빗물이 침투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여기서의 치석은 한자어 그대로 '돌을 간다'는 말이다.
 
"맞습니다. 저 성돌은 확실히 눈에 띄죠. 크니까."
"적어도 정조 이후 성돌들은 잊어버리지 않겠네요."
"저렇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성돌이 커진 건 방어력을 높이려고 그랬던 거죠. 화포에 대한 방어력을 높이려고요. 병자호란 때 청나라군이 홍이포라는 대포로 남한산성을 공격했는데 그걸 교훈 삼아 성돌들을 더 크게 만든 것이죠."

 
이렇게 정리가 된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성돌의 크기가 커지고, 치석의 강도도 세진다. 왜? 당시 세계는 대포로 성벽을 부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포 공격을 이겨내려면 성돌을 대형화시켜야 했고, 대형화된 성돌을 이가 잘 맞물리게 쌓으려면 치석을 잘해야 했다.
 
"두 가지를 알면 훨씬 더 재밌게 성곽길 탐방을 할 수 있어요. 후기로 갈수록 돌이 커진다. 돌을 다듬는 정밀도도 높아진다. 이 두 가지요."


성돌을 시기별로 구분할 줄 모른다고 해도 성곽길을 걷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기왕 하는 성곽 순성길이라면 좀 알고 가면 좋지 않을까? 아는 만큼 보인다고 서울성곽도 아는 만큼 더 재밌게 즐길 수 있을 테니까.

서울성곽의 역사는 조선왕조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역사 속에는 일반 백성들의 땀방울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성돌 하나하나에 박혀 있는 백성들의 피와 눈물! 그런 피눈물이 있었기에 지금의 순성놀이가 가능한 것이다. 그런 성벽을 쌓았던 이들의 노고를 잊지 않으며 성곽길을 걷는 것도 우리의 몫이 아닐까 한다.




 * 훼손부분: 서울성곽의 훼손부분. 한 빌라의 축대로 사용되고 있다. 한양도성 북악산 구간 중에서.











덧붙임

지난 3월 21일, 한양도성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무산됐다는 보도가 전해졌다. 유네스코 자문기관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아래 이코모스)는 한양도성을 대상으로 패널심사를 진행했는데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등재 불가' 판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에 문화재청은 부득이하게 철회하며, 2020년 등재로 목표 수정을 했다고 밝혔다.

이코모스의 결정에 동의하기가 어렵다. 한양도성에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없다는 판단이 납득이 안 된다. 한양도성은 자연지형을 거스르지 않고, 방어력을 극대화시킨 성으로 평지에 축성된 다른 나라 성들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한양도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충분하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협의회의 결정을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아쉬운 마음이 넘치겠지만, 문화재청과 서울시는 다시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임해야 할 것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더 꼼꼼히 챙겨 2020년에는 꼭 등재에 성공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덧붙이는 글 | 2020년 서울성곽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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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성곽은 숙종 시기에 대대적인 보수를 한다. 도성을 다시 쌓자는 의견은 숙종 즉위 초부터 개진되었지만 실제로 실행에 옮겨진 것은 무려 30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렇게 숙종 30(1704)에 시작된 한양도성 다시 쌓기는 1710년까지 이어진다.


숙종은 그 다음해인 1711, 북한산성을 축조하게 한다. 북한산성은 6개월 만에 만들어졌다. 길이가 약 8km에 달하는 산성을 반 년 만에 쌓게 한 것이다. 이렇게 초스피드로 북한산성을 쌓게 한 건 청나라의 눈길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조선은 병자호란 강화조약에 의해 성을 새로 쌓지도, 기존의 성을 보수하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양도성의 수축에 대한 논의가 30년 동안이나 지루하게 진행된 이유 중의 하나도 청나라의 감시의 눈초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TV 속의 숙종은 항상 인현왕후, 장희빈과 함께 등장한다. 숙종 시기는 사극계의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존재다. 한마디로 그는 사극왕이다. 그렇듯 우리는 이제까지 너무 사극 프레임으로만 숙종을 바라보지 않았나?


한양도성의 대대적인 보수, 북한산성 축성, 이에 더해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의 축성 등 숙종 시기에는 국방력이 크게 신장된다. 자신의 여인들을 들었다 놨다하며, 치명적인(?) 삼각관계를 만들었던 숙종이었지만 이렇듯 국방력 강화에도 힘을 썼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서울에 '기도발' 잘 받는 바위가 있다고?


선바위와 국사당을 품고 있는 인왕산



17.01.26 10:29   최종 업데이트 17.01.26 12:10

곽동운(artpunk)             





    

        

 

▲ 선바위 인왕산 중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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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낯을 드러낸 것처럼 거대한 암반이 노출된 인왕산은 그 자체가 절경이다. 그래서 옛 선인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인왕산에 대한 애정 공세는 오늘날에도 그 열기가 식지 않고 있다. 성곽길을 탐방하는 도보 여행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왕산을 향하는 발걸음이 모두 성곽길로 향하는 것은 아니다. 성곽길 트레킹이 아닌 기도를 드리기 위해 인왕산에 오르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속인일 수도 있고, 그냥 평범한 일반 시민일 수도 있다. 필자와 같이 역사 트레킹을 즐겨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럼 그들은 어디를 가서 기원을 드릴까. 대충 아무 곳이나 가서 돗자리 펴고 절을 올리는 것일까.





       

▲ 선바위 누군가 간절히 기원을 드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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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복을 입은 바위?
 
그들이 기원을 드리는 곳은 인왕산 서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선바위라는 곳이다. 선바위는 높이 7미터, 가로 10미터 정도가 되는 바위로 산 중턱에 불쑥 솟아 있다. 그렇게 바위의 규모가 크니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그 존재를 알아볼 수 있다.

선바위를 한자로 쓰면 '선암(禪岩)'으로 '스님바위'라는 뜻이 된다. 승복을 입은 선승이 참선을 하는 모습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선바위를 자세히 보면 단일 암석이 아닌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붙어 있는데 이것을 두고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영혼이 나란히 깃들어 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렇게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서 있다 보니 선바위는 예로부터 아이를 갖기 원하는 이들의 좋은 기도처였다고 한다. 쌍둥이 바위는 다산을 뜻하니까.

거대한 암석에서 치성을 드리는 것을 두고 거석숭배문화라고 한다. 이 거석숭배문화는 우리 민간신앙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선바위는 이런 거석숭배문화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된다. 바로 산악신앙이다.

우리 옛 선인들은 산을 경이로운 존재이자 두려운 존재로 인식하였다. 물이 샘솟고, 과실과 약초들이 산재해 있으며, 연료인 나무들을 채취할 수 있으니 산은 인간에게 생명의 원천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산을 마냥 좋은 것만 주는 존재로 인식하지는 않았다. 사나운 맹수들이나 험준한 지형이 항상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 국사당 인왕산 선바위 아래쪽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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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당과 산악신앙
 
그래서 그들은 경이로운 존재이자 두려운 존재인 산을 신격화하여 제사를 드렸다. 산에 사는 신령, 즉 산신령에게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이것을 두고 산악신앙이라고 부른다. 그런 산악신앙은 우리 무속신앙의 근원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바위 아래에는 국사당(國師堂)이라는 신당이 있다. 이 국사당은 원래 남산에 있던 신당이었다. 조선이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1395년(태조4), 이성계는 목멱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호국의 신으로 삼았다. 그때 제사를 드리기 위해 사당이 세워졌는데 이것을 국사당, 또는 목멱신사(木覓神祠)라고 불렀다.

이 목멱신사에서는 봄과 가을에 국가의 공식행사로 제례를 올렸다. 유교중심주의를 표방하며 건국된 조선에서조차도 산신령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 국사당






그렇게 목멱대왕을 모셨던 국사당은 192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게 된다. 일제가 남산 중턱에 신사를 세웠는데 자기들의 신사 위에 국사당이 있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겼던 것이다. 국사당이 선바위 부근으로 옮겨오게 된 건, 인왕산이 무학대사의 기도처였기 때문이었다. 국사당(國師堂)에서 '국사(國師)'는 무학대사를 뜻한다.

그렇게 아래쪽에 국사당이 자리 잡게 되니 선바위는 거석숭배문화에다 산악신앙까지 더해지게 된다. 선바위에서 기원을 드리는 사람들이 국사당 앞에서도 두 손을 모으게 됐다는 것이다. 









        

▲ 선바위의 뒤태 선바위의 뒷모습. 만화영화 <날아라 슈퍼보드>에 나오는 사오정을 닮았다. 그래서 필자는 선바위를 사오정바위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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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대사와 정도전, 선바위를 두고 맞서다
 
선바위는 한양도성에서 직선거리로 300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 선바위를 도성 안에 두냐 마냐를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 간에 격론이 오갔다. 불교세력을 대변했던 무학대사는 당연히 선바위가 도성 안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유교세력을 대변했던 정도전은 이 스님바위가 도성 안에 들어오는 것을 크게 반대했다. 선바위가 들어오면 도성 안에 불교가 융성해질 거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첨예하게 오갔던 격론은 이성계에 의해 결론이 났다. 선바위가 도성 밖으로 '물러'나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불심이 깊은 이성계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유학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글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인왕산은 그 자체가 매력적인 산이다. 또한 그 안에 선바위와 국사당 같은 풍부한 이야깃거리들을 잘 간직해온 산이다. 그렇게 매력적인 풍광과 풍부한 스토리텔링을 가진 산이 서울 중심가에 '떡'하고 위치해 있는 것이다.







        

▲ 선바위 선바위는 정도전을 위시한 유교세력들에 의해 한양도성 안쪽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사진에서보듯 선바위는 한양도성과 무척 가까운 곳에 위치해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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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문이 불여일견! 인왕산에 직접 가서 선바위와 국사당을 탐방하고 오는 건 어떨까. 선바위가 기도발이 잘 받는 곳이라는데 그곳에서 기원을 해보는 것이다. 그리고는 살짝 뒤로 돌아 선바위의 '뒤태'도 살펴보자. 앞모습과는 또 다른 모습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자세히 보면 만화영화 <날아라 슈퍼보드>에 나왔던 사오정과 비슷하게 보인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필자는 선바위를 '사오정바위'라고 부른다. 

거기에 더해 유명한 수성동 계곡에도 가보자. 수성동계곡에서 바라보는 인왕산은 민낯을 드러낸 것처럼 거대한 암반이 노출된 모습을 하고 있다. 인왕산에 올라 '기도발'도 세워보고, 유명한 수성동 계곡도 탐방하고. 그 아래 서촌에 들러 배도 채우고! 참 서울을 즐기는 방법도 여러 가지인 것 같다.





여행정보

1. 교통편: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1번 출구 하차. 표지판을 따라 800미터 정도 올라가면 선바위에 도착함.


2. 추천이동경로: 선바위(국사당) ▶ 인왕산 성곽구간 ▶ 수성동계곡 ▶ 서촌
 






 



        

▲ 한양도성 인왕산 구간







































성곽에 눈 내리는 날





1월 22일 토요일.


서울에도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더군요. 온 세상이 다 하얗게 변했습니다.


서울성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인왕산 성곽길에 들어섰을 때, 이미 그곳은 설국으로 변해있었습니다. 성곽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눈길을 걸었습니다. 성곽길 너머 희미하게 눈 쌓인 바위들이 보이더군요. 절경이었습니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하얗게 눈 덮인 성곽을 보고 있자니 모든 게 다 정화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흰 눈으로 세상살이에 찌든 제 몸을 씻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눈 덮인 성곽길을 걷고 난 후 촛불 집회가 열리던 광화문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눈사람을 만났네요. 역시 촛불 집회에 참석하는 눈사람이라 그런지 그냥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무언가를 열심히 주장하고 있네요. 앞에다 촛불도 여러개 켜 놓고서.














 * 한강: 매봉산 팔각정에서 바라본 한강.

 





 

* 버티고개: 버티고개에서 한 컷. 수강생분들이 즐거워하고 있다.  








10월 8일 토요일, 한겨레 문화센터 역사트레킹 강의가 있는 날.


그 전날 전화 한 통이 걸려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한겨레 문화센터입니다. 내일 비 예보가 있는데요.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 예보 저도 봤습니다. 그런데 우리 출발할 때는 비가 그친다고 나오네요."


"그래도 비가 계속 올 지 모르니까..."


'그렇죠. 비가 계속 이어서 올 지 모르죠. 요즘 하도 일기예보가 안 맞으니까..."


"음...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혹시 이번 트레킹은 취소하시는 게 어떠신가요?"


"아니요. 일정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때 그때 일정을 소화해야지 차후로 미루면 엉켜버립니다."



저는 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확실히 의사표시를 한 것이죠. 한 번 일정이 틀어지면 계속 꼬이게 되잖아요. 그런 걸 방지하기 위해서 단호하게 나갔던 것입니다. 제 뜻을 알겠다는 듯 담당자 분도 수긍을 해주시더군요. 감사하더군요.


8일에 행해진 서울내부트레킹은 그렇게 비 때문에 취소될 뻔했답니다. 사실 당일날 새벽까지 비가 오긴 왔었습니다. 하지만 아침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날씨가 개었더군요. 전화위복이라고 그렇게 비가 그친 뒤에 행한 트레킹이라 상쾌함이 배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서울내부트레킹을 시작하기 전에는 좀 고민을 했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길을 안 좋아하면 어쩌냐... 여기 산들은 다 동네 뒷산급인데..."


하지만 수강생분들의 만족도는 상당했습니다. 괜한 걱정을 한 것이죠. 수강생분들은 서울의 구석구석을 알 수 있게 되어, 즐거웠다고 이구동성으로 말씀해주시더군요. 매봉산 팔각정, 버티고개, 수표교, 광희문 등등... 수강생분들은 그런 곳들을 탐방하며 즐거워하셨습니다.


걱정을 많이 한 만큼 준비를 많이 한 탓도 있을 겁니다.


역시 강의 준비는 철저히! 다음 트레킹을 또 기약하며!


 








​ * 성곽길: 남산의 동쪽에 위치한 성곽길.


 


* 광희문














* 수표교: 장충단 공원 안에 있는 수표교 앞에 선 참가자들.










"소나기라도 안 내리나? 이런 날씨에 무슨 트레킹이야! 더워 죽겠구만!"



2016년 8월 16일.



찌는 듯한 폭염이 더욱더 기승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광복절 전후로 폭염이 꺾인다는 기상청의 발표는 그저 무색할 따름이었죠. 정말 망설였습니다. 이렇게 더운 날에 무슨 트레킹입니까!


그래도 약속은 약속입니다. 아무리 덥다고 해도 일정을 변경을 할 수는 없겠죠. 중간에 에어컨이 빵빵한 커피숍으로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발걸음을 떼야했습니다. 그래도 너무 덥더라고요. 오죽했으면 제가 소나기가 내렸으면 하는 기원까지 드렸겠습니까!


앞선 포스팅에서도 언급했듯이 저는 렛츠런 문화공감센터에서 역사트레킹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난 16일은 서울내부 역사트레킹이 행해진 날이었습니다. 폭염에 대한 염려의 마음을 한가득 안고 집합장소인 청구역에 도착했습니다.


렛츠런에서 행하는 트레킹은 모임 인원이 20명인데 이날은 9명이 오셨더군요. 아무래도 날씨 때문에 참가율이 저조했던 것 같습니다.


두둥~ 드디어 첫걸음을 옮겼습니다. 태양은 뜨겁게 내려째고 있었고, 지열은 이글이글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서울내부 역사트레킹 코스는 응봉이라고 불리는 산등성이를 타고 갑니다. 산등성이라고 하지만 해발이 낮아서 누구나 다 오를 수 있는 코스죠. 그래도 산을 오르려면 오르막 길을 올라야 하잖아요. 그런 오르막이 초반에 있답니다. 그 초반 오르막을 지나면 숲길을 지나는 터라 걷기는 편하죠. 참가자 분들이 도보여행에 익숙한 분들이 많아서 그랬는지 초반 오르막 길을 무사히 잘 오르시더군요.







*버티고개: 버티고개 쉼터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참가자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날 트레킹도 모든 분들이 완주를 해주셨답니다. 땀을 뻘뻘 흘리기는 했지만... 그래서 옷이 완전 젖었지만... 아참 출발하기 전에 제가 참가자 분들에게 손수건을 나눠 드렸습니다. 일명 '역사트레킹 손수건'이었는데 나름대로 디자인이 예쁘다고 하시더군요. 그 손수건으로 땀도 닦으시고 그러더군요. 하여간 잘 나눠드린 것 같습니다.


저도 다른 모임 때보다 아주 천천히 리딩을 했답니다. 사실 저도 무척 힘들었으니까요. 사실 전날 잠을 제대로 못 잤거든요.


하여간 쉽지 않은 트레킹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고생을 했더니 기억에 많이 남는 모임이 되었답니다. 보람도 컸습니다.


그래도 9월 달 트레킹은 좀 날씨가 좋았으면 좋겠습니다!!! 


 





* 서울성곽: 서울성곽 구간에 선 참가자들.













 







'돌머리'가 되도 좋아!


돌담 쌓기가 그렇게 어려울 줄이야~!




16.07.25 09:47 최종 업데이트 16.07.25 09:47

             곽동운(artpunk)             







     

 
▲ 돌담 완성된 돌담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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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은 정겹습니다. 돌담을 끼고 걷는 것만으로도 푸근함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돌담 쌓기는 만만치 않은 작업입니다. 우선 '손'이 많이 갑니다. 그렇게 만만치 않은 돌담 쌓기 작업을 해봤습니다. 저는 현재 거창귀농학교라는 곳에 기거하고 있는데 그곳의 외부 담벼락이 붕괴됐습니다. 그것을 수리하는 데 제가 '발품'을 팔았습니다.

돌담을 쌓으려면 황토 흙을 반죽해야 합니다. 밀가루 반죽하듯이 반죽해야 합니다. 그래야 찰기가 생기니까요. 황토를 손으로 반죽할 수는 없습니다. 발로 밟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굉장히 어려운 작업입니다.

그 황토반죽 작업을 제가 맡았습니다. 맨발로 황토를 밟는데 마치 늪에 발이 빠지는 느낌이 들더군요. 찰기 때문이죠. 그렇게 맨발로 하다 보니 흙 속에 숨어 있는 작은 돌들에 상처가 나기도 합니다. 장화를 신고 싶어도 장화를 신을 수가 없었습니다.

장화가 본드에 붙은 것처럼 반죽에서 안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한 발 떼기도 힘들 정도였습니다. 황토 반죽을 고무 대야에서 하는 이불 빨래 정도로 생각했다가 아주 큰 코 다쳤습니다.
 






 
▲ 무너진 돌담 무너진 저 돌담을 수리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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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너진 돌담. 뒤쪽에서 본 모습







그렇게 반죽된 황토를 바르고 돌을 올렸습니다. 돌담에 쌓는 돌들은 계곡돌이라고 해서 좀 매끈한 녀석들을 쓰는 게 좋습니다. 그 계곡돌들을 층층이 쌓은 후 진흙으로 빈틈을 채우게 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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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기와를 올렸습니다. 동네의 돌담들은 그냥 돌만 올리지만 우리는 예전부터 기와까지 올렸기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암키와를 올리고, 수키와를 덮고... 옛 우리조상들이 쌓았던 방식과 동일하게 돌담을 쌓게 된 것이죠.

돌담을 쌓다보니 옛날 성을 쌓았을 때의 모습들이 유추되더군요. 서울성곽 같은 경우, 우리가 보고 있는 성체는 조선 후기 이후에 중수한 것들입니다. 두부돌이라 불리는 거대한 장판석(長板石)이 그것들입니다. 하지만 조선 초기에는 잔석(殘石)이라 하여 크기도 작고, 형태도 울퉁불퉁한 돌들로 성체를 올렸습니다.


잔석들은 퍼즐 조각처럼 딱딱 들어맞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딱 들어맞지 않는 부분에는 황토가 들어갔습니다. 찰기가 살아있는 황토가 잔석들의 빈 공간을 채워주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황토 흙도 성체의 일부분이었던 것입니다.







 

 
▲ 돌담 쌓기 반죽된 황토를 바르고 돌들을 올린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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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토 반죽. 저렇게 반죽을 하면 본드가 부럽지 않을 정도다.






그냥 벽돌에다 시멘트 발라서 올리면 작업은 편해질 테지요. 하지만 시멘트가 발린 벽돌담은 돌담처럼 정겨움을 주지 못합니다. 시멘트는 갈라지면 흉하게 보이지만 돌담은 갈라져도 그것 자체로 보기가 좋습니다.

돌담 작업을 하느라 제 옷은 황토로 뒤범벅이 돼버렸습니다. 옷이 완전히 진흙탕이 된 것이지요. 하지만 조상들의 작업 방식과 동일하게 돌담을 올렸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한 일이었답니다.

돌담작업을 하다 보니 서울성곽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겹게 봐왔고, 수도 없이 탐방했던 서울성곽인데 눈앞에 돌담을 보니 불현듯 서울성곽이 그려지는 겁니다.

그러고 보면 저도 우리 돌문화에 깊게 빠진 듯합니다. 서울 성곽길을 걷고, 돌담길에 환호하며, 돌장승들을 탐방하는…. 그렇게 제 머릿속에는 '돌'들이 가득합니다. 우리 옛 조상들의 슬기와 자연미를 담고 있는 그런 '돌'들이 제 머릿속에는 가득한 것입니다. 그럼 제 머리는 '돌머리'인가요?
 






 
▲ 돌담 완성된 모습. 기와까지 올려진 돌담.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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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힐을 신고 성곽길을?


성곽길을 걷는 서울시티트레킹

 





이제 역사트레킹 펀딩도 막바지로 치닫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셨던 것 같습니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죠!


역사트레킹 펀딩 기간은 108일입니다. 108일이면 충분히 제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그렇게 기간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못 다한 이야기가 넘쳐나네요. 한편으로는 펀딩이 빨리 종료됐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원고를 작성하는 게 만만치 않았거든요. 여기에 올린 글들은 기 발표작들입니다. 그것들을 펀딩 플랫폼에 맞게 수정을 가했지요. 그런데 수정하는 게 더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차라리 새로 작성하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으니까요.


어쩌면 역사트레킹 펀딩은 제게 108번뇌와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릅니다. 그 번뇌를 벗어나고자 저는 계속 허우적거렸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허우적거리다보니 이제 종료를 코앞에 두게 됐네요. 시간이 참 빠르죠!


후원자분들! 파티란에 리워드 트레킹 공지 올렸으니 확인해 주세요. 보충 트레킹도 올려놨으니 꼭 확인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번화에서는 서울시티트레킹을 소개해 봅니다. 서울시티트레킹은 '서울시티투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 가보면 서울시티투어 버스를 탈 수 있는데 이 버스를 타면 서울을 편안하게 돌아볼 수 있습니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2층 버스도 만날 수 있습니다.


서울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하면 좋겠지만 서울 구석구석을 돌아보려면 역시 자신의 두 발로 걸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제대로 볼 수 있으니까요. 서울성곽이 있는 인왕산 정상에 버스를 타고 올라갈 수는 없으니까요!


한편 서울시티트레킹은 인왕산 역사트레킹의 자매편입니다. A코스, B코스 정도로 생각해주시면 될 듯싶네요. 인왕산이 스토리텔링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어서 그렇게 나눈 것이죠.

 




 

* 소녀상






 

꽃 한 송이가 놓여 있는 소녀상

 

서울시티트레킹은 조계사와 그 옆쪽에 자리 잡고 있는 우정국 탐방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정국은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갑신정변(1884)을 일으킨 곳입니다. 일명 '3일 천하'로 불린 갑신정변은 임오군란(1882)과 함께 개화기에 발생한 중요한 사건입니다.


정변 주동자들의 의견과 너무나 큰 간극을 보였던 당시의 조선 상황, 정변 당사자들의 과도한 일본 의존 등으로 갑신정변은 '그들만의 리그'로 막을 내렸고, 주동자였던 김옥균은 중국 상해에서 암살을 당하고 맙니다.


정변 주동자들은 일본을 맹주로 한 '대동합방론'과 아시아에서 벗어나자는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친 후쿠자와 유키치의 충실한 모범생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조선에 메이지유신을 '이식' 시키려고 했지만 실패를 하고 만 것이죠.


갑신정변이 발생한 곳인 우정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일본대사관이 있고, 그 앞에는 위안부소녀상이 꿋꿋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1992년부터 개최된 수요집회는 2012년에 1000회를 맞이하게 됐고, 그 기념으로 본 위안부소녀상이 건립되었습니다.


누구는 위안부소녀상이 외롭고 처량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2인용 벤치에 홀로 앉아 있는 모습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일본 정치인들의 끊임없는 망언들을 생각하면 그 외로움이 더 크게 느껴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소녀상이 외롭지 않아 보였습니다. 소녀상을 방문할 때마다 꽃이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꽃이 아니라 매번 다른 꽃이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어떨 때는 과자나 그림 같은 것들이 놓여 있기도 했습니다. 소녀는 벤치에 홀로 앉아 있지만 혼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친구가 있었던 것입니다. 소녀상은 외롭지 않았습니다.

 





* 광화문. 수문장 교대식 행사. 뒤로 보이는 산은 인왕산이다.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

 

다음 탐방지는 광화문입니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문이자 정문입니다. 경복궁이 조선의 법궁이었던 만큼 광화문은 다른 궐문보다 훨씬 더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광화문은 석축을 쌓고 중앙에 홍예문(무지개문)을 셋이나 내서 격식을 높였습니다.


궁궐은 ''''이 합쳐진 말인데 ''은 높은 석대 위에 누각을 세운 것을 말합니다. 지금은 경복궁 돌담과 떨어져 있는 동십자각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일반적인 궁궐의 의미에 빗대어 보자면 광화문은 조선시대 궁궐 정문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 형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경복궁은 조일전쟁(임진왜란) 때 불에 타고 맙니다. 광화문 앞에 화기를 막으려고 세운 해태상이 있었음에도 불에 전소되었던 것이죠. 전쟁이 일어나자 선조는 궁궐을 버리고 몽진(임금의 피난)을 하게 되고, 이에 격분한 백성들은 궁궐로 몰려갑니다. 급기야 백성들은 궁궐에 불을 놓기까지 합니다. 아무리 해태상을 세운다고 한들, 강력한 소방시설을 갖춘다고 한들 성난 민심 앞에서는 그저 무용지물이었던 것입니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은 조선의 정기를 끊기 위해 광화문을 헐어 동쪽으로 옮겨 버렸습니다. 그 자리에는 한용운 선생이 '돌집'이라고 불렀던 조선총독부가 들어섰지요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광화문은 20108월에 완공된 것입니다. 사실 광화문은 1968년에 중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제대로 복원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당시 중앙청으로 쓰이던 구 조선총독부 축에 맞춰 중수를 했는데 그 때문에 본래보다 3.5도 가량 틀어져 버렸던 것이죠.


그런 오류를 바로잡고 거듭난 광화문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수문장 교대식 때문입니다. 바람에 펄럭이는 큰 깃발과 화려한 복식을 한 수문장들의 박력 있는 모습을 보기 위해 국내외 관광객들이 광화문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 동십자각. 도로 위에 섬처럼 떠있다.






 

섬처럼 떠 있는 동십자각

 

광화문에서 동쪽, 삼청동 방면으로 가다보면 누각 하나가 껑뚱하게 떨어져 나와 있습니다. 광화문 인근이라서 그런지 자동차들이 쉴 세 없이 그 앞을 지나고 있지요. 외국인 관광객들을 태운 대형 버스들도 많이 지나갑니다. 도로 한복판에 툭 튀어 나온 누각을 보고 있다 보면 마치 섬이 하나 떠 있는 느낌이듭니다.


도로 한복판에 외떨어져 나온 누각은 앞서 언급한 동십자각입니다. 동십자각은 경복궁의 동쪽의 방위 초소 역할을 했던 곳이죠. 서십자각은 서쪽 방위 초소였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동십자각은 경복궁의 담벼락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럼 왜 지금처럼 끊겨져 있는 걸까요? 이것 역시 일제에 의해 끊기게 됐습니다.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만든다는 명목으로 경복궁의 남쪽 담벼락을 다 헐어버렸습니다. 그때 광화문도 이전을 하게 됐지요.


돌담들이 서 있던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게 철책선이 그 역할을 대신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구한말에 촬영한 사진을 보면 동십자각에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그 계단을 타고 지상으로 오르내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계단을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한편 동십자각이 감시초소였던 만큼 그 역할은 무척 중요했습니다. 명성황후를 시해했던 일본인 자객들도 동십자각을 점령한 후 경복궁 내부로 진입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동십자각은 서십자각 보다는 상황이 더 낫습니다. 서십자각은 아예 허물어졌기 때문입니다. 일제는 광화문에서 영추문 사이에 전차노선을 개설했는데 그때 서십자각을 철거했던 것입니다. 멀쩡한 광화문을 옮겨버리고, 담장을 헐고, 누각도 철거시키고...


그러고 보면 일제도 반달리즘을 저지른 셈입니다. 반달리즘은 로마의 유적들을 파괴했던 반달족들의 반문명적인 행위를 빗댄 명칭입니다.

 

 



* 서울성곽




 

인왕산과 서울성곽

 

이제 서울성곽을 오를 차례입니다. 18km에 달하는 서울성곽은 조선의 도성이었습니다. 북쪽의 백악산(북악산)을 기준으로 동쪽에 낙산, 서쪽에 인왕산, 남쪽에 목멱산(남산)을 둘러서 만든 성곽입니다. 이 산들을 묶어 내사산이라 부릅니다.


북악산은 원래 백악산이라 불렸는데 일제 강점기에 '북악'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런 도성에는 4대문이 있는데 남쪽에는 숭례문(남대문), 동쪽에는 흥인지문(동대문), 북쪽에는 숙정문, 서쪽에는 돈의문(서대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서대문은 없지요.


인왕산에 올라서면 성곽과 함께 고층빌딩으로 둘러싸인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입니다. 내사산이 둘러싸고 있는 서울 중심부입니다. 이를 두고 저는 '작은 서울'이라 칭합니다.


그럼 '큰 서울'은 어디일까요? 서울의 주산인 북한산을 기준으로 남쪽으로는 관악산, 동쪽으로는 아차산(용마산), 서쪽으로는 덕양산(행주산성)을 두고 외사산이라 부르는데 그 외사산의 안쪽 지역을 '큰 서울'이라고 불렀습니다.


서쪽 지역만 빼놓고는 지금의 서울 행정권역과 얼추 비슷합니다. 한양천도 이후, 서울의 확장은 계속됐지만, 지형적인 굴레까지 뛰어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 서울성곽. 급경사를 타고 내려가는 참가자. 딱 봐도 만만치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모든 참가자들이 완주를 해주셨다는 점이다. 정말 감사할 따름이다.





 

급경사를 타는 서울성곽

 

서울성곽은 자연적 지형을 이용하여 방어요새를 구축했습니다. 산사면의 급경사를 이용하여 적의 침략을 대비한 것이죠. 한마디로 매우 급한 경사면에 성곽이 구축됐다는 뜻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경사면이 급하면 급할수록 방어력은 증강될 테니까요. 이를 달리 해석하면 서울성곽길은 걷기가 만만치 않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걷다 보면 발바닥에 불이 난다는 뜻이지요.


물론 평지구간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평지 구간은 도시화로 인해 성벽이 거의 다 허물어졌지요.

간혹 서울성곽길을 좀 만만하게 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전 트레킹 팀원 중에서도 그런 분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께서 하이힐을 신고 오셨던 것입니다. 트레킹 리딩자로서 참 난감하더군요.

     

"! 제가 분명히 편한 복장에 편한 신발을 신고 오라고 당부 드렸는데요."

"앞에는 그냥 평지고, 서울성곽길 걷는다면서요..."

 

서울성곽은 여러 번에 걸쳐 개축됐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토성이었고, 이후에는 주위에 있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축성됐습니다. 그러다 조선 후기 숙종시대에는 두부 모양의 장대석이 올려지게 됩니다.


이렇듯 서울성곽은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품고 있습니다. 마치 600년이란 시간이 퇴적층처럼 돌들에 새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아랫돌은 옛날에 쌓여 '누리끼리'한데 그 이후에 축성된 돌들은 하얀색입니다. 윗돌과 아랫돌이 서로 '시간 퇴적층'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아참! 그 하이힐 신은 분은 어떻게 됐냐고요? 다행이었습니다. 그 분도 끝까지 완주를 해주셨습니다. 그렇게 모든 참가자분들이 완주를 해주시면 저는 정말 뿌듯하더군요. 물론 조마조마 하기는 했지만...

 

 





* 독립문. 독립문을 지나고 있는 참가자들.






 

서대문형무소와 독립문

 

마지막 탐방지는 독립문과 서대문 형무소입니다. 독립문은 잘 아시다시피 독립협회에서 자주 국권을 상징하기 위해 세운 문입니다. 독립문은 영은문을 헐고 지은 문이죠. 영은문은 청나라 사신을 접견하기 위해 만든 문이었습니다.


독립협회가 주장한 '자주독립'은 분명 한계가 있었습니다. 러시아에 대한 독립의지는 확고했으나 일본이나 미국에 대해서는 무척 관대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이권침탈에는 목소리를 높이며 반대했으나 일본의 이권 침탈에는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역사적인 함의가 있어서 그랬는지 독립문은 일제강점기에도 헐리지 않았습니다.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서울시티 투어를 떠납니다.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서 열심히 설명을 듣고, 분주히 사진을 찍어 됩니다. 외국인들이 이렇게까지 서울에 대해서 알려고 하는데 우리가 그들보다 서울을 더 모르면 안 되겠지요? 우리도 열심히 서울에 대해서 배워 보자고요.


그렇게 배우다보면 역사도시 서울의 매력에 푹 빠질 겁니다. 그 매력에서 허우적거리다보면 주말마다 배낭을 꾸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손에는 서울 역사지도를 들고 있을 거고요.

 

 




*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에 걸린 초대형 태극기.





 

 

서울 시티트레킹

 

1. 코스: 조계사 소녀상 광화문(동십자각) 황학정 서울성곽(인왕산) 서대문형무소(독립문)

 

2. 이동거리: 8km

 

3. 예상시간: 3시간 30(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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