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를 받든 안 받든 그냥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무대에 서 있을 때만큼은 정말 행복합니다.”

 

예전에 우연히 만난 연극인이 이런 말을 했었다. 연극인이 겪어야 하는 생활고, 캐스팅에 대한 불안감... 우리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고단한 연극판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는 해맑은 미소로 저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무대행복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는 더 힘줘서 이야기를 했었다.


방송에서 인기가 떨어진 가수나 배우들이 무대가 너무 그립다는 말들을 할 때는 마음에 와 닿지 않았었다. 그냥 한물간 연예인들의 인기회복용 멘트라고 생각했다. 시청자들의 감수성을 건드리려는 작업용 멘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연극인과의 대화 이후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가식적인 방송용 멘트가 아니라 진짜 무대에 대한 간절한 갈증을 마이크에 대고 표출한 것이라고.


무대라고 하니까 가수나 배우들에게만 초점이 맞춰지는데, 무대를 그라운드로 바꿀 수도 있다. 시즌 중에 부상을 당한 한 여자배구 선수가 있었다. 재활 과정 중에 인터뷰를 했었는데 코트가 그립다며 눈물까지 보이더라. 배구가 너무 하고 싶었다는 이야기다. 그녀에게 배구는 존재 이유였던 것이다.


바람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붙은 야구선수 이종범도 인터뷰에서 비슷한 말을 했었다. 부상 이후에 찾아온 슬럼프 때문에 너무 괴로웠고, 다시 그라운드에 서기 위해 더 열심히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루키시절보다 더 열심히 타격과 수비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곳이 바로 그라운드였으니까


결국 그는 다시 그라운드에 섰고, 2009년 소속팀인 기아 타이거즈가 한국시리즈를 우승할 때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 당시 이종범의 나이는 40살이었다. 이미 은퇴를 해야 할 나이였지만 그는 그라운드 위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실히 입증했다.


누구나 다 자신만의 무대가 있을 것이다. 자신만의 그라운드가 있을 것이다. 그곳에 올라서면 자신도 모르게 화색이 돌고 말에 힘이 넘치게 된다.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는 힘에 부쳐하다가도 그곳에 올라서면 얼굴색이 달라진다. 마치 무아지경에 빠진 것처럼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한다.


그렇다면 필자의 무대는 어디일까? 그렇게 화색이 돌고, 말에 힘이 넘치는 무아지경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 어디일까? 길이다. 더 정확히는 숲길.

 



* 북악팔각정: 북악팔각정에서 바라본 북한산. 






세검정(洗劍亭)보다 고향집 팔각정이 더 낫다?

 

3편에서는 백사실계곡 역사트레킹을 소개한다. 서울의 숨어 있는 비경이라고도 불리는 백사실계곡은 북악산에 자리 잡고 있다. 백악산이라고도 불리는 북악산은 서울의 내사산(內四山) 중 가장 키가 큰 산이다. 그 높이가 340m이다. 전편에서도 계속 언급했듯이 한양도성은 내사산을 연결하여 만들어졌다. 북악산-인왕산(338m)-남산(270m)-낙산(125m)을 연결하여 18.6km의 성곽을 쌓았다.


법궁이었던 경복궁이 그 아래에 자리 잡고 있듯, 북악산은 궁궐의 주산으로서 조선시대 내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 군주제에서 공화정으로 바뀐 지금도 그 역할은 계속되고 있다. ? 청와대가 있으니까.


백사실계곡 역사트레킹은 상명대입구에 있는 홍제천에서부터 시작한다. 3호선 경복궁역에서 상명대행 시내버스를 타고 약 15분 정도 이동하면 시작점에 도달한다.


홍제천은 모래가 많아 사천(沙川)이라고도 불렸다. 그 홍제천을 따라 백사실계곡으로 방향을 잡고 가면 세검정을 만날 수 있다. 세검정은 칼을 씻었다(洗劍)’는 의미인데 광해군과 관련이 있는 곳이다. 광해군을 몰아내고자, 인조반정을 획책한 이귀, 김류 등이 칼을 갈아 씻었다고 해서 세검정(洗劍亭)이라고 명명됐기 때문이다. 정자정()에서도 보듯 세검정은 계곡 옆에 지어진 정자다.


세검정 일대(종로구 부암동)는 예부터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명승지였다.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이 주위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고 홍제천이 너럭바위 위를 유유히 흐르고 있으니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데 안성맞춤이었던 셈이다


다산 정약용과 겸재 정선도 그렇게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린 이들이었다. 다산 선생은 <유세검정(遊洗劍亭)>이란 시를 지었고, 겸재 선생은 <세검정도>라는 부채 그림을 그려 세검정을 칭송했다.


현재의 세검정은 1977년에 지어졌다. 1941년에 인근에 있던 종이공장에서 화재가 났는데 불이 옮겨 붙어 주춧돌만 남기고 완전히 소실됐다가 이후 36년 만에 복원된 것이다. 겸재 선생의 부채 그림을 많이 참조하여 복원됐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차이가 크다고 한다


필자가 봐도 복원된 세검정과 겸재 선생의 그림 속의 세검정은 닮아 있지 않았다. 현재의 세검정은, 얼핏 보면 그냥 평범한 동네 정자로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트레킹팀의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었다.

 

우리 고향 마을회관에 있는 팔각정이 더 좋아 보이는데요...”


부채에 그려진 수려한 주위풍광은 되돌릴 수 없겠지만 문화재 복원만큼은 보다 더 정교하게 이루어졌으면 한다.

 




* 세검정





비밀의 화원 같은 백사실계곡

 

북악산은 많은 부분이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다. 그래서인지 1급수에서만 산다는 도롱뇽이 살고 있단다. 그곳이 정확히 어디냐? 바로 백사실계곡이다. 북악산의 북사면에 위치한 백사실계곡은 비밀의 화원같다고 표현할 수 있다. 초고층 빌딩이 즐비한 중심가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그렇게 한적한 장소가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사실 백사실 계곡은 말이 계곡이지 거의 건천에 가깝다. 시원하게 물줄기를 뿜을 때를 거의 본적이 없을 정도다. 그래서인지 백사실 계곡은 계곡 자체보다는 숲길이 더 각광을 받는 곳이다. 울창한 숲이 터널처럼 산책로를 감싸고 있어 삼림욕을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그저 한들한들 걷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기분이랄까.


산책로를 따라 백사실계곡 위쪽으로 올라가면 큰 연못 자리와 함께 별서터가 나온다. 주춧돌만이 남아 있는 그곳은 오성대감 이항복 선생의 별서터였다고 전해졌다. 그래서 필자는 예전에 이런 식으로 해설을 했었다.

 

예전에 이곳은 백사 이항복 선생의 별장터였어요. 이항복 선생은 오성과 한음 할 때, 그 오성이었죠.”

 

하지만 몇 해 전에 추사 김정희 선생이 그곳의 주인이었다는 고문서가 발견됐고, 백사실계곡의 별서는 추사 선생의 소유라는 게 정설이 되었다. 하지만 그 곳이 이항복 선생 소유든 김정희 선생 소유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오히려 오성대감과 추사 선생이 함께 묶여 있으니 더 풍부한 스토리텔링이 가능해졌다. 그래서 요즘은 이런 식으로 해설을 한다.

 

예전에는 이곳이 오성대감 별장터라고 말했는데요. 이제 추사 선생의 문서가 발견됐으니 저는 이렇게 가정해봅니다. 이곳이 오성대감 소유였다가 나중에 추사 선생이 매입했다, 이런 식으로요. 오성대감은 조선 중기 때 인물이고, 추사선생은 후기 때 인물이니까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요?”

 

과거의 행한 해설 오류를 만회하려고 나름대로 꼼수(?)를 써본 것이다.

백사실계곡 일대는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동천은 풍광이 수려한 곳을 지칭하는데 어떤 풍류객이 白石洞天네 글자를 보기 좋게 각자를 해두었다. 그 백석동천 바위는 탐방객들의 포토존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누구나 그 곳을 탐방하면 그 바위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카메라를 꺼내고 멋진 포즈를 취하게 될 것이다. 찰칵!

 




* 백사실계곡: 계곡 초입에 있는 현통사






서울 한복판에 능금마을이?

 

백석동천을 탐방하다 보면 능금마을이라는 곳을 만나게 된다. 능금마을은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어서 그런지 전원적인 모습이 물씬 풍기는 곳이다. 서울 도심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비료포대가 쌓여진 농촌 마을을 보고 있자니 생경한 느낌이 들 정도다.


그렇다면 왜 능금마을이 북악산 서북쪽 부암동 부근에 있는 것일까? 아시다시피 능금이면 우리나라의 고유 사과종을 말하는데 능금으로 유명한 지역은 대구·경북 쪽이 아닌가? 이런 의문이 드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실제로 예전에 트레킹에 참가한 사람들도 그렇게 묻고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 왜 사과마을이 있는 거에요?”

 

현재 창의문 밖, 부암동 일대는 능금마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사과나무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능금마을이라는 마을 명칭만이 옛 흔적(?)을 확인해 주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40여 년까지만 해도 창의문 밖 능금은 경림금(京林檎)이라 하여 서울의 유명한 특산물이었다. 능금이 출하되는 가을 때쯤에는 전국에서 몰려온 상인들로 창의문 인근이 들썩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창의문 밖에 능금나무가 많이 심어졌을까? 먼저 산지 형태를 띠는 부암동 일대의 토양이 척박하여 논농사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로 들어질 수 있겠다. 그럼 두 번째 이유는? 두 번째 이유는 창의문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그 두 번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창의문의 역사를 더듬어 가야 한다.

 




* 백석동천: 각자바위






인조반정과 능금마을

 

1623313.

창의문 밖 홍제원(지금의 서대문구 홍제동)에 집결한 의군(義軍)’들은 창의문을 부수고 창덕궁으로 진격한다.


반정군의 원두표가 도끼로 문을 부셨다. 당시 창의문은 문루가 없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탔기 때문이다. 높은 위치에서 활도 쏘고 해야 하는데 문루가 없으니 효과적인 방어가 펼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반정군은 창덕궁을 점령했고, 광해군은 폐위된다.


능금마을 이야기를 하다 뚱딴지 같이 왜 인조반정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일까? 그렇다. 창의문 밖 능금마을은 인조반정과 무척 관련이 깊다. 인조는 반정에 협조했다 하여 창의문 밖 백성들에게 능금나무와 자두나무를 나눠주었다. 그게 부암동 능금마을의 시초가 된 것이다.


숙종 때에는 정책적으로 묘목을 더 많이 심어 부암동 일대에 무려 20만 그루의 능금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가을이 되면 빨갛게 달아오른 사과들이 푸른 잎들 사이에서 대롱대롱 거렸을 것이다. 아주 멋진 장관이 펼쳐졌을 것 같다. 거기에 인왕산 서편으로 석양이 지는 모습까지 어우러지면!


창의문 밖 능금, 경림금은 그렇게 서울을 대표하는 특산품이 되었다. 추석 차례상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제례물품이 되었던 것이다.

 




* 수각터: 수각터에서 바라본 별서터. 물에 세운 정자를 수각이라고 한다. 백사실계곡 별서터 옆에는 수각이 세워졌던 기단들이 이렇게 남아 있다. 현재 수각은 사라졌고, 연못은 매말랐다. 엄청난 폭우가 쏟아진 다음날에는 저 연못이 물이 차기도 한다. 





북악스카이웨이와 북악산 산책로

 

능금마을을 돌아가면 약수터가 나온다. 산길도 계곡 이어진다. 백사실계곡 숲길보다는 덜하지만 이 산길도 정말 걷기에 좋은 길이다. 걷다보면 어깨춤을 추거나 콧노래가 흘러나오는 곳이다. 필자는 둘 다 했다. 어깨춤을 추며 콧노래를 불렀다.


이제 북악스카이웨이를 따라간다. 북악팔각정을 향해가는 것이다. 일명 북악스카이웨이로 불리는 북악로는 19689월에 완공됐다. 이 도로는 그해 121일에 있었던 청와대습격사건(일명 김신조 사건)의 여파로 만들어졌다. 서울방어목적으로 개통됐던 것이다.


무장공비에 의한 청와대습격이라는 엄청난 사건의 여파로 만들어졌지만 이 도로는 관광용으로 더 많이 애용됐다. 도로 정상부에 북악산 팔각정이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면 서울을 한 눈에 다 내려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사산은 물론 멀리 관악산과 아차산 등 외사산까지도 다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북악산 팔각정이다.


북악산 팔각정은 석양이 질 무렵이 가장 낭만적이다. 뒤쪽 북한산 서편으로 펼쳐진 붉은 노을을 감상한 후에 앞쪽으로 이동을 하여 서울의 야경을 보는 것이다. 노을도 감상하고, 뒤이어 야경도 감상하는 것이다.


이렇듯 자연과 도시의 낭만을 동시에 품고 있는 북악스카이웨이는 60~70년대 신혼여행지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당시에는 택시를 타고 북악스카이웨이나 남산을 한 바퀴 도는 것이 신혼여행의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해외여행이 흔한 일상이 된 요즘과 비교해보면 정말 격세지감이다.


한편 북악산 산책로는 한양도성 북악산 구간과는 다르다. 성곽 구간을 포함하여 북악산 일대는 안보상의 이유로 출입이 통제됐다 2006년 이후 일반인들에게 개방됐다.

팔각정에서 성북동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군인들의 보초로이다. 그 길을 걷다보면 지금 자신이 서울 중심부에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게 될지 모른다. 그만큼 그 길 주변은 때 묻지 않은 자연 경관을 유지하고 있다.

 




* 백사실계곡: 울창한 여름숲도 좋고, 이렇게 단풍이 지는 가을도 좋다. 이렇게 좋은 길을 걸으니 어깨춤이 들썩이고 얼굴에 화색이 도는 거겠지!





숲길에 서면 무아지경에 빠진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필자의 무대는 길이다. 길 위에 서서 트레킹을 행하다보면 모든 근심걱정에서 벗어난다. 평소에 거울을 보면 항상 해있는데 숲길에서 트레킹을 할 때는 얼굴에 화색이 돈다. 그렇게 해맑게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 신기할 정도다


좋은 기가 발산 되서 그런지 숲길에서는 해설도 잘 된다. 마이크를 잡고 이러쿵저러쿵 두서없이 이야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박수로 갈무리된다그렇게 숲길은 필자의 존재가치를 확실히 입증해주는 무대다. 가끔 그 위에 올라서면 어느덧 무아지경에 빠지기도 한다.


누구나 다 자신만의 무대가 있을 것이다. 그 무대가 누구에게는 실험실일수도 있고, 누구에게는 그라운드일수도 있다. 또 누군가에게는 주방일수도 있다. 누구의 무대가 더 좋고 나쁜지는 굳이 우열을 가릴 필요는 없다. 그저 묵묵히 무대에 올라 자신만의 에너지를 발산하면 되는 것이다.


우열을 가릴 필요는 없지만 숫자는 한 번 따져보고 싶다. 숫자는 확실히 필자의 무대가 압도적이다. ? 전국방방곡곡에 있는 숲길이 다 필자의 무대니까.

 

 



* 백사실계곡





백사실계곡 역사트레킹

 

1. IN: 부암동

2. OUT: 성북동

3. 세부코스: 세검정 백사실계곡 능금마을 북악산팔각정 성북동

4. 이동거리: 7km

5. 예상시간: 3시간 30

 

 


* 백사실계곡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북향의 한용운 집... '돌집' 증오 때문이다 2부

[북악산 역사트레킹 2편] 역사 의미 생각하며 걷는 길

 

 

 

 

 

 

 

 

* 북한산: 북악산 팔각정에서 북한산 보현봉 쪽을 바라본 모습

 

 

 

 


일명 북악스카이웨이로 불리는 북악로는 1968년 9월에 완공됐다. 이 도로는 그해 1월 21일에 있었던 청와대 습격 사건(일명 김신조 사건)의 여파로 만들어졌다. 서울방어와 관광목적으로 개통된 것이다.

무장공비에 의한 청와대 습격이라는 엄청난 사건의 여파로 만들어졌지만 이 도로는 관광용으로 더 많이 애용됐다. 도로 정상부에 북악산 팔각정이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면 서울을 한 눈에 다 내려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사산(인왕, 낙산, 남산, 북악)은 물론 멀리 관악산과 아차산 등 외사산도 볼 수 있다.

 


북악산 팔각정은 석양이 질 무렵이 가장 낭만적이다. 뒤쪽 북한산 서편으로 펼쳐진 붉은 노을을 감상한 후에 앞쪽으로 이동해 서울의 야경을 보는 것이다. 노을도 감상하고, 뒤이어 야경도 감상하는 것이다.

이렇듯 자연과 도시의 낭만을 동시에 품고 있는 북악스카이웨이는 1960~1970년대 신혼여행지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당시에는 택시를 타고 북악스카이웨이나 남산을 한 바퀴 도는 것이 신혼여행의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해외여행이 흔한 일상이 된 요즘과 비교해보면 정말 격세지감이다.

북악산 산책로는 서울성곽 북악산 구간과는 좀 다르다. 서울성곽 북악산 구간이 동서로 이어졌다면 산책로는 남북으로 연결된다. 성곽 구간을 포함하여 북악산 일대는 안보상의 이유로 출입이 통제된 뒤 2006년 이후 일반인들에게 개방됐다.

 

 

 

 


 

 
▲ 뮤지컬 심우 만해 한용운의 일대기를 다룬 뮤지컬 <심우>. 만해 선생이 지은 심우장에서 공연되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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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이 싫어한 '돌집'은 사라졌지만...


성북동으로 내려온 역사트레킹 팀은 마지막 탐방지인 심우장으로 향했다. 심우장은 만해 한용운 선생의 생가다. 그곳에 도착하니 마침 <심우>라는 야외뮤지컬이 공연되고 있었다. 조선 독립을 염원한 한용운 선생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이었다. 담장 너머로 본 공연이었지만 나름대로 흥미로웠다. 야외에서 뮤지컬 보는 게 쉬운 게 아니니까.

잘 알려졌다시피 심우장은 남향으로 집을 짓지 않았다. 남향으로 하면 '돌집'을 봐야하기에 일부러 북향으로 집을 지었던 것이다. 그 '돌집'은 조선총독부다. 조선총독부가 얼마나 보기 싫었으면, 집짓기의 기본까지 어겨가며 그렇게 하셨을까?

만해선생이 그렇게 보기 싫어했던 '돌집', 그 조선총독부는 이 땅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 곳에서 뿌려놓았던 식민 잔재들까지 이 땅에서 사라졌을까? 식민지근대화론이 끊임없이 생산되고, 그 이론을 충실히 따르는 이들이 역사교과서를 집필하는 지금의 현실을, 만해 선생께서는 어떻게 바라보실까?  

 

 

* 도움말

1. 북악산 역사트레킹 코스: 홍지문 - 석파랑 - 세검정 - 백사실 계곡 - 이항복 별서터 - 능금마을 - 북악산팔각정(북악스카이웨이) - 북악산산책로 - 한용운 생가(심우장)

2. 약 6km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탐방할 것들이 많아 3시간 이상 소요될 것으로 보임.

3. 시작점: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로 나옴. 버스정류장에서 세검정 방면 버스에 탑승한 후 상명대에서 하차. 버스 이동 시간 약 10분 내외.

4. 종료점: 심우장이 있는 성북동에서 종료한 후, 지하철 4호선 한성대역으로 이동. 버스 이동 시간 약 5분 내외.

5. 이 코스는 지도상으로만 존재한다. 따로 표식이 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길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다면 지도검색으로 탐방지들을 찾아갈 수 있다.

 

 

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북향의 한용운 집... '돌집' 증오 때문이다 1부

 

[북악산 역사트레킹 2편] 역사 의미 생각하며 걷는 길

 

14.10.19 20:38 최종 업데이트 14.10.19 20:38

 

 

 

 

 

 

 
▲ 백사실 계곡 백사실 계곡.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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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 역사트레킹 1편 읽기]

 

 


 

사실 '홍지문 - 석파랑 - 세검정' 구간은 재미가 없다. 모두 다 대로변에 위치해 있어 자동차들의 소음을 들으며 탐방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사실 계곡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진짜 트레킹을 하는 맛이 난다.


백사실 계곡에 들어서면 이전까지 들리던 소음은 사라지고 울창한 숲길이 탐방객들을 반긴다. 백사실 계곡은 서울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도롱뇽 서식지다. 수질이 맑다는 뜻이다. 그만큼 청정하기 때문인지 멧돼지도 가끔 출몰하나 보다. 멧돼지를 조심하라는 현수막이 눈에 띄었으니까.

사실 백사실 계곡은 실개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수량이 적다. 필자는 이곳을 여러번 방문했지만 계곡다운 면모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백사실 계곡을 방문하고 실망한 분들도 많다고 한다. 대성동이나 천불동 계곡까지는 아니더라도, 물줄기가 시원하게 흘러나가는 모습을 기대하고 오신 분들에게는 분명 아쉬울 듯하다.

 


그런 아쉬움은 계곡 입구에 있는 현통사 앞, 너럭바위에 앉아 주위풍광을 둘러보면서 씻어버릴 수 있다. 전면으로는 인왕산이 보이고 뒤쪽으로는 울창한 숲길이 펼쳐져 있으니 아쉬움은 그대로 남겨두고 가볍게 숲길 걷기를 할 수 있으니까.

백사실 계곡의 숨은 매력은 울창한 숲길이다. 서울 종로에 이렇게 걷기 편한 숲길이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다. 산책로도 잘 정비되어 있고, 벤치도 여러개 갖춰져 데이트 코스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 백석동천 이항복 별서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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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대감 이항복과 백사실 계곡

 

그렇게 숲길 안쪽으로 걷다보면 백사 이항복의 별서터가 보인다. 숲길 한편에 자리잡은 별서터는 현재 기단석만이 남아 있다. 그 기단석과 바로 옆쪽에 있는 연못자리로 그 옛날 별장의 풍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전편에서도 언급했듯이 종로구 부암동 일대는 예로부터 많은 이들이 즐겨 찾았던 명승지였다. 그래서 세검정, 석파정 등 이름난 정자와 별장이 지어졌고, 그곳에서 많은 이들이 풍류를 즐겼다. 이항복의 별서터가 있는 백사실 계곡도 부암동에 있으니 이항복도 그 풍류객 대열에 합류했던 셈이다.

별서터에서 조금만 걷다보면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고 새겨진 바위를 볼 수 있다. '백석'은 '백악'을 뜻한다. 북악산을 예전에는 백악산이라고 불렀다. '동천'은 산천으로 둘러싸인, 풍광이 수려한 곳을 말한다. 한마디로 백석동천은 '북악산에 있는 풍광이 수려한 골짜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편 백사실 계곡의 '백사'는 이항복의 호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전편에서 언급했듯이 백사실 계곡 인근에 있는 세검정은 광해군과 관련이 있는 많은 곳이다. 인조반정을 획책한 이귀, 김류 등이 반정을 획책하고 칼을 씻었다고 해서 세검정(洗劍亭)이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항복도 광해군과 관련이 많은 인물이다.


 


 

 
▲ 이항복 별서터 이항복 별서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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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대감으로 더 잘 알려진 이항복은 한음 이덕형과의 재기 넘치는 일화로 유명한 인물이다. 임진왜란 중에 다섯 번이나 병조판서에 오를 만큼 이항복은 선조의 신임을 받았다. 이항복이 당쟁에 물들지 않고, 초연하게 자신의 맡은 임무를 충실히 해냈기에 이런 신임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항복은 이덕형을 명나라에 급파하여 원군 파병을 요청하기도 했다. 또한 조선이 왜와 함께 명나라를 치려고 한다는 오해가 생기자, 그 자신이 직접 명나라에 가 오해를 풀고 오기도 했다. 이렇듯 이항복은 외교적으로도 뛰어난 업적을 쌓았다.

관료로서 업적도 뛰었지만 오성대감의 진면목은 의리다, 의리! 전란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즈음, 대북파로 분류됐던 문홍도가 휴전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유성룡을 탄핵했다. 그러자 오성대감은 자신도 그 의견에 동조를 했다며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난다. 이후 영의정이었던 1600년에는 기축옥사(1589년)와 관련하여 성혼을 변호하다가 반대파들에게 정철 비호자로 몰렸고, 그래서 또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난다.

 

이렇듯 의리가 강했던 그는 인목대비 폐위(1617년)에 대해서도 반대하다 삭탈관직을 당한다. 그리고 다음해인 1618년에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돼 그곳에서 세상과 작별하고 만다. 오성대감이 그렇게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난 5년 뒤, 광해군도 인조반정에 의해 퇴위당하고 유배길에 오르고 만다. 그러다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세상을 떠난다.

호젓하게 숲길트레킹을 하며, 오성대감을 떠올려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자신의 말을 손바닥 뒤집듯 간단하게 뒤집어 버리는 정치인들, 그들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를 오성대감이 사랑한 백석동천을 거닐며 날려버리는 것이다.

이렇듯 광해군과 연관된 유적지가 두 곳이나 있는 부암동 일대를 뒤로 하고, 역사트레킹 팀은 북악산 산책로로 이동을 했다.

 

 

 

 

 

 

 


 

 

 

서울 도보여행, 이렇게 걸으면 즐거움 커진다  2부

[북악산 역사트레킹 1편] 역사 알면 서울이 달라 보입니다

 

 

* 홍지문

 

 

 

 

 

---> 전편에 이어서

 

 

 

상처(?)가 많은 홍지문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이었다. 성벽이 숨을 골랐던 자리에 홍지문이 들어선 것이다. 그래서 홍지문 옆에는 홍제천이 흐를 수 있도록 수문 5개가 함께 세워져 있다.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이라고 불리는 이 수문은 홍예형(무지개)으로 이루어져 있다.

홍지문(弘智門)은 상처(?)가 많은 문이다. 사람들이 자꾸 4대문 중 북쪽에 있는 문으로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역사트레킹 팀에도 그렇게 오해를 한 참가자가 있었다.


"이 근처에 북대문이 있다고 하던데... 이게 그 북대문이에요? "

 


아니다. 홍지문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탕춘대성이라는 보조성의 성문이다. '북대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북쪽의 대문은 서울성곽 북악산 구간에 있는 숙정문(肅靖門)이다. 4대문에 붙여진 인의예지(仁義禮智) 중 북쪽에 해당되는 '智'가 홍지문(弘智門)에 붙여져 그런 오해가 있는 것 같다.


홍지문은 그런 명칭의 혼용 같은 내적상처 뿐 아니라 외적상처도 있다. 성곽 일부가 잘려나간 것이다. 홍지문 바로 옆으로 세검정로가 놓여 있는데 성곽 일부를 잘라서 도로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홍지문은 자동차들의 매연과 소음이 끊임없이 진동하는 곳이다. 문화재가 자동차들에 의해 압도당하는 느낌이 든다.

그보다 더 큰 상처도 있었다. 1921년 대홍수로 아주 싹 쓸려 내려간 것이다. 옆에 있는 오간대수문도 그때 싹 쓸려 내려갔다. 지금의 홍지문은 1977년에 복원한 것이다. 대홍수 이후 방치되어오다 약 반세기 만에 복원을 한 것이다.

이렇게 상처 많은 홍지문이지만 그곳 일대를 탐방하다보면 서울성곽과 북한산성이 어떻게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는지를 관찰할 수 있다. 가파른 경사에 축조된 성곽이 어떻게 방어기지 역할을 했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는 말이다. 평소에는 수풀이 우거져 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가을이 되면 성벽과 오색단풍이 어우러져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할 것이다.

 

 

 

 

 
▲ 석파랑 흥선대원군의 별서 사랑채였다. 전통한옥과 중국풍이 어우러진 건축양식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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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검정(洗劍亭)보다 고향집 팔각정이 더 낫다?


 

역사트레킹 팀은 다음 탐방지인 석파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석파랑(石坡廊)은 석파정(石坡亭)에서 옮겨져 온 것인데 흥선대원군의 별서 사랑채였다. 석파정은 대원군이 사랑한 별장이었다고 한다. 현재 요릿집으로 쓰이고 있는 석파랑은 벽에 둥근 만월창을 내는 듯, 전통한옥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전통 방식과 중국식 양식이 조화를 이룬 건축기법이다.


석파랑에서 조금만 이동을 하면 세검정이 나온다. 세검정은 '칼을 씻었다(洗劍)'는 의미인데 광해군과 관련이 있는 곳이다. 광해군을 몰아내고자, 인조반정을 획책한 이귀, 김류 등이 칼을 갈아 씻었다고 해서 세검정(洗劍亭)이라고 명명됐기 때문이다.


석파정과 세검정에서 보듯, 이 일대(종로구 부암동)는 예부터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명승지였다.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이 주위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고 사천이라 불렸던 홍제천이 너럭바위 위를 유유히 흐르고 있으니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데 안성맞춤이었던 셈이다. 다산 정약용과 겸재 정선도 그렇게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린 이들이었다. 다산 선생은 <유세검정(遊洗劍亭)>이란 시를 지었고, 겸재 선생은 <세검정도>라는 부채 그림을 그려 세검정을 칭송했다.

 

 

 

 
▲ 세검정 세검정과 사천으로 불렸던 홍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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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세검정은 1977년에 지어졌다. 1941년에 인근에 있던 종이공장에서 화재가 났는데 불이 옮겨 붙어 주춧돌만 남기고 완전히 소실됐다, 36년 만에 복원된 것이다. 겸재 선생의 부채 그림을 많이 참조하여 복원됐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차이가 크다고 한다. 필자가 봐도 복원된 세검정과 겸재 선생의 그림 속의 세검정은 닮아 있지 않았다. 현재의 세검정은, 얼핏 보면 그냥 평범한 동네 정자로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참가자 중 한 분이 혼잣말로 이렇게 속삭였다.

"고향 마을회관에 있는 팔각정이 더 좋아 보이는데..." 
 


부채에 그려진 수려한 주위풍광은 되돌릴 없겠지만 문화재 복원만큼은 보다 더 정교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 문제는 앞서 언급한 홍지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숭례문 복원에서 보듯 부실하게 문화재를 복원하면 안 하는 것만도 못한 일이 된다. 특히 답사여행을 하는 사람들 앞에 놓인 것이 '불량 복원품'이라면, 그 답사여행자들은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필자 같이 자신의 두 발로 역사트레킹을 하는 사람들은 더 크게 허탈함을 느낄 것이다.

문화재 복원에 대한 의문 혹은 아쉬움을 품고, 트레킹 팀은 이항복 별서터가 있는 백사실계곡 쪽으로 향했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서울 도보여행, 이렇게 걸으면 즐거움 커진다  1부

 

[북악산 역사트레킹 1편] 역사 알면 서울이 달라 보입니다

 

14.10.17 19:50 최종 업데이트 14.10.17 19:50

 

 

 

 

 

 

 

 
▲ 북악산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 휴식터에서 북한산을 보고 있는 트레킹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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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의 장점은 텍스트상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텍스트 안에서는 읽어낼 수 없는 지식들이 답사를 통해서 체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성곽같은 축조물들은 해당 유적과 함께 주위 사방의 지형을 함께 둘러보아야 그 진면목을 명쾌하게 인지할 수 있다.

가파른 산줄기를 타고 내려온 성곽이 어떤 방면의 방어를 위해 축조되었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탐방자는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가 적들의 예상 침입로를 짐작해보고, 해당 성곽이 그 침입을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게 축조됐는지 나름대로 '워게임 시뮬레이션'을 돌려볼 수도 있다.

 


이런 과정들은 역사교과서나 위성지도 같은 텍스트로는 구현할 수 없는 것들이다. 현장에 가서 직접 눈으로 확인을 해야 가능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답사여행은 '현장에 답이 있다'라는 격언을 가장 잘 실천하는 행위인 듯싶다.

지난 10월 4일, 그런 격언을 실천하기 위해 필자는 배낭을 꾸렸다. 바로 북악산 역사트레킹을 하기 위해서다. 물론 북악산만 탐방하려고 나선 것은 아니다. 세검정 일대와 반대편인 성북동까지 두루 탐방하기 위해서 역사트레킹에 나선 것이다. 코스는 다음과 같다.

 


홍지문  석파랑  세검정  백사실 계곡  이항복 별서터  능금마을  북악산팔각정(북악스카이웨이)  북악산산책로 ▶

한용운 생가(심우장)

 

 



 

 

 
▲ 홍지문 홍지문과 오간대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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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과 북한산성, 그리고 탕춘대성

 


북악산 역사트레킹은 상명대 옆쪽에 자리잡은 홍지문(弘智門)에서부터 시작한다. 서울에는 큰 성곽이 두 개가 있다. 일명 서울성곽이라고 불리는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이 바로 그것이다. 서울성곽은 북악산을 기점으로 동쪽의 낙산, 서쪽 인왕산, 남쪽 남산을 둘러쌓아 축조한 것이다. 이 네 개의 산은 내사산이라 불린다. 안쪽에 있는 네 개의 산이란 뜻이다.

서울성곽이 도읍 방어의 최후의 보루였다면, 북한산성은 도성 방어의 전초기지라고 불릴 수 있다. 북한산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손꼽히는 요충지였다. 이 일대를 차지하기 위해 삼국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고려시대에도 여러차례 북한산에 있는 산성을 수리·축조했다. 그만큼 북한산 일대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방어 거점이었던 것이다.

 


현재의 북한산성은 조선 숙종 시기에 축조된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혹독하게 치룬 조선은 국방력 강화와 도성 방어에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리하여 1704년(숙종 30)부터 1710년까지 도성 성곽을 재정비했다.

또한 다음해인 1711년에는 북한산성을 축조하게 됐다. 약 8km 달하는 북한산성은 기공에서 완공까지 6개월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 규모에 비해 무척 빨리 축조된 것인데 청나라에게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공사를 서둘러 완료시켰다고 한다. 당시 조선은 병자호란 강화조약에 의해 성의 축조와 수축에 큰 제약을 받고 있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서울성곽은 내사산을 둘러 만든 성이다. 북한산성은 북한산에 있는 성이고. 그래서 두 성곽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두 성곽 사이가 좀 '붕 떠있다'고 할 수 있다. 그 간극을 메꾸기 위해 보조성이 축성됐는데 그것이 바로 탕춘대성(湯春大城)이다. 성이 세워진 세검정 부근에 탕춘대(湯春大)가 있다하여 그렇게 명명된 것이다.

도성과 북한산성을 약 4km에 걸쳐 연결한 탕춘대성도 1719년, 조선 숙종 시기에 만들어졌다. 인왕산에서 가파르게 내려온 성벽은 홍제천(사천)에서 잠시 숨을 고르다 다시 북한산 쪽으로 숨 가쁘게 비탈을 탄다. 그러다 북한산 서남쪽 비봉 인근에서 북한산성과 합류된다. 북한산 비봉은 진흥왕 순수비(555년 건립)가 있던 곳이다.

 

 

 

 
▲ 홍지문 홍지문 바로 옆에는 도로가 있다. 탕춘대성의 일부를 잘라 도로로 만든 것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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