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리다성: 레리다성을 배경으로 현지인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아서 카메라에 담아보았다.

 

 

 

<재미난 스페인 10편> 스페인이지만 스페인이 아니다?

카탈루냐의 정체성 2부

 

스페인 동부 카탈루냐 지방의 예이다(Lleida)라는 도시를 방문했다. 예이다는 카탈루냐어 표기이고, 스페인어로는 레리다(Lérida)로 불리는데 바르셀로나에서 서쪽으로 약 160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다.

아릿따운 현지인 처자들이 고풍스러운 성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화려한 분위기가 풍기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오래된 건축물과 어우러져 마치 여신을 보는 듯했다. 그냥 지나갈 필자가 아니었다. 그녀들의 사진을 찍어주며 말을 걸었다.

“저 성이 예뻐요. 당신들도 예뻐요!”

수다성(Castle of the Suda), 혹은 왕성(Castle of the King)이라고 불리는 성이었는데 이곳은 주위를 압도할 정도로 웅장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렇게 멋진 성이지만 곳곳에 역사의 상처들이 흉터처럼 남아 있었다. 특히 수다성은 1700년대 초반에 있었던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의 참화가 직접적으로 들이닥친 곳이다. 당시 카스티야에서 분리독립을 원했던 카탈루냐 사람들은 수다성을 근거지로 삼아 항쟁에 나섰다. 하지만 성은 함락됐고, 카탈루냐는 자치권이 박탈되어 스페인에 병합된다.

전편에 이어서 카탈루냐의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됐는지 알아보자. 이전 편에서는 바르셀로나 백작령의 탄생, 아라곤 왕국의 건국과 아라곤 연합왕국으로의 발전 등 내재적인 요소에 방점이 찍혔다. 이번 편에서는 카탈루냐 반란과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이라는 대내외적인 항쟁을 중심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 아라곤 휘장

 

 

 

1640년에 카탈루냐에서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반란을 일으킨다. 일명 ‘카탈루냐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당시 전 유럽은 종교전쟁이라고 불리는 30년 전쟁(1618~1648년)의 수렁에 빠져 있었다. 스페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구교인 가톨릭편에 선 스페인은 신교측에 선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프랑스도 만만치 않은 가톨릭 국가인데 왜 신교측에 서냐 이 말이다.

부르봉 VS 합스부르크

이 도식 안에 해답이 있다. 당시 부르봉 가문의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가문들이 지배하는 나라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다. 동쪽으로는 신성로마제국, 남쪽으로는 스페인이 프랑스를 압박하는 형국이었다.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왕국들의 포위망을 벗어나야 했기에 신교측을 지지하며 전쟁에 나서게 된다.

이때 프랑스 국경과 인접한 카탈루냐 지방에 많은 부역이 부과됐는데 카탈루냐인들은 이에 반감이 거셌다. 이에 카탈루냐인들은 스페인 왕실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고, 반대로 프랑스의 루이 13세에게는 도움을 청하게 된다. 프랑스-카탈루냐 연합군이 조직된 것이다.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인해 마침내 30년 전쟁은 마무리됐다. 하지만 스페인과 프랑스는 베스트팔렌조약 이후로도 전쟁을 계속했다. 한편 카탈루냐인들은 프랑스 군대에 대해서 불만을 갖게 됐다. 나중에는 스페인 왕실보다 더 지긋지긋해 했다. 1652년, 이런 갈등을 틈타 카스티야의 펠리페 4세는 바르셀로나를 공격했다. 카탈루냐인들은 펠리페 4세를 왕으로 섬기기로 했고, 펠리페 4세는 카탈루냐에 자치를 약속한다.

스페인-프랑스 사이의 전쟁은 1659년, 피레네조약에 의해 마침표를 찍는다. 피레네조약으로 인해 스페인은 로세욘(Roussillon)과 세르다냐(Cerdanya) 일부 등을 프랑스에게 넘기게 된다. 이곳들은 피레네 산맥에 있는 북부 카탈루냐 지역이다. 카탈루냐는 피레네조약으로 인해 북부 권역을 프랑스에 빼앗긴 셈이다.

 

 

 

* 페르피냥 르 카스티예탑: 페르피냥은 프랑스 남동부에 있는 도시로 북부 카탈루냐권에 속한 도시다. 1659년, 스페인과 프랑스가 맺은 피레네조약 이후로 프랑스 영토가 된다. 르 카스티예탑은 14세기 경에 성문시설로 만들어졌는데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한편, 1640년에 또 다른 반란도 있었다. 바로 포르투갈의 반란이다. 포르투갈은 1580년에 자치를 조건으로 스페인에 병합되는데 당시 스페인 왕인 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 왕위를 겸임하게 된다. 60년간 이어진, 스페인-포르투갈의 이베리아 연합(Unión ibérica)이 결성된 것이다.

처음에는 포르투갈의 기존 체제가 존중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포르투갈은 주기만 하는 존재가 됐고, 이에 신물이 난 포르투갈의 귀족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됐다. 1640년, 브라간사 공작이 주앙 4세로 등극하여 포르투갈 왕이 된 것이다. 스페인은 30년 전쟁에 온 정신이 쏠려있던 터라 반란을 효과적으로 진압할 수 없었다. 결국 이 전쟁은 무려 28년 동안 지속됐고, 1668년 리스본 조약에 의해 종결지어진다.

17세기를 넘어 18세기가 됐다. 1700년 11월이었다. 합스부르크가 혈통인 스페인왕 카를로스 2세가 사망한다. 카를로스 2세는 근친혼의 피해자(?)였는데 어려서부터 육체적, 정신적으로 너무나 병약했다. 국정운영도 당연히 제대로 되지 않았다. 탐욕스러운 정치인들의 꼭두각시가 됐고, ‘백치왕’이라는 별명까지 붙게 됐다.

자식이 없이 죽은 카를로스 2세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Felipe de Anjou)공 펠리페에게 왕위를 넘긴다는 유언을 남긴다. 루이 14세가 그의 매형이었기에 가능한 유언이었다. 절대왕정을 이룩한 루이 14세의 혈통이, 프랑스의 부르봉 가문이 스페인의 국왕까지 겸할 태세였다. 이를 그냥 바라만 보고 있을 합스부르크 가문이 아니었다. 카를 대공이 왕위 계승권을 요구했는데 그는 당시 오스트리아 레오폴트 황제의 아들이었다. 레오폴트 황제도 카를로스 2세의 매형이었기에 그런 요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앙주공은 즉위를 하여 마드리드로 입성을 하고, 펠리페 5세가 된다. 이에 유럽 주요국들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왕국이 등장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며 합스부르크 세력을 지지하게 된다. 또 이런 도식이 등장하게 됐다.

부르봉 VS 합스부르크

1701년, 결국 터질 게 터졌다. 부르봉 왕조로 엮인 스페인, 프랑스 군대에 대항하여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제국을 비롯해 합스부르크를 지지하는 영국,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의 국가들이 서로 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를 두고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1701~1714년)’이라고 부른다.

그럼 카탈루냐는 어떤 세력을 지지했을까?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를 지지하게 된다. 마드리드가 속한 카스티야 지방과는 다른 선택이었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전쟁이 이어지다, 1713년에 위트레흐트 조약이 체결되어 국가들 간의 전쟁은 종결이 된다. 이 조약으로 인해 펠리페 5세는 프랑스 왕위를 겸임하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 레리다성: 수다성이라고도 불리는 레리다성. 레리다성은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의 주요 전장 중 한 곳이었다. 레디다는 카탈루냐 서부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카탈루냐 지방에서는 화약 냄새가 계속해서 퍼져나가고 있었다. 국가간의 전쟁은 종료가 됐지만 카탈루냐는 계속해서 합스부르크가를 지지하고 있었다. 이에 펠리페 5세는 바르셀로나를 함락시키고, 카탈루냐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스페인 왕위전쟁의 여파는 카탈루냐인들에게는 치명타와 같았다. 독자적인 제도와 권한을 중앙정부에 몰수당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카탈루냐어까지 사용이 금지되기에 이른다. 폭넓게 누리고 있었던 자치를 잃어버리고 중앙집권체제로 종속된 것이다. 이 부분은 같은 아라곤 연합왕국을 이루고 있던 아라곤 지방, 발렌시아 지방, 마요르카 지방도 마찬가지였다.

참고로 이베리아반도의 최남단에 있는 지브롤터가 영국령이 된 계기도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때문이었다. 지브롤터는 1704년에 영국에 의해 점령됐고, 이후 1713년부터 영국령이 되었다.

카탈루냐 사람들은 자신들이 스페인에 편입된 건 불과 300년 전의 일이라고 말한다. 그 300년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종료 시점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최근 300년을 제외하고는 스페인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고 주장한다. 다른 정체성으로 독자적인 주권을 누렸다는 것이다. 그런 정서는 아직까지도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2017년에 있는 ‘카탈루냐 공화국’ 사건이 그 단적인 예이다.

수다성을 느긋하게 둘러보았다. 더운 여름날이라 땀을 한 바가지 쏟아냈지만 즐겁게 답사를 했다. 역사의 현장을 탐방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너무 더웠다. 시원한 냉커피가 간절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한여름에도 커피는 뜨겁게 마신다. 커피는 얼음 동동 띄운 커피가 제 맛이야!

 

 

* 산타마드로나 성벽(Muralla de Santa Madrona): 바르셀로나를 방어하기 위해 만든 성벽. 구도심에 있다. 산타마드로나 성벽에 있는 산타마드로나 성문.

 

 

 

* 1450년경 이베리아반도: 아직 남쪽에는 이슬람 그라나다 왕국이 존재하고 있다. 그라나다 왕국은 1492년에 멸망하고, 레콘키스타(제정복운동)는 종료된다.

 

 

 

 

* 사라고사: 피에드라 다리에서 바라본 필라르 성모 대성당과 라세오 성당. 피에드라 다리는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다리임. 강 건너 왼쪽이 라세오 성당, 오른쪽이 필라르 성모 대성당임.

 

 

 

<재미난 스페인 9편> 카탈루냐는 스페인이 아니다?

카탈루냐의 정체성 1부

 

이전 글에서도 계속 언급했듯이 카탈루냐 사람들은 자신들이 스페인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역설을 한다. 그들이 말하는 정체성의 시초는 서기 801년, 바르셀로나 백작령에서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711년, 북아프리카에 있던 이슬람 무어인들이 이베리아반도를 침공했고, 서북쪽 일부를 제외한 이베리아반도를 전부 다 차지하게 된다. 이에 그치지 않고 무어인들은 피레네산맥을 넘어 현재의 프랑스 영토까지 욕심을 내게 된다. 당시 프랑스 지역은 프랑크 왕국이 있었고, 메로빙거 왕조가 통치했다.

결국 732년에 프랑크 왕국 중서부에 위치해 있는 투르와 푸아티 지역에서 크게 전투가 벌어졌다. 투르-푸아티 전투에서 프랑크군은 무어인들에게 대승을 거둔다. 이때 사령관이 카를 마르텔이었다. 이후 카를 마르텔의 아들인 피핀이 751년에 메로빙거 왕조를 폐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다. 카롤링거 왕조가 시작된 것이다.

카롤링거 왕조 시기에도 이슬람 세력은 지속적으로 피레네 지역을 위협했다. 계속된 전투 중에 영웅도 출현하고, 그런 영웅을 드높이는 서사시도 탄생하게 된다. 그렇게 나타난 서사시가 바로 <롤랑의 노래>다. ‘롤랑의 노래’는 샤를마뉴의 조카인 롤랑의 영웅담을 담은 중세 유럽의 대표적인 영웅 서사시로 불린다. 실제로 <롤랑의 노래>는 778년, 프랑크 왕국 샤를마뉴의 이베리아 원정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 바르셀로나대성당: 가우디가 설계한 유명한 사그라다 파밀리아와는 다른 성당이다.

 

 

 

8세기가 가고, 9세기로 넘어왔다. 801년 4월이었다. 이 당시도 프랑크 왕국은 샤를마뉴 대제가 통치하고 있었다. 이때 그의 아들 루트비히 1세가 이끄는 군대가 바르셀로나를 점령했다. 바르셀로나는 약 80년간 지속된 이슬람 무어인들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렇듯 피레네산맥과 인접해 있는 이베리아반도 동북쪽, 칸타브리카산맥이 있는 서북쪽은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지 않거나 비교적 짧게 받게 된다.

남부 안달루시아의 그라나다는 이슬람 세력의 마지막 수도였으니, 700년 이상 아랍의 영향을 받게 된다. 몇백 년 동안 지배를 받은 곳과 불과 몇십 년 정도만 받은 곳은 차이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 이슬람 통치 기간의 차이도 카탈루냐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바르셀로나를 위시한 카탈루냐 일대는 프랑크 왕국의 변경 지역이 되었다. 이 변경 지방을 방위하기 위해 베라라는 사람이 바르셀로나 백작으로 임명되었다. 이것이 바로 바르셀로나 백작령이라고 불리는 에스파냐 변경령의 시초다. 이런 역사적 형성과정이 있었기에 바르셀로나 백작령은 프랑크 왕국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카탈루냐어가 프랑스어와 유사한 점이 많은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카롤링거 왕조는 바르셀로나 이외에도 여러 곳에 백작령을 두었다. 백작령들은 피레네산맥을 중심으로 남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곳들이 이슬람 군대의 북상을 막아주는 완충지 역할을 했다. 프랑스 본토에 대한 이슬람 군대들의 직접적인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방패막이가 필요했던 것이다.

프랑크 왕국 입장에서 보자면 에스파냐 변경령은 말 그대로 변방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정치군사적인 영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백작령들은 본국과는 다른 정체성을 함양해 나갔다. 백작령들은 카롤링거 왕조가 쇠퇴하고, 더 나아가 멸망했던 10세기경에는 예속관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주권을 행사하기에 이른다.

이런 백작령들 중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건 바르셀로나 백작령이었다. 다른 백작령들을 병합해나가며 우두머리 역할을 자임하게 된다. 이에 따라 바르셀로나는 중심지로 우뚝서게 되고, 카탈루냐 정체성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다.

 

 

 

* 필라르성모 대성당: 사라고사에 있는 필라르성모 대성당. 앞에 보이는 강이 에브로강이다. 사라고사는 아라곤 연합왕국의 수도였다.

 

 

 

이베리아반도 북부에 하카(Jaca)라는 도시가 있다. 피레네산맥의 아랫동네라 주위 풍광이 수려한 곳이다. 1035년, 이곳 하카에서 아라곤 왕국이 탄생했다. 아라곤 왕국의 초대왕인 라미로 1세(Ramiro I)는 이웃 나라인 팜플로나 왕국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팜플로나 왕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안초 3세(Antso III)였다.

안초 3세가 죽자 그의 아들들이 각각의 영지를 물려받는데 라미로 1세는 아라곤 백작령을 상속받게 됐다. 이에 라미로 1세는 백작 신분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왕을 자처하게 된다. 이때가 1035년이었다. 참고로 팜플로나 왕국은 12세기에 나바라 왕국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하카의 중심지 뒤로는 피레네산맥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데 방어에 이점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대외로 진출하기에는 제약이 많은 지형이다. 필자가 하카 시내를 직접 방문한 후에 느낀 소감이다. 그래서인지 아라곤 왕국은 이후 우에스카(1096년), 사라고사(1118년)로 잇달아 천도하게 된다. 특히 사라고사는 평원지대로 에브로강이라는 큰 강을 끼고 있는 도시다.

 

 

 

* 팜플로나성: 팜플로나 왕국의 아라곤 백작령이 아라곤 왕국의 시초였다.

 

 

 

하카나 우에스카보다는 훨씬 더 개방적인 공간에 위치해 있다. 현재 사라고사(Zaragoza)는 스페인 5대 도시에 속할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참고로 스페인어로 ‘j’는 ‘ㅎ’로 발음되서 하카가 되고, ‘z’는 ‘ㅅ’로 발음되어 사라고사가 됐다.

작은 소국에서 시작한 아라곤 왕국은 1137년에 아라곤 연합왕국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당시 바르셀로나 백작령을 통치하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는 아라곤 왕국의 왕위 계승자인 페트로닐라와 약혼한다. 당시 페트로닐라는 1살이었다. 누가봐도 정략적인 혼인동맹이다. 실제 결혼은 1150년, 페트로닐라가 14살이 되던 해에 행해진다.

연합 당시에 아라곤보다는 바르셀로나가 더 부유했지만 왕국의 명칭은 아라곤으로 정해진다. 아라곤 연합왕국은 중앙집권적인 정치 체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바르셀로나 백작령이 위치했던 까탈루냐 지방의 정치와 행정은 독자적으로 운영됐고, 14세기 이후로는 카탈루냐 왕자령(principado de Cataluña)으로 불리게 된다.

 

 

 

* 하카성: 하카는 아라곤 지방 북부에 위치한 도시다. 하카에는 산 페드로성이라고도 불리는 하카성이 있다. 하카는 아라곤 왕국의 초기 시대 수도였는데 피레네산맥 아래에 위치해 있어 방어에 용이했다. 사진 오른쪽에도 피레네산맥이 보인다.

 

 

 

이베리아반도 중앙에 카스티야 왕국이 버티고 있어서일까? 아라곤 연합왕국은 지중해로 눈길을 돌렸다. 하나하나 영토를 늘려갔는데 15세기 중반에는 그 범위가 지중해 전체에 이를 정도로 큰 해상왕국을 이루었다. 명실상부한 유럽의 강대국으로 등극한 것이다.

711년부터 700년 넘게 이어져 온 레콩키스타(reconquista)라고 불리는 국토회복운동이 드디어 1492년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무어인들이 물러간 것이다. 레콩키스타의 마침표를 찍은 주역들이 있었는데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이사벨 1세 여왕과 아라곤 연합왕국의 페르난도 2세였다. 두 사람은 1469년 결혼을 했고, 두 왕국은 공동왕국을 이루게 됐다. 국토회복운동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공로로 그들은 교황 알렉산더 6세로부터 ‘가톨릭 공동왕’이라는 칭호를 선사 받게 됐다.

 

 

 

* 이베리아반도지도: 13세기 초반 지도이다. 당시 남쪽은 이슬람 알모아데족이 차지하고 있었다. 동쪽 카탈루냐 지방을 보면 현재의 스페인-프랑스 국경과는 다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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