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작가’라는 명칭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글을 참 늦게 쓴다. 그래서인지 아직까지 본인 이름 걸고 쓴 책다운 책이 없다. 물론 글을 빨리 쓴다고 좋은 건 아니다. 속필이 명필이 되는 경우는 흔하지가 않으니까. 그 느릿느릿한 글쓰기는 필자의 성격과 닮아 있다. 느긋한 문장에서는 빠릿빠릿함보다는 게으름이 잔뜩 묻어있다. 오후의 햇살 아래에서 배 쭉 깔고 단 잠에 빠져있는 누렁이의 모습이 그려진다.

 

하지만 필자는 의외로 꼼꼼하다는 소리도 많이 듣는다. 역사트레킹을 진행하려면 생각보다는 많은 지식이 필요로 한다. 그래서 지식노트를 만들었는데 우연하게 그 노트를 본 참가자 분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셨다.

 

“보기와는 다르게 참 꼼꼼하세요.”

 

사실 그런 꼼꼼함은 필자의 방어 기재다. 외부의 공격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에서 꼼꼼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완벽주의. 그렇게 완벽주의에 물들어 있다 보니 삶이 진도가 안 나간다. 살다보면 앞뒤 안 재고, 확 치고 나갈 때도 분명 필요하다.

 

본성이 게으른데 완벽주의에까지 물들어 있으니 글을 빨리 못 쓰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다른 곳에 있다. 필자는 완벽주의자가 아니다. 완벽주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 완벽주의에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탈이 날 수밖에 없지!

 

 

 

 

 

 

* 정약용 선생 상

 

 

 

 

 

 

 

● 트레킹 강의명도 ‘섹시한 제목’이 필요하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이 역사트레킹도 제목을 잘 지어야한다. 눈에 확 띄는 ‘섹시한’ 제목으로 나가야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문화센터에서 트레킹 강의를 진행하는데 매학기 마다 제목 짓는 걸로 골머리를 썩어야했다.

 

수많은 쟁쟁한 강의들 사이에서 필자의 강의를 ‘잘 팔기’ 위해서는 제목으로 승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얼토당토않은 내용을 끌어다 쓸 수는 없었다. 내용성과 완전히 어긋나는 제목은 욕먹기 ‘딱’이기 때문이다.

 

“제 강의 커리큘럼 중에 가장 눈에 띄는 네이밍이 있나요?”

 

매학기가 시작할 때마다 저렇게 물어보곤 했다. 그 중에서 단연 이 강의가 수강생들의 눈에 띄었던 것 같다.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이요!”

 

그렇다. 이번에는 경기도 남양주로 가본다.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을 소개한다.

 

 

 

 

 

 

 

* 여유당: 정약용 선생 생가

 

 

 

 

 

 

 

● 2018년은 다산 정약용의 해배 200주년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하기 전에 2018년과 다산 정약용 선생과의 연관성에 대해서 잠시 언급해본다. 시간을 좀 돌려보자. 2018년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지였던 전남 강진에서 해배(解配)된 지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해배’는 유배에서 풀려나는 것을 말한다. 정약용 선생은 1801년 11월에 강진으로 유배를 갔다 1818년 10월에 고향인 마재(현 남양주)로 돌아온다.

 

정약용 선생은 유독 ‘18’이란 숫자와 연관이 많은 분이다. 유배를 18년 동안 당했고, 유배에서 풀려난 후 18년을 더 사신 후에 돌아가셨다. 또 관직 생활도 18년 동안 하셨다.

 

정약용 역사트레킹은 능내역에서부터 시작된다. 능내역은 중앙선에 있던 간이역이었다. 중앙선은 2008년에 복선화가 됐고, 능내역은 더 이상 열차가 서지 않게 됐다. 폐역이 된 것이다. 하지만 능내역은 휴식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간이역의 색깔을 그대로 남겨두어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공간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그런 정취를 쫓아 주말이 되면 많은 이들이 능내역으로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룬다.

 

단선철도 시절, 옛 중앙선의 일일 수송량보다 더 많은 인파가 주말이면 능내역 인근으로 몰려와 트레킹을 하고, 자전거를 타는 것이다. 한결같이 다 즐거운 표정들을 하고서. 그래서인지 어떤 참가자는 이런 말까지했다.

 

“여기는 정말 딴 세상 같아요. 다들 즐거워 보여요.”

 

그런 딴 세상 같은 능내역을 뒤로 하고 트레킹팀은 천주교 성지인 마재성지로 향했다. 마재성지는 능내역에서 도보로 3분 거리에 있지만 그 주변 분위기는 능내역과는 완전히 다르다. 무척 차분했다. 성지는 성지였던 것이다.

 

 

 

 

 

 

 

 

* 능내역

 

 

 

 

 

 

 

● 정약종의 생가, 마재성지

 

마재성지는 다산 선생의 셋째형인 정약종의 생가다. 새남터, 절두산, 해미읍성 등등... 일반적인 천주교 성지는 거의가 순교, 즉 신자들의 죽음과 관련된 곳이 대대수지만 마재성지는 한 집안의 살림집이 성지가 된 독특한 사례다.

 

그럼 정약종은 누구인가? <자산어보>를 저술한, 정약용의 둘째형인 정약전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약종이란 이름 석 자는 처음 들어보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정약종은 정약용의 셋째형이었다. 바로 위형이었다. 도교에 심취해있던 정약종은 다른 형제들보다 늦게 천주교에 입문하게 된다. 하지만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진산사건으로 인해 다른 형제들이 천주교를 멀리할 때도 그는 강건하게 신앙을 지켜냈다.

 

1791년(신해년)에 발생한 진산사건은 윤지충이란 사람이 제례를 거부하고 위폐를 불사른 사건을 말하는데 이 사건의 파장으로 다산 선생도 벽파세력에 의해 공격을 받게 된다. 신유박해(1801년) 이후 또다시 피바람을 몰고 왔던, 황사영의 백서(帛書)에도 ‘신해년 박해 이후에 형제나 친구들로서 여전히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나, 정약종만 홀로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였다.

 

그렇듯 정약종의 신앙은 강건했다. 하지만 그런 정약종의 강건한 신앙을 그의 형제들은 환영하지 않았다. 당시 조선의 천주교는 외국 선교사에 의해 포교된 것이 아니라 남인 계열의 선비들이 서학을 토대로 자생적으로 발전시켰다. 기존의 유교적 가치관을 전복시키는 혁명적 도구로 천주신앙을 이용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상의 위폐를 불태운 진산 사건에 반발해 천주교를 떠난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렇게 배교를 한 이들은 조상의 제사도 지내지 않는 천주 교리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정약종이 계속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면 지킬수록 집안 형제들과의 사이는 멀어져갔다. 그래서 나중에는 정약종만 홀로 강 건너 분원리(현 광주시 남종면)에 살게 됐을 정도였다.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가진 정약종은 신유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를 하게 된다.

 

 

 

 

 

 

 

* 마재성지

 

 

 

 

 

 

 

● 정조대왕과 정약용

 

트레킹팀은 다산 정약용 생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산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은 마재성지에서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있다.

 

여기서 잠깐 정약용 선생이 유배를 떠났던 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1799년 당시 시파의 영수였던 체제공이 그해 1월에 서거를 하게 된다. 반대파였던 벽파로서는 체제공의 뒤를 잇는 시파 거물 정치인의 등장을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아야 했다.

 

벽파 입장에서는 누가 가장 위협적으로 보였을까? 정약용이 1순위였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체제공 서거 이후 정약용은 더 많은 모함과 박해를 받게 된다. 하지만 딱히 정약용의 손발을 묶을 방법이 없었다. 그만큼 정약용에게 흠결이 없었다는 것이다.

 

벽파는 꼼수를 쓰기에 이른다. 외곽 때리기를 했던 것이다. 정약용의 흠을 잡는데 실패한 그들은 둘째형인 정약전 때리기에 나섰다. 결국 정약전은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를 지켜본 정약용도 격분하며 고향인 마현(현 능내리)으로 낙향하게 된다.

 

체제공과 정약용이란 ‘원투펀치’가 조정을 떠난 두 달 후, 개혁군주였던 정조는 세상을 떠나게 된다. 정조대왕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은, 임금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크게 스스로를 책망했다고 한다. 그때가 1800년 6월이었다.

 

정조의 승하는 벽파에게는 더할 수 없는 호재였다. 벽파는 기다렸다는 듯이 정조를 따르던 인사들을 축출하게 된다. 1801년 2월에 있은 신유박해가 바로 그런 빌미로 이용됐다.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남인 계열 시파 100여 명이 죽음에 이르게 됐고, 400여 명이 유배길을 떠나야 했다.

 

 

 

 

 

 

 

* 거중기: 다산 생가 앞에 전시되어 있음.

 

 

 

 

 

 

● 신유박해로 유배길에 올라야했던 정약용

 

이때 셋째 정약종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했고,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길에 나서게 된다. 처음 다산의 유배지는 경상도 포항 부근 장기였고, 정약전의 유배지는 전라도 완도 본섬 옆에 있는 신지도였다. 하지만 신유박해 이후, 황사영 백사사건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정약용은 포항보다 더 궁벽한 강진 땅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이배되기에 이른다.

 

한편 강진에서도 다산 선생의 유배지는 고정되지 않았다. 읍내에 있는 주막거리에 거처를 하기도 했고, 자신의 제자의 집에 머물기도 했다. 그러다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만덕산 기슭에 초막을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다산초당이었던 것이다. 다산초당은 다산 선생이 1808년에서부터 해배되던 1818년까지, 10년간 머물렀던 곳이다.

 

그렇게 해배된 이후 다산 선생은 고향인 이 곳 마현으로 다시 오게 됐고,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에서 강진 시절에 마치지 못한 저술 작업에 더욱더 박차를 가하게 된다.

 

“다산 선생은 무려 500여 권의 서책을 저술한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였습니다. 강진에서의 18년 동안, 또 여유당에서의 18년 동안 다산 선생은 묵묵히 저술과 학술작업에 매진하셨습니다. 그런 다산 선생의 뜻을 배우고자 우리는 여기에 온 것입니다.”

 

나름대로 설명을 잘했는지 필자의 말에 환호를 하는 참가자도 있었다. 그래서 내친김에 몇 마디 더 설명을 보탰다.

 

“아참 다산 선생은 40세에 유배됐다가 58세에 여유당으로 오시게 됩니다. 그러다 76세에 돌아가십니다. 그때 기준으로는 무척 장수를 하신 셈이죠.”

 

다산생가를 떠나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한 이후에도 필자는 트레킹팀과 함께 다산 선생과 정조대왕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다. 파란만장한 다산 선생과 그의 형제들의 삶, 참된 목민관이었던 다산 선생의 애민 정신, 개혁군주였던 정조대왕의 일대기 등등... 트레킹의 명칭이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이었던 만큼 다산 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래서인지 참가자 중에 한 분은 집에 가서 다산 선생과 관련된 공부를 해야겠다고 필자에게 슬며시 말을 건넨 분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필자와 같은 사람은 두꺼운 역사책의 머리말을 읽어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도서관이 아닌 아웃도어이지만, 필드에서 트레킹을 하며 사람들을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리딩’하기 때문이겠다.

 

 

 

 

 

 

 

* 다산생태공원

 

 

 

 

 

 

 

 

● 귀에 확 꽂히는 이름,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

 

여유당을 뒤로 한 트레킹팀은 자전거도로 옆에 놓인 인도를 따라 운길산 방면으로 나아갔다. 이 길은 옛 중앙선 철로였다. 중앙선이 복선화되면서 옛날 단선 구간을 리모델링하여 자전거도로와 인도로 변신시킨 것이다. 이 길은 아름다운 한강변을 옆에 끼고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자전거의 위협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는 단점도 있다.

 

무섭게 페달을 밟아대는 일부 자전거족들이 이 구간에 많기에 항상 경각심을 가지고 걸어야한다. 하긴 필자도 예전에 자전거를 탔을 때, 특히 한강변을 달릴 때는 무식하게 페달을 밟았었다. 그래서 이런 소리를 들은 적도 있었다.

 

“자전거 폭주족이냐! 그 고물자전거로 애쓴다 애써!”

 

임진왜란 당시 변응성 장군이 지켰다는 마진산성(터) 탐방을 끝으로 정약용 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된다. 마진산성은 야트막한 산인데 그곳에 올라서면 양수대교를 비롯한 양수리 일대를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다.

 

 

 

 

 

 

 

* 양수대교: 마진산성 터에서 바라본 양수대교. 강 건너편이 양수리다.

 

 

 

 

 

 

 

●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제는 완벽주의의 허울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완벽하지도 않은 인간이 완벽주의로 위장을 하고 있으니 정체성에 혼란만 올 뿐이다. 더군다나 나답게 살기를 원한다면서 자신을 완벽주의로 방어한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리다.

 

이렇게 필자의 허울을 벗겨주시는데 정약용 선생의 역할이 컸다. 무슨 소리인가? 정약용 선생도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배에서 풀려나기 위해 당시 세도가문이었던 안동 김씨 쪽과 접촉했던 것, 제자들 중에 큰 사상가가 나타나지 않은 점 등이 바로 그것이다.

 

민족의 큰 스승인 정약용 선생도 이렇듯 개인적인 흠결이 있었다. 하물며 고만고만한 삶을 살고 있는 필자가 어설픈 완벽주의의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었으니 그저 우스울 따름일 뿐!

 

필자는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쓸 것이다. 느릿느릿하게라도 꾸준히 쓸 것이다. 열심히 쓰다 글이 어느 정도 무루 익으면 과감하게 원고를 출판사에 보낼 것이다. 전에는 완벽한 원고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을 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허울에 빠져있던 예전의 내 자신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싶다.

 

“세상에 완벽한 원고가 있을까? 그렇게 했다가는 평생 책 낼 생각은 하지도 말아야지. 완벽한 원고만 찾다가는 완벽하게 평생 그 자리에만 머물러 있어야 할 걸!”

 

 

 

 

 

 

 

* 다산생태공원: 청명한 가을날의 다산생태공원

 

 

 

 

 

 


 

 

 

 

 

■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

 

1. 코스: 능내역 ▶ 마재성지 ▶ 다산생가(정약용묘) ▶ 다산생태공원 ▶ 마진산성(터)

2. 이동거리: 약 10km

3. 예상시간: 4시간(휴식시간 포함)

4. IN: 팔당역 ☞ 팔당역에서 능내리행 버스 탑승(약 15분간 이동) / OUT: 운길산역

 

 

 

 

 

 

 

 

*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남양주정약용역사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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