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이 쓰려도 여행은 계속된다!___ 1부

 

[중부내륙자전거여행 4] 종북 딱지 붙이기 놀이 그리고 말로만 '안보'

13.12.24 17:42  최종 업데이트 13.12.24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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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우와 자전거 횡성 읍내에서 찍은 사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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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3일째: 8월 17일


전날 119의 도움으로 횡성군 공근면 금계천 일대에서 무사히 캠핑을 할 수 있었다. 그럭저럭 밤을 지새울 수는 있었지만 아침에 일어나니 뱃속에서 신호가 왔다. 그건 아주 쓰라린 신호였다.

"우읍~~~ 꺼억"

 


쓰린 속을 붙잡고 여행을 이어갔다!

뱃속을 부여잡고 텐트에서 한 바퀴 굴렀다. 쓰린 속을 두 손으로 문질러댔다. 위산과다였다. 목구멍에 무언가 턱하니 하고 걸린 느낌 때문에 새벽에 몇 번이나 잠을 야 했다. 서울에서부터 기미가 보이더니만 결국은 수면 위로 올라와 '나이트메어'가 됐던 것이다.

화장실에서는 넉넉히 일을 잘 봤기 때문에 별 일 아니라고 여겼고, 그래서 위장병을 치유하지 않고 그냥 출발을 강행했었다. 하지만 그게 화근이었다. 그저 열심히 페달을 밟으면 장운동이 잘되어 위장도 튼튼해질 줄 알았다. 자전거여행으로 몸을 '치유'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어리석은 짓! 어쭙잖은 자가 진단으로 몸을 막 굴려댔던 것이다. 다리에 무리가 많이 갈 거 같아 그에 맞는 비상약은 준비했지만 위장약은 없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여행이고 뭐가 다 귀찮아졌다.

'이 쓰린 속을 붙잡고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그냥 여기까지만 갔다 남은 구간은 나중에 도보여행으로 채울까?'

이러저런 생각으로 머리는 복잡해졌고 몸은 축 늘어졌다. 한참을 그냥 텐트 속에서 물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쫑 낼 수는 없잖아. 그래 일단 읍내에 가서 약국을 찾아보자. 해볼 건 다 해보고 포기하자고!'

여기서 여행팁이 하나 생긴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장거리 여행을 떠날 때에는 필요한 구급약을 챙겨가야 한다. 진통제, 반창고, 소화제는 필수품목이다. 또 에어파스도 꼭 챙겨야한다. 이 에어파스는 유사시에 호신용 무기로도 쓸 수 있다. 예를 들어 들개들이 공격할 때 안면부에 분사를 하면 위험한 순간을 모면할 수 있다. 후각이 예민한 야생동물을 잠시나마 교란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한 여름이었지만 필자는 핫팩도 하나 가져갔다. 갑자기 산 중에서 폭우를 만나면 체온이 급격히 떨어질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하지만 속쓰림을 다스리는 위장약은 챙기질 못했다. 다른 건 다 있었는데 딱 그것만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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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횡성 성당 횡성성당은 1950년대 지어진 성당이다. 현재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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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맛있는 라면, 피자, 통닭, 삼겹살을 포기하라고요?


"라면, 피자, 통닭, 삼겹살... 등등...  뭐 이렇게 기름진 건 드시지 마시고, 식사는 정기적으로 하세요. 소식으로요."
"라면, 피자, 통닭, 삼겹살... 그거 다 제가 좋아하는 건데요. 그리고 저는 아웃도어 하는 사람이라 밥을 많이 먹어야 되는데..."
"병은 고치셔야죠. 안 그러면 그게 위궤양이 되고, 그러다 위암이 되는 거에요."
"예? 위암이요?"

횡성군 읍내에 있는 약국에서 오간 대화다. 약사님은 음식물 조절을 강조하셨다. 그렇지 않으면 상황은 더 악화될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약사님이 미웠다. 그 맛있는 것들을 내게서 떼어 내려고 하다니!

"약사님. 혹시 자전거나 트레킹을 열심히 해서 장운동이 활성화 되면, 위액 분비가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나요?"
"장이 활성화되면 좋기는 하지만 위하고 장은 투약되는 약이 달라요. 둘이 붙어 있지만 다른 거죠."

필자의 자가진단은 보기 좋게 뭉개지고 말았다. 하긴 위하고 장하고 한 몸도 아니지 않은가? 장이 좋다고 위궤양에 걸리지 말라는 법은 없는 법이니까.

아무리 하찮더라도 병을 달고 가는 여행길은 유쾌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허리도 반응을 하는지 찌릿찌릿 거렸다. 이빨도 문제였다. 돈이 없어 치과에 가지 않았던 게 치통으로 되돌아 왔던 것이다. 위장병, 허리통증, 치통까지... 이렇게까지 삼중고(?)에 시달릴 정도면 여행을 포기하고 서울로 돌아가는게 순리일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계속 페달을 굴렸다.

일단 장거리 여행이 한 두 번이 아니었고, 그 삼중고가 상당히 어중간했다는 것이다. 아예 팍 아파버리면 '옳거니' 하고 그냥 집으로 되돌아갔을 테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단 약발로 버텨보기로 했다.

'약발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고고씽이다~!' 

1950년대에 세워진 횡성성당 답사 등, 잠시나마 횡성군 읍내 일대를 돌아본 후 남행을 계속했다. 한우 식당들이 밀집해 있는 우천면에 도착한 후 네덜란드 참전기념공원에서 1박을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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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덜란드 참전 기념탑 횡성군 우천면 우항리에 기념탑이 있다. 날씨가 흐려서 그랬는지 좀 어둡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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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전투와 네덜란드 참전 기념공원


횡성군 우천면에 있는 네덜란드 참전 기념공원은 횡성전투에 참가해서 전공을 세운 네덜란드 군인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곳이다. 1951년 2월 경에 있은 횡성 전투에서 국군 8사단은 중공군의 맹공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됐다. 당시 8사단은 구축된 방어선보다 돌출된 부분에 자리를 잡고 있어 적의 기습공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물밀 듯이 밀려 내려오는 중공군의 공세에 8사단은 큰 타격을 입게 됐고 부대는 퇴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퇴각이라도 순조로웠으면 불행 중 다행이겠지만 그렇지도 못했다. 부대간 연락 체계의 붕괴, 후방지원의 미비 등으로 상황은 더욱더 악화됐던 것이다. 더구나 8사단을 지원하기 달려온 미군과 국군도 중공군의 포위망에 걸려 큰 희생을 치루게 됐다. 당시 미8군 사령관이었던 리지웨이 장군은 전황을 보고받고 크게 격노를 했다고 한다.

그런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을 때 네덜란드군은 퇴각로를 방어하여 국군의 길을 열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희생도 컸다. 대대장이 사망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아군과 적군을 합쳐 1만 5천명이 넘는 인원이 희생된 횡성전투를 두고 미군측에서는 '학살의 계곡'이라고 칭했다. 그런 명칭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횡성 지역에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유해들이 많다고 한다. 그런 쓰디쓴 아픔의 자리에 네덜란드 참전 기념관이 들어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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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전기념탑 6.25참전기념탑과 베트남참전기념탑. 네덜란드 참전기념탑 옆 쪽에 건립되어 있다. 이 사진 역시 좀 어둡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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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차 모양을 한 네덜란드 군인상이 보이는 곳에 텐트를 치고 늦은 저녁을 지어 먹었다. 전날 먹지 못한 특식으로 3분 요리 카레를 해서 먹었다. 차를 한 잔 마신 후 어두워진 공원 일대를 할 일 없이 누볐다. 공원에는 네덜란드 참전비 외에도 6.25참전 기념탑과 베트남참전 기념탑이 나란히 서있었다. 장거리여행을 하다보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전쟁기념탑들! 거기에 적혀 있는 서릿발 같은 반공문구들! 그런 전쟁 조형물들을 바라보면서 자연스럽게 국가와 민족에 대한 물음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된다.


'왜 아직도 우리는 분단되어 있는가?'
'휴전체제에서 평화체제로 나아갈 수는 없는가? 왜 60년이 넘게 평화협정을 맺지 못하고 있는가?'
'분단의 고착화로 이익을 얻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종북, 종북거리는데... 종북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은 진짜 반공을 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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