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달사지 석불대좌

 

 

 

 

 

 

 

 

2021년 5월 27일 목요일

 

3일간의 강원도 평창 오대산 일대 탐방을 마친후 경기도 여주로 향했다. 벼르고 있던 여주 고달사지를 찾아가려고 한 것이다. 아시분들은 아시겠지만 뚜벅이들에게 답사여행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해당 문화재가 읍내 근처에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니까. 하루에 서너편밖에 없는 시골버스를 놓쳤다가는... 택시를 타라고? 돈이 어딨어!

 

지도를 검색해보니 그나마 경기도 양평군에 있는 양동역에서 고달사지로 가는 버스편을 타는게 제일 나은 듯싶었다. 하지만 필자의 뜻대로 됐겠는가? 뭐 워낙 이런 일에는 이골이 난터라 새삼스럽지도 않다. 결론적으로 말해 버스를 잘못타고 해서 2시간 이상을 걸었고, 고달사지에는 해가 진 이후에 도착했다. 그래서 사진들이 다 어둡게 나왔다. 이렇게 뚜벅이들은 문화재 답사하기가 어렵다.

 

내리는 곳을 지나쳐서 급하게 버스에 내렸다. 그런데 알고보니 필자가 탔던 버스는 원래부터 고달사지까지 가지 않는 버스였다. 가는 방향만 비슷할 뿐 하차해서 약 4km 이상을 걸어가야 했다. 혼자 궁시렁거리면서 방향을 다시잡고 이동을 했는데 옆쪽으로 무언가 보이는 것이다.

 

"앗! 버스를 잘 못 탄 이유가 있구만. 저걸 보려고 여기에 내리게 된 거였어!"

 

선돌이었다. 여주 석우리 선돌. 경기도 기념물 제132호로 지정된 석우리 선돌은 청동기 시대의 유물로 알려졌다. 입석이라고 불리는 선돌은 옛 선인들의 신앙의 대상이었다. 이를 두고 거석숭배문화라고 부른다. 석우리 선돌이 자리잡고 있는 곳은 주위 산들이 완만하게 둘러져있고, 앞으로는 금당천이 흐르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예전부터 마을이 형성됐고, 그 주민들이 선돌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선돌 인근에는 마고 할멈이 물레질을 했다는 넓은 돌이 있는데 이 대석은 제단으로 쓰였을 거라고 추측된다.

 

석우리 선돌은 높이가 2.45미터라 그렇게 크지는 않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옛 선인들의 신앙의 대상을 만날 수 있어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선돌이 필자를 불렀나, 아니면 필자가 선돌을 불렀나... 한편 옛날 표지판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표지판에는 '여주군석우리선돌'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됐을 때가 1992년이었으니 '여주시'가 아니라 '여주군'으로 표기된 것이다. 여주군이 여주시로 승격된 시기는 2013년 6월이었다.

 

 

 

 

 

 

 

* 석우리 선돌

 

 

 

 

 

 

 

 

우여곡절 끝에 고달사지에 도착했다. 이미 해가 거의 진 상태였다. 마음이 급해졌다. 잘못하면 또 심령사진처럼 이상한 사진만 찍게될 거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고 산세도 가늠해보고... 이런 것도 없이 그냥 빠르게 셔터를 눌렀다. 큰 폐사지를 빠르게 움직이며 사진을 찍어댔다.

 

혜목산 아래 넓직하게 자리잡고 있던 고달사는 764년, 신라 경덕왕 23년에 창건됐다고 전해진다. 고달사는 남한강 물길과 가까이에 있다.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이곳의 관리를 위해 사찰의 건립을 하였는데 유명한 신륵사도 같은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신륵사, 고달사, 법천사, 흥법사, 거돈사 등등... 남한강 수계에는 큰 사찰들이 들어섰고 고려시대에는 더 크게 번성하게 된다.

 

하지만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갔고 사찰들도 쇠락하기 시작했다. 현재 신륵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폐사되었다. 그래서 남한강 수계를 따라가면 폐사지들을 여럿 만날 수 있다. 폐사지 답사는 역사의 시간을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여행이다. 하지만 폐사지라서 그런지 좀 쓸쓸하다. 가을 낙엽이 날릴때 행하면 아주 더 쓸쓸할 거다. ㅋ

 

고달사(高達寺)는 '도의 경지를 통한다'라는 뜻을 가졌다. 고달사에는 석조물들이 많았는데 모든 석물들은 석공 '고달'이 다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석공 고달은 가족들이 굶어죽는 줄도 모르고 석물 만들기에 매달렸다. 이윽고 석조물들은 다 완성됐고 고달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된다. 이후 그는 도에 통달했으니, 이에 고달사가 됐다는 전설따라 삼천리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달사지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석불대좌이다. 보물 제8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달사지 석불대좌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대좌이다. 높이가 1.57미터인 고달사지 대좌는 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다른 석조대좌들이 원형이나 팔각형으로 되어 있는 것과 다른 면모다. 비교적 원형이 잘 갖추어져 있고 그 모양새가 세련돼 고달사지에서 가장 눈에 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고보니 사각형 석불대좌는 강릉에 있는 안국사지에서도 보았다. 안국사지는 관음리 5층석탑이 있는 곳인데 이 폐사지에도 사각형 석불대좌가 있는 것이다. 안국사지의 석불대좌는 고달사지 대좌보다 규모는 작았고 세련미도 좀 떨어지긴 했다. 그래서인지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데도 아직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 그나저나 안국사지를 방문했을 때도 어두운 밤이었고, 고달사지를 방문했을 때도 해가 떨어진 뒤였고... 그래서 사진이 다 심령사진처럼 찍혔고...ㅋ

 

 

 

 

 

 

 

* 원종국사혜진탑비

 

 

 

 

 

 

 

정말 사진들이 엉망이라 사진을 내거는 게 좀 민망할 정도다. 그래도 보물 제6호로 지정된 원종국사혜진탑비는 좀 언급해야겠다. 옛날 고달사지 사진을 보면 원종국사혜진탑비는 현재의 모습처럼 생기지 않았다. 몸체라 불릴수 있는 비신 부분이 없었다. 그래서 받침돌인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만 있었다. 몸체가 없었지만 워낙

귀부와 이수가 커서 그랬는지 마치 거북이 장갑차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2014년에 비신이 복제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사실 비신은 1915년에 넘어져 8조각으로 깨졌다고 한다. 무슨 조각 피자도 아닌데 8조각이나... 그렇게 훼손된 오리지널 비신은 이후 정비가 됐고, 경복궁을 거쳐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원종대사 찬유는 신라말에 태어나 고려 광종 때 입적을 하셨는데 그때 나이가 90세라고 한다. 광종은 그를 왕사라 삼았고, 그가 열반에 이르자 원종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고달사는 원종대사 때 크게 중창이 됐던 것이다.

 

옛날 자료에는 고달사지 일대가 전부 논과 밭으로 나온다. 하긴 폐사지는 평평하니 곡식을 기르기에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고달사지 일대가 대대적으로 발굴되고, 답사지로 각광을 받게된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가려고 하는데 어떤 남자가 차에서 내려 말을 건냈다.

 

"별보러 오셨어요?"

"예, 별이요?"

"천문동호인 아니세요?"

"아닌데요. 저는 문화재 보러 왔는데요."

 

알고보니 고달사지 주차장이 별을 보는데 딱 좋은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날씨가 좋은 날에 천문동호인들이 간간이 와서 별을 본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고달사지는 아주 컴컴했다. 그 흔한 가로등 시설도 없었다. 그러니 별 보러오지.

 

"여기서 고달사지라고 폐사지의 메카같은 곳이에요. 그래서 저는 문화재 탐방하러 온 거죠."

"그렇군요. 저는 별 보는 거 좋아해서 가끔 이곳에 왔어요. 주차장도 넓어가지고 장비 세팅하기도 좋고 하니까요."

 

한 장소를 두고 서로가 다르게 이용을 했다. 그래도 폐사지에 왔으니 별보는 것보다는 문화재를 보는게 제격이 아니겠나!

 

후일담) 버스가 끊긴지 오래고 해서 신륵사 관광지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그곳에 가면 숙소가 있을 거 같아서. 약 10km 정도가 떨어져 있었는데 열심히 걸어갔다. 다행히 하천 뚝방길이 잘 되어 있어서 안전하게 갈 수 있었다.

 

알고보니 석우리 선돌 앞에 흐르고 있던 금당천을 따라 걷고 있었다. 석우리는 상류였고 신륵사 방향은 하류쪽이었다. 이 일대도 고달사지처럼 아주 컴컴했다. 하긴 인적도 드문 곳에 무슨 가로등이 있었겠는가! 그래서 금당천이 무척 고마웠다. 안전하게 갈 수 있게 뚝방길이 되어 있으니. 이름도 얼마나 이쁜가, 금당천!

 

그렇게 어두컴컴한 금당천을 따라 걷는데... 보름달이 너무 예쁜 것이다. 이날 보름달은 '슈퍼블러드문'이라고 대보름달이었다고 한다. 주위가 어두우니 보름달이 더 명징하게 보였던 것이다. 별 대신 달을 본 것이다.

그날 뚝방길 걷기가 재밌었나보다. 아직까지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우연하게 인조반정과 관련이 있는 원두표의 묘도 확인해두었다. 원두표는 창의문을 도끼로 부수고 도성으로 처음 입성한 무장이었다. <인왕산 역사트레킹>을 행할 때 창의문 앞에서 항상 원두표이야기를 했었는데 그의 묘가 경기도 여주에 있는지는 처음 알았던 것이다.

 

나중에 기회가되면 금당천을 한 번 더 걸어보고 싶다. 야간에, 그것도 대보름달이 뜰 때 말이다. 요즘은 야간트레킹을 자제하려고 하는데 그래도 금당천은 야간에 걸어야 더 재밌게 걸을 수 있을 거 같다.

 

 

 

 

 

 

* 고달사지 석조

 

 

 

 

 

 

 

* 고달사지 승탑

 

 

 

 

 

 

 

 

* 원두표 묘지: 사진 오른쪽 상단에 달이 보인다. 사진으로 찍으니 작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말 큰 보름달이었다.

 

 

 

 

 

 

 

 

 

 

 

 

 

 

* 흥법사지 3층석탑

 

 

 

 

 

 

 

 

2021년 4월 2일 금요일.

이날은 원주에 있는 흥법사지를 탐방했다. 이전 포스팅에도 언급했듯이 강원도 원주 일대에는 큰 폐사지들이 여러개가 있다. 원주시 부론면에 자리잡고 있는 거돈사지와 법천사지에 이어 흥법사지에 대한 포스팅을 해본다.

 

여기서 잠깐 의문이든다. 왜 강원도 원주와 경기도 여주에 큰 폐사지가 많은지에 대해서... 이곳은 남한강이 흐르고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 뿐만아니라 고려시대에도 남한강 수계는 무척이나 중요한 교통로였다. 고려는 이곳에 흥원창이라는 조창을 설치하여 세곡을 거두어들였다. 이곳은 현재 원주시 부론면에 위치해있다.

 

다시 흥법사지 이야기로. 흥법사지는 원주시 지정면에 자리잡고 있는데 뒤쪽으로는 영봉산이라는 야트막한 산이 둘러싸고 있다. 영봉산은 소금산과 걸어서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데 소금산에는 유명한 출렁다리가 놓여 있다. 워낙 유명해서 그런지 소금산 출렁다리는 주중에도 사람들이 티케팅을 하더라.

 

신라 말에 창건된 흥법사는 고려 개국시기에 크게 중창된다. 흥법사에 주석한 진공대사 충담이 태조 왕건의 왕사였기 때문이다. 신라의 귀족 출신인 충담은 당나라에 유학가서 불법을 연구하는데 충담이 귀국하자 왕건은 그를 극진히 대접하며 왕사로 임명했던 것이다. 왕건이 그를 얼마나 극진히 대접했냐면, 진공대사가 열반에 이르자 탑비에 들어가는 비문을 왕건 자신이 직접 지었다는 것이다. 탑비의 비문은 고위 학자들이 짓는게 일반적인데... 왕이 직접 짓다니!

 

흥법사지도 여느 폐사지처럼 주변에 논과 밭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우뚝 서 있어야 할 당간지주가 없기에 그 역할을 삼층석탑이 대신해주고 있다. 흥법사지 삼층석탑은 전형적인 고려시대 3층석탑인데 1층 탑신부에 문고리를 조각해 부처님의 사리가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사진에도 보이듯 흥법사지 3층석탑은 여러부분의 석재들이 파손됐다. 옥개석은 끝단이 잘려나갔고, 하부 기단도 금이 갔다. 탑신 전체도 약간 기울어진 모습이다. 나중에 해체복원도 필요해보인다. 이렇게 훼손된 민낯을 드러낸 흥법사지 3층석탑이지만 그래도 당당히 보물 464호로 지정되어 있다. 약 3.7미터 달하는 3층 석탑이 없었다면 흥법사지의 모습은 무척 쓸쓸했을지 모른다.

 

 

 

 

 

 

 

 

* 진공대사탑비: 중간에 비가 없고, 받침돌인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만 있다.

 

 

 

 

 

 

 

 

 

* 진공대사탑비: 머리 부분에 네모난 홈이 있다. 무언가 별도의 장식이 있었을 것이다.

 

 

 

 

 

 

 

 

 

눈길을 돌려 드디어 진공대사탑비를 바라보았다. 3층 석탑과 아주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 구조를 보니 이런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석탑은 사찰 가람의 중심이잖아. 통상적으로 무슨무슨 대사 탑비나 부도는 사찰 외곽에 조성하지않나?'

 

그만큼 진공대사의 위상을 보여주는 구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공대사가 열반에 든 건 940년이었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것이 936년이었으니 한참 고려의 국운이 뻗어나갈 때 진공대사탑비가 만들어지고 흥법사가 크게 중창된 것이다.

 

사찰의 중심부에, 그것도 태조 왕건이 비문을 작성했으니 흥법사를 방문한 사람들은 당연히 진공대사탑비를 보려고 했을 것이다. 필자도 그랬다. 한자 실력이 낮지만 그래도 봐야쥐~

 

이게 뭐야! 비좌 역할을 하는 귀부와 머리장식인 이수만 있는 것이다. 왕건이 작성한 비문을 보고 싶단 말야! 내 한자 실력을 만방에 알리고 싶단 말야!^^

 

귀부와 이수 사이에 긴 막대처럼 있어야 할 비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반출됐다 다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렇게 세파에 시달렸는지 비는 4조각으로 짤려나갔다고 한다. 무슨 조각피자도 아니고 말야.

 

중간에 있어야 할 비가 타향에 있지만 귀부와 이수만 있는 현재의 모습도 그 자체로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부터 현재의 모습이 완성품이었나 할 정도로 귀부와 이수가 서로 딱 맞아떨어져 보인다. 그래서 보물 463호로 지정되어 있다. 얼핏봤을 때 작은 장갑차처럼 보였는데 그걸 타면 수륙양용으로 달릴 수 있으려나?

 

보시다시피 용인지 거북이인지 정말 정교하게 잘 조각을 해놨다. 발톱과 갑옷도 보시라. 하나하나 부족한 부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화려한 장식을 한 머릿돌인 이수도 보시라. 용이 날아갈 거 같지 않은가?

 

이렇게 귀중한 문화재가 있지만 흥법사지는 방치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위가 논밭이라 그런지 인근에는 농업 쓰레기들이 많이 보였다. 탑비 옆에는 담배꽁초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흥법사지가 유명하지 않아서인지 마땅히 주차할 곳도 없어보였다.

 

흥법사지를 사적지로 지정하자는 한 시민단체의 현수막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직선거리로 20km도 안 떨어져 있는 원주시 부론면의 법천사지와 거돈사지는 사적지로 지정되어 잘 보호를 받고 있다. 하지만 흥법사지는 일부러 찾지 않는 이상은 발길이 쉽게 가지 않을 정도로 방치되어 있다. 보물 2점이 있고, 인근에 소금산과 연동하면 많은 이들이 탐방할 수 있는 소중한 문화 유산인데 말야.

 

예산 쏟아부어서 이상한 조형물 만드는 것보다 있는 문화재 잘 활용하면 그것 자체가 문화재 힐링 여행이 되는 것이다.

 

 

 

 

 

 

 

 

* 흥법사지 3층석탑

 

 

 

 

 

 

 

 

* 흥법사지: 주위는 논밭으로 변했다.

 

 

 

 

 

 

 

 

 

 

* 흥법사지: 방치된 석물들. 왼쪽 연꽃 받침돌은 석등의 일부분이었을 것이다.

 

 

 

 

 

 

 

 

 

 

* 흥법사지: 국가사적 지정 청원 현수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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