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주사지 : 본당터를 중심으로 4개의 탑이 보인다.

 

 

 

 

 

 

 

2021년 6월 11일 금요일.

 

이날은 충남 보령시에 있는 성주사지를 탐방한 날이다. 탐방한 지 두 달이나 지나서 후기를 작성하다니...ㅋ

 

성주사! 후기 신라시대 대표적인 선종 사찰로 불렸던 곳. 하지만 지금은 폐사지가 되어 허허로움이 갈대처럼 나붓기는 곳. 한편 경북 성주군과 이름이 비슷하기에 성주사도 그곳에 있지 않나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곳. 사실 필자가 그랬다. 성주사지라고 하니 경북 성주군부터 생각한 것이다. 맛있는 성주 참외를 떠올리면서...^^

 

답사를 한 날은 무척 무더웠다. 그런 날은 인근에 있는 대천 해수욕장에서 머드팩을 하는게 훨씬 남는 장사일지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무거운 배낭을 메고 성주사지가 있는 성주면으로 향했다. 보령 시내에서 성주면사무소 입구까지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했는데 약 15분 정도 소요됐다. 면사무소 입구에서 성주사지까지는 약 1km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어렵지 않게 걸어갈 수 있다. 성주사지 바로 앞까지 가는 버스 노선도 있지만 자주있지 않다.

 

성주천을 따라 이동을 하다보면 넓게 펼쳐져있는 성주사지가 나타난다. 성주산과 만수산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데 그 품을 아늑하게 감싸고 있는 형상이다. 서해안에 있는 산들이 그렇듯 해발고도가 높지 않은 올망졸망한 봉우리들이 옛 절터의 뒷배경이 되어주고 있다.

 

성주사의 원래 이름은 오합사였다. 백제 법왕이 왕자 시절인 599년에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때는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원찰로 오합사가 창건된 것이다. 한편 백제 법왕은 같은 해인 599년에 제29대 왕으로 등극한다. 그리고는 그 다음해인 600년에 승하하고 만다. 직전 28대 혜왕도 재위 기간이 딱 1년이었다. 598년에서 599년.

 

오합사가 성주사로 이름이 바뀌게 된 건 신라 후기였다. 성주사(聖住寺)의 의미를 풀어보면 '성인이 거주하는 절'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성인은 무염국사를 지칭한다. 태종 무열왕의 8대손인 무염은 어려서부터 총명함을 드러냈다. 아홉살 때에는 해동신동으로 불렸을 정도다. 무염은 22살 때인 821년(헌강왕13)에 당나라에 유학을 갔다. 이후 무려 20년 동안이나 중국 일대를 다니며 자비를 실천했는데 이를 두고 '동방의 대보살'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다.

 

무염이 유학을 했을 당시 중국에는 경전을 중심으로 한 교종에서 벗어나 수행을 강조하는 선종이 유행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무염도 현실의 상황에서 벗어난, 중앙 귀족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던 교종을 비판했다.

 

 

 

 

 

*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그가 중국에서 귀국했을 때 보령 지역의 호족인 김양에 의해 오합사의 주지로 자리를 잡게 된다. 이때 신라에서는 구산선문이 크게 번성하게 된다. 구산선문은 경전 위주의 교종과는 달리 수행에 중심을 둔 선종의 9개 선문을 말한다. 한마디로 신라 말기에 9개의 선종 문파가 산을 중심으로 세워졌다는 것이다. 그중 무염은 선승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하게 되고, 더불어 그가 주지로 주석하는 성주사도 구산선문의 대표적인 사찰로 주목받게 된다.

 

그런 무염의 업적을 기리고자 성주사터 한편에는 큰 비석이 세워져있다. 비각으로 보호되고 있는 이 비석은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이다. 대낭혜는 무염의 시호이고, 백월보광은 탑호이다. 줄여서 낭혜화상탑비라고도 불린다. 국보 제8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후기 신라의 대문장가인 최치원이 비문을 지었다고 한다. 높이가 무려 4.55미터에 달하는 이 거대한 비석에는 무염과 관련된 5천여 자의 글자가 새겨져있다.

 

한편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최치원의 사산비명 중 하나다. 사산비명은 최치원이 지은 비석문 가운데 사료적 가치가 높은 4개를 묶어서 만든 책이다. 그럼 그 대상인 4개는 무엇인가? 아참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가 그중 하나라고 했지.

 

1. 진감선사대공령탑비(국보 제47호): 지리산 쌍계사

​2. 지증대사적조탑비(국보 제 315호): 경북 문경 봉암사

3. 대숭복사비: 경주 대숭복사터

4.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 제8호)

 

대숭복사비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3개의 비문이 다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는데다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니 사산비명을 주제삼아 탐방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신라 말기 비운의 천재였던 최치원의 자취를 따라서... 성주사터에 왔으니 벌써 한 곳은 다녀온 셈이다.

 

이제 절의 중심부였던 곳으로 향해가보자. 총 4개의 탑이 눈길을 확 사로잡을 것이다. 하나는 오층석탑이고, 나머지 3개는 삼층석탑이다. 삼층석탑은 열을 지어 서 있고, 오층석탑은 그것들과는 외떨어져 있다. 오층석탑과 삼층석탑 사이에는 본당 건물터가 있다.

 

하나도 아닌 4개의 탑이 한 곳에 집중적으로 서 있다는 것이 무척 흥미로웠다. 건물 하나에 탑 하나를 두고, 사찰의 가람배치에서 1당 1탑이라고 한다. 탑이 두 개면 1당 2탑이라고 한다. 1당 3탑까지는 들어봤는데 1당 4탑은...? 하여간 우뚝 서 있는 4개의 탑이 있어 그런지 성주사지는 그 어떤 폐사지보다 덜 쓸쓸해보인다.

 

탑들을 둘러보기 전에 본당터부터 살펴보자. 이 본당터 가운데에는 연꽃무늬로 새겨진 석조대좌가 있는데 오랜 시간이 흘러서인지 사각형의 석조대좌는 군데군데가 훼손되었다. 외형이 훼손되었지만 그래도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해보았다. 아니 건축학적 상상력인가? 이 석조대좌에는 큰 불상이 있었다고 전한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 불상은 석불이 아닌 철불이었다고 하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들고 나갔다는 것이다. 이런 괴씸한!

 

 

 

 

 

* 성주사지 오층석탑

 

 

 

 

 

 

 

오층석탑은 6.6미터로 성주사지에 남은 문화재들중에서 가장 높다. 오층석탑은 성주사지의 기준점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처럼 본당터 앞에 우뚝 서 있다. 2중 기단 위에 5개의 탑신이 올려져있는데 1층 탑신이 두드러지게 길쭉하지만 탑 전체가 늘씬한 상승감을 자랑하며 균형있게 층층을 이루고 있다. 안타깝게도 꼭대기 부분인 상륜부는 훼손이 됐다.

 

성주사지 오층석탑은 신라 후기에 제작되었는데 2층 기단과 1층 탑신 사이에 괴임돌이 받혀졌다. 이렇게 괴임돌이 받혀지는 형식은 신라시대 석탑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형태다. 아무래도 오층석탑을 만든 석공은 시대를 앞서간 아티스트가 아니었을까... 성주사지 오층석탑은 보물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제 열을 지어 서 있는 세 개의 탑을 살펴보자. 얼핏보면 세 쌍둥이 탑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보면 각 탑의 높이가 제각각이다. 서탑은 4미터, 중간탑은 3.7미터, 동탑은 4.6미터이다. 이 세 탑은 건너편 오층석탑처럼 2층 기단과 1층 탑신 사이에 괴임돌이 따로 받혀진 형태다. 그런데 이 세 개의 탑의 1층 탑신에는 무언가가 조각되어 있다. 문틀모양과 문고리 장식을 새겨넣은 것이다. 탑에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독특함 때문인지 세 개의 탑은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서탑은 제47호, 중간탑은 제20호, 동탑은 제2021호이다. 동탑은 2019년도에 승격됐는데 이전에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였다.

 

한편에 서 있는 석불입상도 친견했다. 훼손이 심해 시멘트로 보수되어 있는 석불은 좀 어눌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좀 더 친근한 모습이었다. 마을에서는 미륵불로 불린다고 한다. 오랜동안 이곳에 서 있으면서 성주사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석불일텐데... 그렇게 묵묵하게 이 터를 지켜준 석불 앞에서 크게 몸을 숙여 합장을 하였다.

 

성주사지도 폐사지이기에 허허로움이 탐방 내내 느껴졌지만 그래도 석불도 있고, 석탑도 4개나 있어서 그나마 덜 외로운 느낌이었다. 뒤쪽에 둘러져 있는 성주산도 압도하는게 아니라 아늑해 보이고... 그렇게 성주사지 탐방이 종료가 됐다.

 

 

 

 

 

* 세 개의 탑

 

 

 

 

 

 

 

* 성주사지 석불입상

 

 

 

 

 

 

 

 

* 세 개의 석탑: 사진 가운데 하단부에 석불입상이 보인다.

 

 

 

 

 

 

 

* 본당터 석조계단: 오리지널 석조 계단을 1986년에 누가 들고 갔다고 한다. 그 무거운 걸 가져가다니! 이 문화재 도둑놈아! 현재 계단은 옛 사진을 근거로 복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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