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남들과 달라!”

 

이런 광고에서 나올법한 워딩을 외치면 나답게 살기가 가능할까? 필자는 1970년대에 태어나 199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 X세대라는 칭호를 받으며 청년기를 보냈다.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개혁적인 분위기가 고조될 때였다. 1990년대 즈음에 ‘남들과 달라’를 강조한 광고들이 참 많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화장품이나 패션 제품들이 앞장을 섰다. 필자도 X세대 타령을 하면서 ‘난 남들과 달라’를 외치고 다녔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나답게 살기는 남들과 헤어스타일이 다르다고, 남들과 다른 패션스타일을 입는다고 되는게 아닐 것이다. 외모로 그것이 가능하다면 모델들은 모두 다 나답게 살기의 달인일 테니까.

 

나답게 살기가 어려운 것은 나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명료하지 않기 때문이다. 눈에 확 잡히는 것이면 그에 맞게 계획을 세울 수도 있고, 무 자르듯이 확 결단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답게 사는 것은 그런 가시적인 접근으로 도달될 문제가 아니다. 차라리 무소유가 가시적인 면이 있다. 인연이 다 된 책들이 사라진, 책장의 여백들이 그 예가 될 수 있을 테니까.

 

나답게 살기가 명료하지 않다면 세상의 이치로 끌어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6하 원칙으로 접근해보는 것이다. 필자는 전편에서 ‘역사트레킹을 할 때만큼은 나답게 산다’라고 기술했다. 그런데 디테일하게는 6하 원칙 중 공간(where)로 접근을 했었다.

 

 

 

 

 

*관악산: 남산타워에서 바라본 관악산. 정상부를 향해 불꽃이 타올라가는 모습이다. 그래서인지 관악산은 화기가 많은 산이라고 불렸다.

 

 

 

 

 

 

● 누구나 자신만의 베이스캠프가 있기 마련이다

 

아웃도어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자신만의 베이스캠프가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필자도 그런 베이스캠프가 하나 있다. 그곳에서 체력을 키웠고, 정신을 단련했고, 스스로의 위치를 점검했다. 필자의 언어 사용이 조금 의아하신 분들도 있을 것이다. 베이스캠프면 ‘전진기지로써 물자를 저장해 두는 고정적인 시설’이 아닌가? 그곳을 근거 삼아 고지 정복을 하는 것이고. 그런데 왜 정신을 단련하고, 자신의 위치를 점검하는가?

 

오해 없기 바란다. 여기서 필자는 ‘베이스캠프’라는 말을 사전적 의미로 쓰지 않았다. ‘베이스캠프’를 굳이 물리적 공간으로 한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심리적인 공간으로서의 베이스캠프도 존재한다는 말이다. 뭐 비빌 언덕이라고도 칭할 수도 있겠다.

서론이 길어졌다. 그럼 필자의 베이스캠프는 어디일까? 제목에 나와 있다시피 관악산이다.

 

 

 

● 서울의 남주작 관악산

 

관악산(冠岳山)은 한자에도 보이듯 ‘악(岳)’자가 붙은 산이다. 예로부터 경기 5악(五岳)으로 불릴 정도로 산세를 과시했었다. 경기 5악은 개성의 송악산, 파주의 감악산, 포천의 운악산, 가평의 화악산, 그리고 관악산을 말한다. 등산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관악산을 제외하고 언급된 4개의 산들이 어떤 산들인지 잘 아실 것이다. 한마디로 쟁쟁한 산들이다. 물론 개성의 송악산은 휴전선 이북에 있으니 지금은 마음대로 갈 수 없다. 어쨌든 옛 선인들이 바라보는 관악산이 어땠는지 알아볼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이 건국된 후 관악산은 한양의 외사산(外四山) 중 하나가 되었다. 한양의 외곽을 감싸는 네 개의 산을 말하는 외사산은 다음과 같다. 북쪽의 북한산, 동쪽의 아차산, 남쪽의 관악산, 서쪽의 덕양산이 바로 그것이다. 덕양산은 지금의 행주산성을 말한다. 그렇게 외사산에서 남쪽에 위치한 관악산은 한양의 남주작이 되었다. 북현무는 북한산이고.

 

외사산이 나왔으니 내사산(內四山)도 이야기를 해보자. 전편에서 계속 언급을 했지만 복습한다는 생각으로 다시 기술해본다. 내사산은 서울 안쪽을 감싸고 있는 4개의 산을 말한다. 북쪽의 북악산, 남쪽의 남산, 서쪽의 인왕산, 동쪽의 낙산이 바로 그것이다. 낙타산이라고도 불렸던 낙산은 유명한 이화동 벽화마을을 품고 있는 산이다. 이 내사산을 연결하여 18.6km 한양도성이 만들어졌다.

 

관악산이 서울의 남주작이고, 북한산이 북현무라면 좌청룡 우백호는 어느 산인가? 서울의 좌청룡은 낙산이고, 우백호는 인왕산이다. 이것도 전편에서 다 언급을 했었다. 복습한다는 마음으로 기술을 해봤다.

 

 

 

 

 

*관악산: 서울대에서 바라본 정상부.

 

 

 

 

 

 

● 관악산의 화기를 어떻게 막을꼬?

 

다시 관악산 이야기로. 당연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서울을 대표하는 산은 북한산이다. 그래서 관악산은 서울의 ‘진산’이 될 수는 없었다. 높이만 봐도 그렇다. 북한산이 832미터이고, 관악산이 628미터이다. 하지만 한강 이남 지역만 놓고 보자면 관악산은 단연 최고의 산일 것이다.

 

관악산 일대의 가치는 이미 고대시대에서부터 형성되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한강 하류지역의 주도권을 잡기하기 위해 이 일대에서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다. 고려시대에는 남경(지금의 서울)을 방어하기 위한 남쪽산으로 그 전략적 가치가 중시되었다.

 

이런 풍부한 역사성 때문인지 관악산은 스토리텔링의 보고와도 같은 곳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조선의 건국과 관련이 있다. 조선은 철저하게 풍수지리학에 의거하여 건국된 나라였다. 그럼 조선의 건국자들은 관악산을 어떻게 보았을까? 필자처럼 아웃도어의 베이스캠프처럼 생각했을까?

 

조선 건국에 나선 이들은 관악산을 화기(火氣)가 강한 산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중간에 한강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화가 도성 안으로 미칠 수 있다고 생각을 했었다. 2008년도에 복원된 숭례문(崇禮門)을 보자. 현판이 세로로 쓰여 있다. 숭(崇)을 불꽃이 타오르듯이 길게 늘여 썼다. 례(禮)는 남쪽을 뜻하는데 오행으로는 ‘불’을 의미한다. 정리하자면 맞불을 놓아 관악산의 화기를 억제시킨다는 의미다.

 

지금은 광화문 앞에 놓인 해태상도 관악산의 화기와 연관이 있다고 한다. 원래 해태상은 지금의 세종문화회관과 정부종합청사 사이에 있던 사헌부 앞에 놓여 있었다. 해태는 사악한 이들을 잡아먹는 상상의 동물이었는데 물을 상징하기도 했다. 그래서 해태상은 관원들의 심기일전을 돕기도 했고 화기를 막기도 했던 것이다. 아이들의 놀이기구가 되기도 했다. 옛 구한말 때 사진을 보면 해태상 위로 아이들이 올라가서 재밌게 놀고 있었다.

 

 

 

 

* 낙성대 3층석탑: 낙성대가 있는 관악산이 옛 백제땅에 속해서 그런지, 백제시대 탑의 영향을 받았다. 사진에서 보이듯 본 탑은 상륜부가 훼손되어 있다.

 

 

 

 

 

● 진짜 낙성대는 어디?

 

관악산 역사트레킹은 낙성대에서부터 시작된다. 낙성대(落星垈)는 한자를 그대로 풀어보면 ‘하늘에서 별이 떨어진 집’이란 뜻이다. 이곳은 고려시대 때 거란을 크게 무찔렀던 강감찬 장군이 태어나신 곳이다. 현재 생가 터는 주택가 한복판에 있어서 그런지 한눈에 그 위치가 파악이 되지는 않는다.

 

그 생가 터에서 약 300미터 정도 올라가면 거기에 안국사(安國祠)라는 강감찬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 나온다. 장군이 거란을 물리치고 받은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라는 호를 따서 네이밍을 했다.

 

“이 안국사가 1974년에 만들어졌는데요. 그런데 사람들은 여기가 낙성대라고 생각해요. 아까 주택가에 숨어 있는 곳이 강감찬 장군이 진짜 태어난 장소이고, 이곳은 이후에 강감찬 장군의 사당이 들어선 곳이죠.”

“예?”

“그런데 이 안국사가 규모가 있고, 더군다나 이 안국사 일대를 낙성대공원이라고 명명한 거에요. 그러니 착각을 하는 것이죠.”

 

낙성대를 올 때마다 반복적으로 이런 설명을 한다. 하지만 필자가 표현을 못해서 그런지 설명을 들으신 분들 중에도 계속 착각하시는 분들도 있었다. 하긴 어리둥절할 만하다. 필자도 똑같이 그랬으니까.

 

 

 

 

 

* 안국사: 강감찬 장군을 모신 사당

 

 

 

 

 

 

● 문관 출신 최전방 사령관, 강감찬

 

강감찬 장군과 관련된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거 아세요. 강감찬 장군이 사실은 문신 출신이라는 거요.”

“정말요?”

“더 놀라운 사실이 있어요. 장군께서 나이 70에 최전방 사령관으로 직접 전투를 지휘했다는 겁니다. 그러다 귀주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둬서 거란 세력을 물리쳤고요.”

“아, 그렇군요!”

 

필자의 설명에 하나같이 참석자들은 놀랬다. <삼국지>의 황충 장군도 아니고, 고희의 나이에 최전방에서 칼을 휘둘렀다는 점이 놀라웠을 것이다. 더구나 상대편은 당시 동북아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거란족이 아닌가?

 

이야기를 좀 더 확장해 보자.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두고 금수지국(禽獸之國)이라고 칭하며 건국 초부터 강경 정책을 펼쳤다. 그래서 거란이 선물로 준 낙타를 굶겨 죽인, 일명 만부교 사건도 발생하게 됐던 것이다.

 

거란은 요나라를 세우고 동북아에서 위세를 떨쳤다. 당시 요나라는 만리장성 부근에서 송나라와 대치를 하게 됐는데 한반도에 있는 고려에 대해 늘 신경을 곤두세웠다. 고려가 송나라와 손을 잡고 자신들을 공격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3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였던 것이다. 강감찬 장군은 3차 침공 때 상원수가 되어 10만 거란군을 격퇴시켰고 그로 인해 고려는 전란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안국사 뜰 안에는 그런 강감찬 장군을 기리는 삼층석탑이 서있다. 상륜부라고 불리는 맨 꼭대기는 무너져 내렸지만 나머지는 천 년 가까운 세월을 잘 버텨내고 있다. 이 탑은 원래 장군의 생가에 있던 것을 안국사가 만들어지면서 현 위치로 옮겨온 것이다.

 

필자는 계속 ‘강감찬 장군’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강감찬은 문신 출신이었다. 한국사 시간을 곱씹어 보시라. 과거에서 무관을 뽑았던 건 고려 후기 이후였다. 고려 초기 사람이었던 강감찬은 당연히 문관 출신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강감찬은 문·무에 모두 능한 인재였던 것이다. 이를 두고 출장입상(出將入相)이라고 하는데 ‘나가서는 장수(將帥)요, 들어와서는 재상(宰相)이라’는 뜻이다.

 

도교에서는 문(文)을 관장하는 별을 문곡성(文曲星)이라고 칭한다. 문(文)이 뛰어난 사람을 두고도 문곡성이라는 말한다. 그런데 강감찬도 문곡성이라고 불렸다. 최전방 사령관이자 문곡성이었던 강감찬! 그렇게 많은 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인헌공 강감찬은 84세에 천수를 누리다 영면하셨다.

 

 

* 강감찬 장군 기마상: 장군의 발이 너무 숏다리다. 말은 잘 표현했는데...

 

 

 

 

 

● 무학대사가 세운 자운암

 

강감찬 장군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해 좀 해주셨으면 한다. ‘내 아웃도어의 베이스캠프’인 관악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 관악산이 낳은 한국 최고의 위인 중에 한 분인 강감찬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이제 트레킹팀은 서울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관악산 둘레길을 따라가다 서울대 캠퍼스 안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그렇게 트레킹팀은 자운암을 향해간다.

 

서울대에 대해서는 굳이 여기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1975년 서울대가 현재의 위치로 이전한 후 형성된 고시촌은 잠깐 언급해보자. 조선시대 관악산은 벼슬산으로 불렸다.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온 이들은 산세가 수려하다는 이유로 관악산에 있는 절에 기거를 하며 과거 준비에 몰두를 했다. 조선시대에도 관악산은 ‘고시촌’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고시촌에서 붙어나간 이들이 많았기에 관악산이 자연스럽게 벼슬산이라는 애칭을 얻은 것이다.

 

다시 자운암 이야기. 자운암은 무학대사가 1396년에 창건했다. 600년이 넘는 고찰이지만 경내가 큰 사찰은 아니다. 이 절은 이름이 한 번 바뀐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자운암(紫雲庵)이었지만 1734년(영조13)에 대효선사가 자운암(慈雲庵)으로 이름을 바꾼다. ‘紫’에서 ‘慈’로 한자명이 바뀐 것이라 한글 발음은 동일하다.

 

또 본전도 바뀐다. 자운암의 본전은 원래 관음보살을 모신 관음전이었다. 그러다 1976년 보륜 스님이 석가모니 불상을 세우고, 이름도 대웅전으로 고치게 된다. 아시다시피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곳을 말한다. 이곳에는 성종 임금이 자신의 어머니 소혜왕후를 위해 만들어 봉안한 위패가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또한 경내 뒤쪽에는 거대한 마애불이 있다.

 

그런데 2019년 가을경에 방문했을 때 자운암의 건물들은 철거가 되어있었다. 대웅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들이 다 망실되었다. 소송에 걸려서 그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예상하지 못한 광경을 지켜보니 좀 당황스러웠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원만히 문제가 해결이 되었으면 좋겠다.

 

 

 

 

* 자운암: 무학대사가 세운 자운암

 

 

 

 

 

● 당신의 베이스캠프는 어디입니까?

 

트레킹팀은 이제 자하동 계곡을 걷게 된다. 이곳은 북자하동 계곡인데 사람들에게는 ‘서울대 옆 계곡’으로 더 많이 불리고 있는 곳이다. 자하동이란 명칭은 산 건너편 경기도 과천 쪽에도 존재한다. 그 곳은 남자하동 계곡이다.

 

조선 후기 시절에 시·서·화 삼절에 능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분이 바로 자하 신위 선생이다. 신위 선생은 관악산에 은거를 했는데 남·북 자하동 모두 신위 선생의 호인 ‘자하’를 따서 명명한 것이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신위 선생을 존경을 했다. 그래서인지 과천 남자하동 계곡에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세긴 것으로 추정되는 ‘紫霞(자하)’라는 석각글씨가 있다.

 

북자하동 계곡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계곡 폭이 비교적 좀 넓고, 유량도 풍부해서 그런 것이다. 필자도 어렸을 때 이곳에서 물놀이를 많이 했었다. 그러고 보니 관악산은 필자의 베이스캠프이자 놀이동산이었던 셈이다.

 

이제까지 관악산 역사트레킹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필자의 베이스캠프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설명식의 좀 딱딱한 글이 된 거 같다. 좀 어깨에 힘이 들어간 거 같다. 어쨌든 필자의 베이스캠프를 독자들에게 알렸으니 그것으로 만족한다.

 

 

* 북자하동 계곡: 서울대 계곡이라고 더 많이 불리는 계곡.

 

 

 

 

 

 

● 나답게 살기가 어렵다? 그럼 좀 단순화시키자

 

- 글쓰기의 정답이 없듯이, 나답게 살기에 정답도 없어요!

 

이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만병통치약처럼 ‘정답이 없다’라는 말이 너무 난무한다고 여겨진다.

나답게 살기가 명료하지 않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일 것이다. 하긴 그것이 쉽다면 누구나 다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겠지. 어렵다면 좀 단순화시키자. 6하 원칙 같은 것에 대입하여 자신만의 것을 생성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where에 맞춰 베이스캠프를 도출했듯이 누군가는 when에 맞춰 명상의 시간 같은 것을 도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만의 무언가를 찾아가다보면 나답게 사는 삶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 관악산 역사트레킹

 

1. 코스: 강감찬생가 ▶ 낙성대공원 ▶ 자운암 ▶ 관악산계곡(북자하동) ▶ 관악산호수공원 ▶ 관악산입구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쉬는 시간 포함)

4. In: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3번 출구 / Out: 관악산입구

 

 

 

 

 

* 관악산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