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길산: 다산 선생께서 자주 발걸음을 하셨다는 운길산에서 양수리 방면을 찍은 사진이다.

 운좋게도 날씨가 정말 좋아서 사진이 잘 나왔다. 하늘에 구름이 참 멋지다!

 

 

 

 

 

 

 

껑뚱한 나, 다산 선생의 제자가 되다

다산 정약용 테마여행 이야기

 

 

 

 

 

 

 

따로 또 같이, 테마여행



우리는 다산 정약용 선생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필자의 이런 질문에 당황하신 분들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뚱딴지 같은 질문을 필자 스스로에게 해봤다. 나는 다산 선생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나? 다산 선생의 저작은 많이 읽어보았는가?

필자는 역사트레킹 인터넷 카페의 주인장이다. 우리 카페는 역사유물 탐방과 트레킹이 결합된 고품격(?)의 도보여행 카페다. 그래서 가입할 때,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인물이 누구인지를 묻는다. 흥미로웠던 것은 다른 역사인물보다 압도적으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 1위를 차지했다는 점이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같은 쟁쟁한 역사인물들을 물리치고, 다산 선생이 우리카페 회원들이 제일 존경하는 역사인물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퀴즈의 결과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우리 카페의 회원수는 겨우 8명에 불과하니까.

기사 앞 부분부터 싱거운 소리를 한다고 질책을 가하실 독자도 있을 것이다. 물론 필자는 이런 소리를 하려고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니다.

 

 

 

 

 

* 다산 정약용 선생상: 생가인 여유당에서는 저렇게 선비적인 풍모로 여생을 보내셨을 것 같다. 뒤쪽의 나무가 선생의 상과 잘 어울린다.

 

 

 

우리나라에 박경리 선생과 관련된 문학관은 세 개에 이른다. 강원도 원주, 경남 하동과 통영이 바로 그곳이다. 동학혁명기념관도 마찬가지다. 전북 정읍과 전주에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또한 장내리 집회가 열렸던 충북 보은에도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이 들어서 있다.

이렇듯 동일한 테마를 가졌지만 각 지역별로 나눠져 있는 기념관 혹은 기념공원을 하나의 주제로 묶어 탐방해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이번에는 원주 토지 문학관에 갔다면, 다음에는 통영 박경리 기념관을 방문하는 식이다.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박경리'라는 하나의 테마를 가진 곳이라, 두 곳의 일대일 비교도 가능할지 모른다. 자동차 있으면서 질질 끄는 거 싫어하는 분이라면 당일치기로 테마여행을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런 식의 테마 탐방은 무척 흥그런 테마 탐방은 무척 흥미로운 여행일 수 있다.

필자의 테마 탐방은 다산 정약용 선생 유적지다. 다산 선생의 유적지는 크게 두 개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그가 오랫동안 유배돼 있던 전남 강진이고, 또 하나는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다산 생가다. 하나를 더 하자면 수원 화성도 다산 테마 탐방에 포함된다.

 

 

 

 

 

* 다산길: 다산길은 남양주시에서 개설한 도보여행길이다. 아마 이 길을 다산선생도 걸으시지 않으셨을까?

 

 

 

L자형 여행

2010년 여름 당시 필자는 L자형 자전거여행을 행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시작한 여행은 제주도를 거쳐 고흥 나로호 우주센터에서 종료됐다. 이동한 지역을 선으로 이어보면 알파벳 L자와 비슷한 형상이 나와서 L자형 여행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L자형 여행 당시 필자는 제주도→완도→해남→강진 순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도자기로 유명했던 도요새의 고장 강진. 하지만 강진은 내게 '다산 정약용'의 고장으로 더 많이 기억됐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다산은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는데 그곳에서 수백 권의 책을 저술했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1801년에 있는 신유박해로 인해 억울하게 유배길에 올라야 했지만 다산은 그 황량한 유배지를 하나의 작은 '규장각'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이런 이유 때문에 일부러 강진의 다산 초당을 자전거 여행코스로 잡았던 것이다.

 

 

 

 

* 경세유표

 

 

 

 

*목민심서

 

 

 

 

1800년, 당시 조선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전 유럽에 걸쳐 프랑스 혁명을 전파했던 1799년. 당시 조선의 조정은 급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시파의 영수였던 체제공이 그해 1월에 서거했기 때문이다. 벽파로서는 체제공의 뒤를 잇는 시파 거물 정치인의 등장을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아야 했다. 벽파 입장에서는 누가 가장 위협적으로 보였을까. 당연히 정약용이었다. 정약용이 1순위였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체제공 서거 이후 정약용은 더 많은 모함과 박해를 받게 된다. 하지만 딱히 정약용의 손발을 묶을 방법이 없었다. 그만큼 정약용에게 흠결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했으면 '승복'해야 할 텐데 벽파는 그렇지 못했다. 꼼수를 썼던 것이다. 외곽 때리기를 했던 것. 정약용의 흠을 잡는데 실패한 그들은 형 정약전 때리기에 나섰다. 결국 정약전은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를 지켜본 정약용도 격분하며 낙향하게 된다. 그렇게 정약용이 한양을 등지고 낙향한 후 두 달도 안 돼 개혁군주였던 정조는 승하하게 된다. 그때가 1800년 6월이었다.

 

 

 

*다산초당: 강진의 다산초당. 이 현판을 추사 김정희가 썼다고 한다. 추사는 다산을 정신적인 스승으로 흠모했다고 한다.

 

 

정조의 승하는 벽파에게는 더할 수 없는 호재였다. 벽파는 기다렸다는 듯이 정조를 따르던 인사들을 축출하게 된다. 1801년 2월에 있은 신유박해가 바로 그것이다.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남인 계열 시파 100여 명이 사사됐고, 400여 명이 유배길에 나서게 된다.  이때 정약용도 유배길에 나서게 됐는데 처음 다산의 유배지는 경상도 포항 부근이었다. 하지만 신유박해 이후, 황사영 백사사건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정약용은 포항보다 더 궁벽한 강진 땅으로 이배되기에 이른다.

강진에서도 다산 선생의 유배지는 고정되지 않았다. 읍내에 있는 주막거리에 거처를 하기도 했고, 자신의 제자의 집에 머물기도 했다. 그러다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만덕산 기슭에 초막을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다산초당이었던 것이다. 다산초당은 정약용이 1808년에서부터 해배되던 1818년까지, 10년 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