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르니카: 게르니카에서 본 피소의 <게르니카>. 원본은 마드리드에 있는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에 있다.

 

 

 

 

☞ 지난 2023년 12월 14일부터 2024년 1월 26일까지 스페인과 튀르키예를 여행했습니다. 여행은 크게 3단계로 나눠서 했는데 1단계는 산티아고 순례길, 2단계는 스페인 도시여행, 3단계는 튀르키예 여행이었습니다.

여행을 하는 내내 여행일지를 기록했습니다. 이 포스팅들은 그 여행일지 노트를 토대로 작성됐습니다. 여행일지를 중심에 두고 작성된 포스팅이라 그렇게 재미진 포스팅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디테일한 정보를 가져다 주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개인의 여행일지를 객관화 하는 작업은 분명히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쌓이고 쌓인 것이 개인의 역사가 되고, 더 나아가 모두의 지식으로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 산탄데르 매그달레나궁(palacio de la Magdalena)

 

 

 

 

 

* 2023년 12월 28일 목요일: 15일차 / 맑음

- 산탄데르(Santander)는 말 그대로 바다를 보고 싶어서 방문한 곳이다. 대평원도 좋고, 산도 좋지만 망망대해, 그것도 대서양을 바라보고 싶은 생각에 이 동네로 발걸음을 한 것이다.

- 산탄데르에는 해수욕장이 여러개 있는데 여름만 되면 유럽 각지에서 온 피서객으로 인해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한다. 그 중에서 낙타해변(playa del camello)이라고 불리는 해수욕장과 왕족들의 별장인 매그달레나궁(palacio de la Magdalena)을 탐방했다. 낙타해변은 작고 아담했다. 하지만 파도는 거세게 몰아쳤다. 시원할 정도로 큰 파도였다.

- 매그달레나궁은 고풍스러운 면모와 현대적인 멋이 혼재된 그런 건물이었다. 주위 환경과 어울려서 그런지 더 눈에 띄었다.

- 낙타해변과 매그달레나궁을 가기 전에 산탄데르 대성당을 먼저 둘러보았다. 대성당을 출발해서 그 두 곳을 향해갔는데 좀 길을 헤맸다. 처음부터 해안길을 따라가면 손쉽게 갈 수 있었는데... 괜히 잘난척 하느라...ㅋ

- 바다도 실컷보고 헤매느라 걷기도 많이 걸었다. 이제 빌바오로 가야 한다. 산탄데르에서 빌바오까지는 약 100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버스로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 빌바오에 있는 ganbara hostel에 체크인을 했다.

 

 

* 산탄데르대성당

 

 

 

* 낙타해변에 있는 Neptuno, niño바위: 바위 위쪽을 보면 삼지창을 들고 있는 소년이 보일 것이다. 저길 어떻게 올라갔을까?ㅋ Neptuno은 영어로는 neptune, 즉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을 말한다. niño는 소년을 뜻한다. 그럼 소년 포세이돈인가?ㅋ

 

 

 

* 2023년 12월 29일 금요일: 16일차 / 맑음

- 전날 빌바오(Bilbao)에 있는 간바라 호스텔에 체크인을 했다. 빌바오라는 도시가 복잡한건지, 아니면 밤에 도착해서 그런지 밤길을 헤맸다. 그러다 얼떨결에 FC Bilbao 홈구장도 지나쳤다. 너무 헤맨다싶어 지하철을 타고 구도심으로 향했다. 빌바오에도 그렇게 지하철이 다니고 있었다.

- 겨우 부킹닷컴에서 ganbara hostel라는 호스텔을 찾아 예약을 했다. 그런데 이곳에는 스태프가 없는 것이다. 알고보니 이 호스텔의 정식 명칭은 ganbara hostel-self check in이었다. 4명의 빌바오 청년들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체크인을 할 수 있었다. 체크인 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이가 많은 이들이나 기계치인 사람들은 어쩌라는건가!

- 호스텔에서 체크 아웃을 하고 게르니카(Gernika)로 향하는 전철을 탔다. 빌바오대성당 근처에 있는 casco viejo에서 E4 노선을 탔는데 요금이 3.7유로였다. E4 노선은 빌바오와 빌바오 동쪽편을 연결하는 노선인데 게르니카를 거쳐 베르메오(Bermeo)라는 도시까지 운행을 한다. 베르메오는 바다 풍광이 아름다운 해안도시라고 한다.

- 어쨌든 전철을 타고 게르니카를 갈 줄은 몰랐다. 빌바오 casco viejo역에서 게르니카까지는 약 50분 정도 걸렸는데 바깥풍광이 예뻐서 지루하지가 않았다. 도심 구간을 지나니 철로가 단선으로 바뀌었다. 또 자세히보니 선로가 좁았다. 예전 수인선처럼 협궤 철도였던 것이다.

- 드디어 게르니카에 도착했다. 게르니카가 작은 동네인지 알았지만 꼭 그렇지가 않았다. 순례길 구간에 있던 마을들과 비교해보면 훨씬 컸다.

- 대충은 예상했지만 현재의 게르니카에는 스페인 내전 당시의 상흔이 크게 남아있지 않았다. 거의 다 복구가 된 거 같았다. 사실 서울도 한국전쟁을 혹독히 겪었지만 지금 서울에 한국전쟁 때의 상흔이 남아있는 장소가 거의 없지 않은가? 대신 게르니카 곳곳에는 조형물을 설치하여 그때의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 그렇게 곳곳을 탐방하다 드디어 게르니카 벽화 앞에 서게 됐다. 이걸 보기 위해 나는 그 애를 쓰며 이곳에 왔던 것이다. 드디어 게르니카 벽화를 내 두 눈으로 보게 됐다.

- 스페인 내전 당시 파괴되었던 게르니카대성당은 복구가 됐다. 그런데 복구를 해서 그런지 상단부와 하단부의 돌색깔이 차이가 났다.

 

 

 

* 게르니카대성당

 

 

 

* 게르니카대성당: 스페인 내전 이후로 복원됐다.

 

 

 

- 대성당 위쪽에 있는 parque de los pueblos de Europa 공원이 좋았다. 느긋하게 걷기 좋아 크게 두 번이나 돌았다.

- 게르니카 탐방을 마치고 다시 빌바오로 돌아왔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Guggenheim Bilbao Museoa)을 보기 위해 casco viejo에 하차한 후 구겐하임과 가까운 역으로 갈아탈 생각이었다. casco viejo에는 E1, E3, E4, FCC, L3 등등... 많은 노선이 지나는 교통의 요충지다. 그런데 환승이 안된다는 것이다. 뭐 이런게 다 있냐! 1.7유로니까 그냥 티켓을 끊을까 하다가 걸어가기로 했다. 강변길을 따라가면 구겐하임 미술관에 닿을 수 있으니까...

- 강변길 걷기를 한 건 잘한 선택이었다. 네르비온강(rio Nervion) 주변이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드디어 구겐하임 미술관에 도착했다. 왜 사람들이 구겐하임, 구겐하임 하는지 알겠더라. 그 규모에 앞도될 정도로 구겐하임은 웅장함을 자랑했다.

-이제 빌바오를 떠나 스페인 남부로 가야할 때이다. 기차를 탈까하다가 시간이 어정쩡하고, 비용도 비싸서 심야버스를 타고 마드리드공항에 있는 버스터미널(T4)로 이동했다. 이후 남부지방으로 가는 버스를 탈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땅한 버스가 없어 마드리드 시내로 들어가 Madrid-south터미널로 이동해야 했다. 노숙은 아니더라도 버스에서 밤을 지새웠다.

- 새벽 5시경에 프라도 미술관을 지나가는데 좀 묘한 생각이 들더라. 내가 지금 뭐하고 있지?

 

 

 

* 빌바오 네르비온강

 

 

 

* 빌바오 야경: 크리스마스, 신년 시즌의 빌바오

 

 

 

* 구겐하임미술관

 

 

 

* 게르니카: 스페인 내전 당시의 모습을 담은 전시물들.

 

 

 

* Large figure in a shelter: 거대 대피소라는 명칭의 작품. 게르니카와 어울리는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대성당 인근에 있는 parque de los pueblos de Europa 공원에 있다. free palestine!

 

 

 

 

레알마드리드 홈구장 가보니... 상암구장이 낫겠네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14] 허탕만 친 마드리드 탐방기

 

15.02.09 11:22   최종 업데이트 15.02.09 14:10

 

곽동운(artpunk)

 

 

 

 

 

 

 

 

 

 
▲ 알칼라 문 알칼라 문(Puerta de Alcala). 1778년 카를로스 3세에 의해 만들어지기 시작한 문으로 한때는 마드리드의 동쪽 경계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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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20일, 여행 18일째. 내일이면 스페인을 땅을 떠나게 된다. 작별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아쉬움과 함께 후련함이 몰려왔다. 분명 나중에는 다시 스페인 땅을 그리워하겠지만 그 당시에는 빨리 여행의 종착역으로 향해가고 싶었다.

후련하다는 감정이 든다는 건 무언가 확실히 뽑아냈다는 뜻일 것이다. 정확히 어떤 것을 뽑아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냐? 바로 '똥배'였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포함해서 계속 강행군을 했더니 '똥배'가 쏙 들어간 것이다. 여행 기간 동안 화장실을 잘 갔더니 배가 홀쭉해졌던 것이다.

역시 도보여행은 다이어트의 지름길이다.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수록 늘어나는 건 똥배뿐이었고, 그에 따라 허리띠도 길어졌다. 그런데 짧은 기간이나마 허리띠가 줄어드는 신기한 경험도 해보았다. 물론 서울에 돌아와서는 다시 원상복구가 됐지만...

 

 



 
▲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축구팀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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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 마드리드 홈구장보다 상암구장이 더 좋더라

스페인에 와서 정작 수도인 마드리드를 돌아보지 못했던 탓에 그날은 작정하고 마드리드 일대를 탐방하기로 했다. 마드리드 구도심은 도보로 이동을 해도 끝에서 끝까지, 약 1시간 정도 밖에 소요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지도로 중요 지점을 찍어가면서 시내 탐방을 하기로 했다.

처음으로 길을 잡은 곳은 축구팀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이 있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Santiago Bernabéu)였다. 스페인 프리메가리그의 팬이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팬인 필자에게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 방문은 그 자체로 흥분거리였다. 그곳은 구도심에서 좀 멀기에 지하철을 탔는데 이동하는 내내 심장이 '쿵쾅쿵쾅' 거렸다.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 도착했다. 경기가 없는 날이라 시합 구경은 못하더라도 구장 일대를 탐방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한껏 기대감이 차올랐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중심가에 서 있어서 그런지 레알마드리드 홈구장은 차도로 둘러싸여 있었다. 차도로 꽉 막힌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는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FC서울의 홈구장인 상암 월드컵 경기장이나 맨체스터 유나이티트의 올드 트레포드처럼 공원형 구장을 상상했는데... 그 공원에 앉아 느긋하게 커피 한 잔을 마실 생각이었는데... 그런 기대들이 무참히 사라졌던 것이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김에 잔디라도 한 번 밟아봐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매표소에서 구장 투어 가격을 알아봤다. 무려 19유로(한화로 약 2만3천 원)였다. 19유로면, 톨레도 왕복 차비에다 점심까지 먹을 수 있는 돈이다.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속으로 욕에 욕을 해댔다.

 


'FC 서울이랑 할 때는 당연하고, 레알 마드리드랑 맨유랑 붙었을 때도 맨유 응원해야지! 상암 구장이 훨씬 낫네. 인근에 하늘공원도 있고 말야.'

 


 
▲ 고야 프라도 미술관 앞에 서 있는 고야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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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도에는 '게르니카'가 없더라

다음 이동 장소는 프라도 미술관이었다.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라고 불리는 프라도 미술관은 1819년 개관했다. 프라도 미술관은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 등등... 미술계에 큰 족적을 남긴 유명 화가들의 작품 6천여 점을 보유하고 있는 유서 깊은 미술관이다.

미술에 문외한인 필자가 프라도 앞을 서성였던 건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보기 위해서였다. 화가 피카소를 좋아하고, <게르니카>의 가치를 잘 아는 만큼 직접 작품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워낙 유명한 곳이라서 그런지 미술관 앞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프라도 앞에서 그려야 '그림빨'이 사는지 열심히 스케치에 몰두하고 있는 예비 화가들, 느긋하게 잔디에 누워 늦가을 햇볕을 쬐고 있는 커플 등등... 그 중에는 한국인들도 많았다. 역시 이곳은 전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여기 게르니카가 없다고요? 왜요? 프라도면 당연히 게르니카가 있어야 되지 않나요?"

레알 마드리드 홈구장에서처럼 필자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당연히 세계 3대 미술관이라는 프라도 미술관에 <게르니카>가 있을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충격과 함께 창피함이 몰려왔다.

현재 왕립 소피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게르니카>는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던 피카소가 1937년 6월에 완성한 작품이었다. 그해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는데 고국 스페인관에 내걸 벽화를 의뢰받았다. 당시는 스페인 내전 초기였는데 여기서 '고국'이라하면, 당연히 프랑코 정권이 아닌 인민전선 정부를 말한다.

처음 피카소는 작품 구상에 시간을 허비했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4월 28일 바스크 지역에 있는 게르니카에 독일군이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고, 혼신을 다해 그 참상을 화판에 담아낸다. 그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 <게르니카>였다.

 

 



 
▲ 게르니카 왕립 소피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게르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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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도에서 소피아 미술관으로 이전된 게르니카

예전 일이다. 필자는 게르니카가 당연히 카탈로니아(동부) 지역인 줄 알았다. 스페인 내전 중에 카탈로니아에 대한 탄압이 극심했고, 이후에도 분리독립 운동이 활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게르니카는 바스크(북부) 지역이었다. 필자가 번지수를 잘못 안 것이다.

프라도의 명예 관장이었던 피카소는 프랑코 독재에 대한 항거의 뜻으로 <게르니카>를 스페인으로 보내지 않았다. 이후 <게르니카>는 조건이 하나 붙여진 상태로 뉴욕 근대 미술관으로 보내졌다. 스페인에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프라도에 내건다는 조건이었다.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한다. 그렇다고 프랑코 체제가 일거에 사라지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게르니카>는 1981년 9월 9일 고국 땅을 밟게 된다. 하지만 또 문제가 하나 생겼다. 프라도 미술관은 20세기 이후의 작품을 소장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1937년도에 탄생한 <게르니카>를 소장한다면 스스로의 원칙을 깨게 되는 셈이다.

결국 <게르니카>는 왕립 소피아 미술관으로 이동을 하게 된다. 결국 <게르니카>는 왕립 소피아 미술관으로 이동을 하게 됐다. 소피아 미술관이 현대미술을 전문적으로 소장 전시하는 곳이기에 그런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프라도가 19세기 이전의 작품만 소장한다는 원칙과 소피아 미술관이 현대미술의 보고라는 것만 알았어도 허무하게 발길을 돌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번 실수를 발판 삼아 미학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무식하다'는 쓴소리를 밑천 삼아서 더 열심히 책을 뒤적거려야겠다.

 

 


 
 해군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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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이 아쉽다... 스페인 해군 박물관에서

다음 탐방지는 프라도 미술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해군 박물관이었다. 원조(?) 무적함대의 나라 스페인에 왔으니 해군 박물관까지 걸음을 하게 됐지만 이곳은 한국인 방문객들에게는 큰 인기가 없는 곳인 듯싶었다. 민박집 추천 리스트 중에서도 이곳은 빠져 있었다.

앞선 두 탐방지에서 허탕을 쳤기에 이곳에서는 좀 진득하게 둘러봤다. 공항 검색대를 뺨칠 정도로 까다로운 보안 검색을 통과 한 후 입장을 했다. 입장료 3유로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전시물들이 다양했다. 해군이나 배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면 한 번쯤 방문해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배의 실물이 전시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축소된 모형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대포나 총기류, 칼과 같은 비교적 소형 장비들은 실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동양관에는 중국이나 일본, 베트남의 전통 함선들도 전시되어 있었지만 아쉽게도 우리나라와 관련된 것들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이 그 곳에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뒤로 하고 마드리드 시내를 가로질러 숙소로 향했다.

전체적으로 마드리드 여행은 허탕을 쳤고, 그만큼 아쉬움도 컸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왜? 다음에 다시 오면 되니까. 그때는 좀 더 알차게 탐방하면 되니까. 

 

 

 

 

 

 

 

* 해군 박물관: 마드리드 해군 박물관
   

 

 


 
▲ 솔 광장 마드리드의 핵심이라고 불리는 솔 광장. 각양각색의 희극인들이 쇼를 선보이며 관광객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사진 중앙에 빨간색 옷을 입은 광대는 공중부양을 하고 있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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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펠리페 2세 동상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독재자 프랑코가 우리에게 유신을 알려줬다고?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4편] 산티아고를 걷는 유럽인들

 

14.12.27 15:51l최종 업데이트 14.12.27 15:51

 

 

 

 

 

 

 
▲ 순례자 산티아고 대성당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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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들의 동료의식

산티아고 순례길에서의 또다른 볼거리는 바로 '사람'이다. 길을 걷다보면 전 세계에서 온 순례자들과 만나고 헤어지고를 수없이 반복한다. 순례자들의 일일 이동거리가 뻔하기 때문에 계속 동선이 겹쳐지고, 그러다보니 보는 얼굴이 계속 보이게 된다. 아침에 같은 알베르게(albergue: 순례자 전용 숙소)에서 출발한 사람과 점심 때 같은 바르(bar)에서 만나고, 그러다 저녁에 또 같은 알베르게에서 1박을 하고.

그래서인지 순례자들끼리는 자연스럽게 동료의식이 생긴다. 아예 팀처럼 움직이는 무리들도 있었다. 그들은 같은 알베르게에 묵으며 일정 자체를 공유했다. 심지어 그들은 빨래도 같이 했다. 알베르게에 있는 세탁기와 건조기의 요금은 보통 3유로 정도인데 개별적으로 하는 것보다 모아서하면 훨씬 저렴하기에 그들은 세탁물을 한 통에 넣어 세탁을 했다.

순례길을 걷기 전까지는 전혀 인연이 없던, 순례길을 통해 인연을 맺은 사람들의 옷들이 한 통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남자 속옷, 여자 속옷 가릴 것 없이 세탁기에서 원심 운동을 하고 있었다.

 

 

 

 



 
▲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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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피레네에서 끝났다!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은 다국적이었지만 역시 자국민인 스페인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스페인을 제외하고는 프랑스를 위시한 유럽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비유럽권에서는 한국인들이 가장 많은 듯했다.

유럽권 순례자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특히 히피처럼 보이는 순례자들을 보니 그 의문이 더욱 짙어졌다.

'중세는 그렇다 치고, 현대에 와서는 언제부터 유럽 사람들이 이렇게 산티아고 순례길로 몰려들었지? 프랑코 독재에 진절머리 쳤던 유럽 사람들인데 말야. 아직까지 스페인에 프랑코의 어두운 그림자가 남아 있다면 그들이 피레네 산맥을 넘었을까?'

<1984> <동물농장> <카탈로니아 찬가>로 유명한 소설가 조지 오웰은 스페인의 역사를 두고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스페인의 역사는 1936년에 멈추고 말았다."

조지 오웰은 1950년, 46세의 나이로 요절을 했고 그때까지도 스페인은 프랑코가 통치를 했다. 국제여단의 일원으로 스페인내전(1936~1939)에 참여해 목에 관통상을 당하는 등 엄청난 고생을 했던 조지 오웰이었기에 절대로 프랑코를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저런 말들을 쏟아냈을 것이다.

조지 오웰처럼 서구 사람들은 스페인에 대해서 고운 시선을 보낼 수가 없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끌어들여 선거로 들어선 인민전선 정부를 전복시켰던, 파시스트 프랑코 정권이 계속 존속했던 한 서구인들에게 스페인은 논외의 국가였을지 모른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었다.

"유럽은 피레네(산맥)에서 끝났다."

이렇듯 피레네 산맥은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에게 가상 경계선으로 인식됐다. 뻔히 피레네 산맥 아래에 스페인이 존재함에도 그들은 애써 이베리아반도를 유럽 대륙에서 떼어내려고 했던 것이다.

 

 

 



피레네를 들었다 놨다 했던 프랑코

그렇게 가상의 경계선이었던 피레네 산맥은 이제 산티아고 순례길의 시작점이 돼 전세계 순례자들이 모이는 집합소 역할을 해주고 있다. 그러고 보면 피레네는 20세기 들어 유럽과 스페인을 이어주는 가교가 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큰 장벽처럼 경계선이 되기도 하는 등 그 역할이 빈번했다.

그렇듯 피레네가 가교가 되던 장벽이 되던 그 중심에는 항상 프란시스 프랑코가 있었다. 프랑코의 파시즘을 막기 위해 유럽인들은 피레네를 넘었고, 프랑코가 스페인 내전에서 승리하게 되니 피레네를 경계선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다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하자 피레네를 통해 이베리아반도를 방문했다.

 

 



 
▲ 프란시스 프랑코 프란시스 프랑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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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가 사망을 했다고 군부중심의 독재체제가 일거에 해소되지는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다. 프랑코 체제가 하루아침에 민주체제로 변환된다고 생각하는 건 그저 판타지적인 상상일 뿐이다. 그래서 서구 국가들은 스페인의 민주주의 이행 과정을 근심어린 시각으로 바라봤다.


살얼음판 같았지만 '스페인의 봄'은 민주주의 체제로 착실히 이행되어 갔다. 정치개혁법 제정, 공산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의 합법화, 신헌법 제정 등, 39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프랑코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법안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어디나 구체제를 신봉하는 수구세력들이 있는 법! 역사의 수레바퀴가 언제나 순탄하게 돌아가지는 않는 법이다. 1981년 2월 23일, 민주화 이행에 불만을 가진 군부세력들이 국회의사당에 진입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프랑코 사후에 진행된 민주주의 개혁 덕택에 희미해졌던 피레네의 경계가 다시 'DMZ'처럼 선명하게 되돌려 질 판이었다.

 

 

 

쿠데타에 단호히 반대한 후안 카를로스 국왕


프랑코 체제에 향수를 갖고 있던 일부 군부 세력들은 공산당 합법화에 대해서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스페인 내전에서부터 40년간 반공을 국시로 삼고 스스로의 정당성을 부여했던 군부였다. 그래서 공산당까지 합법의 테두리로 끌어들이는 정당 개혁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행위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렇게 '스페인의 봄'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놓이게 됐다. 또다시 프랑코 시대와 같은 독재시대로 돌아갈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스페인의 민주화는 그렇게 쉽게 꺾이지 않았다. 아니다. 오히려 좀 싱거웠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왜? 6시간 만에 쿠데타 상황이 '종결'됐기 때문이다.

"조국의 단합과 영원함의 상징인 왕실은... 민주적인 정치 과정을 무력에 의해 파괴하려고 하는 어떠한 행동도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 후안 카를로스 후안 카를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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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이자 군 최고사령관인 후안 카를로스는 단호하게 쿠데타를 반대했고, 그들 세력의 그릇된 야망을 좌절시켰다. 후안 카를로스는 프랑코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됐지만 아돌포 수아레스를 총리로 내세워 개혁을 이끌게 했고, 쿠데타라는 긴박한 상황에서 결단력을 발휘하여 스페인이 구체체로 복귀하는 것을 막아냈다.


한편 후안 카를로스는 우리하고도 인연이 있다. 왕세자시절 한국인 사범으로부터 태권도를 배웠기 때문이다. 

 

 

 

<게르니카>와 산티아고 순례길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 중에 공화정부의 요청으로 그려진 작품이다. 피카소는 프랑코가 집권하는 한 조국으로 <게르니카>를 보낼 수 없다며, 미국에 그것을 맡겼다. 자유의 상징인 <게르니카>를 파시스트 독재자 손에 건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조국 스페인에 자유와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돌려보낸다는 조건이었다.

40년 넘게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타향살이'를 했던 <게르니카>는 드디어 1982년,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림의 반환에 스페인 국민들은 크게 환호했다. 전세계 사람들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스페인이 오랜 독재체제에서 벗어나 민주주의 사회로 거듭났음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만약 1981년 2월에 있은 군부 쿠데타가 성공을 했다면 <게르니카>가 고향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 산티아고 순례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스페인이 프랑코 체제를 극복하지 못했다면 순례길도 북적거리지 못했을 것이다. 

<게르니카>가 환대를 받으며 귀향했듯, 산티아고 순례길에도 봄바람이 불어왔다. 1982년 교황 바오르 2세의 방문, 1987년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 출간,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등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은 더욱더 북적북적 해진 것이다. 또다른 중흥기를 맞이한 것이다.

 

 

* 게르니카

 

 

 

 


대원군, 십상시, 문고리... 사극 찍어도 되겠네!

 


후안 카를로스 국왕이 태권도로 우리와 인연이 있듯 프란시스 프랑코도 우리와 관련이 있다. 유신 헌법이 바로 그 '인연의 끈'이다. 1972년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제정하며 영구집권을 획책했을 때, 관련 학자들을 스페인과 대만으로 파견했다고 한다. 당시 두 나라는 총통이 최고 권력기관으로 군림했었고, 유신헌법은 총통제를 목표로 했기에 '적절한' 파견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알다가도 모르는 게 세상일인 것 같다. 약 40여년 전, 총통제를 가르쳐줬던 스페인은 입헌군주국으로서 착실히 민주주의를 실천해 갔고,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의 기소에 앞장을 서기도 했다. 하지만 총통제를 배워갔던 우리나라는 그 유신헌법을 기초한 사람이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자리에 임하고 있다. '기춘대원군'이라는 매우 봉건 왕조적인 별명을 가지고 말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십상시'와 '문고리 3인방'도 있다. 대원군, 십상시, 문고리... 이 정도 캐릭터면 사극 영화 하나 찍어도 될 듯하다. 누가 아는가? <광해>나 <왕의 남자> 빰칠 정도의 흥행몰이를 할지!

 


 
▲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필자임.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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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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