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 둘레길 따라 가는 ‘역사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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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는 한강을 기준으로 남쪽에는 관악산, 북쪽으로는 북한산이 우뚝 솟아 있다. 그렇게 두 산은 서울의 남북을 든든히 받쳐주고 있지만 역시 사람들은 북한산을 서울의 최고 산으로 치고 있다. 그래서 관악산은 항상 ‘넘버 2′의 지위에 머물러야 했다. 하지만 한강 이남으로 국한을 시키면 관악산이 당당히 ‘진산’의 지위를 누릴 것이다.

관악산의 중요성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부각되었다. 삼국은 한강 하류지역을 얻기 위해 이 일대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고려시대에는 남경(서울)의 남쪽 방어를 위한 산으로 삼았다. 그렇듯 관악산은 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수많은 역사적인 사건들의 배경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그럼 관악산을 누비며 역사의 시간 속으로 걸어가 보자. 어렵지 않다. 힘들게 등산을 할 필요도 없다. 관악산 둘레길을 따라 걸으면 수월하게 역사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낙성대와 강감찬 장군 이야기

 

앞서도 언급했듯이 관악산은 역사적인 스토리텔링이 풍부한 곳이다. 그런 스토리텔링 중 가장 두드러진 곳은 바로 낙성대(落星垈)다. 낙성대는 고려 초기의 명장인 강감찬 장군의 생가로 한자에서도 보듯, 강감찬 장군이 탄생했을 때 별이 떨어졌다고 한다.

 

 

강감찬 장군 기마상과 낙성대 3층석탑

 

 

 

10만 거란군을 맞아 귀주에서 큰 승리를 이끌었던 인헌공 강감찬(948~1031년)은 사실 문신 출신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려시대에는 광종(925~975년)시기부터 과거시험이 시작됐는데 당시 과거는 문신을 등용하는 창구였다. 무신을 뽑는 과거는 고려 후기에 가서야 정례화 됐다. 즉 강감찬 장군은 문신 출신이었지만 귀주대첩이라는 큰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었던 것이다.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귀주대첩을 지휘할 당시, 강감찬 장군의 나이는 무려 70세였다는 것이다. 칠순의 나이에 최전방 사령관인 상원수가 되어 거란의 침입을 막아냈던 것이다. 그렇듯 노익장을 발휘하며 문무에 능통했던 인헌공 강감찬은 천수를 누리다 84세에 영면하게 된다.

 

 

 

사색하기 좋은 삼성산 성지

 

 

삼성산 성지

 

 

 

 

관악산 둘레길 역사탐방은 서울대 정문을 지나 삼성산 성지로 길을 잡아 볼만하다. 삼성산은 관악산의 지산이다. 삼성산 성지는 기해박해(1839년) 때 효수를 당한 세 명의 프랑스 신부들의 무덤이 있던 자리를 성역화 시킨 것으로 천주교 성지이다. 헌종 5년에 발발한 기해박해로 인해 앵베르도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등이 새남터에서 참수를 당하게 된다. 그들의 주검은 노고산을 거쳐 이곳 삼성산에 가매장 되는데 천주교에서는 이곳을 성역화 하였다. 현재 그들의 주검은 명동 성당 지하에 안치되어 있다.

 

기해박해는 같은 세도 가문이었던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간의 권력투쟁의 산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안동 김씨 집권기에는 천주교에 대해서 관대한 처분이 내려졌는데 그것이 빌미가 되어 기해박해가 일어나게 됐고, 박해 이후로는 풍양 조씨 가문으로 권력의 추가 넘어가게 됐기 때문이다.

 

관악산 주 등산로와 달리 삼성산 성지 일대는 등산객들이 많이 찾지 않는 곳이다. 더군다나 성지 인근에는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심어진 ‘삼성산 숲’이 있고, 또 거기서 좀 더 나아가면 ‘메타세콰이어 숲’도 있다. 한적하게 숲길을 거닐며 사색하기 좋은 환경을 가졌다는 뜻이다.

 

 

 

둘레길 탐방로

 

 

 

역사를 따라 둘레길 탐방도 하고, 한들한들 봄바람을 느끼며 사색을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관악산 둘레길이다. 주 등산로와는 달리 한적해서 더 좋은 곳이 바로 관악산 둘레길인 것이다.

 

 

■ 도움말
 1. 필자가 행한 관악산둘레길 역사탐방은 관악산둘레길 1, 2코스에서 이루어졌다.
 2. 코스: 낙성대역 ▶ 낙성대 ▶ 서울대입구 ▶헬기장 ▶ 삼성산 성지 ▶ 삼성산 성당
 3. 이동거리: 약 7km / 이동시간: 3시간 정도 예상(쉬는 시간 포함)
 4. 교통편: 출발-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 종료- 삼성당 성당 버스정류장에서 지하철 2호선 신림역행 버스 탑승. 약 10분 정도 소요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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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성대 3층석탑 12세기 경에 건립된, 낙성대 3층 석탑을 바라보고 있는 참가자들. 낙성대 3층석탑은 고려시대 건립된 탑으로 강감찬 장군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한편 석탑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곳이다. 그래서 석탑은 대개 사찰이나 폐사지에 세워진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낙성대는 사찰이 아니다. 사찰이 아닌 곳에 석탑이 세워진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다. 그런 면에서 낙성대 3층 석탑은 강감찬 장군의 위상을 대변해주는 큰 징표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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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악산 참가자 중 한 분이 서울대 방면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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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인 엄홍길 대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키운 건 도봉산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히말라야니, 킬리만자로니 이런 산들이 아니라 동네 뒷산인 도봉산이 현재의 자신을 있게 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 대목을 읽을 때 크게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었다. 아웃도어를 즐기는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베이스캠프가 하나씩 있을 것이다. 그 베이스캠프에서 잔뼈가 굵어지고, 더불어 '통'도 커진다. 똥개도 자기집 앞마당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 말처럼 아웃도어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반은 먹고 들어갈, 그런 베이스캠프가 필요한 법이다.

그 말을 빗대서 생각해보면 엄홍길 대장의 베이스캠프는 도봉산이다. 그럼 필자의 베이스캠프는 어디일까? 관악산이다. 동네 뒷산은 아니지만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는 관악산이 베이스캠프 역할을 해주었던 것이다. 필자는 그곳을 활보하며 '다리통'을 늘렸고, '깡다구'도 키웠다.  

 

관악산과 관악산둘레길


봄기운이 스며들던 지난 8일. '관악산 둘레길 역사 트레킹'을 실시하려고 길을 나섰다. 3년 전, 관악산에도 둘레길이 개설됐는데 그 길을 탐방하고자 배낭을 꾸린 것이다. 소셜다이닝 모임인 '집밥'을 통해 모집된 참가자들과 함께해서 그랬는지, 이번 트레킹은 북적북적 거렸다.

2011년에 개통된 관악산 둘레길은 3개 코스로 구성되어 있고, 총 연장이 15km에 달한다. 관악산 둘레길도 최근 몇 년 사이에 급격히 늘어난 걷기 열풍의 일환으로 탄생되었다. 사실 이 길들은 기존에는 등산로로 쓰였다가 그 열풍을 타고 '관악산 둘레길'로 이름 붙여진 것이다. 북한산 둘레길도 마찬가지다. 기존의 등산로가 둘레길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트레킹을 즐기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러한 변화들이 반갑다. 자신의 '보폭'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턱대고 증설되는 것에는 반대한다. 그런 둘레길 개척 비용이 다 국민들의 세금으로 충당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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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산 숲길 아직은 황량하지만 이제 곧 짙은 녹음으로 울창한 수림을 이룰 것이다. 왼쪽에 있는 나무들은 메타세쿼이어. 메타세쿼이어들이 울창해질 때 다시 한 번 이 길을 걸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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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의 위세 때문인지 관악산은 서울의 진산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강남 지역에서는 관악산이 최고일 것이다. 관악산 일대의 가치는 이미 삼국시대에서부터 형성되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한강 하류지역의 주도권을 잡게하기 위해 이 일대에서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다. 고려시대에는 남경(지금의 서울)을 방어하기 위한 남쪽산으로 그 전략적 가치가 중시되었다.


이런 역사성 때문인지 관악산은 흥미로운 스토리텔링들이 넘쳐난다. 광화문에 해태상이 조각된 이유는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한 방편이라는 이야기, 조선 태종이 셋째 세종에게 양위를 할 것을 눈치 챈 첫째 양녕대군과 둘째 효령대군이 도성을 빠져나와 왕좌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기 위해 수도를 했다는 연주대 이야기. 하지만 연주대(戀主臺)는 그 한자 이름에도 나타나듯이 왕좌에 대한 그리움이 넘쳐났던 공간이라는 이야기.

 


 

 

노익장을 발휘한 문신 출신, 강감찬 장군


그런 관악산 스토리텔링 중 가장 많은 주목을 받는 것은 고려시대 명장 강감찬 장군과 그의 생가인 낙성대(落星垈)일 것이다. 낙성대라는 의미에서도 보듯, 강감찬 장군이 태어날 때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굳이 신화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역사적인 인물을 과도하게 칭송했다고 거부감을 드러내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군사정권 시절, 성역화 작업의 한 대상자였던 강감찬에 대해 외면하고 싶은 시각도 존재할 것이다. 참고로 현재의 낙성대는 1974년, 유신헌법이 한참 맹위를 떨칠 때 건립된 것이다.

"그거 아세요. 강감찬 장군이 사실은 문신 출신이라는 거요."
"정말요?"
"더 놀라운 사실이 있어요. 장군께서 나이 70에 최전방 사령관으로 직접 전투를 지휘했다는 겁니다. 그러다 귀주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둬서 거란 세력을 물리쳤고요."
"아,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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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감찬 장군 동상 2013년 여름경에 촬영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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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설명에 참석자들은 좀 놀라는 표정이었다. <삼국지>의 황충 장군도 아니고, 고희의 나이에 최전방에서 칼을 휘둘렀다는 점이 놀라웠을 것이다. 더구나 상대편은 당시 동북아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거란족들이 아닌가?


이야기를 좀 더 확장해 보자.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두고 금수지국(禽獸之國)이라고 칭하며 건국 초부터 강경 정책을 펼쳤다. 그래서 거란이 선물로 준 낙타를 굶겨 죽인, 일명 만부교 사건도 발생하게 됐던 것이다.

거란은 요나라를 세우고 동북아에서 위세를 떨쳤다. 당시 요나라는 만리장성 부근에서 송나라와 대치를 하게 됐는데 한반도에 있는 고려에 대해 늘 신경을 곤두세웠다. 고려가 송나라와 손을 잡고 자신들을 공격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3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였던 것이다. 강감찬 장군은 3차 침공 때 상원수가 되어 10만 거란군을 격퇴시켰고 그로 인해 고려는 전란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낙성대 3층 석탑 좀 보세요.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탑인데요. 12세기 경에 건립됐으니 천 년의 세월을 버틴 탑이라네요."
"아 그렇군요."
"탑이라는 건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담아 놓는 조형물이잖아요. 그런데 강감찬 장군은 부처님도 아니고 유명한 고승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곳에 탑이 세워졌습니다. 아무래도 강감찬 장군의 위엄이 생각 이상으로 엄청났던 것 같아요."

일반적으로 탑이라 하면 불탑을 지칭한다. 이런 불탑은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제작된 터라 사찰이나 폐사지가 아닌 곳에 불탑이 세워진 경우는 거의 없다. 이를 다르게 이야기하면 강감찬 장군에 대한 고려인들의 흠모가 얼마나 열광적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게 많은 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인헌공 강감찬은 84세에 천수를 누리다 영면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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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산 성지 왼쪽부터 앵베르도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라고 쓰여 있는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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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산 성지


낙성대를 뒤로 하고 본격적인 관악산 둘레길 역사트레킹이 시작됐다. 트레킹 팀은 서울대 입구를 지나 삼성산 성지로 향했다. 삼성산은 관악산의 지산으로 원효, 의상, 윤필 세 분의 성인이 움막을 짓고 수도에 정진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성산에 있는 삼막사(三幕寺)의 유래도 거기에서 나왔다.

그런 삼성산에 성지가 있는데 불교 성지가 아니라 천주교 성지다. 삼성산 성지는 기해박해(1839년) 때 효수를 당한 세 명의 프랑스 신부들의 무덤이 있던 자리를 성역화 시킨 것이다.

세도 가문이었지만 안동 김씨는 천주교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폈다. 하지만 뒤이어 집권한 풍양 조씨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에 앞장섰다. 그렇게 하여 발발한 것이 헌종 5년에 있었던 기해박해였다. 이로 인해 권력의 중심은 풍양 조씨로 넘어갔다. 그런 면에서 기해박해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간의 권력투쟁의 부산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기해박해로 인해 앵베르도 주교(한국명: 범세형)와 모방, 샤스탕 신부 등이 새남터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 그들의 주검은 노고산(마포구 노고산동)을 거쳐 삼성산에 묻히게 된 것이다. 이후 천주교에서는 이곳을 성역화 하였고 지금의 삼성산 성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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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산 성지 참가자 한 분이 삼성산 성지(천주교)에 있는 팻말을 촬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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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산 성지는 조용히 사색하기 좋은 곳이다. 성지라서 그런지 다른 탐방객들도 목소리를 낮추고 주위를 경건하게 둘러보고 있었다. 삼성산 성지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삼성산 숲이라는 소나무 군락지도 있는데 이곳도 사색하거나 시집을 꺼내 읽기 좋은 곳이다.

관악산의 또다른 자랑인 메타세쿼이어 숲 탐방을 끝으로 관악산 둘레길 역사트레킹도 무사히 끝마칠 수가 있었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아직 봄기운이 스며들지 않아 겨울 산의 황량함이 배어 있었다는 점이다. 꽃망울이 터지길 바랐는데….

뒤풀이로 순두부찌개를 먹으며 우리 역사트레킹팀은 다음을 기약하였다. 트레킹을 하며 역사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역사트레킹! 앞으로도 역사트레킹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도 한 번 참가해 보는 게 어떠신지? 최소한 필자와 함께 다니면 심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말만 잘하면 간식도 챙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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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산 성지 마리아상 앞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분의 모습을 촬영했다. 이 사진은 사전 답사때 촬영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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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타세쿼이어 관악산에도 저런 울창한 수림이 있다. 이 사진은 2012년 5월에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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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
1. 관악산둘레길은 1, 2, 3코스가 있고, 총 거리는 15km에 이른다.
2. 필자가 행한 <관악산 둘레길 역사트레킹>은 1, 2코스에서 이루어졌는데 좀 변형을 시켰다.
3. 역사트레킹코스:  낙성대역 ▶ 낙성대 ▶ 서울대입구 ▶헬기장 ▶ 삼성산 성지 ▶ 삼성산 성당
4. 이동거리: 약 8km / 약 3시간 30분 정도 소요 예상(쉬는 시간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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