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금티에 세워진 동학 장승들

- 우금티 장승제이야기

 

14.02.19 14:09l   최종 업데이트 14.02.19 14:09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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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장승제 금강 풍물패가 사물놀이를 하고 있다. 한편 왼쪽 장승은 웨이브가 져서 무척 독특한 형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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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실제로 동학군들이 살육을 당한 곳은 우금티 고개 아래쪽이다. 사진에서 버스와 트럭이 다니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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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으로 불리는 장승은 마을 입구와 같이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 세워졌다. 역병 같은 액운을 막고, 마을의 무사태평을 기원하기 위해 세웠던 것이다. 즉 장승은 마을의 수호신이자 지킴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공주 우금티 고개에 세워지는 장승들은 그런 교과서적인 의미의 장승들과는 '임무'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왜? 우금티는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동학군들이 결사항전을 벌인 역사적인 장소이기 때문이다. 동학군들의 한, 민초들의 한이 서려 있는 곳이기에 그곳에 세워지는 장승들도 남다른 '스토리'를 갖게 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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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 장승작업은 나무 껍질을 벗기는 것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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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김작업 장승의 얼굴과 복부 부분의 틀을 잡기 위해 전기톱으로 깎고 있다. 장승은 남녀 쌍으로 제작하기에 사진에서처럼 동시 작업을 할 수 있다. 사진 오른편에서 나무 껍질을 벗기고 있는 사람들은 공주대학교 학생들이다. 공주대 이명희 교수는 교학사 역사교과서 집필에 참여해 식민지 근대화를 역설했지만 정작 나이 어린 공주대 학생들은 우금티에서 동학 정신을 기리는 장승을 깎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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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6일, 충남 공주시 우금티 고개에서는 우금티 장승제가 거행됐다. 우금티 장승제는 공주민주단체협의회와 우금티 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행사로 매년 정월대보름 주간에 열렸다. 벌써 20년이 넘는 유서 깊은 제례라고 한다.

장승제라고 해서 매년마다 장승을 세우지는 않았다. 그렇게 장승을 깎지 않았던 해는 제례만 드렸다고 한다. 제례를 통해 공주 지역의 무사태평과 함께 동학 정신을 기렸던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시간상의 한계 때문에 미리 제작된 거대한 장승이 세워지는 것으로 장승제가 진행된다. 하지만 우금티 장승제에서는 현장에서 장승이 직접 제작되어 참관객들의 시선을 끌었다. 또한 참관객들이 장승 제작에 직접 손발을 보태기도 했다. 필자도 힘을 보탰다. 땔감을 날랐고, 다듬기 작업도 했다. 하지만 크게 일한 티가 나지 않았다. 역시 내가 잘하는 걸 해야지!

'그래서 내가 지금 이 기사를 쓰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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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 역시 공주대학교 학생이 글씨가 새겨지는 부분을 다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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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 윤여관 우금티기념사업회 집행위원장께서 끌과 망치로 장승의 얼굴 부분을 정교하게 입체화 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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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 제작의 첫 단추는 나무껍질 벗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장승에 쓰이는 나무는 밤나무와 같은 목질이 단단한 것들이 선호되지만 일반적으로는 야산에서 구하기 쉬운 소나무가 주로 쓰인다. 껍질이 제거되면 나무는 '알몸'을 드러낸다. 이제 본격적인 장승 제작이 시작되는 것이다.

몸통이 매끈하게 드러난 목재에 전기톱을 이용하여 기본스케치를 하는 것이 두 번째 작업이다. 얼굴 부분과 글씨가 새겨질 복부 부분에 기본스케치를 하게 된다. 이후 얼굴 부분과 몸통부분은 좀 다르게 작업된다.   

얼굴 부분은 끌과 망치로 깎아내는 작업을 하게 된다. 마치 조각가가 조각을 하듯이 정교화 작업을 하는 것이다. 복부 부분은 낫으로 다듬기 작업을 한다. 글씨가 새겨질 곳이기 때문에 평탄하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런 것들이 세 번째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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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 장승의 밑둥을 불로 그슬리고 있다. 밑둥은 흙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쉽게 부식될 수 있다. 그래서 목질의 내구성을 강화시킬 목적으로 밑둥 부분을 불로 그슬린다. 사진 중앙에 마스크를 쓰고 있는 사람이 한준혜 공주민주단체협의회 집행위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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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 장승의 복부에 글을 적는다. 보통의 장승들에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란 글씨들이 새겨지지만 우금티 장승들은 좀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문구들이 쓰여진다. 그래서인지 음각을 하지 않고 즉석에서 먹으로 글씨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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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는 나무 밑동을 불로 그슬리는 것이다. 밑동 부분은 땅 속에 묻히기 때문에 쉽게 부식될 수 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불로 그슬리는 것이다. 그렇게 불로 그슬리면 목질이 단단해지고, 벌레들이 덜 침투하게 된다. 

이제 글씨를 새기는 작업이다. 칼로 음각을 새기고 그 위에다 먹칠을 하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우금티 장승들은 음각을 하지 않고 그냥 먹으로 글씨를 적었다. 왜? 우금티 장승들은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같은 통상적인 문구를 가진 장승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작업은 장승 세우기였다. 미리 준비한 솟대와 함께 장승을 세우는 것으로 장승 작업은 종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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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세우기 예전에는 직접 삽으로 땅을 파서 장승을 세웠지만 요즘은 포클레인으로 땅을 파고 장승을 세운다. 이렇게 하여 장승제작과 장승세우기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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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제 장승세우기가 끝나고 이제 제례가 시작됐다. 우금티기념사업회 이원하 사무국장이 제례의 사회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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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보듯 장승 세우기는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마을 공동체가 움직여야 가능한 작업이다. 그렇게 마을 주민들의 공동의 염원과 기원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장승들이 떡~하고 마을 앞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해보시라. 얼마나 든든하겠는가? '세콤'이 달린 것보다도 훨씬 더 든든할 것이다.

우금티 장승들에는 '시민교통노조화합'과 '살림·나눔·모심' 같은 문구들이 새겨졌다.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과 같은 일반적인 문구들이 아니라 지역 단체들의 염원과 기원이 새겨졌던 것이다. 현안에 맞춰 더 디테일한 문구들이 장승에 새겨진 것이다.

그렇게 하여 우금티에는 한 쌍의 장승들이 더 자리 잡게 되었다. 120년 전, 못다핀 동학군들의 열망이 서려있는 우금티에 농민군들의 뜻을 이어받은 장승들이 더 세워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동학군들의 장승들이 더해지니 우금티가 든든해 보였다.  

장승제가 무사히 끝난 후, 필자도 나름대로 장승에 새겨질 문구를 떠올려보았다. 만약 필자에게 먹과 붓이 주워졌다면 이런 문구를 새겨 넣었을 것이다.

'친일매국노 교과서 축귀'
'국정원 댓글 조작 축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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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 한쪽편만 있던 장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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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 왼쪽에 새로운 장승이 세워졌다. 우금티 고개가 더 든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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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동학군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와 일본은 기어코 조선땅에 군대를 파병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대로 청나라는 조선 정부의 파병 요청을 받고 진압군을 보냈다. 이에 일본도 텐진 조약을 빌미 삼아 조선땅에 군대를 급파하게 된다. 청나라야 요청을 받았다지만 일본군의 파병은 뚱딴지같은 처사였다. 조선 정부의 공식 파병 요청도 없었을 뿐더러 전주화약 이후에 조선 땅에 들어 왔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남부지방이 아닌 한성으로 진격을 했다. 동학도들이 한성에다 집강소를 차린 것도 아닌데.

그랬다. 일본군들은 이미 그릇된 야욕을 품고 조선땅을 침략했던 것이다. 그래서 1894년 6월 하순에 경복궁을 공격했고, 곧이어 청나라와 청·일 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런 거듭된 일본의 침략 야욕에 동학군들은 크게 반발하며 본격적인 항일 투쟁에 나서게 된다. 그들은 전열을 가다듬고 충청도 공주로 진격을 하게 된다. 당시 공주는 충청 감영이 있던 곳으로 호서 지방의 중심지였다. 공주성을 함락시킨다면 호서 지방도 동학군들의 세력 범위 안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주성으로 나아가려는 동학군과 이를 진압하려는 관군, 일본군 사이에 큰 전투가 벌어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우금티 전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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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농민운동 겉면에는 주제가 나가고, 날개를 들어 안쪽을 보면 그 주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기재된 작품. 충남 천안여고 역사동아리 학생들이 제작한 것이다. 역시 여고생들이 제작해서 그런지 꼼꼼함이 돋보였다. 설명 부분에 기재된 내용도 상당히 심도가 있었다. 웬만한 성인들도 잘 모를 수 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충실히 잘 기재하였다. 우리 청소년들이 역사를 잘 모른다고 걱정들을 하시는데 이런 작품들을 보면 오히려 자기 자신을 책망할지 모른다. '읔, 고딩들보다 내가 더 모르네...'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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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죽창으로 무장했던 동학군들에게 개틀링 기관총과 야포를 난사했다. 일본군과 관군의 우수한 화력 앞에 동학군은 속수무책 당하고 말았다. 약 1만 5000명 정도 되는 동학농민군들이 우금티에서 비통한 최후를 맞았고 동학군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됐다.

당시 일본은 동학군의 진압에 심혈을 기울였다. 우금티 전투가 일어날 무렵, 일본군은 청·일 전쟁 중이었는데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와 요동반도를 공략하고 있었다. 그래서 동학군의 봉기를 후방을 교란하는 심각한 사태로 판단하고 무자비하게 진압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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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 공주대 교학사 역사교과서 파동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 중 하나는 공주대가 아닐까? 저자 중에 한 사람인 이명희 교수가 공주대 역사교육과에 재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군다나 이 교수는 총대를 매듯 이번 사태에서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으니, 그 비판의 화살이 이 교수를 넘어 공주대 전역으로까지 퍼져나가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을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공주대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은 무척 억울했을지도 모른다. 자기와는 관계 없는 인물 때문에 괜히 자신들까지 도매급으로 팔려나갔으니까. 하지만 걱정마시라! 필자가 만나본 공주대 역사교육과 재학생들은 패기가 넘쳤고, 무척 똘똘했다. 도매금으로 팔려나갈 인물들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학생들이 교수보다 더 낫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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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보다 학생들이 더 낫네

본격적인 우금티 추모제에 앞서 사전 행사인 역사 축제가 공주대학교 산학협력관에서 개최됐다. 공주대학교? 혹시 교학사 역사교과서의 주요 필진 중의 한 명인 이명희 교수가 재직하고 있다는 그곳?

그렇다. 교학사 교과서 문제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이명희 교수는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에 재직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번 역사 축제는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재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프로그램을 총괄하고 있었다. 단순히 장소 제공을 넘어 전체 진행을 주도적으로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금티 역사축제는 충남 관내에 있는 고등학생들이 직접 제작한 작품 전시와 소극장에서 펼쳐지는 발표회, 두 축으로 이루어졌다. 꼼꼼한 손길로 제작된 전시물들에는 동학뿐만 아니라 독도, 위안부 강제 동원 같은 다양한 문제들이 담겨져 있었다. 작품 의도가 무엇이냐는 필자의 물음에 학생들은 똑 부러지는 설명도 잊지 않았다. 해당 내용을 제대로 숙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당찬 모습에 '요즘 애들은 역사를 너무 모른다'고 몰아세우는 편에 섰던 한 사람으로서 좀 부끄럽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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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넋전 넋전을 직접 땅에 꽂고 있는 청소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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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교학사 역사교과서 파동으로 인해 공주대학교는 본의 아니게 큰 불똥을 맞게 됐다. 선봉장(?) 역할을 맡고 있는 이명희 교수가 목소리를 높이면 높일수록 애꿎은 공주대학교의 재학생·졸업생·교수들까지 도매금으로 묶여 질책을 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가 만나본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학생들은 무척 합리적이었고 쾌활한 젊은이들이였다. 해당 학과의 교수 한 명 때문에 다수의 청춘들이 싸잡혀서 욕을 먹는다? 이거 정말 불합리하지 않은가?

우금티 추모제는 오후 3시 우금티 고개에서 행해졌다. 참가자들이 죽은이의 넋이 담겨져 있는 넋전이라는 종이 인형을 제단 앞쪽에 꽂으면서 추모제는 시작됐다. 추모제는 해원무 공연, 사물 놀이 공연 등으로 이어졌는데 전체적으로 규모가 작게, 조촐하게 치러졌다. 공동집행위원장인 지수걸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는 이런 인사말을 했다.



"여기서 북쪽으로 3km 정도만 올라가면 금강이 나옵니다. 만약 동학군들이 우금티를 넘고, 금강을 건넜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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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추모제례 119년 전 우금티 고개에서 유명을 달리한 동학농민군들의 넋을 달래는 추모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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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변했을 것 같다. 적어도 일제강점이라는 치욕적인 역사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면 분단도 없었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이란 그저 허무한 일이라지만 그래도 이런 유쾌한 상상력은 삶에 활력을 가져다줄지 모른다.

 

 

 

 

 

 

 

 

 

 

 

 

'교학사' 이명희 교수, 공주대 제자들에게 배우시길

공주에서 '우금티 전투' 추모제례·역사축제 열려

13.11.06 13:47l최종 업데이트 13.11.06 15:42
곽동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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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 작은 외계인? 이것은 넋전이다. 넋전은 죽은이의 넋을 담은 종이 인형을 말한다. 이 넋전에는 우금티 전투에서 비통하게 눈을 감은 동학농민군들의 혼이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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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캐릭터 이제 동학농민전쟁 기념식도 정형적인 틀에서 벗어나 젊은층의 참여를 이끌 수 있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런 캐릭터 이벤트는 청년층에 대한 참여와 관심을 이끌 수 있다. 한편 위의 캐릭터에 새겨진 초코릿 복근이 무척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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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냐, 우금치냐

지난 10월 27일. 옛 백제의 도읍이었던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행사가 하나 개최됐다. 119년 전 공주 우금티에서 비통한 최후를 맞은 동학 농민군들에 대한 추모 제례와 역사 축제가 행해진 것이다.

일단 용어 정리가 필요하겠다. '우금치'는 알겠는데 '우금티'는 무엇이냐고 반문을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또 '치'나 '티'나 비스무리한데 굳이 왜 우금티를 내세우냐고 물으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고개를 뜻하는 순수한 우리말은 '티'나 '재'였다. 칡이 많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충북 충주의 '갈티고개', 노루들이 출몰한다는 경북 봉화의 '노루재'가 그 좋은 예일 것이다. 하지만 일제는 고개를 뜻하는 우리말에도 왜곡의 씨앗을 뿌려 놓았다. 일제는 지도를 제작하면서 고개마다 이름을 붙였는데 고개를 뜻하는 한자 '티'자가 없었기에 손쉬운 대로 '언덕 치(峙)'자를 가져다 붙였다고 한다. 그래서 '우금티'가 '우금치'로 개명된 것이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 때문인지 공주 지역에서는 우금치가 아닌 우금티로 더 많이 불리고 있었다.

옛 고지도를 살펴보면 '언덕 치(峙)'를 쓴 지명들이 적지 않게 나타난다. '곰치재'나 '웅치' 같은 곳들이 그런 곳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굳이 우금티라는 명칭을 소리 높여 부른다고 오히려 질책을 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금티가 어떤 곳인가?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동학농민군들이 학살에 가까운 몰살을 당한 곳이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이 결합되었기에 '우금치'가 아닌 '우금티'로의 제 이름 찾기는 분명 의미가 있는 발걸음으로 평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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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수걸 교수 지수걸 교수는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학과장이자 이번 <우금티 추모제례 및 역사축제>의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얼마전 같은 학과에 있는 이명희 교수의 <교학사 역사교과서>에 대한 비판을 꼼꼼하게 담은 성명서를 발표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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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4년 11월, 공주 우금티 고개


그럼 119년 전인 1894년에 도대체 우금티에서는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 아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모르시는 독자들을 위해 부연 설명을 해보겠다.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한 동학군은 그 기세를 몰아 정읍을 점령하고 전주로의 진격을 결행한다.

전주가 어떤 곳인가? 당시 전주는 전라도의 핵심 지역으로 관찰사의 소재지였다. 한마디로 전라도의 심장부가 동학군에 의해 점령되었던 것이다. 이에 당황한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구원 요청을 한다. 이에 외국 군대의 국내 입성에 대한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들이 모아져 동학군과 정부 사이에 전주화약(6월 11일)이 맺어졌다.     

전주화약 이후 동학군의 세력 범위에 있던 지역은 점차 안정화를 찾아갔는데 그 중심에서는 집강소 제도가 있었다. 동학농민군이 휩쓸고 간 지역은 치안과 행정이 마비됐는데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동학군의 대척점에 서 있던 사람들이 누구였는가, '가렴주구'를 행한 장본인들이 누구였는가를 생각해보면 쉽게 유추가 될 것이다. 동학군에 의해 탐관오리들이 처형됐으니 해당 고을의 치안과 행정은 마비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전봉준과 전라도 관찰사 김학진은 전라도 지역의 안정화를 도모하고자 민간자치 기구를 설치하기로 합의한다. 그렇게 하여 탄생된 것이 바로 집강소였다. 집강소는 자치 기구였으나 사실상 지방행정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실질적인 지역 통치기구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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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뚜껑으로 만든 우리나라 우리나라 외교에서 쟁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병뚜껑에 기재하여 제작한 병뚜껑 한반도. 충남 예산 여고 학생들이 급우들과 함께 만든 작품이다. 독도나 위안부를 적은 병뚜껑이 많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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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 작은 외계인?: 이것은 넋전이다. 넋전은 죽은이의 넋을 담은 종이 인형을 말한다.

이 넋전에는 우금티 전투에서 비통하게 눈을 감은 동학농민군들의 혼이 담겨져 있다.

 

 

 

* 병뚜껑으로 만든 우리나라: 우리나라 외교에서 쟁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병뚜껑에 기재하여 제작한 병뚜껑 한반도. 충남 예산 여고 학생들이 급우들과 함께 만든 작품이다. 독도나 위안부를 적은 병뚜껑이 많이 눈에 띄었다.   

 

 

 

 

 

* 학생 작품: 겉면에는 주제가 나가고, 날개를 들어 안쪽을 보면 그 주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기재된 작품. 충남 천안여고 역사동아리 학생들이 제작한 것이다. 역시 여고생들이 제작해서 그런지 꼼꼼함이 돋보였다. 설명 부분에 기재된 내용도 상당히 심도가 있었다. 왠만한 성인들도 잘 모를 수 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충실히 잘 기재하였다. 우리 청소년들이 역사를 잘 모른다고 걱정들을 하시는데 이런 작품들을 보면 오히려 자신을 책망할지 모른다. '읔, 고딩들보다 내가 더 모르네...' 하면서!   

 

 

 

 

 

 

 

* 국립 공주대: 교학사 역사교과서 파동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 중 하나는 공주대가 아닐까? 저자 중에 한 사람인 이명희 교수가 공주대 역사교육과에 재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군다나 이 교수는 총대를 매듯 이번 사태에서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으니, 그 비판의 화살이 이 교수를 넘어 공주대 전역으로까지 퍼져나가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을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공주대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은 무척 억울했을지도 모른다. 자기와는 관계 없는 인물 때문에 괜히 자신들까지 도매금으로 팔려나갔으니까. 하지만 걱정마시라! 필자가 만나본 공주대 역사교육과 재학생들은 패기가 넘쳤고, 무척 똘똘했다. 도매금으로 팔려나갈 인물들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학생들이 교수보다 더 낫더라!

 

 

 

* 우금티 캐릭터: 이제 동학농민전쟁 기념식도 정형적인 틀에서 벗어나 젊은층의 참여를 이끌 수 있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런 캐릭터 이벤트는 청년층에 대한 참여와 관심을 이끌 수 있다. 한편 위의 캐릭터에 새겨진 초코릿 복근이 무척 인상적이다.  

 

 

 

 

 

* 넋전: 넋전을 직접 땅에 꽂고 있는 청소년들.

 

 

 

 

 

* 지수걸 교수: 지수걸 교수는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학과장이자 이번 <우금티 추모제례 및 역사축제>의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얼마전 같은 학과에 있는 이명희 교수의 <교학사 역사교과서>에 대한 비판을 꼼꼼하게 담은 성명서를 발표했었다.

 

 

 

 

 

* 우금티 추모제례: 119년 전 우금티 고개에서 유명을 달리한 동학농민군들의 넋을 달래는 추모제례

 

 

 

 

 

* 은진미륵: 은진미륵을 옆에서 본 모습이다. 뒤쪽으로 보이는 곳은 황산벌이다.

 

 

 

 

* 관촉사 5층 석탑: 관촉사 석등과 함께 은진미륵 앞에 병렬에 서 있다. 필자가 방문했을 당시는 그 앞으로 무언가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무려 36년 동안 제작된 은진미륵

우리나라에서 최대이고 긴 세월 동안 제작된 터라, 관촉사 석불에는 흥미로운 설화가 스며있었다. 어느날 반야산에 큰 바위가 불쑥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에 고려 조정은 그 바위로 불상을 만들 것을 결정하고 당대 최고 고승이던 혜명 스님에게 그 일을 맡겼다. 고려 광종 19년(968)에 시작된 석불 건립은 목종 9년(1006)에 가서야 완성이 됐다. 석불 제작은 다리, 몸통, 머리 세 부분으로 나뉘어서 제작이 됐는데 각 부분이 다 완성된 후 큰 문제가 발생했다. 각 부분들이 엄청나게 크고 무거운 터라 인력으로는 석불을 세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 타워크레인이 있었겠는가?

혜명 스님의 고민은 깊어 갔다. 그러던 차에 스님은 아이들이 진흙 불상 놀이를 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거기서 힌트를 얻어 석불을 세웠다고 한다. 아이들도 다리, 몸통, 머리를 따로따로 제작하여 불상을 만들었는데 나중에 그것을 독특한 방법으로 합체를 했던 것이다. 먼저 다리를 세우고 그 주위를 모래로 채우고는 물을 뿌려 주위를 단단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비탈을 만들어 몸통을 굴려서 올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래비탈을 이용해서 진흙 석불을 3단 합체했다는 것이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혜명스님은 '옳거니'했고, 결국 18m가 넘는 엄청난 규모의 석불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렇듯 은진 미륵불은 제작시기와 제작자가 명확한 석불이다.  

 

 

 

 

 

 

 

 

 

▲ 은진미륵 필자 대신 등장한 나의 배낭. 이제 저 배낭을 메고 계속 해서 '모험'을 떠날 생각이다. 은진미륵의 큰 손을 붙잡고 함께 모험을 떠나고 싶다!

 

 

 

 

 

▲ 은진미륵 은진미륵이 워낙 거대해서,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남성이 무척 작아보인다.

 

 

 

 

# 고려 전기시대에 제작된 대형석불들

한편, 은진 미륵불이 제작된 고려 전기시대는 거석 석불이 유행한 시기였다. 고려왕조 창건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호족들의 독특한 지방문화가 불교문화제에 투영된 시기였던 것이다. 활기차고 강건한 지방문화가 석불 건립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거대한 돌미륵을 탄생시켰다.

고려 전기에 제작된 대형 석불들은 여러 개가 있다. 부여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일명 파주 쌍미륵), 안동 이천동 석불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 시기에 세워진 석불들은 하나 같이 다 엄청난 크기들을 자랑하고 있다. 신체비례에 맞춰 정교함을 구현하는 방식이 아닌 특정 부위를 부각시킨 거대한 석불을 제작하였다. 그런 탓인지 관촉사 석불은 3등신에 가깝고, 얼굴은 '얼큰이'다. 또 손은 마치 야구글로브를 낀 것처럼 아주 크다.

은진미륵을 가까이에서 마주하니, 당장이라도 내게 그 큰 손을 내밀고 이렇게 말하는 듯싶었다.

'어이 곽 작가, 지금 당장 나랑 같이 모험을 떠나자고!'

그럼 왜 그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큰 석불들을 제작했을까?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보다 세공기술이 덜해서 그랬던 것일까?

고려 전기 시대에는 고을의 평안에서부터 각 개인의 기복까지 다 받아주는 수호신 같은 거대한 석불이 제작되었다. 이런 대형 석불은 해당지역의 민간신앙까지 접목되어, 마치 돌로 큰 장승을 세운 것처럼 형상화됐다. 거인 같은 미륵불이 마을입구나 왕래가 잦은 곳에 떡하니 서 있으니 해당지역 사람들은 얼마나 든든했겠는가? 방범용 CCTV가 없었더라도 아주 든든했을 것 같다. 은진미륵이 서 있는 반야산도 황산벌이 보이는 곳으로 인편의 왕래가 잦은 곳이다.

 

 

 

 

▲ 대조사 석조관음보살입상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생김새와 조각기법 등이 논산 관촉사 석조관음보살입상과 유사성을 띄고 있다.

대조사는 충남 부여에 있는 사찰이다. 부여의 옆동네가 논산으로 두 지역은 무척 가까이에 있다.

 

 

 

 

# 은진미륵의 디테일은 선이 굵은 디테일

한편 디테일(detail)적인 관점으로 은진미륵을 바라본다면 어떤 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충남 서산시 가야산 자락 절벽에는 6세기 말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산마애삼존불상이 새겨져 있다.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은 섬세한 백제 불교 미술의 정수라고 할 만하다. 마치 한 땀 한 땀 수를 놓은 듯이 바위에 새겨진 마애삼존불은 정교성을 강조한 '세밀한 디테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손도 크고, 얼굴도 큰 은진미륵은 '선이 굵은 디테일'로 불릴 수 있을 것 같다. 얼굴과 손을 강조했고, 더군다나 발가락까지 크게 부각시킨 은진미륵을 두고 기계적인 관점에서 디테일이 떨어진다고 하면 그거 정말 곤란한 일이다. 세밀한 디테일이 있는가 하면 선이 굵은 디테일도 있지 않겠는가?

 

 

 

▲ 서산삼존마애석불 6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서산 삼존마애석불. 일명 백제의 미소로 불린다. 세밀한 디테일이 두드러진 정교한 석불이다.

 

 

 

 

 

 

은진미륵께 삼배를 올린 후, 필자는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자리를 계속 옮겨가며 열심히 사진을 찍다 카메라 LCD창에 비친 내 얼굴을 보게 되었다. 내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것도 그냥 웃음이 아니라 함박웃음이었다. 그냥 은진미륵 앞에 서 있으니 좋았던 것이다. 필자는 그냥 복을 넝쿨째 받은 느낌이었다.

은진미륵께서 복을 내려주셨으니 필자의 새로운 비즈니스가 번창할 것 같다. 새로운 비즈니스? 필자는 현재 outdoor와 tour를 접목한 일명 '아웃투어'를 아이템 삼아 사업을 시작할 예정이다. 거창한 일은 아니고, 그저 예전부터 해왔던 여행을 나름대로 특화시켜볼 생각이다. 기회가 된다면 <오마이뉴스>에도 아웃투어와 관련된 기사를 송고할 생각이다.

논산 관촉사에 가서 은진미륵께서 주신 '기복'을 받아왔으니 앞으로는 좋은 일들만 가득할 것 같다. 독자여러분들도 좋은 일들이 가득하시길 기원해본다.

 

 

 

 

 

 

 

 

 

 

 

 

 

 

 

 

 

 

 

 

 

 

 

 

 

 

▲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 일명 은진미륵이라고 불리는 우리나라 최대의 석불이다.

신체비율을 따르지 않고 머리, 손, 발 등을 크게 부각시켰다. 고려 전기시대에는 이렇듯 대형 석불들이 많이 제작되었다.

 

 

 

* 관촉사 은진미륵: 손과 얼굴이 크게 부각됐다!

 

 

 

 

 

 

 

미륵불의 큰 손을 잡고 모험을 떠나고 싶다!

-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불인, 관촉사 은진미륵불

 

 

 

인간은 나약한 존재다. 남들 앞에 서는 센 척, 강한 척 하지만 골방에 들어서면 한없이 고독감에 빠져드는 외로운 존재다. 꿈자리가 뒤숭숭하면 아침부터 문안 전화를 돌린다. 시험 날짜를 받아두면 자신이 관운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처녀보살'을 찾는다. 그렇듯 인간의 운명이란 한 치 앞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절대자에게 의탁하게 되고, 기도를 올리게 된다. 그런 기원을 올리는 곳이 동네 서낭당일 수도 있고, 팔공산 갓바위일 수도 있다.

아무리 우리 사회가 근대를 넘어 탈근대를 지향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에게 내포된 불안감은 영구적이기에 기복신앙도 항상 우리 곁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듯 필자도 꿈틀거리는 불안감을 억누르고, 꼬여 있는 실타래를 푼다는 생각으로 기원을 드리러 갔다. 최근에 필자가 새로 시작하는 비즈니스가 있는데 그 일이 잘되길, 기원드리러 간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로 기도를 드리러 갔단 말인가? 갓바위로 갔는가? 아니다. 충남 논산으로 갔다. 황산벌이 내려다보이는 논산 관촉사로 갔다. 은진미륵에게 기원을 드리려고.

 

 

 

▲ 은진미륵 필자도 사진에 등장한 분처럼 은진미륵께 삼 배를 올렸다.

 

 

 

 

 ▲ 관촉사 석등 은진미륵 앞에서는 석등이 세워져 있다. 4각 석등으로 전형적인 고려식 석등이다.

 유명한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에 있는 석등처럼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석등이다. 이 석등 외에도 관촉사 5층 석탑이 은진미륵 앞에 병렬되어 있다.

 

 

 

 

 

 

#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교회는 군대교회

4월 4일 목요일 오전.


필자는 느긋해 있었다. 평일이라 고속버스를 타는 사람들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논산까지 2시간 20분 정도 걸리니까 점심은 논산에서 먹으면 되겠군. 푸하핫! 예전 자전거여행 할 때 밥 먹었던, 그 백반집으로 가야지!'

그러나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세상일이다. 고속버스터미널에 가니 오전 논산행 버스가 다 매진됐다는 것이다. 추석 명절 같은 특별 운송기간도 아니고, 더군다나 평일 오전 시간에 버스좌석이 없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곧 있으면 임시버스가 증차되니까 좀 기다리세요."

평일날 임시버스가 운행된다는 소리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사정을 알고 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논산 연무대에서 입소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연무대에서 입소식이나 퇴소식이 있는 날에는 순식간에 좌석이 매진이 되고, 증차까지 된다고 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그날 승차장에서는 사복을 입은 '빡빡 머리'들이 많이 목격됐었다.

강원도 군번인 필자는 그렇게 예비 '논산 군번'들과 함께 논산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군대시절에 다녔던 교회를 떠올렸다. 필자도 교회를 다녔었다. 물론 초코파이 때문에 갔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초코파이는 군대교회에서 먹었던 초코파이였다.

초코파이 먹는 맛에 교회를 다니긴 했지만, 그래도 그 시절의 신앙은 참 순수했었다. 그 시절의 '기복'이라게 뻔하기 때문이다. 훈련의 무사복귀, 내무생활 잘하기, 무사히 제대하기 등등... 이것만큼 순수한 신앙이 어디 있겠는가? '세상 것'들 과는 질적으로 다른 진정한 신앙이었다. 

 

 

 

* 관촉사 석등: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등이다.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진 석등에 비해 규모가 크다. 

 

 

 

 

# 황산벌이 보이는 반야산

관촉사는 논산시내에서 가깝다. 약 3km정도 떨어져 있는데 버스터미널에서 걸어가면 40분 정도 걸린다. 필자는 천천히 논산 시내를 걸으며 관촉사 방면으로 길을 잡았다.

관촉사는 반야산이라는 야트막한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반야산은 넓은 평야지대에 위치한 산이다. 그곳에 올라서면 가까이는 계백장군이 혼이 살아 있는 황산벌이 보이고, 멀리는 계룡산과 대둔산이 보인다. 그렇게 전망이 좋은 곳에 일명 은진미륵이라고 불리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 입상이 서 있었다. 은진 지역에 있다해서 은진미륵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보물 제218호인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은 높이가 18m가 넘는 우리나라 최대의 석불이다. 크기가 크기인지라 제작하는데 무려 36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 황산벌과 은진미륵 관촉사가 있는 반야산에서는 황산벌이 눈 앞에 펼쳐진다. 멀리는 계룡산과 대둔산이 눈에 들어온다.

 

 

 

 

* 무량사 극락적, 오층석탑, 석등: 귀중한 유물 세 개가 동시에 일렬로 서 있는 모습이 무척 이채롭다.

 

 

 

*부여의 단풍

 

 

 

 

---> 전편에 이어

 

 

# 대조사의 석조관음보살입상

 

 

장하리를 떠난 답사단은 임천면 대조사로 향했다.

대조사는 부여 천도를 위한 밑돌 역할을 해주는 중요한 사찰이었다. 백제 성왕이 천도를 앞두고 직접 대조사의 창건을 명했다고 하는데, 사찰터를 지목한 사람은 유명한 백제의 고승 겸익이라고 한다. 겸익은 성왕의 명을 받고 인도로 직접 가서 범어를 배우고 돌아온 최초의 백제 승려였다. 성왕이 직접 창건을 명하고, 겸익이 그 사찰의 터를 지목하였던 만큼 사비시대의 대조사는 의리의리 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하지만 현재의 대조사는 어마어마한 사찰이 아니다. 대조사가 있는 임천면 성흥산에 올랐을 때의 첫 느낌은 ‘뭐야 왜 이렇게 작아’였다. 우리동네 관악산에 있는 사찰보다도 더 작은 대조사였다. 물론 사찰을, 물리적인 공간의 크고 작음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성왕과 겸익이 창건에 힘을 썼다면서?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하는데 신호탄과 같은 역할을 했다면서...

 

 

 

# 고려 초기 석불: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하지만 그런 ‘외소 콤플렉스’를 일거에 날려버릴 석불이 있었다. 바로 석조미륵보살입상이다. 석조관음보살입상은 무려 10미터가 넘는 큰 키를 자랑하는 ‘거인’과도 같은 풍모였다. 얼핏 보면 우스꽝스러운 외모를 가지고 있는데 인체비례로 따지면 4등신에 가깝다고 한다. 또한 얼굴은 어찌나 큰지 ‘얼큰이’ 같았다. 머리에 쓴 네모난 관도 매우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정교성보다는 투박함이, 조화미보다는 개성이 넘치는 석상이었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고려 초기의 작품이다. 옆 동네 논산 관촉사에 있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도 고려 초기의 작품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그럼 왜 고려 사람들은 선이 굵으면서, 개성이 넘치는 이런 큰 석불을 제작했을까? 이전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의 사람들보다 정교성이나 세공 기술이 떨어져서 이런 식으로 석불을 제작을 했단 말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고려시대 사람들의 기술력이 떨어져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대조사 석조관음보살입상은 당시 그 지역, 중부지방 일원의 민간신앙이 접목된 석불이었다. 마치 큰 장승을 세운 것처럼 석불을 조각했던 것이다. 마을의 수호와 안녕부터 개인적 기복까지 다 받아주는 수호신과 같은 ‘키다리 아저씨’를 제작했던 것이다. 삼국시대 귀족불교에서 출발한 불교문화가 통일신라를 거친 후 고려 초기 시대에 각 지역의 민간신앙과 어떤 식으로 접목이 되었는지 탐구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한편, 재미있는 것은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약 18미터)보다 키가 작을지 모르지만 보물로 재정된 순번은 더 빠르다는 것이다. 대조사 석불이 보물 제217호이고, 관촉사 석불이 보물 제218호다.

 

대조사는 경내가 작지만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있어 큰 사찰이 됐다. 10미터가 넘는, 그것도 천년의 세월을 이겨내며 꿋꿋이 성흥산 일대를 굽어보는 석불이 있는 사찰이 작다고 표현을 하면, 그거 큰 실례일 것이다. ‘대조사는 아담하기에 차분하게 경내를 둘러 볼 수 있어 좋았다. 큰 대조사 석불이 있어 작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바꿔서 표현할 수 있겠다.

 

 

 

 

* 대조사 석조관음보살입상: 멀리 아래쪽에서 찍어봤다.

 

 

 

* 대조사의 건물들과 석조관음보살입상: 대조사는 경내가 작은 사찰이었다. 하지만 석조관음보살입상이 있어 결코 작은 사찰이 아니었다.

 

 

 

 

 

 

이제 일행은 무량사로 향했다. 무량사는 외산면 만수산에 위치해 있다. 무량(無量)사의 뜻은 셀 수 없다는 뜻이다. 세월도, 돈도, 삶조차도 셀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곳 무량사에 들어서면 셀 수 없단다. 무량사를 탐방했을 때가 11월 3일이라 세상은 이미 늦가을에 접어들었다. 그래서 저 강원도 지역은 이미 단풍철이 지났다고 했다. 하지만 무량사는 늦가을의 정취가 남아 있었다. 올 가을은 단풍놀이다운 단풍놀이를 못하고 넘어가나 했더니 무량사에서 단풍을 제대로 구경했던 것이다. 문화재 관람과 단풍놀이를 동시에 즐겼던 셈이다. 이래서 사람들이 우리문화답사 여행을 떠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문화 유적을 탐방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대자연의 정취에 녹아들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 선조들이 만든 유물과 유적은 자연의 조화를 중시해 제작을 했다는 뜻이다.

 

 

 

# 방랑시인 김시습의 흔적이 곳곳에 베어든 천년 고찰 무량사

 

무량사는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이 말년을 보낸 곳으로 유명하다. 세조에 의해 단종이 폐위된 사건을 보고 천재 시인 김시습은 세상을 등지고 정처 없이 유랑길에 나선다. 그렇게 유랑생활을 계속하다 말년에는 이곳 무량사에 머무르게 되고, 결국에는 병환으로 서거하게 된다. 그때가 그의 나이 59세였다.

 

이렇듯 무량사는 김시습과 관련된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그 유명한 무량사 극락전의 편액을 김시습이 직접 썼다고 한다. 당시 극락전은 수리를 하고 있었는데, 마땅히 시주할 것이 없었던 김시습은 글씨로서 시주를 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편액 글씨로서 재능 나눔을 했던 셈이다.

 

김시습의 유려한 서체가 빛나는 극락전은 외형도 참 웅장하다. 외부에서 보면 2층 기와집인데 안으로 들어가면 1층이다. 위아래를 터버려서 하나의 층으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극락전 내부에 모셔진 소조아미타여래삼존상도 키가 크다. 본존인 아미타불상이 무려 5.4미터라고 하는데 동양 최대 규모라고 한다. 극락전 외부가 크고 웅장한 만큼 내부의 삼존불상도 크고 화려했던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무량사는 2층 전각 구조를 가졌다. 극락전은 조선 중기 시대에 재건축되었는데 다층 구조를 가진 건축물은 충북 보은의 법주사 팔상전이 유명하다. 억불 정책에 의해 불교를 탄압했던 조선에서 크고 웅장한 다층 구조의 사찰 건축물이 들어섰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고 한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승병장들의 활약으로 인해 천대받던 불교가 다시 주목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곡창지대에 있는 사찰들을 중심으로 큰 건축물들이 들어서게 됐다고 한다. 전북 김제 금산사 미륵전, 전남 구례 화엄사 각황전, 충북 보은 팔상전 등이 대표적이다.

 

 

 

# 무량사의 자랑: 무량사 오층 석탑

 

무량사에서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무량사 오층석탑이다. 오층석탑은 차곡차곡 쌓아 올려진 모습이 인상적이다. 한층 한층 올라가지만 안정감을 잃지 않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7미터 이상으로 쌓여 올린 탑은 고려 전기의 작품이라고 한다. 같은 시기에 제작된, 앞서 본 장하리 삼층석탑과는 좀 다른 인상이 느껴진다. 이런 장중하면서 안정감을 강조한 오층석탑이 무량사 극락전 앞에 서있다.

 

또 오층석탑 앞에서는 석등이 하나 서있다. 일명 무량사 석등이다. 이 역시 고려 초기의 작품이라고 한다. 석등을 맨 앞으로 하여, 오층석탑과 극락전이 연이어 서있는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다. 귀중한 우리의 문화유산들이 조밀한 공간에 세 개나 있다는 건, 보는 이에게 새 배 이상의 기쁨을 선사할 것이다.

 

답사는 외산면 반교마을과 홍산면 홍산관아 탐방으로 이어졌다. 반교마을은 돌담길이 잘 정비된 곳인데 현재 유홍준이 ‘휴휴당’이라는 집을 짓고 실제로 살고 있는 곳이다. 유홍준은 자신이 반교마을 청년회 회원이라고 힘주어 말해 답사객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홍산관아는 옛 관아의 원형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 곳이다. 관아는 고을의 수령이 직무를 보던 곳으로 지금의 군청이나 읍사무소의 역할을 했다. 대신 조선시대 수령들은 사법권도 행사하고 있었기에 관아에는 자체적으로 감옥도 갖추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에 330여 곳에 관아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친 후 관아들은 다 파괴되거나 원형을 잃게 된다. 그나마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한 관아가 바로 홍산현 관아라는 것이다.

 

홍산관아 탐방을 끝으로 하루 동안의 짧은 부여 답사여행이 끝이 났다. 좀 더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다음 기회를 기약해야 했다. 하긴 한 번 오고 다시 부여에 안 올 텐가?

 

이렇게 좋은 답사여행을 준비해주신 유홍준 선생님과 눌화출판사에 감사를 드린다. 유홍준 선생님은 우리나라 문화 답사의 붐을 일으킨 주범(?)으로서 앞으로도 더 많이 답사여행 가이드에 나서주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책에 기술된 유적 앞에서 독자들을 위해 마이크를 든 저자 유홍준의 모습은 참 행복해보였으니까!

 

 

 

 

 

* 무량사 극락적, 오층석탑, 석등: 차례로 위치해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무량사 극락전: 조선 중기에 다시 지어졌다고 한다. 외부에서는 2층으로 보이나 사실은 천장이 높은 1층이다. 층간을 터버려서 내부는 1층으로 만든 것이다.

 

 

 

*무량사 오층석탑: 한 층, 한 층 올려진 모습이 안정감 드러낸다. 고려 초기 작품으로 백제와 통일신라 기법이 어우러진 석탑이라고 한다.

 왼쪽 하단에 있는 꼬맹이 녀석은 오층석탑이 좋은지 탑돌이를 하는 것 같다.

 

 

 

 

 

*홍산 관아 객사: 조선시대에는 전국 팔도에 330여 고을이 있었고, 그 고을마다 관아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관아들은

거의 다 사라져 갔다. 홍산현 관아는 비교적 원형복원이 잘 된 곳이라고 한다.

 

 

 

 

 

* 홍산현 관아 객사: 조선시대 객사에는 임금과 궁궐을 상징하는 궐패가 안치되었다고 한다. 수령은 임금을 대신하여 고을을 다스리기에 그에 걸맞은 징표를 객사에 두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객사는 수령이 근무하는 동헌보다 더 격이 높은 곳이라고 한다. 한편 동헌은 객사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헌이라고 불린다.

 

 

 

 

 

 

 

 

 

 

 

 

* 대조사석조관음보살입상과 답사객: 이 사진을 통해서도 대조사 석불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석불 뒤쪽으로 길이 있어 바로 옆에서 석불을 볼 수 있다. 또한 소나무가 석불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무척 이채롭다.

 

 

 

 

 

* 장하리 삼층석탑: 석탑 바로 옆이 민가라 그런지 마을아주머니가 탑 주변에서 작업을 하시고 계셨다.

 

 

 

 

---> 전편에서 계속

 

 

 

충청남도 부여는 백제의 3번째 수도였다. 일명 <개로왕 국서>라 불리는 문서로 인하여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한성이 함락되고 백제왕이 죽는 참극이 일어났는데 그 때가 서기 475년, 개로왕 즉위 21년이었다. 국왕이 죽고, 수도가 함락된 백제는 허둥지둥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천도를 한다. 그때부터 웅진 백제시대라고 하는데, 웅진 시대는 서기 475년부터 538년까지 약 63년간 지속된다.

 

부여로의 천도는 26대 성왕 시기에 이루어진다. 성왕은 국호를 백제에서 남부여로 바꾸고 국가의 부흥을 도모하게 된다. 급기야 웅진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의 천도가 이루어지기까지 했다. 그 시기를 일컬어 사비시대라고 한다. 서기 538년부터 백제가 멸망한 660년까지를 말하는데 약 122년에 걸쳐 사비시대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부흥을 위해 천도된 곳에서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을 당해야 하는 비운을 겪게 된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백제가 멸망하고 난 후 부여는 그저 중앙권력에서 벗어난 변방에 불과했다. 그건 공주도 마찬가지였다. 경주 -> 개경 -> 한양으로 중앙권력이 이동을 했지만 부여와 공주는 옛 백제 땅으로만 기억될 뿐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중앙에서 비켜난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현재의 부여와 공주는 문화유산 답사를 하기에 상당히 호조건에 있다. 호젓하게 문화유적 답사를 하고, 느긋하게 트래킹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데 역사의 현장도 ‘새옹지마’가 될 수 있는 것일까?

 

 

 

 

*부여의 단풍

 

 

 

* 유홍준: 무량사 경내에서 무량사의 연혁과 김시습에 대한 설명을 답사객들에게 하고 있다.

 

 

 

 

 

 

 

 

여행의 일정은 다음과 같았다.

 

국립부여박물관(정림사터) 집합 -> 장암면 장하리 삼층석탑 -> 임천면 대조사 -> 외산면 무량사 -> 반교마을 -> 홍산관아 -> 국립부여박물관 입구

 

오전 9시부터 진행된 답사는 오후 5시가 되서야 끝이 났다. 일명 '유구라'라고 불리는 유홍준 선생의 입담은 직설적이면서도 구수했다. 막힘이 없는 달변을 구사했고, 주제 전달력도 상당히 뛰어났다. 자연스럽게 청중의 집중을 이끌어 냈다면 그거 여행가이드로서 최고의 능력 아닌가? 이런 분이라면 여행의 주도권을 내놓아도 상관이 없지.

 

첫 도착지인 장하리 삼층석탑은 장하리 마을 언덕에 세워진 고려시대 석탑이다. 그 유명한 정림사지 오층 석탑의 '3층석탑' 버전으로 보이는 이 석탑의 축조 시기는 고려 전기라고 한다. 장하리 삼층석탑은 ‘늘씬함’을 드러내지만 정교함을 잊지 않은 모습이었다. 사비 백제시대 축조된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롤모델로 삼은 탑이지만 그냥 무턱대고 베끼지는 않은 듯싶었다. 백제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 초기의 탑 축조 기술이 서로 어우러져 장하리 삼층석탑을 만들었던 것이다.

 

한편 옛날에는 삼층석탑 자리 옆에 한산사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한산사는 사라지고 삼층석탑만이 홀로 남아 웅장했을 옛 사찰의 기억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것은 정림사 오층석탑도 마찬가지다. 현재 정림사도 절터만 남아 있고 오층석탑만이 웅장했을 정림사의 옛 모습을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고보면 사찰은 사라져도 석탑은 남아 있게 되는 것 같다. 돌은 그냥 남아 있는 것 같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이스턴 섬의 이스턴 석상이나 영국의 스톤 헤지가 항상 그 자리에 그렇게 서있는 것처럼 말이다.

 

 

 

 

 

* 반교마을: 유홍준 선생의 반교마을 집의 이름은 '휴휴당'이다. 그 대문을 지키고 있는 백소나무가 눈길을 끈다. 얼핏보면 저 백소나무가 비실비실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런 나무들이 꿋꿋하게 오래간다고 한다. 자신의 응축된 에너지를 잘 간직하고 있다가 제때에 방출한다는 것이다. 오버하지도 않고, 건방을 떨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너지를 발산할 때는 발산을 하여 한뼘 한뼘 자신의 가지를 키운다고 한다. 괜히 자기 잘난 맛에 취해 자신의 에너지를 한꺼번에 쏟아 놓고 사멸해 가는 인간들에게 좋은 교훈을 주는 나무인 것 같다. 인생은 한 방 인가? 그건 모르겠고. 최소한 나무의 인생에서 한 방은 무척 위험한 것이다.

 

 

 

* 부여의 가을

 

 

 

 

 

 

 

 

 

 

 

 

 

 

 

 

 

* 대조사 석조관음보살입상: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생김새와 조각기법 등이 논산 관촉사 석조관음보살입상과 유사성을 띄고 있다.

안동 이천동 석불상, 관촉사 석불 등 고려 초기의 석불 등은 위 사진처럼 아주 거대한 크기로 제작됐다. 전체 높이가 10미터가 넘는 대조사 석상은

그냥 봐도 투박하다. 인체 비례도 맞지 않다. 이천동 석상이나 관촉사 석상도 마찬가지다. 왜 고려 초기 사람들은 이토록

투박하고 '얼큰이' 같은 석불을 제작했을까? 그들의 조각 실력이 미천해서???

 

 

 

 

* 대조사 뒷길 단풍: 대조사 탐방을 마친 후 임천면 면사무소 방면으로 길을 걸을 때 이 단풍나무들을 만났다. 생각지도 못한 단풍놀이를 해서 무척 흥이 났다.

 

 

 

 

 

---> 이 여행기는 유홍준 선생님과 함께 하는 부여답사기에 참여를 하고 작성한 포스팅입니다. 현재 충남 부여에 둥지를 튼 유홍준 선생님은 부여문화원의 요청으로 2009년 4월부터 부여답사 여행에 가이드를 하시고 계십니다. 1회 답사여행의 정원은 80명인데, 유홍준의 네임밸류가 있어서 그런지 접수와 동시에 마감이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부여문화원을 통해서 부여답사를 한 게 아닙니다. 눌와출판사라는 곳에서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2>가 새롭게 나왔는데, 신간 발행 기념으로 답사이벤트를 진행했고, 저도 운이 좋게 답사에 참여를 하게 된 것입니다.

 

눌와출판사 탐방단 일행 40여 명은 부여문화원이 주관한 답사에 서로 결합하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그래서 11월 3일에 있은 부여답사 일행은 총 120명이나 됐답니다. 뜻깊고 알찬 행사를 주관해주신 눌와출판사와 부여문화원측에 감사를 드립니다. 덕분에 저도 좋은 답사여행을 했고, 현장에서 바로 책도 한 권 구매를 했습니다. <유홍준의 국보순례>라는 책을 사서 유홍준 선생님에게 직접 저자 사인도 받았습니다.

 

아! 정말 이런 문화 체험이벤트는 정말 좋습니다. 저자도 만나고, 책에 기술된 현장에 대한 답사도 하고. 꿩먹고 알먹고...ㅋ 기회가 닿는다면 <유홍준의 국보순례>에 대한 서평도 한 번 써보고 싶네요.

 

 

 

 

 

# 아웃도어와 문화답사

 

나는 아웃도어 여행을 즐겨하는 터라 단독여행이나 소규모 여행을 선호한다. 그래서 가이드 여행을 많이 해보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여행을 할 기회가 별로 없었고, 할 필요도 못 느꼈다. 가이드여행이라면 여행의 주도권을 내가 아닌 가이드들이 행사하는 것인데, 그것이 별로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행의 주체자는 어디까지나 내 자신 스스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런 사고방식이 꼭 좋은 것은 아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 미처 내 시선이 담아내지 못하는 부분들을 가이드들이 짚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앞서도 언급했듯이 여행의 주도권은 잠시 접어야 한다. 나는 그런 것이 ‘거시기’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행가이드가 유홍준이라면?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의 저자이자 문화재청 청장을 역임한 유홍준이라면? 그거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유홍준이 가이드를 해준다면 여행의 주도권을 잡시 접어둔다고 해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유홍준 에 대한 설명은 따로 할 필요가 없지 않나? <나의문화유산 답사기>라는 저서가 많은 것을 대변해주지 않는가 이 말이다. 그러고 보면, 유홍준은 참 복받은 사람이다. 그의 저작물들이 독서인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고, 그로 인해 유홍준이라는 이름 석 자가 대중들에 의해 각인이 됐기 때문이다. 자신이 쓴 책으로 인해 폭넓은 독서 계층을 확보한 저자가 몇 명이나 있을까? 소설가나 시인 같은 문인이 아닌 미술사 저작물을 통해 폭넓은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는 사람이 도대체 대한민국 지식인층에서 몇 명이나 될까 이 말이다.

 

더군다나 노무현 정권 시절, 유홍준은 문화재청 청장이라는 우리나라 문화재 행정의 수장으로서 그 이름을 날리지 않았던가. 그는 2004년 9월부터 2008년 2월까지 문화재청장 직을 수행했다. 유홍준은 3대 청장을 역임했는데, 솔직히 일반 대중들이 유홍준 이외에 다른 문화재 청장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이 있을까? 현재 문화재 청장은 김 찬씨인데, 그는 6대 청장이다. 그런 대중적 관심도와 인기로 인해, 유홍준은 <1박 2일>이나 <놀러와>와 같은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현을 했다.

 

 

 

 

* 장하리 삼층석탑과 유홍준 쌤: 유홍준 쌤은 특유의 언변으로 답사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 부여의 가을: 단풍이 예쁘게 색깔을 머금고 있어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 아웃사이더 기질이 있던 유홍준

 

 

하지만 그도 탄탄대로만을 걷지는 않았다. 기억하시는가? 2008년 2월에 있은 숭례문 방화사건을 말이다. 당시 신병을 비관한 한 남성이 불을 질러 숭례문이 전소된 사건 말이다. 당시 문화재청장이었던 그는 유럽 출장 중이었다고 한다. 국내에 머물고 있지 않았지만 국보 1호인 숭례문의 상징성 때문에 문화재 행정의 수장이었던 유홍준은 책임을 지고 사퇴해야 했다.

 

또한 유홍준은 풍운아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1967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한 그는 1981년 홍익대 대학원에 입학해 미술사학으로 석사과정을 밟는다. 1967년부터 1981년 무려 14년의 시간적 간극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 1967년부터 1981년 사이의 대한민국의 당시 상황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면 유홍준이 걸었을 길이 순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사실 그 기간 동안 유홍준은 학생운동으로 인해, 투옥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런 폭압적인 정치 세력과의 갈등과 고민, 우리문화에 대한 사랑은 <민족미술협의회> 발족으로 이어지게 된다. <민족미술협의회>는 <민족문학작가회의>와 비슷한 성향의 단체로 보시면 될 것 같다. 단지 구성원들이 다를 뿐 우리문화, 우리문학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공통분모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학문적 과정도 마찬가지다. 1967년 서울대 미학과 입학, 1981년 홍익대 대학원 석사과정(미술사학과), 1988년 성균관대 대학원 박사과정(예술철학) 등 계속 학교를 옮겨 가면서 공부를 하게 된다. 학부, 석사, 박사 과정을 한 대학교에서 수학하는 통상적인 방식이 아니었고, 하나의 테마에 집착한 학문 과정도 아니었다. 석사학위와 박사학위가 다른 것을 보면 그가 걸어간 학문적 길이, 깊이보다는 넓이에 주안점을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유홍준의 면모를 보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우리나라 지식인 사회 풍토상 '넓이'에 주안점을 두었으면 전문성이 없다는 평가를 받으며 폄하를 받지 않던가. 그럼 유홍준은 지식인 사회에서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위에 언급 그대로다. 우리나라 지식인 풍토가 그리 너그럽지 못하지 않던가. 풍운아에 대한 대접을 적절하게 해주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번 부여 문화답사 행사는 눌와출판사에서 진행을 했는데, 신간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2> 발행 기념으로 마련된 것이다. 나는 인터넷 서점 알라딘을 통해 본 행사에 지원을 했는데 운이 좋았는지, ‘끝발’로 당첨이 되어 11월 3일(토요일) 부여 답사에 나설 수 있었다.

 

 

 

 

 

* 대조사 석조관음보살입상: 카메라 각도를 다르게 해보니 마치 석불이 숨바꼭질 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 반교마을의 석등: 유홍준 선생의 반교마을 집에 있는 석등. 지리산 실상사에 있는 석등을 '카피'하여 세웠다고 한다.

 

 

 

 

* 유홍준과 나무들: 유홍준 쌤은 자신의 독자들과 사진을 찍는게 익숙하신지 아주 자연스러운 포즈를 지으셨다.

 그에 비해 나무들(필자)은 굳은 표정이다.ㅋ 뒤쪽에 서있는 여자분은 눌와출판사 직원 분이다.  

 

 

 

 

 

 

 

 

 

 

 

 

 

 

 

 

 

 

 

 

 

 

 

 

 

 

 

 

 

 

 

 

 

 

 

 

 

*서산 삼존마애석불 

 

 

 

 

 

불경한 짓일까요? 감히 마애석불 앞에서 크게 웃었다면요.

경건하지 못했다는 질책을 들을 수도 있겠네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마애석불 앞에서 깔깔거리며 웃다니! 

잘못하면 불교에 대해 적대시 하는 개념 없는 놈으로 몰릴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불자는 아니지만 항상 여행을 다니면서 사찰을 방문하고  해당 사찰의 대웅전에 들러

부처님께 무사하게 여행을 마칠 수 있도록 기원을 드린답니다. 그래서 사찰에 들어서면

옷깃이라도 여미며 경건함을 유지하려고 애쓰지요. 그것이 매너니까요.


 

 

하지만 전 가야산에 있는 서산 마애석불을 보자마자 크게 웃었습니다.

왜? 석불에 그려진 미소가 정말 좋았기 때문입니다. 세상 근심을 다 잊게 해주는

정말 아름다운 미소였기 때문입니다.


 

 

서산마애석불이 웅진(공주) 백제시대에 새겨졌다고 하니 신라에서 이차돈이 순교했을 때보다도 먼저 만들어졌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마애석불은 1500년도 더 넘는 시간동안 가야산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온화한 미소를 드러냈던 것입니다.

 

 

저는 다짐했습니다.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을 때마다 서산 마애석불을 생각하자고. 그 후덕한 미소를 생각하며 스마일하자고! 

 

 

 

 *서산 마애삼존석불

 

 

 

 

 

* 충남 서천 부근에서 찍은 원두막: 저 곳에서 시원하게 수박을 먹고 싶네요.

마애석불의 미소는 제게 편안한 안식처와도 같은 느낌을 주어 관련 사진으로 같이 실어봤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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