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러분들의 뜨거운 관심으로 인해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진행된 <함께 걷는 서울트레킹>이 잘 마무리가 됐답니다.


펀딩이 성공을 한 것입니다. 달성율 101%. 100%를 넘어 101%에 도달한 것입니다. 짝짝짝~!

​2016년 9월 1일부터 12월 20일 까지 무려 111일간 진행!

그렇게 <함께 걷는 서울트레킹> 펀딩을 진행하는 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답니다. 

제게는 과분할 정도로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았답니다. 물론 오해도 받았답니다.~ ㅋ  

​어차피 사랑이든 오해든 뭐든... 이제는 다 지난간 일입니다.


이제는 남은 한 해를 잘 마무리 하고 다가올 2017년 계획을 세워야 할 때입니다.

다사다난 했던 2016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네요. 한 해 잘 마무리 하시고 밝아오는 새해에는

항상 좋은 일들만 함께 하시길~!

* 후원금: <함께 걷는 서울트레킹>은 펀딩 소개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자신이 낸 후원금으로 역사트레킹(테마트레킹)을 즐기는 것입니다. 연재글에서도 계속 언급을 했었지요.


그래서 후원금도 그렇게 지출됐습니다. 5번의 리워드 트레킹에 후원금이 모두 지출된 것입니다. 이 점도 리워드에 참가를 해주신 참여자분들에게도 계속 이야기를 했었답니다. 

사실은 제 사비를 털어서 실비로 먼저 지출했지요. 이 글을 쓰는 이 시점까지도 저는 펀딩금을 만져 보지도 못했으니까요. 한마디로 전 지금 마이너스... -_-; ㅋㅋㅋ


그래도 다른 펀딩에 비하면 <함께 걷는 서울트레킹>은 양반입니다. 다른 펀딩들은 리워드 때문에 무척 골치가 아플텐데 저는 그런 염려에서 벗어났으니까요.

회계 보고에 대한 부담감도 없습니다. 후원자들을 직접 만나 후원금을 같이 집행을 했으니까요.

 






                                                                                                                                                                                            




  * 대서문: 북한산성 대서문





펀딩해서 돈 좀 만지셨수?

풍광이 수려한 북한산계곡 역사트레킹

) --> 

올해는 펀딩과 함께 했다. 이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난 올 한 해 스토리펀딩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323일부터 108일 동안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을 진행했었고, 91일부터는 본 프로젝트인 <함께 걷는 서울트레킹>을 무려 111일에 걸쳐 진행하고 있다.

<함께 걷는 서울트레킹>이 종료를 앞두고 있는 이 시점까지도 난 가끔 이런 생각에 빠진다.

) --> 

내가 펀딩을 한 게 잘 한 건가?’

) --> 

어쩌면 트레킹이라는 주제는 스토리펀딩에 적합하지 않은 테마일 수 있다. 아무리 앞쪽에 역사혹은 서울이라는 접두어가 붙었다고 하더라도 트레킹이 주는 그 자체의 무게감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다. 공익적으로 중차대한 문제를 다루는 것도 아니고, 독자의 눈가에 감동의 폭포수를 흐르게 할 수 있는 주제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종종 이런 반응도 접하게 된다.

) --> 

개나 소나 다 펀딩질 하며 돈 구걸하네. 너희 놀고먹는 일에 돈까지 내라고!”

) --> 

그런 오해들이야 애초부터 감수를 했지만 그래도 막상 그런 반응들을 접하면 씁쓸해지는 건 어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오해를 극복할 수 있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저 묵묵히 글을 발행하는 것밖에. 그래서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에서는 17편의 글을 발행했었다.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게으름 때문인지 6편 밖에 작성하지 못했다.

이번 글은 7편째다. 지난 1113일에 행한 북한산계곡 역사트레킹에 대한 이야기다. 북한산계곡 역사트레킹은 천년 고찰인 진관사에서부터 시작된다.

) --> 






 *트레킹팀: 숲길을 걷고 있는 참가자들.



 





) --> 

기막힌 스토리가 숨어 있는 진관사

) -->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4대 명찰이 있다. 동쪽에 불암사, 남쪽에 삼막사, 북쪽에 승가사. 그럼 서쪽은? 진관사다.

천년 고찰인 진관사(津寬寺)는 고려 현종 때인 1010년에 만들어졌다. 고려 제8대 왕인 현종이 직접 창건한 이 절은 진관대사를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태조 왕건의 손자였던 현종, 즉 왕순은 어릴 적에는 대량원군(大良院君)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왕건의 손녀였던 천추태후로부터 어릴 적부터 박해를 받은 왕순은 한때 강제로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천추태후가 그의 이모가 되기도 했는데 이것은 당시 얽히고설킨 왕실혼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같은 왕건의 혈통이자 이모뻘의 천추태후로부터 살해위협까지 받게 된 건 그가 왕위계승자였기 때문이다. 당시 천추태후는 애인인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왕으로 등극시킬 셈이었다.


그런 천추태후의 마수가 진관사에까지 뻗치게 됐다. 원래 진관사 자리에는 신혈사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진관이라는 승려가 홀로 수도를 하고 있었다. 승려가 홀로 거처하는 곳이라 천추태후 입장에서는 무언가 거사를 치르기에 적당한 곳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랬다. 천추태후는 신혈사에 자객을 보내 왕순을 죽일 셈이었다.

천추태후의 의도대로 왕순이 자객에 손에 비명횡사를 했다면, 현종도 탄생되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의 진관사도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진관사: 대웅전









천추태후의 의도를 눈치 챈 진관은 본존불을 안치한 수미단 밑에 굴을 파서 왕손을 숨기는 기지를 발휘한다. 수미단은 불상을 올려놓는 단을 말한다. 수미산은 불교에서 말하는 상상의 산을 말하는 것이고.


그렇게 진관에 의해 목숨을 건진 왕순은 3년 뒤, 개경으로 돌아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고려 8대 왕 현종이다. 현종은 1010, 신혈사 자리에 대가람을 세우고 진관 대사의 이름을 본 따서 사찰 이름을 지으니 그 사찰이 바로 지금의 진관사다.

 

조선시대 진관사는 사가독서제로 애용된 곳이다. 사가독서제란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정진하게 만든 제도로 세종시대에 처음 도입되었다. 풍광이 수려하고 계곡이 시원한 진관사라면 학문을 닦기에 제격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사가독서제로 진관사를 다년간 이들은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이었다.

진관사는 한국전쟁동안 많은 전각들이 소실된다. 그래서 지금의 진관사는 천년고찰의 웅장함이 묻어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진관사는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모으고 있는 사찰이다. 진관사 숲길과 계곡을 걷다보면 몸도 마음도 깨끗이 씻겨 내려가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런 느낌들이 좋아서 발걸음들이 진관사로 향하는 것이 아닐까? 트레킹팀도 그런 좋은 기운을 받으며 다음 코스인 대서문으로 방향을 잡아갔다.

) --> 







 * 진관사: 아름다운 북한산과 어우러진 진관사.






 

) --> 

풍광이 수려한 북한산계곡에서

 

대서문은 북한산성에 있는 14개의 성문 중 서쪽에 있는 성문을 말한다. 높은 고도에 위치해 있는 대동문, 대남문 등과 달리 대서문은 해발고도가 낮아 접근성이 매우 좋다. 북한산둘레길 코스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거리가 가까워, 둘레길과 묶어서 탐방할 수도 있다. 트레킹팀이 그렇게 탐방을 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북한산성은 1711(숙종37)에 축조된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북한산에는 산성이 존재했었다. 백제시대에는 위례성의 북쪽 방어성으로 산성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후 본격적인 삼국 항쟁시기에는 북한산을 두고 각국 간에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었다.

그 항쟁의 증거 중에 하나인 진흥왕 순수비가 북한산 비봉에 세워져있다. 정확히는 지금 비봉에 세워진 순수비는 진품이 아니고, 순수비가 세워져 있다는 것을 알리는 알림석이다. 진품은 훼손을 막기 위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참고로 비봉은 앞서 언급한 진관사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거리는 가깝지만 경사도는 상당히 가파르다. 답사에 참고하시라!

) --> 





 * 북한산계곡




 

우리 북한산계곡에 와 있습니다. 정말 시원스럽지 않습니까?”

) --> 

원효봉이 시원하게 바라다 보이는 계곡에서 나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 --> 

저기 성벽 구간, 무너진 성벽 구간이 보이시죠? 원래 이 곳에는 수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수문을 통해서 계곡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 --> 

북한산성에는 대서문 같은 7개의 대문과 6개의 암문, 그리고 한 개의 수문이 있었다. 이를 두고 북한산성 14성문이라고 말한다. 대문과 암문은 복원이 되고 해서 실재하고 있지만 수문은 소실된 상태다.

) --> 

아참, 북한산성은 포곡식 산성입니다. 포곡식이라는 건 계곡을 끼고 있는 산성이라는 뜻이죠. 성이 만들어지면 음용수 때문에 골치를 썩잖아요. 그런면에서 계곡을 끼고 있는 북한산성은 물 공급면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죠.”

진짜 그랬겠네요.”

하지만... 보시다시피 계곡이 있다 보니 풍수해에 취약해요. 그래서 저 앞에 수문이 떠내려가 버렸잖아요.”

그러네요.”

) --> 






 * 북한산성 수문터: 북한산성 수문은 북한산계곡에 놓여 있었다.

 

) --> 





 

함께 걷는 서울트레킹 펀딩을 마치며

) --> 

풍광이 수려한 북한산계곡 탐방을 끝으로 북한산계곡 역사트레킹도 무사히 종료가 됐다. 더불어 후원자들과 5번에 걸쳐 함께한 리워드 트레킹도 무사히 종료가 됐다.


이제 <함께 걷는 서울트레킹>도 마칠 때가 됐다. 글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2016년 한 해는 펀딩과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다른 프로젝트들과 달리 리워드를 트레킹 초대형식으로 제공했다. 에코백이나 머그컵 같은 것을 드리는 것도 좋지만 내가 잘하는 것을 리워드로 제시하자는 의미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5번에 걸쳐 직접 후원자들과 만나 트레킹을 행했었다. 내 리딩 방식이 마음에 드셨는지 그중에는 중복 참여를 하신 분들도 여럿 계셨다. 어떤 분은 5번 다 참가를 해주시기까지 했다. 내년에도 스토리펀딩에 트레킹 프로젝트를 개설해달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시는 분도 계셨다.

글을 끝내기 전에... 누군가 이렇게 물으실 수도 있을 것이다.

) --> 

펀딩으로 올 한 해를 때웠다고 하는데... 그래서 돈 좀 만지셨수?”

) --> 

난 이렇게 대답하련다.

) --> 

돈 벌려고 펀딩합니까? 그냥 사람들이 좋아서 펀딩한 거지. 어차피 실비 빼면 마이너스에요. 그래도 하는 건 트레킹이 좋고, 사람들이 좋아서 하는 거에요. 그런 게 세상사는 맛 아니겠어요? 당신도 기회 되시면 서울트레킹에 참여해보세요. 제가 김밥이랑 물 챙겨 드릴 테니까!”

) --> 


 




* 트레킹팀: 앞에 보이는 봉우리는 원효봉이다.









        * 대서문: 대서문의 여장. 특이하게도 일체형이다.













무장공비 루트에 고운 단풍... 그런데 여기가 서울?



정릉에서 김신조 루트까지, 성북동 역사트레킹




16.11.21 13:10 최종 업데이트 16.11.21 13:10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함께 걷는 서울트레킹>이라는 프로젝트를 12월 20일까지 진행합니다. 그 프로젝트 연재글을 알맞게 편집·수정하여 오마이뉴스에 기고할 예정입니다. 이번글은 5편입니다. - 기자 말

    

▲ 북악산 북악산 하늘길, 일명 김신조 루트를 걷고 있는 참가자들.
빛깔 고운 단풍비를 맞으며 걷고 있다.

        

        



출발 전부터 바람이 불었다. 빗방울도 오락가락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이 처음 런칭하는 날인데..."

지난 10월 23일.

이 날은 성북동 역사트레킹이 행해진 날이었다. 성북동 트레킹은 스토리펀딩에서 처음으로 실시하는 트레킹이었다. 그래서 나름 준비도 열심히 했다. 발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답사도 여러번 다녀왔고, 자료를 찾는다고 책장을 분주히 넘기기도 했다. 하지만 당일 날 날씨가 발목을 잡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바람이 불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트레킹할 때 날씨가 좋으면 반을 먹고 들어간다고 하는데 보시다시피 오늘은 꽝이네요."
"그래도 좋아요!"
"이런 날씨에 걷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오히려 그 자리에 모인 후원자분들이 더 걱정을 해주셨다. 말씀만이라도 고마웠다. 이런 후원자들과 함께 트레킹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축복일 테지!





▲ 정릉 세계문화유산 정릉.   

       







이성계의 총애를 받은 신덕왕후

트레킹 팀이 첫 번째로 탐방한 곳은 정릉(貞陵)이었다. 정릉은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이다. 황해도 곡산 출신인 신덕왕후는 이성계의 둘째 부인으로 이성계의 총애를 받게 된다. 1392년, 조선이 개국했을 때 태조의 옆에 서 있던 사람도 신덕왕후였다.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가 그 전 해에, 조선의 개창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결국 강씨는 현비로 봉해져 조선의 첫 번째 왕비에 오르게 된다.

조선왕조가 개창될 때 이성계의 나이는 58세였다. 그래서 즉위하자마자 세자 책봉에 나서야 했다. 현비였던 신덕왕후로서는 자신이 생산한 왕자를 세자의 자리에 앉히고 싶어 했다. 이성계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던 그녀였기에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했으리라.

하지만 쟁쟁하게 버티고 있던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들이 문제였다. 방과(정종), 방원(태종) 등등... 신의왕후의 소생들은 조선 창업에 큰 공을 세운 이들었다. 호락호락한 인물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신덕왕후는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정도전과 손을 잡게 된다. 정도전 입장에서도 이미 다 장성한데다 자기 주관이 뚜렷한 신의왕후 자제들보다는 아직 나이가 어린 강씨의 소생이 세자가 되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 재상중심의 왕도정치를 주창한 정도전이었으니까.

결국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었던 방석(의안대군)이 1392년 8월 20일에 세자로 책봉된다. 그해 7월 17일에 조선이 개국했으니 약 한 달 만에 세자가 책봉이 된 것이다. 이에 이방원(정안대군)은 격분한다.

"정릉은 조선왕조가 개국한 후 처음으로 능으로 조성되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왕릉들에 비해서는 좀 허술해 보이지 않나요? 봉분을 둘러싼 봉분석도 없고요." 

그 말대로 정릉은 능의 격식에 맞지 않게 무언가가 빠져 있다. 여백의 미학이 아닌 인위적으로 뺄셈을 당한 것이다. 그렇게 뺄셈을 한 사람은 바로 태종 이방원이었다.

신덕왕후는 자신의 소생이 왕위에 등극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396년(태조5)에 눈을 감고 만다. 자신이 너무나 사랑했던 신덕왕후가 죽자 이성계는 지금의 서울 정동, 현재의 영국대사관 자리에 능을 조성했다. 또한 흥천사라는 사찰을 지어 그녀의 명목을 빌었다.

이 흥천사를 두고 원찰(願刹)이라고 부르는데, 원찰은 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어진 사찰을 뜻한다. 정조대왕과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융건릉 인근에 있는 용주사도 원찰이다.



                             ▲ 정릉 봉분을 두르는 봉분석이 없다.

        






뺄셈을 당한 정릉

1398년 8월, 이방원이 주도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무인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불리는 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정도전은 목숨을 잃게 된다. 세자였던 이방석도 목숨을 잃게 된다.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도성 안에 무덤이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1409년(태종9)에 정릉을 지금의 위치인 성북동으로 이전시킨다. 본격적인 뺄셈이 시작된 것이다. 그 다음해에는 정릉의 봉분을 두르고 있던 석각신장 같은 석물을 광통교 건설에 쓰게 했다. 광통교는 청계천에 있는 다리다.

능에서 가져온 귀한 석재들로 돌다리를 만드는 만큼 그것들을 제대로 이용했으면 좋았으련만 이방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부러 신장석을 뒤집어 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광통교 하단을 보면 몇몇 신장석들은 머리가 바닥을 향해 있다. 이방원은 철저하게 신덕왕후를 짓밟았던 것이다.

"여기 이거 물구나무 선 거 같지 않나요?"
"진짜 그러네요."
"청계천 복원할 때 뒤집어서 복원한 게 아니고, 광통교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이렇게 물구나무를 세웠습니다. 광통교는 1410년, 태종 때 만들어졌지요. 이렇게 거꾸로 놓이게 된 건 제작자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됐다는 뜻이겠죠."
"굳이 이렇게까지..."
"그나저나 이것들은 거의 600년 이상을 이렇게 거꾸로 세상을 보고 있었겠네요."


인왕산역사트레킹 때 광통교 앞에서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이런 스토리텔링이 있기 때문에 정릉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광통교도 함께 탐방할 것을 추천한다. 





▲ 광통교 정릉에서 빼온 신장석이 거꾸로 세워져 있다. 무려 600년이 넘는 시간동안. 광통교는 청계천에 있다.

     


 
  

아픈 현대사를 걷다, 김신조 루트를 걷다

정릉을 뒤로 하고 트레킹팀은 본격적인 길을 나섰다. 바람이 좀 더 세게 부는 듯했다. 빗줄기도 더 강해지고 있었다. 참가자들 중에는 우비를 꺼내 입은 분들도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날씨가 이런 게 내 잘못이야? 기왕 이렇게 된 거 좋게 생각하자. 오늘 가는 곳이 아픈 현대사를 담은 곳이잖아. 그러니 비를 배경 삼아 가는 것도 괜찮겠네.'

트레킹팀은 북악스카이웨이를 지나 <북악하늘길>로 접어들었다. 북악하늘길은 성북구에서 조성한 도보여행길로 총 4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트레킹 팀은 제2산책로를 '타깃'삼아 이동을 했다. 나는 제2산책로를 앞에다 두고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정릉을 거쳤고, 북악스카이웨이 옆 산책로도 지나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많이 소요됐습니다."
"그럼 거의 끝난 건가요?"
"아니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이 코스를 걷기 위해 우리가 여기에 온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예행연습이었어요."
"에이..."
"너무 해!"







      ▲ 북악산 하늘길 단풍이 고운 북악산 하늘길.         

       



그렇게 참가자들은 탄식을 내뱉었다. 어떤 참가자는 내게 '사기꾼'이라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자신이 있었다. 그 탄식과 핀잔이 감탄사로 바뀔 것이라는 그런 자신감.

"이 곳은 북악하늘길 제2코스입니다. 일명 김신조 루트라고 불리는 곳이죠."

북악산은 군사 목적으로 출입이 제한되다가 지난 2007년 전면 개방이 되었다. 그 군사적인 목적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 바로 김신조 일당이었다.

"1·21사태, 일명 김신조 사건에 대해서 알고 계시죠? 청와대 습격 사건이라고도 부르는 그 사건이요."

나는 호경암 앞에서 입을 열었다. 호경암은 1·21사태 때 격전이 벌어진 곳이다. 당시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져 아직까지도 바위 곳곳에는 그날의 아픈 흉터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당시 김신조를 위시한 무장공비들은 시간당 10km 이동을 했답니다. 그것도 산길을요. 건강한 성인이 4km로 정도로 이동하니까 그들이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이동을 했는지 알 수 있겠죠."

구멍이 뻥뻥 뚫린 호경암을 앞에 두고 나는 설명을 이어갔다.


▲ 호경암 치열했던 교전의 흔적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호경암. 빨간색으로 칠한 표시가 바로 총탄 자국이다.        

  





격동의 시기, 1968년!

"김신조 사태가 1968년 1월 21일에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 이틀 후인, 1월 23일에는 미국의 정보선인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의해 나포되지요. 또 그해 10월 경에는 울진, 삼척 지역에 무장공비 120명이 침투를 하기에 이릅니다."
"참 많은 일이 있었네요. 그때..."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었어요. 베트남에서는 월맹군의 구정공세로 미군의 예봉이 꺾였고, 미국에서는 반전 운동이 크게 일어났잖아요. 히피문화로 대변되는..."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나는 숨을 좀 가다듬고 말을 이어갔다.

"이것 말고도 1968년에는 전세계적으로 많은 일들이 발생합니다. 서구에서는 68혁명이라 하여 구체제 극복을 내세운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약간 다른 이야기지만 당시 공산권인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프라하의 봄이라는 혁명이 일어났지요. 밀란 쿤데라라고 소설가 아시죠? 그 사람이 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프라하의 봄이 중요한 모티브였습니다. 하지만 그 봄날은 오래가지 못했답니다. 구소련이 강제 진압을 했었거든요. 봄날이 너무나 쉽게 가버린 것이죠."

너무 설명이 진지했던 것 같아 약간 말을 돌렸다.

"이제까지 1968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봤는데, 그 1968이라는 숫자를 저도 가지고 있답니다. 제 전화기 끝자리가 1968이거든요."

그렇게 내가 실없는 소리를 했어도 참가자들은 신나했다. 비가 오고 있어도 바람이 불고 있어도 신나했다. 왜? 성북동 트레킹이 아름다운 풍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악산 단풍이 아주 곱게 잘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빛깔 고운 단풍을 서울에서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무장공비의 루트였던 곳에서 그토록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보고 있다니!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하긴 아무리 지뢰가 깔리고, 철조망이 쳐져 있다고 해도 DMZ만큼 아름다운 곳도 없을 테니까!

글을 마치기 전에 혁명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한 마디만 하자. 며칠 전인 12일에 백 만명 이상 사람들이 모여 촛불집회를 열었다. 그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19일에도 수많은 이들이 촛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모여들었다. 촛불혁명이라고 명명해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광장에 모여 불을 밝혔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이렇게 외쳤다.

"박근혜 퇴진"

나중에 이 촛불혁명은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승리로 기록될 것인가? 아니면 패배로? 나는 승리로 기록되길 간절히 기원한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참가자: 길을 걷고 있는 참가자.









2016년 11월 13일 일요일.


이날은 참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랬습니다.


드디어 <함께 걷는 서울트레킹> 펀딩의 리워드 트레킹이 마지막으로 실시된 날이었으니까요.


여기서 잠깐! 앞에서도 계속 언급을 했지만 잘 모르시는 분들도 있을 거 같아 다시 설명을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저는 지난 9월부터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함께 걷는 서울트레킹>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답니다. 한마디로 트레킹을 주제로 펀딩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펀딩을 받으면 저는 후원자들에게 무언가 답례를 해야 합니다. 이것을 두고 '리워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제게 돈을 주신 분들에게 무언가를 건네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요!^^


다른 펀딩을 진행하시는 분들은 에코백이나 엽서, 도서 등을 리워드로 많이 제시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트레킹을 잘하니 '북악산트레킹 초대' 같은 식으로 리워드를 제공했습니다. 유형의 물질을 드리는게 아니라 무형의 것을 제공한 셈이죠.


그렇게 리워드 트레킹이 진행되었고, 결국 이날 마지막 트레킹인 '북한산계곡 역사트레킹'이 실시된 것입니다.


순조로운 해피엔딩은 없었던 것인지 , 아침부터 좀 삐그덕거렸답니다. 오전 10시경 집합장소인 구파발역에 가봤더니 갑자기 '헉' 소리가 나더군요.


구파발역에서 시작점인 북한산성 입구까지 가려면 버스를 타야 하는데... 등산객들이 워낙 많았던 터라 버스를 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을 빰칠 정도로 콩나물 시루 같았습니다. 정말 탈 수 없었습니다.


"차라리 종료점인 진관사에서 출발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역순으로 가겠습니다."


저는 이 말을 하고 진관사 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진관사행 버스는 북한산성행 버스에 비하면 천국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별로 없었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제가 순발력 있게 잘 대처한 듯했습니다.


정방향이면 어떻고 역방향이면 어떻습니까! 앞뒤를 바꿔서 시작해도 상관없는 게 트레킹의 묘미잖아요!


진관사를 출발해 북한산성입구, 대서문, 북한산계곡 등으로 이어진 이 날의 트레킹은 약 4시간에 걸쳐 진행이 됐답니다. 길이에 비해 상당히 오랫동안 진행이 된 셈입니다.


그렇게 하여 마지막 리워드 트레킹인 북한산계곡 역사트레킹은 순조롭게 잘 마무리 됐답니다. 참가자들의 만족도도 상당히 좋았습니다. 버스 타는 것만 혼잡했지, 그 다음부터는 계속 한적하게 우리만 다녔기 때문입니다. 역시 트레킹은 한적한 맛이 있어야 합니다!


하여간 제 어깨에 놓인 짐이 하나가 날아간 느낌입니다. 어쨌든 다섯번의 트레킹이 잘 마무리가 됐으니 마음이 홀가분하더군요. 또 한편으로는 시원섭섭하다는 감정도 생기고!

 






  * 북한산: 북한산성 대서문에서 바라본 원효봉.







  * 북한산계곡 역사트레킹: 길을 걷고 있는 참가자.













  * 전망대: 금호산 팔각정에서 바라본 한강. 금호산도 응봉 라인의 한 축이다.








11월 6일 일요일.



청명한 가을날이었습니다. 약속 장소인 지하철 5호선 청구역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습니다. 전날에는 미세먼지 때문인지 하늘이 뿌였습니다. 약간 목이 간질거리기까지 하더군요. 하지만 그날은 달랐습니다. 하늘이깨끗하더군요. 하루 사이에 그렇게 달라지더군요.


한마디로 트레킹하기 아주 좋은 날이었다는 뜻이죠. 그렇게 좋은 날, 우리는 서울내부트레킹을 하러 떠났습니다.


사실 내부트레킹을 진행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답니다. 다른 트레킹과 달리 사람들의 외면을 받았기 때문이었죠. 다른 리워드 트레킹은 거의 다 '만땅'을 채웠는데 유독 내부트레킹만이 신청이 미비했답니다.  


많으면 많은데로, 적으면 적은데로... 또 그렇게 떠나는게 트레킹의 묘미 아닙니까!


트레킹을 할 때마다 열 대여섯 명에 가까운 인원들이 함께 이동하느라 좀 북적북적거렸습니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아주 단출했지요.


트레킹팀은 가벼운 발걸음을 내딛으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와!"

"단풍 명소가 따로없네"

"북악산 단풍하고는 또 다르네!"


참가자들 입에서 이구동성으로 저런 말씀들이 터져 나오더군요. 생각지도 못한 단풍구경을 하고 있다고 감탄을 하시는 겁니다.


내부트레킹은 매봉산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응봉 라인을 따라 걷는답니다. 응봉은 이름에도 나타나듯이 매사냥터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작은 봉우리들이 남산에서부터 서울숲까지 '쭈욱' 연결되어 있는데 그곳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모습이 절경입니다.


그런 한강의 모습을 보기 위해 트레킹 코스로 넣었는데 시기가 시기인만큼 단풍구경까지 덤으로 하게 된 것이죠. 아니 단풍구경이 메인이 되고 한강 조망이 사이드가 되었다고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이곳이 한강과 가까워서 그런지 강에서 불어는 바람 때문에 단풍이 빛깔이 잘 드는 듯싶더군요. 하늘도 청명하고 단풍도 예쁘고...!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할까요? 사람들이 참여를 많이 안 해서 기분이 별로였는데 생각지도 못한 단풍 선물, 그것도 비주얼이 뛰어난 단풍 선물을 받았으니까요.


역시 세상일은 한 치 앞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트레킹 때문에 또 하나 삶을 배워갑니다. 그러고보면 제 인생학교는 트레킹인 것 같습니다!









​  * 참가자: 이번 트레킹은 단출하게 진행됐다. 하지만 코스의 비주얼은 대단했다!





  * 북한산: 단풍들 너머로 멀리 북한산이 보인다.    








 







           

    * 성북동 트레킹: 비주얼이 뛰어났던 북악산.








10월 23일.


강원도에서 들려오는 단풍 소식이 우리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때였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서울의 대부분의 산들은 아직 단풍 절정기에 들지 않았더군요. 기왕하는 트레킹, 아름다운 단풍을 보며 걸으면 좋잖아요.


이 날은 <함께 걷는 서울트레킹>의 세번째 리워드 트레킹이 있었던 날입니다. 일명 성북동 역사트레킹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이 성북동 트레킹은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처음으로 런칭하는 것이었습니다.


"잘해야 하는데!"


첫 스타트였으니 부담감도 좀 생기더군요. 그런 약간의 부담감을 안고 약속장소인 성심여대역으로 출발을 했습니다.


첫번째 코스인 정릉을 지났는데... 그만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군요. 바람도 거세게 불고. 가는날이 장날이라고 트레킹을 첫번째로 런칭한 날인데!!! 


그렇다고 하염없이 날씨 탓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고 하잖아요. 기획한대로 제 임무를 열심히 수행했습니다. 답사를 제대로 해서 그랬는지 첫 번째로 행하는 트레킹치고는 물 흐르듯이 잘 진행이 되었답니다.


"우와!"


북악산을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참가자들의 탄성 소리도 커져갔습니다. 왜냐? 알록달록한 단풍들이 주위를 뒤덮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울의 다른 산들은 아직 단풍절정기가 아니었지만 우리가 갔던 북악산 코스는 단풍이 최절정기에 다다랐던 것입니다.


아름다운 비주얼을 바라보며 걸으니 발걸음이 한결 더 가볍더군요. 참가자분들의 반응도 폭발적이었습니다.


"올해 단풍놀이를 여기서 할 줄이야!"


첫번째인데다, 비 내리는 날 행한 트레킹이었지만 많은 분들이 호응을 해주셔서 무사히 행사가 잘 종료가 됐답니다.


그러고보니 저도 올해 단풍놀이를 그날 처음했던 것 같네요. 눈이 호강을 한 하루였습니다.

 



 





 
   * 전망대: 뒤로 성북구와 도봉구 일대가 보인다.
 






 

  * 호경암: 1.21사태. 일명 김신조 사태 때의 상흔을 품고 있는 호경암.








  * 성북동 역사트레킹: 단풍길을 걷고 있는 참가자들.

 








 * 백사실 계곡: 백사실 계곡 입구 









서울 한복판에 능금마을?

북악산에 가면 무언가 얻어가는 느낌이 들 겁니다!

 

이제 완연한 가을이다. 청명한 가을 하늘이 드높기만 하다. 설악산에서는 단풍 소식도 들려온다. 그래서일까, 이런 계절에 집에만 있으면 손해 보는 느낌까지 든다. 가벼운 배낭 하나 둘러메고 어디를 가도 좋을 계절이 다가온 것이다.

그럼 어디로 떠나는 게 좋을까? 북악산을 추천해 본다. 북악산 역사트레킹을.

 

  

 

세검정(洗劍亭)보다 고향집 팔각정이 더 낫다?

 

북악산 역사트레킹은 세검정에서부터 시작한다. 세검정은 칼을 씻었다(洗劍)’는 의미인데 광해군과 관련이 있는 곳이다. 광해군을 몰아내고자, 인조반정을 획책한 이귀, 김류 등이 칼을 갈아 씻었다고 해서 세검정(洗劍亭)이라고 명명됐기 때문이다. 정자정()에서도 보듯 세검정은 계곡 옆에 지어진 정자다.


세검정 일대(종로구 부암동)는 예부터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명승지였다.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이 주위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고 사천이라 불렸던 홍제천이 너럭바위 위를 유유히 흐르고 있으니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데 안성맞춤이었던 셈이다. 다산 정약용과 겸재 정선도 그렇게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린 이들이었다. 다산 선생은 <유세검정(遊洗劍亭)>이란 시를 지었고, 겸재 선생은 <세검정도>라는 부채 그림을 그려 세검정을 칭송했다.

현재의 세검정은 1977년에 지어졌다. 1941년에 인근에 있던 종이공장에서 화재가 났는데 불이 옮겨 붙어 주춧돌만 남기고 완전히 소실됐다가 이후 36년 만에 복원된 것이다. 겸재 선생의 부채 그림을 많이 참조하여 복원됐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차이가 크다고 한다. 내가 봐도 복원된 세검정과 겸재 선생의 그림 속의 세검정은 닮아 있지 않았다. 현재의 세검정은, 얼핏 보면 그냥 평범한 동네 정자로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누군가는 농담 삼아 이런 말도 한다.

 

우리 고향 마을회관에 있는 팔각정이 더 좋아 보이는데요...”


부채에 그려진 수려한 주위풍광은 되돌릴 수 없겠지만 문화재 복원만큼은 보다 더 정교하게 이루어졌으면 한다.

 

 




 * 세검정: 홍제천 위에 서 있는 세검정

 

오성대감 이항복과 백사실 계곡

 

세검정을 지나 백사실 계곡에 들어서면 본격적인 북악산 트레킹이 시작된다. 백사실 계곡은 말이 계곡이지 거의 건천에 가깝다. 시원하게 물줄기를 뿜을 때를 거의 본적이 없을 정도다. 그래서인지 백사실 계곡은 계곡 자체보다는 숲길이 더 각광을 받는 곳이다. 중심가와 인접한 곳에 그렇게 잘 정돈된 숲길이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니까.


숲길 안쪽으로 걷다보면 백사 이항복의 별서터가 보인다. 숲길 한편에 자리 잡은 별서터는 현재 기단석만이 남아 있다. 그 기단석과 바로 옆쪽에 있는 연못자리로 그 옛날 별장의 풍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별서터에서 조금만 걷다보면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고 새겨진 바위를 볼 수 있다.백석백악을 뜻한다. 북악산을 예전에는 백악산이라고 불렀다. ‘동천은 산천으로 둘러싸인, 풍광이 수려한 곳을 말한다. 한마디로 백석동천은 북악산에 있는 풍광이 수려한 골짜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편 백사실 계곡의 백사는 이항복의 호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백사실 계곡 인근에 있는 세검정은 광해군과 관련이 많은 곳이다. 인조반정을 획책한 이귀, 김류 등이 반정을 획책하고 칼을 씻었다고 해서 세검정(洗劍亭)이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항복도 광해군과 관련이 많은 인물이다.


오성대감으로 더 잘 알려진 이항복은 한음 이덕형과의 재기 넘치는 일화로 유명한 인물이다. 임진왜란 중에 5번이나 병조판서에 오를 만큼 이항복은 선조의 신임을 받았다. 이항복이 당쟁에 물들지 않고, 초연하게 자신의 맡은바 임무를 충실히 해냈기에 이런 신임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항복은 이덕형을 명나라에 급파하여 원군 파병을 요청하기도 했다. 또한 조선이 왜와 함께 명나라를 치려고 한다는 오해가 생기자, 그 자신이 직접 명나라에 가 오해를 풀고 오기도 했다. 이렇듯 이항복은 외교적으로도 뛰어난 업적을 쌓았다.


오성대감 이야기를 조금 더해보자. 전란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즈음, 대북파로 분류됐던 문홍도가 휴전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유성룡을 탄핵했다. 그러자 오성대감은 자신도 그 의견에 동조를 했다며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난다. 이후 영의정이었던 1600년에는 기축옥사(1589)와 관련하여 성혼을 변호하다가 반대파들에게 정철 비호자로 몰렸고, 그래서 또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는 인목대비 폐위(1617)에 대해서도 반대하다 삭탈관직을 당한다. 그리고 다음해인 1618년에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세상과 작별하고 만다. 오성대감이 그렇게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난 5년 뒤, 광해군도 인조반정에 의해 퇴위당하고 유배길에 오르고 만다. 그러다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세상을 떠난다.

 

 




 * 백사실계곡: 백사실 계곡 숲길을 걷고 있는 참가자들.




 


서울 한복판에 능금마을이?

 

백석동천을 탐방하다 보면 능금마을이라는 곳을 만나게 된다. 능금마을은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어서 그런지 전원적인 모습이 물씬 풍기는 곳이다. 서울 도심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비료포대가 쌓여진 농촌 마을을 보고 있자니 생경한 느낌이 들 정도다.


그렇다면 왜 능금마을이 북악산 뒤편 부암동 부근에 있는 것일까? 아시다시피 능금이면 우리나라의 고유 사과종을 말하는데 능금으로 유명한 지역은 대구·경북 쪽이 아닌가? 이런 의문이 드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실제로 예전에 북악산 역사트레킹에 참가한 사람들도 그렇게 묻고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 왜 사과마을이 있는 거에요?”

 

현재 창의문 밖, 부암동 일대는 능금마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사과나무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능금마을이라는 마을 명칭만이 옛 흔적(?)을 확인해 주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40여 년까지만 해도 창의문 밖 능금은 경림금(京林檎)이라 하여 서울의 유명한 특산물이었다. 능금이 출하되는 가을 때쯤에는 전국에서 몰려온 상인들로 창의문 인근이 들썩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창의문 밖에 능금나무가 많이 심어졌을까? 먼저 산지 형태를 띠는 부암동 일대의 토양이 척박하여 논농사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로 들어질 수 있겠다. 그럼 두 번째 이유는? 두 번째 이유는 창의문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그 두 번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창의문의 역사를 더듬어 가야 한다.

 




 * 백석동천: 백석동천이라는 한자가 음각된 바위.




 

 

인조반정과 능금마을

 

1623313.

 

창의문 밖 홍제원(지금의 서대문구 홍제동)에 집결한 의군(義軍)’들은 창의문을 부수고 창덕궁으로 진격한다.

반정군의 원두표가 도끼로 문을 부셨다. 당시 창의문은 문루가 없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탔기 때문이다. 높은 위치에서 활도 쏘고 해야 하는데 문루가 없으니 효과적인 방어가 펼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반정군은 창덕궁을 점령했고, 광해군은 퇴위된다.


능금마을 이야기를 하다 뚱딴지 같이 왜 인조반정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일까? 그렇다. 창의문 밖 능금마을은 인조반정과 무척 관련이 깊다. 인조는 반정에 협조했다 하여 창의문 밖 백성들에게 능금나무와 자두나무를 나눠주었다. 그게 부암동 능금마을의 시초가 된 것이다.


숙종 때에는 정책적으로 묘목을 더 많이 심어 부암동 일대에 무려 20만 그루의 능금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가을이 되면 매운 음식을 먹은 듯, 빨갛게 달아오른 사과알들이 푸른 잎들 사이에서 대롱대롱 거렸을 것이다. 아주 멋진 장관이 펼쳐졌을 것 같다. 거기에 인왕산 서편으로 석양이 지는 모습까지 어우러지면...!


창의문 밖 능금, 경림금은 그렇게 서울을 대표하는 특산품이 되었다. 추석 차례상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제례물품이 되었던 것이다.





   

 * 능금마을: '능금마을'을 가리키고 있는 표식. 

 

 

적어도 손해 보지는 않는다!

 

전편인 4편에서 나는 이렇게 부제목을 썼다.

 

- 다음은 북악산입니다. 안 가면 후회할 겁니다.

 

조금은 자극적이다. 한편으로는 너무 노골적인 영업성 멘트로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장담할 수 있다. 북악산 역사트레킹을 행하다보면, 적어도 손해 보는 느낌이 들지는 않을 거라고. 무언가를 얻어 가는 느낌이 들 거라고.






 * 북악산: 북악산 팔각정에서 바라 본 북학산. 












* 서대문 안산: 봉수대 올라가는 길.










펀딩 잘 몰라요, 그냥 트레킹이 좋아서...

다음은 북악산입니다. 안 가면 후회할 겁니다!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함께 걷는 서울트레킹>이라는 프로젝트를 12월 20일까지 진행합니다. 그 프로젝트 연재글을 알맞게 편집·수정하여 오마이뉴스에 기고할 예정입니다. 이번글은 4편입니다. - 기자 말 

- 죄송합니다. 김밥이랑 생수 사느라고 한 10분 정도 늦을 거 같습니다.

 


925일 일요일.

 

나는 서대문 영천시장을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트레킹 참가자, 정확히는 내 후원자들에게 나눠줄 김밥과 생수를 구매하기 위해서였다. 미리 준비한다고 김밥집 검색도 해놨는데 막상 당일이 되니 허둥지둥 댔던 것이다. 먼저 가서 후원자들을 맞았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들을 기다리게 하다니! 후원자들과 함께하는 첫 번째 리워드 트레킹부터 발걸음이 꼬였던 것이다.

 

 




 *  안산: 봉수대 가는 길. 뒤로 보이는 산이 인왕산이다.









 

높아진 긴장도 수치

 

사실 이날 리워드 트레킹을 앞두고 나는 좀 긴장을 했었다. 후원자들과 직접 대면한다는 사실이 부담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하루 전인 토요일에 한겨레문화센터에서 트레킹 리딩을 했는데 그 여파가 그날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행하는 트레킹 강의도 그날이 처음 시작하는 날이었다. 한마디로 이틀 연속으로 첫 시작이었던 것이다. 긴장도 수치가 높을 만 하지 않는가? 실제로 일요일 트레킹을 마친 후에 나는 며칠간 앓아누워야했다.

 

죄송합니다. 오늘이 리워드 트레킹 첫날인데 지각을 해버렸네요... 너그러이 용서를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정이야기를 드려서 그랬는지 모두다 넘어가주는 분위기였다. 역시 후원자분들이었다. 다른 곳이었으면 분명 한소리 들었을 것이다. 리딩자가 어떻게 늦을 수 있냐며...

독립문과 서대문형무소 탐방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트레킹이 시작이 되었다. 미세먼지 때문인지 하늘이 좀 뿌옇게 보였다. 그래도 인왕산은 바로 옆에 있어서 그랬는지 멀리 있는 남산보다는 훨씬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바로 앞에 보이는 산이 인왕산입니다. 우리는 인왕산의 서쪽 면을 보고 있습니다. 경복궁이나 서촌 쪽에서 바라보는 인왕산과는 좀 다를 겁니다.”


어떻게 다르죠?”


경복궁 쪽에서는 아래에서 위쪽으로 올려보잖아요. 그래서 인왕산의 암반 노출면이 두드러지게 보이죠. 하지만 이곳에서 보면 인왕산을 전체적으로 다 조망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요?”


내사산인 인왕산이 북악산, 또 그 뒤에 있는 북한산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자리를 잡고 있는지 확인을 할 수 있다는 거죠.”

 

내 설명이 좀 부족했을지 모른다. 경복궁이나 서촌쪽에서 인왕산을 직접 올려다 본 후라야 저 해설이 더 설득력이 있었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한 곳을 제대로 보려면 365도로 다 둘러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안산에서 보는 인왕산이 다르듯, 북한산에서 보는 인왕산도 다르거든요. 북한산에서는 인왕산의 북쪽면을 둘러볼 수 있죠.”

 

 




* 안산 자락길: 안산 자락길 표식.







펀딩 그런 거 몰라요. 그냥 트레킹이 좋아서...

 

나는 이렇게 힘을 주어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참가자들은 연신 카메라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사실 나 같아도 저런 딱딱한 해설보다는 시원한 풍광 쪽에 포인트를 맞췄을 거 같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지인이 한 말이 생각났다.

 

참가자들한테 한 번 물어보세요. 서울트레킹 펀딩의 취지가 좋아서 돈을 냈는지 아니면 그냥 트레킹이 좋아서 왔는지요.”

 

사실 나도 그게 궁금했다. 그래서 쉬는 시간에 슬쩍 물어보았다.

 

스토리펀딩의 창작자 입장에서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오늘 트레킹에 참여를 하셨는데, <함께 걷는 서울트레킹>의 취지가 좋아서 참여를 했다 1, 그냥 펀딩 형식만 빌렸을 뿐 내 돈 내고 트레킹에 참여를 했다 2, 자 손을 들어 주십시오.”

 

압도적이었다. 내심 1번이 많았으면 했지만 거의 다 2번으로 손을 들어주셨다. 대충 감은 잡고 있었지만 그래도 2번으로 중심추가 쏠리니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낙담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1번에 선 분들이 언젠가는 2번으로 자리바꿈을 할 수도 있을 테니까. 물론 그렇게 자리를 옮기게 하려면 내가 잘해야 했다.

 

 



* 홍제천: 홍제천 인공폭포






 

승복을 입은 바위?

인왕산의 서울성곽 구간은 인왕산 자체보다 여기 안산에서 보는 게 더 낫습니다. 인왕산 정상부근에서 내려온 성곽이 능선을 타고 내려오다 큰 바위 하나를 비켜서 나갑니다.”


무슨 바위죠?”


선바위입니다. 마치 바위가 승복을 입은 승려처럼 보인다고 해서 선()바위라고 불립니다. 성곽을 쌓을 때 무학대사는 저 선바위를 도성 안쪽에 놓자고 했지요. 하지만 정도전은 반대를 했습니다. 승복을 입은 거대한 바위가 도성 안쪽으로 들어오는 것을 경계한 것이죠.”


누가 이긴 거죠?”


정도전이 이겼죠. 보시다시피 선바위는 성곽 밖에 있습니다.”

 

이렇게 설명을 했지만 아차 싶었다. 사실 멀리서보면 이 바위가 선바위인지, 저 바위가 선바위인지 잘 분간이 안 된다. 그래서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저 선바위 밑에 국사당이라고 우리나라 민간신앙의 대표적인 기도처가 있거든요. 거기가면 기도빨이 잘 받는다고 하니까 나중에 우리 거기 한 번 가보죠.”

 

애꿎은 국사당을 들먹이며 시선을 돌렸던 것이다. 휴우!

안산의 자랑인 메타세쿼이아 숲길을 지나 홍제천 인공폭포 앞에서 트레킹은 무사히 종료가 됐다. 거의 4시간 정도 진행이 됐는데 한 분도 낙오하지 않고 모두 다 완주를 해주셨다. 정말 감사할 일이었다.

 

 




 * 세검정: 북악산 역사트레킹.





 

다음은 북악산 역사트레킹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지만 서울트레킹 펀딩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음 리워드 트레킹은 북악산으로 이어집니다. 안 가시면 후회할 겁니다. 사실 안산 트레킹은 맛배기에 불과하거든요.”

 

안산 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됐지만 앞으로도 리워드 트레킹은 계속된다. 당장 109일에 북악산 역사트레킹이 실시가 된다. 그날은 또 어떤 후원자들이 오실까?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이미 오신다고 약속을 해주신 분들이 여럿이니 그날 먹을 김밥이랑 생수를 좀 넉넉히 준비해야 할 것 같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니까!

 


 * 표지속: 북악산 완전 개방 표지석. 





 















9월 25일 일요일.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제 발걸음은 분주했습니다. 이날은 안산 역사트레킹을 하는 날이었으니까요.


안산 트레킹은 처음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좀 긴장이 되더군요. 처음하는 트레킹도 아닌데 긴장을???



저는 현재 다음 스토리펀딩에 <함께걷는 서울트레킹>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전에 올린 포스팅에도 기술되어 있지요. 이날 오신 분들은 모두 다 <함께걷는 서울트레킹>을 통해 참가를 해주신 분들입니다.

한마디로 저는 제게 후원해주신 분들과 함께 리워드 트레킹에 나선 것입니다.


크라우드 펀딩을 하는 사람들 중에 저처럼 후원자들과 직접 만나는 창작자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더군다나 간단한 티타임이나 강연 형식이 아닌 저처럼 서너시간을 함께하는 창작자는 더더욱 없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참가자 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행운아에요. 이렇게 후원자분들을 직접 만나서 오랜시간을 함께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12348












 













 * 안산 자락길: 서대문 안산 자락길 표식
        








요즘도 가끔가다 이런 질문을 받는다.

"트레킹으로 먹고 살 수 있어요?"

그런 질문에 익숙해질 만도 한데 입 속에서 우물거리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하지만 대응능력은 예전보다는 좀 더 나아졌다.

"우리나라에서 글만 써서 밥 먹는 사람이 몇이나 되나요?"
"거의 없지 않나요."
"그렇죠. 거의 없죠. 이 트레킹 바닥은 그것보다 더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걷기열풍이 휘몰아치지 않았던가. 그에 편승되어 각 지자체에서 앞 다투어 도보여행길을 개설하지 않았나. 그렇게 만들어진 트레일(trail:오솔길)이 무려 2만km가 넘는다. 또 아직까지도 사그라지지 않은 산티아고 순례길 열풍은 또 어떤가.

참 아이러니컬하다. 그렇게 트레킹에 대한 물리적인 저변이 크게 확장됐음에도 트레킹으로 밥 먹고 사는 사람이 거의 없다니! 

솔직히 나도 트레킹만으로 먹고 사는 입장이 못 된다. 얼마 전에도 시멘트 포대를 좀 날랐다. 각기목도 나르고. 공사판에서 일을 했던 것이다. 또 요즘은 추석 시즌이라 농장에서 일을 해야 했다.    

공사장일도 농장일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 자리에서 일당을 딱딱 받는 재미가 있으니까. 또 삼시 세끼를 규칙적으로 먹을 수 있어서 그것도 좋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트레킹으로 먹고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적어도 트레킹과 관련된 일로 생활이 가능하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 필자: 남도의 어느 임도 길에서.     




● 트레킹의 정확한 어원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 더 많이 답사를 다니고, 더 많이 자료조사를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적절할 때 '아재 개그'를 터뜨려서 참가자들의 배꼽을 빠뜨리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트레킹이든 답사여행이든 재밌어야하니까.

어쨌든 내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한다. 그렇게 공부를 하다 보니 우리나라에서 트레킹의 어원을 잘못 쓰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아래는 그와 관련된 이야기다.

최근 몇 년간 거세게 일어났던 도보여행 덕분일까? 우리는 트레킹(trekking)이라는 낯선 단어를 꽤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다. 하물며 이 글의 서두에서는 '트레킹으로 먹고 살 수 있냐'는 질문까지 적시되어 있다.

그렇듯 우리는 트레킹이라는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입에 올리고 있다. 그것도 그냥 액면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접두사까지 붙여서 사용한다. 힐링트레킹, 숲길트레킹, 봄꽃트레킹 등등...








 * 공산성: 공산성 성곽길을 걷고 있는 도보여행자.      
        





한마디로 '트레킹'이란 명칭은 이제 우리에게 '등산'이란 단어만큼이나 친숙해진 말이 됐다. 하지만 트레킹이란 말은 자주 입에 올려도 그 어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아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은 듯싶다.

트레킹은 남아프리카의 보어인들이 소달구지 등을 이용하여 정처 없이 이동한다는 것을 그 어원으로 두고 있다. 여기서 보어(bore)인들은 네덜란드에서 지금의 남아프리카공화국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을 지칭한다. 즉 보어인들은 남아프리카 지역의 원주민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들은 백인이었고 네덜란드어를 썼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트레킹(trekking)이라는 말도 네덜란드어 'trek(끌기, 이동)'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일부에서는 보어인들을 남아프리카 원주민으로 잘못 설명하고 있다. 남아프리카의 원주민은 흑인인 줄루족인데도 보어인들을 원주민으로 잘못 지칭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어원 설명도 뒤바뀌어 버렸다. 네덜란드 이주민들이 썼던 말을 남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썼던 말로 잘못 설명한 것이다.

그 설명대로 하자면 넬슨 만델라도 보어인이 된다.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 때문에 온갖 박해를 받은 넬슨 만델라가 보어인이 되는 것이다. 보어인들은 아파르트헤이트를 정책을 만든 장본인들이다.

어원 설명이 잘못되다보니, 나머지 사실들도 뒤죽박죽이 된 것이다. 참고로 만델라는 줄루족이 아닌 템부족 출신이다. 줄루족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다수 종족이다.

일부 도보여행 전문가들의 홈페이지뿐만 아니라 온라인 백과사전에도 그런 식으로 트레킹의 어원 설명을 잘못 기재한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 사안은 확실하게 개선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삼신봉: 지리산 삼신봉. 1284고지에 위치한 삼신봉. 저 곳에 올라서면 지리산의 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져진다.










● 트레킹 VS 등산

사실 트레킹의 어원이 네덜란드이든 남아프리카이든 걷기에 나선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일이 아닐 것이다. 걷기가 트레킹으로 불리든 도보여행으로 불리든 배낭을 둘러메고 나서는 사람들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중요한 것은 트레킹의 장점일 것이다. 트레킹의 효용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동어반복이 될 수 있다. 트레킹 좋은 거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차라리 누구나 다 아는 트레킹의 장점을 나열하는 것보다 등산과 비교하는 것이 더 알찬 일이 될 것이다.

등산은 '산에 오른다'라는 말처럼 수직적인 개념이다. 이에 비해 트레킹은 수평적인 개념이다. 산에 올라야 하기에 등산의 등판각은 급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에 비해 산 주위를 둘러가는 트레킹은 등판각이 완만하다. 거의 평지를 걸을 때도 있다. 그렇게 완만한 길을 걷기에 등산보다는 관절에 부담이 덜 한 것이다.

관절의 부담만 덜한 것이 아니다. 심장의 부담도 덜하다. 등산 시에는 종종 호흡이 가팔라지지는 경우가 있지만 트레킹을 할 때는 그렇게 심장박동이 빨라질 일이 별로 없다. 그렇게 완만함이 유지되다 보니 접두사가 붙여질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풍류, 역사, 봄꽃, 인문학 등등...

그런 접두사들은 테마로 도출된다. 한마디로 테마트레킹이 되는 것이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이 '헥헥' 거리는 게 아니라 느긋하게 걸어 다니니 설명을 하고, 이야기를 듣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추석 연휴도 막바지를 향해간다. 한 해의 소출을 거두는 귀중한 시기를 맞이한 것이다. 가을걷이가 이루어지는 들녘은 언제 봐도 풍요롭다. 수확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농부들의 미소가 달덩이처럼 보인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도 모두 다 보름달 같은 미소로 추석 연휴를 즐기셨으면 좋겠다. 나도 보름달 같은 미소를 짓고 싶다. 그리고 올해는 머뭇거렸지만 내년에는 당당히 답을 하고 싶다.

"트레킹으로 먹고 살 수 있어요?"
"네, 많이는 못 벌어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
 






* 안산 자락길: 안산 자락길을 산책하는 모습.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