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독자사연공모전 당선작

 

여러분의 2012년은 어떻게 저물어가고 있습니까? 형편없는 성적표나 불합격 통지서, 애인의 이별통보와 갑자기 엄습해온 병 등 많은 것들이 우리를 지치게 했고 울게 만들었습니다. 많은 독자분들이 esc와 함께 그 흑역사를 털어버리고자 공모전에 동참해왔습니다. 아깝게 탈락한 독자 여러분께도 큰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당선자 7명에게 롯데월드 자유이용권 4매씩 드립니다.

 

 

 

 

호환마마보다 두려운 카드명세서

 

 

내게는 사자나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있다. 귀신도 두려워하지 않는 나지만 그 녀석 앞에만 서면 내 심장은 ‘쫄깃쫄깃’해진다. 그 녀석은 한달에 한번씩 꼭 찾아와서는 나를 뒤죽박죽 만들어 놓고 떠나가 버린다. ‘대금 결제가 정상적으로 이뤄졌습니다’라는 문자메시지를 남기고. 그렇다.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건 바로 카드 값이다.

 

 

그간 카드 좀 긁었다. 벌이가 변변치 않아, 일단 카드로 결제하고 다음달에 메우는 식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현금서비스도 많이 받았다. 그러다 보니 결제일이 다가올수록 살얼음판을 걸어야 했다. 혹자는 내게 ‘화끈하게 놀았구먼!’ 하고 질책할 것이다. ‘얼마나 절제하지 못하고 긁었으면….’ 하지만 난 화끈하게 놀지 않았다. 이상한 곳에서 긁지도 않았다. 가난하게 살다 보니 카드 의존도가 높았을 뿐이다. 누군들 한달에 한번씩 꼭 ‘멘붕’을 맞고 싶겠는가!

 

 

2013년 새해부터는 카드 값의 공포에서부터 벗어나고 싶다. 새해부터는 재무설계를 똑 부러지게 할 생각이다. 더 졸라맬 허리띠도 없지만 그래도 개미허리가 되겠다는 각오로 열심히 살아볼 생각이다. 체크카드도 이용할 생각이다. 통장의 잔고 범위에서 지출하는 체크카드를 쓴다면 계획성 있게 돈을 쓸 것 같다. 재무설계를 똑 부러지게 하고 체크카드도 쓴다면, 2013년은 호랑이보다도 더 무서운 카드 값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원년이 될 것이다.

 

 

  

곽동운/

 

 

*** 한겨레 주말판(ESC)에 독자공모를 한다고 해서 글을 올렸습니다. 카드값과 관련된 이야기를요. 맨 위에 걸린 일레스트레이션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카드값 귀신이 자고 있는 사람을 놀래킵니다. 앗! 혹시 저 그림에서 놀란 곽작가, 나인가???ㅋ

아래글은 다른분들의  공모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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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가야 좀만 참아줘~

 

7시50분, 내가 직장에 출근을 해야 하는 시간이다. 집에서 직장까지는 차로 6~7분 거리, 밀릴 염려도 없는 주택가 도로임을 고려한다면 나의 출근길은 천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시 정도에 밥을 먹고 준비해서 7시40분께 집에서 출발하면 느긋한 맘으로 갈 수 있는 거리다. 그런데 느긋한 나의 이 출근길을 가로막는 방해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일명 ×이라 불리는 대변이다.

 

 

지금껏 내 인생에서 아침에 대변을 보지 않은 적은 손에 꼽을 정도다. 일어나면 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배설기관을 작동시키는 것. 실패한 적이 거의 없는지라 항상 가뿐하게 아침을 시작하는데, 문제는 희한하게도 아침을 먹고 나서 7시40분만 되면 후속타가 생긴다는 것이다. “나 다녀올게” 하고 인사까지 다 마치고 현관문을 열려고 하면, 그때서야 무슨 약속이라도 한 듯이 신호가 오는데, 그 신호를 무시하고 그냥 가기에는 너무 부담스럽고 꺼림칙하다. 옷이며 가방이며 다 준비된 것들을 다시 내려놓고 화장실로 가야 하는 참담함, 그리고 오늘도 늦을 수밖에 없구나 하는 암담함. 그래도 어쨌거나 가뿐한 몸으로 출근을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이 뒤늦은 쾌감.

 

 

아침잠이 없어 새벽에 항상 일어나는 아침형 인간인 나는, 이 말 못할 배설작용으로 올 한해 게으름뱅이라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이것이 하늘의 뜻이 아니라면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13년 새해를 시작하기에 앞서, 당당하게 외친다. “×아, 이제 나를 놓아다오~”

 

 

임주성/대전시 유성구 노은동

 

 


 

 

 

양다리의 길은 멀고도 험난해

 

 

스물다섯이 되도록 애인 없이 모태솔로로 지내던 나에게 소개팅은 거의 일상이었다. 끝나가는 스물다섯을 한탄하며 ‘이번에는 꼭!’이라는 각오로 소개팅을 하게 됐다. 다행히 괜찮은 상대를 만나게 되었다. ‘드디어 남자친구가 생기는구나’ 하는 기대까지 하게 됐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상대는 만날수록 물음표를 던지게 되는 사람이었다. 그러던 중 다른 지인에게서 새로운 소개팅 제안을 받았고 약속 날까지 잡았다.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바람 아닌 바람을 피우는 기분이랄까.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뭐! 하고 생각하며 남자1호와의 만남을 이어갔다.

 

 

문제의 발단은 남자2호를 만나기 전에 1호의 고백을 받게 된 거였다. 나의 예상 시나리오는 두 사람을 만나보고 더 나은 상대를 택하는 것이었는데! 팔자에도 없는 저울질을 하려다 보니 일이 꼬인 것인지, 남자1호에게 나는 시간을 달라는 애매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이야기 들은 사람이라면 예상했을 것이다.

 

 

‘두 마리 토끼 잡으려다 놓쳤구나?’ 이 정도였다면 그렇게 지우고 싶은 기억도 아니었을 것이다. 남자1호는 자꾸만 대답을 듣고 싶어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기다려달라’는 말만 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만났을까. 정말, 거짓말처럼 남자2호와의 약속이 잡힌 바로 전날 인내심이 바닥난 남자1호가 이별 선언(?)을 해온 것이다. 떠나겠다는 사람 잡을 이유는 없었기에 쿨하게 안녕 하고 다음날 소개팅에 나갔지만, 더는 쿨할 수가 없었다.

 

 

남자2호가 영 아니었던 것이다. 그 뒤로 자꾸만 남자1호가 생각나고 마음에 걸렸다. 가슴앓이를 하는 나를 주선자는 신기해했다. 지금껏 내가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나는 해서는 안 되는 연락을 하고야 말았다. 무려 세번이나! 주선자를 통해서도 해보고 내가 시도도 해보고. 결국 세번 다 까였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결론이다. 떠나는 2012년과 함께 정말 잊고 싶은 기억이 돼버렸다.

 

 

문송이/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

 


 

호환마마보다 두려운 카드명세서

 

 

 

 

 

 

2012 view블로거대상 엠블럼

 

 

 

 

 

 

 

 

 

 

 

 

 

 

 

 

 

 

 

 

 

 

 

 

 

 

 

뱃길아, 북적북적해져라

 

[한겨레] 강화도 외포리에서 출발한 ‘2005 한강하구 평화의 배 띄우기’

전쟁으로 갈라진 강화지역-황해도 생활권의 적막이 구슬프다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글 곽동운 10기 독자편집위원

 

 

 


7월27일 오전 9시, 강화 외포리 항구에서 뱃고동이 힘차게 울렸다. 그동안 통행할 수 없었던 한강 하구를 향해 평화의 배는 씩씩하게 물살을 헤치고 나아갔다. 얼마 만인가. 52년 동안 갈 수 없었던 한강 하구. 더 정확히는 한강과 임진강의 하구. 남북 분단으로 반세기가 넘는 동안 가로막혔던 물길을 평화의 배는 갈매기를 벗 삼아 유유히 흘러갔다.

지금은 석모도행 전용 항구가 됐지만, 옛날 외포리에서는 서울 마포나루로 떠나는 배들도 있었다. 수산물과 각종 특산물을 가득 싣고 한강 하구를 거슬러 올라갔던 것이다. 인근 교동도에서는 북한 지역인 황해도 연백으로 장을 보러 다니곤 했다. 생활권으로 묶일 만큼 강화 일대와 황해도는 가까웠다.

 

 

 

 


전쟁은 물길까지 갈라놓았다. 52년 전 조인된 정전협정에서는 민간 선박의 규제가 없었음에도 북방한계선(NLL)과 어로 한계선이 ‘관습헌법’처럼 작동해 이 지역은 고깃배 한척 없는 적막한 곳이 되었다. 돈이 있어도 그곳은 못 갔다. 배가 있어도 그곳은 갈 수 없었다. 러시아도 가고, 달나라도 가는데.

평화의 배 출항지가 외포리항이어서 더욱 뜻깊었다.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로 인해 강화 지역에서만 1천명 정도가 사망했다. 외포리도 학살지 중 하나였다. 비무장 민간인들이 전쟁의 제물이 되어 총과 칼을 맞아야 했던 잔혹한 역사를 지닌 곳이다. 진혼무의 가락이 더욱더 구슬프게 느껴졌다.

예정했던 항로가 단축되어 어로한계선 800m 북상을 끝으로 뱃머리를 돌려야 했던 평화의 배에서는 각종 문화공연과 리영희 교수, 도법 스님, 김낙중 선생의 강연이 이어졌다. 예정 항로를 다 채우지 못해 무척 아쉬웠지만 평화의 배 띄우기는 출항만으로도 충분한 의의가 있었다. 꽃게철만 되면 남북 경비정의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던 이곳에 새로운 물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이 평화의 기운이 서해 건너 중국 베이징까지 전달되면 얼마나 좋을까. 52주년을 맞은 7·27 휴전 협정일을 떠올리며 4차 6자회담이 잘되길 기원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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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는 제가 한겨레21 독자편집위원을 했을 때, 작성한 기사였습니다. 한겨레21 독자편집위원을 하면, 아주 간간이 한겨레 측에서 원고 청탁을 하더군요. 물론 원고료가 서운했죠...-_- ㅋ 그러고보니 이 행사를 했던 때가 벌써 7년 전입니다. 시간이 참 빠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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