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모천사성당(Church of Our Lady of the Angels)과 베르나드타워(Bernard So Tower): 성당과 타워는 인접해있지만 별개의 건물이다. 타워는 감옥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재미난 스페인 12편> 이비아

왜 프랑스 땅에 스페인 영토가 있어?

유럽을 여행할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고풍스러운 건축물도, 아름다운 자연환경도 아니었다. 바로 국경 넘기였다.

필자에게 기존의 국경이란 절대 넘을 수 없는, 그런 공간이었다. 날카로운 철조망이 2단으로 쳐져 있고, 각종 감시장비가 빽빽이 운영되어 있던 곳. 긴장감, 살벌함, 매서움 등등... 이런 이미지가 뇌리에 박힐 수밖에 없었던 건, 필자가 군복무를 DMZ 부근에서 했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가시가 박힌 철책선이 국경선이었고, 그 철책선은 절대 넘어서는 안 되는 금지된 선이었다.

전날 피레네산맥에 자리 잡은 작은 나라, 안도라에서 1박을 했다. 공기가 좋은 곳에서 잠을 잤더니 얼굴에 생기가 도는 듯했다. 물론 아침에 거울을 봤을 때는 어김없이 오징어(?) 한 마리가 불쑥 튀어나왔지만...

이번에 탐방할 곳은 이비아(Llivia)라는 곳이다. 리비아? 북아프리카에 있는? 아니다. 영어로 읽으면 ‘리비아’가 맞지만 스페인어로는 ‘이비아’로 발음한다. 안도라는 어찌어찌해서 이름을 들어본 분들이 있을 테지만 이비아는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이 대다수일 것이다. 이비아도 안도라처럼 피레네산맥 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두 도시는 약 50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래서 두 지역을 묶어서 탐방할 수도 있다.

 

 

 

* 이비아: 이비아성에서 바라본 모습. 하단 중앙에 천사성모 성당이 보인다.

 

 

 

그런데 그 낯선 이비아에는 뭐하러 갔는가? 이비아의 독특한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갔다. ​이비아는 프랑스 영토 안에 있는 스페인 땅이다. 혹시 칼리닌그라드라는 지명을 들어보셨는가? 칼리닌그라드는 폴란드 동북쪽 국경과 면해 있는 곳으로 러시아의 고립 영토다. 바닷길을 제외하고, 칼리닌그라드에서 러시아 본토로 가려면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를 거쳐 가야 한다.

이렇듯 다른 나라에 둘러싸여서 본토와 외떨어진 영토를 고립 영토라고 부른다. 스페인에 둘러싸여 있는 영국령 지브롤터도 대표적인 고립 영토다. 또한 북아프리카 모로코 영토에 둘러싸인 세우타와 멜리야도 스페인의 고립 영토다.

그래도 칼리닌그라드와 지브롤터는 바다와 면해 있어 바닷길로 본토에 닿을 수 있다. 세우타와 멜리야도 마찬가지로 여객선을 타면 스페인 본토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비아는 무조건 프랑스 땅 2km를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다. 이게 참 재밌는 게 어쨌든 국경을 넘는 거라 스마트폰 통신사가 달라진다.

사실 이비아는 필자 같은 뚜벅이 여행자들이 쉽게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그래서 일부러 여행 초기에 배치해서 찾아갔다. ​먼저 안도라에서 스페인의 라세우두르젤(La Seu d'Urgell)로 갔고, 다시 프이그세르다(Puigcerdà)라는 도시로 이동했다. 익숙하지 않은 지명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사실 필자도 두 도시의 이름을 발음하기가 버겁다. 차라리 ‘안도라’는 세글자로 떨어져서 발음하기가 편하기라도 하지... 이렇게 유명하지 않은 외국 답사지를 각인시키기가 쉽지 않다. 이런 어려움은 이 책을 쓰는 내내 필자의 어깨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 천사성모성당: 중심거리에서 바라본 성당의 종탑

 

 

 

긴장을 풀고 찬찬히 살펴보자. 라세우두르젤은 안도라 편에서 언급이 됐었다. 안도라는 입헌공동군주제라는 독특한 형태의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는데 프랑스 대통령과 스페인의 우르헬 교구의 주교가 그 공동군주들이다. 그 우르헬 교구가 있는 도시가 바로 라세우두르젤이다. 프이그세르다는 프랑스 국경과 맞닿아 있는데 이비아로 가기 위한 베이스캠프(?)로 제격인 곳이다.

안도라 -> 라세우두르젤 -> 프이그세르다 -> 프랑스영토(유흐 / 부흑-마담므) -> 이비아

복잡해 보이지만 거리가 그리 길지 않았다. 총 이동 거리는 약 70km 정도이다. 스페인 영토인 프이그세르다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프랑스땅을 넘어 이비아로 갔다. 갈아탄 버스는 우리나라로 치면 마을버스만한 크기였다. 그래도 나름 국경을 넘는 버스인데 아주 소박하고 정감 있어 보였다. 프이그세르다에서 이비아까지 프랑스 영토내에서 직선으로 도로가 연결되는데 그 도로를 중심으로 동쪽에 있는 동네가 부흑-마담므(Bourg-Madame)이고, 서쪽에 있는 동네가 유흐(Ur)이다.

이비아의 지정학적인 위치를 알기 위해서는 세르다냐(Cerdaña)라는 지역을 알아야 한다. 스페인에 속한 이비아와 프이그세르다는 물론 프랑스령인 유흐와 부흑-마담므도 세르다냐에 속하기 때문이다. 세르다냐는 전체면적이 1,086㎢로 인천광역시(1,067㎢) 정도의 크기다. 지금은 남북이 갈려 있는데 남쪽은 스페인 영토로 바이샤 세르다냐(Baixa cerdanya)로 북쪽은 프랑스 영토로 알타 세르다냐(Alta cerdanya)로 불린다. 그 프랑스 세르다냐 지역 속에 스페인의 이비아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종교전쟁이라고 불렸던, 30년 전쟁이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종결됐음에도 스페인과 프랑스는 계속 전쟁을 이어갔다. 그러다 1659년, 피레네조약에 의해서 종전을 하게 됐는데 이때 스페인은 세르다냐 북부지역을 프랑스에 넘겨주게 된다. 협정을 통해 프랑스는 북쪽 세르다냐의 33개 마을을 획득하게 됐다. 하지만 이비아는 제외되는데 스페인측에서 이비아가 ‘마을(village)’이 아닌 ‘도시(town)’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 이비아성: 많은 부분이 폐허로 남아 있다.

 

 

 

피레네조약을 통해 프랑스가 얻은 영토를 생각해보면 이비아는 작은 규모였다. 챙긴 전리품이 두둑한데 굳이 타운 하나 때문에 전쟁을 이어나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해서 이비아는 스페인영토로 남게 됐다.

이비아는 부메랑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크기가 약 12.9㎢ 정도로 서울의 금천구(13㎢)와 비슷한 규모다. 인구는 2023년 기준으로 약 1,500명 정도에 달한다. 행정구역은 카탈루냐 지역, 지로나 주에 속한다.

사실 이비아는 로마시대부터 그 중요성이 부각된 곳이었다. 이름도 이곳에 주둔했던 로마의 장군인 율리아 리비카(Julia Lybica)에서 따온 것이다. 이비아는 한때 세르다냐의 도읍지 역할을 했다.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중심가를 지나니 언덕을 향해 자리잡은 천사성모 성당이 보였다. 이 성당은 16세기에 완성됐는데 도시의 상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풍채가 당당했다. 성당의 입구에는 베르나드타워라는 탑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탑이 있어 성당의 외형이 더 다채로워 보였다.

이비아 탐방의 정점인 이비아성(castell de Llivia)에 올라 주위를 살펴보았다. 이비아성은 상당 부분 파괴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상부에 올라서니 주위 풍광을 한눈에 다 볼 수 있었다. 로마시대부터 오랫동안 왜 이곳이 요충지였는지 짐작해 볼 수 있었다.

 

 

 

* 이비아: 평원을 피레네의 고봉들이 감싸고 있는 형상이다.

 

 

 

분명 피레네 산맥에 자리잡고 있지만 그 일대는 큰 평원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이 피레네가 맞나 싶을 정도로 널찍한 공간이 펼쳐지고 있었다. 마치 피레네의 고봉들이 평원을 숨겨놓고 있는 형상이었다. 평원과 고봉들을 동시에 볼 수 있었던 꽤나 흥미로운 순간이었다. 그런 굉장한 풍광들이 이슬비와 함께 눈 앞에 펼쳐지고 있으니 약간은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DMZ에서 보초를 설 때였다. 어둠이 거치고 여명이 밝아올 무렵, 철책선 건너편에서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소총에 힘을 꽉 쥐고, 초소를 나와 철책선 너머가 더 잘 보이는 곳으로 이동했다. 침투조인가? 아니었다. 멧돼지들이었다. 한 마리가 아니라 가족단위였다. 먹이를 찾아 철조망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나중에는 고라니들도 보였다. 말 그대로 DMZ은 야생동물들의 천국이었다. 야생동물들은 자유롭게 DMZ 일대를 누비는데 왜 인간들은 날카로운 철책선으로 금을 그어 서로를 분리시키는가?

국경 같지도 않은 국경을 마을버스로 넘으며 필자의 20대 시절을 되돌아봤다. 프랑스에 있는 스페인 고립영토 이비아에서.

 

 

*이비아 지도

 

 

 

 

 

 

 

* 안도라베야: 안도라의 수도 안도라베야

 

 

 

 

 

<재미난 스페인 11편> 입헌공동군주제? 그런 말도 있어?

피레네의 작은나라 안도라

바르셀로나 국제공항에 내렸다. 그간 마드리드 국제공항은 많이 이용했지만 바르셀로나 공항은 처음이었다. 서울도 그렇지만 바르셀로나의 여름도 만만치 않았다. 아니 무슨 6월 초순의 날씨가 이렇게 강렬한가! 이제껏 스페인, 포르투갈은 가을이나 겨울 시즌에만 와서 그랬는지 이베리아반도의 여름 맛(?)은 처음이었다. 한국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뜨거운 뙤약볕이었다!

이후 바르셀로나 중앙역 옆쪽에 있는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안도라(Andorra)로 이동했다. 총 비행시간이 16시간을 넘다 보니 버스를 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확실히 비행기보다는 버스가 잠자기에 딱이었다. 덕분에 시차 적응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안도라는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있는 피레네산맥에 있는 작은 나라다. 서울의 면적이 605㎢이고, 안도라가 468㎢이니 서울보다도 더 작은 곳이다. 인구는 2021년 기준으로 약 8만 명 정도에 달한다. 안도라의 공식 명칭은 안도라공국(Principality of Andorra)이다. 거칠게 말해 공작이 최고 수반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공작은 새가 아니라 백작, 공작할 때 그 공작이다.

그런데 왜 하필 안도라인가? 안도라와 스페인이 무슨 관계가 있나? 안도라는 스페인의 카탈루냐 지방과 크게 연관을 맺고 있는 곳이다. 공용어로 카탈루냐어를 사용하고, 심지어 카탈루냐 지방에 속한 우르헬이라는 도시의 주교가 안도라의 공동 수반으로 봉직하고 있을 정도다.

 

 

 

*성 에스테베 성당: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12세기에 지어졌다. 물론 그 이후로도 여러번 개축을 했다. 안도라베야에 있는 유서 깊은 건물이다.

 

 

 

한편 이 책의 제목이 <재밌는 스페인>이지만, 굳이 그 내용을 스페인으로만 한정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스페인, 포르투갈은 물론 영국령 지브롤터와 피레네산맥의 안도라까지... 이베리아반도 내에 있는 주권국가들이 모두 논의 대상 안에 포함된다.

​스페인에서 안도라로 입국(?)하려면 검문소를 지나야 한다. 안도라가 솅겐 조약에 미가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문소에는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대신 스페인에서 프랑스, 반대로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넘어가는 차들이 많았다. 졸다가 깨보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차창 밖으로 피레네산맥의 산들이 위엄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랬는지 구례 읍내에서 공영버스를 타고 올라갔던 지리산 성삼재가 연상됐다. 피레네도 산 넘어 산, 지리산도 산 넘어 산... 다를 거 없이 참 좋구나!

약 4시간 만에 안도라베야(Andorra la Vella)에 도착했다. 다른 작은 나라들은 도시 국가 형태인 경우가 많지만 안도라는 안도라베야라는 수도가 따로 있다. 수도답게(?) 안도라베야에는 이 나라 인구의 ¼인, 약 2만 명이 거주한다.

피레네의 험준함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이곳 사람들은 그런 척박함을 이겨낸 듯이 보였다. 절벽 위에다 집을 짓고 마을을 지은 것이다. 안도라 사람들은 지반 공사하기도 어려운 땅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거주 기반이 스위스와 비슷해 보였다. 하긴 안도라베야는 해발 약 1,023미터에 위치해 있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수도다.

 

 

 

*성 에스테베 성당: 왼쪽 건물이 성당이다. 오른쪽 건물은 리모델링 중인데 공사 가림막이 주위와 어울리게 만들어져 착시 효과를 내고 있다. 사진에서도 보이듯 뒤쪽에 있는 산은 민둥산이다. 안도라베야 일대의 몇몇 산들은 산사태를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맨살'을 드러내고 있다.

 

 

 

안도라는 ​스페인과 프랑스라는 두 개의 큰 나라에 끼어있는 작은 나라다. 그래서인지 입헌공동군주제라는 아주 독특한 방식의 정치 체제로 운영된다. 입헌군주제는 알겠는데 입헌공동군주제라니! 안도라는 프랑스 대통령과 스페인의 카탈루냐 지방인, 우르헬 교구의 주교가 공동으로 최고 권력 수반을 이루고 있다.

안도라의 건국이 13세기였으니, 중세 시기에 프랑스 측에서는 왕이 대표자였고, 현재는 대통령이 그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스페인 측에서는 계속해서 우르헬 교구의 주교가 대표자였다. 이를 두고 입헌공동군주제라고 부른다. 물론 안도라에는 현재 총리가 실질적으로 국정을 총괄하고 있다.

여기서 궁금한 게 있다. 스페인의 주교는 논외로 치고, 프랑스의 왕이 어떻게 공국의 수반이 될 수 있을까? 겸임하면 가능하다. 왕(king)이 공작(duke)도 겸임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태양왕이라고 불린 루이 14세는 프랑스의 국왕이자 안도라의 공작이 된다. 중세 시기였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배경지로 유명한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 공국이 있었다. 바이킹이라고 불렸던 북유럽인들이 세운 노르망디 공국이었다. 그런데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은 영국에서는 국왕이었다. 정리하면 노르망디 공국의 수장은 프랑스에서는 공작, 영국에서는 왕이었던 것이다.

안도라는 1993년까지 헌법도 없었다. 규모가 작고, 인구도 적어서 헌법 없이도 통치가 가능했으리라. 1993년까지는 공동군주제였고, 이후로는 헌법이 제정되어 입헌공동군주제라는 현재와 같은 정치 체제로 발돋움 한 것이다. 그해에 UN에 가입하기도 했다.

 

 

 

* 입헌공동군주제: 입헌공동군주제를 표현한 청동판. 의회 건물로 쓰였던 카사 데 라 발(Casa de la Vall)의 한켠에 서 있다.

 

 

 

안도라의 기원은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샤를마뉴 대제는 이슬람 무어인들의 북상을 막기 위해 피레네산맥 일대에 에스파냐 변경령을 설치한다. 에스파냐 변경령은 프랑스 남부 지역을 방어하는 마지노선 역할을 했다.

다수의 변경령이 설치가 됐는데 우르헬 백작령도 그중 하나였다. 우르헬 백작이었던 보렐 2세는 안도라의 통치권을 우르헬 교구로 넘겼다. 우르헬 교구는 말 그대로 가톨릭의 일개 교구일 뿐이었다. 실질적으로 지역의 방위를 할 수 있는 물리력이 필요했다. 이에 우르헬 교구는 통치권의 일부를 유력 가문에게 넘기게 됐고, 그 통치권은 돌고 돌아 결국에는 프랑스 남부의 푸아 백작이 행사하게 됐다. 1278년, 푸아 백작과 우르헬 주교는 합의에 의해 안도라의 공동통치자로 나서게 된다.

스페인 측은 가톨릭 교구이기에 그 주체가 변함이 없었지만, 프랑스 측은 세속 정치에 엮여있기에 부침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격변기에는 프랑스 측 공작이 공석이 되기도 했다. 또한 대혁명과 파리코뮌 같은 엄청난 대격변을 겪으며 봉건제를 폐지 시킨 프랑스인데, 정작 안도라에서는 공화국의 대통령이 공작이 되는 특이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정치 체제가 800년도 넘게 이어질 수 있었을까? 프랑스와 스페인이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더군다나 피레네라는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안도라 사람들의 절박함이 그런 독특한 정치 체제를 만들고, 유지시킨 것이 아닐까?

 

* 안도라: 스페인과 프랑스에 끼어있는 안도라의 모습을 빗댄 것 같은 표지판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안도라공국이라는 명칭 때문에 살짝 중세풍의 도심 풍경을 기대했었다. 하지만 안도라는 현대적인 건물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물론 옛 건물들도 있었지만.

안도라는 쇼핑과 레저·스포츠산업이 발달했다. 거의 모든 품목이 무관세라서 쇼핑의 천국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고지대에 있고, 눈도 많이 내리다 보니 스키를 타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카지노로도 유명한 곳이다.

상류라서 그런지 강물이 엄청난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발리라 오리엔트(valira d'orient)라고 불리는 강이었는데 그냥 계곡 같아 보였다. 어쨌든 그렇게 유속이 빠른 도심지 강물은 처음 봤는데 물소리가 아주 시원했다.

그 물소리를 듣고 있자니 예전에 천왕봉을 다녀온 후 거닐었던 지리산 대원사 계곡이 떠올랐다. 전날 비가 와서 그랬는지 그때 대원사 계곡은 우렁찬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한참을 계곡에 앉아 물소리를 들었었다. 계곡물 소리가 번뇌와 집착들을 씻어주는 듯했다. 그날의 지리산 대원사 계곡물 소리처럼 우렁찬 피레네 강물 소리에 귀가 다 시원해졌다. 시차에서 오는 피로감이 싹 다 날아가는 듯했다.

피레네 강물 소리에 번뇌와 집착이 씻겨 내려갔던 것일까? 그날은 아주 잘 잤다. 바르셀로나처럼 덥지도 않았다. 역시 피레네산맥!

 

 

 

* 피레네의 강물: 우렁찬 물소리를 듣고 있자니 번뇌와 집착들이 싹 다 씻겨나가는 듯했다.

 

 

 

 

* 안도라: 시각적 효과를 위해 원래 크기보다 더 크게 표기했다.

 

 





* 피레네가는길





☞ 지난 2019년 12월 17일부터 2020년 2월 11일까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및 유럽 여행을 행하고 왔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그 전년도에도 다녀왔으니 2년 연속 탐방을 한 셈입니다. 순례길 탐방이 종료된 이후에는 20대에 못해봤던 배낭여행을 행했답니다.

독일 - 오스트리아 - 슬로베니아 - 크로아티아 - 스위스 - 이탈리아

알프스 산맥을 둘러싸고 있는 나라들 위주로 여행을 다녔습니다. 알프스 산맥에는 못 갔지만 먼 발치에서나마 알프스 일대를 둘러보았답니다.

여행을 하는 내내 열심히 여행일지를 작성했습니다. 여행일지는 수첩(기자수첩 사이즈)에 작성했는데 그 내용들을 포스팅할 생각입니다. 여행일지를 온라인으로 옮겨 놓는거라 재밌는 포스팅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또한 디테일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한 개인의 여행기가 이 공간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한 개인의 작은 기록이 올라가지만 그것 자체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한 개인의 역사로 이어질테니까요!




* 2019년 12월 19일 목요일: 3일차 / 맑음


1. 자전거 뒷안장이 필요하기에 생장피에르드포드에 있는 자전거샵을 찾아갔음. 그 자전거샵은 작년에 길을 헤매였던 곳에 위치해있었음.


2. 자전거샵에 가니 주인장이 문을 닫으며 30분 후에 돌아온다고 했음.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1시간 후에 나타났음.


3. 뒷안장을 달고 하니 돈 좀 들었음. 무려 66.6유로. 깎아서 66유로를 지불함. 무슨 뒷안장 다는데 무려 8만원 가까이나 하나!ㅋ


4. 하여간 뒷안장을 달고 임시방편으로 양쪽에 바구니를 달아서 드디어 여행자전거 형태가 나옴. 이제 시작인가! 이제 열심히 주행하는 일만 남았음.


5. 그런데 자전거를 탄지 너무 오래되서 그런가? 자전거를 타는게 너무 불편한 것이다. 바지도 자전거를 타기에는 불편했다. 너무 거치적거리는게 아닌가? 이러다 나중에 큰 사고가 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들었다.


6. 생각해보니 국내에서 자전거여행을 할 때는 항상 여름이었다. 그러니 복장이 간편하고 거치적거리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겨울이 아닌가? 겨울 바지를 입으니 페달 굴리기가 어렵지.


7. 그런 와중에 뒷바퀴가 펑크가 났음. 주행한지 5km도 안 됐는데 펑크가 난 것이다. 수리 공구도 마땅치 않아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8. 고심 끝에 다시 생장피에르드포드로 돌아가기로 했다. 돌아오는 길에 자전거를 타는 현지인을 만났는데 내 자전거를 보니 순례길 여행을 하는데 적절하지 않다고 하더라. 강하지 않은 약한 자전거라고. 차라리 자전거샵에 팔아버리거나 기부하라고 했다.


9.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내 자전거는 도시형 자전거라 장거리여행에 적절하지가 않았다. 중고자전거를 타고 다녔던 옛날 생각에 사로잡혀 이게 장거리여행에 적합한지 아닌지도 구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참 여러가지로 꼬인다 꼬여!


10. 고심 끝에 뒷안장을 달았던 자전거샵에 가서 자전거를 팔았다. 정확히는 기부를 했다. 그런데 주인장이 아까 받았던 뒷안장 값을 돌려주었다. 70유로. 뒷안장 값이 66유로였으니 자전거를 4유로에 판 셈이다. 180유로에 사서 이틀도 못되서 4유로를 받고 판 것이다.


11. 나의 산티아고순례길 자전거여행은 5km 만에 끝이 났다. 아이고 이를 어쩌냐! ㅋ


12. 돈이 아까운 건 둘째치고 기획했던 일정이 엉망이 된 것이 너무 억울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어쩌면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계속 비가 온다는데 그 비를 맞고 자전거를 타기에는 너무 위험했으니까.


13. 다시 시작하는 거다. 그냥 작년처럼 도보여행을 하는 것이다. 열심히 걸어야지. 자전거를 대신해서 열심히 걷는 거야! 아자아자~





* 자전거: 바디만 있는 자전거. 생장피에르드포드 알베르게 앞에서.





* 펑크난 자전거: 호기롭게 시작된 자전거 여행은 약 5km도 안 되서 아웃됐다.






* 2019년 12월 20일 금요일: 4일차 / 흐리다 비 옴


1. 9시 30분경 생장피에르드포드(saint-jean-pied-de-port) 알베르게(albergue)에서 체크 아웃함. 드디어 순례길을 다시 시작한다. 자전거가 사라졌으니 새로운 각오로 다시 임해야 한다.


2. 배낭을 꾸려서 출발을 하려고 할 때 순례길 사무소 할배가 와서 뭐라고 뭐라고 그런다. 처음에는 같은 알베르게에서 이틀 연속 묵은 거에 대해 질책을 하는 줄 알았다.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같은 알베르게에서는 연박이 허용되지 않으니까.

그런데 알고보니 피레네 산맥에 강한 바람이 부니 조심하라는 거였다. 할배가 무표정하게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하니 질책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꼴이었나...ㅋ


3. 알고보니 전날 피레네를 넘은 팀들 몇 명이 조난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할배가 경고를 한 거 같다.


4. 1년 만에 다시 피레네를 넘을 생각을 하니 셀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작년에 정말 힘들게 넘어서 아픈 기억이 다시 되살아 난 것이다. 그때 비를 엄청 맞고 걸었으니...


5. 1년 만에 다시 악몽이 되살아 났다. 자전거 여행용으로 짐을 싸서 그랬는지 짐이 많았다. 물론 작년에도 많았지만... 짐 무게는 짓눌려 오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하고. 약 1년 만에 다시 똑같은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다. 정말 중간에 때려 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택시라도 불러서 점핑을 하고 싶었다.


6. 그 와중에 배낭 레인커버를 분실했다. 일체형이 아닌 분리형이라 바람에 날라갔던 것이다. 비닐 봉지로 배낭을 감싸기는 했는데 진짜 임시 방편이지!


7. 빗줄기는 거세지고 바람도 거세졌다. 배낭 무게도 점점더 늘어나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짐 무게가 내 어깨를 눌러댔다. 하지만 가야 할 길이면 가자! 그래 가자!


8. 중간에 산길을 거쳐갔는데 전날 강풍의 영향으로 등산로에 나무들이 쓰러져 있었다. 사무소 할배가 경고를 할만 했다.큰 나무들이 쓰러졌기에 그 나무들을 피해 기어가야만 했다.


9.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비를 맞으며 홀로 걷는 피레네 산맥. 역시 피레네는 피레네였다. 우여곡절 끝에 9시간 만에 목적지인 론셀바예스(Roncesvalles) 알베르게에 도착함. 아이고 힘들어! 그래도 또 피레네 산맥을 넘었다!


10. 하도 배가 고파서 바르에 가 닭고기+ 감가칩을 먹었음. 배가 고파서 그랬는지 정말 맛있게 먹었음. 이번 여행 중에서 가장 맛있게 먹은 음식이라고 판단됨. 주인장에게 이름이 뭐냐고 물었는데, racion이라고 했음. 그런데 나중에 찾아보니 racion은 '1인분의 요리' 이런 뜻이었음.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 요리 이름을 정확히 알아내야겠음.


* 이동거리: 약 26km

* 누적: 26km





* 피레네 가는길





*배낭:자전거를 팔고(?) 다시 도보여행자로. 무슨 돗떼기 장수 같다...ㅋ





* 도보여행자: 본의 아니게 이틀 연속 잠을 청한 생장피에르드포드 알베르게. 그 앞에서 한 컷. 휴대폰 카메라가 별로임.








 

 

 

독재자 프랑코가 우리에게 유신을 알려줬다고?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4편] 산티아고를 걷는 유럽인들

 

14.12.27 15:51l최종 업데이트 14.12.27 15:51

 

 

 

 

 

 

 
▲ 순례자 산티아고 대성당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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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들의 동료의식

산티아고 순례길에서의 또다른 볼거리는 바로 '사람'이다. 길을 걷다보면 전 세계에서 온 순례자들과 만나고 헤어지고를 수없이 반복한다. 순례자들의 일일 이동거리가 뻔하기 때문에 계속 동선이 겹쳐지고, 그러다보니 보는 얼굴이 계속 보이게 된다. 아침에 같은 알베르게(albergue: 순례자 전용 숙소)에서 출발한 사람과 점심 때 같은 바르(bar)에서 만나고, 그러다 저녁에 또 같은 알베르게에서 1박을 하고.

그래서인지 순례자들끼리는 자연스럽게 동료의식이 생긴다. 아예 팀처럼 움직이는 무리들도 있었다. 그들은 같은 알베르게에 묵으며 일정 자체를 공유했다. 심지어 그들은 빨래도 같이 했다. 알베르게에 있는 세탁기와 건조기의 요금은 보통 3유로 정도인데 개별적으로 하는 것보다 모아서하면 훨씬 저렴하기에 그들은 세탁물을 한 통에 넣어 세탁을 했다.

순례길을 걷기 전까지는 전혀 인연이 없던, 순례길을 통해 인연을 맺은 사람들의 옷들이 한 통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남자 속옷, 여자 속옷 가릴 것 없이 세탁기에서 원심 운동을 하고 있었다.

 

 

 

 



 
▲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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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피레네에서 끝났다!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은 다국적이었지만 역시 자국민인 스페인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스페인을 제외하고는 프랑스를 위시한 유럽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비유럽권에서는 한국인들이 가장 많은 듯했다.

유럽권 순례자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특히 히피처럼 보이는 순례자들을 보니 그 의문이 더욱 짙어졌다.

'중세는 그렇다 치고, 현대에 와서는 언제부터 유럽 사람들이 이렇게 산티아고 순례길로 몰려들었지? 프랑코 독재에 진절머리 쳤던 유럽 사람들인데 말야. 아직까지 스페인에 프랑코의 어두운 그림자가 남아 있다면 그들이 피레네 산맥을 넘었을까?'

<1984> <동물농장> <카탈로니아 찬가>로 유명한 소설가 조지 오웰은 스페인의 역사를 두고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스페인의 역사는 1936년에 멈추고 말았다."

조지 오웰은 1950년, 46세의 나이로 요절을 했고 그때까지도 스페인은 프랑코가 통치를 했다. 국제여단의 일원으로 스페인내전(1936~1939)에 참여해 목에 관통상을 당하는 등 엄청난 고생을 했던 조지 오웰이었기에 절대로 프랑코를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저런 말들을 쏟아냈을 것이다.

조지 오웰처럼 서구 사람들은 스페인에 대해서 고운 시선을 보낼 수가 없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끌어들여 선거로 들어선 인민전선 정부를 전복시켰던, 파시스트 프랑코 정권이 계속 존속했던 한 서구인들에게 스페인은 논외의 국가였을지 모른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었다.

"유럽은 피레네(산맥)에서 끝났다."

이렇듯 피레네 산맥은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에게 가상 경계선으로 인식됐다. 뻔히 피레네 산맥 아래에 스페인이 존재함에도 그들은 애써 이베리아반도를 유럽 대륙에서 떼어내려고 했던 것이다.

 

 

 



피레네를 들었다 놨다 했던 프랑코

그렇게 가상의 경계선이었던 피레네 산맥은 이제 산티아고 순례길의 시작점이 돼 전세계 순례자들이 모이는 집합소 역할을 해주고 있다. 그러고 보면 피레네는 20세기 들어 유럽과 스페인을 이어주는 가교가 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큰 장벽처럼 경계선이 되기도 하는 등 그 역할이 빈번했다.

그렇듯 피레네가 가교가 되던 장벽이 되던 그 중심에는 항상 프란시스 프랑코가 있었다. 프랑코의 파시즘을 막기 위해 유럽인들은 피레네를 넘었고, 프랑코가 스페인 내전에서 승리하게 되니 피레네를 경계선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다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하자 피레네를 통해 이베리아반도를 방문했다.

 

 



 
▲ 프란시스 프랑코 프란시스 프랑코
ⓒ 위키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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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가 사망을 했다고 군부중심의 독재체제가 일거에 해소되지는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다. 프랑코 체제가 하루아침에 민주체제로 변환된다고 생각하는 건 그저 판타지적인 상상일 뿐이다. 그래서 서구 국가들은 스페인의 민주주의 이행 과정을 근심어린 시각으로 바라봤다.


살얼음판 같았지만 '스페인의 봄'은 민주주의 체제로 착실히 이행되어 갔다. 정치개혁법 제정, 공산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의 합법화, 신헌법 제정 등, 39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프랑코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법안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어디나 구체제를 신봉하는 수구세력들이 있는 법! 역사의 수레바퀴가 언제나 순탄하게 돌아가지는 않는 법이다. 1981년 2월 23일, 민주화 이행에 불만을 가진 군부세력들이 국회의사당에 진입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프랑코 사후에 진행된 민주주의 개혁 덕택에 희미해졌던 피레네의 경계가 다시 'DMZ'처럼 선명하게 되돌려 질 판이었다.

 

 

 

쿠데타에 단호히 반대한 후안 카를로스 국왕


프랑코 체제에 향수를 갖고 있던 일부 군부 세력들은 공산당 합법화에 대해서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스페인 내전에서부터 40년간 반공을 국시로 삼고 스스로의 정당성을 부여했던 군부였다. 그래서 공산당까지 합법의 테두리로 끌어들이는 정당 개혁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행위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렇게 '스페인의 봄'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놓이게 됐다. 또다시 프랑코 시대와 같은 독재시대로 돌아갈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스페인의 민주화는 그렇게 쉽게 꺾이지 않았다. 아니다. 오히려 좀 싱거웠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왜? 6시간 만에 쿠데타 상황이 '종결'됐기 때문이다.

"조국의 단합과 영원함의 상징인 왕실은... 민주적인 정치 과정을 무력에 의해 파괴하려고 하는 어떠한 행동도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 후안 카를로스 후안 카를로스
ⓒ 위키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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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이자 군 최고사령관인 후안 카를로스는 단호하게 쿠데타를 반대했고, 그들 세력의 그릇된 야망을 좌절시켰다. 후안 카를로스는 프랑코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됐지만 아돌포 수아레스를 총리로 내세워 개혁을 이끌게 했고, 쿠데타라는 긴박한 상황에서 결단력을 발휘하여 스페인이 구체체로 복귀하는 것을 막아냈다.


한편 후안 카를로스는 우리하고도 인연이 있다. 왕세자시절 한국인 사범으로부터 태권도를 배웠기 때문이다. 

 

 

 

<게르니카>와 산티아고 순례길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 중에 공화정부의 요청으로 그려진 작품이다. 피카소는 프랑코가 집권하는 한 조국으로 <게르니카>를 보낼 수 없다며, 미국에 그것을 맡겼다. 자유의 상징인 <게르니카>를 파시스트 독재자 손에 건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조국 스페인에 자유와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돌려보낸다는 조건이었다.

40년 넘게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타향살이'를 했던 <게르니카>는 드디어 1982년,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림의 반환에 스페인 국민들은 크게 환호했다. 전세계 사람들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스페인이 오랜 독재체제에서 벗어나 민주주의 사회로 거듭났음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만약 1981년 2월에 있은 군부 쿠데타가 성공을 했다면 <게르니카>가 고향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 산티아고 순례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스페인이 프랑코 체제를 극복하지 못했다면 순례길도 북적거리지 못했을 것이다. 

<게르니카>가 환대를 받으며 귀향했듯, 산티아고 순례길에도 봄바람이 불어왔다. 1982년 교황 바오르 2세의 방문, 1987년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 출간,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등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은 더욱더 북적북적 해진 것이다. 또다른 중흥기를 맞이한 것이다.

 

 

* 게르니카

 

 

 

 


대원군, 십상시, 문고리... 사극 찍어도 되겠네!

 


후안 카를로스 국왕이 태권도로 우리와 인연이 있듯 프란시스 프랑코도 우리와 관련이 있다. 유신 헌법이 바로 그 '인연의 끈'이다. 1972년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제정하며 영구집권을 획책했을 때, 관련 학자들을 스페인과 대만으로 파견했다고 한다. 당시 두 나라는 총통이 최고 권력기관으로 군림했었고, 유신헌법은 총통제를 목표로 했기에 '적절한' 파견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알다가도 모르는 게 세상일인 것 같다. 약 40여년 전, 총통제를 가르쳐줬던 스페인은 입헌군주국으로서 착실히 민주주의를 실천해 갔고,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의 기소에 앞장을 서기도 했다. 하지만 총통제를 배워갔던 우리나라는 그 유신헌법을 기초한 사람이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자리에 임하고 있다. '기춘대원군'이라는 매우 봉건 왕조적인 별명을 가지고 말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십상시'와 '문고리 3인방'도 있다. 대원군, 십상시, 문고리... 이 정도 캐릭터면 사극 영화 하나 찍어도 될 듯하다. 누가 아는가? <광해>나 <왕의 남자> 빰칠 정도의 흥행몰이를 할지!

 


 
▲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필자임.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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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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