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도 이런 대형석불이? 외국 안 가도 되겠네 1편

고려 전기시대 대형석불 테마 탐방... 가을 여행지로 여기 어떠세요?

 

14.09.30 15:51    최종 업데이트 14.09.30 15:51

 

 

 

 

 

천고마비의 계절인 가을. 산이나 들, 어디로든 떠나기 좋은 계절이다. 이제 곧 단풍철도 다가오지 않는가!

기왕 떠나는 여행, 테마를 가지고 떠나면 어떨까? 발 가는대로 떠나는 좌충우돌식의 여행도 좋지만 주제를 잡고 여행을 떠나보는 것이다. 산성(山城)기행, 폐사지 답사기행, 천주교 성지순례 등등... 이런 것들이 테마 여행이다.

이렇게 테마를 중심에 놓고 여행을 하다 보면 학습과 여행이 유기적으로 작동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산성 기행인 경우 '행주산성 → 서울성곽 → 공산성' 등으로 여행 일정을 계획 할 수 있다. 각 산성들을 탐방, 관찰한 후 서로 공통점과 차이점을 등을 살펴보는 것이다.

필자가 제안하는 테마 여행은 거대석불 탐방이다. 고려 전기시대에 집중적으로 제작된 거대한 석불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한때 필자는 거대한 석불들을 찾아다니며 '복'을 기원한 적이 있었다. 그때 복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최소한 거대한 석불 앞에 섰을 때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바미안 석불에는 못 미치지만 그런 거대한 석불이 내 눈 앞에 떡하니 서 있으니 얼마나 든든하던지! 그래서 복스러운 함박웃음을 지었던 것이다.

한편 바미안 석불은 탈레반이 파괴해 지금은 흉물처럼 서 있지 않던가! 하지만 우리의 석불들은 천년의 세월을 꿋꿋이 견뎌내며 거리의 수호신처럼 서 있었다. 듬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돌미륵을 찾아 여행을 떠났었다.  

 

 

 


  


 
▲ 용미리마애이불입상 쌍미륵석불이라고도 불린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쌍둥 석불 형식이다. 왼쪽에 원립불을 쓰고 있는 상은 손에 연꽃을 들었는데 남성을 뜻한다. 오른쪽 방립불을 쓰고, 손을 합장한 상은 여성을 상징한다. 원립불은 말그대로 둥근 모자 형태이고, 방립모는 그에 비해 각이 진 모자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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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이 쌍으로 들어오려나? 파주 용미리 쌍둥이 석불

 

 

먼저 소개할 석불은 파주시 광탄면에 있는 용미리 쌍둥이 석불이다. 용미리, 용암사에 위치한 이 쌍둥이 석불의 공식명칭(문화재청)은 용미리마애이불입상이다. 이 석불은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어 대중교통으로도 편리하게 닿을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서울에서 용미리로 가기 위해서는 혜음령이라는 고개를 넘어야 한다. 혜음령은 조선시대 한양에서 개성으로 넘어갈 때 거쳐야 했던 중요한 고개다. 그래서 혜음령 근처에는 벽제관이라는 역관(驛館)이 있었다. 그렇다. 용미리 일대는 한양에서 개성을 거쳐 평양, 의주로 향했던 의주대로가 있던 곳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곳을 내왕했고, 쌍미륵에게 복을 기원했던 것이다.

장지산 기슭에 자리 잡은 용미리 쌍미륵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제작되었다. 자연석을 몸통으로 삼아 조각을 새기고, 얼굴 부위는 따로 제작해 올렸다. 쌍미륵도 고려 전기시대의 다른 석불들처럼 인체 비례가 일치하지 않는다.

용미리 석불입상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남여 쌍미륵 형상이라 '다산(多産)'과 관련된 기원들을 많이 하러 온다고 한다. 즉,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부부들이 많이 와서 기원을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쌍미륵과 관련된 설화도 '잉태'와 관련이 있다.

그 전설로 들어가 보자. 고려 선종 때였다. 선종은 자식이 없어 원산궁주를 후궁으로 맞이했다. 하지만 원산궁주도 쉽게 잉태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날 궁주가 이상한 꿈을 꾼다.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이다.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

 


이런 내용의 꿈이었다. 꿈 이야기를 전해들은 선종은 장지산으로 사람을 보냈다. 그런데 궁주의 꿈처럼,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왕은 그 바위에다 미륵불을 조각하고, 그 옆쪽에 사찰을 세워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그런 정성이 전해졌는지 그해에 왕자인 한산후가 탄생했다고 한다.

고려 선종은 13대왕으로 1083년부터 1094년까지 왕위에 올랐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용미리석불입상도 고려 전기 때 제작된 것임이 유력해진다.

쌍미륵 앞에서 복을 기원하면 복이 두 배로 들어올까? 확실한 건 모르겠지만 쌍미륵 앞에 서면 함박웃음이 두 배로 지어질 것이다. 그렇게 웃다보면 복은 자연스럽게 들어올지 모른다. 



 
▲ 은진미륵 고려전기시대 제작된 대형 석불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관촉사 석불.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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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대 석불 '관촉사 은진미륵'

 

 

이제 거대 석불을 찾아 충남 지역으로 가보자. 다음으로 탐방할 곳은 충남 논산에 있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다. 관촉사 석불은 관촉사 경내에 자리 잡고 있다. 관촉사는 반야산이라는 야트막한 산 중턱에 위치해 있는데 그곳에 올라서면 가까이는 계백장군 혼이 살아있는 황산벌이 보이고, 멀리는 계룡산과 대둔산이 보인다.


그렇게 전망이 좋은 곳에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굽어보고 있던 것이다. 한편 관촉사 석불은 은진미륵이라고도 불린다. 원래 그 지역의 명칭이 '은진'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보물 제218호인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은 높이가 18m가 넘는 우리나라 최대의 석불이다. 크기가 크기인지라 제작하는 데 무려 36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최대이고 긴 세월 동안 제작된 터라, 관촉사 석불에도 흥미로운 설화가 스며 있었다. 어느 날 반야산에 큰 바위가 불쑥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에 고려 조정은 그 바위로 불상을 만들 것을 결정하고 당대 최고 고승이던 혜명 스님에게 그 일을 맡겼다. 고려 광종 19년(968)에 시작된 석불 건립은 목종 9년(1006)에 가서야 완성됐다. 석불 제작은 다리, 몸통, 머리 세 부분으로 나뉘어서 제작이 됐는데 각 부분이 다 완성된 후 큰 문제가 발생했다. 각 부분들이 엄청나게 크고 무거운 터라 인력으로는 도저히 석불을 세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혜명 스님의 고민은 깊어 갔다. 그러던 차에 스님은 아이들이 진흙 불상 놀이를 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거기서 힌트를 얻어 석불을 세웠다고 한다. 아이들도 다리, 몸통, 머리를 따로따로 제작하여 불상을 만들었는데 나중에 그것을 독특한 방법으로 합체를 했던 것이다. 먼저 다리를 세우고 그 주위를 모래로 채우고는 물을 뿌려 주위를 단단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 뒤 비탈을 만들어 몸통을 굴려서 올렸다.

그렇게 모래비탈을 이용해서 진흙 석불을 장난감 로봇 만들 듯 3단으로 합체했다는 것이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모방했고, 결국 18m가 넘는 엄청난 규모의 석불이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이렇듯 은진 미륵불은 제작시기와 제작자가 명확한 석불이다.

관촉사 석불도 고려 전기시대 작품답게(?) 인체 비례가 맞지 않는다. 대신 신체 부위를 시원시원하게 표현하였다. 머리, 손, 발 등이 아주 굵직하게 표현되었다. 인체비율을 중시했던 석불들이 정교한 디테일을 강조했다면, 은진미륵은 선이 굵은 디테일로 표현됐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손가락, 발가락까지 시원시원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그런지, 관촉사 석불을 보고 있노라면 친근감이 밀려온다. 거대 석상에 압도된다기 보다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관촉사 일대도 예전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었다. 옛 삼남대로가 이곳을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은진미륵은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 서 있었다. 액운을 막아주고 마을의 안녕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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