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도시 톨레도의 골목길에서 서성이다!

스페인 톨레도 역사트레킹

 

 

이번에는 해외로 눈을 돌려보겠습니다. 해외 역사트레킹을 한 번 해보는 것이죠. 역사트레킹을 굳이 국내에서만 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제가 소개할 곳은 톨레도(Toledo)라는 곳입니다. 톨레도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고도(古都)입니다. 로마시대에는 자치 도시가 있었고, 서고트 왕국 시절에는 도읍지가 있던 곳이 바로 톨레도입니다. 8세기경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한 이슬람 무어인들도 톨레도를 전략적 거점으로 이용했습니다. 그들은 이 도시를 요새화시켰습니다.


이렇듯 2천년도 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톨레도이기에 역사트레킹을 하기에도 제격인 것이죠. 우리나라의 경주나 공주, 혹은 전주를 탐방한다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쉽게 될 겁니다.

 

 




* 톨레도 위치






 

마드리드에서 고속버스타고 톨레도로!

 

저는 이 톨레도를 2년 전 쯤에 방문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4편에 언급함)을 탐방한 후 마드리드 근교 여행을 행했을 때, 그때 방문한 것입니다.


톨레도는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70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논스톱 버스로 5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고 왕복(round trip) 버스비도 약 10유로 정도로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곳은 스페인에 오면 꼭 한 번은 들러야 할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페인 중부지역의 드넓은 평원이 차창 밖으로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광경들을 바라보다 잠깐 잠이 들었었는데 벌써 종착지였습니다. 역시 톨레도는 생각보다 가까웠습니다. 터미널에서 내려 구도심 쪽을 바라보는데 예사롭지 않은 풍광이 펼쳐지더군요. 옛 건축물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데 마치 중세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톨레도 여행은 언덕길을 올라가 비사그라 문을 통해 톨레도 구 시가지에 진입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 비사그라 문은 카를로스 1세가 1550년에 축조한 문으로 일명 성스러운 문이라고도 불립니다. 합스부르크가 출신인 카를로스 1세는 이 문의 정면에다 자신의 가문의 문장을 새겨놓았습니다.

 





* 세르반테스 상: 톨레도에 있는 세르반테스 상.




 

 

독일 출신 스페인 왕, 카를로스 1

 

합스부르크가 문장에도 보듯 카를로스 1세는 당시 스페인 국왕이기도 했지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기도 했습니다. 독일 지방을 통치하는 황제가 스페인 국왕을 겸임할 수 있었던 건 결혼을 통해 왕실끼리 연결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약간 결이 다른 이야기인데 정복왕윌리엄 1(1028~1087) 같은 경우도 프랑스 노르망디 공이면서 영국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영국의 왕이면서도 주로 프랑스 지역에 거주했지요. 영어도 못했다고 합니다.


카를로스 1세는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카를로스 5세로 불렸습니다. 그는 합스부르크 출신답게(?) 스페인보다는 독일 지역을 우선시 했는데 그로 인해 스페인 국내인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의 집권 초기에 발발한 코무네로스(Comuneros) 반란의 원인 중에는 외국 출신 왕에 대한 반감도 한 몫을 했을 정도였습니다.


집권 40년 동안 스페인에 있었던 시기가 고작 16년 밖에 되지 않았던,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였지만 그는 스페인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을 아들로 두었습니다. 그가 바로 스페인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펠리페 2세였습니다.

 

 




* 톨레도 성.





 

스페인 내전의 상흔을 간직한 곳, 톨레도 성

 

비사그라 문을 지나 톨레도 성(Alcázar of Toledo)으로 향했습니다. 톨레도가 역사적인 장소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이곳에서 수많은 분쟁이 일어났다는 뜻일 겁니다. 그런 분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 바로 톨레도 성이었습니다.


톨레도 성은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데 멀리서보면 빈틈이 없는 단단한 하나의 성채처럼 보입니다. 로마시대부터 궁성이 있었던 이곳은 수많은 세월을 거치는 동안 계속해서 증개축이 이루어졌습니다.


현재의 톨레도 성은 카를로스 1세와 펠리페 2세 때 밑그림이 그려진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 지금의 톨레도 성은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완전히 파괴된 것을 복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멀리서 본 성의 형상은 고풍스러웠지만 실제 외관의 벽돌 하나하나는 비교적 때가 덜 묻어 있었습니다

 

이렇듯 톨레도 성은 스페인 내전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그와 관련된 유명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소개를 해보겠습니다.


1936727. 당시 톨레도 성은 프랑코 휘하의 호세 모스카르도(José Moscardó) 대령이 사관생도들과 함께 방어를 하고 있었고 외곽에서는 인민전선이 진을 치고 성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인민전선은 모스카르도 대령의 16세 아들을 인질로 잡고 있었는데 톨레도 성을 포기하지 않으면 아들을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습니다. 그와 관련된 전화 통화 내용입니다.

 

나는 인민전선군 대장 바르델로 소령이오. 항복하지 않으면 당신 아들을 죽일 것이오.”

항복은 없소.”

최후통첩이란 말이오.”

중략...

아버지. 저 루이스에요.”

아들아, 스페인 국민으로, 기독교인으로 만세 두 번을 외쳐라. 한 번은 그리스도를 위해, 다른 한 번은 스페인을 위해...”

, 아버지. 신이여 만세! 스페인 만세!”

탕탕

 

어린 소년의 죽음 때문인지 성 안에 있던 프랑코 군은 70일간 지속됐던 인민전선의 포위를 이겨냈습니다. 이런 일화 때문인지 톨레도 성은 복원과 함께 성역화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70일간 계속된 인민전선의 혹독한 포위를 견뎌내고, 성을 지키는 최고 사령관의 어린 아들의 장렬한 죽음까지... 이 곳은 이후 스페인 내셔널리즘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 되어버립니다. 독재자 프랑코는 이를 놓치지 않고 톨레도 성을 선전장으로 활용했던 것이죠

 




* 톨레도 골목길: 톨레도의 거리는 저렇게 좁은 골목길 투성이었다. 그래도 자동차들은 쌩쌩 잘 달린다.





저는 이 일화를 들었을 때 좀 의아했습니다. 물음표부터 떠오르더군요. 그 엄혹한 순간에 만세를 외치라고 한 모스카르도 대령이나 그 말에 따라서 만세를 외친 아들 루이스나... 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인민전선 측의 대응도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인질로 잡혀 있는 최고 사령관의 아들을 그대로 총살했다는 건 자신이 쥐고 있는 최고의 꽃놀이패를 스스로 버려버렸다는 뜻이니까요. 아무리 당시 인민전선 측이 노련하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히든카드를 버릴 정도로 멍청했을까요

 

그래서인지 그 에피소드와 관련하여 몇 가지 다른 이야기들이 존재합니다. 먼저 대령의 아들이 전화 통화 중에 죽지 않고 한 달 후에 벌어진 인민전선에 대한 보복공습 때 총격을 당해 사망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하나는 어린 아들의 죽음을 통해 인민전선의 잔악성을 고발함으로써 프랑코 측의 만행을 덮어버렸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옵니다. 당시 ‘Guardia Civil’이란 공안조직이 다수의 인민전선 측 남성 인질들을 죽였는데 그 만행을 덮기 위해 어린 아들의 죽음을 더 부각시켰다는 것입니다.


루이스의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스페인 내전을 기억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것을 과거의 일로 돌리지 않고, 또한 서양 사람들의 일로 치부하지 않고 기억하는 일이 톨레도 성을 방문하는 우리들의 책무일 겁니다.

 


 


* 톨레도 성당.






 

스페인 내전과 마드리드 시민들

 

스페인 내전과 관련해서 한 가지 더! 우리는 스페인 내전과 관련하여 바르셀로나를 위시한 까탈루니아, 빌바오를 위시한 바스크 지방이 프랑코 측에 의해 혹독하게 탄압받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마드리드 지역은 프랑코 측에 우호적이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가 않습니다. 실제로 스페인 내전 당시 많은 수의 마드리드 시민들이 프랑코에 맞서다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또한 1970년대 중반, 프랑코 사망에 의한 혼란기 때 많은 마드리드 시민들이 앞장서서 민주화를 외쳤습니다.


스페인 내전을 마드리드 VS 바르셀로나프레임으로만 바라본다면, 프랑코 독재에 맞섰던 수많은 마드리드 시민들의 희생은 말 그대로 헛된 희생이 될 것입니다.

 






* 톨레도 성당.





 

 

정신없었던 톨레도 성당

 

다음 탐방지는 톨레도 성당입니다. 톨레도 성당으로 가는 길은 좁았습니다. 아주 좁은 골목길이었습니다.

 

? 8유로요?”

 

멈칫했습니다. 무슨 성당 입장료가 그렇게 비싸단 말입니까? 8유로면 우리나라 돈으로 만 원이 넘는 돈이었습니다. 그래도 발걸음을 돌릴 수 없어 표를 끊었습니다. 속으로 궁시렁궁시렁거리며...


톨레도 대성당은 페르난도 3세 재위시절인 1226년부터 짓기 시작했습니다. 후기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이 성당은 완공 때까지 무려 187년이나 소요됐습니다. 오랜 연륜을 가지고 있고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인 만큼 이 성당은 톨레도 여행의 필수코스로 자리매김 하고 있습니다.


핵심 코스라서 그런지 성당 안에는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8유로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톨레도 대성당은 훌륭했지만 인파에 떠밀리는 것이 싫어서 서둘러 다음 탐방지로 향했습니다.

 

 



* 알칸타라.





 

천혜의 요새 톨레도

 

마지막 탐방지는 톨레도 구시가지를 감싸고 있는 타호강과 알칸타라(Alcantara) 다리였습니다. 톨레도가 오래전부터 전략적 요충지가 된 건 타호강 때문이었습니다. 톨레도의 구도심은 말발굽처럼 생겼는데 그 주위 3면을 타호강이 휘돌아 나갑니다. 3면은 협곡 형태를 띠고 있는 터라 톨레도는 천혜의 방어요충지가 되는 셈입니다.


그런 타호강에 로마시대에 축조된 다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알칸타라 다리입니다. ‘알칸타라는 아랍어로 다리라는 뜻이죠. 알칸타라는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만큼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입니다.


톨레도가 수많은 분쟁을 겪은 도시인만큼 알칸타라도 부침이 많았습니다. 또한 협곡에 위치해 있는 터라 홍수가 나서 교각이 떠내려가기도 했습니다. 톨레도만큼이나 알칸타라의 역사도 파란만장했던 셈입니다.


톨레도를 탐방을 하니 중세시대로 되돌아 간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스페인 내전 같은 현대사도 떠올리기도 했지요. 덕분에 유익한 해외 역사트레킹을 행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톨레도에서 지인들과 함께 역사트레킹을 해보고 싶네요. 대신 그때는 인원파악을 하느라 애를 좀 먹을 것 같습니다. 작은 골목길을 헤집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까요.

 

 

 


* 산 마르틴 다리: 이 다리는 알칸타라가 아니다. 산 마르틴(San Martin) 다리다. 이 다리는 14세기 경에 만들어졌는데 이 곳에서 바라보는 석양이 일품이라고 한다. 산 마르틴에서 알칸타라까지는 약 3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샌책로로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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