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령 옛길을 가다!



차령 옛길을 다녀왔습니다. 쌍령 옛길도 다녀왔습니다. 차령은 천안시 광덕면과 공주시 정안면을 연결하는 고개입니다. 고려 왕건이 언급한 훈요 10조에 등장하는 그 차령입니다. 쌍령은 차령 바로 옆에 있는 고개입니다.

차령은 약 190미터 정도로 해발은 그리 높지 않지요. 하지만 호남대로 상에 있는 고개 중에서 가장 험한 곳 중에 하나입니다. 실제로 차령 옛길은 등산을 방불케 할 정도로 가파른 구간이 아직까지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런 가파른 구간이기에 있기에 역설적으로 옛길이 잘 보존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옛길 걷기가 유행이지요. 그런데 가끔 그 옆에 난 임도길을 옛길과 혼동하시는 분들이 있더군요. 임도길도 도로라 산을 깎고 만들 수밖에 없지요. 또한 차량의 등판력을 고려해 길의 경사도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간간이 도보여행자의 시야각에서 벗어날 정도로 구불구불하게 되는 것이죠. 횡각이 크니 코너를 돌아야 다음 구간이 보이는 것이죠.

하지만 옛길은 그런 고려를 할 필요가 없으니 구불구불함이 덜 한 것이죠. 실제로 옛길의 횡폭은 크지가 않습니다. 그 범위가 한 눈에 다 들어올 정도로 뻔하다는 것이죠. 임도길의 횡폭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확실히 알 수 있답니다.

옛길이든 임도길이든 우리 같은 도보여행자들에게는 참으로 고마운 존재들입니다. 왜? 걷기 좋기 때문이죠.










 

 

 

 

 

 

 

농촌체험, 아이들은 이미 놀 준비가 돼 있다

아산 외암마을에서 행한 평가단 활동

 

14.03.03 14:02    최종 업데이트 14.03.03 17:53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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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암마을 설화산과 어우러진 초가집. 사진 중간 하단에 있는 누렁바둑이는 외암마을의 감시견(?)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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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암마을 외암마을은 설화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시냇물을 마을 안쪽으로 끌어왔다. 그렇게 끌어들인 물은 연못이나 빨래터로 사용되었다. 마을 주민들의 지혜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사진은 물래방아를 재현해 놓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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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뒤에 서 있는 설화(雪華)산 때문일까? 예안 이씨의 집성촌인 충남 아산, 외암마을의 첫 느낌은 '잘 생겼다'였다. 설화산이 외암마을을 든든하게 감싸주고 있는 모습은 풍수지리에 '풍'자도 모르는 사람도 이곳이 명당 마을이라는 걸 직감하게 될 것이다.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다. 여행객들의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을 정도로 이곳은 산과 들판, 그리고 마을이 서로 '잘 생기게' 어우러진 곳이다. 어쩌면 역마살이 붙은 '노마드'들도 이 마을의 풍광을 보고 있노라면 고향생각에 젖어들어 수구초심(首丘初心)에 빠질지 모른다.    
 
기와집과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인 이 아늑한 마을을, 여행이 아닌 '비즈니스' 차원에서 방문했다고 하면 엇박자가 날 수도 있다. 이곳은 패스트푸드보다는 누룽지를 박박 긁어 먹고 싶은, 그런 느긋한 곳인데 업무 특성에 맞춰 날카로운 시선을 유지해야 한다면 무척 피곤한 일이 될 테니까.

 

 



농어촌 체험학습의 검열관(?)

지난 2월 20일, 필자는 농어촌공사가 주관하는 농촌체험학습평가단의 일원으로 외암마을 방문했다. 농촌체험학습의 주요 고객은 초등학생들이라 초등학교 교사들의 평가가 중시된다. 하지만 제3자적인 시각도 필요하기에 필자와 같은 여행프리랜서들이 그 자리를 메우게 된다. 한편 평가를 수행한 교사분들의 자제들도 외암마을에 동행했는데 필자는 이 녀석들이 하는 행동들을 주시하며 관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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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암마을 연자방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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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본업은 역사트레킹이지만 평소부터 농어촌 체험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터라 그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그렇게 업무라는 꼬리표(?)를 달고 외암 마을을 방문하니 후더분한 눈빛보다는 검열관과 같은 날카로운 눈매를 지녀야 했다. 한 박자 쉬어 가고 싶은 민속마을에서 검열관과 같은 냉철한 태도를 지녀야 했으니 무척 곤란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업무는 업무다. 밥벌이는 해야지. 그래서 농어촌 체험학습의 성과를 높일 수 있는 평가 요인들을 제시해본다.

 


1. 활동성
2. 결과물의 생성
3. 흥미성
4. 학습성

 


여기에 나열된 항목들은 체험학습의 참관 혹은 도우미로 참여했던 필자의 경험과 여타 다른 관계자들의 의견을 종합한 것이다. 각 항목별로 서열이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모든 체험학습이 위에 제시된 요인들을 다 포함하고 있지 않다. 예를 들어 김치 담그기 같은 체험은 귀가할 때 자신이 담근 김치를 포장해 가지만 투호나 널뛰기 같은 전통놀이 체험은 결과물이 생성되지 않는다. 그저 놀이 참여자체가 무형의 결과물인 것이다.

활동성은 참가자 개개인이 체험의 주체가 되는 것을 말한다. 앞 줄에 있는 몇 명만 행위에 참여를 하면 뒤에 선 아이들은 딴짓을 하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는 안 된다. 뒷줄에 있는 아이들도 참여를 하러 왔지 뒷짐 지고 있으려고 농촌에 온 건 아니니까.

결과물의 생성은 아이들에게 자신의 손으로 무언가를 이루었다는 성취감을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달걀꾸러미를 만드는 짚풀공예 체험에 참여한 아이들은 자신이 만든 결과물을 집으로 가져와 가족들에게 자랑을 할 것이다. 그럼 가족들은 칭찬을 할 것이고, 아이는 더욱더 성취감을 강화할 수 있다. 물론 달걀꾸러미를 엉망으로 만들면, 반대로 가족들에게 면박을 당할 수 있지만.

흥미성은 가장 중요한 요인일지 모른다. 고리타분한 체험활동을 교실 밖에서까지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신나는 일이라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해당 체험에 빠져 들어가기에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춰 흥미성을 돋우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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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암마을 외암마을 참판댁. 참판을 지낸 이정렬에게 조선 고종이 사액한 고택이다. 외암마을 참판댁은 중요민속자료 제195호로 등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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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평가를 내렸나?

그럼 필자는 외암마을에서 어떤 체험활동을 했고, 어떤 평가를 내렸나? 필자는 '냅킨을 이용한 핸드폰가방 만들기'와 '손두부 만들기'를 직접 체험했고, 그에 대한 평가를 했다. 냅킨에 그려진 캐릭터들을 잘라, 풀로 손가방에 붙이는 것이 핸드폰가방 만들기 체험이었다. 학창시절의 공작시간이 연상된 순간이었다. 손재주 없다고 무척 면박을 당했던 아픔도 떠올랐던 시간이었다.

손두부 만들기는 단골로 등장하는 체험활동 중에 하나다. 맷돌만 여러개 준비되어 있다면 손쉽게 아이들의 참여를 높일 수 있는 활동이다. 실제로 동행한 초등학생 아이들은 어처구니(맷돌 손잡이)를 돌리며 신나했다. 아이들에게는 어처구니를 돌리는 일 자체가 재미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또한 자신이 돌린 맷돌 사이로 흘러나온 흰 비지가 흘러나오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어떤 녀석은 맷돌을 돌리며 손으로 비지를 찍어 먹기도 했다.

그렇다면 필자는 어떤 평가를 내렸나? 솔직히 위에 언급된 체험학습들은 도시에서도 할 수 있다. 외암마을에서만 할 수 있는 체험은 아닌 것이다. 이야기를 확장해 보자. 다른 마을의 체험학습 리스트들을 보면 중복되는 활동들을 여러 개 발견할 수 있다. 깍두기 만들기, 한지공예, 김치 담그기 등 마치 우리나라 어느 관광지를 가도 똑같은 기념품들이 진열되어 있는 것과 같은 현상이 체험학습 시장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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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암마을 외암마을의 참판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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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요커 스타일'과 '내고향 6시'

그럼 필자는 검열관과 같은 날카로운 눈매로 낙제점을 주었는가? 아니다. 후한 점수를 주었다. 필자는 아이들이 대도시를 벗어나 흙과 전통문화에 접할 수 있는 것 자체를 중시한다. 점점 더 벌어지는 도시와 농어촌의 간극을, 미흡하지만 이런 체험활동을 통해서라도 채워야 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1만 1천 킬로가 떨어진 뉴욕의 일상은 '뉴요커 스타일'로 끊임없이 소비되지만, 불과 고속버스로 2~3시간 걸리는 우리 농어촌의 일상은 '내고향 6시' 정도로만 편성될 뿐이다. 도시인들에게는 오히려 우리의 농어촌보다 미국 대도시의 사람들과 더 많이 닮아 있을지 모른다.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시고, 타블릿PC로 자료를 검색하고, 보안카드를 찍고 사무실로 출근하고... 이번 체험에 동행했던 초등학생 아이들의 부모 세대, 즉 대도시에서 나고 자란 지금의 30~40대들도 리스트에 나열된 체험활동 리스트들이 익숙지 않을 것이다. 아파트 놀이터에서 유년기를 보냈던 그들이 짚신을 잘 만들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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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부만들기 아이들은 어처구니를 열심히 돌리며 두부를 만들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선행학습이 아니고 노는 것이다. 아이들은 놀 준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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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놀 준비가 되어있다!

체험활동에 참가한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이런 생각이 든다.

'아이들은 놀 준비가 되어있다!'

접착제를 붙인 듯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던 스마트폰을 뒤로 하고 열심히 체험활동에 빠져든 아이들의 모습에서 그런 말들이 읽혀졌다. 

필자가 부족하지만 농어촌체험학습을 옹호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해당마을의 재방문율이 바로 그것이다. 학교에서 체험활동을 한 아이들이 가정으로 돌아가 해당마을에 대해 입소문을 내면, 부모들은 아이 손을 붙잡고 그 마을을 방문하여 숙박을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가족들과 함께 1박을 하며 체험활동의 여운을 되새기게 될 것이다. 이런 식의 재방문율의 증가는 농촌 소득증대에도 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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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핸드폰가방 필자가 만든 핸드폰 가방. 나름대로 수작이라고 자평해본다. 독자들의 후덕한 평가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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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암마을은 여러번 방문해도 좋다. 앞서 언급했듯이 설화산이 잘 품어주고 있는 이 민속마을은 정겨움이 넘치는 곳이기 때문이다. 초가집에서 하룻밤을 보낸다면 아이들보다 아빠가 더 신날지 모른다. 느긋하게 초가집에서 1박을 한 후, 아이들과 함께 외암마을의 자랑인 돌담길을 따라 동네 한바퀴를 산책한다면 상쾌함이 더할 것이다.

필자도 외암마을을 재방문을 할 생각이다. 그때는 날카로운 검열관의 눈매가 아닌 '수구초심'의 감흥에 젖어 있는 눈으로 이 민속마을 곳곳을 탐방할 생각이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설화산에도 올라 풍수지리적인 시각으로 외암마을을 바라볼 생각이다. 그러려면 풍수지리 책도 몇 권 보고 가야겠지. 그럼 풍수지리 체험학습이 되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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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담길 돌담길은 외암마을의 또다른 자랑거리이다. 전통가옥과 어우러진 돌담은 산책의 동반자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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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

1. 외암마을은 아산시내에서 약 7km 정도 떨어져 있다.


2. 교통편: 서울 강남터미널에서 아산행 고속버스 이용(약 1시 30분 소요 / 배차간격 30분) ▶ 강당골행 시내버스 탑승(약 40분 소요 / 배차간격 40분)

 
3. 입장시간: 9시~17시 30분(동절기: 17시)


4. 문의전화: 041) 541-0848

 

 

 

 

 

 

 

 

이런 동학군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와 일본은 기어코 조선땅에 군대를 파병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대로 청나라는 조선 정부의 파병 요청을 받고 진압군을 보냈다. 이에 일본도 텐진 조약을 빌미 삼아 조선땅에 군대를 급파하게 된다. 청나라야 요청을 받았다지만 일본군의 파병은 뚱딴지같은 처사였다. 조선 정부의 공식 파병 요청도 없었을 뿐더러 전주화약 이후에 조선 땅에 들어 왔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남부지방이 아닌 한성으로 진격을 했다. 동학도들이 한성에다 집강소를 차린 것도 아닌데.

그랬다. 일본군들은 이미 그릇된 야욕을 품고 조선땅을 침략했던 것이다. 그래서 1894년 6월 하순에 경복궁을 공격했고, 곧이어 청나라와 청·일 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런 거듭된 일본의 침략 야욕에 동학군들은 크게 반발하며 본격적인 항일 투쟁에 나서게 된다. 그들은 전열을 가다듬고 충청도 공주로 진격을 하게 된다. 당시 공주는 충청 감영이 있던 곳으로 호서 지방의 중심지였다. 공주성을 함락시킨다면 호서 지방도 동학군들의 세력 범위 안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주성으로 나아가려는 동학군과 이를 진압하려는 관군, 일본군 사이에 큰 전투가 벌어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우금티 전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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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농민운동 겉면에는 주제가 나가고, 날개를 들어 안쪽을 보면 그 주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기재된 작품. 충남 천안여고 역사동아리 학생들이 제작한 것이다. 역시 여고생들이 제작해서 그런지 꼼꼼함이 돋보였다. 설명 부분에 기재된 내용도 상당히 심도가 있었다. 웬만한 성인들도 잘 모를 수 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충실히 잘 기재하였다. 우리 청소년들이 역사를 잘 모른다고 걱정들을 하시는데 이런 작품들을 보면 오히려 자기 자신을 책망할지 모른다. '읔, 고딩들보다 내가 더 모르네...'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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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죽창으로 무장했던 동학군들에게 개틀링 기관총과 야포를 난사했다. 일본군과 관군의 우수한 화력 앞에 동학군은 속수무책 당하고 말았다. 약 1만 5000명 정도 되는 동학농민군들이 우금티에서 비통한 최후를 맞았고 동학군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됐다.

당시 일본은 동학군의 진압에 심혈을 기울였다. 우금티 전투가 일어날 무렵, 일본군은 청·일 전쟁 중이었는데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와 요동반도를 공략하고 있었다. 그래서 동학군의 봉기를 후방을 교란하는 심각한 사태로 판단하고 무자비하게 진압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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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 공주대 교학사 역사교과서 파동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 중 하나는 공주대가 아닐까? 저자 중에 한 사람인 이명희 교수가 공주대 역사교육과에 재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군다나 이 교수는 총대를 매듯 이번 사태에서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으니, 그 비판의 화살이 이 교수를 넘어 공주대 전역으로까지 퍼져나가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을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공주대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은 무척 억울했을지도 모른다. 자기와는 관계 없는 인물 때문에 괜히 자신들까지 도매급으로 팔려나갔으니까. 하지만 걱정마시라! 필자가 만나본 공주대 역사교육과 재학생들은 패기가 넘쳤고, 무척 똘똘했다. 도매금으로 팔려나갈 인물들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학생들이 교수보다 더 낫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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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보다 학생들이 더 낫네

본격적인 우금티 추모제에 앞서 사전 행사인 역사 축제가 공주대학교 산학협력관에서 개최됐다. 공주대학교? 혹시 교학사 역사교과서의 주요 필진 중의 한 명인 이명희 교수가 재직하고 있다는 그곳?

그렇다. 교학사 교과서 문제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이명희 교수는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에 재직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번 역사 축제는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재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프로그램을 총괄하고 있었다. 단순히 장소 제공을 넘어 전체 진행을 주도적으로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금티 역사축제는 충남 관내에 있는 고등학생들이 직접 제작한 작품 전시와 소극장에서 펼쳐지는 발표회, 두 축으로 이루어졌다. 꼼꼼한 손길로 제작된 전시물들에는 동학뿐만 아니라 독도, 위안부 강제 동원 같은 다양한 문제들이 담겨져 있었다. 작품 의도가 무엇이냐는 필자의 물음에 학생들은 똑 부러지는 설명도 잊지 않았다. 해당 내용을 제대로 숙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당찬 모습에 '요즘 애들은 역사를 너무 모른다'고 몰아세우는 편에 섰던 한 사람으로서 좀 부끄럽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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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넋전 넋전을 직접 땅에 꽂고 있는 청소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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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교학사 역사교과서 파동으로 인해 공주대학교는 본의 아니게 큰 불똥을 맞게 됐다. 선봉장(?) 역할을 맡고 있는 이명희 교수가 목소리를 높이면 높일수록 애꿎은 공주대학교의 재학생·졸업생·교수들까지 도매금으로 묶여 질책을 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가 만나본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학생들은 무척 합리적이었고 쾌활한 젊은이들이였다. 해당 학과의 교수 한 명 때문에 다수의 청춘들이 싸잡혀서 욕을 먹는다? 이거 정말 불합리하지 않은가?

우금티 추모제는 오후 3시 우금티 고개에서 행해졌다. 참가자들이 죽은이의 넋이 담겨져 있는 넋전이라는 종이 인형을 제단 앞쪽에 꽂으면서 추모제는 시작됐다. 추모제는 해원무 공연, 사물 놀이 공연 등으로 이어졌는데 전체적으로 규모가 작게, 조촐하게 치러졌다. 공동집행위원장인 지수걸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는 이런 인사말을 했다.



"여기서 북쪽으로 3km 정도만 올라가면 금강이 나옵니다. 만약 동학군들이 우금티를 넘고, 금강을 건넜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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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추모제례 119년 전 우금티 고개에서 유명을 달리한 동학농민군들의 넋을 달래는 추모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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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변했을 것 같다. 적어도 일제강점이라는 치욕적인 역사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면 분단도 없었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이란 그저 허무한 일이라지만 그래도 이런 유쾌한 상상력은 삶에 활력을 가져다줄지 모른다.

 

 

 

 

 

 

 

 

 

 

 

 

'교학사' 이명희 교수, 공주대 제자들에게 배우시길

공주에서 '우금티 전투' 추모제례·역사축제 열려

13.11.06 13:47l최종 업데이트 13.11.06 15:42
곽동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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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 작은 외계인? 이것은 넋전이다. 넋전은 죽은이의 넋을 담은 종이 인형을 말한다. 이 넋전에는 우금티 전투에서 비통하게 눈을 감은 동학농민군들의 혼이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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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캐릭터 이제 동학농민전쟁 기념식도 정형적인 틀에서 벗어나 젊은층의 참여를 이끌 수 있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런 캐릭터 이벤트는 청년층에 대한 참여와 관심을 이끌 수 있다. 한편 위의 캐릭터에 새겨진 초코릿 복근이 무척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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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냐, 우금치냐

지난 10월 27일. 옛 백제의 도읍이었던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행사가 하나 개최됐다. 119년 전 공주 우금티에서 비통한 최후를 맞은 동학 농민군들에 대한 추모 제례와 역사 축제가 행해진 것이다.

일단 용어 정리가 필요하겠다. '우금치'는 알겠는데 '우금티'는 무엇이냐고 반문을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또 '치'나 '티'나 비스무리한데 굳이 왜 우금티를 내세우냐고 물으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고개를 뜻하는 순수한 우리말은 '티'나 '재'였다. 칡이 많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충북 충주의 '갈티고개', 노루들이 출몰한다는 경북 봉화의 '노루재'가 그 좋은 예일 것이다. 하지만 일제는 고개를 뜻하는 우리말에도 왜곡의 씨앗을 뿌려 놓았다. 일제는 지도를 제작하면서 고개마다 이름을 붙였는데 고개를 뜻하는 한자 '티'자가 없었기에 손쉬운 대로 '언덕 치(峙)'자를 가져다 붙였다고 한다. 그래서 '우금티'가 '우금치'로 개명된 것이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 때문인지 공주 지역에서는 우금치가 아닌 우금티로 더 많이 불리고 있었다.

옛 고지도를 살펴보면 '언덕 치(峙)'를 쓴 지명들이 적지 않게 나타난다. '곰치재'나 '웅치' 같은 곳들이 그런 곳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굳이 우금티라는 명칭을 소리 높여 부른다고 오히려 질책을 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금티가 어떤 곳인가?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동학농민군들이 학살에 가까운 몰살을 당한 곳이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이 결합되었기에 '우금치'가 아닌 '우금티'로의 제 이름 찾기는 분명 의미가 있는 발걸음으로 평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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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수걸 교수 지수걸 교수는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학과장이자 이번 <우금티 추모제례 및 역사축제>의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얼마전 같은 학과에 있는 이명희 교수의 <교학사 역사교과서>에 대한 비판을 꼼꼼하게 담은 성명서를 발표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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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4년 11월, 공주 우금티 고개


그럼 119년 전인 1894년에 도대체 우금티에서는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 아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모르시는 독자들을 위해 부연 설명을 해보겠다.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한 동학군은 그 기세를 몰아 정읍을 점령하고 전주로의 진격을 결행한다.

전주가 어떤 곳인가? 당시 전주는 전라도의 핵심 지역으로 관찰사의 소재지였다. 한마디로 전라도의 심장부가 동학군에 의해 점령되었던 것이다. 이에 당황한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구원 요청을 한다. 이에 외국 군대의 국내 입성에 대한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들이 모아져 동학군과 정부 사이에 전주화약(6월 11일)이 맺어졌다.     

전주화약 이후 동학군의 세력 범위에 있던 지역은 점차 안정화를 찾아갔는데 그 중심에서는 집강소 제도가 있었다. 동학농민군이 휩쓸고 간 지역은 치안과 행정이 마비됐는데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동학군의 대척점에 서 있던 사람들이 누구였는가, '가렴주구'를 행한 장본인들이 누구였는가를 생각해보면 쉽게 유추가 될 것이다. 동학군에 의해 탐관오리들이 처형됐으니 해당 고을의 치안과 행정은 마비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전봉준과 전라도 관찰사 김학진은 전라도 지역의 안정화를 도모하고자 민간자치 기구를 설치하기로 합의한다. 그렇게 하여 탄생된 것이 바로 집강소였다. 집강소는 자치 기구였으나 사실상 지방행정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실질적인 지역 통치기구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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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뚜껑으로 만든 우리나라 우리나라 외교에서 쟁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병뚜껑에 기재하여 제작한 병뚜껑 한반도. 충남 예산 여고 학생들이 급우들과 함께 만든 작품이다. 독도나 위안부를 적은 병뚜껑이 많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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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량사 극락적, 오층석탑, 석등: 귀중한 유물 세 개가 동시에 일렬로 서 있는 모습이 무척 이채롭다.

 

 

 

*부여의 단풍

 

 

 

 

---> 전편에 이어

 

 

# 대조사의 석조관음보살입상

 

 

장하리를 떠난 답사단은 임천면 대조사로 향했다.

대조사는 부여 천도를 위한 밑돌 역할을 해주는 중요한 사찰이었다. 백제 성왕이 천도를 앞두고 직접 대조사의 창건을 명했다고 하는데, 사찰터를 지목한 사람은 유명한 백제의 고승 겸익이라고 한다. 겸익은 성왕의 명을 받고 인도로 직접 가서 범어를 배우고 돌아온 최초의 백제 승려였다. 성왕이 직접 창건을 명하고, 겸익이 그 사찰의 터를 지목하였던 만큼 사비시대의 대조사는 의리의리 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하지만 현재의 대조사는 어마어마한 사찰이 아니다. 대조사가 있는 임천면 성흥산에 올랐을 때의 첫 느낌은 ‘뭐야 왜 이렇게 작아’였다. 우리동네 관악산에 있는 사찰보다도 더 작은 대조사였다. 물론 사찰을, 물리적인 공간의 크고 작음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성왕과 겸익이 창건에 힘을 썼다면서?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하는데 신호탄과 같은 역할을 했다면서...

 

 

 

# 고려 초기 석불: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하지만 그런 ‘외소 콤플렉스’를 일거에 날려버릴 석불이 있었다. 바로 석조미륵보살입상이다. 석조관음보살입상은 무려 10미터가 넘는 큰 키를 자랑하는 ‘거인’과도 같은 풍모였다. 얼핏 보면 우스꽝스러운 외모를 가지고 있는데 인체비례로 따지면 4등신에 가깝다고 한다. 또한 얼굴은 어찌나 큰지 ‘얼큰이’ 같았다. 머리에 쓴 네모난 관도 매우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정교성보다는 투박함이, 조화미보다는 개성이 넘치는 석상이었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고려 초기의 작품이다. 옆 동네 논산 관촉사에 있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도 고려 초기의 작품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그럼 왜 고려 사람들은 선이 굵으면서, 개성이 넘치는 이런 큰 석불을 제작했을까? 이전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의 사람들보다 정교성이나 세공 기술이 떨어져서 이런 식으로 석불을 제작을 했단 말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고려시대 사람들의 기술력이 떨어져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대조사 석조관음보살입상은 당시 그 지역, 중부지방 일원의 민간신앙이 접목된 석불이었다. 마치 큰 장승을 세운 것처럼 석불을 조각했던 것이다. 마을의 수호와 안녕부터 개인적 기복까지 다 받아주는 수호신과 같은 ‘키다리 아저씨’를 제작했던 것이다. 삼국시대 귀족불교에서 출발한 불교문화가 통일신라를 거친 후 고려 초기 시대에 각 지역의 민간신앙과 어떤 식으로 접목이 되었는지 탐구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한편, 재미있는 것은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약 18미터)보다 키가 작을지 모르지만 보물로 재정된 순번은 더 빠르다는 것이다. 대조사 석불이 보물 제217호이고, 관촉사 석불이 보물 제218호다.

 

대조사는 경내가 작지만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있어 큰 사찰이 됐다. 10미터가 넘는, 그것도 천년의 세월을 이겨내며 꿋꿋이 성흥산 일대를 굽어보는 석불이 있는 사찰이 작다고 표현을 하면, 그거 큰 실례일 것이다. ‘대조사는 아담하기에 차분하게 경내를 둘러 볼 수 있어 좋았다. 큰 대조사 석불이 있어 작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바꿔서 표현할 수 있겠다.

 

 

 

 

* 대조사 석조관음보살입상: 멀리 아래쪽에서 찍어봤다.

 

 

 

* 대조사의 건물들과 석조관음보살입상: 대조사는 경내가 작은 사찰이었다. 하지만 석조관음보살입상이 있어 결코 작은 사찰이 아니었다.

 

 

 

 

 

 

이제 일행은 무량사로 향했다. 무량사는 외산면 만수산에 위치해 있다. 무량(無量)사의 뜻은 셀 수 없다는 뜻이다. 세월도, 돈도, 삶조차도 셀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곳 무량사에 들어서면 셀 수 없단다. 무량사를 탐방했을 때가 11월 3일이라 세상은 이미 늦가을에 접어들었다. 그래서 저 강원도 지역은 이미 단풍철이 지났다고 했다. 하지만 무량사는 늦가을의 정취가 남아 있었다. 올 가을은 단풍놀이다운 단풍놀이를 못하고 넘어가나 했더니 무량사에서 단풍을 제대로 구경했던 것이다. 문화재 관람과 단풍놀이를 동시에 즐겼던 셈이다. 이래서 사람들이 우리문화답사 여행을 떠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문화 유적을 탐방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대자연의 정취에 녹아들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 선조들이 만든 유물과 유적은 자연의 조화를 중시해 제작을 했다는 뜻이다.

 

 

 

# 방랑시인 김시습의 흔적이 곳곳에 베어든 천년 고찰 무량사

 

무량사는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이 말년을 보낸 곳으로 유명하다. 세조에 의해 단종이 폐위된 사건을 보고 천재 시인 김시습은 세상을 등지고 정처 없이 유랑길에 나선다. 그렇게 유랑생활을 계속하다 말년에는 이곳 무량사에 머무르게 되고, 결국에는 병환으로 서거하게 된다. 그때가 그의 나이 59세였다.

 

이렇듯 무량사는 김시습과 관련된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그 유명한 무량사 극락전의 편액을 김시습이 직접 썼다고 한다. 당시 극락전은 수리를 하고 있었는데, 마땅히 시주할 것이 없었던 김시습은 글씨로서 시주를 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편액 글씨로서 재능 나눔을 했던 셈이다.

 

김시습의 유려한 서체가 빛나는 극락전은 외형도 참 웅장하다. 외부에서 보면 2층 기와집인데 안으로 들어가면 1층이다. 위아래를 터버려서 하나의 층으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극락전 내부에 모셔진 소조아미타여래삼존상도 키가 크다. 본존인 아미타불상이 무려 5.4미터라고 하는데 동양 최대 규모라고 한다. 극락전 외부가 크고 웅장한 만큼 내부의 삼존불상도 크고 화려했던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무량사는 2층 전각 구조를 가졌다. 극락전은 조선 중기 시대에 재건축되었는데 다층 구조를 가진 건축물은 충북 보은의 법주사 팔상전이 유명하다. 억불 정책에 의해 불교를 탄압했던 조선에서 크고 웅장한 다층 구조의 사찰 건축물이 들어섰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고 한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승병장들의 활약으로 인해 천대받던 불교가 다시 주목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곡창지대에 있는 사찰들을 중심으로 큰 건축물들이 들어서게 됐다고 한다. 전북 김제 금산사 미륵전, 전남 구례 화엄사 각황전, 충북 보은 팔상전 등이 대표적이다.

 

 

 

# 무량사의 자랑: 무량사 오층 석탑

 

무량사에서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무량사 오층석탑이다. 오층석탑은 차곡차곡 쌓아 올려진 모습이 인상적이다. 한층 한층 올라가지만 안정감을 잃지 않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7미터 이상으로 쌓여 올린 탑은 고려 전기의 작품이라고 한다. 같은 시기에 제작된, 앞서 본 장하리 삼층석탑과는 좀 다른 인상이 느껴진다. 이런 장중하면서 안정감을 강조한 오층석탑이 무량사 극락전 앞에 서있다.

 

또 오층석탑 앞에서는 석등이 하나 서있다. 일명 무량사 석등이다. 이 역시 고려 초기의 작품이라고 한다. 석등을 맨 앞으로 하여, 오층석탑과 극락전이 연이어 서있는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다. 귀중한 우리의 문화유산들이 조밀한 공간에 세 개나 있다는 건, 보는 이에게 새 배 이상의 기쁨을 선사할 것이다.

 

답사는 외산면 반교마을과 홍산면 홍산관아 탐방으로 이어졌다. 반교마을은 돌담길이 잘 정비된 곳인데 현재 유홍준이 ‘휴휴당’이라는 집을 짓고 실제로 살고 있는 곳이다. 유홍준은 자신이 반교마을 청년회 회원이라고 힘주어 말해 답사객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홍산관아는 옛 관아의 원형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 곳이다. 관아는 고을의 수령이 직무를 보던 곳으로 지금의 군청이나 읍사무소의 역할을 했다. 대신 조선시대 수령들은 사법권도 행사하고 있었기에 관아에는 자체적으로 감옥도 갖추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에 330여 곳에 관아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친 후 관아들은 다 파괴되거나 원형을 잃게 된다. 그나마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한 관아가 바로 홍산현 관아라는 것이다.

 

홍산관아 탐방을 끝으로 하루 동안의 짧은 부여 답사여행이 끝이 났다. 좀 더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다음 기회를 기약해야 했다. 하긴 한 번 오고 다시 부여에 안 올 텐가?

 

이렇게 좋은 답사여행을 준비해주신 유홍준 선생님과 눌화출판사에 감사를 드린다. 유홍준 선생님은 우리나라 문화 답사의 붐을 일으킨 주범(?)으로서 앞으로도 더 많이 답사여행 가이드에 나서주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책에 기술된 유적 앞에서 독자들을 위해 마이크를 든 저자 유홍준의 모습은 참 행복해보였으니까!

 

 

 

 

 

* 무량사 극락적, 오층석탑, 석등: 차례로 위치해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무량사 극락전: 조선 중기에 다시 지어졌다고 한다. 외부에서는 2층으로 보이나 사실은 천장이 높은 1층이다. 층간을 터버려서 내부는 1층으로 만든 것이다.

 

 

 

*무량사 오층석탑: 한 층, 한 층 올려진 모습이 안정감 드러낸다. 고려 초기 작품으로 백제와 통일신라 기법이 어우러진 석탑이라고 한다.

 왼쪽 하단에 있는 꼬맹이 녀석은 오층석탑이 좋은지 탑돌이를 하는 것 같다.

 

 

 

 

 

*홍산 관아 객사: 조선시대에는 전국 팔도에 330여 고을이 있었고, 그 고을마다 관아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관아들은

거의 다 사라져 갔다. 홍산현 관아는 비교적 원형복원이 잘 된 곳이라고 한다.

 

 

 

 

 

* 홍산현 관아 객사: 조선시대 객사에는 임금과 궁궐을 상징하는 궐패가 안치되었다고 한다. 수령은 임금을 대신하여 고을을 다스리기에 그에 걸맞은 징표를 객사에 두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객사는 수령이 근무하는 동헌보다 더 격이 높은 곳이라고 한다. 한편 동헌은 객사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헌이라고 불린다.

 

 

 

 

 

 

 

 

 

 

 

 

 

 

 

 

 

 

 

 

 

 

 

 

 

 

 

 

*서산 삼존마애석불 

 

 

 

 

 

불경한 짓일까요? 감히 마애석불 앞에서 크게 웃었다면요.

경건하지 못했다는 질책을 들을 수도 있겠네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마애석불 앞에서 깔깔거리며 웃다니! 

잘못하면 불교에 대해 적대시 하는 개념 없는 놈으로 몰릴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불자는 아니지만 항상 여행을 다니면서 사찰을 방문하고  해당 사찰의 대웅전에 들러

부처님께 무사하게 여행을 마칠 수 있도록 기원을 드린답니다. 그래서 사찰에 들어서면

옷깃이라도 여미며 경건함을 유지하려고 애쓰지요. 그것이 매너니까요.


 

 

하지만 전 가야산에 있는 서산 마애석불을 보자마자 크게 웃었습니다.

왜? 석불에 그려진 미소가 정말 좋았기 때문입니다. 세상 근심을 다 잊게 해주는

정말 아름다운 미소였기 때문입니다.


 

 

서산마애석불이 웅진(공주) 백제시대에 새겨졌다고 하니 신라에서 이차돈이 순교했을 때보다도 먼저 만들어졌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마애석불은 1500년도 더 넘는 시간동안 가야산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온화한 미소를 드러냈던 것입니다.

 

 

저는 다짐했습니다.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을 때마다 서산 마애석불을 생각하자고. 그 후덕한 미소를 생각하며 스마일하자고! 

 

 

 

 *서산 마애삼존석불

 

 

 

 

 

* 충남 서천 부근에서 찍은 원두막: 저 곳에서 시원하게 수박을 먹고 싶네요.

마애석불의 미소는 제게 편안한 안식처와도 같은 느낌을 주어 관련 사진으로 같이 실어봤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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