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편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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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목사님 필자 같은 가난한 여행객에게 따뜻함을 선사해 주신 분이다. 사진에 나온 녀석들은 전 목사님을 큰 아버지라고 부른다. 보라색 옷을 입은 꼬마 숙녀는 내게 '모르는 아저씨한테 함부러 이름 알려주는 거 아니에요'라며 도도함을 드러냈었다. 하지만 사진을 찍자고 하니 저렇게 활달한 포즈를 취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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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님은 센스쟁이

여러번 공을 치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곳은 춘천시 동산면 조양리라는 곳이었다. 이곳 마을회관 앞쪽에 공간이 있어 그곳에다 텐트를 치려는데 걸림돌이 하나 있었다. 그 공간 바로 앞이 이면 도로였던 것이다. 텐트가 도로 바로 옆에 설치되는 형상이었다. 그런 난감한 상황이 전 목사님의 배려로 한 방에 해결됐다. 목사님은 센스쟁이!

그렇게 하여 여행 첫째 날은 무사히 넘길 수가 있었다. 야음을 틈타(?) 전 목사님의 교회 앞마당에서 시원하게 샤워를 했다. 대충 콘플레이크로 저녁을 떼운 후, 시계를 보니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었다. 그곳에서 이장님 같은 목사님을 뵙지 못했다면 영락없이 날 밤을 지새웠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음날.

전 목사님이 티타임이나 갖자며 교회로 초대를 해주셨다. 전날 들이닥쳤던 도보 순례단은 이미 떠나고 없던 터였다.

"작년 겨울인가, 그때도 학생들이 우리 교회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간 적이 있어요."
"그때도 도보여행자들이었어요?"
"그랬어요. 대학생 두 명이서 도보 여행을 하는데 우리 교회로 왔더라고요. 겨울이라 해는 빨리 졌고, 갈 곳은 없고 했는데 마침 교회가 있어서 그냥 무작정 들어왔대요."
"그 친구들도 무척 준비가 안 된 상태였나 보네요."
"그랬던 것 같아요."
"아무리 그래도 아무나 막 다 받아주실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어쩌겠어요. 날씨는 춥고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또 1층은 공간이 넓어서 여러 명이 와도 다 잘 수 있어요."

아침에 기상해서 주위를 살펴봤는데 그곳 근처는 논과 밭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지도를 보니 동산면은 춘천시에 속했지만 지리적으로는 홍천군에 더 가까웠다. '되도록이면 춘천 도심지에서 멀리 벗어나보자'라는 첫날 계획이 맞아 떨어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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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통 춘천시도 시가지만 벗어나면 전원의 풍경이 펼쳐진다. 홍천군과의 경계 지역에서 찍은 벌통들이다. 원거리에서 찍어 화질이 선명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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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사이 '전두환 코드'

"목사님. 그런데 걸려 있는 사진들을 보니까 젊은 시절에 유학을 다녀오셨나 봐요."
"맞아요. 젊었을 때 독일에 좀 있었어요."

1980년대 목사님 내외분은 슈투트가르트에서 오랫동안 유학을 하셨다. 목사님은 신학, 부인은 성악을 공부하셨다고 한다.

"그때는 참 답답하고 징글징글 했지."
"뭐가요?"

그때 사모님께서 필자에게 빵을 건네주시며 말씀하셨다.

"전두환 때요. 요즘 젊은이들은 그걸 아나 모르겠네."
"이분은 알 거 같은데. 87년에 선거가 그렇게 끝나고 나니까 독일 친구들도 이상하게 이야기를 했었지."
"하여간 그 꼴 보기 싫어서... 아니 내가 손님 앞에 두고 쓸데없는 말을 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
"사모님 괜찮습니다. 저는 여행중에 만난 분들이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해요. 또 그런 걸 여행기로 쓰기도 하고요."

젊은 시절 '외국물'을 드셔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목사님 내외분은 환갑 언저리에 연배가 놓여있었음에도 필자에게 고리타분한 '설교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런 편안한 분위기가 좋아서 그랬는지 아니면 커피가 맛있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필자는 연거푸 커피 리필을 요청했다. 주는 거 없이 받기만 하는 게 '거시기'해서 필자는 썰렁한 농담을 하나 띄었다.

"이 빵이랑 커피 그 분한테 갖다 줄까 봐요. 29만 원 밖에 없다니까 얼마나 배고프겠어요."

필자는 전 목사께서 어떤 방식으로 교회 사역을 하는지 잘 모르고 묻지도 않았다. 더불어 그 분의 정치적, 사회적 견해가 어느쪽에 맞춰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 역시 알 필요가 없는 사안이다. 하지만 목사님 내외분과 나는 전두환에 대한 '코드'가 정확히 일치하였기에 서로 느긋하게 환담을 나눌 수 있었다. 당시 뉴스에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 비자금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이런 맛에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닌가? 생판 모르는 분들과 차를 마시며, 또는 술잔을 기울이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다는 것. 그게 여행의 또다른 매력이 아니겠는가.

 

 

 

 

 

 

 

 

 

자전거 여행서 만난 목사님, '전두환 코드'로 통했네

[중부내륙자전거여행②] 춘천에서 만난 센스쟁이 목사님

13.11.25 10:17l최종 업데이트 13.11.25 10:57l
         
여행은 8월 15일부터 시작하여 9월 15일에 다녀왔습니다. 이동 경로는 강원도 춘천→홍천→횡성→영월→충북 단양→제천→경북 문경→경남 거창으로, 자전거를 이용해 다녀왔습니다. 여행수첩과 사진기록을 토대 삼아 약 5편에 걸쳐 여행기를 작성할 예정입니다. - 기자 말

여행 1일째 : 2013년 8월 15일

용산역에서 ITX 열차를 탄 후, 한 1시간 가량을 달려 남춘천역에서 하차했다. 북한강 자전거 도로를 따라 춘천까지 올 수도 있었지만 그냥 편하게 ITX로 이동을 했다. 일명 '청춘열차'라고도 불리는 ITX는 영업 속도가 시속 180km에 이른다. KTX 다음으로 쾌속 질주를 한다.

 



# ITX와 동서고속철도

경춘선의 복선화와 그에 따른 전철화로 '춘천 가는 기차'식의 낭만이 많이 사그라진 게 사실이다. 복선화 이후 터널이 많아져 창문 밖 경치 구경도 '끊김 현상'이 자주 발생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복선화가 경춘선의 신비감을 떨어뜨렸다고 푸념을 늘어놓기도 한다. 나도 일정 정도 그 푸념에 동의를 한다. 분명 단선일 때, 경춘선은 터널도 적었고, 역사(驛舍)도 아담했다. 옛 김유정역 같은 경우는 아담하다 못해 앙증맞을 정도였다.  

그런 시각을 불편해 하는 사람도 있다. 낭만을 따지기에는 강원도 지역의 SOC(사회간접자본) 시설이 너무 열악하다는 것이다. 단선철도 시절, 서울 청량리역에서 무궁화호를 타면 거리가 80km 정도인 춘천까지 약 2시간 정도가 소요됐다. 서울에서 천안까지 거리가 약 90km 정도이고 무궁화호로 약 1시간 정도 소요되니 춘천까지 얼마나 거북이 걸음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강원도 도청 소재지인 춘천이 이런 상황인데 다른 곳은 어땠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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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X ITX에는 자전거 거치대가 있는 칸이 있다. 그나저나 왼쪽에 있는 자전거와 필자의 자전거가 너무 비교된다. 필자의 자전거는 뒤태가 너무 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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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역사에 들어선 장애인, 노약자 편의 시설들은 기존의 옛 역사들이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다. 지금도 철도 건널목을 건너듯 맞은편 플랫폼으로 이동을 해야 기차를 탈 수 있는 역이 있다. 신체가 건강한 사람이야 철로를 건너 맞은편으로 느긋하게 이동할 수 있지만 휠체어나 유모차를 끌고 횡단한다고 생각해보라.

이런 맥락에서 나는 춘천에서 속초까지 이어지는 동서고속철도를 찬성한다. 동서고속철도는 강원도민들의 오랜 숙원 사업으로, 선거철만 되면 단골메뉴로 등장했다. 거의 30년 동안이나. 이렇게 오랫동안 동서고속철도가 활로를 찾지 못했던 건, 이 사업이 경제 타당성이 낮다고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악산이 수도권의 '외곽산'이라고 불릴 정도로 강원도 지역은 정서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수도권과의 거리가 많이 좁혀진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간의 동서고속화철도에 대한 박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낡은 경제 방식이지만,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현상을 경춘선 복선화와 중앙선(용산-용문) 전철화로 확인을 이미 한 바 있다.

북한-중국-러시아를 잇는 환동해권 물류 '파이프라인'으로도 동서고속화철도가 이용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중국이나 러시아에서 선적된 물류들이 속초항을 거쳐 수도권으로 직접 올 수 있게 될 것이다. 남북 교류뿐 아니라 극동아시아 물류 운송 등에서도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는 '카드'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동서고속화철도를 찬성하지만 그건 조건부다. 백두대간에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그런 조건 말이다. 허울뿐이지만 그래도 필자가 명색이 역사트레킹 마스터인데 백두대간이 다치는 것은 눈뜨고 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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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랭이논 다랭이논은 경작지가 협소한 산촌이나 섬지역에서 많이 나타난다. 그래서 남해군, 청산도, 지리산에 있는 다랭이논들은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다. 이 다랭이 논은 좀 규모가 작지만 경작구간과 비경작구간이 확연히 구분되어 있어 필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춘천에서 홍천으로 넘어갈 때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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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장님 같은 목사님


남춘천역에 하차했을 때가 오후 6시께였으니 많이 달려봐야 2시간 정도를 주행할 수 있을 터. 애초 첫날 계획은 춘천 시내에서 되도록이면 멀리 벗어나 홍천 부근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춘천의 도심부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시보다는 군이나 읍 단위가 야영하기에 더 느긋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내 자전거가 '거북이'였다는 것이다. 180km가 아니라 그저 시속 18km 정도만 됐어도 좋았을 텐데... 현실은 8km였다. 그나마도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보다 끌고 가는게 더 많았다. 그리고 춘천-홍천 간에는 왜 그리 고개들이 많던지!

결국 야간주행을 하게 됐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하려고 보니 고심이 앞섰다. 통상 3일 정도는 페달을 굴려줘야 다리가 풀리는데 아직 다리가 덜 풀린 상태에서 행하는 야간주행이었기 때문이다. 갓길이 거의 없는 도로 사정도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공친 거 같다. 빨리 마을회관 같은데 가서 텐트나 쳐야겠어!'

당시 나는 제대로 공을 쳤다. 농로길로 들어섰다 공동묘지로 빠져나왔고 논두렁에 자전거가 엎어지기도 했다. 오랜만에 하는 야간주행이라 적응이 안됐던 것이다. 누군가의 손길이 그리웠다. 그저 하룻밤 캠핑을 할 수 있는 장소를 적시해 줄 그런 고마운 손길.

"실례하지만 이 동네 이장님이세요?"
"아니에요. 저는 저쪽에 있는 교회 목사예요."
"예... 아... 그러세요."

영락없는 동네 이장님 같은 분이셨는데 교회 목사님이란다.

"오늘은 손님들이 많네."
"손님이요?"
"좀 전에도 대안학교 학생들이 도보 순례를 한다고 왔어요. 숙소가 없다고 해서 우리교회 1층에 자리를 마련해 줬어요."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신 분은 춘천시 동산면에서 교회 사역을 담당하고 계신, 전 목사님이셨다.

"텐트 칠 자리가 필요하다고요? 우리 교회에 앞마당이 있는데..."
"그건 제가 좀 불편하고요. 저기 마을회관 앞에다 텐트를 좀 칠게요."
"여기는 바로 앞에 차들이 다녀서 좀 정신없을 텐데요."
"그게 좀 걸리긴 하네요."
"그럼 제가 차를 앞쪽에다 댈게요. 그럼 차가 방패막이 역할을 할테니까."
"그럼 저야 감사하죠. 앞이 뻥 뚫린 것보다 훨씬 낫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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