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금티에서 갑오년, 그날을 떠올리다!

 

공주역사트레킹 2편

 

14.10.31 09:39  최종 업데이트 14.10.31 09:39

 

 

 

 

 

 

 

 

 
▲ 우금티 우금티에 쓰러져 있는 조형물들. 피눈물을 흘리며 쓰러져 간 동학농민군들의 모습과 겹쳐져, 좀 서글퍼 보인다. 올해 여름에 촬영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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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직이든 수평이든, 장염 걸린 사람에게는 힘들다

 


공산성 탐방을 마친 트레킹 팀은 중동성당을 지나 본격적인 도보여행에 나섰다. 옛 공주 읍내는 분지형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시가지를 두고 둥글게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 그런 지형을 기반으로 도보 여행길을 개척했기에 해변가나 강변을 걷는 길보다는 좀 험하다. 본격적인 등산보다는 덜해도 급경사가 있는 구간이 몇몇 있다는 것이다.

등산이 수직적인 개념이라면, 트레킹은 수평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트레킹도 지형을 타고 가야하기에 일정 부분에서는 수직적으로 올라가야 할 때가 있다. 반대로 등산도 봄소풍 가듯 평평한 길을 걸을 때도 많다.

개념 정의에서는 수직과 수평으로 나누어지지만 지형이라는 구체적인 물리적 공간에서는 중첩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필자가 베이스 캠프로 삼고 있는 관악산 둘레길의 경우,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등산로였다. 그런데 걷기 열풍을 타고 '둘레길'로 변신을 하게 됐다.

하지만 이런 지형적, 개념적 정의들도 컨디션이 좋을 때나 귀에 들어올 것이다. 장염 때문에 배앓이를 하는 사람에게 수직이든 수평이든 힘든 것은 매한가지 일 테니까. 그랬다. 본격적인 트레킹에 나서게 되니 공주토박이 분보다는 장염에 걸린 분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장염 특성상 아무것도 먹을 수 없지 않은가? 공복인 상태로 장시간 걸으면 자칫 탈진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 분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자신은 완주를 할 수 있다고 강하게 의사표시를 했기 때문이다. 또 나름대로 아웃도어 활동을 꾸준히 해왔다고 해서 그분의 뜻을 존중하기로 했다.

 

 





 

 
▲ 금학생태공원 금학생태공원에서 우금티로 향해가는 역사트레킹 팀. 가는 도중에 밤송이 '지뢰밭'을 지나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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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송이 '지뢰밭'을 지나 우금티로...

 


가는 중간 중간에 우금티와 관련된 설명을 했다. 1894년 갑오년에 있었던 국내 정세, 청나라의 파병을 빌미로 국내로 출병한 일본군, 청나라와의 전쟁 중이라 후방지역의 '준동'을 심각하게 판단했던 당시 일본 정부, 일본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청나라 폐잔병들 일부가 동학농민군에 합류했다는 사실 등등...

우금티로 향해가는 의미를 확실히 전달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참가자들 중에는 이미 동학농민전쟁과 우금티에 대해서 알고 있는 분들도 있었고, 처음 듣는 듯 생소한 눈빛을 보내는 분들도 있었다.

이미 그 관련 내용을 알고 있든, 아니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우리가 공산성을 출발하여 우금티로 가는 것이었고, 그곳에서 120년 전의 사건을 떠올려 보는 것이었다. 이렇게 의미심장한 다짐을 하고 나섰다.

하지만 의외의 복병(?)을 만났다. 밤송이가 바로 그것이다. 우금티 부근도 밤나무가 지천으로 깔려 있어 그런지 가는 곳마다 밤송이들이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밤송이가 너무 많아 이동이 쉽지 않을 정도였다. 얼마나 독한지(?) 신발 사이로 가시가 쑥쑥 들어올 정도였다. 선두에 선 필자는 이렇게 외쳤다.

"조심하세요. 지뢰밭이에요. 밤송이 지뢰밭!"

유독 장염에 걸린 참가자 분이 가장 많이 밤송이에 찔렸다. 트레킹화가 아닌 가벼운 신발을 신고 와서 그랬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던 건, 밤송이 지뢰밭 통과 이후부터 그 분이 복통을 호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발에 가시가 찔리면서 복통이 완화된 것인가?

이런 우여곡절 끝에 역사트레킹 팀은 우금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장염으로 고생한 분도 무사히 완주를 해주셨다. 공주토박이 분은 '공주 사람도 모르는 길을 개척하고 안내해 주셔서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모두 다 완주를 해주고, 저런 칭찬을 들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 우금티 우금티. 올해 여름에 촬영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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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티에서 갑오년, 그날을 떠올리다!

 


우금티에 도착해서는 주위 지형을 가리키며 설명을 했다. 일본군의 기관총이 어디에 배치됐는지 또한 농민군들이 어느 방면에서 올라왔는지, 하는 것들을 알려주었다. 농민군들은 실제로 정상부가 아닌 고개 아래에서 희생을 많이 당했는데 높은 지대를 선점하고 있던 연합부대가 기관총과 화포를 난사해서 그렇게 됐다고 말해주었다. 현장성을 살려 책에서는 풀어낼 수 없는 것들을 설명하려고 나름대로 애썼다. 물론 그런 설명들이 제대로 전달됐는지는 잘 모를 일이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었다. 참가자들이 이번 트레킹을 단순히 소비(?) 하지 않고 그 이상의 대화를 나누었다는 점이다. 우금티 고개에 있는 조형물들, 처음에는 곧추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쓰러져 있는 조형물들이 동학농민군처럼 느껴져 마음이 애잔하다고, 표현한 참가자가 있었다. 또한 이런 식으로 대화가 확장되기도 했다.

"요즘 세대들은 우리 역사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안 하는 것 같아요."
"이런 아픔의 역사들을 많이 알아야 하는데... 아는 사람만 아는 것 같고요."
"정치도 그래요. 젊은 사람들이 좀 많이 관심을 가져야 할 텐데요."


우금티에서 이런 대화들이 오갔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저 뿌듯할 따름이다. 리딩자로서 보람을 느꼈다. 앞서 언급했듯이 올해는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한 지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60년이 한 갑자이니 120년이면 두 갑자가 되는 것이다.

 

 



 

 
▲ 우금티 우금티에 선 역사트레킹 팀. 그곳에서 갑오년을 떠올렸다. 단순히 트레킹을 소비(?)했던 것이 아니라 발전적이고 확장된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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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11월 초에는 우금티 추모제가 개최된다. 프랑스 대혁명에 비견되는 동학농민혁명의 의미를 고찰해 볼 수 있는 좋은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내외적으로 진지한 숙고의 시간을 방해하는 사건과 발언들이 넘쳐난다. 그 중에서 요즘 가장 '인상적인 발언'은 이인호 KBS 이사장이 해주었다.

"김구는 대한민국 건국 공로자가 아니다.(10월 22일, 한국방송 국정감사)"
"(조부는) 유학의 세를 늘려가기 위해 타협하면서 사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친일을 단죄하면 일제시대 중산층은 다 친일파다.(9월 9일,<한겨레신문>과의 전화통화)"


자신의 조부를 구명하고자 김구 선생까지 매도하는 사람이 KBS 이사장 자리에 앉아 있다. 이렇듯 '친일매국'의 후손들은 요직에 앉아 느긋하게 부모세대들의 친일에 대해 항변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 무슨 일본의 군국주의 침탈에 대해 왈가불가 하는가? 일본 아베 정권의 과거사 부정과 친일파 후손들의 항변이 서로 맥락이 다른 것인가? 이인호 같은 사람이 KBS 이사장 자리를 꿰차고 있는 한,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정부비판은 그저 쇼에 불과할 뿐이다. 그저 보여주기 위한 쇼!

우금티에서 돌아가신 영령들은 그런 쇼를 보고 어떤 생각을 가지실까? 혹시 이런 말씀들을 하지 않을까?

"아이고~ 재미없다!"

 

 

 



덧붙임
<공주역사둘레길>은 아직 정식으로 개통되지 않은 길입니다. 내년 봄을 목표로 표식 작업을 완성한 후 개통할 예정입니다. 제 사비를 털어서 표식 작업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지만, 더 많은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자금을 마련할 생각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애정 부탁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우금티 고개에서 족구 한 판?

[주장] 우금티에 동학농민군들의 동상을 세우자

14.07.07 11:13l최종 업데이트 14.07.07 11:50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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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 공산성 진남루. 진남루는 삼남길과 연결된다. 이 길을 따라가면 논산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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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 공산성 금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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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공주는 경북 경주와 마찬가지로 땅만 파면 유물이 쏟아져 나오는 곳이다. 그만큼 공주는 도시 자체가 '지붕 없는 박물관'이다. 공산성, 우금티, 무령왕릉, 석장리 유적, 황새울 성지 등등… 이들 중에서 무령왕릉을 제외하고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곳은 공산성과 우금티일 것이다. 실제로 이 두 장소는 공주를 대표하는 곳이다.


한편 공산성과 우금티는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자.  

 



웅진성에서 산성공원까지, 공산성의 이름 변천사

앞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있고, 뒤로는 크고 작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현재의 공산성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475년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현 공주)으로 천도했을 때 이곳은 왕성(王城)이었고, 536년 사비(현 부여)로 천도했을 때는 북방성으로 불리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660년, 당나라 소정방에 의해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백제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때, 의자왕이 있던 곳도 사비성이 아닌 바로 이곳 공산성이었다. 당나라가 옛 백제땅에 세운 웅진도독부가 있던 곳도 공산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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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 공산성은 산성트레킹을 하기에 제격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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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시기 공주는 신라 9주의 하나인 웅천주였고, 공산성의 이름도 웅천성으로 바뀌게 된다. 공산성이 지금과 같은 '공산성'으로 불리게 된 것은 고려시대 때부터였다. 940년(태조 23년)에 지방제도를 정비하게 되는데 웅천에서 공주(公州)로 명칭이 바뀌게 된 것이다.


이때 비로소 공산성(公山城)이라는 지금의 이름을 얻게 된다. 공(公)자형 산에 성이 축조됐다고 하여 공산성이 된 것이다. 공산성이 자리잡은 산은 '공산'이다. 변산반도의 '변산'처럼 '공산'도 한 글자 산이다.

공산성의 현재 모습은 조선시대에 그 틀이 잡혔다고 볼 수 있다. 1602년 충청감영이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했다. 이후 공주는 호서지방의 중심 고을이 되었고 공산성은 개·보수가 이루어졌다. 토성(土城)이었던 공산성이 튼튼한 석성(石城)으로 축조된 것도 조선시대였다.

한편 1624년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으로 피신을 왔는데 그 이후로는 '쌍수산성(雙樹山城)'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인조는 성 안에 있는 나무 두 그루 아래에서 반란이 진압되길 손꼽아 기다린다. 그러다 이괄이 부하의 배신으로 참수됐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그 나무 두 그루(쌍수)에 정삼품의 작위를 내린다. 그리하여 '쌍수산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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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 금강에서 바라본 공산성 만하루. 파란색 천이 씌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공사중임을 알 수 있다. 이 사진은 2013년 11월 경에 찍은 사진이다. 필자가 올해 6월에 공산성을 방문했을 때도 만하루 일대는 공사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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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에는 공산성에 공원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곳에서는 각종 체육대회나 야유회가 개최되었다. 그래서 일제시대에는 산성공원(山城公園)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제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들어 조선의 궁궐을 격하시켰듯 공산성에 공원을 만들어 그 위엄을 깎아내렸던 것이다.


공산성이 수많은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그 성을 둘러싼 역사가 '드라마틱' 했다는 뜻일 것이다. 현재의 공산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수순을 밟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벽 일부가 내려앉아 등재까지는 가시밭길이다.

 



공주성, 동학농민군들이 가고자 했던 그 성

왕성, 웅천성, 쌍수산성 등등… 지금까지 공산성과 관련된 수많은 다른 이름들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 빠진 명칭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공주성이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1894년 10월.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들은 논산을 출발하여 기세등등하게 북상하고 있었다. 그들이 점령하고자 했던 곳은 공주성이었다. 그렇다. 지금의 공산성인 공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진격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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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우금티전투가 있었던 우금티. 사진에서도 보이듯 무척 황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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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도 언급했듯이 당시 공주는 감영이 있던 충청지방의 중심지였다. 감영은 관찰사가 주재하던 곳으로 지금으로 치면 도청(都廳)소재지이다. 조선시대 크고 작은 변란이 있었지만 이괄의 난을 제외하고는 한 도(道)의 감영이 함락된 적은 없었다.


그래서 1894년 4월 27일, 동학농민군들이 전주성을 함락시켰을 때 조선 정부는 깜짝 놀라 '멘붕'에 빠졌다. 하지만 당시 조선정부는 이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결국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을 한다.

청나라는 조선정부의 공식적인 파병 요청을 받고 아산만에 출병을 한다. 이에 일본도 텐진조약을 빌미삼아 인천으로 군대를 급파하게 된다. 그나마 청나라는 출병 요청을 받았다지만 일본군은 왜 우리 땅에 들어왔나? 들어왔으면 전주성이 있는 남도로 진격을 해야지, 왜 인천으로 향했단 말인가?

뚱딴지같은 일본의 출병은 6월 하순에 있은 경복궁 점령으로 본색이 드러나게 된다. 그들은 조선사회의 평안을 위해 이 땅을 밟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평화유지군'이 아니라 그저'침략군'이었을 뿐이다. 경복궁 점령 이후, 아산만 풍도 앞바다에서 청나라군을 기습하여 청일전쟁을 벌인 것을 보면 그 침략야욕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뒤이어 발발한 청일전쟁에 대해 동학농민군은 크게 반발했다. 그래서 2차 봉기에 나서게 됐고 공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북상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는 우금티에서 관군(3천명)과 일본군(2천명)의 연합부대와 맞서게 된 것이다.

 

 

 

 

 

 

 

 

 

 

이런 동학군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와 일본은 기어코 조선땅에 군대를 파병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대로 청나라는 조선 정부의 파병 요청을 받고 진압군을 보냈다. 이에 일본도 텐진 조약을 빌미 삼아 조선땅에 군대를 급파하게 된다. 청나라야 요청을 받았다지만 일본군의 파병은 뚱딴지같은 처사였다. 조선 정부의 공식 파병 요청도 없었을 뿐더러 전주화약 이후에 조선 땅에 들어 왔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남부지방이 아닌 한성으로 진격을 했다. 동학도들이 한성에다 집강소를 차린 것도 아닌데.

그랬다. 일본군들은 이미 그릇된 야욕을 품고 조선땅을 침략했던 것이다. 그래서 1894년 6월 하순에 경복궁을 공격했고, 곧이어 청나라와 청·일 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런 거듭된 일본의 침략 야욕에 동학군들은 크게 반발하며 본격적인 항일 투쟁에 나서게 된다. 그들은 전열을 가다듬고 충청도 공주로 진격을 하게 된다. 당시 공주는 충청 감영이 있던 곳으로 호서 지방의 중심지였다. 공주성을 함락시킨다면 호서 지방도 동학군들의 세력 범위 안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주성으로 나아가려는 동학군과 이를 진압하려는 관군, 일본군 사이에 큰 전투가 벌어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우금티 전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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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농민운동 겉면에는 주제가 나가고, 날개를 들어 안쪽을 보면 그 주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기재된 작품. 충남 천안여고 역사동아리 학생들이 제작한 것이다. 역시 여고생들이 제작해서 그런지 꼼꼼함이 돋보였다. 설명 부분에 기재된 내용도 상당히 심도가 있었다. 웬만한 성인들도 잘 모를 수 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충실히 잘 기재하였다. 우리 청소년들이 역사를 잘 모른다고 걱정들을 하시는데 이런 작품들을 보면 오히려 자기 자신을 책망할지 모른다. '읔, 고딩들보다 내가 더 모르네...'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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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죽창으로 무장했던 동학군들에게 개틀링 기관총과 야포를 난사했다. 일본군과 관군의 우수한 화력 앞에 동학군은 속수무책 당하고 말았다. 약 1만 5000명 정도 되는 동학농민군들이 우금티에서 비통한 최후를 맞았고 동학군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됐다.

당시 일본은 동학군의 진압에 심혈을 기울였다. 우금티 전투가 일어날 무렵, 일본군은 청·일 전쟁 중이었는데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와 요동반도를 공략하고 있었다. 그래서 동학군의 봉기를 후방을 교란하는 심각한 사태로 판단하고 무자비하게 진압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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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 공주대 교학사 역사교과서 파동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 중 하나는 공주대가 아닐까? 저자 중에 한 사람인 이명희 교수가 공주대 역사교육과에 재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군다나 이 교수는 총대를 매듯 이번 사태에서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으니, 그 비판의 화살이 이 교수를 넘어 공주대 전역으로까지 퍼져나가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을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공주대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은 무척 억울했을지도 모른다. 자기와는 관계 없는 인물 때문에 괜히 자신들까지 도매급으로 팔려나갔으니까. 하지만 걱정마시라! 필자가 만나본 공주대 역사교육과 재학생들은 패기가 넘쳤고, 무척 똘똘했다. 도매금으로 팔려나갈 인물들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학생들이 교수보다 더 낫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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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보다 학생들이 더 낫네

본격적인 우금티 추모제에 앞서 사전 행사인 역사 축제가 공주대학교 산학협력관에서 개최됐다. 공주대학교? 혹시 교학사 역사교과서의 주요 필진 중의 한 명인 이명희 교수가 재직하고 있다는 그곳?

그렇다. 교학사 교과서 문제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이명희 교수는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에 재직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번 역사 축제는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재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프로그램을 총괄하고 있었다. 단순히 장소 제공을 넘어 전체 진행을 주도적으로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금티 역사축제는 충남 관내에 있는 고등학생들이 직접 제작한 작품 전시와 소극장에서 펼쳐지는 발표회, 두 축으로 이루어졌다. 꼼꼼한 손길로 제작된 전시물들에는 동학뿐만 아니라 독도, 위안부 강제 동원 같은 다양한 문제들이 담겨져 있었다. 작품 의도가 무엇이냐는 필자의 물음에 학생들은 똑 부러지는 설명도 잊지 않았다. 해당 내용을 제대로 숙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당찬 모습에 '요즘 애들은 역사를 너무 모른다'고 몰아세우는 편에 섰던 한 사람으로서 좀 부끄럽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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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넋전 넋전을 직접 땅에 꽂고 있는 청소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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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교학사 역사교과서 파동으로 인해 공주대학교는 본의 아니게 큰 불똥을 맞게 됐다. 선봉장(?) 역할을 맡고 있는 이명희 교수가 목소리를 높이면 높일수록 애꿎은 공주대학교의 재학생·졸업생·교수들까지 도매금으로 묶여 질책을 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가 만나본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학생들은 무척 합리적이었고 쾌활한 젊은이들이였다. 해당 학과의 교수 한 명 때문에 다수의 청춘들이 싸잡혀서 욕을 먹는다? 이거 정말 불합리하지 않은가?

우금티 추모제는 오후 3시 우금티 고개에서 행해졌다. 참가자들이 죽은이의 넋이 담겨져 있는 넋전이라는 종이 인형을 제단 앞쪽에 꽂으면서 추모제는 시작됐다. 추모제는 해원무 공연, 사물 놀이 공연 등으로 이어졌는데 전체적으로 규모가 작게, 조촐하게 치러졌다. 공동집행위원장인 지수걸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는 이런 인사말을 했다.



"여기서 북쪽으로 3km 정도만 올라가면 금강이 나옵니다. 만약 동학군들이 우금티를 넘고, 금강을 건넜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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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추모제례 119년 전 우금티 고개에서 유명을 달리한 동학농민군들의 넋을 달래는 추모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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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변했을 것 같다. 적어도 일제강점이라는 치욕적인 역사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면 분단도 없었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이란 그저 허무한 일이라지만 그래도 이런 유쾌한 상상력은 삶에 활력을 가져다줄지 모른다.

 

 

 

 

 

 

 

 

 

 

 

 

'교학사' 이명희 교수, 공주대 제자들에게 배우시길

공주에서 '우금티 전투' 추모제례·역사축제 열려

13.11.06 13:47l최종 업데이트 13.11.06 15:42
곽동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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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 작은 외계인? 이것은 넋전이다. 넋전은 죽은이의 넋을 담은 종이 인형을 말한다. 이 넋전에는 우금티 전투에서 비통하게 눈을 감은 동학농민군들의 혼이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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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캐릭터 이제 동학농민전쟁 기념식도 정형적인 틀에서 벗어나 젊은층의 참여를 이끌 수 있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런 캐릭터 이벤트는 청년층에 대한 참여와 관심을 이끌 수 있다. 한편 위의 캐릭터에 새겨진 초코릿 복근이 무척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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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냐, 우금치냐

지난 10월 27일. 옛 백제의 도읍이었던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행사가 하나 개최됐다. 119년 전 공주 우금티에서 비통한 최후를 맞은 동학 농민군들에 대한 추모 제례와 역사 축제가 행해진 것이다.

일단 용어 정리가 필요하겠다. '우금치'는 알겠는데 '우금티'는 무엇이냐고 반문을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또 '치'나 '티'나 비스무리한데 굳이 왜 우금티를 내세우냐고 물으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고개를 뜻하는 순수한 우리말은 '티'나 '재'였다. 칡이 많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충북 충주의 '갈티고개', 노루들이 출몰한다는 경북 봉화의 '노루재'가 그 좋은 예일 것이다. 하지만 일제는 고개를 뜻하는 우리말에도 왜곡의 씨앗을 뿌려 놓았다. 일제는 지도를 제작하면서 고개마다 이름을 붙였는데 고개를 뜻하는 한자 '티'자가 없었기에 손쉬운 대로 '언덕 치(峙)'자를 가져다 붙였다고 한다. 그래서 '우금티'가 '우금치'로 개명된 것이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 때문인지 공주 지역에서는 우금치가 아닌 우금티로 더 많이 불리고 있었다.

옛 고지도를 살펴보면 '언덕 치(峙)'를 쓴 지명들이 적지 않게 나타난다. '곰치재'나 '웅치' 같은 곳들이 그런 곳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굳이 우금티라는 명칭을 소리 높여 부른다고 오히려 질책을 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금티가 어떤 곳인가?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동학농민군들이 학살에 가까운 몰살을 당한 곳이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이 결합되었기에 '우금치'가 아닌 '우금티'로의 제 이름 찾기는 분명 의미가 있는 발걸음으로 평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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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수걸 교수 지수걸 교수는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학과장이자 이번 <우금티 추모제례 및 역사축제>의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얼마전 같은 학과에 있는 이명희 교수의 <교학사 역사교과서>에 대한 비판을 꼼꼼하게 담은 성명서를 발표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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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4년 11월, 공주 우금티 고개


그럼 119년 전인 1894년에 도대체 우금티에서는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 아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모르시는 독자들을 위해 부연 설명을 해보겠다.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한 동학군은 그 기세를 몰아 정읍을 점령하고 전주로의 진격을 결행한다.

전주가 어떤 곳인가? 당시 전주는 전라도의 핵심 지역으로 관찰사의 소재지였다. 한마디로 전라도의 심장부가 동학군에 의해 점령되었던 것이다. 이에 당황한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구원 요청을 한다. 이에 외국 군대의 국내 입성에 대한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들이 모아져 동학군과 정부 사이에 전주화약(6월 11일)이 맺어졌다.     

전주화약 이후 동학군의 세력 범위에 있던 지역은 점차 안정화를 찾아갔는데 그 중심에서는 집강소 제도가 있었다. 동학농민군이 휩쓸고 간 지역은 치안과 행정이 마비됐는데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동학군의 대척점에 서 있던 사람들이 누구였는가, '가렴주구'를 행한 장본인들이 누구였는가를 생각해보면 쉽게 유추가 될 것이다. 동학군에 의해 탐관오리들이 처형됐으니 해당 고을의 치안과 행정은 마비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전봉준과 전라도 관찰사 김학진은 전라도 지역의 안정화를 도모하고자 민간자치 기구를 설치하기로 합의한다. 그렇게 하여 탄생된 것이 바로 집강소였다. 집강소는 자치 기구였으나 사실상 지방행정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실질적인 지역 통치기구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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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뚜껑으로 만든 우리나라 우리나라 외교에서 쟁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병뚜껑에 기재하여 제작한 병뚜껑 한반도. 충남 예산 여고 학생들이 급우들과 함께 만든 작품이다. 독도나 위안부를 적은 병뚜껑이 많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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