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arge figure in a shelter: 거대 대피소라는 명칭의 작품. 게르니카와 어울리는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대성당 인근에 있는 parque de los pueblos de Europa 공원에 있다. free palestine!

 

 

 

<재미난 스페인 13편> 스페인 내전과 게르니카

게르니카에서 <게르니카>를 봤다!

스페인에 대해서 잘 모를 때였다. 그래도 유럽역사에 대해서 관심이 있어서 게르니카(Gernika)에서 일어난 학살사건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1937년 스페인 내전 당시였다. 프랑코 군대를 돕기 위해 나치 독일의 공군기들이 게르니카를 폭격한다.

지도를 찾아보았다. 바르셀로나를 위시한 카탈루냐 지역을 쭈욱 훑어봤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프랑코 군대에 반대한 인민전선이 바르셀로나를 임시수도로 정할 만큼 카탈루냐 지역은 반 프랑코 정서가 강한 곳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게르니카도 카탈루냐 지역에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바스크 지역에 있었다. 구겐하임 미술관이 있는 빌바오의 옆 동네가 바로 게르니카였다. 이게 무슨 창피인가...

스페인은 1898년,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그나마 남아있던 식민지들까지 잃게 된다. 미국에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괌을 넘겨줬고, 쿠바는 독립하게 된다. 한 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에서 유럽 변방으로 완전히 몰락한 것이다. 그 이후로도 스페인은 내외적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됐다.

1923년 9월에 바르셀로나에서 쿠데타가 일어난다. 그 유명한(?) 프란시스 프랑코가 군사 반란을 일으켰는가? 아니다. 미구엘 프리모 데 리베라(Miguel Primo de Rivera)라는 카탈루냐 주둔군 사령관이 군대를 동원했다. 총리에 오른 리베라는 독재 정치로 자유를 억압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일정 정도 경제발전을 이루게 된다. 당시 왕이었던 알폰소 13세는 리베라의 독재 정치를 슬쩍 눈감아 주었다.

짧은 호황기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29년, 미국에서 경제 대공황이 발생했고 그 여파가 대서양 건너 스페인에도 퍼지게 된다. 독재 정치에 대한 반감, 악화하는 경제상황 등등... 여러 악재가 겹쳐지자 리베라는 사임하게 된다. 이때가 1930년 1월이었다. 그는 프랑스로 망명을 하게 됐는데 사임을 한 지 두 달도 되지 않아 파리의 한 호텔에서 병사하게 된다.

 

 

 

* 게르니카대성당: 스페인 내전 이후로 복원됐다.

 

 

 

리베라가 집권하던 1920년대, 유럽에서는 파시즘이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군사독재를 이끌던 리베라도 파시즘을 동경했다. 실제로 그는 이탈리아에 가서 당시 파시스트당을 이끌고 있던 베니토 무솔리니와 회담을 한다. 이때 리베라는 존경의 의미로 무솔리니에게 두체(duce)라고 칭하게 된다. 두체는 ‘총통’ 혹은 ‘수령’으로 쓰이기도 하고, ‘공작’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미구엘 프리모 데 리베라가 사망한 후, 3년 뒤인 1933년이었다. 그의 아들인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José Antonio Primo de Rivera)가 팔랑헤(Falange)라는 파시스트 정당을 결성한다.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는 팔랑헤를 통해서 자신의 아버지의 이념을 계승하려고 했다. 1936년 7월,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는데 이때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는 공화파 정부에 의해 체포됐다. 군사반란을 사주했다는 죄목이었는데 결국 그는 1936년 11월에 총살됐다.

팔랑헤의 유산은 군사반란의 지도자인 프랑코가 계승했다. 이념과 정책을 뒷받침해 줄 파시스트 정당을 발 밑에 두고 공화파 정부에 총부리를 겨누었던 것이다.

1931년 4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국왕 알폰소 13세가 이탈리아로 망명을 한 것이다. 같은 달에 있었던 선거에서 군주정 폐지를 선언한 좌파 세력이 승리했기 때문이다. 4월 14일에 제2공화국이 선언됐고, 알폰소 13세는 스페인을 떠나게 된다. 이로써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약 230년간의 통치는 막을 내린다. 하지만 완전히 끝은 아니었다. 프랑코가 사망한 후 다시 부르봉 왕조가 부활했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도 혼란이 멈추지 않았다. 1931년 좌파, 1933년 우파, 1936년에는 다시 좌파가 집권하게 된다. 이때 각각의 집권 세력들은 전임 정부의 정책들을 되돌려 놓았다. 예를 들면 당시 초미의 관심사였던 농지법은 ‘좌파정책 -> 우파정책 -> 좌파정책’으로 마치 실타래가 꼬이듯, 꼬이게 된다.

이런 혼란을 틈타 군부가 13년 만에 다시 쿠데타를 일으킨다. 스페인 내전이 발발한 것인데 이때가 1936년 7월 17일이었다. 좌파 세력이 인민전선을 결성하여 선거에서 승리한 지 5개월이 지난 때였다. 동남아시아도 마찬가지인데 스페인 사례처럼 한 번 쿠데타가 일어나면 계속 일어나게 된다. 그러니 애초부터 그 뿌리를 싹 뽑아버려야 한다.

 

 

 

 

* 게르니카: 스페인 내전 당시의 모습을 담은 전시물들.

 

 

 

스페인 내전 초기에 군부는 남북 종심축으로 작전을 펼쳤다. 당시 아프리카 지역 사령관인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는 남부 안달루시아 지역에 상륙하여 북쪽으로 진군했다. 반대로 나바라 주둔군 사령관인 에밀리오 몰라(Emilio Mola)는 북쪽인 팜플로나에서 남쪽 방향으로 진격했다.

남북으로 치고 오던 군사반란군들이 서로 연결됐고, 수도인 마드리드를 공격하게 된다. 하지만 공화국 지지자들이 버티고 있던 마드리드는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이에 프랑코는 마드리드를 남겨두고, 북부 지역 공세에 주력한다. 공화국의 세력 범위에 있던 북부 지역들이 차례차례 반란군들에게 함락됐다. 이 시기에 게르니카 학살도 발생하게 된다. 그때가 1937년 4월 26일이었다.

‘내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스페인 내전은 국제적이었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프랑코 군대를 위해 참전했다. 반면 소련과 멕시코가 공화국군을 지원했다. 이와 별도로 세계 각국에서 온 의용병들이 국제여단이라는 이름으로 공화국을 위해 싸웠다. <동물농장>, <1984>로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도 파시스트들과 싸우기 위해 총을 들었다. 조지 오웰은 전투 중에 총상을 입기도 했는데 그런 스페인 내전의 경험을 담아 <카탈루냐 찬가>라는 기념비적인 책을 출간하게 된다.

조지 오웰 이외에도 앙드레 말로, 존 콘포드와 같은 문인들이 직접 참전했다. 또한 알베르 카뮈, 생텍쥐페리, 파블로 네루다, 루이 아라공,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등... 수많은 예술가들이 공화국 정부에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나치 독일은 게르니카에 중무장한 폭격기와 전투기를 보냈다. 폭격으로 인해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고, 많은 시설물들이 파괴됐다. 당시 공화국 측에서는 1,600명 정도가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평화로웠던 작은 도시가 한 순간에 지옥으로 변한 것이다.

그럼 왜 독일은 게르니카를 공습했을까? 새로 개발한 전략 무기들을 테스트하기 위해서였다. 신무기들의 파괴력을 확인하기 위해 무고한 게르니카 시민들을 희생시켰던 것이다. 게르니카 공습이 있고, 약 2년 뒤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 게르니카: 게르니카에서 본 피소의 <게르니카>. 원본은 마드리드에 있는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에 있다.

 

 

 

 

<게르니카>는 피카소가 스페인 내전 중에 공화국의 요청으로 그린 작품이다. 피카소는 게르니카에서 벌어진 만행을 화폭에 담아 전쟁의 비참함을 널리 알리고자 했다. 그런데 당시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던 피카소는 프랑코가 집권하는 한 조국으로 <게르니카>를 보낼 수 없다며, 미국에 그림을 맡겨버렸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조국 스페인에 자유와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돌려보낸다는 조건이었다.

40년 넘게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타향살이'를 했던 <게르니카>는 드디어 1982년,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영원할 거 같았던 프랑코의 철권통치도 1975년, 그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후 스페인은 발 빠르게 민주화로 나아갔다. 그림의 반환에 스페인 국민들은 크게 환호했다. 전세계 사람들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스페인이 오랜 독재체제에서 벗어나 민주주의 사회로 거듭났음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빌바오에서 게르니카로 향하는 전철을 탔다. 약 50분 정도 걸렸는데 바깥 풍광이 예뻐서 지루하지 않았다. 드디어 게르니카에 도착했다. 게르니카는 아담했지만 활기차 보였다. 현재의 게르니카에는 스페인 내전 당시의 상흔이 크게 남아있지 않았다. 거의 다 복구가 된 거 같았다. 사실 서울도 한국전쟁을 혹독히 겪었지만 지금 서울에 한국전쟁 때의 상흔이 남아있는 장소가 거의 없지 않은가? 대신 곳곳에 조형물을 설치하여 그때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렇게 곳곳을 탐방하다 드디어 <게르니카> 벽화 앞에 서게 됐다. 드디어 <게르니카> 벽화를 내 두 눈으로 보게 됐다. 피카소가 그린 오리지널 <게르니카>는 마드리드에 있는 레이나 소피아 국립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고, 이 벽화는 오리지널을 복제한 것이다. 어쨌든 복제한 것이지만 게르니카에서 <게르니카>를 보게 됐다.

게르니카 대성당 위쪽에 유러파 공원이라는 곳이 있어 그곳을 찾아갔다. 대성당도 당시 폭격의 참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크게 훼손이 됐고 이후에 복구하게 된다. 그래서 아랫돌과 윗돌의 색깔이 다르다.

공원이 조용하고 쾌적해서 산책하기에 적당했다. 야외 조형물들도 세워져 있었는데 동네가 동네인만큼 모두 평화를 주제로 하고 있었다. 한적한 공원에서 산책을 하다 보니 여행에서 온 피로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평화로운 느낌도 들었다. 그렇게 게르니카에서 평화의 느낌을 받게 됐다.

 

 

 

 

 

* 유로파공원: 대성당 인근에 있다. 산책하기에 정말 좋았다. 이곳에서 평화에 대해서 곱씹어 보았다.

 

 

 

 

 

 

 

 

*게르니카 지도

 

 

 

 

 

 

독재자 프랑코가 우리에게 유신을 알려줬다고?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4편] 산티아고를 걷는 유럽인들

 

14.12.27 15:51l최종 업데이트 14.12.27 15:51

 

 

 

 

 

 

 
▲ 순례자 산티아고 대성당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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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들의 동료의식

산티아고 순례길에서의 또다른 볼거리는 바로 '사람'이다. 길을 걷다보면 전 세계에서 온 순례자들과 만나고 헤어지고를 수없이 반복한다. 순례자들의 일일 이동거리가 뻔하기 때문에 계속 동선이 겹쳐지고, 그러다보니 보는 얼굴이 계속 보이게 된다. 아침에 같은 알베르게(albergue: 순례자 전용 숙소)에서 출발한 사람과 점심 때 같은 바르(bar)에서 만나고, 그러다 저녁에 또 같은 알베르게에서 1박을 하고.

그래서인지 순례자들끼리는 자연스럽게 동료의식이 생긴다. 아예 팀처럼 움직이는 무리들도 있었다. 그들은 같은 알베르게에 묵으며 일정 자체를 공유했다. 심지어 그들은 빨래도 같이 했다. 알베르게에 있는 세탁기와 건조기의 요금은 보통 3유로 정도인데 개별적으로 하는 것보다 모아서하면 훨씬 저렴하기에 그들은 세탁물을 한 통에 넣어 세탁을 했다.

순례길을 걷기 전까지는 전혀 인연이 없던, 순례길을 통해 인연을 맺은 사람들의 옷들이 한 통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남자 속옷, 여자 속옷 가릴 것 없이 세탁기에서 원심 운동을 하고 있었다.

 

 

 

 



 
▲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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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피레네에서 끝났다!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은 다국적이었지만 역시 자국민인 스페인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스페인을 제외하고는 프랑스를 위시한 유럽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비유럽권에서는 한국인들이 가장 많은 듯했다.

유럽권 순례자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특히 히피처럼 보이는 순례자들을 보니 그 의문이 더욱 짙어졌다.

'중세는 그렇다 치고, 현대에 와서는 언제부터 유럽 사람들이 이렇게 산티아고 순례길로 몰려들었지? 프랑코 독재에 진절머리 쳤던 유럽 사람들인데 말야. 아직까지 스페인에 프랑코의 어두운 그림자가 남아 있다면 그들이 피레네 산맥을 넘었을까?'

<1984> <동물농장> <카탈로니아 찬가>로 유명한 소설가 조지 오웰은 스페인의 역사를 두고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스페인의 역사는 1936년에 멈추고 말았다."

조지 오웰은 1950년, 46세의 나이로 요절을 했고 그때까지도 스페인은 프랑코가 통치를 했다. 국제여단의 일원으로 스페인내전(1936~1939)에 참여해 목에 관통상을 당하는 등 엄청난 고생을 했던 조지 오웰이었기에 절대로 프랑코를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저런 말들을 쏟아냈을 것이다.

조지 오웰처럼 서구 사람들은 스페인에 대해서 고운 시선을 보낼 수가 없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끌어들여 선거로 들어선 인민전선 정부를 전복시켰던, 파시스트 프랑코 정권이 계속 존속했던 한 서구인들에게 스페인은 논외의 국가였을지 모른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었다.

"유럽은 피레네(산맥)에서 끝났다."

이렇듯 피레네 산맥은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에게 가상 경계선으로 인식됐다. 뻔히 피레네 산맥 아래에 스페인이 존재함에도 그들은 애써 이베리아반도를 유럽 대륙에서 떼어내려고 했던 것이다.

 

 

 



피레네를 들었다 놨다 했던 프랑코

그렇게 가상의 경계선이었던 피레네 산맥은 이제 산티아고 순례길의 시작점이 돼 전세계 순례자들이 모이는 집합소 역할을 해주고 있다. 그러고 보면 피레네는 20세기 들어 유럽과 스페인을 이어주는 가교가 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큰 장벽처럼 경계선이 되기도 하는 등 그 역할이 빈번했다.

그렇듯 피레네가 가교가 되던 장벽이 되던 그 중심에는 항상 프란시스 프랑코가 있었다. 프랑코의 파시즘을 막기 위해 유럽인들은 피레네를 넘었고, 프랑코가 스페인 내전에서 승리하게 되니 피레네를 경계선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다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하자 피레네를 통해 이베리아반도를 방문했다.

 

 



 
▲ 프란시스 프랑코 프란시스 프랑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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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가 사망을 했다고 군부중심의 독재체제가 일거에 해소되지는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다. 프랑코 체제가 하루아침에 민주체제로 변환된다고 생각하는 건 그저 판타지적인 상상일 뿐이다. 그래서 서구 국가들은 스페인의 민주주의 이행 과정을 근심어린 시각으로 바라봤다.


살얼음판 같았지만 '스페인의 봄'은 민주주의 체제로 착실히 이행되어 갔다. 정치개혁법 제정, 공산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의 합법화, 신헌법 제정 등, 39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프랑코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법안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어디나 구체제를 신봉하는 수구세력들이 있는 법! 역사의 수레바퀴가 언제나 순탄하게 돌아가지는 않는 법이다. 1981년 2월 23일, 민주화 이행에 불만을 가진 군부세력들이 국회의사당에 진입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프랑코 사후에 진행된 민주주의 개혁 덕택에 희미해졌던 피레네의 경계가 다시 'DMZ'처럼 선명하게 되돌려 질 판이었다.

 

 

 

쿠데타에 단호히 반대한 후안 카를로스 국왕


프랑코 체제에 향수를 갖고 있던 일부 군부 세력들은 공산당 합법화에 대해서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스페인 내전에서부터 40년간 반공을 국시로 삼고 스스로의 정당성을 부여했던 군부였다. 그래서 공산당까지 합법의 테두리로 끌어들이는 정당 개혁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행위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렇게 '스페인의 봄'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놓이게 됐다. 또다시 프랑코 시대와 같은 독재시대로 돌아갈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스페인의 민주화는 그렇게 쉽게 꺾이지 않았다. 아니다. 오히려 좀 싱거웠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왜? 6시간 만에 쿠데타 상황이 '종결'됐기 때문이다.

"조국의 단합과 영원함의 상징인 왕실은... 민주적인 정치 과정을 무력에 의해 파괴하려고 하는 어떠한 행동도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 후안 카를로스 후안 카를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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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이자 군 최고사령관인 후안 카를로스는 단호하게 쿠데타를 반대했고, 그들 세력의 그릇된 야망을 좌절시켰다. 후안 카를로스는 프랑코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됐지만 아돌포 수아레스를 총리로 내세워 개혁을 이끌게 했고, 쿠데타라는 긴박한 상황에서 결단력을 발휘하여 스페인이 구체체로 복귀하는 것을 막아냈다.


한편 후안 카를로스는 우리하고도 인연이 있다. 왕세자시절 한국인 사범으로부터 태권도를 배웠기 때문이다. 

 

 

 

<게르니카>와 산티아고 순례길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 중에 공화정부의 요청으로 그려진 작품이다. 피카소는 프랑코가 집권하는 한 조국으로 <게르니카>를 보낼 수 없다며, 미국에 그것을 맡겼다. 자유의 상징인 <게르니카>를 파시스트 독재자 손에 건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조국 스페인에 자유와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돌려보낸다는 조건이었다.

40년 넘게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타향살이'를 했던 <게르니카>는 드디어 1982년,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림의 반환에 스페인 국민들은 크게 환호했다. 전세계 사람들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스페인이 오랜 독재체제에서 벗어나 민주주의 사회로 거듭났음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만약 1981년 2월에 있은 군부 쿠데타가 성공을 했다면 <게르니카>가 고향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 산티아고 순례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스페인이 프랑코 체제를 극복하지 못했다면 순례길도 북적거리지 못했을 것이다. 

<게르니카>가 환대를 받으며 귀향했듯, 산티아고 순례길에도 봄바람이 불어왔다. 1982년 교황 바오르 2세의 방문, 1987년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 출간,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등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은 더욱더 북적북적 해진 것이다. 또다른 중흥기를 맞이한 것이다.

 

 

* 게르니카

 

 

 

 


대원군, 십상시, 문고리... 사극 찍어도 되겠네!

 


후안 카를로스 국왕이 태권도로 우리와 인연이 있듯 프란시스 프랑코도 우리와 관련이 있다. 유신 헌법이 바로 그 '인연의 끈'이다. 1972년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제정하며 영구집권을 획책했을 때, 관련 학자들을 스페인과 대만으로 파견했다고 한다. 당시 두 나라는 총통이 최고 권력기관으로 군림했었고, 유신헌법은 총통제를 목표로 했기에 '적절한' 파견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알다가도 모르는 게 세상일인 것 같다. 약 40여년 전, 총통제를 가르쳐줬던 스페인은 입헌군주국으로서 착실히 민주주의를 실천해 갔고,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의 기소에 앞장을 서기도 했다. 하지만 총통제를 배워갔던 우리나라는 그 유신헌법을 기초한 사람이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자리에 임하고 있다. '기춘대원군'이라는 매우 봉건 왕조적인 별명을 가지고 말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십상시'와 '문고리 3인방'도 있다. 대원군, 십상시, 문고리... 이 정도 캐릭터면 사극 영화 하나 찍어도 될 듯하다. 누가 아는가? <광해>나 <왕의 남자> 빰칠 정도의 흥행몰이를 할지!

 


 
▲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필자임.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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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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