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명

  남태령 역사트레킹

세부코스

선바위미술관 ▶ 남태령 ▶ 부대앞 ▶ 예술의전당

모임일시

4월 23일 일요일 오전 10시 10분

집합장소

지하철 4호선 선바위역 3번 출구

이동시간

약 4시간

이동거리

약 7km

IN / OUT

In: 남태령역 3번 출구

Out: 예술의 전당

난이도

모집인원

10명

최소출발인원

4명 ▶ 4월 20일까지 최소 인원 미달시 자동으로 취소됨.

참가비

1만 5천원

참가비 사용처

생수, 행동식, 리딩비

참가비 납부방법

 

15천원 -> 송금( 곽동운 / 우리은행/ 129-08-530255)

참고) 부득이 한 경우 현장 납부 가능

 

참가방법

 

댓글로 참가신청 -> (참가번호 / 참가자 / 하고 싶은 말)에 맞춰 참가신청

(. 참가1 / 곽작가 / 즐겁게 해 보아요~)

 

준비물

생수, 모자, 편한신발(트레킹화), 선크림 등등...

참고

4월 20일 오후 10시까지 최소인원 미달시, 자동 취소됨.

주의사항

비가 와도 진행합니다. 우비는 개별로 준비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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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사항

 

1. 배려와 존중, 재미와 유익함을 나누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2. 역사트레킹 시에는 금연과 금주를 해주세요.

3. 마스터는 민형사상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이 점 양지하시고 신중하게 참가 신청을 해주세요.

4. 카페에서는 단체로 여행자 보험에 가입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사태에 대비하신다면 개별적으로 여행자 보험에 가입하시는 걸 권합니다.

5. 안전사고에 대비를 해주세요. 모임 시에 발생하는 사고의 책임은 참가자 본인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http://cafe.naver.com/trekkingmaster/35    <--- 신청하러 가기








 











남태령 역사트레킹갑니다. 남태령은 예로부터 무척 중요한 고개 중에 하나였습니다.
서울에서 삼남지방으로 갈 때 꼭 넘어야 했던 고개였기 때문입니다.

남태령 고개를 두고 북쪽은 서울이 되고, 남쪽은 과천이 됩니다. 그 고개를 따라 많은 이들이
발걸음을 서둘렀습니다. 유생들은 청운의 꿈을 안고 남태령을 넘었고, 보부상들은 장사가 잘 되길 기원하며 이 고개를 넘었습니다.

정조대왕도 이 고개를 넘었습니다. 남태령을 넘어 과천을 향한 후 수원까지 나아갔던 것입니다.
사도세자가 잠들어 있는 화산으로 능행차를 떠났던 것이지요.

이렇듯 고개길은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불러 모았고, 그에 따라 수많은 스토리텔링들도 피어 오르게 됩니다.

화창한 봄날입니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남겨져 있는 남태령을 떠날볼까요?

남태령 역사트레킹으로 해보는 겁니다! 




 













정조대왕이 만든 돌다리를 건너며

 

삼성산 역사트레킹

 

 

흥미로운 질문 두 가지를 던져볼게요. 서울 인근에 경주 불국사보다 더 오래된 연혁을 가진 사찰이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또 그 사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정조대왕 시대에 축조한 돌다리가 있다면요?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분들은 분명 이런 물음에 흥미를 느끼실 것입니다.


불국사보다 더 오래됐다는 사찰은 삼성산에 있는 삼막사라는 사찰이고, 정조대왕 시대에 축조된 다리는 만안교라는 석교(石橋)입니다. 이 두 문화재는 하나의 선으로 연결하여 이동할 수 있습니다. 또한 편리하게 수도권 전철을 타고 탐방을 할 수 있답니다. 이를 두고 저는 일명 삼성산 역사트레킹이라고 이름을 붙였답니다.

 





 

* 만안교.







 

화산 능행차와 만안교(萬安橋)

 

 

삼성산 역사트레킹은 경기도 안양시에 있는 관악역 1번 출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1번 출구에서 나와 안양역 방면으로 약 500미터 정도를 걸어가면 만안교를 만날 수 있답니다.


1795(정조19)에 축조된 만안교는 정조대왕의 화산 능행차를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효심이 깊었던 정조는 1789년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경기도 양주 영우원에서 수원 화산의 현륭원으로 이장을 합니다. 그리고는 자주 참배에 나섰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화산 능행차가 된 것입니다.


처음 능행차는 도성에서 동작나루를 거쳐 남태령을 넘는 길이었지만 이후 시흥과 안양을 거치는 길로 변경됩니다. 남태령 길이 협소하다는 지형적인 한계가 가장 큰 이유였지만 다른 사정도 있었습니다. 과천 행차로에는 김상로와 그의 형 김약로의 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잘 알려졌다시피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의 명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것도 뒤주에 갇혀 죽게 되지요. 이것을 두고 임오화변(1762, 영조 38)이라고 부릅니다.


임오화변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상로는 사도세자 처벌을 적극적으로 주장했습니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해원하기 위해 떠나는 능행차 길에 사도세자의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김상로 형제의 묘소를 지나는 것이, 정조 입장에서는 당연히 유쾌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1794년 이후부터는 능행차 노선이 시흥과 안양 방면으로 변경된 것입니다.


당시 왕의 행차 길에는 임시로 나무다리 등을 가설한 후, 행차가 끝난 뒤에는 철거 하는 방식이 반복됐습니다. 이에 정조는 그런 번거로움을 피하고, 인근 주민들이 평상시에도 안전하고 편리하게 하천을 넘을 수 있게 튼튼한 돌다리(石橋)를 건설하라고 왕명을 내립니다.


석교의 축조에는 경기관찰사, 병마수군절도사, 수원개성강화 유수까지 동원됐습니다. 큰 공사였지요. 하지만 건설 기간은 3개월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렇게 왕명으로 지어진 돌다리는 길이가 31.2m, 넓이가 8m에 달하는 큰 규모를 자랑하게 됩니다.


왕의 뜻대로 인근 백성들도 안심하고 하천을 건널 수 있는 튼튼한 돌다리가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 다리를 두고 정조대왕은 만년동안 사람들이 편안하게 다리를 건널 수 있게 한다는 의미로 만안교(萬安橋)라는 이름을 직접 작명하였습니다.

 

 





* 만안교. 만안교를 건너는 트레킹 팀.








 

백성들을 위해 튼튼한 돌다리를 축조한 정조대왕

 

 

한편 원래 만안교는 지금의 자리보다 남쪽으로 200m 지점인 삼성천 위에 축조됐습니다. 그러다 1980년 국도 확장 공사 시에 지금의 삼막천 위로 옮겨지게 됩니다. 이 다리가 놓여 있는 안양시 만안구의 명칭은 만안교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만안교는 무지개교라 불리는 홍예교입니다. 조선 후기에 축조된 홍예교 중에서 가장 큰 다리로 모두 7개의 아치가 놓여 있습니다. 판석과 장대석을 서로 맞물려 축조했는데 그 기법이 매우 정교하여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로 불린답니다.


저는 처음 만안교를 탐방했을 때 좀 색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4대문 밖, 그것도 한강 이남에 이렇게 정교하고 거대한 아치형 석교를 볼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이 돌다리는 박물관에 갇혀 있는 죽은(?) 다리가 아니라 지금도 인근 주민들이 건너다니는 살아있는 생활다리였다는 점입니다.


이제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진두지휘하는 화산 능행차를 볼 수 없고, 다리 주위로는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섰지만 정조대왕의 바람은 계속 이어지는 듯싶습니다. 인근 백성들이 만년동안 편안하게다리를 건널 수 있게 하는, 그런 애민 정신 말입니다.

예전 삼성산 역사트레킹을 했을 때 저는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정조대왕 시대에 만들어진 역사적인 다리를 걷고 있습니다. 200년이란 시간이 흘렀어도 아직까지 튼튼한 돌다리를 넘고 있는 거죠. 그 이름대로 만년동안 계속 잘 넘어 다녔으면 좋겠네요.”

 

 





* 남근석. 삼막사 칠성각 부근에 위치해 있다. 은근히 인기가 좋다.







 

울창한 숲길, 삼막계곡

 

 

다음 코스는 삼막천을 따라 이동을 합니다. 삼막천은 삼성산에서 발원된 작은 하천으로 그 상류 위쪽에는 삼막사가 터를 잡고 있고, 그 하류에는 현재 만안교가 놓여 있습니다. 만안교를 지난 삼막천은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 안양천과 합수됩니다.


예전, 삼성산 역사트레킹을 행했을 때는 5월 달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여름과 같이 더운 날씨였지요. 땀방울이 눈앞을 가릴 정도였습니다. 봄소풍 같은 역사트레킹을 기대했지만 때 이른 더위로 자꾸 나무그늘만 찾게 됐던 걸로 기억합니다. 저도 지쳐갔고, 참가자들도 지쳐갔습니다.


하지만 삼막계곡에 들어서니 언제 그랬냐는 듯 기운이 솟구쳤습니다. 계곡을 끼고 있는 숲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아무리 강한 직사광선이 내려찐다고 해도 숲속에 있으면 탈진할 일이 없습니다. 숲속이 강력한 썬크림역할을 해주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시원한 나무그늘에 있으면 원기가 회복됩니다. 이런 숲길을 걷는다면 한 여름 때양볕 아래에서도 트레킹을 마음껏 할 수 있을 듯싶었습니다.


1시간 정도 계곡 숲길을 따라 올라가니 드디어 삼막사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 삼막사.







 

불국사보다 더 오래된 삼막사


  

삼막사는 677,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입니다. 원효, 의상, 윤필 3대사가 막()을 치고 수행을 하다가 그 후에 절을 지으니, 그 절이 삼막사가 된 것입니다. 삼성산의 명칭 유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원효, 의상, 윤필의 성인이 수도를 한 곳이라 하여 삼성산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앞선 8화에서도 언급을 했었습니다. 참고로 삼성산은 관악산의 지산입니다.


서두에서 저는 삼막사가 불국사보다 더 오래된 연혁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개창 시기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통상적으로 불국사의 창건은 751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면 삼막사가 불국사보다 무려 70년 정도 앞선 연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서가 깊어서인지 삼막사에는 수많은 선승들이 다녀갔습니다. 신라 말에 도선국사, 고려시대에는 나옹선사, 조선시대에는 무학대사와 사명대사, 서산대사가 이곳에서 수도를 했습니다. 특히 조선왕조 개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무학대사는 삼막사에서 새로운 왕조에 대한 융성을 기원했다고 합니다.





* 삼막사.





유명한 선승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는 건, 달리 말하면 삼막사가 좋은 기운을 품고 있다는 뜻일 테지요. 제가 처음 삼막사를 탐방했을 때였습니다. 기운이 사방으로 트였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삼막사는 정상부 능선 부근에 자리 잡고 있어, 그 곳에 올라서면 멀리 서해바다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데 그런 입지적 조건이 삼막사의 기운을 하게 생성시키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좋은 기운 때문인지 삼막사는 조선시대부터 남왈삼막(南曰三幕)으로 지칭됐습니다. 또한 진관사 등과 함께 서울 인근의 4대 명찰로 불리게 됐답니다

 

삼막사에는 무학대사가 중수한 대웅전을 비롯하여 1880(고종 17)에 지어진 명부전과 그 다음해 지어진 칠성각 등의 당우(堂宇)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또 고려중기 시대에 건립된 3층 석탑과 조선 후기시대에 제작된 아미타삼존불 등 다양한 문화재가 있습니다.


삼막사에서 바라보는 낙조도 일품입니다. 서해바다로 넘어가는 해가 세상을 붉게 만든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시조 한 수를 읊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삼막사 아래에 있는 염불암 탐방을 끝으로 삼성산 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됩니다. 삼성산 역사트레킹은 8화에서 소개했던 관악산 역사트레킹과 함께 묶어서 해보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서울 남부지역에 대한 이해도도 더 높아질 것입니다.

 


 



* 삼막사.






 

삼성산 역사트레킹

 

1. 코스: 만안교 경인교대 정문 삼막계곡 삼막사 염불암 안양예술공원

 

2. 이동거리: 8km

 

3. 예상시간: 3시간 30(쉬는 시간포함)

 

4. 난이도:

 

 

 


 

 

 







 

강남주민 오들오들 떨게 한 우면산 '그 물건'

 

[여행] 남태령-우면산 '안보 트레킹'

 

15.03.19 09:08    최종 업데이트 15.03.19 09:08

 

 

 

 

 

 

* 남태령

 

 

 

 

 

 

 

 

 
▲ 지뢰지대 과거에 지뢰지대였음을 알리는 경고판. 아직 미수거된 지뢰들이 남아 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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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적대적 공생관계, 공포의 균형, 안보상업주의 같은 냉전시대 맹위를 떨쳤던 개념들이 어지럽게 난무해 있으면서도 그 나름대로 질서를 갖추고 있다. 적대적 공생관계는 적대관계에 있는 두 세력들이 서로를 비방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키우는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의 강경파와 이란의 강경파들이 서로에게 비난을 해대며 자신들의 몸집을 불리는 것이 좋은 예이다.


공포의 균형은 공포나 두려움을 통해서 쌍방 간에 균형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냉전시대 미소 양국이 보유한 핵무기들은 지구를 수십 번 파괴하고도 남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지녔다. 그래서 핵무기의 발사 버튼을 누르는 순간, 이쪽이든 저쪽이든 모두 괴멸된다. 그런 공포감이 역설적으로 '균형자' 역할을 하게 됐는데 이를 두고 공포의 균형이라고 칭했다. 안보상업주의는 문자 그대로 안보를 가지고 상품화 시켰다는 의미이다.

남한의 강경파와 북한의 강경파가 서로 윽박을 질러 자신들의 입지를 키우고, 휴전선을 기준으로 남한의 전력 70%, 북한의 전력 90%가 몰려 있고, 안보를 상품화하여 계속해서 송출하는 방송국들이 있으니 앞서 언급한 필자의 판단이 꼭 억지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필자는 그것들이 어지럽게 난무하지만 '종북몰이'에서는 진영을 갖춰 질서정연하게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공포의 균형 정도만 최신무기 획득이라는 방향으로 변주된다고 판단하고 있다. 최근 회자와 되고 있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제(THAAD)가 바로 그 예일 수 있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남태령 옛길 남태령 옛길을 알리는 표지판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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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령으로 개명한 여우고개


자자, 서설이 너무 길어졌다. 뚱딴지같이 여행기사에 냉전시대에나 통용되던 개념들을 끌어와 어지럽히지 말라는 독자들의 원성도 들리는 듯하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이 좋아 주말에 갈 봄 소풍 장소를 알아보려고 <오마이뉴스>에 접속했는데 '종북' 같은 신물 나는 단어를 여행면에서까지 볼 줄이야, 하고...

필자가 이번에 소개할 곳은 서울 남태령-우면산 구간이다. 남태령(南泰嶺)은 관악산과 우면산 중간에 위치한 고개로 해발은 183m에 달한다. 우리나라에 워낙 해발이 높은 고개들이 많아 183m의 높이면 명함도 못 내미는 게 맞지만, 한자어에서도 보이듯 이 고개는 당당히 '남쪽의 큰 고개'로 명명되어 있다.

처음에 이 곳은 여우고개, 혹은 여시고개로 불렸다. 한자어 명칭도 '여우호'자를 써서 호현(狐峴)이라고 쓰이기도 했다. 그만큼 이 지역에는 여우가 많이 출몰했다고 한다. 그 옛날 관악산과 우면산의 울창한 수풀은 여우들이 서식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제공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일대에서는 여우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우 굴들이 발견됐다. 그런 배경 때문인지 이곳에는 천 년 묵은 여우가 사람을 홀리고 다녔다는 '전설의 고향'도 전승된다.

 
▲ 과천루 남태령에 위치해 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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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곳은 왜 여우고개에서 남태령으로 개명을 하게 됐을까? 가장 유력한 설은 정조대왕 시대에 행했던 화산 능행차와 관련이 있다. 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경기도 양주에서 수원 화산으로 이장을 한 후, 정조대왕은 참배에 나서게 된다. 이를 '화산 능행차'라고 불렀다.

서울에서 수원으로 가기 위해서 꼭 넘어야 했던 이 고개의 이름을 정조대왕께서 물으셨다. 이때 과천현의 이방이 여우고개라는 이름 대신 남태령이란 명칭으로 대답을 했다고 한다. 상감께서 행차하는 고개가 '여우고개'라는 요망스러운 이름으로 불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그런 답변을 했다는 것이다.

여우고개가 토속적인 이름이기는 하지만 요망스러운 이름인지는 잘 모르겠다. 더불어 고개의 명칭이 한 사람에 의해 급작스럽게 변경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정조대왕 이전 시대부터 여우고개가 아닌 남태령으로 불렸다는 설도 있다.

한강 이남에는 정조대왕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혹시 남태령도 그에 편승된 것이 아닐까? 정조대왕과 관련된 스토리텔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남태령은 이미 보통 이상의 고개가 될 수 있으니까.

정조대왕이 남태령을 넘어서 다닌 기간은 5년 밖에 되지 않았다. 1794년 이후부터 능행차 노선이 시흥-안양 방면으로 변경됐기 때문이다. 남태령 길이 협소하다는 이유가 가장 컸지만 과천에 김상로와 그의 형 김약로의 묘가 있어 일부러 남태령-과천 코스를 버렸다고 한다. 김상로는 영의정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사도세자의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자이다.

 

 



 
▲ 벙커 벙커 입구를 막아 놓았다. 어떤 사람들은 저런 벙커나 참호에 쓰레기를 버리기도 한다. 심지어 용변을 보는 사람들도 있다. 몰상식한 사람들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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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생활 생각나게 하는 남태령 참호와 벙커


천년 묵은 여우가 사람을 홀리고(?), 정조대왕이 능행차를 하러 다녔던 남태령. 현재 남태령 곳곳에는 참호가 놓여 있다. 벙커도 있다. 서울 인근에서 이렇게 많은 참호와 벙커들이 정열되어 있는 곳도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안보(?)시설들을 가로질러 갈 수 있는 곳이 바로 남태령-우면산 코스다. 그 참호와 벙커들을 파고, 쌓기 위해 얼마나 많은 군인 아저씨들이 땀과 눈물을 흘렸을까! 그런 시설들을 무심히 지나치기는 했지만 필자도 군대 생활이 생각나서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군대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필자는 요즘에도 가끔 이등병 시절의 꿈을 꾼다. 군복을 벗고, 예비군도 끝난 지가 한참인데 아직까지도 그런 꿈을 꾸고 있다. 그런 꿈을 꾸고 난 뒤에는 항상 식은땀을 닦으며 이런 혼잣말을 하곤 했다.

"혹시 죽을 때까지 이등병 꿈을 꾸는 거 아니야?"

 
▲ 우면산 참호 서울시계인 우면산쪽의 참호는 저렇게 나무데크로 덮어 놓았다. 유사시에 나무데크는 열리고, 그 참호에 군인들이 배치된다. 나무데크가 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원히!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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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의 뒷산에 걸려 있는 지뢰표식


남태령의 많은 참호와 벙커들을 뒤로 하고 우면산으로 방향을 잡고 나아갔다. 소가 졸고 있다는 뜻의 우면산(牛眠山)은 해발 293m로, 이웃산인 관악산(620m)보다 훨씬 키가 작은 산이다. 해발이 높지 않은 산이라 그런지 관악산보다 오르기도 수월하고 코스도 짧다.

우면산은 '서울보다 더 서울'적인 강남의 뒷산이다. 그래서 전망대에 오르면 관악산에서 보는 광경과는 좀 차이가 있다. 관악산이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고시촌의 풍광을 품고 있다면 우면산은 타워팰리스 같은 초고층 주거시설을 보여준다.

 

 

 

* 우면산 벙커

 

 

 


대한민국에서 가장 먼저 욕망이 발현되는 곳이자 가장 먼저 앞서가는 곳의 뒷산이기에, 그 표식을 우면산에서 봤다는 것만으로도 필자의 발걸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강남과 그 표식이 우리사회의 냉혹한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언제든지 파괴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수 있다는 그 엄혹한 현실!

그럼 그 표식이 무엇이냐? 바로 '지뢰' 지대를 알리는 표식이었다. 우면산 정상부에는 군부대가 자리 잡고 있고 그 부대의 방어를 위해 1980년대 대인지뢰가 매설됐다. 이후 순차적으로 지뢰가 제거됐지만 그 중 일부가 수거가 안 돼 울타리를 쳐놓고 지뢰 표식을 걸어둔 것이다.

지난 2011년 7월, 우면산에 큰 물난리가 났다. 물난리로 큰 고초를 겪은 인근 주민들은 혹시나 있을지 모를 지뢰 유실까지 이중고에 시달렸다고 한다. 민통선 인근에서나 일어날 줄 알았던 지뢰 유실을 강남 주민들이 걱정했던 셈이다. 

 

 



 
▲ 지뢰밭에 토끼 토끼 한 마리가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곳이 지뢰밭인 줄도 모르고.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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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본 것처럼 남태령-우면산 코스는 '안보 트레킹'으로 손색이 없는 곳이다. 당장이라도 총을 든 군인들이 자리를 잡을 것 같은 참호와 벙커들, DMZ이나 민통선 인근에서나 볼 수 있는 '지뢰' 표식까지... 더군다나 트레킹을 마치고 강남에 가서 맛집 탐방도 할 수 있다.


그 참호와 벙커가 실전에서 작동되는 순간 한반도는 석기시대로 돌아갈지 모른다. 남북한이 모두 공멸할지 모른다. 그러니 그 시설물들은 계속 '안보 트레킹'으로만 쓰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영원히!

 


 
▲ 남태령-우면산 트레킹 남태령-우면산 트레킹 코스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아 호젓하게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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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태령-우면산: 이 코스는 산악자선거를 타는 사람들도 많다.

 

 

 

 

 

◆ 도움말

1. 코스:  선바위 미술관 ▶ 삼거리 ▶ 남태령 ▶ 군부대 ▶ 약수터 ▶ 예술의 전당
2. 이동거리: 약 7km / 이동시간: 약 3시간 (쉬는 시간 포함)
3. 교통편: 시작점 - 지하철 4호선 선바위역  / 종료점 - 3호선 남부터미널역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 소셜다이닝 <집밥>에 올린 삼성산 역사트레킹에 대한 공지글입니다.

공지에 나온대로 6월 14일에 계곡트레킹을 하러 갑니다! 잼나게~ㅋ

 

 

 

 

관악산( 삼성산) 숲길 트레킹? 혹은 계곡트레킹___ 삼성산 역사트레킹!



 

* 더운데 웬 트레킹이냐고요? 때양볕에서 걷다 일사병 날 수도 있다고요?

ㅋㅋㅋ

하지만 숲길이나 계곡길을 걸으면 여름에도 트레킹을 할 수 있답니다.

숲길에서는 일사병이 일어나지 않거든요. 


그렇습니다. 이번 삼성산 역사트레킹은 삼막계곡이라는 숲길을 따라 이동합니다.

그래서 한 여름에도 트레킹을 할 수 있답니다. 


삼성산 역사트레킹은 지난 5월 10일에 이미 한 번 실시를 했었답니다. 

그때 반응이 좋아서 한 번 더 해보려합니다. 사실 이 삼성산역사트레킹을 끝으로

상반기 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됩니다. 날씨가 너무 덥거든요. 올 가을에나 다시 재가동

될 거 같습니다. 



중간 중간에 사진 촬영이 있습니다. 이 점 양지해 주세요. 사진 촬영이 별로인 분들은
스키마스크 착용을 추천 드립니다!~ㅋ 



아래는 지난 5월 10일 모임에 사용했던 초대장인데 재활용(?) 해 봅니다!


***


혹시 그거 아세요? 서울 인근에 불국사보다도 더 오래된 사찰이 있는 거?

그 절이 어디냐고요? 바로 삼막사라는 사찰입니다. 

원효, 의상, 윤필의 세 성인께서 창건을 했다해서 삼막사라는 명칭이 붙여졌답니다.


한편 삼막사가 있는 산의 이름은 삼성산인데 그 세 분이 이 곳에서 수도를 했다해서

삼성산이라 불립니다. 사실 삼성산은 관악산의 지산입니다. 바로 옆동네 산이라는 뜻입니다.

통칭으로는 그냥 다 관악산으로 불리지요. 


이렇게 유서가 깊은 곳이라 그런지, 이 삼막사는 진관사, 불암사, 승가사 등과 

함께 서울의 4대 명찰로 불리는 곳입니다. 


이 곳에 올라서면 약간 강원도 산골짜기 분위기가 풍겨집니다. 또 산 정상 부근에 자리잡은 

사찰의 모습도 정감 있어 보입니다.    


아참 이번 트레킹에서는 만안교 탐방도 합니다. 만안교는 정조대왕 시절에 건립된 돌다리인데, 지금도

그 동네사람들은 만안교를 지나다닙니다. 박물관에 있는 다리가 아니라 지금도 실제로 동네 사람들이

애용하는 다리가 바로 만안교랍니다. 


한가지 더: 조선 후기시대에 제작된 다리도 직접 걸어보고, 삼막사를 

탐방을 하니, 이번 역사트레킹의 명칭이 <삼성산 역사트레킹>이 되었답니다.



일시: 2014년 6월  14일 토요일 오후 1시


집결장소
:  지하철 1호선 관악역 1번 출구

이동경로:  관악역 ▶만안교  경인교대 입구 삼막사 계곡  삼막사  ▶ 염불암 ▶ 안양예술공원 

이동거리: 약 8km / 약 4시간 30분 정도 소요 예상(쉬는 시간 포함)

 

난이도: 중 ---> 계곡트레킹입니다. 체력이 필요합니다만 그래도 지난번 참가자 분들도 무리 없이 다 완주를 했답니다. 


준비물: 여분의 옷, 배낭(백팩), 트레킹화(등산화) ---> 운동화를 신어도 상관없으나 가급적 트레킹화나

등산화를 준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주의점: 장시간 트레킹을 하는 것이니 가급적 편한 복장을 해주세요. 
출발 즈음에 가볍게 스트래칭을 할 예정입니다. 아웃도어를 하기 전에는 꼭 스트래칭을!!!


참고사항:  당일날 햇살이 강할지 모르니 모자나 썬크림 등을 준비해주세요. 해가 떨어지면 추워집니다.

여분의 옷도 준비해주세요!

 


비용: 비용은 8천원입니다. ---> 식수, 간식, 리딩비 , 집밥 수수료 포함입니다.  

 

 

 

 

 

 

 

 

 

 

 

 

 

 

 

 

 

 

 

 

정조대왕을 생각하며 행했던 역사트레킹

 

집밥 식구들과 함께 한 삼성산 역사트레킹

14.05.15 19:15     최종 업데이트 14.05.15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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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안교 1795년, 정조 19년에 축조된 만안교. 건립된지 200년도 더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튼튼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돌다리를 씩씩하게 걷고 있는 삼성산 역사트레킹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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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질문 두 가지! 서울 인근에 경주 불국사보다 더 오래된 연혁을 가진 사찰이 있다면? 또 그 사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정조대왕 시대에 축조한 돌다리가 있다면?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분들은 분명 이런 물음에 흥미를 느끼실 것이다.


불국사보다 더 오래됐다는 사찰은 삼성산에 있는 삼막사라는 사찰이고, 정조대왕 시대에 축조된 다리는 만안교라는 석교(石橋)다. 이 두 장소는 하나의 선으로 연결하여 이동할 수 있고, 또한 편리하게 수도권 전철을 타고 탐방할 수 있다. 필자는 그런 만안교와 삼막사를 묶어, 일명 '삼성산 역사트레킹'을 진행하였다.

지난 10일, 날씨는 조금만 움직여도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정도로 햇볕이 강렬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5월 날씨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때 이른 더위였다. 필자 단독으로 행하는 트레킹이면 땡볕이든 폭풍우든 상관이 없지만, 단체트레킹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번 삼성산 역사트레킹은 소셜다이닝 '집밥'에서 사람들을 모아, 함께 트레킹에 나섰기 때문이다.

'트레킹이나 등산하고는 담 쌓은 사람들도 올지 모르는데... 그러다 낙오자라도 생기면... 이거 잘못하면 욕만 바가지로 먹는 거 아냐?'

 

 

화산 능행차와 만안교(萬安橋)


삼성산 역사트레킹은 경기도 안양시에 있는 관악역 1번 출구에서부터 시작된다. 1번 출구에서 나와 안양역 방면으로 약 500미터 정도를 걸어가면 만안교를 만날 수 있다.

1795년 축조된 만안교는 정조대왕의 화산 능행차를 위해 만들어졌다. 효심이 깊었던 정조는 1789년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경기도 양주 영우원에서 수원 화산의 현륭원으로 이장을 한다. 그리고는 자주 참배에 나섰는데 이를 두고 '화산 능행차'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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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안교 사진에서 보듯 만안교는 인근 주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하는 생활속의 다리다. 박물관에 있는 잘 모셔진(?) 다리가 아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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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능행차는 도성에서 동작나루를 거쳐 남태령을 넘는 길이었지만 이후 시흥과 안양을 거치는 길로 변경된다. 남태령 길이 협소하다는 지형적인 한계가 가장 큰 이유였지만 다른 사정도 있었다. 과천 행차로에는 김상로와 그의 형 김약로의 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상로는 사도세자 처벌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해원하기 위해 떠나는 능행차 길에 사도세자의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김상로 형제의 묘소를 지나는 것이 탐탁지 않았음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1794년 이후부터는 능행차 노선이 시흥과 안양 방면으로 변경된 것이다.

당시 왕의 행차 길에는 임시로 나무다리 등을 가설한 후, 행차가 끝난 뒤에는 철거 하는 방식이 반복됐다. 이에 정조는 그런 번거로움을 피하고, 인근 주민들이 평상시에도 안전하고 편리하게 하천을 넘을 수 있게 튼튼한 돌다리(石橋)를 건설하라고 왕명을 내린다.

석교의 축조에는 경기관찰사, 병마수군절도사, 수원·개성·강화 유수까지 동원될 정도로 큰 공사였지만 공사 기간은 3개월 정도였다. 그렇게 왕명으로 지어진 돌다리는 길이가 31.2m, 넓이가 8m에 달하는 큰 규모를 자랑하게 된다. 왕의 뜻대로 인근 백성들도 안심하고 하천을 건널 수 있는 튼튼한 돌다리가 놓이게 된 것이다. 이 다리를 두고 정조대왕은 만년동안 사람들이 편안하게 다리를 건널 수 있게 한다는 의미로 만안교(萬安橋)라는 이름을 직접 작명하였다.

 

 


백성들을 위해 튼튼한 돌다리를 축조한 정조대왕

한편, 원래 만안교는 지금의 자리보다 남쪽으로 200m 지점인 삼성천 위에 축조됐지만 1980년 국도 확장 공사시에 지금의 삼막천 위로 옮겨지게 됐다. 이 다리가 놓여 있는 안양시 만안구의 명칭은 만안교에서 유래된 것이다.

만안교는 무지개교라 불리는 홍예교다. 조선 후기에 축조된 홍예교 중에서 가장 큰 다리로 모두 7개의 아치가 놓여 있다. 판석과 장대석을 서로 맞물려 축조했는데 그 기법이 매우 정교하여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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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안교 밑줄친 부분은 현재의 만안교의 위치고, 동그라미 부분이 옛 만안교의 위치다. 애초 만안교는 세로로 놓였지만 현재의 위치로 이전할 때는 90도로 각도를 틀어 가로로 놓이게 됐다. 네이버 지도 사진 활용.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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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처음 만안교를 탐방했을 때 좀 색다른 느낌을 받았다. 4대문 밖, 그것도 한강 이남에 이렇게 정교하고 거대한 아치형 석교를 볼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 돌다리는 박물관에 갇혀 있는 죽은(?) 다리가 아니라 지금도 인근 주민들이 건너다니는 살아있는 '생활' 다리였다는 점이다.


이제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진두지휘하는 화산 능행차를 볼 수 없고, 다리 주위로는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섰지만 정조대왕의 바람은 계속 이어지는 듯싶다. 인근 백성들이 '만년동안 편안하게' 다리를 건널 수 있게 하는, 그런 애민 정신 말이다.

돌다리를 넘으면서 필자는 한마디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정조대왕 시대에 만들어진 역사적인 다리를 걷고 있습니다. 200년이란 시간이 흘렀어도 아직까지 튼튼한 돌다리를 넘고 있는 거죠."

역사트레킹팀은 정조대왕의 애민 정신을 곱씹으며 튼튼한 돌다리를 씩씩하게 걸어 다음 코스인 삼막사 계곡으로 향했다.


* 삼막사: 삼막사는 삼성산의 능선 부근에 자리잡고 있어, 날씨가 좋을 때는 인천 시가지는 물론 멀리 서해바다까지 보일 정도다.

 

 

 

 

 


 

* 만안교: 1795년, 정조 19년에 축조된 만안교. 건립된지 200년도 더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튼튼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돌다리를 씩씩하게 걷고 있는 삼성산 역사트레킹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 만안교: 사진에서 보듯 만안교는 인근 주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하는 생활속의 다리다. 박물관에 있는 잘 모셔진(?) 다리가 아니다.

 

 

 

 

 

* 만안교: 밑줄친 부분은 현재의 만안교의 위치고, 동그라미 부분이 옛 만안교의 위치다. 애초 만안교는 세로로 놓였지만

현재의 위치로 이전할 때는 90도로 각도를 틀어 가로로 놓이게 됐다.

 

 

 

 

 

*삼막계곡: 밖에는 햇살이 강했지만 계곡 안쪽 숲길은 나무그늘이 져서 트레킹 하기에 적당했다.

 

 

 


 

* 바위구릉: 삼막사 위쪽에 가면 바위구릉이 있는데 그 곳에서 바라본 관악산 연주대 방면.

관악산이 돌산이라는 사실을 이 바위구릉에 올라서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 삼막사: 삼막사의 명왕전. 1880년, 고종 17년에 건립되었다.

 

 

 


* 삼막사 돌부적: 지운영이 그린 돌부적. 지운영은 종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의 형으로, 추사 김정희의 제자였는데 그림과 글씨에 능했다고 한다.

 지운영은 한 때 삼막사의 한 암자에서 은거하며 수도를 했다.

 


 

* 삼막사 3층 석탑과 거북모양 감로정석조: 3층 석탑은 고려시대 중엽 양식이다. 승려 김윤휴가 몽고 살리타를 화살로 쓰러뜨린

기념으로 제작된 탑이라 전해진다. 거북모양 감로정석조(甘露井石漕)는 조선 정조 시대 인물인 김창영의 탄생전설과 관련이 있다.

 

 

 

 


 

* 삼막계곡: 삼막계곡에는 누군가가 쌓아놓은 돌탑들이 많이 산재해 있다. 과연 저 돌탑들이 한여름 비에도 잘 견뎌낼 수 있을까?

 

 

 

 


 

* 삼막사: 산 정상 능선 부근에 자리잡고 있는 삼막사는 무언지 모를 포근함을 전해준다.

 

 

 

 


 

* 삼막사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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