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걷는 역사트레킹 3편>

 

 

역사트레킹을 행하다보면 필연이든 우연이든 역사적 라이벌과 관련된 테마를 언급하게 된다. <인왕산 역사트레킹>에서 다룬 무학대사와 정도전, 즉 불교세력 VS 유교세력 간의 라이벌 대결이 좋은 예이다. 인물이 아닌 자연지형물 간의 대결도 있다. <낙산 역사트레킹>에서 서울의 좌청룡(낙산)과 우백호(인왕산) 간의 대결이 바로 그것이다.

 

이번에 소개할 정릉 역사트레킹도 라이벌과 관련이 있다. 누구와 누구 간의 라이벌일까?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 씨의 무덤이다. 일단 한 명은 나왔다. 그럼 나머지 한 사람은 누구? 자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 정릉: 필자가 탐방했을 때는 비가 많이 온 다음이어서 그랬는지 봉분에 방수포를 덮었었다. 보시다시피 정릉은 다른 왕릉에 비해 무척 단출하다. 뺄셈을 당한 것이다.

 

 

 

 

 

 

● 이성계의 총애를 받은 신덕왕후

 

트레킹 팀이 첫 번째로 탐방한 곳은 정릉(貞陵)이었다. 정릉은 신덕왕후 강 씨의 무덤이다. 황해도 곡산 출신인 신덕왕후는 이성계의 둘째 부인으로 이성계의 총애를 받게 된다. 1392년, 조선이 개국했을 때 태조의 옆에 서 있던 사람도 신덕왕후였다.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 씨가 그 전 해에, 조선의 개창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결국 강 씨는 현비로 봉해져 조선의 첫 번째 왕비에 오르게 된다.

 

조선왕조가 개창될 때 이성계의 나이는 58세였다. 그래서 즉위하자마자 세자 책봉에 나서야했다. 현비였던 신덕왕후로서는 자신이 생산한 왕자를 세자의 자리에 앉히고 싶어 했다. 이성계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던 그녀였기에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했으리라. 하지만 쟁쟁하게 버티고 있던 신의왕후 한 씨의 소생들이 문제였다. 방과(정종), 방원(태종) 등등... 신의왕후의 소생들은 조선 창업에 큰 공을 세운 이들이었다. 호락호락한 인물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신덕왕후는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정도전과 손을 잡게 된다. 정도전 입장에서도 이미 다 장성한데다 자기 주관이 뚜렷한 신의왕후 자제들보다는 아직 나이가 어린 강 씨의 소생이 세자가 되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 재상중심의 왕도정치를 주창한 정도전이었으니까.

 

결국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었던 방석(의안대군)이 1392년 8월 20일에 세자로 책봉된다. 그해 7월 17일에 조선이 개국했으니 약 한 달 만에 세자가 책봉이 된 것이다. 이에 이방원(정안대군)은 격분한다.

 

“정릉은 조선왕조가 개국한 후 처음으로 능으로 조성되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왕릉들에 비해서는 좀 허술해 보이지 않나요? 봉분을 둘러싼 봉분석(병풍석)도 없고요.”

 

그 말대로 정릉은 능의 격식에 맞지 않게 무언가가 빠져있다. 여백의 미학이 아닌 인위적으로 뺄셈을 당한 것이다. 그렇게 뺄셈을 한 사람은 바로 태종 이방원이었다.

 

신덕왕후는 자신의 소생이 왕위에 등극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396년(태조5)에 눈을 감고 만다. 자신이 너무나 사랑했던 신덕왕후가 죽자 이성계는 지금의 서울 중구 정동, 현재의 영국대사관 자리에 능을 조성했다. 또한 흥천사라는 사찰을 지어 그녀의 명목을 빌었다. 이 흥천사를 두고 원찰(願刹)이라고 부르는데, 원찰은 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어진 사찰을 뜻한다. 정조대왕과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융건릉 인근에 있는 용주사도 원찰이다.

 

 

 

 

 

 

 

* 정릉: 봉분에서 정자각 및 부속건물들을 내려본 모습.

 

 

 

 

 

 

 

● 뺄셈을 당한 정릉

 

1398년 8월, 이방원이 주도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무인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불리는 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정도전은 목숨을 잃게 된다. 세자였던 이방석도 목숨을 잃게 된다.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도성 안에 무덤이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1409년(태종9)에 정릉을 지금의 위치인 성북동으로 이전시킨다. 본격적인 뺄셈이 시작된 것이다. 그 다음해에는 정릉의 봉분을 두르고 있던 석각신장 같은 석물들을 광통교 건설에 쓰게 했다. 광통교는 청계천에 있는 다리다.

 

능에서 가져온 귀한 석재들로 돌다리를 만드는 만큼 그것들을 제대로 이용했으면 좋았으련만 이방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부러 신장석을 뒤집어 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광통교 하단을 보면 몇몇 신장석들은 머리가 바닥을 향해 있다. 이방원은 철저하게 신덕왕후를 짓밟았던 것이다.

 

“여기 이거 물구나무 선 거 같지 않나요?”

“진짜 그러네요.”

“청계천 복원할 때 뒤집어서 복원한 게 아니고, 광통교가 처음으로 만들어졌을 때부터 이렇게 물구나무를 세웠습니다. 광통교는 1410년, 태종 때 만들어졌지요. 이렇게 거꾸로 놓이게 된 건 제작자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됐다는 뜻이겠죠.”

“굳이 이렇게까지...”

“그나저나 이것들은 거의 600년 이상을 이렇게 거꾸로 세상을 보고 있었겠네요.”

 

이 대화들은 청계천 광통교를 탐방했을 때 이루어졌다. 이런 스토리텔링이 있기 때문에 정릉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광통교도 함께 탐방할 것을 추천한다.

 

신덕왕후의 능을 탐방한 후에는 정릉 숲길을 따라 걷는다. 정릉 자체보다 정릉 숲길이 더 좋다고 할 정도로 숲길이 참 빼어나다. 30분 정도 걸리는 코스가 있고 1시간 정도 걸리는 코스가 있는데 둘 다 좋다. 트레킹팀은 일부러 긴 코스를 걸었다.

 

이제 트레킹팀은 흥천사(興天寺)로 향한다. 정릉에서 나와 위쪽 주택가로 길을 잡으면 흥천사 표지판이 나온다. 왕릉의 정문을 통해 나오니 바로 주택가가 나오는 것도 정릉의 특징이다. 큰 주차장이 자리를 잡고 있는 동구릉이나 서오릉 같은 곳과는 차이가 확연하다. 숲길을 좋아하는 주민들은 아예 정릉 숲길에서 산책을 할 정도다. 정릉이 속해있는 성북구 주민들에게는 50% 할인이 적용된다. 성인 입장료가 1천 원이니 할인을 받으면, 500원으로 매일같이 정릉 숲길을 걷는 것이다. 무척 부럽더라.

 

 

 

 

 

 

 

* 석각신장: 청계천 광통교 교각 부분에 있는 석각신장. 머리 부분이 아래를 향하고 있다. 정릉의 봉분을 두루고 있던 병풍석이었는데 이렇게 엉뚱한 곳에서 이상한 자세로 세워져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정릉의 봉분이 단출할 수밖에...

 

 

 

 

 

 

● 정릉의 원찰 흥천사

 

흥천사는 정릉의 원찰이다. 신덕왕후에 대한 그리움이 지극했던 태조 이성계였기에 원찰을 크게 짓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흥천사는 1397년에 170여 칸의 대가람으로 탄생했고, 창건과 동시에 조계종의 본산이 된다. 1년 후에는 부처님 사리를 모신 사리각(舍利閣)도 만들어진다.

 

하지만 흥천사도 정릉처럼 우여곡절이 많았다. 흥천사는 정릉처럼 중구 정동에 세워졌다. 정릉이 현재의 자리인, 성북구로 옮겨진 후로도 계속 그 자리를 지키게 된다. 이때에는 원찰이 아닌 왕실의 비호를 받게 되는 왕실 사찰이 된다. 하지만 성종 이후에는 쇠락해졌고 1504년(연산군10)에는 큰 화재가 나서 사리각을 제외한 건물 전체가 불에 타는 아픔을 겪는다.

 

그러다 1510년(중종5)에는 남아있던 사리각까지 불타 없어진다. 이렇게 사찰이 쇠락하니 그 안에 있던 기물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그중 대표적인 게 보물 1460호로 지정된 흥천사 동종이다. 이 동종은 현재 덕수궁에 전시되어 있다. 범종이 사찰이 아닌 궁궐에 있는 것이다.

 

흥천사는 1569년(선조2)에는 왕명에 의해 정동 생활을 마감하고 ‘함취정’이라는 정자터에 다시 세워진다. 이때는 이름을 바꿔 신흥사(新興寺)로 불렸다. 그러다 1669년(현종10)에 신덕왕후가 복권됐고, 1794년(정조18)에 지금의 자리인 성북구 돈암동으로 이전하여 중창된다.

 

신흥사에서 흥천사로 제 이름을 다시 찾게 된 건 1865년(고종2) 때였다. 흥선대원군은 대방을 짓고, 그 대방의 현판을 쓰는 등 흥천사의 중창에 큰 역할을 한다.

 

어렵지 않은가? 연도도 많이 나오고, 여기 갔다 저기 갔다. 솔직히 정릉골 역사트레킹을 하면서 참 많이 애를 먹었다. 위에 저 내용을 트레킹팀 앞에서 해설을 했다고 생각해보시라! 가뜩이나 머리도 안 좋은데... 그래서 정리를 해본다.

 

1. 1397년 정릉과 흥천사 만들어짐

2. 1409년 정릉, 성북동으로 천장됨

3. 1569년 흥천사가 신흥사로 이름을 바꿔 옛 함취정 자리에 들어섬

4. 1669년 신덕왕후 복권됨

5. 1794년 신흥사가 지금의 자리로 이전, 중창됨

6. 1865년 흥선대원군이 중창을 하고, 흥천사로 이름을 다시 고침

 

흥천사는 사찰 탐방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꼭 한 번 방문해 볼만한 곳이다. 본당인 극락전을 비롯해 대방, 명부전 등의 가람들이 조선 후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 흥천사 대방의 겨울

 

 

 

 

 

 

 

● 이름값 하는 산사 가는 길

 

이제 트레킹팀은 북악스카이웨이의 동쪽편을 따라 걷는다. 차로로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북악하늘길을 걷는 것이다. 계속 북악하늘길을 따라 걷다 북악골프연습장이 나오면 숲길로 들어선다. 이 숲길은 ‘산사 가는 길’이라는 도보여행길이다. 북악산 북쪽편에는 작은 사찰들이 많은데 그 사찰들을 연결한 길이다. 북악하늘길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차가 다니는 길이라 산사 가는 길보다 못하다. 산사 가는 길은 진짜 이름값을 한다. 직접 걸어보시길 권한다.

 

역사의 라이벌은 참 많이도 있었다. 싸움 구경이 재미나듯이, 역사가들에 의해 싸움 붙여진 라이벌들도 많을 것이다. 라이벌은 선의의 경쟁관계로 있어야 서로에게 이득이 될 것이다. 상대방을 찍어 누르려는 라이벌은 비극만을 초래할 뿐이다. 특히 권력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는 더 그렇다. 도대체 권력이 무엇이기에!

 

 

 

 

 

 

 

* 흥천사의 본당 극락전

 

 

 

 

 

 

 

 

* 정릉 숲길

 

 

 

 

 

 


 

 

 

 

■ 정릉골 역사트레킹

 

1. 코스: 정릉 ▶ 흥천사 ▶ 북악하늘길 ▶ 산사가는길 ▶ 전망대

2. 이동거리: 약 7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휴식시간 포함)

4. IN: 경전철 우이신설선 정릉역 2번 출구 / OUT: 국민대 ☞ 국민대에서 버스편을 이용하여 다시 정릉역으로 이동할 수 있다.

 

 

 

 

 

* 태릉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지난 3월 21일 목요일


3월 14일부터 영등포 50플러스센터에서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강의를 진행합니다. 어라,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은 어디다 팔아 먹고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이 된 거죠? ^^;

이번 강의는 인문학을 강조해야 한다는 영등포50 측의 요청으로 네이밍을 저렇게 했답니다. 뭐 이름만 살짝 바꿨지 별다를 건 없습니다. 한마디로 오십보 백보, 거기서 거기라는 것이죠...ㅋ

경국사에서 시작하는 정릉골 역사트레킹은 조금 난이도가 있는 코스입니다. 계단도 많고, 고바위도 있고요. 이날 오신 분들은 좀 고생을 하셨을 겁니다.ㅋㅋㅋ 

하지만 그렇게 고생을 한 보람은 분명히 있을 겁니다. 왜냐? 시원한 풍광이 트레킹팀을 맞이했으니까요. 트레킹팀은 정릉골 역사트레킹의 메인 포인트인 인디언 바위에 올랐는데요, 이곳이 정말 바람의 언덕이더군요. 시원한 바람이 트레킹팀의 얼굴을 스쳐가는데... 그 뒤로, 아니 360도로 펼쳐져 있는 풍광이 정말 멋졌습니다. 

이 인디언 바위는 삼각산(북한산)에서 내려온 맥이 경복궁 뒤편의 백악산(북악산)으로 연결되는 구준봉에 자리잡고 있는 곳입니다. 삼각산 보현봉에서 내려온 맥은 구준봉을 거쳐 백악산으로 뻗어나갑니다. 한마디로 삼각산과 백악산으로 연결하는 아주 중요한 맥을 트레킹팀이 탐방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수강생분들에게 제 목을 탁 치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곳은 서울 풍수에서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목뒷덜미 같은 곳이니까요. 여기는 직접 눈으로 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어요."

수강생분들도 내심 제 말에 동의를 해주시는 거 같더군요. 내친김에 저는 말을 더 보탰습니다.

"제가 이 땅 살까요? 여기 사면 서울을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데..."

그런데 바람소리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는데 희미하게 이런 소리가 들리더군요.  

"살 돈은 있수? 점심 값도 없어보이는디..."





























  











추석 연휴 잘 보내고 계신가요? 

저는 연휴를 맞이하여 열심히 답사를 다니고 있답니다. 놀면 뭐합니까! ^^;
요즘에는 북한산의 남쪽면을 집중적으로 답사하고 있답니다. 정확히는 성북구 정릉 일대이지요. 

이쪽 부근은 최근에 개통된 우이신설 경전철 덕분에 접근성이 무척 좋아졌답니다. 우리 같이 트레킹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희소식이지요.

그렇게 요즘 정릉 일대를 탐방하고 다녔답니다. 박경리 선생의 사진도 답사를 다니면서 찍은 사진이지요.

박경리 선생이 통영에서 서울로 왔을 때 북한산과 가까운 곳으로 이주를 하셨답니다. 소위 문화주택이라는 곳에 보금자리를 트셨는데 그곳이 정릉천 부근이었던 것이죠. 아래 사진처럼 정릉천을 쭈~욱 타고 가다가 살짝 골목으로 빠지면 박경리 선생이 사셨던 집이 나옵니다. 

하지만 사진에서 보듯 선생과 관련된 표식이 아무것도 없답니다. 수성동 계곡 아래 윤동주 선생 하숙집은 안내판이라도 걸려 있는데... 이곳은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누가 알려주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딱 좋을 정도입니다. 

박경리 선생은 저 집에서 <토지>를 쓰기 시작하셨답니다. 물론 이후에는 원주에 가셔서 계속 집필을 하셨지만요. 그렇게 정릉골은 이야기거리도 많고, 볼거리도 많은 곳입니다. 그래서 그 곳에 트레킹 코스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정릉골 역사트레킹! 

사실 이 코스를 메이킹 할 때는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답니다. 하지만 걸을 때마다 이런 말이 제 입에서 내뱉어집니다.

대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