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빌라성: 둥그런 타워가 도열하듯 서 있다. 푸른하늘과 흰구름, 그리고 제비들이 서로 어우러진 모습이다.

 

 

 

<재미난 스페인 14편> 아빌라성과 한양도성

성곽이 이렇게 예쁠 수가 있어?

한참 성곽 답사를 다닌 적이 있었다. 일단 집과 가까운 한양도성을 주로 탐방하며 ‘답사 근육’을 길렀다. 서울 안쪽에 있는 4개의 산을 둘러 만든 한양도성은 그 길이가 무려 18.6km에 달한다. 그 4개의 산은 북쪽 북악산, 서쪽 인왕산, 남쪽 남산, 동쪽 낙산이다. 낙산은 처음 들어보시는가? 일품 야경을 자랑하는 낙산공원이 있는 곳이 바로 낙산이다. 모두 다 산책하기에 좋은 산들이라 필자가 행하는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프로그램의 에이스 역할을 해주고 있다.

한양도성 트레킹이 종료가 되면 다음으로는 북한산성, 아차산성, 탕춘대성, 호암산성 같은 서울에 소재한 산성들을 탐방했었다. 이렇듯 서울의 성들을 탐방하면서 종종 이런 대화들을 했었다.

“서울에도 성이 꽤 많네요.”

“그렇죠. 우리나라로 넓혀보면 더 많아요. 무려 이천 개나 됩니다.”

“네? 이천 개요?”

“그래서 우리나라를 성의 나라라고도 부를 수 있답니다.”

이 대목에서 수강생분들은 한결같이 놀라는 표정을 지으신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성들이 많이 축조된 건 역사적으로 전란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페인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성(城)이 많은 곳이다. 특히 중앙에 자리 잡은 카스티야(Castilla)는 명칭 자체가 ‘성’을 뜻하는 카스티요(castillo)에서 나온 것이다. 11세기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였던 부르고스(Burgos)도 이름 자체가 ‘성’이다. 카스티야 지역은 광활하게 펼쳐진 메세타 평원에 자리잡고 있다.

 

 

 

* 아빌라: 아빌라 외곽 지역을 바라본 모습. 아빌라는 스페인 중부지역에 있다.

 

 

 

지리적으로 방어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래서 곳곳에 성을 쌓아 방어력을 높이려 했다. 더군다나 카스티야가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에서 선봉장 역할을 했던 터라 더더욱 많은 수의 성을 축조할 수밖에 없었다.

마드리드에서 약 1시간 30분 정도 기차를 타고 아빌라(Ávila)로 이동했다. 아빌라는 마드리드에서 약 110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그곳에 아빌라성(Walls of Ávila)이 있다. 아빌라성은 중세시대에 축조되어 구도심을 감싸고 있는데 그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다. 그래서 198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우리나라 성들도 그렇지만 스페인의 성들도 훼손되어 방치된 곳들이 많다. 도심지의 확장이라는 불가피한 상황에 직면하면 성체부터 훼손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스페인의 성들은 사방이 뚫려있는 평지성들이 대부분이라 도시가 확장하려면 필연적으로 성곽을 깨고 나가야 한다. 하지만 아빌라성은 지금도 성문을 닫고 농성전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채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사실 아빌라는 두 번째 방문이었다. 처음 방문했을 때는 어떻게 성채가 축조됐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서양의 성들은 주로 협축법으로 성채를 쌓는데 아빌라성도 협축법으로 제작되었다. 직접 올라가서 좁은 성곽길을 걸어보았다. 성곽길을 걷는데 돈을 받네! 우리 한양도성은 공짜인데!

아빌라 성처럼 평지에 만들어진 성은 협축법(夾築法)으로 축조된다. 협축법은 성벽을 큰 담장처럼 높게 쌓아 성 안팎을 확연하게 구분한다. 높은 담장처럼 쌓다 보니 위에서 내려다보면 성곽길은 좁을 수밖에 없다. 외형상 성 안쪽도 낭떠러지, 성 바깥쪽도 낭떠러지처럼 보인다. 주로 평지에 만들어진 유럽의 도시성벽들이 협축법으로 만들어졌는데 중국의 만리장성과 충북 보은에 있는 삼년산성도 협축법으로 제작되었다.

 

 

 

*아빌라성: 협축법으로 만들어졌다.

 

 

 

 

이와 달리 한양도성은 편축법(片築法)으로 축성되었다. 편축법은 한쪽만 성체를 쌓은 것을 말하는데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의 지형 조건에 부합되는 축성 방식이다. 협축법으로 쌓인 성들이 안쪽과 바깥쪽 모두 다 낭떠러지라면 편축법은 바깥쪽만 낭떠러지다. 한쪽만 쌓으니 돈도 덜 들고, 공기도 단축된다. 얼마나 좋은가.

또한 편축법은 지형과 합치되는 방식이기에 성체가 자연의 일부로 녹아든 형상을 보인다. 편축법은 산자락을 이용하여 축조되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지 주로 산성의 형태로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남한산성, 북한산성이 그 예이다.

아빌라성 안쪽으로는 구도심이 자리 잡고 있다. 시간도 늦고 해서 아예 1박을 하기로 했다. 성북동 성곽마을을 탐방했을 때 ‘성곽을 벗삼아 하룻밤을 보내면 참 좋겠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장소는 달라졌지만 어쨌든 성곽마을에서 잠을 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잠이 들 무렵 빗소리가 들렸다.

스페인 중부지방의 하늘이 청명하게 드러났다. 성곽 트레킹을 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아빌라성은 한순간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처음 축조됐을 때는 1090년이었고, 12세기경에 방어에 적합한 성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로도 계속 성을 쌓았는데 그 시기가 14세기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 아빌라성: 성곽의 형태를 나타낸 조형물

 

 

아빌라성은 길쭉한 사각형처럼 생겼는데 총 길이가 약 2,500m에 달한다. 특이하게도 아빌라 대성당이 성곽 외벽 한쪽에 자리 잡고 있다. 한마디로 대성당의 외벽이 아빌라성의 성채 일부를 담당하고 있다는 뜻이다. 성 안의 넓이는 약 9만 3천 평 정도 된다. 문은 9개가 있는데 이들 중 성 빈센트 문(Puerta de San Vicente)과 알카사르 문(Puerta del Alcazar)이 확연히 눈에 띈다. 이들 문 양 옆에는 측면 타워가 나란히 붙어 있어 문의 격조을 높여주고 있다. 그 쌍둥이 측면 타워는 높이가 무려 20m에 달한다.

88개에 달하는 반원형 타워도 연이어 늘어서 있다. 누렁이가 코를 내밀 듯, 둥그스름한 타워의 모습에서 입체감이 느껴졌다. 선을 긋듯 성채가 일직선으로만 세워졌다면 교도소 담장과 다를 바 없이 밋밋했을 것이다. 그렇게 타워의 볼륨감이 아빌라성을 돋보이게 해주고 있었다. 더군다나 한양도성에서는 연이어 늘어선 타워를 볼 수 없기에 더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성벽의 높이는 평균 12m 정도인데 6~7m 사이인 한양도성에 비하면 훨씬 더 높은 셈이다. 12m 높이의 성벽을 어떻게 오른단 말인가! 더군다나 필자처럼 똥배가 나온 사람은...

 

 

 

* 아빌라성: 성 안쪽에서 바라본 모습. 협축법으로 지어져서 성곽길 양 옆은 낭떨어지가 된다.

 

 

 

 

아빌라성과 한양도성을 계속 묶어서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다. 둘 다 시티월(city wall)이기 때문이다. 시티월은 도시성벽이라고 불리는데 왕족이나 귀족들이 거주하는 캐슬(castle), 요새로 불리는 포트레스(fortress), 성채라 불리는 시타델(citadel)과는 좀 다른 개념이다. 성벽 안과 밖을 엄격하게 구분하기 위해 만들었기에 캐슬이나 포트레스, 시타델보다는 크기가 더 크다. 도시를 둘러싸는 만큼 기본적으로 사각형 형태를 띤다. 물론 지형을 따라 만드니 형태가 싹뚝 떨어지지는 않는다.

참고로 시타델은 ‘작은 도시’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육각형의 별모양으로 축성된다. 시티월이 성벽을 한 겹으로 두른 형태라면 시타델은 겹겹이 쌓아 올린 겹성 형태다. 그래서 방어력이 훨씬 더 증강되었다. 시타델 안에 마을을 짓기도 하지만 주로 도시 외곽이나 혹은 도시와 별도로 세운다. 시티월의 방어력이 부족하다면 별도의 시타델이 함께 축성되는 식이다.

순례길에서 첫 번째로 만나는 대도시인 팜플로나에는 구도심을 시티월이 감싸고 있고, 별도로 육각형의 시타델이 있다. 팜플로나 시타델이 순례길 바로 옆에 있지만 다음 목적지로 가는 길이 바뻐서인지 순례객들은 그냥 지나쳐간다. 그 모습이 좀 안타까웠다. 저 좋은 걸 그냥 지나치다니!

아빌라성의 길이가 2,500m라 약 30~40분이면 한 바퀴를 다 돌 수 있다. 한양도성은 18.6km이라 순성을 제대로 하려면 10시간 정도가 필요하다. 밥 시간은 둘째치고, 북악산과 인왕산 성곽길이 상당히 난코스이기 때문이다. 산을 꽤 잘 타는 사람들도 북악산 성곽길의 계단에서는 숨을 가쁘게 몰아쉴 정도다.

비가 온 뒤라 하늘은 더없이 맑고 푸르렀다. 느긋하게 성곽 트레킹을 하며 사진을 찍었다. 둥글둥글한 타워들이 사열하듯이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흰구름과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성곽이 이렇게 예쁠 수가 있어? 우리 한양도성도 예뻐!

 

 

 

* 알카사르 문(Puerta del Alcazar): 양 옆에 측면 타워가 있어 문의 격조를 높여주고 있다.

 

 

 

* 아빌라 지도

 

 

 

 

 

 

* Large figure in a shelter: 거대 대피소라는 명칭의 작품. 게르니카와 어울리는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대성당 인근에 있는 parque de los pueblos de Europa 공원에 있다. free palestine!

 

 

 

<재미난 스페인 13편> 스페인 내전과 게르니카

게르니카에서 <게르니카>를 봤다!

스페인에 대해서 잘 모를 때였다. 그래도 유럽역사에 대해서 관심이 있어서 게르니카(Gernika)에서 일어난 학살사건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1937년 스페인 내전 당시였다. 프랑코 군대를 돕기 위해 나치 독일의 공군기들이 게르니카를 폭격한다.

지도를 찾아보았다. 바르셀로나를 위시한 카탈루냐 지역을 쭈욱 훑어봤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프랑코 군대에 반대한 인민전선이 바르셀로나를 임시수도로 정할 만큼 카탈루냐 지역은 반 프랑코 정서가 강한 곳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게르니카도 카탈루냐 지역에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바스크 지역에 있었다. 구겐하임 미술관이 있는 빌바오의 옆 동네가 바로 게르니카였다. 이게 무슨 창피인가...

스페인은 1898년,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그나마 남아있던 식민지들까지 잃게 된다. 미국에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괌을 넘겨줬고, 쿠바는 독립하게 된다. 한 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에서 유럽 변방으로 완전히 몰락한 것이다. 그 이후로도 스페인은 내외적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됐다.

1923년 9월에 바르셀로나에서 쿠데타가 일어난다. 그 유명한(?) 프란시스 프랑코가 군사 반란을 일으켰는가? 아니다. 미구엘 프리모 데 리베라(Miguel Primo de Rivera)라는 카탈루냐 주둔군 사령관이 군대를 동원했다. 총리에 오른 리베라는 독재 정치로 자유를 억압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일정 정도 경제발전을 이루게 된다. 당시 왕이었던 알폰소 13세는 리베라의 독재 정치를 슬쩍 눈감아 주었다.

짧은 호황기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29년, 미국에서 경제 대공황이 발생했고 그 여파가 대서양 건너 스페인에도 퍼지게 된다. 독재 정치에 대한 반감, 악화하는 경제상황 등등... 여러 악재가 겹쳐지자 리베라는 사임하게 된다. 이때가 1930년 1월이었다. 그는 프랑스로 망명을 하게 됐는데 사임을 한 지 두 달도 되지 않아 파리의 한 호텔에서 병사하게 된다.

 

 

 

* 게르니카대성당: 스페인 내전 이후로 복원됐다.

 

 

 

리베라가 집권하던 1920년대, 유럽에서는 파시즘이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군사독재를 이끌던 리베라도 파시즘을 동경했다. 실제로 그는 이탈리아에 가서 당시 파시스트당을 이끌고 있던 베니토 무솔리니와 회담을 한다. 이때 리베라는 존경의 의미로 무솔리니에게 두체(duce)라고 칭하게 된다. 두체는 ‘총통’ 혹은 ‘수령’으로 쓰이기도 하고, ‘공작’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미구엘 프리모 데 리베라가 사망한 후, 3년 뒤인 1933년이었다. 그의 아들인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José Antonio Primo de Rivera)가 팔랑헤(Falange)라는 파시스트 정당을 결성한다.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는 팔랑헤를 통해서 자신의 아버지의 이념을 계승하려고 했다. 1936년 7월,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는데 이때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는 공화파 정부에 의해 체포됐다. 군사반란을 사주했다는 죄목이었는데 결국 그는 1936년 11월에 총살됐다.

팔랑헤의 유산은 군사반란의 지도자인 프랑코가 계승했다. 이념과 정책을 뒷받침해 줄 파시스트 정당을 발 밑에 두고 공화파 정부에 총부리를 겨누었던 것이다.

1931년 4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국왕 알폰소 13세가 이탈리아로 망명을 한 것이다. 같은 달에 있었던 선거에서 군주정 폐지를 선언한 좌파 세력이 승리했기 때문이다. 4월 14일에 제2공화국이 선언됐고, 알폰소 13세는 스페인을 떠나게 된다. 이로써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약 230년간의 통치는 막을 내린다. 하지만 완전히 끝은 아니었다. 프랑코가 사망한 후 다시 부르봉 왕조가 부활했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도 혼란이 멈추지 않았다. 1931년 좌파, 1933년 우파, 1936년에는 다시 좌파가 집권하게 된다. 이때 각각의 집권 세력들은 전임 정부의 정책들을 되돌려 놓았다. 예를 들면 당시 초미의 관심사였던 농지법은 ‘좌파정책 -> 우파정책 -> 좌파정책’으로 마치 실타래가 꼬이듯, 꼬이게 된다.

이런 혼란을 틈타 군부가 13년 만에 다시 쿠데타를 일으킨다. 스페인 내전이 발발한 것인데 이때가 1936년 7월 17일이었다. 좌파 세력이 인민전선을 결성하여 선거에서 승리한 지 5개월이 지난 때였다. 동남아시아도 마찬가지인데 스페인 사례처럼 한 번 쿠데타가 일어나면 계속 일어나게 된다. 그러니 애초부터 그 뿌리를 싹 뽑아버려야 한다.

 

 

 

 

* 게르니카: 스페인 내전 당시의 모습을 담은 전시물들.

 

 

 

스페인 내전 초기에 군부는 남북 종심축으로 작전을 펼쳤다. 당시 아프리카 지역 사령관인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는 남부 안달루시아 지역에 상륙하여 북쪽으로 진군했다. 반대로 나바라 주둔군 사령관인 에밀리오 몰라(Emilio Mola)는 북쪽인 팜플로나에서 남쪽 방향으로 진격했다.

남북으로 치고 오던 군사반란군들이 서로 연결됐고, 수도인 마드리드를 공격하게 된다. 하지만 공화국 지지자들이 버티고 있던 마드리드는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이에 프랑코는 마드리드를 남겨두고, 북부 지역 공세에 주력한다. 공화국의 세력 범위에 있던 북부 지역들이 차례차례 반란군들에게 함락됐다. 이 시기에 게르니카 학살도 발생하게 된다. 그때가 1937년 4월 26일이었다.

‘내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스페인 내전은 국제적이었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프랑코 군대를 위해 참전했다. 반면 소련과 멕시코가 공화국군을 지원했다. 이와 별도로 세계 각국에서 온 의용병들이 국제여단이라는 이름으로 공화국을 위해 싸웠다. <동물농장>, <1984>로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도 파시스트들과 싸우기 위해 총을 들었다. 조지 오웰은 전투 중에 총상을 입기도 했는데 그런 스페인 내전의 경험을 담아 <카탈루냐 찬가>라는 기념비적인 책을 출간하게 된다.

조지 오웰 이외에도 앙드레 말로, 존 콘포드와 같은 문인들이 직접 참전했다. 또한 알베르 카뮈, 생텍쥐페리, 파블로 네루다, 루이 아라공,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등... 수많은 예술가들이 공화국 정부에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나치 독일은 게르니카에 중무장한 폭격기와 전투기를 보냈다. 폭격으로 인해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고, 많은 시설물들이 파괴됐다. 당시 공화국 측에서는 1,600명 정도가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평화로웠던 작은 도시가 한 순간에 지옥으로 변한 것이다.

그럼 왜 독일은 게르니카를 공습했을까? 새로 개발한 전략 무기들을 테스트하기 위해서였다. 신무기들의 파괴력을 확인하기 위해 무고한 게르니카 시민들을 희생시켰던 것이다. 게르니카 공습이 있고, 약 2년 뒤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 게르니카: 게르니카에서 본 피소의 <게르니카>. 원본은 마드리드에 있는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에 있다.

 

 

 

 

<게르니카>는 피카소가 스페인 내전 중에 공화국의 요청으로 그린 작품이다. 피카소는 게르니카에서 벌어진 만행을 화폭에 담아 전쟁의 비참함을 널리 알리고자 했다. 그런데 당시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던 피카소는 프랑코가 집권하는 한 조국으로 <게르니카>를 보낼 수 없다며, 미국에 그림을 맡겨버렸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조국 스페인에 자유와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돌려보낸다는 조건이었다.

40년 넘게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타향살이'를 했던 <게르니카>는 드디어 1982년,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영원할 거 같았던 프랑코의 철권통치도 1975년, 그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후 스페인은 발 빠르게 민주화로 나아갔다. 그림의 반환에 스페인 국민들은 크게 환호했다. 전세계 사람들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스페인이 오랜 독재체제에서 벗어나 민주주의 사회로 거듭났음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빌바오에서 게르니카로 향하는 전철을 탔다. 약 50분 정도 걸렸는데 바깥 풍광이 예뻐서 지루하지 않았다. 드디어 게르니카에 도착했다. 게르니카는 아담했지만 활기차 보였다. 현재의 게르니카에는 스페인 내전 당시의 상흔이 크게 남아있지 않았다. 거의 다 복구가 된 거 같았다. 사실 서울도 한국전쟁을 혹독히 겪었지만 지금 서울에 한국전쟁 때의 상흔이 남아있는 장소가 거의 없지 않은가? 대신 곳곳에 조형물을 설치하여 그때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렇게 곳곳을 탐방하다 드디어 <게르니카> 벽화 앞에 서게 됐다. 드디어 <게르니카> 벽화를 내 두 눈으로 보게 됐다. 피카소가 그린 오리지널 <게르니카>는 마드리드에 있는 레이나 소피아 국립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고, 이 벽화는 오리지널을 복제한 것이다. 어쨌든 복제한 것이지만 게르니카에서 <게르니카>를 보게 됐다.

게르니카 대성당 위쪽에 유러파 공원이라는 곳이 있어 그곳을 찾아갔다. 대성당도 당시 폭격의 참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크게 훼손이 됐고 이후에 복구하게 된다. 그래서 아랫돌과 윗돌의 색깔이 다르다.

공원이 조용하고 쾌적해서 산책하기에 적당했다. 야외 조형물들도 세워져 있었는데 동네가 동네인만큼 모두 평화를 주제로 하고 있었다. 한적한 공원에서 산책을 하다 보니 여행에서 온 피로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평화로운 느낌도 들었다. 그렇게 게르니카에서 평화의 느낌을 받게 됐다.

 

 

 

 

 

* 유로파공원: 대성당 인근에 있다. 산책하기에 정말 좋았다. 이곳에서 평화에 대해서 곱씹어 보았다.

 

 

 

 

 

 

 

 

*게르니카 지도

 

 

 

 

 

* 성모천사성당(Church of Our Lady of the Angels)과 베르나드타워(Bernard So Tower): 성당과 타워는 인접해있지만 별개의 건물이다. 타워는 감옥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재미난 스페인 12편> 이비아

왜 프랑스 땅에 스페인 영토가 있어?

유럽을 여행할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고풍스러운 건축물도, 아름다운 자연환경도 아니었다. 바로 국경 넘기였다.

필자에게 기존의 국경이란 절대 넘을 수 없는, 그런 공간이었다. 날카로운 철조망이 2단으로 쳐져 있고, 각종 감시장비가 빽빽이 운영되어 있던 곳. 긴장감, 살벌함, 매서움 등등... 이런 이미지가 뇌리에 박힐 수밖에 없었던 건, 필자가 군복무를 DMZ 부근에서 했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가시가 박힌 철책선이 국경선이었고, 그 철책선은 절대 넘어서는 안 되는 금지된 선이었다.

전날 피레네산맥에 자리 잡은 작은 나라, 안도라에서 1박을 했다. 공기가 좋은 곳에서 잠을 잤더니 얼굴에 생기가 도는 듯했다. 물론 아침에 거울을 봤을 때는 어김없이 오징어(?) 한 마리가 불쑥 튀어나왔지만...

이번에 탐방할 곳은 이비아(Llivia)라는 곳이다. 리비아? 북아프리카에 있는? 아니다. 영어로 읽으면 ‘리비아’가 맞지만 스페인어로는 ‘이비아’로 발음한다. 안도라는 어찌어찌해서 이름을 들어본 분들이 있을 테지만 이비아는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이 대다수일 것이다. 이비아도 안도라처럼 피레네산맥 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두 도시는 약 50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래서 두 지역을 묶어서 탐방할 수도 있다.

 

 

 

* 이비아: 이비아성에서 바라본 모습. 하단 중앙에 천사성모 성당이 보인다.

 

 

 

그런데 그 낯선 이비아에는 뭐하러 갔는가? 이비아의 독특한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갔다. ​이비아는 프랑스 영토 안에 있는 스페인 땅이다. 혹시 칼리닌그라드라는 지명을 들어보셨는가? 칼리닌그라드는 폴란드 동북쪽 국경과 면해 있는 곳으로 러시아의 고립 영토다. 바닷길을 제외하고, 칼리닌그라드에서 러시아 본토로 가려면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를 거쳐 가야 한다.

이렇듯 다른 나라에 둘러싸여서 본토와 외떨어진 영토를 고립 영토라고 부른다. 스페인에 둘러싸여 있는 영국령 지브롤터도 대표적인 고립 영토다. 또한 북아프리카 모로코 영토에 둘러싸인 세우타와 멜리야도 스페인의 고립 영토다.

그래도 칼리닌그라드와 지브롤터는 바다와 면해 있어 바닷길로 본토에 닿을 수 있다. 세우타와 멜리야도 마찬가지로 여객선을 타면 스페인 본토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비아는 무조건 프랑스 땅 2km를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다. 이게 참 재밌는 게 어쨌든 국경을 넘는 거라 스마트폰 통신사가 달라진다.

사실 이비아는 필자 같은 뚜벅이 여행자들이 쉽게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그래서 일부러 여행 초기에 배치해서 찾아갔다. ​먼저 안도라에서 스페인의 라세우두르젤(La Seu d'Urgell)로 갔고, 다시 프이그세르다(Puigcerdà)라는 도시로 이동했다. 익숙하지 않은 지명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사실 필자도 두 도시의 이름을 발음하기가 버겁다. 차라리 ‘안도라’는 세글자로 떨어져서 발음하기가 편하기라도 하지... 이렇게 유명하지 않은 외국 답사지를 각인시키기가 쉽지 않다. 이런 어려움은 이 책을 쓰는 내내 필자의 어깨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 천사성모성당: 중심거리에서 바라본 성당의 종탑

 

 

 

긴장을 풀고 찬찬히 살펴보자. 라세우두르젤은 안도라 편에서 언급이 됐었다. 안도라는 입헌공동군주제라는 독특한 형태의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는데 프랑스 대통령과 스페인의 우르헬 교구의 주교가 그 공동군주들이다. 그 우르헬 교구가 있는 도시가 바로 라세우두르젤이다. 프이그세르다는 프랑스 국경과 맞닿아 있는데 이비아로 가기 위한 베이스캠프(?)로 제격인 곳이다.

안도라 -> 라세우두르젤 -> 프이그세르다 -> 프랑스영토(유흐 / 부흑-마담므) -> 이비아

복잡해 보이지만 거리가 그리 길지 않았다. 총 이동 거리는 약 70km 정도이다. 스페인 영토인 프이그세르다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프랑스땅을 넘어 이비아로 갔다. 갈아탄 버스는 우리나라로 치면 마을버스만한 크기였다. 그래도 나름 국경을 넘는 버스인데 아주 소박하고 정감 있어 보였다. 프이그세르다에서 이비아까지 프랑스 영토내에서 직선으로 도로가 연결되는데 그 도로를 중심으로 동쪽에 있는 동네가 부흑-마담므(Bourg-Madame)이고, 서쪽에 있는 동네가 유흐(Ur)이다.

이비아의 지정학적인 위치를 알기 위해서는 세르다냐(Cerdaña)라는 지역을 알아야 한다. 스페인에 속한 이비아와 프이그세르다는 물론 프랑스령인 유흐와 부흑-마담므도 세르다냐에 속하기 때문이다. 세르다냐는 전체면적이 1,086㎢로 인천광역시(1,067㎢) 정도의 크기다. 지금은 남북이 갈려 있는데 남쪽은 스페인 영토로 바이샤 세르다냐(Baixa cerdanya)로 북쪽은 프랑스 영토로 알타 세르다냐(Alta cerdanya)로 불린다. 그 프랑스 세르다냐 지역 속에 스페인의 이비아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종교전쟁이라고 불렸던, 30년 전쟁이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종결됐음에도 스페인과 프랑스는 계속 전쟁을 이어갔다. 그러다 1659년, 피레네조약에 의해서 종전을 하게 됐는데 이때 스페인은 세르다냐 북부지역을 프랑스에 넘겨주게 된다. 협정을 통해 프랑스는 북쪽 세르다냐의 33개 마을을 획득하게 됐다. 하지만 이비아는 제외되는데 스페인측에서 이비아가 ‘마을(village)’이 아닌 ‘도시(town)’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 이비아성: 많은 부분이 폐허로 남아 있다.

 

 

 

피레네조약을 통해 프랑스가 얻은 영토를 생각해보면 이비아는 작은 규모였다. 챙긴 전리품이 두둑한데 굳이 타운 하나 때문에 전쟁을 이어나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해서 이비아는 스페인영토로 남게 됐다.

이비아는 부메랑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크기가 약 12.9㎢ 정도로 서울의 금천구(13㎢)와 비슷한 규모다. 인구는 2023년 기준으로 약 1,500명 정도에 달한다. 행정구역은 카탈루냐 지역, 지로나 주에 속한다.

사실 이비아는 로마시대부터 그 중요성이 부각된 곳이었다. 이름도 이곳에 주둔했던 로마의 장군인 율리아 리비카(Julia Lybica)에서 따온 것이다. 이비아는 한때 세르다냐의 도읍지 역할을 했다.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중심가를 지나니 언덕을 향해 자리잡은 천사성모 성당이 보였다. 이 성당은 16세기에 완성됐는데 도시의 상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풍채가 당당했다. 성당의 입구에는 베르나드타워라는 탑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탑이 있어 성당의 외형이 더 다채로워 보였다.

이비아 탐방의 정점인 이비아성(castell de Llivia)에 올라 주위를 살펴보았다. 이비아성은 상당 부분 파괴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상부에 올라서니 주위 풍광을 한눈에 다 볼 수 있었다. 로마시대부터 오랫동안 왜 이곳이 요충지였는지 짐작해 볼 수 있었다.

 

 

 

* 이비아: 평원을 피레네의 고봉들이 감싸고 있는 형상이다.

 

 

 

분명 피레네 산맥에 자리잡고 있지만 그 일대는 큰 평원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이 피레네가 맞나 싶을 정도로 널찍한 공간이 펼쳐지고 있었다. 마치 피레네의 고봉들이 평원을 숨겨놓고 있는 형상이었다. 평원과 고봉들을 동시에 볼 수 있었던 꽤나 흥미로운 순간이었다. 그런 굉장한 풍광들이 이슬비와 함께 눈 앞에 펼쳐지고 있으니 약간은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DMZ에서 보초를 설 때였다. 어둠이 거치고 여명이 밝아올 무렵, 철책선 건너편에서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소총에 힘을 꽉 쥐고, 초소를 나와 철책선 너머가 더 잘 보이는 곳으로 이동했다. 침투조인가? 아니었다. 멧돼지들이었다. 한 마리가 아니라 가족단위였다. 먹이를 찾아 철조망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나중에는 고라니들도 보였다. 말 그대로 DMZ은 야생동물들의 천국이었다. 야생동물들은 자유롭게 DMZ 일대를 누비는데 왜 인간들은 날카로운 철책선으로 금을 그어 서로를 분리시키는가?

국경 같지도 않은 국경을 마을버스로 넘으며 필자의 20대 시절을 되돌아봤다. 프랑스에 있는 스페인 고립영토 이비아에서.

 

 

*이비아 지도

 

 

 

 

 

 

 

* 안도라베야: 안도라의 수도 안도라베야

 

 

 

 

 

<재미난 스페인 11편> 입헌공동군주제? 그런 말도 있어?

피레네의 작은나라 안도라

바르셀로나 국제공항에 내렸다. 그간 마드리드 국제공항은 많이 이용했지만 바르셀로나 공항은 처음이었다. 서울도 그렇지만 바르셀로나의 여름도 만만치 않았다. 아니 무슨 6월 초순의 날씨가 이렇게 강렬한가! 이제껏 스페인, 포르투갈은 가을이나 겨울 시즌에만 와서 그랬는지 이베리아반도의 여름 맛(?)은 처음이었다. 한국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뜨거운 뙤약볕이었다!

이후 바르셀로나 중앙역 옆쪽에 있는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안도라(Andorra)로 이동했다. 총 비행시간이 16시간을 넘다 보니 버스를 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확실히 비행기보다는 버스가 잠자기에 딱이었다. 덕분에 시차 적응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안도라는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있는 피레네산맥에 있는 작은 나라다. 서울의 면적이 605㎢이고, 안도라가 468㎢이니 서울보다도 더 작은 곳이다. 인구는 2021년 기준으로 약 8만 명 정도에 달한다. 안도라의 공식 명칭은 안도라공국(Principality of Andorra)이다. 거칠게 말해 공작이 최고 수반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공작은 새가 아니라 백작, 공작할 때 그 공작이다.

그런데 왜 하필 안도라인가? 안도라와 스페인이 무슨 관계가 있나? 안도라는 스페인의 카탈루냐 지방과 크게 연관을 맺고 있는 곳이다. 공용어로 카탈루냐어를 사용하고, 심지어 카탈루냐 지방에 속한 우르헬이라는 도시의 주교가 안도라의 공동 수반으로 봉직하고 있을 정도다.

 

 

 

*성 에스테베 성당: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12세기에 지어졌다. 물론 그 이후로도 여러번 개축을 했다. 안도라베야에 있는 유서 깊은 건물이다.

 

 

 

한편 이 책의 제목이 <재밌는 스페인>이지만, 굳이 그 내용을 스페인으로만 한정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스페인, 포르투갈은 물론 영국령 지브롤터와 피레네산맥의 안도라까지... 이베리아반도 내에 있는 주권국가들이 모두 논의 대상 안에 포함된다.

​스페인에서 안도라로 입국(?)하려면 검문소를 지나야 한다. 안도라가 솅겐 조약에 미가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문소에는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대신 스페인에서 프랑스, 반대로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넘어가는 차들이 많았다. 졸다가 깨보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차창 밖으로 피레네산맥의 산들이 위엄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랬는지 구례 읍내에서 공영버스를 타고 올라갔던 지리산 성삼재가 연상됐다. 피레네도 산 넘어 산, 지리산도 산 넘어 산... 다를 거 없이 참 좋구나!

약 4시간 만에 안도라베야(Andorra la Vella)에 도착했다. 다른 작은 나라들은 도시 국가 형태인 경우가 많지만 안도라는 안도라베야라는 수도가 따로 있다. 수도답게(?) 안도라베야에는 이 나라 인구의 ¼인, 약 2만 명이 거주한다.

피레네의 험준함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이곳 사람들은 그런 척박함을 이겨낸 듯이 보였다. 절벽 위에다 집을 짓고 마을을 지은 것이다. 안도라 사람들은 지반 공사하기도 어려운 땅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거주 기반이 스위스와 비슷해 보였다. 하긴 안도라베야는 해발 약 1,023미터에 위치해 있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수도다.

 

 

 

*성 에스테베 성당: 왼쪽 건물이 성당이다. 오른쪽 건물은 리모델링 중인데 공사 가림막이 주위와 어울리게 만들어져 착시 효과를 내고 있다. 사진에서도 보이듯 뒤쪽에 있는 산은 민둥산이다. 안도라베야 일대의 몇몇 산들은 산사태를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맨살'을 드러내고 있다.

 

 

 

안도라는 ​스페인과 프랑스라는 두 개의 큰 나라에 끼어있는 작은 나라다. 그래서인지 입헌공동군주제라는 아주 독특한 방식의 정치 체제로 운영된다. 입헌군주제는 알겠는데 입헌공동군주제라니! 안도라는 프랑스 대통령과 스페인의 카탈루냐 지방인, 우르헬 교구의 주교가 공동으로 최고 권력 수반을 이루고 있다.

안도라의 건국이 13세기였으니, 중세 시기에 프랑스 측에서는 왕이 대표자였고, 현재는 대통령이 그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스페인 측에서는 계속해서 우르헬 교구의 주교가 대표자였다. 이를 두고 입헌공동군주제라고 부른다. 물론 안도라에는 현재 총리가 실질적으로 국정을 총괄하고 있다.

여기서 궁금한 게 있다. 스페인의 주교는 논외로 치고, 프랑스의 왕이 어떻게 공국의 수반이 될 수 있을까? 겸임하면 가능하다. 왕(king)이 공작(duke)도 겸임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태양왕이라고 불린 루이 14세는 프랑스의 국왕이자 안도라의 공작이 된다. 중세 시기였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배경지로 유명한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 공국이 있었다. 바이킹이라고 불렸던 북유럽인들이 세운 노르망디 공국이었다. 그런데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은 영국에서는 국왕이었다. 정리하면 노르망디 공국의 수장은 프랑스에서는 공작, 영국에서는 왕이었던 것이다.

안도라는 1993년까지 헌법도 없었다. 규모가 작고, 인구도 적어서 헌법 없이도 통치가 가능했으리라. 1993년까지는 공동군주제였고, 이후로는 헌법이 제정되어 입헌공동군주제라는 현재와 같은 정치 체제로 발돋움 한 것이다. 그해에 UN에 가입하기도 했다.

 

 

 

* 입헌공동군주제: 입헌공동군주제를 표현한 청동판. 의회 건물로 쓰였던 카사 데 라 발(Casa de la Vall)의 한켠에 서 있다.

 

 

 

안도라의 기원은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샤를마뉴 대제는 이슬람 무어인들의 북상을 막기 위해 피레네산맥 일대에 에스파냐 변경령을 설치한다. 에스파냐 변경령은 프랑스 남부 지역을 방어하는 마지노선 역할을 했다.

다수의 변경령이 설치가 됐는데 우르헬 백작령도 그중 하나였다. 우르헬 백작이었던 보렐 2세는 안도라의 통치권을 우르헬 교구로 넘겼다. 우르헬 교구는 말 그대로 가톨릭의 일개 교구일 뿐이었다. 실질적으로 지역의 방위를 할 수 있는 물리력이 필요했다. 이에 우르헬 교구는 통치권의 일부를 유력 가문에게 넘기게 됐고, 그 통치권은 돌고 돌아 결국에는 프랑스 남부의 푸아 백작이 행사하게 됐다. 1278년, 푸아 백작과 우르헬 주교는 합의에 의해 안도라의 공동통치자로 나서게 된다.

스페인 측은 가톨릭 교구이기에 그 주체가 변함이 없었지만, 프랑스 측은 세속 정치에 엮여있기에 부침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격변기에는 프랑스 측 공작이 공석이 되기도 했다. 또한 대혁명과 파리코뮌 같은 엄청난 대격변을 겪으며 봉건제를 폐지 시킨 프랑스인데, 정작 안도라에서는 공화국의 대통령이 공작이 되는 특이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정치 체제가 800년도 넘게 이어질 수 있었을까? 프랑스와 스페인이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더군다나 피레네라는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안도라 사람들의 절박함이 그런 독특한 정치 체제를 만들고, 유지시킨 것이 아닐까?

 

* 안도라: 스페인과 프랑스에 끼어있는 안도라의 모습을 빗댄 것 같은 표지판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안도라공국이라는 명칭 때문에 살짝 중세풍의 도심 풍경을 기대했었다. 하지만 안도라는 현대적인 건물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물론 옛 건물들도 있었지만.

안도라는 쇼핑과 레저·스포츠산업이 발달했다. 거의 모든 품목이 무관세라서 쇼핑의 천국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고지대에 있고, 눈도 많이 내리다 보니 스키를 타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카지노로도 유명한 곳이다.

상류라서 그런지 강물이 엄청난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발리라 오리엔트(valira d'orient)라고 불리는 강이었는데 그냥 계곡 같아 보였다. 어쨌든 그렇게 유속이 빠른 도심지 강물은 처음 봤는데 물소리가 아주 시원했다.

그 물소리를 듣고 있자니 예전에 천왕봉을 다녀온 후 거닐었던 지리산 대원사 계곡이 떠올랐다. 전날 비가 와서 그랬는지 그때 대원사 계곡은 우렁찬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한참을 계곡에 앉아 물소리를 들었었다. 계곡물 소리가 번뇌와 집착들을 씻어주는 듯했다. 그날의 지리산 대원사 계곡물 소리처럼 우렁찬 피레네 강물 소리에 귀가 다 시원해졌다. 시차에서 오는 피로감이 싹 다 날아가는 듯했다.

피레네 강물 소리에 번뇌와 집착이 씻겨 내려갔던 것일까? 그날은 아주 잘 잤다. 바르셀로나처럼 덥지도 않았다. 역시 피레네산맥!

 

 

 

* 피레네의 강물: 우렁찬 물소리를 듣고 있자니 번뇌와 집착들이 싹 다 씻겨나가는 듯했다.

 

 

 

 

* 안도라: 시각적 효과를 위해 원래 크기보다 더 크게 표기했다.

 

 

 

 

* 사라고사: 피에드라 다리에서 바라본 필라르 성모 대성당과 라세오 성당. 피에드라 다리는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다리임. 강 건너 왼쪽이 라세오 성당, 오른쪽이 필라르 성모 대성당임.

 

 

 

<재미난 스페인 9편> 카탈루냐는 스페인이 아니다?

카탈루냐의 정체성 1부

 

이전 글에서도 계속 언급했듯이 카탈루냐 사람들은 자신들이 스페인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역설을 한다. 그들이 말하는 정체성의 시초는 서기 801년, 바르셀로나 백작령에서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711년, 북아프리카에 있던 이슬람 무어인들이 이베리아반도를 침공했고, 서북쪽 일부를 제외한 이베리아반도를 전부 다 차지하게 된다. 이에 그치지 않고 무어인들은 피레네산맥을 넘어 현재의 프랑스 영토까지 욕심을 내게 된다. 당시 프랑스 지역은 프랑크 왕국이 있었고, 메로빙거 왕조가 통치했다.

결국 732년에 프랑크 왕국 중서부에 위치해 있는 투르와 푸아티 지역에서 크게 전투가 벌어졌다. 투르-푸아티 전투에서 프랑크군은 무어인들에게 대승을 거둔다. 이때 사령관이 카를 마르텔이었다. 이후 카를 마르텔의 아들인 피핀이 751년에 메로빙거 왕조를 폐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다. 카롤링거 왕조가 시작된 것이다.

카롤링거 왕조 시기에도 이슬람 세력은 지속적으로 피레네 지역을 위협했다. 계속된 전투 중에 영웅도 출현하고, 그런 영웅을 드높이는 서사시도 탄생하게 된다. 그렇게 나타난 서사시가 바로 <롤랑의 노래>다. ‘롤랑의 노래’는 샤를마뉴의 조카인 롤랑의 영웅담을 담은 중세 유럽의 대표적인 영웅 서사시로 불린다. 실제로 <롤랑의 노래>는 778년, 프랑크 왕국 샤를마뉴의 이베리아 원정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 바르셀로나대성당: 가우디가 설계한 유명한 사그라다 파밀리아와는 다른 성당이다.

 

 

 

8세기가 가고, 9세기로 넘어왔다. 801년 4월이었다. 이 당시도 프랑크 왕국은 샤를마뉴 대제가 통치하고 있었다. 이때 그의 아들 루트비히 1세가 이끄는 군대가 바르셀로나를 점령했다. 바르셀로나는 약 80년간 지속된 이슬람 무어인들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렇듯 피레네산맥과 인접해 있는 이베리아반도 동북쪽, 칸타브리카산맥이 있는 서북쪽은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지 않거나 비교적 짧게 받게 된다.

남부 안달루시아의 그라나다는 이슬람 세력의 마지막 수도였으니, 700년 이상 아랍의 영향을 받게 된다. 몇백 년 동안 지배를 받은 곳과 불과 몇십 년 정도만 받은 곳은 차이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 이슬람 통치 기간의 차이도 카탈루냐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바르셀로나를 위시한 카탈루냐 일대는 프랑크 왕국의 변경 지역이 되었다. 이 변경 지방을 방위하기 위해 베라라는 사람이 바르셀로나 백작으로 임명되었다. 이것이 바로 바르셀로나 백작령이라고 불리는 에스파냐 변경령의 시초다. 이런 역사적 형성과정이 있었기에 바르셀로나 백작령은 프랑크 왕국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카탈루냐어가 프랑스어와 유사한 점이 많은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카롤링거 왕조는 바르셀로나 이외에도 여러 곳에 백작령을 두었다. 백작령들은 피레네산맥을 중심으로 남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곳들이 이슬람 군대의 북상을 막아주는 완충지 역할을 했다. 프랑스 본토에 대한 이슬람 군대들의 직접적인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방패막이가 필요했던 것이다.

프랑크 왕국 입장에서 보자면 에스파냐 변경령은 말 그대로 변방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정치군사적인 영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백작령들은 본국과는 다른 정체성을 함양해 나갔다. 백작령들은 카롤링거 왕조가 쇠퇴하고, 더 나아가 멸망했던 10세기경에는 예속관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주권을 행사하기에 이른다.

이런 백작령들 중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건 바르셀로나 백작령이었다. 다른 백작령들을 병합해나가며 우두머리 역할을 자임하게 된다. 이에 따라 바르셀로나는 중심지로 우뚝서게 되고, 카탈루냐 정체성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다.

 

 

 

* 필라르성모 대성당: 사라고사에 있는 필라르성모 대성당. 앞에 보이는 강이 에브로강이다. 사라고사는 아라곤 연합왕국의 수도였다.

 

 

 

이베리아반도 북부에 하카(Jaca)라는 도시가 있다. 피레네산맥의 아랫동네라 주위 풍광이 수려한 곳이다. 1035년, 이곳 하카에서 아라곤 왕국이 탄생했다. 아라곤 왕국의 초대왕인 라미로 1세(Ramiro I)는 이웃 나라인 팜플로나 왕국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팜플로나 왕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안초 3세(Antso III)였다.

안초 3세가 죽자 그의 아들들이 각각의 영지를 물려받는데 라미로 1세는 아라곤 백작령을 상속받게 됐다. 이에 라미로 1세는 백작 신분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왕을 자처하게 된다. 이때가 1035년이었다. 참고로 팜플로나 왕국은 12세기에 나바라 왕국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하카의 중심지 뒤로는 피레네산맥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데 방어에 이점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대외로 진출하기에는 제약이 많은 지형이다. 필자가 하카 시내를 직접 방문한 후에 느낀 소감이다. 그래서인지 아라곤 왕국은 이후 우에스카(1096년), 사라고사(1118년)로 잇달아 천도하게 된다. 특히 사라고사는 평원지대로 에브로강이라는 큰 강을 끼고 있는 도시다.

 

 

 

* 팜플로나성: 팜플로나 왕국의 아라곤 백작령이 아라곤 왕국의 시초였다.

 

 

 

하카나 우에스카보다는 훨씬 더 개방적인 공간에 위치해 있다. 현재 사라고사(Zaragoza)는 스페인 5대 도시에 속할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참고로 스페인어로 ‘j’는 ‘ㅎ’로 발음되서 하카가 되고, ‘z’는 ‘ㅅ’로 발음되어 사라고사가 됐다.

작은 소국에서 시작한 아라곤 왕국은 1137년에 아라곤 연합왕국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당시 바르셀로나 백작령을 통치하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는 아라곤 왕국의 왕위 계승자인 페트로닐라와 약혼한다. 당시 페트로닐라는 1살이었다. 누가봐도 정략적인 혼인동맹이다. 실제 결혼은 1150년, 페트로닐라가 14살이 되던 해에 행해진다.

연합 당시에 아라곤보다는 바르셀로나가 더 부유했지만 왕국의 명칭은 아라곤으로 정해진다. 아라곤 연합왕국은 중앙집권적인 정치 체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바르셀로나 백작령이 위치했던 까탈루냐 지방의 정치와 행정은 독자적으로 운영됐고, 14세기 이후로는 카탈루냐 왕자령(principado de Cataluña)으로 불리게 된다.

 

 

 

* 하카성: 하카는 아라곤 지방 북부에 위치한 도시다. 하카에는 산 페드로성이라고도 불리는 하카성이 있다. 하카는 아라곤 왕국의 초기 시대 수도였는데 피레네산맥 아래에 위치해 있어 방어에 용이했다. 사진 오른쪽에도 피레네산맥이 보인다.

 

 

 

이베리아반도 중앙에 카스티야 왕국이 버티고 있어서일까? 아라곤 연합왕국은 지중해로 눈길을 돌렸다. 하나하나 영토를 늘려갔는데 15세기 중반에는 그 범위가 지중해 전체에 이를 정도로 큰 해상왕국을 이루었다. 명실상부한 유럽의 강대국으로 등극한 것이다.

711년부터 700년 넘게 이어져 온 레콩키스타(reconquista)라고 불리는 국토회복운동이 드디어 1492년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무어인들이 물러간 것이다. 레콩키스타의 마침표를 찍은 주역들이 있었는데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이사벨 1세 여왕과 아라곤 연합왕국의 페르난도 2세였다. 두 사람은 1469년 결혼을 했고, 두 왕국은 공동왕국을 이루게 됐다. 국토회복운동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공로로 그들은 교황 알렉산더 6세로부터 ‘가톨릭 공동왕’이라는 칭호를 선사 받게 됐다.

 

 

 

* 이베리아반도지도: 13세기 초반 지도이다. 당시 남쪽은 이슬람 알모아데족이 차지하고 있었다. 동쪽 카탈루냐 지방을 보면 현재의 스페인-프랑스 국경과는 다른 모습이다.

 

 

 

 

* 메세타평원: 저런 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재미난 스페인 6편> 메세타평원

스페인 한복판에 탁자 고원이 있다고?

 

"오! 이 안개 좀 봐요. 엄청 짙어요."

"좀 음산하기까지 하네요. 한국 안개는 애교에요, 애교!"

짙은 안개가 너무나 자욱했다. 말 그대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한기까지 파고드는 느낌이드니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한국에서 봤던 낭만적인(?) 안개하고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안개였다.

메세타고원(Meseta).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순례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마주쳐야 할 고원지대이다. 가도가도 끝이 없어보이는 드넓은 평야가 순례객들의 눈 앞에 펼쳐진다. 워낙 광활해서 한국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지평선을 볼 수 있을 정도다. 그렇게 광대한 평야가 펼쳐지니 시야는 확 트여서 좋다. 하지만 발걸음이 좀 위축된다.

메세타에 대한 악명(?)이 워낙 자자해서 그런 것이다. 지형 자체는 평평하니 체력적으로 힘들지는 않다. 하지만 그늘도 없는 평야를 신물이 날 정도로 걸어야 하니 정말 고역일 수밖에 없었다. 마을에서 마을까지 거리도 꽤나 멀어서 밥 시간에 맞춰 식당에 들어가기가 정말 어려웠다. 그래서 메세타 구간에서는 꼭 도시락을 챙겨야했는데 문제는 걸터앉아 먹을만한 곳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벤치나 쉼터같은 휴식공간도 부족하다보니 거의 스탠딩으로 빵을 뜯어 먹었었다.

그 광활한 평야에 홀로 서서 빵을 뜯어먹으니 이것이 눈물 젖은 빵인가? 이때 눈치없는 매 한 마리가 '휘~' 소리를 내며 필자의 머리 위를 선회하고 있었다. 이걸 뺏어먹으려고? 빼앗길 수는 없지, 눈물 젖은 빵치고는 맛났으니까...

메세타에 대해서 더 알아보기 전에 간단한 스페인 회화를 한 번 해보자. 식당에서 주문을 할 때다.

A: ¿Tiene mesas?(띠에네 메사스: 테이블 있어요?)

B: Sí, ¿Cuantas personas?(시, 꾸안따스 페르소나스?: 네, 몇 명이세요?)

영화 좋아하시는 분들은 페르소나(사람)의 복수형인 페르소나스에 눈길이 갈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메세타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이다. A가 테이블이 있냐고 묻는데 mesas라고 말한다. 스페인어로 테이블을 mesa라고 부르는데 여기서는 복수형인 mesas라고 쓰고 있다. 메세타(meseta)는 테이블, 탁자를 뜻하는 mesa가 변형된 형태다. 한마디로 메세타 평원은 일명 '테이블 평원'인 것이다.

 

  

 

* 안개낀 메세타평원: 싸늘함이 전해진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스페인어라고 칭하는 언어는 까스띠야어다. 카스티야는 수도 마드리드를 중심으로한, 이베리아반도 중앙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카스티야어를 사용한다. 이에 비해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한 카탈탈루냐 지역은 카딸란어라는 지역어를 카스티야어와 함께 공용어로 사용한다. 이렇게 해당 지역어를 사용하는 지역이 또 있다. 피레네산맥 부근에 위치한 바스크, 북서쪽에 자리잡은 갈리시아 등이다. 스페인이 워낙 지역색이 강하다보니 이렇게 각 지역의 지역어도 공식언어로 대접받고 있다.

메세타는 스페인의 중앙부에 위치해 있는데 그 넓이가 210,000km2 에 달한다. 한반도가 약 230,000km2이니 그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는데 스페인의 3/4 정도가 메세타에 속할 정도다. 이베리아반도 전체로 확장해보면 2/3가 된다.

고원이라는 명칭답게 평균고도는 약 660m로 꽤 높은 편이다. 한반도만한 면적의 고원지대가, 그것도 해발 600미터가 넘고 있으니 스페인의 평균 해발고도는 꽤 높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유럽국가들 중에서 스위스 다음으로 스페인이 해발고도가 가장 높다.

메세타는 서쪽을 제외한 동쪽, 남쪽, 북쪽이 모두 큰 산맥으로 둘러쌓여 있다. 동쪽에는 이베리코(Ibérico), 북쪽에는 칸타브리카(Cantábrica) 산맥이 두르고 있고, 남쪽에는 2중 장벽 형식으로 모레나(Morena)산맥과 베티카스(Béticas)산맥이 자리잡고 있다.

이베리코산맥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몬카요(Moncayo / 해발 2,315미터), 칸타브리카 산맥에서는 토레세레도(Torre Cerredo / 해발 2,650미터), 모레나산맥에서는 바누에라스(Bañuelas / 해발 1,332미터)이다.

모레나와 함께 남쪽에 있는 베티카스산맥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물아센(Mulhacén)인데 그 높이가 무려 3,482미터에 달한다. 그렇다. 물아센은 이베리아반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베티카스산맥은 지맥 개념으로 시에라네바다산맥을 거느리고 있는데 물아센이 그 시에라네바다산맥에 위치해 있다. 시에라네바다산맥은 알함브라 궁전으로 유명한 그라나다(Granada)의 배후산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그라나다에서 물아센이 가깝다는 것이다. 그라나다만큼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론다(Ronda)도 베티카스산맥의 서쪽 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 메세타평원: 안개 속의 돌다리. 역설적으로 안개와 어울리는 모습이다.

 

 

 

 

한편 메세타의 중심부에도 중앙(Central)산맥이 무려 600km에 걸쳐 동서 횡축으로 놓여져 있다. 중앙산맥은 국경을 넘어 포르투갈 동쪽지역까지 뻗어 있다. 이 중앙 산맥을 기준으로 메세타는 북쪽 메세타와 남쪽 메세타로 나뉜다. 카스티야의 행정구역도 나눠진다. 메세타 북쪽은 카스티야이레온(Castilla y León), 남쪽은 카스티야라만차(Castilla-La Mancha)로 분리된다.

외형적으로보면 평균 고도가 600미터에 달하는 그 자체로 고지대인 메세타를, 그보다 더 높은 산맥들이 담장을 치듯 두르고 있는 셈이다. 아직까지 이해가 잘 안 되신다면 강원도 양구군의 펀치볼 지형을 연상하시면 좋을 듯싶다. 펀치볼은 해발고도가 400~500미터 위치에 있는데 그 주위를 대암산, 도솔산, 대우산, 가칠봉 등의 1,000미터가 넘는 산들이 두르고 있다. 차이점은 메세타가 서쪽이 트여있는 형태라면 펀치볼은 동서남북이 다 둘러진 형태다.

수박 화채를 해먹기 좋은 둥그스러운 그릇을 영어로 펀치볼(Punchbowl)이라고 하는데 그곳 지형이 펀치볼처럼 생겼다하여 그렇게 이름이 불려진 것이다. 한국사람들이 붙인건 아니고 한국전쟁 때 양구에 주둔한 미군들에 의해 붙여졌다.

서쪽이 트여있는 지형이라 스페인의 주요 강들은 서쪽인 포르투갈 방향이나 남쪽으로 흐른다. 포르투로 흐르는 두에로강, 리스본으로 흐르는 타호강,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남쪽 국경을 형성하는 과디아나강, 스페인 남부를 흐르는 과달키비르강. 모두 다 대서양으로 흘러들어간다. 단 에브로강은 동쪽인 카탈루냐 지방으로 흘러 지중해가 된다.

아시다시피 스페인의 여름은 정말 뜨겁다. 당연히 스페인의 2/3를 차지하고 있는 메세타도 뜨겁다. 또한 건조하다. 하지만 겨울은 추운 편이다. 즉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가 크다는 뜻이다. 또한 지대 자체가 높다보니 겨울에는 짙은 안개가 매일같이 끼는 것이다. 필자가 순례길을 겨울에 많이 가서 그랬나? 메세타 구간에서는 거의 안개 속을 헤치며 걸었었다.

메세타지역은 인구가 희박한터라 마을들도 띄엄띄엄있다. 오랜시간 안개 속을 헤매며 외롭게 순례길을 걷는다고 생각해보라. 쉽게 발걸음이 안 떨어질 거다. 그래서 어떤 순례자들은 산티아고 순례길의 본 노선인 프랑스길에서 벗어나 지선인 북쪽길로 이동하기도 한다. 어떤이는 아예 버스나 기차로 메세타 구간을 점핑하기도 한다.

필자도 메세타를 겪어본 사람으로서 그 순례자들이 좀 이해가 된다. 하지만 안개 속을 헤치며 당당하게 걷는 것도 순례길의 일부가 아니겠는가! 순례길에서 메세타 빼먹으면 재미없지!

 

 

 

* 메세타평원

 

 

 

 

* 메세타평원: 안개가 구름처럼 깔려있다.

 

 

 

 

 

* 지도: 메세타평원을 타나냄. 메세타는 표시된 지역보다 더 넓음. 박스처리로 대략적인 위치를 표시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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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몬세라트: 쪽에 보이는 건물은 성모 마리아 수도원(Abadia de Montserrat)이다.

 

 

 

☞ 엄청 더웠던 지난 여름, 저는 유럽에 있었습니다. 2024년 6월 8일부터 8월 14일까지, 약 67일간 많은 나라를 탐방했습니다. 스페인, 포르투갈, 안도라, 모로코,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크로아티아, 헝가리, 튀르키에...

애초에는 포르투갈 순례길을 약 25일 정도 걷고, 나머지 기간을 배낭여행을 이어갈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름철 남유럽의 더위는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전 일정을 다 배낭여행으로 소화했답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것도 여행의 묘미겠지요.

​여행을 하는 내내 여행일지를 기록했습니다. 펜으로 노트에 적기도 했고, 스마트폰 메모장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본 포스팅은 그 여행일지를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재밌지는 않습니다. 또한 가이드북 수준의 디테일한 정보도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여행일지를 객관화 하는 작업은 분명히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쌓이고 쌓인 것이 개인의 역사가 되고, 더 나아가 모두의 지식으로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 몬세라트

 

 

 

<핫한 유럽여행 5편> 돌산의 기운이 팍팍 느껴지네! _몬세라토

2024년 6월 14일 금요일: 7일차, 맑음

전날 가우디의 생가인 레우스를 방문한 후 바르셀로나 몬주익 부근에 있는 숙소에 체크인 했다. 역시 바르셀로나는 바르셀로나다. 무슨넘의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지! 그 사람들의 대다수가 관광객들이다. 그래서인지 숙소 가격이 널뛰기를 하더라.

냄새나는 군대식 도미토리 베드 하나가 35유로를 받더라. 우리나라 돈으로 약 5만 2천원 정도다. 칸막이가 있는 벙커 베드도 아니고... 한 20유로를 예상했는데...

분노를 삼키며 몬세라트로 향했다. 몬세라트는 바르셀로나에서 북서쪽으로 약 60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데 이곳으로 가려면 교외선 전철을 탄 후, 다시 산악열차로 갈아타야 한다.

좀 복잡할 수 있지만 외곽노선과 산악열차를 조합해서 구매할 수 있어 그리 어렵지 않게 티켓팅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안내인들이 있어 티켓 구매를 도와줬다.

몬세라트는 한국말로 직역하자면 '세라트 산'이다. 스페인도 산이 많다. 피레네 산맥, 시에라네바다 산맥 등등...

몬세라트는 바르셀로나 여행의 필수 코스 같은 곳이다. 어쩌면 몬세라트는 한국 사람들한테 가장 유명한 스페인 산이 아닐까 한다. 그만큼 한국사람들이 바르셀로나를 많이 방문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난 6년 전 바르셀로나에 왔을 때 이곳을 지나쳤다. 그래서 이번 바르셀로나 탐방의 핵심을 몬세라트로 정하게 됐다.

산악열차를 타고 몬세라트역에 딱~하고 내리면, 둥그스름한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펼쳐진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얼핏보면 북한산의 인수봉 여럿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이다. 물론 우리 인수봉이 더 이쁘게 생겼다~^^

몬세라트에는 성모 마리아 수도원이 있다. 깎아질듯한 절벽 위에 세워져 있는데 산 봉우리들과 어우러진 모습이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이런 모습 때문인지 몬세라트는 가우디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옥수수 같은 몬세라트의 봉우리들이 바르셀로나 사그리다 파밀리아 성당에 구현된 것이다.

전망대에서 왼쪽을 바라보니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시설물이 있고 그 아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국기봉인가? 아니다. 십자가 탑이었다. 그 위로도 계속 길이 연결되어 있었다. 임도 같은 길이었는데 약 30분은 더 올라가야 했다. 거기가 푸니풀라 종착점이 있다. 푸니쿨라는 산악열차와는 별개로 운영되는데 몬세라트의 윗부분까지 운행한다.

날씨가 화창해서 사진이 정말 잘 찍혔다. 하지만 정말 더웠다. 평소 때 같으면 걸어올라갔겠지만

이번에는 푸니쿨라를 타고 올라가기로 했다. 편도 약 11유로... 돈 벌레들! 푸니쿨라 타고 올라가니 더 멋진 풍광이 펼쳐졌다. 돈값을 하는 듯했다. 올라가지 않았으면 후회했을 빤헸다.

이렇게 멋진 곳이다보니 가우디가 몬세라트에서 영감을 얻게 됐던 것이다. 나도 이곳에서 기를 받은 느낌이다. 몬세라트의 돌산의 기운이 내게 확 다가오는 듯했다! 이제 멋진 결과물만 생산하면 되는건가!

ps. 우연히 주차장 아랫쪽을 걷다가 숲길 산책로에 진입하게 됐답니다. 몬세라트에 좋은 숲길이 있더라고요. 순례길하고도 연결되기도 하고요. 하여간 돌산의 기운도 받고 숲길도 알게 되서 참 좋았습니다.

 

 

 

* 몬세라트: 중앙에 산악열차 궤도가 보인다.

 

 

 

* 산 미구엘 철십자가 전망대(Creu de Sant Miquel): 또다른 풍광이 펼쳐진다.

 

 

 

 

 

* 몬세라트: 이렇게 천하의 절경이니 가우디가 좋아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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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티아고순례길

 

 

 

<재미난 스페인 5편> 산티아고 순례길

도대체 순례길이 무엇이기에!

 

 

"왜 순례길에 한국인들이 이렇게 많죠?"

처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을 때였다. 순례길의 종착점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의 외곽에 있는 산티아고 공항 부근을 걷고 있었다. 미국 알래스카에서 온 미국인 순례객 부부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얻어마셨다. 나이가 지긋하신 남편분이 보온병에서 차를 따르며 저렇게 물으셨던 것이다.

답을 좀 망설였다. 솔직히 필자 스스로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한국사람들은 여기를 왜 오는 거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나는 또 뭐야?

"한국은 스트레스 사회입니다. 그래서 힐링이 필요합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힐링을 합니다."

부족한 영어실력으로 더듬더듬 이야기를 했는데 다행히 필자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떡이셨다. 이후로도 스페인을 여러번 갔었는데 갈 때마다 순례길을 걸었고, 그런 필자를 붙잡고 외국인들은 또 비슷한 질문을 했다. 왜 순례길을 걷는 한국 사람들이 많냐고?

그들이 보기에 필자는 전형적인(?) 한국인이 아닌 것처럼 여겨졌던 모양이다. 딱봐도 엄청 무거운 배낭을 메고, 단독으로 움직이며, 외국인들과도 스스럼없이 인사하는 모습이 여타 한국인들과는 다른 모습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답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실 저런 물음들 속에는 순례길을 걷는 한국인들을 좀 언짢게 생각하는 의도가 숨어있다. 어떤 유럽에서 온 순례자는 필자에게 '한국인들이 꺼려진다'는 말을 직접 건네기도 했었다. 도대체 산티아고 순례길이 무엇이기에 이런 이야기들이 오가는 것인가? 왜 일부 한국인 순례자들은 그 먼 스페인 땅까지 가서 회피의 대상이 되는가?

 

 

 

* 순례길표식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처음 접하는 분들도 있을테니 산티아고 순례길의 연혁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자. 산티아고 순례길은 성 야고보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지는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길을 말한다. 산티아고(Santiago)는 스페인어로 야고보를 뜻하는데 예수의 12제자 중에 한 명이었다. 야고보는 현재의 스페인(에스파냐)과 포르투갈이 위치해 있는 이베리아 반도에 복음을 전파했다고 전해진다.

고향으로 돌아온 야고보는 헤롯 아그리파 1세에 의해 참수를 당하게 됐다. 12제자 중 첫 순교자가 야고보였던 것이다. 야고보에게도 제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스승의 시신을 돌로 만든 배에 실어 이베리아 반도로 향했다. 배 자체가 돌로 만든 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이베리아반도로 온 야고보의 유해는 9세기 초반에 발견되고, 그곳에 성당이 들어서니 그 성당이 바로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대성당인 것이다.

이후 교황 알렉산더 3세는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를 로마, 예루살렘과 함께 3대 성지로 선포한다. 이에 유럽 각국의 순례자들이 프랑스 땅을 거쳐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로 향했다. 초반 순례길이 번성했던 시기는 11~15세기였는데 당시 이베리아반도에서는 국토회복운동이 진행중이었다. 이베리안반도 내에 있던 그리스도교 국가들은 이슬람 무어인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것이다. 전쟁으로 인해 다른 유럽 국가들과 인적 교류가 끊길 수 있었음에도 순례길로 인해 명맥이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다 16세기에 불어닥친 종교전쟁 이후로 쇠퇴하고 만다. 약 400년간 조용했던 순례길이 다시 각광을 받게 된 건 1982년이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 신분으로는 처음으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방문했기 때문이다. 또한 5년 후인, 1987년에 출간된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라는 책이 큰 인기를 끌면서 순례길은 더욱더 주목을 받게 된다.

스페인 정국의 변화 요인도 한 몫 했을 것이다. 1975년에 독재자인 프랑코가 사망하고, 이후 스페인은 민주화 과정에 놓이게 된다. 히틀러와 협력하여 참혹했던 스페인 내전을 일으킨 프랑코가 아닌가? 그런 프랑코 정권 하에서는 순례길을 걷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1980년, 일부 정치군인들이 구체제 회귀를 목표로 쿠데타를 일으키지만 신속하게 진압되고 만다. 그렇게 정치적인 위험 요인들이 제거됐기에 평화롭게 순례길을 걸을 수 있게 된 것이다.

 

 

* 순례길의 종착점인 산티아고대성당

 

 

이렇게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모았던 순례길은 1993년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다. 파울로 코엘료가 걸었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길은 프랑스길이다. 프랑스 남부에 있는 생장피에드포드(Saint-Jean-Pied-de-Port)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약 800km를 걷는 길이다. 프랑스길 이외에도 북쪽길, 포르투갈길, 마드리드길 등등... 여러가지 순례길이 있는데 이들 모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종착점이다.

"한국인들은 영어를 잘 못하고, 부끄러움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스위스에서 온 처자가 한국인 순례객들은 왜 다른나라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냐라는 물음을 해서 저렇게 답을 해줬다. 필자도 한국인이라 한국인에 대한 변호를 자임한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인들이 꺼려진다는 뜻일 것이다. 당시는 겨울철이라 순례객 자체가 별로 없을 때인데도 한국인들을 콕 짚어 이야기를 한 게 좀 의아스럽기까지 했다. 혹시 그 스위스 처자는 한국인 순례객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일부 서양인들은 한국인 순례객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이 가진 역사와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 같다. 떼지어 다니고, 엄숙하지 못하고, 큰소리로 떠들고... 뭐 이런 이미지로 한국인들을 바라보는 듯하다. 이에 대해 필자는 이렇게 반박을 하고 싶다.

'니들은 안 그러냐? 니들도 큰 소리로 떠들고, 엄숙하지 못하잖아. 그리고 순례길이라면서 뭘 그렇게 연애를 하고 다녀! 알베르게에서 낯뜨거운 장면들은 지들이 다 하면서...'

여기서 알베르게는 순례자를 위한 숙소를 말한다. 알베르게는 기숙사 침대같은 2층 침대가 놓여 있다. 그 좁은 침대에 남녀가 쏙 들어가 있는 경우를 꽤 여러번 봤다. 좀 낯뜨거웠다.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고...

 

 

 

*순례길: 프랑길 말고도 다른 순례길도 많다. 하지만 역시 프랑스길이 가장 메인이 된다.

 

 

 

* 순례길누렁이: 순례길의 표식인 조가비를 달고 있는 누렁이. 순한 녀석이었다.

 

 

 

또 야고보가 산티아고 대성당에 잠들어 계신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일까? 야고보의 제자들이 돌로 만든 배에 시신을 실어 옮겼다고 하는데 그게 말이 되나? 그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지브롤터해협을 돌배로 건넜다는게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항해는 과학이자 기술이다. 그래서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면'이라는 말까지 오가는 것이다.

썩 달갑지 않은 대접을 받으면서도,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을수도 있다는 의문이 있으면서도 또 순례길에 발걸음을 하는 이유가 있다. 걸을수록 마음의 평화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마음의 평화가 세상의 평화로까지 확장되는 느낌까지 받았다. 전쟁의 공포가 사라지고, 화합의 악수가 건내지길 염원하게 되는 것이다. 이게 바로 산티아고 순례길의 진정한 정신이 아닐까?

  

 

* 순례자의 그림자

 

 

 

* 순례자동상

 

 

 

* 산티아고순례길: 프랑스길

 

 

<재미난 스페인 4편> 세고비아

돌기둥이 빚어낸 절대음감!

 

 

 

 

* 수도교

 

 스페인에 대해서 잘 모를 때였다. 당연히 스페인도 방문해 본 적이 없을 때였다. 그렇게 미디어를 통해서만 스페인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필자의 눈을 확 사로잡는 장소가 있었다. 정확히는 건축물이었는데 바로 세고비아의 수도교였다. 저 수도교를 꼭 보겠다고 다짐을 했었고, 결국에는 그 수도교를 직접 친견했다. 거기에 더해 수도교 앞 숙소에서 1박을 하기도 했다.

평생 그곳을 가보지는 않았지만, 이름만 들어도 친숙한 도시들이 있을 것이다. 영화 <카사블랑카> 때문에 유명해진 모로코의 카사블랑카, 희망봉이라고 불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 등등... 필자에게도 그런 도시가 있었다. 이번에 소개할 세고비아(Segovia)가 바로 그곳이다.

예전에 통기타가 하나 있었다. 지인한테 물려받은 것인데 아무리 조율해도 돌 긁어대는 소리가 났던 그런 통기타였다. 그래도 열심히 튕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음유시인까지는 못되더라도 좋아하는 후배 앞에서 폼 좀 잡아볼 생각이었다. 그때 튕기던 기타가 바로 '세고비아 기타'였다. 그런 기억 때문에 세고비아는 필자에게 전혀 낯선 도시가 아니었다.

세고비아 기타는 유명 기타리스트인 안드레스 세고비아(Andres Segovia)의 이름을 따서 상품명으로 삼았다. 안드레스 세고비아는 다른 악기용으로 작곡된 음악들을 기타 연주에 적합하게 편곡을 하는 등 현대 기타 연주의 대가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안드레스 덕택에 '세고비아 기타'가 명성을 얻게 됐고, 그 상품명 덕분에 세고비아라는 도시가 우리 귀에 익숙해진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세고비아에 가면 안드레아와 관련된 기타 박물관 같은 것이 있는 줄 알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도시 세고비아와 안드레 세고비아와는 별 관계가 없다. 그는 스페인 남부인 안달루시아 출신이고 데뷔도 안달루시아에서 했다. 그냥 그의 이름에 '세고비아'라는 도시 이름이 들어간 것뿐이다. <강철군화>의 저자 잭 런던처럼 그냥 사람 이름에 도시명이 포함된 것이다.

수도교(aqueduct)를 품고 있는 세고비아는 마드리드에서 북쪽으로 약 60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래서 톨레도(Toledo)와 함께 마드리드 근교 여행지로 많은 이들이 방문하고 있다.

처음 세고비아를 방문했을 때였다. 버스를 잘못타서 밤 늦게 터미널에 내렸다. 그냥 숙소를 잡으러 갈까하다가 바로 수도교로 향했다. 야경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와! 정말 환상적이네!"

수많은 아치들로 이루어진 수도교의 장엄함이 화려한 조명 빛을 받아 그 위용을 더하고 있었다. 미디어에서나 보던 로마시대 때의 수도교를, 그것도 조명에 휩싸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필자의 눈을 확 사로잡는 광경이었다.

 

* 수도교의 야경

그런 장면에 매혹됐는지 상상력이 피어올랐다. 수도교의 아치에 리듬을 입혀본 것이다. 기둥을 타고 오르는 선율이 아치에서 곡선을 그린 후, 위층으로 올라가 3단 고음으로 울려퍼지는 그런 모습...

세고비아에 세고비아가 없다지만 필자에게는 수도교가 '절대음감'처럼 보였다. 시각의 청각화를 통한 음악 연상하기! 딱딱한 돌기둥을 보며 리듬감을 상상한 필자의 상상력이 과한 것일까? 돌기둥같은 돌아이?

- 로마인들의 기술력이 집약된 거대한 수도교

기둥: 120개

아치: 167개

관로: 25*30*30cm

총길이: 16,220km

최고높이: 28.10m

교량구간: 728m

수도교의 스펙이다. 수도교는 로마시대인, 기원 후 1~2세기에 만들어진 건축물이다. 당시 이베리아반도는 로마의 식민지였다. 로마인들은 곳곳에 식민도시를 세웠는데 세고비아도 그 중 하나였다. 정착지는 세워졌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세고비아는 넓은 평원에 자리 잡고 있는 터라 대규모로 용수를 공급할 수 있는 수원지와 거리가 멀었다. 수도교는 그런 고민의 산물이었다. 로마인들은 외곽에 있는 프리오 강(Rio Frio)에서부터 중심부까지 수로(水路)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여 무려 16km에 달하는 수로가 만들어졌다.

수도교는 그 수로의 교량구간이다. 즉 16km 송수관 중 728m 정도가 아치형 다리 위에 자리 잡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로마인들은 왜 수도교라는 교량을 만들었을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그냥 수로를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하물며 시멘트도 없던 시대에 그런 거대한 다리 구조물을 축조한다는 건 엄청난 공사였기 때문이다.

 

* 수도교

수도교를 잘 즐길 수 있는 곳은 아소구에호(Plaza del Azoguejo) 광장인데 그곳을 중심으로 양 옆쪽을 보면 왜 로마인들이 거대한 아치형 교각을 세웠는지 알 수 있다. 양 옆의 언덕으로 인해 광장은 협곡 형태를 띠게 된다.

이제껏 수로를 타고 온 물이 협곡으로 떨어지면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말 것이다. 협곡을 넘어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인위적인 구조물을 연결하여 최종목적지까지 물을 도달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양편을 이으려고 하니 거대한 구조물이 나타났고, 교량 형식이니 아치가 놓여졌다. 또한 협곡의 높이가 있으니 복층까지 올려 졌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세고비아의 수도교가 탄생됐던 것이고, 그 가치를 높이 사 198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되기에 이른다.

- 악마가 만든 수도교?

옛날 옛적에 이 거대한 교량은 악마의 구조물이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접착제도 없이 큰 돌조각들이 무지개를 그리며 놓여 있으니, 눈앞에서 보고도 그런 의심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관련해서 전설이 하나 있다.

매일같이 물 주전자를 들고 비탈진 길을 오르내려야 했던 소녀가 한 명 있었다. 일이 고된 나머지 소녀는 새벽닭이 울기 전까지 자신의 집까지 물길을 내주겠다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갔고,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기에 이른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소녀는 비극적인 상황을 모면할 수 있게 열렬히 기도를 하게 된다.

그동안 악마는 수로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토네이도가 발생하여 일에 차질이 생기게 된다. 그러다 갑자기 새벽닭이 울게 됐는데 그때 악마는 돌조각 하나만을 세우지 못한 채 건축물을 다 완성시킨 상태였다. 돌조각 하나 때문에 거래는 무산됐지만, 수도교는 온전히 그 자리에 생성됐고 소녀의 영혼도 빼앗기지 않게 됐다.

소녀는 마법 같았던 지난밤의 일을 세고비아 시민들에게 실토하게 됐고, 이에 사람들은 아치를 통과한 물은 유황 성분이 제거된 성수라고 여기며 새로운 건축물을 기쁘게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전설에도 내포되어 있듯이 옛날 사람들 입장에서는 거대한 수도교가 경외적인 존재였을지 모른다.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는 축조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수도교가 자신들의 식수를 공급해주고 있으니, 그 존립 자체를 인간 영역 밖에서 끌어오고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수도교를 두고 거대한 '마법덩어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세고비아 시민들은 19세기 중반까지 그 '마법덩어리'에서 물을 공급받았다.

 

 

* 수로: 정수장 인근에서 찍었다. 교량 구간이 끝나면 수로가 지면과 가까이에 위치하게 된다.

- 정수장 시설까지!

세고비아는 수도교를 중심으로 그 안쪽은 구시가지이고, 그 밖은 신시가지로 분류된다. 수로의 지상 구간은 신시가지쪽에 있다. 한 10분 정도를 걷다보니 정수장과 함께 드디어 지상구간이 나왔다. 전설에 유황이 제거됐다고 언급됐듯이 정수장도 수도교와 함께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정수는 이물질을 물에 침전하는 방식으로 행해졌다. 정수장에는 심도가 깊은 물탱크를 만들었는데 그 물탱크에 모래나 황 같은 불순물들을 침전시키고, 깨끗한 윗물만 빠져나가는 식으로 정수시스템을 만들었던 것이다. 간단한 구조였지만 그들의 지혜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지상 구간의 수로는 말 그대로 수로였다. 돌을 깎아내고 그 위에 25*30*30cm 규격의 홈을 파 내 관로를 삼은 것이다. 수도교의 맨 위 부분도 그렇게 관로가 놓여 있다. 고대 로마인들의 건축기술에 다시 한 번 감탄을 했던 대목이었다.

지상 구간을 탐방하다 길을 잃고 말았다. 궁금했던 것들이 풀려나가는 재미에 빠져 있다 보니 길을 잘못 든 것이다. 덕분에 세고비아의 신시가지를 갈지(之)자로 마구마구 돌아다녔다. 그렇게 다니다보니 수로가 시작되는 산을 더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그 산은 구아다라마(Guadarrama)산이었는데 당시가 11월경이라서 그랬는지 산봉우리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아름다운 설봉이었다.

전날에는 수도교에 상상력을 더했다면, 이날은 수도교를 더 면밀하게 탐구한 날이 됐다. 문화유적 앞에서 멋지게 사진을 찍는 것도 좋지만 그 문화유산에 상상력도 더해 보고, 더 꼼꼼히 관찰해 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아니겠나!

 

* 구아다라마(Guadarrama)산: 구아다라마산에서 발원한 물이 수도교 위를 흘러갔다.

* 세고비아

 

 

 

 

* 타리파성: 타리파성에서 해안가 방면의 모습. 왼쪽 상단에 또다른 성이 하나 있다. 산타카탈리나성이다.

 

 

 

<재미난 스페인 3편> 타리파

땅끝마을에 해적이 나타났다!

 

"당연한 말인데요, 서울에도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가 있어요. 우백호는 인왕산이고, 좌청룡은 낙산입니다. 낙산공원으로 유명한 그 낙산이에요. 남주작은 관악산이고, 북현무는 북한산입니다. 좌청룡우백호가 서울 안쪽에 위치한다면, 남주작북현무는 외곽에 자리잡고 있는 셈이죠. 그렇게 각각의 방위를 지키는 네마리 동물을 사신수라고 부릅니다."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강의를 할 때 종종 저런 설명을 했었다. 서울의 공간적인 면을 알기 위해서는 서울의 동서남북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신수와 함께 언급을 하면 흥미를 유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학습효과는? 그게 참 쉽지가 않다. 필자가 열심히 지도를 그리는 이유가 있다.

남쪽 안달루시아 지방에 있는 타리파(Tarifa)라는 곳에 갔는데 이곳이 스페인의 남쪽 땅끝마을이었다. 예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은 후 피스테라라는 곳을 방문했는데 그곳은 스페인의 서쪽 땅끝마을이었다. 여차저차해서 스페인의 남쪽과 서쪽의 땅끝마을을 탐방했던 것이다. 기왕이렇게 된 거 스페인의 동서남북을 땅끝에 초첨을 맞춰서 알아보았다. 사신수는 없어도 땅끝마을은 존재하니까.

일단 피스테라(Fisterra)부터 좀 더 살펴보자.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오신 분들은 피스테라(Fisterra)에 대해서 잘 아실 것이다. 피스테라는 스페인의 서쪽 땅끝으로 순례길의 종착지인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에서 서쪽으로 약 90km 정도 떨어져 있다. 북쪽 땅끝은 바레스(Bares)라는 곳으로 피스테라에서 북동쪽으로 약 200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한다. 비교적 거리가 가까운 바레스와 피스테라는 둘 다 갈리시아 지방에 속한다. 동쪽 땅끝은 크레우스(Creus)라는 곳이다. 정확히는 크레우스(Cap de Creus)곶인데 바로셀로나에서 북동쪽으로 약 160km 정도 떨어져 있다.

여기서 용어 정리를 해보자. 바다쪽으로 땅이 많이 튀어나온 지형을 두 가지로 나눠서 부른다. 크게 튀어나오면 '반도'가 되고, 작으면 '곶(串)'이 된다. 포항의 호미곶을 생각하시면 된다. 북한쪽에는 백령도와 마주하고 있는 장산곶이 유명하고 유럽쪽에서는 포르투갈의 호카곶이 유명하다. 호카곶은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맨 끝지점이다. 포르투갈의 서쪽 땅끝마을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곶은 영어로는 케이프(cape)로 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cape town)은 직역하면 '곶마을'이 될 거다.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에서는 카보(cabo)로 쓰는데 바로셀로나가 속해 있는 까딸루냐에서는 캅(cap)으로 적는다.

 

 

 

* 타리파섬: 흰색 등대가 보이는 곳이 타리파섬이다. 그 앞으로 타리파항이 있다. 모로코에서 출항한 배가 입항하고 있다.

 

 

 

다시 스페인 남쪽 땅끝마을인 타리파(Tarifa)에 대한 이야기다. 타리파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카디스주에 속해 있는 도시다. 앞으로 지브롤터해협이 펼쳐져 있고, 그 건너로 북아프리카 모로코땅이 보이는 곳이다. 지브롤터에서 봤던 풍광하고는 또다른 모습이었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북아프리카가 손에 잡힐 정도로 가까이보일 정도였다.

한편 타리파라는 지명은 711년 이베리아반도를 침공한 무어인 장군인 타리크 이븐 말릭(Tarif ibn Malik)의 명칭에서 나온 것이다. 무어인들이 북아프리카를 떠나 가장 먼저 도달한 곳에 타리크 장군의 이름을 따서 명칭을 붙인 것이다. 이렇듯 무어인들의 지배를 가장 오랫동안 받은 안달루시아 지방은 곳곳에 무어인들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타리파에는 구즈만 엘 부에노(Castillo de Guzman el Bueno)라고도 불리는 타리파성이 있다. 스페인어로 성을 카스티요(Castillo)라고 부른다. 워낙 스페인에 성이 많으니 앞으로도 '카스티요'에 대한 언급이 많을 것이다.

타리파가 스페인의 땅끝인만큼 타리파성은 스페인의 가장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더불어 유럽에서 가장 남쪽에 자리잡은 성이기도 하다. 북아프리카 모로코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15km 정도에 불과할 정도다.

타리파성은 960년에 무어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문명에 십자로상에 놓여 있다보니 타피라성은 지정학적으로 역사의 현장이 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앞서 언급한 구즈만 엘 부에노도 그런 역사의 현장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1294년에 카스티야 왕국의 왕위 계승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그들은 무어인들까지 끌어들여 왕위를 쟁취하려고 했다. 레콩키스타, 즉 국토회복전쟁이 무색할 정도였다. 이때 구즈만 엘 부에노가 지키고 있던 타리파성이 격전지가 됐는데 반란군들은 성을 포위하며 항복을 요구했었다. 운명의 장난인지 반란군들은 구즈만의 아들을 포로로 잡고 있었고, 성을 포기하지 않으면 그 아들을 죽인다고 협박했었다.

 

 

 

*구즈만 엘 부에노상: 단검을 들고 있다.

 

 

 

이에 구즈만은 반란군측에 단검을 던지며, 그 단검으로 아들을 죽이라고 말했다. 아들이 아닌 국가를 선택한 것이다. 읍참마속보다도 더한 일이지 않은가? 만약 여러분들이 그런 상황에 직면한다면 어떤 판단을...?

타리파성에 올라가면 타리파항이 바로 앞에 보인다. 타리파항에서는 모로코에 있는 탕헤르로 향하는 여객선을 탈 수 있다. 타리파항 너머로는 흰 등대가 우뚝 서 있는 타리파섬이 보이는데 육지와 워낙 가까워 이곳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타리파섬은 이베리안반도의 최남단이자 유럽의 최남단이기도 한다. 여러모로 의미가 큰 섬이지만 필자가 갔을 때는 쇠사슬로 문이 잠겨있었다. 알고보니 몇 년째 문이 잠겨 있다고 했다.

한 때 타리파섬은 해적들의 소굴이었다. 비좁은 지브롤터해협은 지정학적으로 중요한만큼 해적질을 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유럽 각국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약탈한 보물이 캐리비언 해적들의 좋은 먹잇감이었다면 타리파섬의 해적들은 통행세를 챙겼다. 어차피 길목을 차단하면 두고두고 보호비(?)를 뜯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캐나다 출신 역사학자 데이빗 데이는 자신의 저서인 <Smugglers and Sailors: The Customs History of Australia 1788-1901>(밀수업자와 선원: 호주의 관세 역사 1788~1901)에서 관세(tariff)의 어원이 타리파섬의 해적행위에서 기원한다고 언급했다. 15세기 이후 아메리카 및 인도로 가는 신항로가 개척되자 지중해 무역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유럽 각국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힘의 무게를 쏟게 된다. 지브롤터 인근 해역에 힘의 공백이 생긴 것이다. 해적들이 신날 일이었다.

해적들이 물러간 타리파는 현재 서핑족들의 천국이 되었다. 여름이면 유럽 각지에서 몰려온 서핑족들로 물반서핑족반이라고 할 정도다. 로스란세스 해변이 그 중심인데 대서양의 거친 파도가 계속 밀려들고 있었다. 서핑족들이 보기에는 물질하기 딱일 듯싶었다.

수영복도 없고 해서 필자는 그냥 모래사장을 걸었다.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온 몸을 휘감고 있었다. 무언가가 씻겨가는 느낌이었다. 이런 바람을 해남 땅끝탑에서도 맞은 적이 있었는데 바람을 맞으며 무언가 다짐을 했었다. 그 다짐들이 잘 이루어졌을까?

 

 

 

* 타리파성

 

 

 

 

* 유럽의 최남단: 타리파는 스페인의 땅끝이자 유럽의 최남단이기도 하다. 더 가고 싶어도 더 나아갈 수가 없다.

 

 

 

* 스페인의 동서남북 땅끝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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