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티투어? 아니... 서울시티트레킹!  1편

 

자신의 두 발로 가는 서울 명소탐방

 

 

14.10.12 17:56   최종 업데이트 14.10.12 17:56

 

 

 

 

 

 

 

 

 

 
▲ 광화문 취라척. 장악원(궁중에서 음악과 무용을 담당하는 관청) 소속의 취라척. 수문장 교대식에서. 뒤에 보이는 산은 인왕산이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올해는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한 지 620년이 되는 해다. 그때가 1394년이었으니, 조선을 개창한 지 겨우 2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당시는 궁(경복궁)도 완성되기 전이었다. 그만큼 천도는 다급하게 이루어졌다. 개경에 남아 있는 친(親) 고려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도성의 틀도 갖춰지기 전에 남행을 한 것이다.


2대 왕 정종 때 다시 개경으로 천도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지만 이후 한양은 조선의 도읍으로 굳건하게 자리를 잡는다. 그만큼 서울은 유서 깊은 도시다. 그런 서울을 알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지도 한 장을 들고 서울 구석구석을 누비는 외국인들. 당장 광화문이나 시청 쪽으로 나가보시라. 수많은 외국인들이 카메라에 서울 곳곳을 담고 있으니….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 한국 사람인 우리는 서울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역사트레킹을 실시하기로 했다. 서울 한복판에서 행하는 일명 서울시티트레킹.

서울시티트레킹은 '서울시티투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 가면 서울시티투어 버스를 탈 수 있는데 이 버스를 타면 서울을 편안하게 돌아볼 수 있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2층 버스도 있다. 물론 서울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하면 좋겠지만 서울 구석구석을 돌아보려면 역시 자신의 두 발로 걸어야 한다. 그래야 진짜 제대로 볼 수 있다. 서울성곽이 있는 인왕산 정상에 버스를 타고 올라갈 수는 없지 않은가!

 

 

 

 
▲ 서울시티투어버스 서울시티투어버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 일본대사관 앞을 당당히 지키고 서 있는 위안부소녀상

 


지난 9월 28일. 서울시티트레킹은 조계사와 그 옆쪽에 자리 잡고 있는 우정국 탐방에서부터 시작된다. 우정국은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갑신정변(1884년)을 일으킨 곳이다. 일명 '3일 천하'로 불린 갑신정변은 임오군란(1882년)과 함께 개화기에 발생한 중요한 사건이다.

정변 주동자들의 의견과 너무나 큰 간극을 보였던 당시의 조선 상황, 정변 당사자들의 과도한 일본 의존 등으로 갑신정변은 '그들만의 리그'로 막을 내렸고, 주동자였던 김옥균은 중국 상해에서 암살을 당하고 만다. 정변 주동자들은 일본을 맹주로 한 '대동합방론'과 아시아에서 벗어나자는'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친 후쿠자와 유키치의 충실한 모범생들이었다. 그들은 조선에 메이지유신을 '이식' 시키려고 했지만 실패를 하고 만 것이다.

갑신정변이 발생한 곳인 우정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일본대사관이 있고, 그 앞에는 위안부소녀상이 꿋꿋하게 자리 잡고 있다. 1992년부터 개최된 수요집회는 2012년에 1000회를 맞이하게 됐고, 그 기념으로 본 위안부소녀상이 건립되었다.

일본발 외신기사에서 보듯 일본 아베 정권의 우경화는 급속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지난 7월 1일 자위대 창설 60주년 기념에 맞춰, 헌법해석결정으로 집단적자위권이 승인됐다. 현실적으로 전쟁을 금지한 평화헌법 9조를 개헌을 통해 수정하기가 어려워, 각의결정이라는 우회로를 써서 자위대에 집단적 자위권을 부여한 것이다.

1993년 8월에 있었던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의 '고노담화'도 아베 정권에 의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지난 9월 <아사히신문>은 고노담화의 근간이 된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을 담은, 자사의 기사에 일부 오류가 있다며 해당 기사를 취소했다. 그것을 빌미 삼아 아베 정권과 우익들은 들불처럼 일어나 손가락질을 해댔다. <아사히신문>과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을 기사화한 전직 기자에게 도를 넘는 비난을 가한 것이다.

 

 



 
▲ 위안부소녀상 위안부소녀상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요시다 세이지 증언의 큰 골자는 제주도에서 조선인 여성들을 강제로 사냥하듯 위안부로 삼았다는 것이다. 작은 오류가 있을 수는 있지만, 요시다 증언과 수요집회에 선 할머니들의 증언이 큰 간극이 있는가? 백번 양보해서 요시다 증언이 오류를 포함했다고 해도 일본 황군이 위안부를 강제 동원했다는 본질이 전복되는가? 또한 요시다 증언을 담은 30년 전의 <아사히신문> 보도만이 위안부 문제를 다룬 유일한 총체인가?


아베 총리는 요시다 증언 철회를 빌미 삼아 '일본 성노예 강제연행은 중상…'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국제여론의 눈치를 보는지 '고노담화는 승계한다'는 이중적인 행보를 보인다. 누구는 위안부소녀상이 외롭고 처량하게 보인다고 한다. 2인용 벤치에 홀로 앉아 있는 모습 때문에 그렇게 본 것이다. 더군다나 일본 정치인들의 끊임없는 망언들을 생각하면 그 외로움이 더 커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필자는 소녀상이 외롭지 않아 보인다. 필자가 소녀상을 방문할 때마다 꽃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똑같은 꽃이 아니라 매번 다른 꽃이 놓여 있던 것이다. 어떨 때는 과자나 그림 같은 것들이 놓여 있기도 했다. 소녀는 벤치에 홀로 앉아 있지만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친구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 위안부소녀상은 미국 몇몇 도시에도 설치되어 있다.

 

 

 

 
▲ 서울시티트레킹 서울시티트레킹 참가자들. 인왕산 서울성곽길에서.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