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걷는 역사트레킹 5편>

“에이 그게 말이 되나요? 서울에, 그것도 강남과 가까운 곳에 무슨 지뢰밭이에요?”

필자가 우면산에서 지뢰밭이야기를 하면 항상 저런 반응을 듣게 된다. 이구동성이다. 어떤 참가자분은 필자를 무척이나 한심하게 쳐다보기도 했었다. 무슨 사기꾼 보듯이... 설마 거짓말을 할까. 지뢰밭이 있으니까 있다고 하지.

하긴 필자도 처음에는 설마 했었다. 강남을 품고 있는 우면산에 지뢰밭이 있다는 걸 쉽게 못 받아들이겠더라. 더군다나 아직까지도 미확인 지뢰지대까지 있다고 하니까.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 무슨 비무장지대로 트레킹을 하러 가는 거 같다. 우리 강남에 있는 우면산으로 트레킹 하러 가는 거 아닌가요? 강남스타일 트레킹이요!

* 우면산 숲길

● 소가 졸고 있는 모습을 한 우면산

서두부터 참 요란스럽다. 사실 우면산 역사트레킹도 참 재미난 코스다. 위험하지도 않다. 그럼 왜 저런 자극적인 에피소드로 글을 시작했는가? 방심을 하지 말자는 의미에서 그랬다. 안전 없이 트레킹 없다.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다.

본격적인 트레킹에 앞서 우면산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자. 관암산이라고도 불린 우면산(牛眠山)은 소가 졸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모양새다. 그래서인지 동서로 길게 뻗은 모습을 하고 있다. 남태령을 사이에 두고 있는 옆 산 관악산이 해발 632미터인데 비해 동서로 퍼져 있어서 그런지 우면산은 해발이 293미터이다. 관악산의 반도 못 미친다. 하지만 키가 작은 만큼 관악산보다는 오르기가 수월하다.

우면산 역사트레킹은 2호선 방배역 4번 출구에서 집합을 해 그 옆에 있는 청권사로 향한다. 4번 출구와 청권사까지는 약 50미터밖에 떨어져있지 않다.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첫 탐방지를 만나는 것이다.

* 효령대군 묘역으로 가는 길

● 효령대군을 모신 사당, 청권사

그럼 청권사(淸權祠)는 어떤 곳인가? 청권사는 세종대왕의 둘째형인 효령대군 이보를 기리는 사당과 함께 그와 후손의 묘가 있는 곳이다. 원래 효령대군의 묘는 임산원이라고 불렸었는데 1736년(영조12)에 왕명에 의해 경기감영이 사당을 짓게 됐다. 사당은 다음해에 완성됐고, 청권사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이후 1789년(정조13)에 사액된다.

‘청권’이란 이름은 <논어> 미자편에서 유래했는데 ‘신중청폐중권(身中淸廢中權)’이란 말에서 따왔다. 명칭이 복잡한데 그 내막을 알려면 효령대군의 삶을 되짚어봐야 한다.

중국에서 은나라가 쇠락하고 주나라가 흥기할 때인 주나라 태왕 때였다. 태왕은 세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 태백, 둘째 우중, 셋째 계력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중 계력이 창(昌)을 낳으니 성군으로서의 큰 자질이 보였다. 이를 알고 첫째 태백과, 둘째 우중은 몰래 도읍에서 빠져나와 멀리 도망간다. 이에 왕위는 셋째 계력으로 전해졌고, 마침내 그의 아들 창에게로 이어졌다.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이 아닌가? 성군의 자질이 가득했던 셋째 아우를 위해 도성을 떠났던 첫째 양녕대군과 둘째 효령대군이 눈앞에 그려진다. 그렇다. 세종대왕의 왕위를 위해 도성을 등졌던 효령대군은 주나라 태왕의 둘째 우중에 비견된다. 우중은 이후 청빈하게 살았기에 청도(淸道)에 맞았고, 스스로 왕위 계승을 깨끗이 포기했으니 권도(權道)에 맞았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신중청폐중권’이라 했고, 여기서 ‘청권사’의 명칭이 나온 것이다.

어렵다. 하지만 이렇게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계력의 아들 창은 이후 주나라 문왕(文王)이 된다. 무왕(武王)의 아버지이자 강태공과의 일화로 유명한 그 문왕이다. 주나라 무왕은 은나라를 멸망시킨다.

 

“보세요. 주위는 다 아파트와 건물들인데 효령대군 묘만 녹음을 품고 있습니다. 효령대군 묘가 쉼표를 찍어주는 거 같아요.”

“오, 정말 그런 거 같아요. 쌤, 적절한 표현!”

청권사와 효령대군 묘는 묘지이지만 한편으로는 공원 같다. 유치원 꼬맹이들도 소풍을 올 정도로 효령대군과 그의 후손들은 넉넉하게 주위를 품고 있는 듯하다.

효령대군은 유교 국가 조선에서 불교의 진흥과 보전에 많은 애를 기울이셨다. 우중처럼 어진 성품을 지니고 많은 이들과 두루두루 교류를 하셨다. 불교에 심취했다고 성리학자들이 비판을 하긴 했지만 그런 비판에도 괘념치 않으신 듯싶다. 그렇게 덕업을 쌓으며 살아갔던 효령대군은 크게 장수를 하시다 돌아가신다. 91세에!

* 효령대군 묘: 효령대군 묘를 지키는 문인석. 문인석 뒤로 아파트가 병풍처럼 펼쳐진 모습이 이채롭다.

 

● 봉은사보다도 300년이나 앞서 건립된 대성사

이제 트레킹팀은 반대편 매봉재산으로 향한다. 매봉재산은 우면산의 지산인데 백석대학교 서울캠퍼스 옆으로 난 산책로로 진입할 수 있다. 매봉재산은 동네 뒷산 정도이지만 숲이 울창해서 삼림욕을 하기에 적당하다. 트레킹팀은 남부순환로를 지나 본격적으로 우면산에 진입한다. 트레킹팀 앞에 서울둘레길 표지가 나타난다. 이곳은 서울둘레길 4코스인데 트레킹팀은 대성사로 방향을 잡고 이동한다.

서울 강남에서 가장 유명한 사찰은 단연코 봉은사일 것이다. 어쩌면 조계사보다도 봉은사를 더 익숙하게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조계사의 일주문을 본 사람들보다 봉은사의 일주문을 본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봉은사가 코엑스 사거리 옆에 위치해 있어 오며가며 바라볼 수도 있으니까. 평지에 있는 사찰의 장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수월한 접근성은 산사가 주는 고즈넉함과는 배치된다. 소음에 시달리고 번잡하고... 우리가 기대하는 사찰은 그런 것이 아니니까.

좀 사설이 길어졌다. 여기 봉은사보다 더 오래된 산 중 사찰이 있다. 트레킹팀의 탐방지인 대성사(大聖寺)가 바로 그곳이다. 봉은사가 794년(신라 원성왕 10)에 연회국사에 의해 창건된 것에 비하여 대성사는 384년(백제 침류왕 1)을 그 기원으로 두고 있으니 무려 400년이나 그 시기가 앞선다. 백제가 충남 공주(웅진)로 천도를 했을 때가 475년이니 대성사는 한성 백제시기의 지어진 사찰인 것이다. 한성 백제시기에 창건된 사찰이 서울 강남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여기 대성사는 무려 1700년 전에 만들어진 사찰이에요. 한국사책에 백제가 불교를 384년에 받아들였다고 적혀있는데요 그때 만들어진 백제 최초의 사찰이에요.”

“그게 정말이에요? 저는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에요.”

대성사가 백제 최초의 사찰이라는 게 놀라운 게 아니고, 대성사의 존재를 잘 모르는 분들이 대다수였다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강남 지역에 거주하시는 분들도 대성사의 존재를 잘 모르셨다는 분들이 대다수였다.

* 대성사

 

● 1700년 전에 창건된 백제 최초의 사찰

 

그러니 대성사에 대해서 더 알아보자. 384년에 중국 동진을 통해서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백제로 들어온다. 이에 침류왕은 크게 환대하고 왕실에 머물게 했다. 서역과 중국 등 먼 길을 이동하느라 그랬는지 마라난타는 수토병에 걸려 고생을 하게 된다. 지금이야 편의점에서 손쉽게 생수를 사서 마실 수 있지만 예전에는 다른 지역에 가면 물이 안 맞는, 물갈이로 고생한 분들이 꽤나 많았다. 그 수토병이 물갈이다.

그렇게 수토병으로 고생을 했던 마라난타는 우면산 샘물을 마시고 치유가 된다. 이에 우면산에 초당을 짓고 수행을 하니 그곳이 바로 대성초당(大聖草堂)이 됐고, 대성사의 기원이 된 것이다. 그래서 대성사에는 백제 초전법륜성지(初轉法輪聖地)라는 설명이 꼭 따라 붙는다.

이렇게 놀라울 정도의 창건 배경을 가진 대성사지만 막상 그곳에 가보면 좀 허전한 느낌이다. 가람들도 근래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왜 그럴까? 대성사에는 삼일운동 당시 불교계를 대표했던 용성 스님이 계셨던 곳이다. 독립운동에 아지트로 쓰였다는 이유로 일제는 대성사에 불을 지른 것이다. 격노할 일이다. 이후 대성사는 한국전쟁 때 또 한 번 파괴가 되는 아픔을 겪는다.

대성사를 떠나기 전에 침류왕 이야기를 첨언해본다. 불교를 공인한 침류왕은 그 유명한 근초고왕의 손자였다.

근초고왕(재위 346~375) ☞ 근구수왕(375~384) ☞ 침류왕(384~385)

침류왕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재위 기간이 겨우 1년 정도다. 약 30년 가까이 보위에 오른 할아버지 근초고왕에 비해 너무 단명했다. 이와 관련해서 토착신앙을 중시하던 기존의 귀족세력이 불교를 공인한 침류왕에게 위해를 가했다는 설이 있다. 왕위도 침류왕의 아들이 아닌 동생이 이어받게 된다. 그가 진사왕이다.

 

* 우면산 소망탑

 

● 끝까지 안전하게 트레킹합시다!

대성사를 벗어난 트레킹팀은 이제 우면산 소망탑을 향해서 이동한다. 숲길을 따라가는 길이라 참 좋다. 참나무 숲 구간이 있는데 향이 좋아 오래 머물고 싶을 정도다. 소망탑은 산 정상부 능선에 있어 오르막길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경사도가 아니니 역사트레킹의 취지에 맞게 느릿느릿 걷다보면 어느 순간 도착해있을 것이다.

소망탑에서 바라보는 풍광이 참 시원해서 좋다. 강남의 빌딩숲은 가깝게 보이고 멀리 북한산도 선명하게 보인다. 특히 이 소망탑 전망대는 강남과 가까이에 있어 야경보기 명소 중에 하나다.

소망탑에서 내려와 다시 방배역 방면으로 내려가면 우면산 역사트레킹이 종료된다. 하지만 내려오는 발걸음을 조심하시라! 지뢰밭이 있으니까. 우면산 정상 부근에는 군 기지가 있는데 그곳을 방어하기 위해서 1000여기의 지뢰를 매설했었다. 이후 여러 가지 이유로 지뢰의 효용성이 떨어지자 우면산의 지뢰도 제거가 된다. 하지만 10여기가 미확인 상태로 제거되지 못했다. 2011년도에 있었던 유명한 우면산 산사태로 인해 미확인 지뢰에 대한 공포심이 극에 달하게 됐다.

“지정된 탐방로만 다니시면 문제가 없을 겁니다!”

 

여러번에 걸쳐 우면산 트레킹을 행한 필자의 의견이다. 우면산에서는 꼭 지정된 곳으로만 다니자. 재밌게 우면산 역사트레킹을 행했으니 끝까지 안전을 지켜야 하는 법! 아울러 1997년 채택된 대인지뢰금지협약에 우리나라와 북한이 동시에 가입하지 않았는데 이참에 가입 좀 하자.

발효된 지 벌써 20년이 넘었는데 남북한은 아직까지도 가입을 하지 않고 있다. 대인지뢰는 군인과 민간인을 구별하지 않는 잔인한 무기이다. 즐겁게 트레킹을 하는데 앞에 지뢰가 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 지뢰지대 표시판


■ 우면산 역사트레킹

1. 코스: 효령대군묘(청권사) ▶ 매봉재산 ▶ 대성사 ▶ 우면산소망탑 ▶ 방배역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휴식시간 포함)

4. IN: 지하철 2호선 방배역 4번 출구 / OUT: 방배역 1번 출구 ☞ 우면산에서 다시 방배역으로 회귀할 수 있음.

 

 

* 우면산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강남주민 오들오들 떨게 한 우면산 '그 물건'

 

[여행] 남태령-우면산 '안보 트레킹'

 

15.03.19 09:08    최종 업데이트 15.03.19 09:08

 

 

 

 

 

 

* 남태령

 

 

 

 

 

 

 

 

 
▲ 지뢰지대 과거에 지뢰지대였음을 알리는 경고판. 아직 미수거된 지뢰들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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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적대적 공생관계, 공포의 균형, 안보상업주의 같은 냉전시대 맹위를 떨쳤던 개념들이 어지럽게 난무해 있으면서도 그 나름대로 질서를 갖추고 있다. 적대적 공생관계는 적대관계에 있는 두 세력들이 서로를 비방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키우는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의 강경파와 이란의 강경파들이 서로에게 비난을 해대며 자신들의 몸집을 불리는 것이 좋은 예이다.


공포의 균형은 공포나 두려움을 통해서 쌍방 간에 균형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냉전시대 미소 양국이 보유한 핵무기들은 지구를 수십 번 파괴하고도 남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지녔다. 그래서 핵무기의 발사 버튼을 누르는 순간, 이쪽이든 저쪽이든 모두 괴멸된다. 그런 공포감이 역설적으로 '균형자' 역할을 하게 됐는데 이를 두고 공포의 균형이라고 칭했다. 안보상업주의는 문자 그대로 안보를 가지고 상품화 시켰다는 의미이다.

남한의 강경파와 북한의 강경파가 서로 윽박을 질러 자신들의 입지를 키우고, 휴전선을 기준으로 남한의 전력 70%, 북한의 전력 90%가 몰려 있고, 안보를 상품화하여 계속해서 송출하는 방송국들이 있으니 앞서 언급한 필자의 판단이 꼭 억지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필자는 그것들이 어지럽게 난무하지만 '종북몰이'에서는 진영을 갖춰 질서정연하게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공포의 균형 정도만 최신무기 획득이라는 방향으로 변주된다고 판단하고 있다. 최근 회자와 되고 있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제(THAAD)가 바로 그 예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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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태령 옛길 남태령 옛길을 알리는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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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령으로 개명한 여우고개


자자, 서설이 너무 길어졌다. 뚱딴지같이 여행기사에 냉전시대에나 통용되던 개념들을 끌어와 어지럽히지 말라는 독자들의 원성도 들리는 듯하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이 좋아 주말에 갈 봄 소풍 장소를 알아보려고 <오마이뉴스>에 접속했는데 '종북' 같은 신물 나는 단어를 여행면에서까지 볼 줄이야, 하고...

필자가 이번에 소개할 곳은 서울 남태령-우면산 구간이다. 남태령(南泰嶺)은 관악산과 우면산 중간에 위치한 고개로 해발은 183m에 달한다. 우리나라에 워낙 해발이 높은 고개들이 많아 183m의 높이면 명함도 못 내미는 게 맞지만, 한자어에서도 보이듯 이 고개는 당당히 '남쪽의 큰 고개'로 명명되어 있다.

처음에 이 곳은 여우고개, 혹은 여시고개로 불렸다. 한자어 명칭도 '여우호'자를 써서 호현(狐峴)이라고 쓰이기도 했다. 그만큼 이 지역에는 여우가 많이 출몰했다고 한다. 그 옛날 관악산과 우면산의 울창한 수풀은 여우들이 서식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제공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일대에서는 여우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우 굴들이 발견됐다. 그런 배경 때문인지 이곳에는 천 년 묵은 여우가 사람을 홀리고 다녔다는 '전설의 고향'도 전승된다.

 
▲ 과천루 남태령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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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곳은 왜 여우고개에서 남태령으로 개명을 하게 됐을까? 가장 유력한 설은 정조대왕 시대에 행했던 화산 능행차와 관련이 있다. 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경기도 양주에서 수원 화산으로 이장을 한 후, 정조대왕은 참배에 나서게 된다. 이를 '화산 능행차'라고 불렀다.

서울에서 수원으로 가기 위해서 꼭 넘어야 했던 이 고개의 이름을 정조대왕께서 물으셨다. 이때 과천현의 이방이 여우고개라는 이름 대신 남태령이란 명칭으로 대답을 했다고 한다. 상감께서 행차하는 고개가 '여우고개'라는 요망스러운 이름으로 불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그런 답변을 했다는 것이다.

여우고개가 토속적인 이름이기는 하지만 요망스러운 이름인지는 잘 모르겠다. 더불어 고개의 명칭이 한 사람에 의해 급작스럽게 변경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정조대왕 이전 시대부터 여우고개가 아닌 남태령으로 불렸다는 설도 있다.

한강 이남에는 정조대왕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혹시 남태령도 그에 편승된 것이 아닐까? 정조대왕과 관련된 스토리텔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남태령은 이미 보통 이상의 고개가 될 수 있으니까.

정조대왕이 남태령을 넘어서 다닌 기간은 5년 밖에 되지 않았다. 1794년 이후부터 능행차 노선이 시흥-안양 방면으로 변경됐기 때문이다. 남태령 길이 협소하다는 이유가 가장 컸지만 과천에 김상로와 그의 형 김약로의 묘가 있어 일부러 남태령-과천 코스를 버렸다고 한다. 김상로는 영의정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사도세자의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자이다.

 

 



 
▲ 벙커 벙커 입구를 막아 놓았다. 어떤 사람들은 저런 벙커나 참호에 쓰레기를 버리기도 한다. 심지어 용변을 보는 사람들도 있다. 몰상식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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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생활 생각나게 하는 남태령 참호와 벙커


천년 묵은 여우가 사람을 홀리고(?), 정조대왕이 능행차를 하러 다녔던 남태령. 현재 남태령 곳곳에는 참호가 놓여 있다. 벙커도 있다. 서울 인근에서 이렇게 많은 참호와 벙커들이 정열되어 있는 곳도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안보(?)시설들을 가로질러 갈 수 있는 곳이 바로 남태령-우면산 코스다. 그 참호와 벙커들을 파고, 쌓기 위해 얼마나 많은 군인 아저씨들이 땀과 눈물을 흘렸을까! 그런 시설들을 무심히 지나치기는 했지만 필자도 군대 생활이 생각나서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군대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필자는 요즘에도 가끔 이등병 시절의 꿈을 꾼다. 군복을 벗고, 예비군도 끝난 지가 한참인데 아직까지도 그런 꿈을 꾸고 있다. 그런 꿈을 꾸고 난 뒤에는 항상 식은땀을 닦으며 이런 혼잣말을 하곤 했다.

"혹시 죽을 때까지 이등병 꿈을 꾸는 거 아니야?"

 
▲ 우면산 참호 서울시계인 우면산쪽의 참호는 저렇게 나무데크로 덮어 놓았다. 유사시에 나무데크는 열리고, 그 참호에 군인들이 배치된다. 나무데크가 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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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의 뒷산에 걸려 있는 지뢰표식


남태령의 많은 참호와 벙커들을 뒤로 하고 우면산으로 방향을 잡고 나아갔다. 소가 졸고 있다는 뜻의 우면산(牛眠山)은 해발 293m로, 이웃산인 관악산(620m)보다 훨씬 키가 작은 산이다. 해발이 높지 않은 산이라 그런지 관악산보다 오르기도 수월하고 코스도 짧다.

우면산은 '서울보다 더 서울'적인 강남의 뒷산이다. 그래서 전망대에 오르면 관악산에서 보는 광경과는 좀 차이가 있다. 관악산이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고시촌의 풍광을 품고 있다면 우면산은 타워팰리스 같은 초고층 주거시설을 보여준다.

 

 

 

* 우면산 벙커

 

 

 


대한민국에서 가장 먼저 욕망이 발현되는 곳이자 가장 먼저 앞서가는 곳의 뒷산이기에, 그 표식을 우면산에서 봤다는 것만으로도 필자의 발걸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강남과 그 표식이 우리사회의 냉혹한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언제든지 파괴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수 있다는 그 엄혹한 현실!

그럼 그 표식이 무엇이냐? 바로 '지뢰' 지대를 알리는 표식이었다. 우면산 정상부에는 군부대가 자리 잡고 있고 그 부대의 방어를 위해 1980년대 대인지뢰가 매설됐다. 이후 순차적으로 지뢰가 제거됐지만 그 중 일부가 수거가 안 돼 울타리를 쳐놓고 지뢰 표식을 걸어둔 것이다.

지난 2011년 7월, 우면산에 큰 물난리가 났다. 물난리로 큰 고초를 겪은 인근 주민들은 혹시나 있을지 모를 지뢰 유실까지 이중고에 시달렸다고 한다. 민통선 인근에서나 일어날 줄 알았던 지뢰 유실을 강남 주민들이 걱정했던 셈이다. 

 

 



 
▲ 지뢰밭에 토끼 토끼 한 마리가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곳이 지뢰밭인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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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본 것처럼 남태령-우면산 코스는 '안보 트레킹'으로 손색이 없는 곳이다. 당장이라도 총을 든 군인들이 자리를 잡을 것 같은 참호와 벙커들, DMZ이나 민통선 인근에서나 볼 수 있는 '지뢰' 표식까지... 더군다나 트레킹을 마치고 강남에 가서 맛집 탐방도 할 수 있다.


그 참호와 벙커가 실전에서 작동되는 순간 한반도는 석기시대로 돌아갈지 모른다. 남북한이 모두 공멸할지 모른다. 그러니 그 시설물들은 계속 '안보 트레킹'으로만 쓰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영원히!

 


 
▲ 남태령-우면산 트레킹 남태령-우면산 트레킹 코스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아 호젓하게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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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태령-우면산: 이 코스는 산악자선거를 타는 사람들도 많다.

 

 

 

 

 

◆ 도움말

1. 코스:  선바위 미술관 ▶ 삼거리 ▶ 남태령 ▶ 군부대 ▶ 약수터 ▶ 예술의 전당
2. 이동거리: 약 7km / 이동시간: 약 3시간 (쉬는 시간 포함)
3. 교통편: 시작점 - 지하철 4호선 선바위역  / 종료점 - 3호선 남부터미널역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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