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기?

토박이와 함께 한 공주역사트레킹

 

 

이번 트레킹 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고, 이거 괜히 공주토박이 앞에서 망신당하는 거 아니야?’

 

역사트레킹을 진행하다보면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이 톡톡 튀어나옵니다. 제 리딩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중간에 집에 가버리는 분. 그것도 아무런 말씀도 없이... 험한 서울 성곽길을 걷는데 하이힐을 신고 오신 분. 트레킹에는 관심이 없고 이성의 연락처를 얻는 데만 혈안이 되신 분 등등...


몇 해 전, 가을경에 행했던 공주역사트레킹에서도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바로 공주 토박이 분이 참가를 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공주 시청에서 근무하는 분이 참가를 한 것입니다. 좀 긴장이 되더군요. 괜히 밑천이 드러날까 조마조마하기까지 했습니다.

 





* 우금티. 우금티에 쓰러져 있는 조형물. 원래는 서 있었는데 지금은 쓰러져 있다. 120여 년 전, 우금티에서 쓰러져 갔을 농민군들의 모습이 겹쳐져서 그런지,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애잔해진다.






 

토박이에게 선수를 빼앗기다!

 

공주역사트레킹의 시작점은 공산성입니다. 동학농민전쟁 당시 전봉준 부대가 가고자 했던 성이 바로 공산성입니다. 공주성이 공산성이라는 것이죠.


현재의 공산성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475년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현 공주)으로 천도했을 때 이곳은 왕성이었고, 536년 사비(현 부여)로 천도했을 때는 북방성으로 불리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당나라 소정방에 의해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백제가 역사속으로 사라졌을 때, 의자왕이 있던 곳도 사비성이 아닌 바로 이곳 공산성이었습니다.


공산성의 현재 모습은 조선 후기 시대에 그 틀이 잡혔습니다.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인해, 1602년 충청감영이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했고, 그에 따라 공산성도 개·보수가 이루어졌습니다.





* 진남루: 공산성 진남루. 남쪽에 위치해 있다.





매표소가 있는 금서루 부근에서 이런 기본적인 설명을 하며 서쪽 성곽을 둘러갔습니다. 서쪽 성곽에서는 멀리 황새울이라는 천주교 성지가 보이는데 그 지점에 다다랐을 때 공주토박이 참가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기 건너편 십자가 표시 보이시죠? 저기가 황새울이라는 곳인데요. 저기서 천주교 신자가 많이 죽었어요. 그래서 황새울 성지로 불러요.”


! 그건 제가 설명하려고 했는데...”

 

선수를 빼앗긴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시선을 되찾아오기 위해 서둘러 첨언을 했습니다.

 

저 건너편에 공주 감영이 있어서 그랬어요. 사실 천주교 신자가 가장 많이 희생된 곳은 여기 공주라고 하더군요. 감영이 있어 충청지역의 천주교도들이 여기로 다 붙잡혀 온 거에요. 그래서 희생이 컸던 거고요.”

 

염려했던 일이 발생했지만 그럭저럭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식은땀 한 방울을 흘리며 서둘러 쌍수정(雙樹亭)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 산책로: 공산성 산책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기... 참 힘드네!

 

1624년 인조는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으로 파천(播遷: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난을 하는 일)했습니다. 인조는 성 안에 있는 나무 두 그루 아래에서 반란이 진압되길 간절히 기원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이괄이 부하의 배신으로 참수됐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그 나무 두 그루(쌍수)에 정삼품의 작위(통훈대부)를 내립니다.


이후 영조 11, 그 자리에 정자가 세워졌으니 이것이 바로 쌍수정입니다. 처음에는 삼가정이라고 불렸으나 이후 쌍수정이 되었고, 오늘에 이르고 있지요. 한편 이런 스토리텔링 때문인지 공산성은 조선시대 쌍수산성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쌍수정에 대한 대략적인 이야기를 하고 금강이 보이는 성의 북면으로 이동을 하려고 할 때였습니다. 인조와 관련된 설명을 하나 더 준비를 했는데 기억이 안 났습니다. 무슨 떡 이름이었는데 기억이 안 나서 그냥 북면 쪽으로 이동을 하려 했습니다. 찜찜한 마음을 뒤로 하고 선두로 나서는데 뒤쪽에서 그 떡 이름과 그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더군요.

 

인조가 이곳에 와서 6일 동안 머물렀는데 인근에 사는 임씨 집안사람이 떡을 받쳤데요. 인조는 그걸 맛있게 먹었고요. 당연히 그 떡 이름을 물어봤겠죠. 그런데 이름이 없던 거에요. 그래서 이후에 임씨 집안에서 만든 맛있는 떡이라고 해서 인절미가 된 거라고 하더군요.”

 

또 그 토박이 분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못한 설명을 그 분이 직접 대신해주었습니다. 저는 멋쩍은 나머지 서둘러 입을 열었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역사트레킹 마스터 아닙니까!

 

“‘변화돼서 결국 인절미가 된 거에요. 그나저나 갑자기 인절미가 땡기네...”

 

괜히 애꿎은 인절미 타령을 하며 그 순간을 벗어났습니다. 역시 토박이 앞에서 해당 지역을 설명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번데기 앞에서는 주름을 잡는 게 그렇게나 힘들 줄이야!

 

 





* 임류각: 공산성 임류각. 백제 동명왕 시대 건축물이다. 1980년대 복원한 것이다.






 

공산성을 떠나 우금티로 향하는 길

 

공산성 탐방을 마친 트레킹 팀은 중동성당을 지나 본격적인 도보여행에 나섰습니다. 옛 공주 읍내는 분지형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가지를 두고 둥글게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입니다. 공주 분들은 이를 두고 공주대간이라고 부르더군요

 

그렇게 공주대간을 타고 가는 중간에 우금티와 관련된 설명들을 간략하게 했습니다. 1894년 갑오년에 있었던 국내정세, 청나라의 파병을 빌미로 국내로 출병한 일본군, 청나라와의 전쟁 중이라 후방지역의 준동을 심각하게 판단했던 당시 일본 정부, 일본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청나라 폐잔병들 일부가 동학농민군에 합류했다는 사실 등등...


우금티로 향해가는 의미를 확실히 전달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참가자들 중에는 이미 동학농민전쟁과 우금티에 대해서 알고 있는 분들도 있었고, 처음 듣는 듯 생소한 눈빛을 보내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 금학생태공원. 금학생태공원을 걷고 있는 트레킹팀.






이미 그 관련 내용을 알고 있든, 아니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공산성을 출발하여 우금티로 가는 것이었고, 그곳에서 120년 전의 사건을 떠올려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의미심장한 다짐을 하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의외의 복병(?)을 만났습니다. 복병은 바로 밤송이들이었습니다. 공주역사트레킹을 행했을 때가 가을경이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밤 막걸리에서 보듯, 공주는 밤의 고장 아닙니까? 우금티 부근도 밤나무가 지천으로 깔려 있어서 그런지, 가는 곳마다 밤송이들이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밤송이가 너무 많아 이동이 쉽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얼마나 독한지(?) 신발 사이로 가시가 쑥쑥 들어올 정도였지요. 선두에 선 저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조심하세요. 지뢰밭이에요. 밤송이 지뢰밭!”

 

밤송이 지뢰밭을 지나 우여곡절 끝에 트레킹 팀은 우금티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 우금티터널: 우금티 아래를 지나고 있는 우금티 터널.





 

우금티에서 갑오년, 그날을 떠올리다!

 

우금티에 도착해서는 주위 지형을 가리키며 설명을 했습니다. 일본군의 기관총이 어디에 배치됐는지 또한 농민군들이 어느 방면에서 올라왔는지, 하는 것들을 알려주었습니다. 농민군들은 실제로 정상부가 아닌 고개 아래에서 희생을 많이 당했는데 높은 지대를 선점하고 있던 연합부대가 기관총과 화포를 난사해서 그렇게 됐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현장성을 살려 책에서는 풀어낼 수 없는 것들을 설명하려고 나름대로 애썼지요. 물론 그런 설명들이 제대로 전달됐는지는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었습니다. 당시 참가자들이 트레킹을 단순히 소비(?) 하지 않고 그 이상의 대화를 나누었다는 점입니다. 우금티 고개에 있는 조형물들, 처음에는 곧추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쓰러져 있는 조형물들이 동학농민군처럼 느껴져 마음이 애잔하다고, 표현한 참가자가 있었습니다. 또한 이런 식으로 대화가 확장되기도 했습니다.

 

요즘 세대들은 우리 역사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안 하는 것 같아요.”

이런 아픔의 역사들을 많이 알아야 하는데... 아는 사람만 아는 것 같고요.”

정치도 그래요. 젊은 사람들이 좀 많이 관심을 가져야 할 텐데요. 투표날에 놀러가지 말고요.”

 

우금티에서 이런 대화들이 오갔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저 뿌듯할 따름이었지요. 리딩자로서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 맛에 역사트레킹을 하는 것이겠죠.

그렇게 하여 공주역사트레킹은 잘 종료가 됐습니다. 트레킹을 마친 후 그 토박이 분이 제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공주 사람도 잘 몰랐던 길을 안내해 주셔서 감사해요. 오랜만에 엄청 걸었네요. 힘들어도 재밌었어요.”

 

공주 토박이 분에게 그런 칭찬의 말을 들으니 정말 기분이 좋더군요. 코스를 잡기 위해서 100km 이상을 탐방을 했었는데 그게 물거품이 되지 않았으니까요. 중간에 뱀들과 사투(?)를 벌이며 탐방했던 게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초반에는 좀 스텝이 꼬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번데기 앞에서 제대로 주름을 잡아본 하루였습니다.

 

 



* 우금티: 우금티 조형물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트레킹팀.




 

공주 역사트레킹

 

1. 코스: 공산성 중동성당 금학생태공원 우금티

 

2. 이동거리: 11km

 

3. 소요시간: 4시간 30분 정도(휴식시간 포함)

 

4. 난이도:












 

 

 

 

우금티 고개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현장] '2015 우금티 예술제', 통한의 고개에서 본 '희망의 씨앗'

 

15.11.14 15:54   최종 업데이트 15.11.14 15:56

 

 

 

 

 

 

 
▲ 우금티 예술제 지게 상여가 나가고 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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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오후 2시. 전국에 촉촉한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극심한 가을 가뭄을 꺾어줄 단비였지요. 저는 그날 우산을 받쳐 들고 충남 공주시 우금티 고개에 서있었습니다. '2015 우금티 예술제'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금티 전투. 벌써 12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60갑자로 치면, 두 갑자에다 또 한 해가 더해진 것입니다. 121년 전 그날, 그곳 우금티 고개에서는 통한의 피눈물들이 뿌려졌습니다. 빗발치는 일본군과 관군의 공세에 막혀 우금티를 넘지 못하고, 그곳에서 눈을 감아야 했던 2만여 명의 농민군들의 피눈물이 바로 그것입니다.  농민군들이 내세웠던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도 그 피눈물을 따라 흩뿌려지게 됩니다.

'2015 우금티 예술제'는 사단법인 '동학농민전쟁 우금티기념사업회'가 주관이 되어 진행됐습니다. 우금티를 넘지 못했던, 인내천 사상을 제대로 펼쳐보지 못했던 수많은 농민군들의 통한을 달래주기 위해서 행해졌습니다.

 

 


 
▲ 지게상여 우금티예술제에 등장한 지게상여.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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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제는 추모제례와 역사축제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추모제례는 농민군들의 한을 달래기 위한 의식이 진행됐는데 특이하게도 지게상여가 등장했더군요. 지게 두 개를 이어붙인 지게상여는 상여를 살 수 없었던 망자를 운구하기 위해 쓰였습니다. 그 옛날, 가난 때문에 상여조차 구할 수 없었던 이들이 이승과 하직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타고 갔던 것이 지게상여였습니다. 평생 동안 등짝에 걸쳐 메고 곡식과 땔감을 날랐던 그 지게에 자신을 실어 보냈던 것입니다. 


121년 전, 우금티에서 전사한 동학농민군들은 그런 초라한 지게 상여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시신은 버려졌고 내팽개쳐졌습니다. 살아난 자들에게는 '반역도'라는 낙인이 찍혀졌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장례는 꿈도 못 꾸었던 것입니다.

 

 



21세기 우금티 고개엔,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 설문조사판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설문조사판이 설치되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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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제례가 영령들의 한을 달래주는 자리였다면, 역사축제는 미래 세대들을 위한 자리였습니다. 예술제에 모인 중·고등학생들은 농민군들의 뜻을 기억하면서도 '놀 건' 놀았습니다. 짚으로 만든 달걀꾸러미 체험, 벼훑이를 이용한 탈곡체험 등등...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자신의 소원을 적은 만장과 사발통문이었습니다.


'좋은 대학 가게해주세요!'
'이번에는 오빠들 콘서트 꼭 가고 말테야!'


위처럼 또래끼리 통용되는 생각들이 많이 적혀있더군요. 하지만 뜨거운 이슈를 담은 것들도 있었습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한국사 국정교과서 OUT'


'헬조선'이라는 우울한 말이 그들의 입에서 오르내리고, 극우 성향의 커뮤니티 일베 같은 사이트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그들이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의 희망의 씨앗도 그들 아닙니까?

121년 전, 갑오년의 우금티가 통한의 피눈물이 터져 나온 곳이라면 현재의 우금티는 새로운 희망이 싹 터 오르는 옥토와 같은 곳이 되어야 합니다. 인내천을 꿈꾸던 농민군들의 희생이 헛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겠죠. 그런 의미로 우리 아이들이 우금티에서 많은 역사체험을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우금티 우금티에 세워진 조형물이 쓰러져 있다. 우금티에서 쓰러져 갔을 농민군들의 모습이 겹쳐져서 마음이 애잔해진다. 봄의 새싹처럼 힘껏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으면 좋겠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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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저는 2년 전에도 우금티 추모제례에 대해서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그때 기사를 다시 살펴보니, 당시는 교학사 역사교과서에 대해서 언급을 했더군요. 당시 교학사 역사교과서가 얼마나 뜨거운 이슈였습니까?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해서 긍정적인 시각을 드러낸 교학사 교과서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반대를 했었죠.


2년이 지난 현재. 이제 교학사 교과서를 넘어 한국사가 국정 교과서가 되려고 합니다. 역사가 퇴보한다는 걸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요. 정말 안타깝습니다. 내년 우금티 예술제 기사에서는 이런 안타까운 심정을 기사 말미에 적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희망의 씨앗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 우금티: 동학농민전쟁 시기 공주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 대해서 설명한 설명판.

 

 

 

 

* 우금티: 설명판을 보고 있는 학생. 

 

 

 


덧붙이는 글 | 우금티 예술제에서 자원봉사를 한 후, 그것에 대한 소감을 작성해 보았습니다.

 

 

 

 

 

 

 

 

 

 

 

* 공산성: 공산성 금서루

 

 

 

 

* 지난 6월 중순 경에 '공산성-우금티'를 하나의 선으로 연결하고자 충남 공주로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공산성과 우금티는 직선거리로 3k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간 하나의 선으로 연결될 수 있는 트레킹 코스는 없었답니다. 그래서 공산성과 우금티의 탐방도 버스 투어 형식이 많았습니다. 저는 그 부분에 주목을 했고, 어떻게 해서든 두 지점을 연결하여 도보여행을 할 수 있게 해보고 싶었습니다.

 

왜냐? 공산성과 우금티는 공주의 대표적인 역사유적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여 일명 '공주역사둘레길'이 탄생했습니다. 이 길을 따라가면 공산성과 우금티는 물론 중동성당, 영명학교, 송장배미 등의 근현대유적들을 탐방할 수 있답니다. 각 코스를 연결하면 둥근 원형을 띈다고 해서 '공주역사둘레길'이라는 명칭을 붙여 보았습니다. 공주역사둘레길은 역사, 풍광, 동식물 등...

 

세 박자가 딱 맞아 떨어지는 명품트레킹 코스입니다. 정식 개통이 되지 않아 무척 아쉽지만 저도 빨리 여러분들과 함께 이 길에서 역사트레킹을 해보고 싶답니다!

 

 

 

*** 이 포스팅은 그와 관련된 사진포스팅입니다.

 

 

 

 

 

 

 

 

 

 

 * 공산성: 공산성 진남루. 진남루는 공주지역 삼남길의 관문이다.

 

 

 

 

 

 

* 공산성: 금강에서 바라본 공산성 만하루.  파란색 천이 씌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공사중임을 알 수 있다. 

이 사진은 2013년 11월 경에 찍은 사진이다. 필자가 올해 6월에 공산성을 방문했을 때도 만하루 일대는 공사중이었다.  

 

 

 

 

 

 

 

 * 우금티: 우금티는 황량하다. 얼핏보면 우금티 벌판으로 보일 수도 있다.

 

 

 

 

 

 

 * 우금티: 나무로 만든 조형물들이 쓰러져 있다. 

피눈물을 흘리며 쓰러져 갔을 동학농민군들의 모습이 겹쳐져 마음이 무척 착잡했다. 

 

 

 

 

 

* 우금티: 실제로 동학농민군들이 죽음을 당한 곳은 저 아래 쪽이다. 도로가 보이는 곳이다.  

 

 

 

 

 

* 우금티: 나무를 엮어 만든 조형물들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 사이로 잡풀들이 파고 올라왔다.

피눈물을 흘리며 쓰러져 갔을 동학농민군들의 모습이 연상되어 씁쓸했다.  

 

 

 

 

 

*동학혁명군위령탑: 동학농민 혁명과 잘 어울리는 탑인가?

 

 

 

 

 

 

 * *동학혁명군위령탑: 이 탑도 세월의 흔적을 이기지 못하고 낡아지고 있다.

탑신 중간 부분의 벽돌이 깨어졌다.

 

 

 

 

 

 

*동학혁명군위령탑: 탑두 부분의 빨간 벽돌은 그나마 잘 남아 있다.  

 

 

 

 

 

* 우금티 터널: 현재 우금티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이 우금티 터널이다.  

 

 

 

 

 

 

 

* 공산성: 공산성은 산성트레킹을 하기에 제격인 곳이다.

 

 

 

 

 

* 공산성 만하루: 만하루 옆에는 연지라는 연못이 있다. 옆으로 흐르는 강은 금강이다.

멀리 금강교가 보인다. 이렇듯 공산성은 산성트레킹과 강변트레킹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곳이다.

 

 

 

 

 

 

 

 

 

 

 

 

▲ 우금티 대나무로 만든 조형물들이 쓰러져 있다.

우금티를 넘지 못하고 쓰러진 동학농민군들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다.

 

 

 

 

 

 

 

                                                       우금티 고개에서 족구 한 판?  ___2편

 

 

 

 

 

---> 1편에 이어

 


황량한 우금티 벌판, 어떻게 채울까

1894년 11월. 동학농민군은 우금티에서 관군과 일본군 연합부대에 의해 크게 패배했다. 당시 동학농민군은 연합부대보다 병력이 훨씬 더 많았다. 하지만 죽창을 든 동학군은 개틀링 기관총 등 최신무기로 무장한 연합부대 앞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만다. '우금티 전투'가 아닌'우금티 학살'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동학농민군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렀던 것이다.

우금티 전투는 갑오동학농민전쟁의 최정점에 위치한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농민군의 역량이 총집결하여 대규모 전투를 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농민군은 패배했고, 뒤이어 전봉준도 사로잡혀 한성으로 압송된다. 이렇게 갑오년의 뜨거운 함성이 메아리치는 우금티. 하지만 그 우금티를 바라보는 필자는 좀 엉뚱한 생각부터 들었다.

'음 여기서 족구 한 판 뜨면 재밌겠군!'

역사적인 장소를 두고 너무 불경한 말을 한 것인가? 사실 필자는 공주여행에서 우금티를 따로 추천하지 않는다. 왜? 너무 한적하기 때문이다. 우금티에 올라서면 이곳이 역사적인 장소가 맞나, 할 정도로 황량함이 몰아친다. 그 흔한 비석조차 없다. 예전에 세워졌던 조형물들은 쓰러져 있고, 여름이면 그 사이를 잡초들이 파고 들어가 무성하게 피어난다. 잡초가 파고 들어간 조형물들을 보고 있자니 그저 안타까움만 더 커질 뿐이다. 우금티를 넘지 못하고 쓰러진 농민군들의 모습이 떠올라서.

 

 


기사 관련 사진
▲ 우금티 대나무를 엮어 만든 조형물들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 사이로 잡풀들이 파고 올라왔다. 피눈물을 흘리며 쓰러져 갔을 동학농민군들의 모습이 연상되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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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혁명군위령탑 동학농민 혁명과 잘 어울리는 탑인가? 한편 이 탑은 건립된지 40년이 넘어서 그런지 무척 낡아보인다. 탑두의 빨간 벽돌은 그런대로 잘 붙어 있지만 탑신 부분의 벽돌은 제거가 됐고, 그 부분이 흉터처럼 남아있다. 좀 흉해 보인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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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고개 아래쪽에 세워진 동학혁명군위령탑은 더 형편없어 보인다. 유신시대에 건립된 탑이라 그런지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담아낼 수 있을지 의구심부터 앞서는 게 사실이다. 또한 건립된 지 오래되어 그런지, 탑이 무척 낡아 보이기까지 한다. 실제로 탑신 중간의 벽돌이 떨어져 나가 흉해 보인다.

현재 우금티를 가장 명징하게 드러낸 조형물(?)은 바로 우금티 터널이다. 2006년에 개통된 우금티 터널은 국도 40호선의 4차선 확장 반대 투쟁의 산물로 등장하였다. 우금티를 가로지르던 기존 2차선 도로가 4차선으로 확장되면, 우금티 고개는 원형이 손상될 게 뻔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당시 공주지역 시민단체들은 도로 확장 반대를 주장하며 대안으로 터널형식을 제안하였고, 그것을 관철시켰던 것이다.

터널이 개통되었고 그 위로는 작은 벌판이 생겨났다. 일명 '우금티 벌판'.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곳은 그저 황량한 벌판일 뿐이다. 족구가 하고 싶어지는 그런 벌판인 것이다.

이 황량한 우금티 벌판을 무언가로 채워야 하지 않겠나? 언제까지 이런 역사적인 장소를 그저 쓸쓸한 공간으로 남겨둘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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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터널 현재 우금티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이 우금티 터널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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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한 가지 제안을 해본다. 이 우금티 벌판에 돌로 만든 튼튼한 석상 조형물을 올려놓아 보자는 것이다. 큰 동상을 하나 세우자는 것이 아니다. 우금티를 못 넘은 동학농민군의 한을 담아 사람 크기의 동상들을 여러 개 세워보자는 것이다.

그렇게되면 진시황의 병마용으로 보일 수 있는 동학농민군 동상들이 우금티 벌판을 '점령'하게 되는 것이다. 목숨을 걸고 넘고자 했던 우금티 고개를 돌이 되어서나마 넘게 되는 것이다.

역사는 책에서 배우는 것보다 직접 현장에 가서 배우는 것이 가장 좋다. 공산성이든 우금티든 한번 떠나보자. 공산성에서는 즐겁게 산성 트레킹을 해보고, 우금티에서는 갑오년 동학농민군의 결기를 느껴보자. 공산성에서는 백제시대를 떠올려 보고, 우금티에서는 구한말의 상황을 되새겨보자.

그렇게 살아있는 역사 지식을 쌓다보면 머릿속이 튼튼해지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ps. 다음 편에는 공산성과 우금티를 직접 연결하여 트레킹을 할 수 있는 일명 '공주역사둘레길'에 대한 기사를 작성할 생각이다.

 

 

 

 

 

 

 

 

 

 

우금티 고개에서 족구 한 판?

[주장] 우금티에 동학농민군들의 동상을 세우자

14.07.07 11:13l최종 업데이트 14.07.07 11:50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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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 공산성 진남루. 진남루는 삼남길과 연결된다. 이 길을 따라가면 논산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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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 공산성 금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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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공주는 경북 경주와 마찬가지로 땅만 파면 유물이 쏟아져 나오는 곳이다. 그만큼 공주는 도시 자체가 '지붕 없는 박물관'이다. 공산성, 우금티, 무령왕릉, 석장리 유적, 황새울 성지 등등… 이들 중에서 무령왕릉을 제외하고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곳은 공산성과 우금티일 것이다. 실제로 이 두 장소는 공주를 대표하는 곳이다.


한편 공산성과 우금티는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자.  

 



웅진성에서 산성공원까지, 공산성의 이름 변천사

앞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있고, 뒤로는 크고 작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현재의 공산성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475년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현 공주)으로 천도했을 때 이곳은 왕성(王城)이었고, 536년 사비(현 부여)로 천도했을 때는 북방성으로 불리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660년, 당나라 소정방에 의해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백제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때, 의자왕이 있던 곳도 사비성이 아닌 바로 이곳 공산성이었다. 당나라가 옛 백제땅에 세운 웅진도독부가 있던 곳도 공산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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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 공산성은 산성트레킹을 하기에 제격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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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시기 공주는 신라 9주의 하나인 웅천주였고, 공산성의 이름도 웅천성으로 바뀌게 된다. 공산성이 지금과 같은 '공산성'으로 불리게 된 것은 고려시대 때부터였다. 940년(태조 23년)에 지방제도를 정비하게 되는데 웅천에서 공주(公州)로 명칭이 바뀌게 된 것이다.


이때 비로소 공산성(公山城)이라는 지금의 이름을 얻게 된다. 공(公)자형 산에 성이 축조됐다고 하여 공산성이 된 것이다. 공산성이 자리잡은 산은 '공산'이다. 변산반도의 '변산'처럼 '공산'도 한 글자 산이다.

공산성의 현재 모습은 조선시대에 그 틀이 잡혔다고 볼 수 있다. 1602년 충청감영이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했다. 이후 공주는 호서지방의 중심 고을이 되었고 공산성은 개·보수가 이루어졌다. 토성(土城)이었던 공산성이 튼튼한 석성(石城)으로 축조된 것도 조선시대였다.

한편 1624년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으로 피신을 왔는데 그 이후로는 '쌍수산성(雙樹山城)'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인조는 성 안에 있는 나무 두 그루 아래에서 반란이 진압되길 손꼽아 기다린다. 그러다 이괄이 부하의 배신으로 참수됐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그 나무 두 그루(쌍수)에 정삼품의 작위를 내린다. 그리하여 '쌍수산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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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 금강에서 바라본 공산성 만하루. 파란색 천이 씌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공사중임을 알 수 있다. 이 사진은 2013년 11월 경에 찍은 사진이다. 필자가 올해 6월에 공산성을 방문했을 때도 만하루 일대는 공사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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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에는 공산성에 공원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곳에서는 각종 체육대회나 야유회가 개최되었다. 그래서 일제시대에는 산성공원(山城公園)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제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들어 조선의 궁궐을 격하시켰듯 공산성에 공원을 만들어 그 위엄을 깎아내렸던 것이다.


공산성이 수많은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그 성을 둘러싼 역사가 '드라마틱' 했다는 뜻일 것이다. 현재의 공산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수순을 밟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벽 일부가 내려앉아 등재까지는 가시밭길이다.

 



공주성, 동학농민군들이 가고자 했던 그 성

왕성, 웅천성, 쌍수산성 등등… 지금까지 공산성과 관련된 수많은 다른 이름들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 빠진 명칭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공주성이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1894년 10월.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들은 논산을 출발하여 기세등등하게 북상하고 있었다. 그들이 점령하고자 했던 곳은 공주성이었다. 그렇다. 지금의 공산성인 공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진격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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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우금티전투가 있었던 우금티. 사진에서도 보이듯 무척 황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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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도 언급했듯이 당시 공주는 감영이 있던 충청지방의 중심지였다. 감영은 관찰사가 주재하던 곳으로 지금으로 치면 도청(都廳)소재지이다. 조선시대 크고 작은 변란이 있었지만 이괄의 난을 제외하고는 한 도(道)의 감영이 함락된 적은 없었다.


그래서 1894년 4월 27일, 동학농민군들이 전주성을 함락시켰을 때 조선 정부는 깜짝 놀라 '멘붕'에 빠졌다. 하지만 당시 조선정부는 이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결국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을 한다.

청나라는 조선정부의 공식적인 파병 요청을 받고 아산만에 출병을 한다. 이에 일본도 텐진조약을 빌미삼아 인천으로 군대를 급파하게 된다. 그나마 청나라는 출병 요청을 받았다지만 일본군은 왜 우리 땅에 들어왔나? 들어왔으면 전주성이 있는 남도로 진격을 해야지, 왜 인천으로 향했단 말인가?

뚱딴지같은 일본의 출병은 6월 하순에 있은 경복궁 점령으로 본색이 드러나게 된다. 그들은 조선사회의 평안을 위해 이 땅을 밟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평화유지군'이 아니라 그저'침략군'이었을 뿐이다. 경복궁 점령 이후, 아산만 풍도 앞바다에서 청나라군을 기습하여 청일전쟁을 벌인 것을 보면 그 침략야욕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뒤이어 발발한 청일전쟁에 대해 동학농민군은 크게 반발했다. 그래서 2차 봉기에 나서게 됐고 공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북상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는 우금티에서 관군(3천명)과 일본군(2천명)의 연합부대와 맞서게 된 것이다.

 

 

 

 

 

 

 

 

 

 

이런 동학군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와 일본은 기어코 조선땅에 군대를 파병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대로 청나라는 조선 정부의 파병 요청을 받고 진압군을 보냈다. 이에 일본도 텐진 조약을 빌미 삼아 조선땅에 군대를 급파하게 된다. 청나라야 요청을 받았다지만 일본군의 파병은 뚱딴지같은 처사였다. 조선 정부의 공식 파병 요청도 없었을 뿐더러 전주화약 이후에 조선 땅에 들어 왔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남부지방이 아닌 한성으로 진격을 했다. 동학도들이 한성에다 집강소를 차린 것도 아닌데.

그랬다. 일본군들은 이미 그릇된 야욕을 품고 조선땅을 침략했던 것이다. 그래서 1894년 6월 하순에 경복궁을 공격했고, 곧이어 청나라와 청·일 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런 거듭된 일본의 침략 야욕에 동학군들은 크게 반발하며 본격적인 항일 투쟁에 나서게 된다. 그들은 전열을 가다듬고 충청도 공주로 진격을 하게 된다. 당시 공주는 충청 감영이 있던 곳으로 호서 지방의 중심지였다. 공주성을 함락시킨다면 호서 지방도 동학군들의 세력 범위 안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주성으로 나아가려는 동학군과 이를 진압하려는 관군, 일본군 사이에 큰 전투가 벌어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우금티 전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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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농민운동 겉면에는 주제가 나가고, 날개를 들어 안쪽을 보면 그 주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기재된 작품. 충남 천안여고 역사동아리 학생들이 제작한 것이다. 역시 여고생들이 제작해서 그런지 꼼꼼함이 돋보였다. 설명 부분에 기재된 내용도 상당히 심도가 있었다. 웬만한 성인들도 잘 모를 수 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충실히 잘 기재하였다. 우리 청소년들이 역사를 잘 모른다고 걱정들을 하시는데 이런 작품들을 보면 오히려 자기 자신을 책망할지 모른다. '읔, 고딩들보다 내가 더 모르네...'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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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죽창으로 무장했던 동학군들에게 개틀링 기관총과 야포를 난사했다. 일본군과 관군의 우수한 화력 앞에 동학군은 속수무책 당하고 말았다. 약 1만 5000명 정도 되는 동학농민군들이 우금티에서 비통한 최후를 맞았고 동학군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됐다.

당시 일본은 동학군의 진압에 심혈을 기울였다. 우금티 전투가 일어날 무렵, 일본군은 청·일 전쟁 중이었는데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와 요동반도를 공략하고 있었다. 그래서 동학군의 봉기를 후방을 교란하는 심각한 사태로 판단하고 무자비하게 진압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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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 공주대 교학사 역사교과서 파동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 중 하나는 공주대가 아닐까? 저자 중에 한 사람인 이명희 교수가 공주대 역사교육과에 재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군다나 이 교수는 총대를 매듯 이번 사태에서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으니, 그 비판의 화살이 이 교수를 넘어 공주대 전역으로까지 퍼져나가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을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공주대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은 무척 억울했을지도 모른다. 자기와는 관계 없는 인물 때문에 괜히 자신들까지 도매급으로 팔려나갔으니까. 하지만 걱정마시라! 필자가 만나본 공주대 역사교육과 재학생들은 패기가 넘쳤고, 무척 똘똘했다. 도매금으로 팔려나갈 인물들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학생들이 교수보다 더 낫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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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보다 학생들이 더 낫네

본격적인 우금티 추모제에 앞서 사전 행사인 역사 축제가 공주대학교 산학협력관에서 개최됐다. 공주대학교? 혹시 교학사 역사교과서의 주요 필진 중의 한 명인 이명희 교수가 재직하고 있다는 그곳?

그렇다. 교학사 교과서 문제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이명희 교수는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에 재직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번 역사 축제는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재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프로그램을 총괄하고 있었다. 단순히 장소 제공을 넘어 전체 진행을 주도적으로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금티 역사축제는 충남 관내에 있는 고등학생들이 직접 제작한 작품 전시와 소극장에서 펼쳐지는 발표회, 두 축으로 이루어졌다. 꼼꼼한 손길로 제작된 전시물들에는 동학뿐만 아니라 독도, 위안부 강제 동원 같은 다양한 문제들이 담겨져 있었다. 작품 의도가 무엇이냐는 필자의 물음에 학생들은 똑 부러지는 설명도 잊지 않았다. 해당 내용을 제대로 숙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당찬 모습에 '요즘 애들은 역사를 너무 모른다'고 몰아세우는 편에 섰던 한 사람으로서 좀 부끄럽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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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넋전 넋전을 직접 땅에 꽂고 있는 청소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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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교학사 역사교과서 파동으로 인해 공주대학교는 본의 아니게 큰 불똥을 맞게 됐다. 선봉장(?) 역할을 맡고 있는 이명희 교수가 목소리를 높이면 높일수록 애꿎은 공주대학교의 재학생·졸업생·교수들까지 도매금으로 묶여 질책을 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가 만나본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학생들은 무척 합리적이었고 쾌활한 젊은이들이였다. 해당 학과의 교수 한 명 때문에 다수의 청춘들이 싸잡혀서 욕을 먹는다? 이거 정말 불합리하지 않은가?

우금티 추모제는 오후 3시 우금티 고개에서 행해졌다. 참가자들이 죽은이의 넋이 담겨져 있는 넋전이라는 종이 인형을 제단 앞쪽에 꽂으면서 추모제는 시작됐다. 추모제는 해원무 공연, 사물 놀이 공연 등으로 이어졌는데 전체적으로 규모가 작게, 조촐하게 치러졌다. 공동집행위원장인 지수걸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는 이런 인사말을 했다.



"여기서 북쪽으로 3km 정도만 올라가면 금강이 나옵니다. 만약 동학군들이 우금티를 넘고, 금강을 건넜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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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추모제례 119년 전 우금티 고개에서 유명을 달리한 동학농민군들의 넋을 달래는 추모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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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변했을 것 같다. 적어도 일제강점이라는 치욕적인 역사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면 분단도 없었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이란 그저 허무한 일이라지만 그래도 이런 유쾌한 상상력은 삶에 활력을 가져다줄지 모른다.

 

 

 

 

 

 

 

 

 

 

 

 

'교학사' 이명희 교수, 공주대 제자들에게 배우시길

공주에서 '우금티 전투' 추모제례·역사축제 열려

13.11.06 13:47l최종 업데이트 13.11.06 15:42
곽동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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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 작은 외계인? 이것은 넋전이다. 넋전은 죽은이의 넋을 담은 종이 인형을 말한다. 이 넋전에는 우금티 전투에서 비통하게 눈을 감은 동학농민군들의 혼이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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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캐릭터 이제 동학농민전쟁 기념식도 정형적인 틀에서 벗어나 젊은층의 참여를 이끌 수 있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런 캐릭터 이벤트는 청년층에 대한 참여와 관심을 이끌 수 있다. 한편 위의 캐릭터에 새겨진 초코릿 복근이 무척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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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냐, 우금치냐

지난 10월 27일. 옛 백제의 도읍이었던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행사가 하나 개최됐다. 119년 전 공주 우금티에서 비통한 최후를 맞은 동학 농민군들에 대한 추모 제례와 역사 축제가 행해진 것이다.

일단 용어 정리가 필요하겠다. '우금치'는 알겠는데 '우금티'는 무엇이냐고 반문을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또 '치'나 '티'나 비스무리한데 굳이 왜 우금티를 내세우냐고 물으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고개를 뜻하는 순수한 우리말은 '티'나 '재'였다. 칡이 많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충북 충주의 '갈티고개', 노루들이 출몰한다는 경북 봉화의 '노루재'가 그 좋은 예일 것이다. 하지만 일제는 고개를 뜻하는 우리말에도 왜곡의 씨앗을 뿌려 놓았다. 일제는 지도를 제작하면서 고개마다 이름을 붙였는데 고개를 뜻하는 한자 '티'자가 없었기에 손쉬운 대로 '언덕 치(峙)'자를 가져다 붙였다고 한다. 그래서 '우금티'가 '우금치'로 개명된 것이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 때문인지 공주 지역에서는 우금치가 아닌 우금티로 더 많이 불리고 있었다.

옛 고지도를 살펴보면 '언덕 치(峙)'를 쓴 지명들이 적지 않게 나타난다. '곰치재'나 '웅치' 같은 곳들이 그런 곳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굳이 우금티라는 명칭을 소리 높여 부른다고 오히려 질책을 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금티가 어떤 곳인가?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동학농민군들이 학살에 가까운 몰살을 당한 곳이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이 결합되었기에 '우금치'가 아닌 '우금티'로의 제 이름 찾기는 분명 의미가 있는 발걸음으로 평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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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수걸 교수 지수걸 교수는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학과장이자 이번 <우금티 추모제례 및 역사축제>의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얼마전 같은 학과에 있는 이명희 교수의 <교학사 역사교과서>에 대한 비판을 꼼꼼하게 담은 성명서를 발표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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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4년 11월, 공주 우금티 고개


그럼 119년 전인 1894년에 도대체 우금티에서는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 아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모르시는 독자들을 위해 부연 설명을 해보겠다.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한 동학군은 그 기세를 몰아 정읍을 점령하고 전주로의 진격을 결행한다.

전주가 어떤 곳인가? 당시 전주는 전라도의 핵심 지역으로 관찰사의 소재지였다. 한마디로 전라도의 심장부가 동학군에 의해 점령되었던 것이다. 이에 당황한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구원 요청을 한다. 이에 외국 군대의 국내 입성에 대한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들이 모아져 동학군과 정부 사이에 전주화약(6월 11일)이 맺어졌다.     

전주화약 이후 동학군의 세력 범위에 있던 지역은 점차 안정화를 찾아갔는데 그 중심에서는 집강소 제도가 있었다. 동학농민군이 휩쓸고 간 지역은 치안과 행정이 마비됐는데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동학군의 대척점에 서 있던 사람들이 누구였는가, '가렴주구'를 행한 장본인들이 누구였는가를 생각해보면 쉽게 유추가 될 것이다. 동학군에 의해 탐관오리들이 처형됐으니 해당 고을의 치안과 행정은 마비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전봉준과 전라도 관찰사 김학진은 전라도 지역의 안정화를 도모하고자 민간자치 기구를 설치하기로 합의한다. 그렇게 하여 탄생된 것이 바로 집강소였다. 집강소는 자치 기구였으나 사실상 지방행정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실질적인 지역 통치기구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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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뚜껑으로 만든 우리나라 우리나라 외교에서 쟁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병뚜껑에 기재하여 제작한 병뚜껑 한반도. 충남 예산 여고 학생들이 급우들과 함께 만든 작품이다. 독도나 위안부를 적은 병뚜껑이 많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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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인가요? 아닙니다. 저것은 넋전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죽은 자의 넋을 담은 종이 인형입니다.

그럼 저 넋전들에는 어떤 죽은이들의 혼이 스며 들어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아래 현수막 문구에도 나와 있듯이

119년 전, 충남 공주 우금티 전투에서 유명을 달리한 동학 농민군들의 넋이 담겨져 있답니다.

10월 27일 우금티 고개에서 개최된 <2013년 우금티 추모제례 역사축제>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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