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사실 계곡: 백사실 계곡 입구 









서울 한복판에 능금마을?

북악산에 가면 무언가 얻어가는 느낌이 들 겁니다!

 

이제 완연한 가을이다. 청명한 가을 하늘이 드높기만 하다. 설악산에서는 단풍 소식도 들려온다. 그래서일까, 이런 계절에 집에만 있으면 손해 보는 느낌까지 든다. 가벼운 배낭 하나 둘러메고 어디를 가도 좋을 계절이 다가온 것이다.

그럼 어디로 떠나는 게 좋을까? 북악산을 추천해 본다. 북악산 역사트레킹을.

 

  

 

세검정(洗劍亭)보다 고향집 팔각정이 더 낫다?

 

북악산 역사트레킹은 세검정에서부터 시작한다. 세검정은 칼을 씻었다(洗劍)’는 의미인데 광해군과 관련이 있는 곳이다. 광해군을 몰아내고자, 인조반정을 획책한 이귀, 김류 등이 칼을 갈아 씻었다고 해서 세검정(洗劍亭)이라고 명명됐기 때문이다. 정자정()에서도 보듯 세검정은 계곡 옆에 지어진 정자다.


세검정 일대(종로구 부암동)는 예부터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명승지였다.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이 주위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고 사천이라 불렸던 홍제천이 너럭바위 위를 유유히 흐르고 있으니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데 안성맞춤이었던 셈이다. 다산 정약용과 겸재 정선도 그렇게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린 이들이었다. 다산 선생은 <유세검정(遊洗劍亭)>이란 시를 지었고, 겸재 선생은 <세검정도>라는 부채 그림을 그려 세검정을 칭송했다.

현재의 세검정은 1977년에 지어졌다. 1941년에 인근에 있던 종이공장에서 화재가 났는데 불이 옮겨 붙어 주춧돌만 남기고 완전히 소실됐다가 이후 36년 만에 복원된 것이다. 겸재 선생의 부채 그림을 많이 참조하여 복원됐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차이가 크다고 한다. 내가 봐도 복원된 세검정과 겸재 선생의 그림 속의 세검정은 닮아 있지 않았다. 현재의 세검정은, 얼핏 보면 그냥 평범한 동네 정자로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누군가는 농담 삼아 이런 말도 한다.

 

우리 고향 마을회관에 있는 팔각정이 더 좋아 보이는데요...”


부채에 그려진 수려한 주위풍광은 되돌릴 수 없겠지만 문화재 복원만큼은 보다 더 정교하게 이루어졌으면 한다.

 

 




 * 세검정: 홍제천 위에 서 있는 세검정

 

오성대감 이항복과 백사실 계곡

 

세검정을 지나 백사실 계곡에 들어서면 본격적인 북악산 트레킹이 시작된다. 백사실 계곡은 말이 계곡이지 거의 건천에 가깝다. 시원하게 물줄기를 뿜을 때를 거의 본적이 없을 정도다. 그래서인지 백사실 계곡은 계곡 자체보다는 숲길이 더 각광을 받는 곳이다. 중심가와 인접한 곳에 그렇게 잘 정돈된 숲길이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니까.


숲길 안쪽으로 걷다보면 백사 이항복의 별서터가 보인다. 숲길 한편에 자리 잡은 별서터는 현재 기단석만이 남아 있다. 그 기단석과 바로 옆쪽에 있는 연못자리로 그 옛날 별장의 풍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별서터에서 조금만 걷다보면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고 새겨진 바위를 볼 수 있다.백석백악을 뜻한다. 북악산을 예전에는 백악산이라고 불렀다. ‘동천은 산천으로 둘러싸인, 풍광이 수려한 곳을 말한다. 한마디로 백석동천은 북악산에 있는 풍광이 수려한 골짜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편 백사실 계곡의 백사는 이항복의 호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백사실 계곡 인근에 있는 세검정은 광해군과 관련이 많은 곳이다. 인조반정을 획책한 이귀, 김류 등이 반정을 획책하고 칼을 씻었다고 해서 세검정(洗劍亭)이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항복도 광해군과 관련이 많은 인물이다.


오성대감으로 더 잘 알려진 이항복은 한음 이덕형과의 재기 넘치는 일화로 유명한 인물이다. 임진왜란 중에 5번이나 병조판서에 오를 만큼 이항복은 선조의 신임을 받았다. 이항복이 당쟁에 물들지 않고, 초연하게 자신의 맡은바 임무를 충실히 해냈기에 이런 신임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항복은 이덕형을 명나라에 급파하여 원군 파병을 요청하기도 했다. 또한 조선이 왜와 함께 명나라를 치려고 한다는 오해가 생기자, 그 자신이 직접 명나라에 가 오해를 풀고 오기도 했다. 이렇듯 이항복은 외교적으로도 뛰어난 업적을 쌓았다.


오성대감 이야기를 조금 더해보자. 전란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즈음, 대북파로 분류됐던 문홍도가 휴전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유성룡을 탄핵했다. 그러자 오성대감은 자신도 그 의견에 동조를 했다며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난다. 이후 영의정이었던 1600년에는 기축옥사(1589)와 관련하여 성혼을 변호하다가 반대파들에게 정철 비호자로 몰렸고, 그래서 또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는 인목대비 폐위(1617)에 대해서도 반대하다 삭탈관직을 당한다. 그리고 다음해인 1618년에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세상과 작별하고 만다. 오성대감이 그렇게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난 5년 뒤, 광해군도 인조반정에 의해 퇴위당하고 유배길에 오르고 만다. 그러다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세상을 떠난다.

 

 




 * 백사실계곡: 백사실 계곡 숲길을 걷고 있는 참가자들.




 


서울 한복판에 능금마을이?

 

백석동천을 탐방하다 보면 능금마을이라는 곳을 만나게 된다. 능금마을은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어서 그런지 전원적인 모습이 물씬 풍기는 곳이다. 서울 도심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비료포대가 쌓여진 농촌 마을을 보고 있자니 생경한 느낌이 들 정도다.


그렇다면 왜 능금마을이 북악산 뒤편 부암동 부근에 있는 것일까? 아시다시피 능금이면 우리나라의 고유 사과종을 말하는데 능금으로 유명한 지역은 대구·경북 쪽이 아닌가? 이런 의문이 드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실제로 예전에 북악산 역사트레킹에 참가한 사람들도 그렇게 묻고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 왜 사과마을이 있는 거에요?”

 

현재 창의문 밖, 부암동 일대는 능금마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사과나무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능금마을이라는 마을 명칭만이 옛 흔적(?)을 확인해 주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40여 년까지만 해도 창의문 밖 능금은 경림금(京林檎)이라 하여 서울의 유명한 특산물이었다. 능금이 출하되는 가을 때쯤에는 전국에서 몰려온 상인들로 창의문 인근이 들썩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창의문 밖에 능금나무가 많이 심어졌을까? 먼저 산지 형태를 띠는 부암동 일대의 토양이 척박하여 논농사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로 들어질 수 있겠다. 그럼 두 번째 이유는? 두 번째 이유는 창의문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그 두 번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창의문의 역사를 더듬어 가야 한다.

 




 * 백석동천: 백석동천이라는 한자가 음각된 바위.




 

 

인조반정과 능금마을

 

1623313.

 

창의문 밖 홍제원(지금의 서대문구 홍제동)에 집결한 의군(義軍)’들은 창의문을 부수고 창덕궁으로 진격한다.

반정군의 원두표가 도끼로 문을 부셨다. 당시 창의문은 문루가 없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탔기 때문이다. 높은 위치에서 활도 쏘고 해야 하는데 문루가 없으니 효과적인 방어가 펼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반정군은 창덕궁을 점령했고, 광해군은 퇴위된다.


능금마을 이야기를 하다 뚱딴지 같이 왜 인조반정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일까? 그렇다. 창의문 밖 능금마을은 인조반정과 무척 관련이 깊다. 인조는 반정에 협조했다 하여 창의문 밖 백성들에게 능금나무와 자두나무를 나눠주었다. 그게 부암동 능금마을의 시초가 된 것이다.


숙종 때에는 정책적으로 묘목을 더 많이 심어 부암동 일대에 무려 20만 그루의 능금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가을이 되면 매운 음식을 먹은 듯, 빨갛게 달아오른 사과알들이 푸른 잎들 사이에서 대롱대롱 거렸을 것이다. 아주 멋진 장관이 펼쳐졌을 것 같다. 거기에 인왕산 서편으로 석양이 지는 모습까지 어우러지면...!


창의문 밖 능금, 경림금은 그렇게 서울을 대표하는 특산품이 되었다. 추석 차례상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제례물품이 되었던 것이다.





   

 * 능금마을: '능금마을'을 가리키고 있는 표식. 

 

 

적어도 손해 보지는 않는다!

 

전편인 4편에서 나는 이렇게 부제목을 썼다.

 

- 다음은 북악산입니다. 안 가면 후회할 겁니다.

 

조금은 자극적이다. 한편으로는 너무 노골적인 영업성 멘트로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장담할 수 있다. 북악산 역사트레킹을 행하다보면, 적어도 손해 보는 느낌이 들지는 않을 거라고. 무언가를 얻어 가는 느낌이 들 거라고.






 * 북악산: 북악산 팔각정에서 바라 본 북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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